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안드레 두버스의 소설 가운데, 이혼해서 두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겨울 아버지>라는 단편이 있다. 그 소설 속의 아버지와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사이가 나빠진다. 오후마다 그들은 재즈 클럽, 극장,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앉아 있다. 하지만 여름이 되어 바닷가에 갈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즐거워진다. "기다란 백사장과 바다는 그들의 잔디밭이었으며, 비치 타월은 그들의 집이었고, 아이스박스와 보온병은 그들의 부엌이었다. 그들은 다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시트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이 엄청난 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아빠들이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으로 나가서 프리스비 원반을 든 채 배회하는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겨울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단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고, 동물원 구경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을 평이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해주었다. - P19

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축구장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거나 어른들이 "이 변태야!"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 주위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축구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증오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 경기를 보는 내내,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킥오프 몇 분 만에 분노가 터져나왔다.
"굴드, 이런 개망신이 있나. 정말 망신살이 뻗쳤다!"
"주급 100파운드? 주급 100파운드라니! 그 돈은 너를 봐주는 값으로 내가 받아야겠다!" - P22

내가 지금까지 가보았던 공연이란, 관객들이 즐기기 위해 돈을 내고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공연장에 가보면 이따금 칭얼거리는 아이나 하품하는 어른은 있었을지 몰라도, 분노나 절망 혹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고통으로서의 오락‘이란 완전히 새로운개념이었고, 나는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바로 그 개념이 내 인생을 형성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책이나 음반도ㅡ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한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후진 음반을 듣거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분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하이버리의 웨스트 스탠드에 모여 있던, 절망으로 가득 차 신랄한 욕설을 퍼붓던 그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바로 그 덕분에 지금 내가 비평가로 약간의 용돈을 벌고 있는지조 모르겠다. - P24

그때부터 이런 식의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대학에서 맨처음 가장 쉽게 사귄 친구들도 축구팬이었다. 새 직장에서의 첫날, 점심시간에 신문 마지막 장에 있는 축구 페이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반응이 오게 마련이다.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이 손쉬운 기술에는 단점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외롭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떠랴?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전부 다 나보다 덩치가 큰 팔백 명의 사내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걸어들어갈 때, 단지 호주머니에 지미 허스번드의 스티커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죽지 않을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홍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P28

스윈던과의 비극적인 승부가 끝난 다음 주 토요일에는 퀸스파크레인저스와의 원정 경기가 있었다. 나는 그때의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1-0 승리의 골을 넣은 조지 암스트롱이 공중으로 솟구쳐 있고, 데이비드 코트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배경으로는 스탠드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아스널 팬들이 그라운드 뒤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도 역시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장면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딱 일주일 전에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까지그런 창피를 당하게 만들었던 선수들이 어떻게 이토록 기뻐할 수 있단 날인가? - P35

1970년까지, 내 또래뿐 아니라 한참 연배가 높은 사람들까지도 세계 최고의 펠레 선수보다는 이언 어 선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펠레가 꽤 쓸 만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실제로 그 사실이 증명되는 것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브라질은 1966년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포르투갈에 지는 바람에 탈락했지만, 사실 그때 펠레는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1962년 칠레 월드컵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를 써낸 지 6년이나 지난 때였지만, 잉글랜드 인구 4분의 3 이 족히 되는 사람들이 펠레라는 선수에 대해서 아는 것은, 150년 전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알고 있던 수준 정도였던 것이다. - P49

스윈던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도 그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우듯이 잠깐 동안 토트넘을 기웃거리는 아스널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면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 년 동안 아스널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스윈던, 트랜미어, 요크, 월솔, 로더럼, 렉섬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는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 - P47

그 시절, 축구 경기가 진짜로, 정말로 기억할 만한 경기가 되어서만족감에 들떠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 아버지와 함께 가야 했다. 우리는 피시 앤 칩스 가게에 들러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지 않고) 점심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웨스트 스탠드 위쪽(그곳이어야 하는 까닭은, 거기에 앉으면 선수들이 입장하는 터널을 내려다보면서 팀이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프라인과 노스 뱅크 사이에 앉아야 했다. 아스널이 좋은 경기를 펼치고두 골 차이로 이겨야 했다. 경기장이 만원 혹은 거의 만원이어야 했다. 즉 상대 팀이 꽤 중요한 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는 BBC의<오늘의 경기>가 아니라 일요일 오후 ITV의 <빅 매치>에 방송되어야했으며(아마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일요일 오후를 영하의 기 - P75

온에서 보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프랑스에서 외투를 챙겨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추워서 덜덜 떨어댔기때문에, 나는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응원하자고 조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졸랐다. 경기가 끝나 차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버지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골인 장면을 놓칠 위험을 무릅쓸 만큼 미안하지는 않았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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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책에 의한 책을 위한 책이다.

책에 대한 작가의 넘치는 사랑에 독자도 함께 흠뻑 빠져드는 책이다.


수많은 전쟁과 폭력과 재해와 무지와 검열과 분서에서 살아남은 책들, 이름만 남은 책들, 이름도 남지 못한 책들.

돌과 가죽과 양피지와 파피루스와 종이와 단말기와 또 다른 어떠한 모습으로도 영원히 살아남아 주기를.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책들과 많은 이름들을 기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만날 책들, 이름들.

언젠간 읽게 될 책들, 스쳐지나갈 책들.

책과 나의 운명을 생각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오스카 와일드 <레딩 감옥의 노래>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루스 랜들 <활자 잔혹극>
치누아 아체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레이 브레드버리 <화씨 451>
크리스토퍼 몰리 <파르나소스 이동서점>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조이스 <율리시스>

페넬로페
사포
헤타이라
아스파시아
안티고네
리시스트라테
프락사고하
에우리피테스 <메데이아>
히파르카아
마거릿 애트우드 <페넬로피아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
헤로도토스 <역사>
에마뉘엘 레비나스
메난드로스
플래너리 오코너

플라톤 <파이돈>
조이스 <율리시스>
폴 오스터 <페허의 도시> <고독의 발명>
히파티아
모니카 즈구스토바 <눈 속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
존 치버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
영화 <노예 12년>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조지 오웰 <서점의 추억>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로운 고독>
술피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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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26 2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게 좋다는데~~ 읽고 싶은 책 목록만 잔뜩 늘어날 것 같아 무서워요^^;;

햇살과함께 2024-02-26 22:02   좋아요 2 | URL
쓰다 너무 많아서 그냥 넘어간 책들도…
다른 책에서 여러번 본 책도 있어서 언젠가 만날 운명이면 만나겠죠?!

얄라알라 2024-02-2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많은 제목 중에서 <눈 속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 !!!!
확 끌립니다! 햇살과함께 님의 ˝책과함께˝가는 운명의 기록^^ 짬짬히 보고 배우겠습니다~~

햇살과함께 2024-02-27 09:22   좋아요 0 | URL
스페인계 작가여서인지 번역본은 없는 것 같아요...
평생 함께 할, 함께 하고픈 운명이고 싶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02-27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ㅋㅋ 저 나름대로 열심히 책 읽는 사람인데 올려주신 리스트 보니 안읽은 책 왜이렇게 많아요? 책의 세계는 정말이지 넓고도 무한하네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4-02-27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저기 리스트 중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랑 <장미의 이름>만 읽어 보았는데, 이 책 읽고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요~
죽기 전에 언제 다 읽죠 ㅎㅎㅎ

다락방 2024-02-27 11:47   좋아요 1 | URL
죽지 않는게 답입니다!!

햇살과함께 2024-02-27 15:0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영생!
무엇보다 안구 교체가 필요합니다!! 노안 슬퍼요....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
영화 <노예 12년>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조지 오웰 <서점의 추억>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로운 고독>
술피키아

2 로마의 길

이 전설적이고 야만적인 집단성은 로마 결혼식의 모델이 되었고 여성 납치는 수 세기에 걸쳐 극화되었다. 이로써 신랑이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울고 저항하고 소리지르는 신부를 강제로 떼어내는 형태의 의식이 만들어졌다. - P323

로마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된다. 때로는 방어적이고때로는 공격적인 국지전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가 되면 당시의 지배 세력이던 그리스인들이 로마의 확장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원전 240년, 연이은 승리로 로마의 영토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포함하게 된다. 1세기 반이 지난 뒤에는 이베리아반도, 프로방스,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 그리스, 소아시아의 서부,
그리고 현재의 리비아와 튀니지 사이의 북아프리카 해안을 지배하게된다. 기원전 100년에서 43년 사이에는 갈리아, 아나톨리아 반도, 흑해 연안, 시리아, 유대, 키프로스, 크레타, 오늘날 알제리의 해안 지역및 모로코의 일부가 합병되었다. 테베레 강가의 작은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악취가 나는 늪에서 살다가 지중해를 내륙의 호수처럼 독점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P324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성과를 탐구했으며, 그 성과를 내면화하고, 보호하고, 확장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거기에서 현재와 우리와 찬란한 과거의 사라진 세계를 연결하는 실이 태어났다. 그렇게 사상, 과학적 발견, 신화, 사유, 감정, 실수와 불행이 수세기에 걸쳐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적 실을 고전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일깨우는 그리스는 유럽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 P330

한나 아렌트 같은 철학자,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같은 과학자, 독재로 인해 이주한 스페인 작가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ón Jiménez)나 라몬 호세 센데르(Ramón José Sender) 등 수많은 예로 확인할 수 있듯이, 20세기 중반에 매우 계산된 수용과 비용으로 예술과 지식의 진원지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 이전은 더욱 무자비한 조건에서 이뤄졌다. 당시에는 로마의 꿈이 있었다거나외국의 인재를 열망하는 갤러리나 대학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엄청난 수의 그리스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로마에 노예로 팔려왔던 것이다. - P341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노예는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괴물이자 항상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였다. 당시에는 아무리 부자이고 귀족혈통이어도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자유로이태어난 사람을 포함해 지옥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도시나 국가가 전쟁으로 타격을 입고(고대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패배하면 누구나 승리한 군대의 전리품이 되었다. "패자에겐 비애뿐"이라는 라틴어격언이 있다. 고대의 전설은 우리가 지금 ‘시민‘으로 부르는 대상에 대한 동정심이 없었다는 걸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에는 잿더미가 된 트로이에서 침략한 군인들에 둘러싸인 채 비탄에 빠진 여왕과 공주들이 등장한다. 전날 밤만 하더라도 호화로운 옷을 입고 존경의 인사를 받았지만 살육과정복의밤이 지난후, 그리스인들은 그녀들을 끌고 가 강간한다. - P342

로마인들은 그리스인을 비롯해 히스패닉인, 갈리아인, 카르타고인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스 포로들의 특징은 상당수가 로마인보다교양을 갖췄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중산층이나 상류층의 자녀들이갖는 권위 있는 직업은 로마에선 노예들이 하던 일이었다. 의사, 은행원, 행정관, 공증인, 세무관, 관료, 교수는 종종 자유를 박탈당한 그리스인이 담당했다. 문화적 열망을 지닌 로마 귀족들은 언제든 시장에나가 자녀를 교육할 그리스 지식인을 살 수 있었다. 집 밖에서는 대부분의 학교 교사가 그리스 노예나 자유민이었다. 모든 사무직은 그리스인의 전문 분야였으며 그들은 제국의 행정과 법체계를 지원했다. - P345

알베르토 망겔은 독서의 역사에 이렇게 쓴다. "미국 남부 전역의 대농장 소유주들은 철자를 아는 노예를 교수형에 처했다. 노예의 주인들(독재자, 폭군, 절대 군주, 기타 불법적인 권력의 소유자)은 문자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읽기가 몇 개의 단어만으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는걸 알고 있었다. 한 문장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읽을수 있다. 글을 모르는 군중은 지배하기 쉽다. 읽는 기술은 한번 습득하면 버릴 수 없기에,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독서는 금지되어야 했다." - P348

반면에 나는 헝가리 저널리스트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의 천재적발명품인 볼펜의 시대에 속한다. 라슬로는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금속으로 만든 공으로 새로운 필기구를 만드는 초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물웅덩이에 빠진 공이 구르면서 흔적을남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 오는 도시에서 공을 차며 소리를 지르고 웃는 아이들과 공의 젖은 발자국을 상상해본다. 거기에서 내 어린시절의 육각형 빅 크리스털 볼펜이 유래했다. 우리는 지루한 오후 시간이 되면 그 볼펜 막대기에 쌀알을 넣어 공기총처럼 친구들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대곤 했다. 나 또한 서투른 사춘기에 누군가의 관심을끌려고 그렇게 했었다. - P364

사실 우리의 기원을 되돌아보면, 우리 독자들이 아주 젊은 종족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약 38억년전, 지구에서 특정분자가 모여서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가 생성됐다. 현생인류와 매우 유사한 동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250만년전이다. 30만년전, 우리의 선조들은 불을 길들였다. 그리고 인류가 말을 정복한 건 10만년전이다.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익명의 수메르인 천재들이 점토에 기호를 씀으로써 음성의 시간적, 공간적 장벽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언어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5000년 이상이 지난 20세기가 되어서야 글쓰기가 대부분의 인구가 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기술이 되었다. 따라서 글쓰기는 아주 최근의 일이다. - P368

193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서점에서 시간제로 근무했던 조지 오웰은 서점의추억』에서 서점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서점을 존경받는 노인들이 송아지 가죽으로 묶인 책 사이를 영원히 배회하는 일종의 낙원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고객들은 에릭 블레어(조지 오웰의 본명)가 바랐던 만큼 흥미롭지도 다정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자신이 아끼는 책이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이를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를 거만하고 비사교적인 판매자로 기억하고 있다. 에릭은 자신의 종이 왕국을 우아하게 지켜줄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되기엔 창의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서적상이 환상적 무대의 마술사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 P392

히스파니아의 마르티알리스의 향수 어린 꿈이 서린 로마의 장엄한 도서관은 재난과 약탈과 화재와 사고로 무너지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고대 도서관은 파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치하 79년 10월 24일, 나폴리만에 있는 두개의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시간이 멈췄다. 로마의 부자들은 그곳에 저택을 지었다. 태양은 빛나고, 물은 맑은 푸른색이었고, 도금양 꽃의 향기는 공기를 달콤하게 했으며, 휴가객의 즐거움을 위한파티가 연이어 열렸고, 삶은 편안했다. 그러나 그 가을날 이른 아침, 베수비오 화산 분화구에서 하늘을 향해 한 줄기 검은 연기가 거세게치솟았다. 곧이어 화산재가 헤르쿨라네움의 길거리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산재는 지붕을 뒤덮으며 창을 뚫고 들어왔다. 마침내 600도의 용암이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주민들은 뼈만 남았다. 폼페이는 유황 연기에 뒤덮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P434

문제는 고전에 어떻게 다가가냐이다. 고전은 학교와 대학 커리큘럼에 필독서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전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마크 트웨인은 문학의 소멸』에서 "고전은 누구나 읽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을 썼다. 피에르바야르(Pierre Bayard)는 그 유머를 빌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법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이 작품에서 그는 위선적 독서에 대해 분석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대화에서배제되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떨며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하곤 한다. 또 바야르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책을 읽은척하면서 가까이 가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거짓말은 되돌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주워섬기며 아는 체하게 된다. 이런 사기는 그 대상이 고전이라면 더 쉬워지는데, 고전은 익숙하기 때문이다. - P465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지적처럼 고전은 우리가 주워들어서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독서를 해보면 훨씬 새롭고 예상치 못한 내용이 실린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고전은 제 말을 끝내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 감동받고 깨우침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그 말이 끝난다. 오랜 위험에서 고전을 부적처럼 보호해온 사람은 강제적으로 고전을 읽은 독자들이 아니라 고전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 P466

세 명의 철학자, 즉 형이상학의 니체, 윤리학의 프로이트, 정치학의 마르크스는 고대 연구에서 출발하여 근대성으로 전환했다. 아주 혁신적인 창작물에도 과거의 아이디어가 부분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고전은 아직도 활동하는 나이 많은 로커들처럼 무대에서 나이를먹어가면서도 새로운 유형의 대중에 적응한다. 고전에 열광하는 자들은 고전의 콘서트에 가려고 돈을 내며 불경한 자들은 고전을 패러디하지만, 결코 고전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과 복잡하고 창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나아렌트가 지적하듯, "과거는 후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예상과달리 미래는 우리를 과거로 이끈다." - P470

유럽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해 중 하나였던 1940년,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탈주한 발터 베냐민은 이렇게 썼다. "문화에 대한 기록은 동시에 모두 야만에 대한 기록이다." 이성의 영역에서 야만이 지속되고 계몽이 악을쫓아내지 못했다는 뼈아픈 증거에 직면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194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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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2-26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햇살님 이 책 넘 좋죠? :)

햇살과함께 2024-02-26 13:08   좋아요 1 | URL
네 좋아요! 책 사랑 찐 사랑이 느껴지는 책.
좋은데 생각보다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아서 의아.. ㅎㅎㅎ
책이 두꺼워서 자주 들고 다니지 못한 것도 있을 거 같고,
제가 그리스 로마에 약해서, 역사에 약해서 인 것도 같고요.
읽고 싶은 책은 한가득 주워 담고요...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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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이란 진정 신에 의해 정해진 것이란 말인가. 달아나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넘어서려 하지만 더 큰 화만 불러오는, 죽어서야 해방되는, 어리석고도 불쌍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라니. 왜 살아야 하는 건가.
그냥 읽는 것 만으로는 난해한, 깊이 있는 해석, 공부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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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스 여인들

헤라클레스 그런데 예언된 신의 뜻대로, 이 짐승 켄타우로스가
죽어서도 이렇게 살아 있는 나를 죽였구나.
이제 나는 밝히겠노라, 이러한 상황에 들어맞는
새로운 신탁을, 옛것과 일치하는 것을.
그것들을 나는, 산속에 살며 땅바닥에서 자는
셀로이들의 숲으로 들어가서 적어 두었다,
많은 혀를 가진 내 아버지의 참나무에서 받았느니라
그 나무는 나에게, 살아 있는 현재의 시간에
내게 얹힌 괴로움들에서 해방될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잘살 것으로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건 결국 내가 죽는다는 것일 뿐이었구나.
터 죽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들러붙지 않으니까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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