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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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서평
함규진 지음

몰랐던 30개 도시의 한국사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호기심이 더욱 증폭되었고, 한때는 우리의 땅이었던 곳과 북한의 도시를 알게되어 재미있었다

최초의 서울이 세워진 강동구와 송파구 암사동의 신석기 집터는 '사람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1876년 경복궁에 불이 나 잿더미가 되었는데, 범인은 흥선대원군으로 추청된다고 한다. 고종이 친정에 나서고 자신을 배제한 원한과 증오 때문에 태운 것이라고 한다


용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은 40년간 주둔했으며, 임오군란 때는 청변이 주둔했다면 용산 기지에는 미군이 70년 이상 주둔한다. 용산 전자상가는 1987년 IT 열풍을 타고 IT 관련 제품 판매구역으로 성장하고, 일본의 미디어 상품과 굿즈들의 메카가 되었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견고한 성곽을 쌓아서 수도 방위에 만전을 기한다는 명분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으로 정한 것이다. '화성'은 실학이라 불리는 당시의 학술과 문화의 상징이자 집대성이다. 화성은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다


천안의 홍경원은 고려 현종이 세웠는데, 천안삼거리가 교통의 요지라 늘 붐볐고, 도적이 나타나는 걸 걱정해 홍경사 절을 세우고 객관을 마련하도록 했다. 병천의 아우내장터에서 '독립 만세' 소리가 퍼졌고 그속에 유관순이 있었다

전주는 옛 유적이 많은 도시로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묵게 한 관사인 '전주 객사', 견훤이 궁궐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남고산성', 전주는 조선 후기 상업 도시로 이름을 알렸다. 신흥종교인 동학이 활발한 세력을 주도했다. 전주형무소 학살사건이 두 차례에 걸쳐서 일어나는데 6.25의 축소판과도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광주는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외된 빛고을로 1929년 열차에서 조선 여학생을 일본 남학생이 댕기머리를 잡아당겨 희롱한게 시발점이 되어 항일운동이 불붙었다. 1930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은 5만 4000 여 명이라는 학생이 참여했다. 해방후에도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진 충장로가 있다


1979년 12월에 12.12사태는 계엄군에 의한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6.10 민주항쟁에서 광주 출신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졌을 때, 아들의 시체를 붙잡은 어머니는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가자!"라고 울부 짖었다


제주도는 특산물, 이방인, 반란이 많았다. '관덕정'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세종 때 지은 무예 훈련을 하던 누각이다. 귤은 634년 백제에 금귤을 조공했다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제주목사들으 공납으로 귤밭이 있지만 할당량을 맞추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다.

유배지로 인기를 끌었던 제주도는 광해군을 포함해 300명 정도가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가장 참혹했던 봉기는 1948년 4.3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지시로 서북청년단에 의해 무참히 일어난 살육현장이다. 좌익무장대원과 양민들을 가리지 않고 져지러진 사건으로 무려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양은 일제강점기에 대륙 침략의 군수기지로 설계. 개조되었으며, 평양권번으로 유흥의 메카가 되었다. 일제가 물러나고 소련군이 진주하며 평양은 '붉은 도시' '혁명의 수도'가 되어가고 1945년 김일성이 평양역에 도착해 광장연설로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1948년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이 정식 수립 되었다.

"평양은 북한 내부의 천국이며 북한의 이상향"이라고 북한전문가 뤼디거 프랑크는 말한다


함흥은 조선왕조의 성지로 만든 이성계가 벌인 전투가 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으로 흥남항 부두를 유엔군이 폭파한다. 이후 중공업 중심지로 위상을 회복하지만 최고의 범죄도시라는 오명을 안게 된다


단둥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며 세계에서 활발한 정보전이 펼쳐지는 도시로 전 세계 언론사 특파원들과 국가 첩보원들의 암약처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30개의 도시에서 한국사를 읽으며 배우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단둥과 룽징이다. 중국과 북경의 국경인 단둥과 룽징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군들이다. 역사기행을 몇년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의 역사를 알고나니, 더 가까이 더 친숙하게 역사의 현장이 느껴졌다.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를 알게되니 그곳이 이제 다르게 보인다

위 서평은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지원받아서 작성하였습니다

@dasan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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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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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서평
황현필 지음

먼저 [이순신의 바다]를 출간한 역바연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황현필의 유튜버를 통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상을 열번을 넘게 반복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책으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에 읽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워온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는 너무나 일부분이었고, 외국 유명 유튜버가 이순신 장군에 관한 것을 만화로 만든것을 보고, 솔직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더 앞당겼을 것이고,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 조선의 존패가 어찌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이순신을 제대로 알고 싶었습니다. 이순신은 어린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놀이를 하다가 진을 치고 있는데, 동네 어른이 그 진을 무시하고 걸어가자 이순신이 분노해서 활 시위를 조준한채 물었다고 한다.



"여기 진 쳐놓은 게 보이지 안나요? 어째서 함부로 들어오는 겁니까?" 이때부터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피해다녔다고 한다.

이순신은 32세에 식년 무과에 합격하였는데 임진왜란을 앞둔 16년 전입니다. 두만강 녹둔도 전투이후 곤경에 처해서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가 되어 일본이 침략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해서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전략을 고심하고, 하급 병사들의 의견도 수렴하여서 열띤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관할지 5관 5포의 병력 충원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했다. 전투선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판옥선으로 개선하였고, 판옥선에 함포를 장착했다. 이때 신기전, 비격진천뢰, 장병겸의 무기를 만들었다.

노를 젓는 격군들을 훈련시키고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다. 백병전에 대비해서 일본군이 판옥선에 올라오지 못하게 궁리한 끝에 거북선을 만들게 되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밖으로 확대하고 싶어서 조선을 침략하는 계획을 짠다. 일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에 상륙을 해서 경상도까지 침략을 했고, 옥포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으로 출정을 하여서 임진왜란 첫 승리를 얻었다. 이때, 원균은 판옥선을 수장시키고 도망을 갔다

이순신은 합포해전과 적진포 해전으로 3승을 연이어서 거두었다. 사천해전이 거북선의 첫 등장이었고, 위력이 확인된 첫 승리의 전투였다. 당포해전의 승리까지 조선 수군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한산도 대첩에서 와키자카는 패전했고, 이후 일본군들에게 이순신은 염라대왕이었고, 판옥선은 저승사자였다. 안골포 해전, 장림포해전, 화준구미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해전, 절영도해전, 그리고 이순신이 가장 큰 승리라고 생각했던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했다. 웅포해전을 끝으로 휴전이 이어졌다.

일본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선조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고, 파직당하여 또다시 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 된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고 배설의 판옥선 12척만 살아서 돌아가게 되었다. 최고 지휘관의 역량이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대표적 사레로 남게 되었다.

칠천


량의 패전으로 이순신은 흐느껴 울었다. 몇년에 걸쳐만든 조선의 무적 함대가 사라지고 전투경험을 갖춘 정예병 수천명이 억울하게 수장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배설의 판옥선 12척으로 다시 조선 수군을 재건하였다.

일본군은 슬금슬금 조선을 다시 침공하였고, 어란진해전을 승리로, 울돌목에서 왜군들을 유인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유명한 어록이 있다.
"죽으려고 하면 곧 살 것이요(必死則生 ), 살려고 하는 자는 곧 죽을 것이다(必生則死)" 1대 133의 전설적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고군분투를 하다가 뒤이어 구경하던 판옥선들이 합류해서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군은 이순신에 대한 보복으로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렸고, 셋째 아들 이면도 전사했다. 절이도 전투에서 승리하고 조명연합군의 순천왜성전투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노량해전은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삼국의 에이스들이 모인 전투였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총에 맞아서 전사했지만 승리한다.

이순신의 사망설과 은둔설은 그만큼 이순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살아있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300년 더 일찍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했을 것이고, 그 치욕스런 역사적인 수치를 이순신 개인이 막아 내은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이 솟아났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세계 전쟁사에 회자되고 감탄사를 연발케하는 이순신을 우리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 "나는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는 신채호의 말을 다시한번 새겨본다

위 서평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yeokba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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