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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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홍규. 그의 글은 처음 읽는다. 잘 마른 손수건이 되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사람.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위로를 건네는 건, 그가 강해서도 마음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대학 시절'이란 글을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으며 우리처럼 연약하다. 그런데도 위안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 아픔을 자신 역시 겪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에 힘없이 이마를 기대고 다친 마음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물기 어린 눈에 어떤 풍경을 담아내는지를.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담긴 그의 글은 자신도 힘든 하루를 보냈으면서 그렇기에 자식이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잘 알아 곧 귀가할 자식을 위로하기 위해 집에 환한 등을 켜두고 맛있는 밥을 짓느라 여념이 없는 어머니의 등을 떠오르게 한다. 너무나 지치고 피로한 하루엔 창가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만 봐도 반가울 때가 있다. 요즘 내 상황이 그래서 나도 이 책이 그렇게 다가왔다.




 저녁이라고 하니 독일의 북쪽에 있는 도시, 함부르크에 처음 갔을 때의 저녁이 생각난다. 오후 일곱시 쯤, 거주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려고 시내 중심 상가를 찾았다. 처음엔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생각했다. 시내 중심 상가의 분위기가 마치 새벽 두 세시 같았던 것이다. 식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리 바닥에 여럿 둘러 앉아서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거나 홀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거나 했다. 거리엔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듯했다. 고요와 자유. 다른 도시의 텅 빈 모습은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데 그 곳만은 비었는데도 오히려 더 넉넉해 보였다. 거기에 취해 나조차 거리에 나온 원래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하릴없이 이런저런 거리를 무던히 소요했다. 그러면서 실감했다. 이것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걸,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우리에겐 저녁이 없다. 저녁은 일상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과 함께 오늘은 어땠나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저녁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 한 켠에 왠지 따스한 그리움부터 스며드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오가는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진심 어린 애정이 영그는 시간이건만, 지금의 우리에겐 타인의 사연을 음미할 저녁의 여유가 한없이 부족하다. 돌아오면 침대 위로 시체처럼 쓰러지기 바쁘게 내일 또 아침 일찍 나가려면 시계 알람을 맞춰놓아야 한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니. 그저 기계를 너무 많이 가동해 고장이라도 날까 봐 잠시 식혀두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저녁. 그런 우리에게 바깥 세계나 타인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헤아린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세상도, 남도, 나도 빈곤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간다. 소설보다 보고서가 친숙해지고 명료하게 하나의 의미만 갖는 단어를 더 선호하게 된다. 소는 소일뿐, 소의 사연까지 헤아리는 건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빨리 판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우리의 속도를 빼앗기니까. 어느새 이익이 미덕이고 손해는 죄악이라는 걸 금과옥조로 여기게 된 우리들은 더하기만 허용할 뿐, 빼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연을 듣고 헤아리는 건 뺄셈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사연을 전하는 일이다. 눈 앞의 소를 넘어, 그 소가 어떻게 오늘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숨은 내력 속으로 인도하는 여정이다. 사전 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밖에 가지지 못하는 단어들을 새롭게 살려내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많고도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업이다. 함부르크가 전혀 다른 저녁의 낯빛을 보여준 것처럼.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은 낱말과 더불어 사연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내게 그건 곧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전을 믿어 본 적이 없다. (...)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정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소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사전이 된다.(p. 45)


 그렇기에 우리는 차츰 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출판계를 정리한 보도를 보니 사람들이 문학 보다 잡서를 더 많이 봤다고 한다. 특히나 위로를 보내는 에세이를. 내 상처도 제대로 헤아릴 겨를이 없어 어떤 상처가 되었든 일단 된장부터 바르고 보듯 이런 에세이로 응급 처방만 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틈이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문학은 바로 그 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만 보는 눈을 타인도 보라고 이끄는 손이라고. 그러나 그런 문학의 초대는 귀찮고 피곤하다. 문학이 설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문학의 사도를 자임했던 이들조차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하나 둘 떠나간다. 저자 역시 어느덧 환멸의 방문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p. 175)


 왜 이리 굳건한 것일까? 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문득 보게 되니,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더이상 단순한 산문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4부에 걸쳐 모은 그의 글들이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문학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그 선택의 근원에는 저자의 초등학교 시절, 탈곡기를 돌리다 절단되어 버린 아버지의 집게 손가락이 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p. 79)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건, 그 손가락으로 인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언젠가 들렀던 경주 열암곡에서 본 석불좌상의 형상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부처는 중생의 떠받듦이 지겨워서 스스로 엎드려버린 것만 같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 그들과 더불어 오체투지를 하고 싶은 거였다.(p. 105)


 그도 그렇게 아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거였다. 그걸 매개한, 절단된 집게 손가락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을 때 마주 잡아주었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을 진심으로 연결하는 존재였다. 그게 문학이 되었다. 삶과 삶을 이어주는 존재. 어느 때인가, 인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가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쉬다가 인도 여자 옆에 앉아서 그이와 타밀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말을 주고받으며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쌓인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저이도 삶이 힘든가보더라"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겹칠 수 있도록. 서로 맞잡은 손은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의 이데아적 형상이다. 우리는 그걸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에 있는 '기억이 우리를 본다'와 '늙은 농민'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삶의 경험에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포개는 것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이러한 겹침의 순례이다.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며 내 삶의 결만큼 타인의 것 역시 깊고도 다양한 것을 헤아리려 드는 동등의 시선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p. 213~14)


 이는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맞잡고 저마다 간직한 사연을 통해 네 삶을 내 삶처럼 헤아리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문학이라는 수레를 힘겹게 이끈다. 그가 이웃의 은빛미용실 보조미용사를, 술 한 잔 걸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취객을 겉모습이 아니라 살아온 이력의 총체로 읽었듯, 많은 이들도 그리하길 빈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p. 265)


 그러므로 그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외롭다고 칭얼대면 그럴수록 남에게 더 많이 다가가라 말하고 아프다고 호소하면 그렇기에 타인의 아픔을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동안 겹침을 손해로 여겨 온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겨우 골방밖에 가진 게 없는데 그조차 기꺼이 내줄 수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사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글을 계속 접하다보니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그의 삶과 자꾸만 겹치다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휘몰아치고 있는 불안, 취미가 되어버린 좌절을 그동안 나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 모든 게 날 너무 유폐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환대하지 않는 사람 역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p. 257)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에 허다하게 들어갔던 작가와 달리 난 남의 삶에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 사촌, 친구와 관련된 기억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잘도 꺼내는데, 나는 부모님에 대한 것조차 끄집어 내는 게 어려웠다. 누구의 말대로 추억이 재산이라면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결과만 챙기는 삶을 살다보니 삶은 사실 과정의 총체이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어느새 잊고 말았다. 사연을 중시하는 것은 망각 속에 매몰되기 쉬운 과정들을 건져내어 그 모든 것을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토록 빈곤한 삶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보니, 어쩌랴? 이제라도 그의 조언을 마음에 새길 수밖에. 앞으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면 얼른 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저녁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려 한다. 삶과 사람 곳곳에 깃든 사연들을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헤아려봐야겠다. 내 마음의 빈터가 풍성한 꽃밭으로 되는 날을 꿈꾸며...


 사람을 키우는 비와 바람과 햇살은 무엇일까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허라고만 여겼던 그 공터에 비와 바람과 햇살이 다녀갔듯이 사람의 가슴에 다녀간 것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를 다녀간 모든 이들,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이들이 순식간에 그리워졌다. 언젠가 저 공터는 무참히 갈아엎어져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 얼마나 높은 건물이 들어서든 이 기억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빈 가슴은 꽃밭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일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p. 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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