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안드레 두버스의 소설 가운데, 이혼해서 두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겨울 아버지>라는 단편이 있다. 그 소설 속의 아버지와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사이가 나빠진다. 오후마다 그들은 재즈 클럽, 극장,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앉아 있다. 하지만 여름이 되어 바닷가에 갈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즐거워진다. "기다란 백사장과 바다는 그들의 잔디밭이었으며, 비치 타월은 그들의 집이었고, 아이스박스와 보온병은 그들의 부엌이었다. 그들은 다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시트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이 엄청난 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아빠들이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으로 나가서 프리스비 원반을 든 채 배회하는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겨울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단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고, 동물원 구경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을 평이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해주었다. - P19

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축구장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거나 어른들이 "이 변태야!"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 주위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축구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증오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 경기를 보는 내내,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킥오프 몇 분 만에 분노가 터져나왔다.
"굴드, 이런 개망신이 있나. 정말 망신살이 뻗쳤다!"
"주급 100파운드? 주급 100파운드라니! 그 돈은 너를 봐주는 값으로 내가 받아야겠다!" - P22

내가 지금까지 가보았던 공연이란, 관객들이 즐기기 위해 돈을 내고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공연장에 가보면 이따금 칭얼거리는 아이나 하품하는 어른은 있었을지 몰라도, 분노나 절망 혹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고통으로서의 오락‘이란 완전히 새로운개념이었고, 나는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바로 그 개념이 내 인생을 형성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책이나 음반도ㅡ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한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후진 음반을 듣거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분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하이버리의 웨스트 스탠드에 모여 있던, 절망으로 가득 차 신랄한 욕설을 퍼붓던 그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바로 그 덕분에 지금 내가 비평가로 약간의 용돈을 벌고 있는지조 모르겠다. - P24

그때부터 이런 식의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대학에서 맨처음 가장 쉽게 사귄 친구들도 축구팬이었다. 새 직장에서의 첫날, 점심시간에 신문 마지막 장에 있는 축구 페이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반응이 오게 마련이다.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이 손쉬운 기술에는 단점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외롭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떠랴?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전부 다 나보다 덩치가 큰 팔백 명의 사내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걸어들어갈 때, 단지 호주머니에 지미 허스번드의 스티커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죽지 않을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홍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P28

스윈던과의 비극적인 승부가 끝난 다음 주 토요일에는 퀸스파크레인저스와의 원정 경기가 있었다. 나는 그때의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1-0 승리의 골을 넣은 조지 암스트롱이 공중으로 솟구쳐 있고, 데이비드 코트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배경으로는 스탠드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아스널 팬들이 그라운드 뒤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도 역시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장면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딱 일주일 전에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까지그런 창피를 당하게 만들었던 선수들이 어떻게 이토록 기뻐할 수 있단 날인가? - P35

1970년까지, 내 또래뿐 아니라 한참 연배가 높은 사람들까지도 세계 최고의 펠레 선수보다는 이언 어 선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펠레가 꽤 쓸 만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실제로 그 사실이 증명되는 것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브라질은 1966년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포르투갈에 지는 바람에 탈락했지만, 사실 그때 펠레는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1962년 칠레 월드컵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를 써낸 지 6년이나 지난 때였지만, 잉글랜드 인구 4분의 3 이 족히 되는 사람들이 펠레라는 선수에 대해서 아는 것은, 150년 전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알고 있던 수준 정도였던 것이다. - P49

스윈던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도 그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우듯이 잠깐 동안 토트넘을 기웃거리는 아스널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면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 년 동안 아스널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스윈던, 트랜미어, 요크, 월솔, 로더럼, 렉섬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는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 - P47

그 시절, 축구 경기가 진짜로, 정말로 기억할 만한 경기가 되어서만족감에 들떠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 아버지와 함께 가야 했다. 우리는 피시 앤 칩스 가게에 들러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지 않고) 점심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웨스트 스탠드 위쪽(그곳이어야 하는 까닭은, 거기에 앉으면 선수들이 입장하는 터널을 내려다보면서 팀이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프라인과 노스 뱅크 사이에 앉아야 했다. 아스널이 좋은 경기를 펼치고두 골 차이로 이겨야 했다. 경기장이 만원 혹은 거의 만원이어야 했다. 즉 상대 팀이 꽤 중요한 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는 BBC의<오늘의 경기>가 아니라 일요일 오후 ITV의 <빅 매치>에 방송되어야했으며(아마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일요일 오후를 영하의 기 - P75

온에서 보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프랑스에서 외투를 챙겨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추워서 덜덜 떨어댔기때문에, 나는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응원하자고 조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졸랐다. 경기가 끝나 차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버지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골인 장면을 놓칠 위험을 무릅쓸 만큼 미안하지는 않았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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