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고 도라에몽이 생각났다. 표지의 빈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빈틈에서 나온 존재가 바로 도라에몽이니까. 책상 서랍에서 홀연히 튀어나온 그는 시간의 빈틈을 지나왔고 내부에 광막한 빈틈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사람처럼 말하고 감정도 느끼는 데다 인간의 음식마저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그는 로봇이라고 하지만 생물에 가까우며 생물이라고 하기엔 생물에게는 불가능한 무한한 공간을 내부에 지니고 있어 우리의 지성으론 얼른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존재다. 따라서 도라에몽은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고 빈틈의 존재라는 점에서 꿈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꿈도 이성의 빈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도라에몽은 환상성을 갖는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상상적인 것'. 그건 언어라는 빛이 들어가기 전의 어둠이며 규정으로 구획되기 이전의 물컹물컹한 점액질 덩어리와 같다. 소설에 나오는 존재에 빗대어서 말하자면 '이물'에 나오는 털뭉치다.


 도라에몽이 찾아온 것은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다. 바로 노진구란 아이다. 그는 한없이 약골에다 운동은 젬병이고 성적은 반에서 꼴찌다. 노진구는 사회의 승자가 될만한 자질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노진구는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 거하는, 인도로 치면 '불가촉천민'이라 할 만하다. 노진구는 매일 비실이와 퉁퉁이란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비실이는 기업체 사장인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고 퉁퉁이는 덩치가 크고 힘이 쎄 싸움을 잘 한다. 노진구를 사회적 약자로 약호화할 수 있다면 비실이는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그를 도와주는 퉁퉁이는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이나 검찰 같은 사법 세력으로 약호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진구가 괴롭힘 당하는 것은 현실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것과 똑같다. 노진구는 늘 비실이와 퉁퉁이에게 패한다. 현실의 사회적 약자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가진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이기지 못한다. 한계를 절감한 그는 도라에몽에게 도움을 청한다. 환상의 힘이 현실의 빈틈으로 들어올 것을 요청한다. 상상적인 것이 도구의 몸을 빌려 현실로 물컹 들어오자 현실의 질서는 전복된다. 비실이와 퉁퉁이는 노진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사죄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현실로 들어와 한 번 입을 벌린 환상은 때로 블랙홀처럼 현실 세계를 모조리 빨아들이기도 한다. 현실의 위계질서와 가치가 모조리 뒤엉키고 어떻게도 풀기 어려운 혼돈의 덩어리로 만든다. 참으로 강한 환상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라에몽에 대해 구구절절 말한 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도라에몽'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창'과 마지막 '어디까지를 묻다'를 제외하고는 곳곳에서 마치 도라에몽이 '어디든지 문'이라도 세워놓은 것처럼 환상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선 하이가 겪는 경험이 그랬고 '파르마코스'에서는 우물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이란 존재로 나타났으며 '관통'에서는 루초 폰타나의 그림에 난 틈으로 '식우'에선 도시 전체를 부식시키는 비가 그랬고 '이물'에서는 정체불명의 털뭉치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이제 곧 사회의 안전망 바깥으로 내몰릴 이들이 거대한 덩굴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나타나서는 모두 도라에몽의 도구가 그랬듯이 현실을 뒤집어 버렸다. 하이의 사라짐은 화자인 나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파르마코스'에선 고대 그리스의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에선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질 때마다 제물을 바친다는 의미로 폴리스의 몇몇 사람을 뽑아 폴리스 밖으로 데려가서는 돌로 쳐 죽였다. 그렇게 죽은 자들을 '파르마코스'라 불렀다.) 그대로 희생양인 존재가 자신을 내쫓고 착취한 마을 전체를 수장시켜 버렸고 '관통'에선 틈 밖에 세계에서 지금의 처지와는 완전 반대의 나로 살아가게 되는가 하면 '식우'에선 국가의 중심이었던 도시가 모두가 기피하는 폐허로 돌변하고 '이물'에선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되짚어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사회에서 내몰린 자가 오히려 사회를 장악해 버렸다. 이렇게 비슷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동기도 노진구랑 비슷할까? 이제 내 힘으론 도저히 안된다는 마음이 환상에게 의지하도록 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 읽고나서 솔직히 난 '작가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란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만큼 이 소설집은 문학이 봉착한 절망적인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화자의 말은 내게 '이런 세상에서 과연 언제까지 문학이란 걸 할 수 있을까요?'라는 작가 자신의 하소연처럼 들리기도 했다. 사실 이 소설집은 첫 문장부터 '이번에야말로 진짜 장례식이다.'라며 끝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처럼 여기엔 문학이 뭔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느낌, 현실 어디서도 희망을 길어올릴 수 없다는 낙담이 가득해 보였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선 생후 9개월 때 어머니를 엘리베이터 추락 사고로 잃고 습관처럼 건물을 기어올라 마치 추락으로 죽은 어머니가 개인적이면서 특수한 비극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맞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비극임을 몸소 증명하며 그 자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문학이 되었던 하이가 44층까지 오르다가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파르마코스'에서는 고통스런 글쓰기에 비유할 수 있는 지렁이와 개구리를 게워내는 행위로 이루어진 문학이 소통 중이던 세상을 그야말로 끝장내 버렸으며(사실 이 단편이 놀라운 것은 독자가 읽고 있는 동안에도 파멸의 비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맹인 소년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독자도 읽어나감에 따라 종말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여인의 마지막 문장과 함께 세상도 망한다. 때문에 이 단편은 문학의 분노로 보이며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보내는 문학의 가장 단호한 결별 선언이 아닐까 한다.)


 '관통'에서 문학은 아이에게 젖을 주는 것으로 비유되는데, 그 소통이 중단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녀는 홀연히 빈틈을 지나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엔 아이만 남는다. 그녀가 빈틈으로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보다 젖을 물릴 때 한 여자가 그녀에게 한 욕설 때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같은 여자임에도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을 전혀 이해 못하고 오직 자신의 연주가 방해받는 것만 생각하는 여자의 욕설은 그대로 '어디까지를 묻다'의 상담원이 듣는 허다한 욕설과 연결되어, 자기 내면에 갇힌 사람들 사이에선 문학이 존재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절망은 '이창'에서 더욱 강조된다. 우연히 건너편 집에서 엄마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을 목격한 여인은, 남의 일이니 신경끄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 엄마와 맞선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죽고 사람들은 오히려 여인에게 그 죽음을 책임지라는 비난을 한다. 타인을 향한 나의 선의는 남들에게 제 멋대로 곡해되어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한 마디로 말이 점점 더 남을 찌르기 위한 무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적의가 아닌 호의가 바탕이 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고민을 전하고 있었다. '식우'에선 재난이 온전히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이대로는 안된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가능성이 분명 있는데도 냉혹한 현실 논리는 그마저도 예전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여 상황이 더욱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했으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마치 그런 '식우'의 절망으로 아예 현실에다 거센 보복을 하는 것 같았고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이것 저것 다 해보았는 데도 도저히 길이 안 보이니 어디로 가야 할 지 당신이 제발 가르쳐 달라는 호소가 묻어 나왔다.(아마도 여기서 그녀의 말을 듣는 애니메이션 성우 출신 택시 운전사는 얼마전 세상을 떠난 '짱구 아버지'의 성우였던 오세홍씨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분도 성우 일로 받는 돈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해 택시 운전사를 병행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성우라 이 이야기는 내게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정말 소설 속 인물의 대사 그대로 세상의 멱살을 잡고 "대체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이는 그대로 한없이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갈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세월호 참사후 지난 1년간 잘 보았듯이 설령 제 아무리 거대한 재난이 닥쳐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와 내 주위의 사람만 피해 입지 않으면 빠르게 잊었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지냈다. 문학의 절망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알고보면 문학은 나와는 다른, 타인의 낯선 삶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 생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창'이란 단편이 하필이면 인간의 관음증적 욕망을 묘사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와 똑같은 제목을 가져온 것도 은연 중에 문학 역시 동일한 욕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이왕 '이창'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환상'의 개입이 별로 없는 두 편, '이창'과 '어디까지를 묻다'는 그대로 문학 자신의 호소로 보인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창'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디까지를 묻다'는 작가의 글쓰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직업을 가진 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문학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은유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호소라고 보는 직접적 이유이기도 한데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는 상황이 참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창'의 주인공은 타인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 자신의 진심을 의심하고 오히려 가만있지 않고 나섰다고 공격하는 댓글들 때문에 힘들어하며(사실 이 단편 전체는 거기에 대한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어디까지를 묻다'의 주인공은 듣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에게 쌓인 감정만 배설하기 바쁜 이들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깊이 갇혀 있으며 거기서 조금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지 똑똑히 보게 되는데 그럴수록 문학은 질식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오로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허물고 타인을 받아들일 때라야 호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하는 주인공의 곤경은 그대로 문학의 곤경이다. '이창'의 주인공이 '그럼에도 나는 세상 모두가 합심하여 이웃집 아이의 불행과 재난에 한몫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p.114)'며 고독을 토로할 땐 그대로 문학의 고독을 호소하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주인공에게 한 고객이 "괜찮으세요?"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고려하는 듯한 반응을 하자 그만 울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문학의 대성통곡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문학은 타자인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 탐욕이 가져온 사대강의 녹조 라떼 속 물고기처럼 질식 중인 것이다.


 이로써 왜 두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이 지속적으로 환상을 요청하는 지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환상이 전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내면에 갇혀 있기에 강한 충격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내면의 벽을 허물기 위한 충격은 그대로 순전히 낯선 것일수록 더욱 강하기에 도라에몽의 신비한 도구만큼이나 우리의 힘으론 정체를 결코 규명할 수 없어 그대로 절대적 타자일 수밖에 없는 환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나 규정하기 어렵기에 환상은 그대로 한 덩어리의 점액질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정확히 이러한 환상의 모습을 촉각이나 청각 혹은 시각으로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하이는 처음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섰을 때 손으로 물컹한 촉감을 느끼고 '파르마코스'가 된 여인은 처음으로 지렁이 무더기와 개구리를 목에서 뱉어낼 때 '차갑고 끈적끈적한 점액질 덩어리'가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관통'에서 미온은 환상이 열어보인 빈틈에서 살아 움직이는 어둠에 손을 넣었다가 실해파리처럼 스멀거리는 암흑을 느끼며 '식우'의 비는 사물과 나와 너를 모조리 녹여 물컹한 상태로 만들며 '이물'은 문자 그대로 정체 불명의 털 뭉치로 존재한다. 그리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 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덩굴의 말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환상은 미끌거리는 점액질처럼 외형이 따로 없고 나뉨없이 한데 뭉쳐서만 나타난다.

 이런 특성은 내면에 갇힌 자들이 하는 행동으로 거꾸로 더 강조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창'에서 아동을 학대하는 집의 거실과 '식우'에서 정부가 G시의 피난민을 막으려는 O시의 시민들에게 하는 행동이 그러하다. 그 집의 거실은 '때가 타기 쉬운 색인데도 아이보리 소파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고 책장의 책들은 '표정 없이 냄새 없이, '읽는 용도보단 인테리어의 일부로 착각될 만큼 질서 정연하게 그 자리에 투척되어'(p.128)있다. 한 마디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개체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식우'의 정부는 어떠한가. 그들은 한데 뭉쳐 저항하고 있는 O시의 시민들을 나누고 쌓아놓은 컨테이너를 낱낱이 해체한다. '이창'에 나오는 거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분리와 정리 가능성은 현실의 속성이고 뭉침과 규정 불능은 환상의 속성이라는 게 이로써 분명해진다. 더구나 'G시'와 'O시'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G는 그대로 덩어리인 O를 분리한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대립은 자주 합리와 불합리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창'의 주인공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려는 자의 행위는 대부분 불합리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특히 '파르마코스'에 나오는 수의 이복 언니가 대표적인데 그녀는 '당신 때문에 우리가 떼죽음을 해야 하냐?'며 도움을 요청하는 외지인 여자에게 물을 나눠주지 않는다. 이 때 그녀가 하는 변명은 사실 더없이 합리적인데 그것은 오직 공리주의적 입장을 따를 때만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엔 그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윤리적 입장이 나온다. 바로 칸트의 의무주의다. 이는 수의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드릴 물이 없어지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바로 눈 앞에서 도움을 바라는 이에게 물을 나눠주는데 그것은 아무 계산 없이 그저 도와주라는 도덕적 명령에 따른 것으로 의무주의적 행동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무주의 행동은 그러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오직 불합리할 뿐이다. 그대로 수의 이복 언니는 수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합리와 불합리의 대립은 실은 공리주의와 의무주의의 대립이다. 대부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선의를 거부하는 이들은 공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식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디귿'은 치매 걸린 조모를, 설령 피난가는데 더없이 방해되더라도 함께 데리고 가는 의무주의적 행동을 보여준다. 반면 '니은'은 그것을 바라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문을 열어주면 차에 다 태우지도 못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공리주의적인 변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이 환상이 의도하는 타인에 대한 응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길 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무주의로, 거기에 있으니까 바라보는 무조건적인 응시이다. 


 이렇게 하여, 제목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도 비로소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나만 예외이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 아니라 '나만이어서는 안된다!'라는 호소임이 말이다. 헤아림의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먼저 타인으로 향해야 한다는 우리를 향한 간구가 여기엔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이를테면 '이물'에서 타인의 '온기와 감촉을 아는 순간', '그것의 권리와 자격을 숙고'(p.192)하여 베풀게 되는 양선의 선의를 가로막는 집게 손가락을 더이상 내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부푼 희망이나 다짐이 소각로에 던져져 티끌과 재로 사그라지고 심장과 머리가 냉각되는 계기란 이처럼 단순하다. 블록의 누적이 한계에 도달하고 균형을 상실한 채로 버티고 있을 때 그것을 직접 쓰러뜨리는 것은 어디선가 급습하는 대단한 토네이도가 아니라 부주의한 어린애의 집게손가락이다.(p.191)


 작가는 비록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고 해도 정작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재난과도 같은 거대한 파국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실은 무심히 던진 차가운 한 마디, 뜻없이 해버린 한 순간의 무시와 같은 아주 사소한 행위들이 집적되어 결국엔 절망을 낳는 파국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절망은 실은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 역시도 비슷할 것이다. 원대한 포부도, 거창한 의지도 필요없다.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주인공을 울린 한 마디처럼 아주 작은 부분으로나마 타인을 신경쓰고 좀 더 배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카오스 이론'처럼 나의 작은 선의가 거대한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었기에 절망을 딛고 소설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이 요청한 환상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 동기의 유인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문학이 자맥질 할 수 있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주는 것. 아마도 문학이 좀 더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도록 그것을 보다 넓히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도라에몽의 도구도 결국엔 매개에 지나지 않았다. 노진구가 바라는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그 자신이 성장에 달려있었으니까. 그렇게 작가가 정말 바라는 것도 환상인 신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도 거기에 도움을 주고 싶다. 좀 더 시야를 넓혀 타인을 담고 미력이나마 선의를 베풀려 노력하는 것으로. 이대로 문학의 숨이 다하는 것은 나 역시 바라지 않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09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4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쪽잠에다 밥먹을 시간조차 쫓기는 일상이라 각잡고 정색하며 읽어야 하는 문학 보단 내 주변 이야기 같아서 공감을 향한 진입장벽이 낮고 흔들리는 지하철에서나 잠깐 커피 마실 때 흘깃 읽어도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절실하다. 바쁜 우리를 위한 살가운 위안. 최은미의 `근린`을 응원하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에는 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불행이라 부르는 명함을 들고 불현듯 방문하는 이런 불청객 때문에 삶은 자주 맨발로 작두를 타는 듯한 불안을 가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이런 불청객의 방문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7년의 IMF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그 불청객은 내일의 희망을 갖고 착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들을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집을 가진 자는 집을 잃었고  둥지 안의 새들처럼 도란도란 살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다. 삽시간에 절망과 공포가 교차하는 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은 새삼 삶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여기엔 그들이 책임질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이나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그대로 성실하게 자기 맡은 바를 다해 살았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경악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대로 계속 순탄하게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IMF는 비웃으며 뿌리채 뽑아버렸다. 삶은 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조금만 큰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져버릴 등잔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IMF는 그렇게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켰다. 아버지의 말씀은 더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고 믿음을 얻지 못한 기성의 권위들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사라지고 카오스의 우주가 도래했다. 더구나 그 우주에 도사린 예측불허의 불청객이 가지는 압도적인 힘은 허무마저 가져왔다. 많은 이들이 이제 삶은 항로없는 비행이며 온전히 자기만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어디선가 주입된 머리 속의 말들은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했고 오로지 손으로 쥘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만 유일한 가치로 여겨졌다.


 삶이든,사회든 똑같이 불청객은 불안과 허무를 동시에 가져와서는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발판을 없애 버린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열심히 달리다가 뒤늦게 자신이 허공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캐릭터와 똑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날 안심시켰던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구나 하는 통렬한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뭐랄까, 리부트(reboot)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 즉 모든 것을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실연이나 이혼을 겪고 다시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알아가고 맞춰가야 한다는 게 싫어.'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불청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학도 불청객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불청객만큼이나 내가 딛고 있는 '발판 빼내기'의 전문가라는 뜻이다. 문학을 읽다보면 때로 경험하지 않는가?  문학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의 창살을 문득 드러내어 내가 지금까지 조악한 편견에 갇혀 있었음을 일깨우더니 결국 갑자기 내 발 아래 놓여진 아득한 허공을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말이다. 흔히들 문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든다고 하는데 바로 그 느낌을 달리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일변시키는 것을 문학이 가져다 주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불청객은 꼭 회피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발판의 제거는 아득한 추락의 공포와 함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겨움마저 가져다 주지만 사실은 그 추락의 깊이만큼 우리를 해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안정이란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길들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토끼와 같이 너무나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내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더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기른다. 원래는 '길냥이'였다. 야생의 습성이 강했기에 처음 집에서 키울 때 아주 애를 먹었다. 늘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해서 어떻게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가 매일의 고민이었다. 그랬는데 1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도통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안아 들고서 문을 열면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이제 어떻게 데리고 나가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이 정도로 고양이는 이미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었다. 지금 이 세계에 너무 길들여진 탓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만든 창살을 우리 스스로의 한계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내 집에 편히 거한다는 '안주'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렇다면 불청객은 오히려 열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을 열고 사실은 히키코모리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을 밖으로 내모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불청객은 기존 세계의 파괴와 허무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파괴와 허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안다. 그가 파괴하는 것은 실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틀이며 허무 역시도 그 틀을 떠받치는 근거의 삭제를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결국 그는 나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는 존재다. 그렇다면 실은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는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을 읽고 느낀 것을 갈무리한 것이다.

 이 단편집엔 모두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모든 단편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청객의 존재이다. 8개의 단편 모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에 느닷없이 출몰해서는 삶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똑같다.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5년만에 갑자기 돌아온 오빠와 그가 데리고 온 여자가 집안에 일으키는 변화나 '이사'에서 믿고 맡겼던 포장이사업자들의 주인공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의 파괴. '보물선'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던 이에게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던 이가 문득 찾아와 선사한 불행이라든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과거의 인연들이 가져온 혼돈(그들이 찾아오는 계기가 하필이면 '지진'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그렇다. 이렇게 8개의 단편 모두 누군가가 꼭 찾아와서는(그들은 '엄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문득 도래한다.) 나이테처럼 지울 수 없는 파문을 남기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 그러니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하는 왜 이렇게 자꾸 불청객을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늘 혼란과 불안을 가져다주는 불청객을 말이다.


 나는 그걸 이 단편집이 쓰인 사회적 상황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단편집은 원래 2004년에 나왔는데 대부분 2000년을 언저리로 해서 쓰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IMF와 미국의 9.11 사태의 여파가 꽤 강력하던 시기의 산물인 것이다. 개인들이 불현듯 도래한 외부적인 힘에 마구 휘둘리던 시기. 내내 등장하는 불청객은 바로 그 힘의 은유가 아닐런지. 정말 우리에게 도래했었던 현실의 반영으로써 말이다. 그 때 우리들은 종횡무진 쏟아져 들어오는 불청객들 때문에 좌충우돌 하느라 잔뜩 불안했었다. 그들은 멀쩡히 안방에서 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방에 갇히게 만든 '오빠'였고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부셔버린 '포장이사업자'였으며 남부러울 것 없었던 '재만'을 피고인 신분으로 국정원에 불러가게 만든 '형식'이었다. 불청객 때문에 삶은 쪼들리고 상처입었으며 완전히 부서지기도 했다. 어찌 불청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김영하는 8개의 단편을 통하여 내내 묻는다. 과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불청객은 날선 톱니바퀴와 같다. 그들과 마주하면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깍여나가게 된다. 하지만 김영하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것이 독인지 아니면 득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바로 그 자화상을 아직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이 나는 '오빠가 돌아왔다'의 단편들을 끌고간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은 그 때의 우리들은 상황 한가운데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이리저리 타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울을 볼 때 필요한 객관적인 거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몸에 와 닿는 피부의 아픔과 몸의 힘겨움만으로 불청객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뿐이었다. 우리에겐 거울이 필요했는데 김영하는 아마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 그 자화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은 모두 하나의 실험이며 그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불청객과 대면한 나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거리를 만들어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단편들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한다.


 단편들 모두가 '기승전'만 있다. 여기엔 '결'다운 '결'이 없다. 불쑥 들어왔다 불쑥 나가버리는 불청객 같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실제 삶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삶도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결'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결말이 주는 바로 이 황당함이 실은 김영하의 노림수 같다. 바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 같은 것 말이다. '소외효과'란 연극을 아주 인위적으로 만들어 관객을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객을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로서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것을 김영하가 쓰는 것 같다. 엉성한 상태의 이야기 덩어리로 만들어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음미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거울로써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의 바퀴 하나를 빼버린 것과 같다. 끊임없이 덜커덕거리는 마차 위에서 어떻게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왜 이리 불편할까 하면서 내내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단편들은 불청객스럽다. 불청객이라는 존재야말로 '결'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틀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마련해주고자 함인데 분명한 '결'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혹은 그래서 더욱 '결'은 없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불청객이 사실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 항로를 개척하게 만들기 위한 존재라면 진정한 '결'은 소설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설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김영하는 이것을 배려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꽤 매너 좋은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삶의 모퉁이마다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불청객은 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삶이 허약하기에 이 불청객들은 아무래도 불안한 존재이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무조건 회피할 게 아니라 환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이 더욱 나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불청객은 순수한 응시를 가져다 준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이 덧씌웠던 시선에서 해방되어 나의 참된 시선으로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청객이 두려웠던 것은 내 진실된 모습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데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신뢰가 바로 불청객에 대한 환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에서 왜 이혼해서 오래도록 따로 살던 엄마가 오빠가 데려온 여자에게 그렇게 했는지 또 오빠의 귀환을 계기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는 지가 이해된다. 세상이 내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상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니까. 분명 '오빠가 돌아왔다'의 불청객들은 궁극적으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전령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