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장애인 대표로서 어떤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나?"라고. 나는 그 질문에 늘 당황하고 만다. 대표 자리에 올라가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는 나를 그 자리에 앉혀버리곤 한다. ‘대표‘의 자리에 쉽게 올려지는 것은 대단한 권리인 동시에, 사회적 소수자에겐 그 자체로 소수자성을 재확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이야기를 했을 뿐임에도 사회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이유로(그것은 대부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는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뿐이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대표의 말하기가 되는 것이다. - P8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순간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우당탕탕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글을 읽다가 자꾸만 울고 싶거나 성찰하고 싶다면 책을 덮고 잠깐 산책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개그를 해본답시고 쓴 건데 재미가 없거나(그렇다면 사과한다) 아니면 이제까지 ‘대표‘의 글을 소화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사회적인 관념이 자꾸만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를 일깨우거나 반성하게 만드는 역할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 많은 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지 않고 책갈피 사이로 들어오길 희망한다. - P9

현미는 어떤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어디라도 찾아 나섰다.

**장애는 완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나아진다‘는 말은, 종종 ‘비장애인과 비슷해진다‘는 욕망을 함축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서 ‘나아짐‘이라 함은 ‘걷게 됨‘이었다. 내가 받은 여러치료의 목적이 ‘조금 더 예쁘게 걷기, 오래 서 있기’에 맞춰져 있던 것처럼. 그때 현미와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조금 더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것보다 기쁜게 없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내 몸을 좀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다. 걷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한다. - P18

그렇게 현미는 서른의 시작부터 마흔을 훌쩍 넘어서까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 현미에게 언젠가 나는 ‘좋아지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오랜 시간 내 몸과 마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걸음을 연습하는 것보다, 걷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우선이라고 느꼈다. 이미 60대의 그것이 된 관절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하고 몸을 바꿔가며 혼자 걷게 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현미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조금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나중에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조금 화를 냈다. - P19

하지만 난 정말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 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장애인 되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운동하고 싶었다. - P20

나 때문에 거부를 경험한 비장애인은 전 애인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 거부의 시초에 현미가 있었다. 나는 순진하고 어렸을 20년 전의 현미를 떠올린다. 갑자기 삶에 떨어진 ‘장애‘를 가진 나로 인해, 이전까진 경험해보지 못한 거부를 온몸으로 감내했을 그를 상상해본다. - P22

때로는 창피하고 무서워서 내가 엉엉 울며 말리더라도 현미는 일단 싸우고봤다. 나를 키우는 건 싸움의 연속이었다. 현미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활동가가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 P23

그때 현미가 말했다.
"어우 씨, 진짜 한 대 칠 뻔했네."
그렇게 그 문장은 내 마음속에 남아 부당함을 마주할 때 튀어나오곤 한다. 현미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장애를 숨기거나 집 안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대 때릴‘ 기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말은 내게 숨을 필요 없다고, 여차하면 그냥 ‘한 대 때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잘못은 내 존재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 P25

현미 허락받고 가지 않았나? 몰라, 몰라. 기억이 안 나. 이런 거 쓰면 안 된다. (잠시 정적) 술도 몰래몰래 닭발이랑 시켜가지고 받아서 먹기도 하고. 엄마 술 걸려서 뺏기기도 하고 그랬어. (함께 웃음) 근데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런 간호사들도 있었지. 왜냐하면 엄마들이 정말 애들한테 거의 매여 있으니까, 하루 종일 그러니까 "안 걸리게 잘하세요" 뭐 이런 간호사 선생님도 있고…… 하여튼 이런 거 쓰면 안 될 텐데. 보바스(병원이름)에서는 골뱅이 요리 잘하는 애가 있어서 골뱅이 무치고 쫄면 해서 나눠 먹고. 저녁 시간에 같이 둘러앉아가지고. - P35

카카오 웹툰 <열무와 알타리>와 네이버 베스트도전 <제제와 함께>처럼, 장애아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들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안에 납작한 인물은 없다. 또 확실한 비극이나 희극도 없다. 그저 살아남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분명 누군가는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읽고 또 살아갈 것이다. - P37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그 ‘관계‘로만 삶이 설명될 때가 많다. 장애인의 엄마, 장애인의 형제, 장애인의 친구처럼. 물론 관계로서의 인간도 아주 중요하지만, 종종 그것에 너무나 매몰되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곤 한다. 나 역시 이번 인터뷰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현미의 용기와 사람을 살리는 살림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현미는 나를 빼고도 충분히 다른 존재들을 살릴 수 있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다. - P39

나 역시,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그 낯익은 단어가
귀를 울리고 가슴을 찢어놓는 거 같았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어쩌란 말인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 가족은 abnormal한 삶 속으로
빠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 abnormal한 case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건지…….….
난 정말 알수가 없었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작성자 태균 2005.04.25 - P45

태균은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 내가 몸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쉽게도(?) 태균이 내게 사과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몸에 대해 절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태균이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에 갇혀 원망할 대상을 찾아다녔던 순간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평화를. - P50

어쩌면 장애인들은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갈등에 빠지는 것을,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절망하는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갈등과 절망을 경험하는 게 장애인의 삶에서 마치 일생일대의 분기점이라도 되는 것마냥 미디어에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만약‘이라는 말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빛을 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극대화되는 환상 같은 단어다. 나는 장애에 대해 절망할 시간에 구겨진 책을 다시 소중히 펴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 P54

어쩌면 걸음은 내게 그저 두 발이 교차하며 지면을 밀어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정상‘으로써의 갈망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비장애인처럼 보일‘ 수록 좋다는 가치 평가가 만연하기에, 보행이 가능한 장애인들은 휠체어를 졸업하고 목발이나 지팡이를 짚고, 혹은 걸음을 보조하는 로봇을 차고 걷길 권유받는다. 그것이 자신의 생활과 몸에 잘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휠체어를 탐‘과 ‘걷는 것을 포기함‘이 대응하는 것처럼 여겨져 휠체어를 타지 않거나 그러길 강요받는 이들도 있다. - P58

"그래서 항상 나를 인식할 때, 그리고 유튜버로서의 나를 생각할 때 힘들어질 때가 많아요. 어쩌면 ‘보기 좋은 장애인‘이 아닌가 하고요"라고 내가 말했다. 이 고민은 유튜브를 시작하면서부터 날 괴롭혔다. ‘보기 좋은 장애인‘, ‘잘 팔리는 장애인‘으로서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듣기 좋을 정도의 말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평생을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아온, 적당히 학력도 좋고 적당히 상냥해 보이는 착한 장애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일을 할수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답답함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다. - P59

태균은 대답했다. "아빠는 그래서 지우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구분 짓는게 아니라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 P59

글을 슬프게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지원은 나의 결심을 쉽게 망가뜨리는 인물이다. 게다가 비극의 끝도 너무나 상투적이었다. 현미는 엉엉 우는 나를 안아주고, 전화기를 다시 바꿔 "지원아, 엄마랑 언니 네 밤만 더 자고 갈게.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달랬다. 완벽한 대사다. 고전소설에 등장해도 될 것만 같은 이야기다. - P64

지원을 떠올리다 보면 자꾸만 어릴 적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애는 격하게 부정하지만 나는 꽤 좋은 언니였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동생의 눈높이에 맞춰 그 애를 돌봤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멋지게 써두었는데, 그냥 같이 기어 다녔다는 말이다. 지원이가 막 뒤집기에 성공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의 이동 방식 역시 네발 기기였다. 덕분에 우리 집 바닥에는 기어 다니는 6개월과 일곱 살이 있었다. - P67

그리고 이런 건 절대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또 어떻게든 환승을 하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리프트를 타거나 휠체어로 한 정거장을 굴러 다음 역에서 타든 하면서 대충 살아간다. 그래서 도통 계획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나도 1분 1초를 귀하게 쓰고 싶은데, 이 세상이 자꾸만 나를 리듬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든다. - P83

지하철은 ‘대중교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꾸 대중이라는 말 안에 장애인이 있는 것은 까먹는 모양이다(버스는 아예 모르는 게 확실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혜화역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불법시위‘(역사 안내문의 말을 빌리면 휠체어 승하차)를 막는답시고 역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막아버렸다. 만약 내가 오늘 혜화역에 갈 일이 있었다면, 나는 혜화역에 내렸다가 영문도 모르고 다시 전 역으로 돌아가 한 정거장을 휠체어로 건너고, 지각을 사과하느라 연신 굽신거려야 했을 것이다. - P85

그런데 승강장에 도착해서야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휠체어 리프트는 탑승 30분 전까지 요청해야 하며, 그마저도 연결되는 칸은 휠체어석이 있는 칸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KTX를 개통한 지 20년이 넘었다는데, 어느 칸에나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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