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장애인 대표로서 어떤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나?"라고. 나는 그 질문에 늘 당황하고 만다. 대표 자리에 올라가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는 나를 그 자리에 앉혀버리곤 한다. ‘대표‘의 자리에 쉽게 올려지는 것은 대단한 권리인 동시에, 사회적 소수자에겐 그 자체로 소수자성을 재확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이야기를 했을 뿐임에도 사회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이유로(그것은 대부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는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뿐이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대표의 말하기가 되는 것이다. - P8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순간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우당탕탕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글을 읽다가 자꾸만 울고 싶거나 성찰하고 싶다면 책을 덮고 잠깐 산책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개그를 해본답시고 쓴 건데 재미가 없거나(그렇다면 사과한다) 아니면 이제까지 ‘대표‘의 글을 소화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사회적인 관념이 자꾸만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를 일깨우거나 반성하게 만드는 역할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 많은 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지 않고 책갈피 사이로 들어오길 희망한다. - P9

현미는 어떤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어디라도 찾아 나섰다.

**장애는 완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나아진다‘는 말은, 종종 ‘비장애인과 비슷해진다‘는 욕망을 함축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서 ‘나아짐‘이라 함은 ‘걷게 됨‘이었다. 내가 받은 여러치료의 목적이 ‘조금 더 예쁘게 걷기, 오래 서 있기’에 맞춰져 있던 것처럼. 그때 현미와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조금 더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것보다 기쁜게 없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내 몸을 좀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다. 걷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한다. - P18

그렇게 현미는 서른의 시작부터 마흔을 훌쩍 넘어서까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 현미에게 언젠가 나는 ‘좋아지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오랜 시간 내 몸과 마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걸음을 연습하는 것보다, 걷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우선이라고 느꼈다. 이미 60대의 그것이 된 관절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하고 몸을 바꿔가며 혼자 걷게 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현미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조금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나중에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조금 화를 냈다. - P19

하지만 난 정말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 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장애인 되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운동하고 싶었다. - P20

나 때문에 거부를 경험한 비장애인은 전 애인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 거부의 시초에 현미가 있었다. 나는 순진하고 어렸을 20년 전의 현미를 떠올린다. 갑자기 삶에 떨어진 ‘장애‘를 가진 나로 인해, 이전까진 경험해보지 못한 거부를 온몸으로 감내했을 그를 상상해본다. - P22

때로는 창피하고 무서워서 내가 엉엉 울며 말리더라도 현미는 일단 싸우고봤다. 나를 키우는 건 싸움의 연속이었다. 현미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활동가가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 P23

그때 현미가 말했다.
"어우 씨, 진짜 한 대 칠 뻔했네."
그렇게 그 문장은 내 마음속에 남아 부당함을 마주할 때 튀어나오곤 한다. 현미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장애를 숨기거나 집 안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대 때릴‘ 기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말은 내게 숨을 필요 없다고, 여차하면 그냥 ‘한 대 때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잘못은 내 존재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 P25

현미 허락받고 가지 않았나? 몰라, 몰라. 기억이 안 나. 이런 거 쓰면 안 된다. (잠시 정적) 술도 몰래몰래 닭발이랑 시켜가지고 받아서 먹기도 하고. 엄마 술 걸려서 뺏기기도 하고 그랬어. (함께 웃음) 근데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런 간호사들도 있었지. 왜냐하면 엄마들이 정말 애들한테 거의 매여 있으니까, 하루 종일 그러니까 "안 걸리게 잘하세요" 뭐 이런 간호사 선생님도 있고…… 하여튼 이런 거 쓰면 안 될 텐데. 보바스(병원이름)에서는 골뱅이 요리 잘하는 애가 있어서 골뱅이 무치고 쫄면 해서 나눠 먹고. 저녁 시간에 같이 둘러앉아가지고. - P35

카카오 웹툰 <열무와 알타리>와 네이버 베스트도전 <제제와 함께>처럼, 장애아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들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안에 납작한 인물은 없다. 또 확실한 비극이나 희극도 없다. 그저 살아남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분명 누군가는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읽고 또 살아갈 것이다. - P37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그 ‘관계‘로만 삶이 설명될 때가 많다. 장애인의 엄마, 장애인의 형제, 장애인의 친구처럼. 물론 관계로서의 인간도 아주 중요하지만, 종종 그것에 너무나 매몰되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곤 한다. 나 역시 이번 인터뷰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현미의 용기와 사람을 살리는 살림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현미는 나를 빼고도 충분히 다른 존재들을 살릴 수 있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다. - P39

나 역시,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그 낯익은 단어가
귀를 울리고 가슴을 찢어놓는 거 같았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어쩌란 말인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 가족은 abnormal한 삶 속으로
빠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 abnormal한 case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건지…….….
난 정말 알수가 없었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작성자 태균 2005.04.25 - P45

태균은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 내가 몸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쉽게도(?) 태균이 내게 사과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몸에 대해 절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태균이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에 갇혀 원망할 대상을 찾아다녔던 순간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평화를. - P50

어쩌면 장애인들은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갈등에 빠지는 것을,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절망하는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갈등과 절망을 경험하는 게 장애인의 삶에서 마치 일생일대의 분기점이라도 되는 것마냥 미디어에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만약‘이라는 말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빛을 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극대화되는 환상 같은 단어다. 나는 장애에 대해 절망할 시간에 구겨진 책을 다시 소중히 펴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 P54

어쩌면 걸음은 내게 그저 두 발이 교차하며 지면을 밀어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정상‘으로써의 갈망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비장애인처럼 보일‘ 수록 좋다는 가치 평가가 만연하기에, 보행이 가능한 장애인들은 휠체어를 졸업하고 목발이나 지팡이를 짚고, 혹은 걸음을 보조하는 로봇을 차고 걷길 권유받는다. 그것이 자신의 생활과 몸에 잘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휠체어를 탐‘과 ‘걷는 것을 포기함‘이 대응하는 것처럼 여겨져 휠체어를 타지 않거나 그러길 강요받는 이들도 있다. - P58

"그래서 항상 나를 인식할 때, 그리고 유튜버로서의 나를 생각할 때 힘들어질 때가 많아요. 어쩌면 ‘보기 좋은 장애인‘이 아닌가 하고요"라고 내가 말했다. 이 고민은 유튜브를 시작하면서부터 날 괴롭혔다. ‘보기 좋은 장애인‘, ‘잘 팔리는 장애인‘으로서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듣기 좋을 정도의 말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평생을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아온, 적당히 학력도 좋고 적당히 상냥해 보이는 착한 장애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일을 할수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답답함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다. - P59

태균은 대답했다. "아빠는 그래서 지우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구분 짓는게 아니라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 P59

글을 슬프게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지원은 나의 결심을 쉽게 망가뜨리는 인물이다. 게다가 비극의 끝도 너무나 상투적이었다. 현미는 엉엉 우는 나를 안아주고, 전화기를 다시 바꿔 "지원아, 엄마랑 언니 네 밤만 더 자고 갈게.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달랬다. 완벽한 대사다. 고전소설에 등장해도 될 것만 같은 이야기다. - P64

지원을 떠올리다 보면 자꾸만 어릴 적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애는 격하게 부정하지만 나는 꽤 좋은 언니였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동생의 눈높이에 맞춰 그 애를 돌봤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멋지게 써두었는데, 그냥 같이 기어 다녔다는 말이다. 지원이가 막 뒤집기에 성공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의 이동 방식 역시 네발 기기였다. 덕분에 우리 집 바닥에는 기어 다니는 6개월과 일곱 살이 있었다. - P67

그리고 이런 건 절대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또 어떻게든 환승을 하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리프트를 타거나 휠체어로 한 정거장을 굴러 다음 역에서 타든 하면서 대충 살아간다. 그래서 도통 계획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나도 1분 1초를 귀하게 쓰고 싶은데, 이 세상이 자꾸만 나를 리듬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든다. - P83

지하철은 ‘대중교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꾸 대중이라는 말 안에 장애인이 있는 것은 까먹는 모양이다(버스는 아예 모르는 게 확실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혜화역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불법시위‘(역사 안내문의 말을 빌리면 휠체어 승하차)를 막는답시고 역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막아버렸다. 만약 내가 오늘 혜화역에 갈 일이 있었다면, 나는 혜화역에 내렸다가 영문도 모르고 다시 전 역으로 돌아가 한 정거장을 휠체어로 건너고, 지각을 사과하느라 연신 굽신거려야 했을 것이다. - P85

그런데 승강장에 도착해서야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휠체어 리프트는 탑승 30분 전까지 요청해야 하며, 그마저도 연결되는 칸은 휠체어석이 있는 칸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KTX를 개통한 지 20년이 넘었다는데, 어느 칸에나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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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당신"은 트랜스젠더의 건강권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국내 유일무이한 연구보고서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번도 시행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삶과 건강에 대한 설문조사 및 인터뷰, 국내외 자료조사, 관련 의료인 인터뷰 등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차별없는 삶을 살고 차별없는 의료 접근권을 가질 수 있도록 제언한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에서 듣은 휠체어 위의 유투-바 '구르님 김지우'님의 장애인 '오줌권'에 대한 얘기와 이 책의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접근 문제가 겹친다. 구르님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거나, 있더라도 접근이 쉽지 않다며 기본적인 '오줌권'에 대해 강조했는데, 트랜스젠더도 역시 화장실을 편하게 가지 못한다. 트랜스남성이든 트랜스여성이든. 남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여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없다. 당사자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화장실을 참거나, 사람들이 없을 틈을 타서 급하게 다녀온다. 화장실도 맘 편히 갈 수 없는 삶이란. 젠더중립화장실, 가족화장실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정신과 상담,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제거 및 재건 수술) 어느 것 하나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성전환 수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기 형성 수술 뿐만 아니라 성기 제거 수술까지 되어야 성별 정정이 이루어져 사실상 트렌스젠더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이지만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성기 형성 수술은 원하지만 성기 제거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법적 성별을 일치키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김승섭 교수님과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의 노력으로 아마도 작년에 대학병원 최초로 고려대안암병원에 젠더 클리닉이 생기는 좋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책에 나온 추혜인 원장님의 살림의원이나 녹색병원 이외에도 더 많은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병원이 생겨야 한다.


그 동안 의과대학에서 의대생을 위한 성소수자, 트렌스젠더 교육이 거의 전무하다고 언급되었는데, 얼마 전 휴머니스트에서 출판된 "차별 없는 병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개설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강의를 바탕으로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를 담은 책이다. 이제 더 많은 의대에서 관련 강좌가 생겨나야 한다. 의대 차원에서, 학회 차원에서 이런 논의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소수자의 건강권에 대해 계속 연구, 조사하고 있는 김승섭 교수님 및 그 팀을 응원하며,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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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수자들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싸우고 주장하고 해야 얻을 수 있다는게 안타깝네요. 이런 책들이 많이 읽히고 문제제기 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이 모두에게 좀 더 편해져야 할텐데 말이죠. 사실 트렌스젠더 분들이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는건 저도 얼마전에야 알았거든요. 관심이 없으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거겠죠. 반성합니다.

햇살과함께 2022-08-22 17:39   좋아요 1 | URL
이 책 서두에도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도 이 책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관련 책을 보면서 취업 같은 큰 문제 뿐만 아니라 화장실 가는 문제, 은행이나 관공서 등 신분 조회가 필요한 상황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 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을 보려고 합니다~!
 

성별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연구 참여자들은 또래집단 내에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사의 혐오 발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성별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문제시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가시성은 높아져도 낙인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학생들과 어떻게 이야기 나눠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사가 수업시간에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편견에 기반한 발언을 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상황이다. - P68

조금 있으면 성인인데, 성인 되면 좀 병원을 알아봐서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치료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여지가요. 솔직히 그걸 어떤 희망 삼아서 살고 있는데. 진짜 지금은 뭔가 바라볼 데가 있으니까 삶의 끈을 놓지 않는데. 진짜 성인이 되어서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고, 돈 쓰고 하다 보면, 제가 이걸 진짜 놔 버릴지 놓지 않을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깜깜해요. 지금은 막연한 목표가 있으니까 살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되게 진짜 가끔 이런 거 생각을 해 보면 막막해요. 적은 돈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호적정정을 제가 혼자서 진행하면 적어도 20대 중반은 지날 텐데, 호적정정에만 매달리기에 제청춘이 아깝지 않아요? - 트랜스남성 H - P69

저희 부모님은 조금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개방적이에요, 또 네 인생이고, 부모가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로서 그냥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하신 거죠. 엄마도 "물론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정말 생물학적인 거고 바꿀 수 없는 거라면 네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죽는 것보단 낫잖아"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 20대 트랜스남성 M - P77

제가 많이 봤던 케이스는 어릴 때부터 티가 나서 학업을 포기하고, 그냥 이래저래 지내다가 거기서 2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편의점이나 PC방 그런 데를 전전하면서 성전환 수술을 받아서 20대 중반이나 후반에 여성이 되었지만 학력도 낮고 구체적인 능력도 없는 그런 경우요. 두 번째는 업소를 가거나 아니면 조건 만남 같은 걸 하면서 그걸로 번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생활하는 그런 경우요. 이 2가지 경우가 한국에서는가장 많은 거 같아요. - 30대 트랜스여성 D - P82

전형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 패싱은 어려운 일이다.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으로 인해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그 이외의 성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스스로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다른 성별로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중간자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 P96

트랜스젠더 중 사회활동을 하며 한 번의 예외 없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트랜스젠더가 사회 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인의 성별정체성으로 인지되는 패싱의 과정은 이들의 외모나 옷차림, 행동과 습관이 성별정체성과 적절히 부합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지되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의연함으로, 때로는 ‘나‘를 찾아가는 연극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패싱 과정에서 이들이 느끼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었다. - P95

이 보고서에서 의료적 트랜지션과 더불어 중요하게 살펴볼 또 다른 결과는 법적 성별정정과 관련한 내용이다.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하고자 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 수술 여부는 아직까지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인데, 총 233명중 124명(53.2%)이 "외부 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점" 때문에 성별정정을 준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점"(28.3%) 역시 많은 응답자들이 부담으로 느끼는 지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해당 보고서에서는 모든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트랜지션을 원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성별을 정정하려고 할 때 외부 성기 수술 같은 성전환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에게 사실상 국가가 수술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P117

덴마크에서 진행된 코호트 연구는 104명의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 56명, 트랜스남성 48명)를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추적 관찰해,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후의 건강 상태를 비교했다. 연구 결과,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과 후 참여자들의 심혈관계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 등 신체 질환의 유병률과 사망률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 정신 질환의 유병율은 이전보다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스웨덴의 코호트 연구에서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를 30년 동안 추적관찰하여 이들의 사망률 및 정신 질환 발병율을 일반 인구 집단과 비교했다. 연구 결과, 트랜스젠더는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자살할 가능성이 19.1배, 정신 질환으로 입원할 가능성이 2.8배 더 높은 것을 확인했다. - P122

넷째, 국내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가 매우 제한적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임상적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는 주로 성전환 수술, 호르몬 관리 및 검사 등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국외에서는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다양한 임상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가령,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HIV/AIDS와 자궁경부암 검진, 부인과 관련 연구 등이 수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과 낙인 등 부정적인 사회 경험이 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부족하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건강은 앞서 이야기한 차별이나 사회적 지지와 같은 사회적 인자로부터 주요한 영향을 받을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 P123

성소수자 운동의 오랜 슬로건,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We Are Everywhere)‘가 말해 주듯이, 트랜스젠더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계속해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며, 이들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P125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및 성전환 수술을 건강보험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118개국 중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해 총 45개국에서 국가 건강보험이나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한 가지 이상의 의료적 트랜지션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이 중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호르몬 요법만을 보장하는 나라는 6개국, 성전환 수술만을 보장하는나라는 7개국이며, 두 의료적 조치 모두를 보장하는 나라는 총 32개국이다. 한국은 트랜스젠더의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 이 중 어떤 비용도 공공보건의료시스템에서 보장하지 않는다. 기존에 진행된 국내 연구에서는 성소수자가 정부에 바라는 주요 요구사항 중 하나로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 살펴본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비용 부담이 의료적 트랜지션의 가장 큰 장벽으로 드러났다. - P145

한국의 정신과 진단은 국제 표준인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사인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를 기준으로 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따른다. 트랜스젠더가 받는 정신과 진단인 성주체성장애 역시 이와 같은 표준분류에 의거한다. 성주체성장애 진단은 과거 개인의 성별정체성을 정신장애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따라 ICD-11에서는 기존에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분류되었던 성주체성장애를 성적 건강과 관련 있는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로 분류하고, 진단명을성별부조화(Gender incongruence)로 수정할 것이 제안되었다.
2018년6월 18일, 세계보건기구는 그 제안을 수용해 ICD-11에서 트랜스젠더 정체성 항목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 P149

의학 전문가들은 의료적 트랜지션을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이나 실험적 시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료보장이 필요한 의료적 조치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트랜스젠더 보건의료 전문가 협회는 트랜스젠더 의료표준을 발간하여 보건의료 전문가에게 임상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호르몬 요법과 성전환 수술은 트랜스젠더의 성별위화감 해결에 필수적인 의료적 조치다. 미국의학협회 또한 2008년도 결의안을 통해 의료적 트랜지션의 효과를 인정하며, 이를 공공 및 민간의료보험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159

2016년 기준으로, 국내 병원 및 의원 수는 64,999개이고 여기에 종사하는 의료인 수는 606,182명에 달한다. 현재 정규 의학 교육에 트랜스젠더와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트랜스젠더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이 부족하다. - P164

"병원에서 우리를 환자로 보는 게 아니라 돈으로 보더라도, 서비스를잘하면 상관없는데, ‘너희는 우리 병원 아니면 갈 데 없잖아. 우리가 너희한테 해 주는 거야‘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뭔가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병역 문제 관련해서 호르몬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증명서를 받아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안 떼 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들도 찔려서 뭔가 문제가 생길까봐 그런 것 같아요." (20대 트랜스여성 A) - P169

"누군가는 트랜스젠더 진료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료하는 곳은 안전했으면 좋겠고, 진료를 하는 의사도 믿을 만하면 좋겠다. 트랜스젠더인 자신이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당시 나는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치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친구에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해 의과대학에서 배운 적도 없고, 가정의학과 수련을 받을 때도 배운 적이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어차피 다른 의사들도 다 몰라, 어차피 다 모르는 거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공부해서 진료해 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 P183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면, 사실 만성 질환을 관리하는 것과 동일하다. 호르몬 치료는 젊었을 때 잠깐 하는 게 아니라 50대가 되어서도 계속 필요한 치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만성 질환이 발생할 수있고, 호르몬 치료가 흔히 성인병이라고 하는 고혈압, 당뇨, 간질환같은 만성 질환들의 발병률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호르몬 치료에만 관심을 가지고, 호르몬 치료에 동반되는 다른 건강위험요인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교육과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맨날 술 줄이고 담배 끊고 운동하고 물 많이 마시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이런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의사를 만나는 건 꼭 필요하다. - P187

이렇게 화장실을 만들고 보니, 트랜스젠더만이 아닌 다른 환자들도 편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살림의원에는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등 소아환자와 보호자의 성별이 다른 내원객이 많은데, 만약 아이가 뒤처리를 혼자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보호자가 동행해야 된다. 그렇다면 아빠가 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남/녀로 구분되어 있으면, 어느 화장실로 가야할지 고민이 될 수 있다. 살림의원에 오는 분들은 아이를 데리고 가족 화장실로 가면 된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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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
성주체성장애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1980년에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DSM-III)에 아동기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of childhood)와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재되었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은 이후 청소년과 성인의 성주체성장애에 대한 진단명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성주체성장애라는 진단명은 ‘장애’라는 표현으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병리화하고, 트랜스젠더에게 정신장애라는 낙인을 추가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P10

이에 따라, 2013년 개정된 DSM-5에서 성주체성장애는 성별위화감으로 바뀌었다. 성별위화감은 출생 시의 법적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불일치함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 또는 위화감을 가리킨다. 성별위화감이라는 진단명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자체는 장애가 아니며,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것은 성별위화감으로 인해 트랜스젠더 본인이 느끼는 고통임을 강조한다. - P11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 - P18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는 과정은 모든 게 새로웠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고 그 뜻을 배워야 했던 면도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그 고정관념을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로서 쓴수많은 논문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는 남과 여로 고정된 것이었으니까.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 P19

연구실 학생들과 연구를 기획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할 때, 충분한 사전 검토와 고민이 없으면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동안 소방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조사나 전공의 근무 환경조사 같은 여러 연구를 진행하면서 애초 의도했던 계획이 실패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학생들이 막연히 궁금한 내용을 설문 문항에 포함시키도록 허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해서는 아직 설문조사를 진행할 만큼 당시 우리의 고민과 공부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았다. - P23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이 글을 논문으로 받아 줄 학술지가 있을까요?" 학생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이 한국 사회에 학술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는 점은 확신하지? 그러면 믿고 가자. 그런 글은 학술지가 분명 알아볼 거야." - P26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좀 더 준비를 하며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부족함을 감수하며 현재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의 연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만약 우리 연구가 세계의 구성원리를 파악하는 물리학 연구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건학은 인구 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응용학문이다.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집단은 그 공동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현재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방법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 P29

준비해 간 연구팀 소개글과 연재글을 보여 줬을 때 매니저분은 "대학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시죠?"라고 말하고는 우리의 눈을 피했다. 이혜민 선생님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희 글이 그 정도로 이상한가요?" 매니저분은 글이 나쁜 건 아닌데 많은 분들이 핸드폰으로 보실 텐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라고 했다. 나름 부드럽게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연구자스러운 글이었던 것이다. - P31

2017년 3월 23일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 우리가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대안적인 연구 형태로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던 우리의 여정이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받은 것 같았다. - P33

2016년 12월 <청소년 건강 학술지(Journal of Adolescent Health)》에 실린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와 하버드대의 공동연구였다. 10대 트랜스젠더 73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기 전에, 난자·정자 보관(Fertilitypreservation)을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것이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는데,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하고 나면 자신의 난자와 정자로 아이를 갖기 어려우니 그 전에 난자와 정자를 추출해서 보관해 놓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조사한 연구였다. 연구에 참여한 73명 중 72명이 난자·정자 보관 상담을 했고, 2명은 실제로 난자·정자 보관을 했으며, 45%는 나중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야 나는 트랜스젠더의 가족구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 P36

몇몇 분들이 "그냥 브로슈어를 보내시지, 부담스럽게 교수님이 직접 오셨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부담드리려고요. 도와주세요.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데이터 수집이 끝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병원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반쪽짜리 설문조사가 될 뻔했다. - P38

그러나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체성을 두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적 기호‘라는 잘못된 단어로 표현하거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의료적 조치를 ‘미용성형‘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한국의 의과대학 교육 과정과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는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실력이 좋은 의사에게 수술받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태국에서 수술받고 한국에 돌아온 뒤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대책이 마땅치 않았다. - P44

의료적 트랜지션을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시키는 결정은,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역사를 감당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그들에게 한국 사회가 보내는 작은 전언이 될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에 무지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겠다고. 늦었지만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겠다고. 그러니 당신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 P46

"저도 사실 법적 성별정정 때문에 수술을 한 거라서. 수술 없이도 가능했다면 저도 수술을 안 하고 정정하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어차피 생식기를 뭐 보여 주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거고." (20대 젠더퀴어 K) - P51

"한국에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2013년, 청소년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를 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낯설게 느끼고, ‘청소년기에도 성전환 수술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성전환 수술과 같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회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긴 고민과 협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다수 트랜스젠더는 아동기나 청소년기 - P54

에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깨닫고 형성하며 성장한다. 또한 자신의 성별정체성으로 인해 가족이나 또래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 때론 폭력을 경험하며, 의료적 트랜지션과 법적 성별정정을 비롯해 미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P55

연구 참여자들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으로 몸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나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막연하게 갖고 있던 다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자기인식과 충돌하며, 불안과 불편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어린 시절 "자고 일어나면"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트랜스여성F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의 데뷔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실제 존재하며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 P59

처음 생리가 왔을 땐 어땠어요? 아, 키는 망했구나 했죠. - 트랜스남성 D - P60

연구 참여자들에게 청소년기에 찾아온 2차 성징은 다른 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본인이 깨달았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이들은 이미 어딘가 ‘달랐지만’, 몸의 2차 성징으로 인해 더욱 ‘달라졌고’, 따라서 이 차이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 채 현실로 소환되었다. ‘나는 누구‘라는 말을 찾기 위해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도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쉽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의 성별을 둘 - P61

러싼 경합과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무엇이 아닌‘ 나를 넘어 ‘나는 누구다‘라는 감정을 형성하고 스스로 명명하는 행위는, 연구 참여자들이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62

주로 방과 후까지 화장실 가는 걸 다 참고 학교에서 나간 다음에 해결을 한다거나, 아니면 수업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체육시간 같을 때에 자유시간을 준다 그러거나 하면 그때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 안 가니까. 그런 식으로 다들 안 들어가는 시간에 해결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 트랜스여성 A - P62

중학교 때 조용히 지냈던 편인데, 그때도 상담 선생님과 말을 해 본 적이 있었어요. "제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예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할 거다라고 설명을 드리면서……, 제 입장에서는 설명을 잘 드린 거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딱 한마디를 했어요. "이 개새끼……" 따졌죠. 제가……… 왜 개새끼냐고요. 그러니까 "니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 종교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 종교인데, 내가 어떻게너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 이러시더라고요. - 트랜스여성 E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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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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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의 다름에 고민이 있거나, 아직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는 10대들이 주인공인 청소년 퀴어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너도 곧 받아들이게 될 거야˝ 라고 말해주며 용기와 응원의 손길을 내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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