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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상화 -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엮음 / 눌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깊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셔 폐를 빵빵하게 부풀린 후에 용단 결딴을 내렸던 것이다. <한국의 초상화>를 구입했다. 자그마치 정가가 9만원이다. 하지만 책을 받아보면 뭐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우 훌륭하고 또 귀한 책이다.
유홍준의 발간사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초상화는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그려졌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유섭 선생은 조선을 ‘초상화 왕국’이라고 했다고 한다. 과문한 소생은 금시 초문의 이야기다. ‘절제된 필선과 맑고 은은한 색채를 사용하여 단아하게 표현된 조선시대의 초상화’들을 한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고 많은 초상화 중에 돼지 마음대로 다섯 분의 초상화를 골랐습니다. 허목, 윤증, 박문수, 체제공, 심환지. 대충 아시겠지만 나름 이름을 날리신 분들입니다. 혹시 심심하시면 재미로 누가 누구인지 한 번 맞춰보시라고 누구 초상화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요. 호호호. 정답은 금일 자정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목(1595-1682)
양천사람으로,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이고, 호는 미수(眉叟)이다. 벼슬은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대현과 영수로서 깊이 추앙을 받았으며, 평생 몸가짐이 고결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제일인자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림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유난히 길어서 스스로 미수라 불렀다 한다. (p280)
윤증(1629-1711)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논산군 유봉 아래 살아서 호를 유봉(酉峰)이라고도 하였다. 35세 때인 현종 4년(1663)부터 조정에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이 치열한 가운데 집권 세력인 노론에 밀려 그의 아버지 윤선거와 함께 관직을 추탈당했다가 경종 2년(1722)에 복관되었다.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종가가 있는 논산 노성의 노강서원을 비롯하여, 홍성의 용계서원, 영광의 용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p286)
박문수(1691-1756)
본관이 고령, 자가 성보(成甫), 호가 기은(耆隱)으로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초년에 영남 암행어사와 충청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으며,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영조가 왕세제일 때부터 세자시강원 설서로 인연을 맺어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찬성하며 도승지와 어영대장 같은 요직을 두루 지내고, 군정과 세정에 밝아 오랫동안 병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지내며 많은 개혁을 감행했다. 사후 영의정과 영성부원군에 추증되고 충헌의 시호가 내려졌다.(p102)
채제공(1720-1799)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남인계 출신으로 1748년(영조 24) 탕평을 내세운 영조의 특명으로 선발되어 예문관 사직을 비롯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88년(정조 12)에 우의정, 1790년(정조 14)에 좌의정, 1793년(정조 17)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주도적으로 운영하였을 정도였다. 그는 10여 년을 재상 자리에서 당쟁을 진정시켜 탕평책을 성공리에 이끌었고, 한편으로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이른바 문예부흥 정치를 이룩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p308)
심환지(1730-1802)
본관은 청송으로 1771(영조47)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병조·형조 판서를 거쳐 1798년에 우의정, 1800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벽파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p182)
초상화 1번
초상화 2번
초상화 3번
초상화 4번
초상화 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