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당신"은 트랜스젠더의 건강권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국내 유일무이한 연구보고서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번도 시행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삶과 건강에 대한 설문조사 및 인터뷰, 국내외 자료조사, 관련 의료인 인터뷰 등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차별없는 삶을 살고 차별없는 의료 접근권을 가질 수 있도록 제언한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에서 듣은 휠체어 위의 유투-바 '구르님 김지우'님의 장애인 '오줌권'에 대한 얘기와 이 책의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접근 문제가 겹친다. 구르님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거나, 있더라도 접근이 쉽지 않다며 기본적인 '오줌권'에 대해 강조했는데, 트랜스젠더도 역시 화장실을 편하게 가지 못한다. 트랜스남성이든 트랜스여성이든. 남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여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없다. 당사자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화장실을 참거나, 사람들이 없을 틈을 타서 급하게 다녀온다. 화장실도 맘 편히 갈 수 없는 삶이란. 젠더중립화장실, 가족화장실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정신과 상담,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제거 및 재건 수술) 어느 것 하나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성전환 수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기 형성 수술 뿐만 아니라 성기 제거 수술까지 되어야 성별 정정이 이루어져 사실상 트렌스젠더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이지만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성기 형성 수술은 원하지만 성기 제거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법적 성별을 일치키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김승섭 교수님과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의 노력으로 아마도 작년에 대학병원 최초로 고려대안암병원에 젠더 클리닉이 생기는 좋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책에 나온 추혜인 원장님의 살림의원이나 녹색병원 이외에도 더 많은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병원이 생겨야 한다.


그 동안 의과대학에서 의대생을 위한 성소수자, 트렌스젠더 교육이 거의 전무하다고 언급되었는데, 얼마 전 휴머니스트에서 출판된 "차별 없는 병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개설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강의를 바탕으로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를 담은 책이다. 이제 더 많은 의대에서 관련 강좌가 생겨나야 한다. 의대 차원에서, 학회 차원에서 이런 논의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소수자의 건강권에 대해 계속 연구, 조사하고 있는 김승섭 교수님 및 그 팀을 응원하며,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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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수자들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싸우고 주장하고 해야 얻을 수 있다는게 안타깝네요. 이런 책들이 많이 읽히고 문제제기 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이 모두에게 좀 더 편해져야 할텐데 말이죠. 사실 트렌스젠더 분들이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는건 저도 얼마전에야 알았거든요. 관심이 없으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거겠죠. 반성합니다.

햇살과함께 2022-08-22 17:39   좋아요 1 | URL
이 책 서두에도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도 이 책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관련 책을 보면서 취업 같은 큰 문제 뿐만 아니라 화장실 가는 문제, 은행이나 관공서 등 신분 조회가 필요한 상황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 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을 보려고 합니다~!
 

성별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연구 참여자들은 또래집단 내에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사의 혐오 발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성별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문제시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가시성은 높아져도 낙인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학생들과 어떻게 이야기 나눠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사가 수업시간에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편견에 기반한 발언을 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상황이다. - P68

조금 있으면 성인인데, 성인 되면 좀 병원을 알아봐서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치료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여지가요. 솔직히 그걸 어떤 희망 삼아서 살고 있는데. 진짜 지금은 뭔가 바라볼 데가 있으니까 삶의 끈을 놓지 않는데. 진짜 성인이 되어서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고, 돈 쓰고 하다 보면, 제가 이걸 진짜 놔 버릴지 놓지 않을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깜깜해요. 지금은 막연한 목표가 있으니까 살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되게 진짜 가끔 이런 거 생각을 해 보면 막막해요. 적은 돈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호적정정을 제가 혼자서 진행하면 적어도 20대 중반은 지날 텐데, 호적정정에만 매달리기에 제청춘이 아깝지 않아요? - 트랜스남성 H - P69

저희 부모님은 조금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개방적이에요, 또 네 인생이고, 부모가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로서 그냥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하신 거죠. 엄마도 "물론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정말 생물학적인 거고 바꿀 수 없는 거라면 네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죽는 것보단 낫잖아"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 20대 트랜스남성 M - P77

제가 많이 봤던 케이스는 어릴 때부터 티가 나서 학업을 포기하고, 그냥 이래저래 지내다가 거기서 2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편의점이나 PC방 그런 데를 전전하면서 성전환 수술을 받아서 20대 중반이나 후반에 여성이 되었지만 학력도 낮고 구체적인 능력도 없는 그런 경우요. 두 번째는 업소를 가거나 아니면 조건 만남 같은 걸 하면서 그걸로 번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생활하는 그런 경우요. 이 2가지 경우가 한국에서는가장 많은 거 같아요. - 30대 트랜스여성 D - P82

전형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 패싱은 어려운 일이다.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으로 인해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그 이외의 성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스스로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다른 성별로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중간자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 P96

트랜스젠더 중 사회활동을 하며 한 번의 예외 없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트랜스젠더가 사회 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인의 성별정체성으로 인지되는 패싱의 과정은 이들의 외모나 옷차림, 행동과 습관이 성별정체성과 적절히 부합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지되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의연함으로, 때로는 ‘나‘를 찾아가는 연극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패싱 과정에서 이들이 느끼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었다. - P95

이 보고서에서 의료적 트랜지션과 더불어 중요하게 살펴볼 또 다른 결과는 법적 성별정정과 관련한 내용이다.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하고자 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 수술 여부는 아직까지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인데, 총 233명중 124명(53.2%)이 "외부 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점" 때문에 성별정정을 준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점"(28.3%) 역시 많은 응답자들이 부담으로 느끼는 지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해당 보고서에서는 모든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트랜지션을 원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성별을 정정하려고 할 때 외부 성기 수술 같은 성전환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에게 사실상 국가가 수술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P117

덴마크에서 진행된 코호트 연구는 104명의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 56명, 트랜스남성 48명)를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추적 관찰해,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후의 건강 상태를 비교했다. 연구 결과,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과 후 참여자들의 심혈관계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 등 신체 질환의 유병률과 사망률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 정신 질환의 유병율은 이전보다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스웨덴의 코호트 연구에서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를 30년 동안 추적관찰하여 이들의 사망률 및 정신 질환 발병율을 일반 인구 집단과 비교했다. 연구 결과, 트랜스젠더는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자살할 가능성이 19.1배, 정신 질환으로 입원할 가능성이 2.8배 더 높은 것을 확인했다. - P122

넷째, 국내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가 매우 제한적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임상적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는 주로 성전환 수술, 호르몬 관리 및 검사 등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국외에서는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다양한 임상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가령,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HIV/AIDS와 자궁경부암 검진, 부인과 관련 연구 등이 수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과 낙인 등 부정적인 사회 경험이 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부족하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건강은 앞서 이야기한 차별이나 사회적 지지와 같은 사회적 인자로부터 주요한 영향을 받을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 P123

성소수자 운동의 오랜 슬로건,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We Are Everywhere)‘가 말해 주듯이, 트랜스젠더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계속해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며, 이들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P125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및 성전환 수술을 건강보험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118개국 중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해 총 45개국에서 국가 건강보험이나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한 가지 이상의 의료적 트랜지션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이 중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호르몬 요법만을 보장하는 나라는 6개국, 성전환 수술만을 보장하는나라는 7개국이며, 두 의료적 조치 모두를 보장하는 나라는 총 32개국이다. 한국은 트랜스젠더의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 이 중 어떤 비용도 공공보건의료시스템에서 보장하지 않는다. 기존에 진행된 국내 연구에서는 성소수자가 정부에 바라는 주요 요구사항 중 하나로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 살펴본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비용 부담이 의료적 트랜지션의 가장 큰 장벽으로 드러났다. - P145

한국의 정신과 진단은 국제 표준인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사인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를 기준으로 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따른다. 트랜스젠더가 받는 정신과 진단인 성주체성장애 역시 이와 같은 표준분류에 의거한다. 성주체성장애 진단은 과거 개인의 성별정체성을 정신장애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따라 ICD-11에서는 기존에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분류되었던 성주체성장애를 성적 건강과 관련 있는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로 분류하고, 진단명을성별부조화(Gender incongruence)로 수정할 것이 제안되었다.
2018년6월 18일, 세계보건기구는 그 제안을 수용해 ICD-11에서 트랜스젠더 정체성 항목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 P149

의학 전문가들은 의료적 트랜지션을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이나 실험적 시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료보장이 필요한 의료적 조치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트랜스젠더 보건의료 전문가 협회는 트랜스젠더 의료표준을 발간하여 보건의료 전문가에게 임상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호르몬 요법과 성전환 수술은 트랜스젠더의 성별위화감 해결에 필수적인 의료적 조치다. 미국의학협회 또한 2008년도 결의안을 통해 의료적 트랜지션의 효과를 인정하며, 이를 공공 및 민간의료보험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159

2016년 기준으로, 국내 병원 및 의원 수는 64,999개이고 여기에 종사하는 의료인 수는 606,182명에 달한다. 현재 정규 의학 교육에 트랜스젠더와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트랜스젠더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이 부족하다. - P164

"병원에서 우리를 환자로 보는 게 아니라 돈으로 보더라도, 서비스를잘하면 상관없는데, ‘너희는 우리 병원 아니면 갈 데 없잖아. 우리가 너희한테 해 주는 거야‘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뭔가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병역 문제 관련해서 호르몬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증명서를 받아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안 떼 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들도 찔려서 뭔가 문제가 생길까봐 그런 것 같아요." (20대 트랜스여성 A) - P169

"누군가는 트랜스젠더 진료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료하는 곳은 안전했으면 좋겠고, 진료를 하는 의사도 믿을 만하면 좋겠다. 트랜스젠더인 자신이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당시 나는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치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친구에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해 의과대학에서 배운 적도 없고, 가정의학과 수련을 받을 때도 배운 적이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어차피 다른 의사들도 다 몰라, 어차피 다 모르는 거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공부해서 진료해 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 P183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면, 사실 만성 질환을 관리하는 것과 동일하다. 호르몬 치료는 젊었을 때 잠깐 하는 게 아니라 50대가 되어서도 계속 필요한 치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만성 질환이 발생할 수있고, 호르몬 치료가 흔히 성인병이라고 하는 고혈압, 당뇨, 간질환같은 만성 질환들의 발병률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호르몬 치료에만 관심을 가지고, 호르몬 치료에 동반되는 다른 건강위험요인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교육과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맨날 술 줄이고 담배 끊고 운동하고 물 많이 마시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이런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의사를 만나는 건 꼭 필요하다. - P187

이렇게 화장실을 만들고 보니, 트랜스젠더만이 아닌 다른 환자들도 편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살림의원에는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등 소아환자와 보호자의 성별이 다른 내원객이 많은데, 만약 아이가 뒤처리를 혼자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보호자가 동행해야 된다. 그렇다면 아빠가 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남/녀로 구분되어 있으면, 어느 화장실로 가야할지 고민이 될 수 있다. 살림의원에 오는 분들은 아이를 데리고 가족 화장실로 가면 된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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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
성주체성장애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1980년에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DSM-III)에 아동기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of childhood)와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재되었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은 이후 청소년과 성인의 성주체성장애에 대한 진단명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성주체성장애라는 진단명은 ‘장애’라는 표현으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병리화하고, 트랜스젠더에게 정신장애라는 낙인을 추가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P10

이에 따라, 2013년 개정된 DSM-5에서 성주체성장애는 성별위화감으로 바뀌었다. 성별위화감은 출생 시의 법적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불일치함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 또는 위화감을 가리킨다. 성별위화감이라는 진단명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자체는 장애가 아니며,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것은 성별위화감으로 인해 트랜스젠더 본인이 느끼는 고통임을 강조한다. - P11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 - P18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는 과정은 모든 게 새로웠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고 그 뜻을 배워야 했던 면도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그 고정관념을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로서 쓴수많은 논문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는 남과 여로 고정된 것이었으니까.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 P19

연구실 학생들과 연구를 기획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할 때, 충분한 사전 검토와 고민이 없으면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동안 소방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조사나 전공의 근무 환경조사 같은 여러 연구를 진행하면서 애초 의도했던 계획이 실패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학생들이 막연히 궁금한 내용을 설문 문항에 포함시키도록 허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해서는 아직 설문조사를 진행할 만큼 당시 우리의 고민과 공부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았다. - P23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이 글을 논문으로 받아 줄 학술지가 있을까요?" 학생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이 한국 사회에 학술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는 점은 확신하지? 그러면 믿고 가자. 그런 글은 학술지가 분명 알아볼 거야." - P26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좀 더 준비를 하며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부족함을 감수하며 현재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의 연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만약 우리 연구가 세계의 구성원리를 파악하는 물리학 연구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건학은 인구 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응용학문이다.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집단은 그 공동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현재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방법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 P29

준비해 간 연구팀 소개글과 연재글을 보여 줬을 때 매니저분은 "대학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시죠?"라고 말하고는 우리의 눈을 피했다. 이혜민 선생님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희 글이 그 정도로 이상한가요?" 매니저분은 글이 나쁜 건 아닌데 많은 분들이 핸드폰으로 보실 텐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라고 했다. 나름 부드럽게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연구자스러운 글이었던 것이다. - P31

2017년 3월 23일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 우리가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대안적인 연구 형태로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던 우리의 여정이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받은 것 같았다. - P33

2016년 12월 <청소년 건강 학술지(Journal of Adolescent Health)》에 실린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와 하버드대의 공동연구였다. 10대 트랜스젠더 73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기 전에, 난자·정자 보관(Fertilitypreservation)을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것이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는데,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하고 나면 자신의 난자와 정자로 아이를 갖기 어려우니 그 전에 난자와 정자를 추출해서 보관해 놓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조사한 연구였다. 연구에 참여한 73명 중 72명이 난자·정자 보관 상담을 했고, 2명은 실제로 난자·정자 보관을 했으며, 45%는 나중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야 나는 트랜스젠더의 가족구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 P36

몇몇 분들이 "그냥 브로슈어를 보내시지, 부담스럽게 교수님이 직접 오셨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부담드리려고요. 도와주세요.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데이터 수집이 끝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병원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반쪽짜리 설문조사가 될 뻔했다. - P38

그러나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체성을 두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적 기호‘라는 잘못된 단어로 표현하거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의료적 조치를 ‘미용성형‘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한국의 의과대학 교육 과정과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는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실력이 좋은 의사에게 수술받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태국에서 수술받고 한국에 돌아온 뒤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대책이 마땅치 않았다. - P44

의료적 트랜지션을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시키는 결정은,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역사를 감당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그들에게 한국 사회가 보내는 작은 전언이 될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에 무지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겠다고. 늦었지만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겠다고. 그러니 당신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 P46

"저도 사실 법적 성별정정 때문에 수술을 한 거라서. 수술 없이도 가능했다면 저도 수술을 안 하고 정정하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어차피 생식기를 뭐 보여 주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거고." (20대 젠더퀴어 K) - P51

"한국에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2013년, 청소년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를 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낯설게 느끼고, ‘청소년기에도 성전환 수술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성전환 수술과 같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회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긴 고민과 협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다수 트랜스젠더는 아동기나 청소년기 - P54

에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깨닫고 형성하며 성장한다. 또한 자신의 성별정체성으로 인해 가족이나 또래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 때론 폭력을 경험하며, 의료적 트랜지션과 법적 성별정정을 비롯해 미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P55

연구 참여자들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으로 몸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나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막연하게 갖고 있던 다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자기인식과 충돌하며, 불안과 불편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어린 시절 "자고 일어나면"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트랜스여성F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의 데뷔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실제 존재하며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 P59

처음 생리가 왔을 땐 어땠어요? 아, 키는 망했구나 했죠. - 트랜스남성 D - P60

연구 참여자들에게 청소년기에 찾아온 2차 성징은 다른 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본인이 깨달았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이들은 이미 어딘가 ‘달랐지만’, 몸의 2차 성징으로 인해 더욱 ‘달라졌고’, 따라서 이 차이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 채 현실로 소환되었다. ‘나는 누구‘라는 말을 찾기 위해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도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쉽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의 성별을 둘 - P61

러싼 경합과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무엇이 아닌‘ 나를 넘어 ‘나는 누구다‘라는 감정을 형성하고 스스로 명명하는 행위는, 연구 참여자들이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62

주로 방과 후까지 화장실 가는 걸 다 참고 학교에서 나간 다음에 해결을 한다거나, 아니면 수업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체육시간 같을 때에 자유시간을 준다 그러거나 하면 그때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 안 가니까. 그런 식으로 다들 안 들어가는 시간에 해결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 트랜스여성 A - P62

중학교 때 조용히 지냈던 편인데, 그때도 상담 선생님과 말을 해 본 적이 있었어요. "제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예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할 거다라고 설명을 드리면서……, 제 입장에서는 설명을 잘 드린 거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딱 한마디를 했어요. "이 개새끼……" 따졌죠. 제가……… 왜 개새끼냐고요. 그러니까 "니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 종교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 종교인데, 내가 어떻게너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 이러시더라고요. - 트랜스여성 E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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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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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의 다름에 고민이 있거나, 아직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는 10대들이 주인공인 청소년 퀴어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너도 곧 받아들이게 될 거야˝ 라고 말해주며 용기와 응원의 손길을 내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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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은 우산의 투명 비닐 밖에 펼쳐진 축축한 회색 풍경을 바라봤다. 모자가 필요한 날씨다. 검정 야구모자와 헤어 젤. 로빈은 둘 다 쓰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는 뭘 해도 소용이 없다.
"바보같이 외모 걱정을 왜 해? 생각만 바꾸면 비의 생명력이 내 것이 되는데!"
로빈의 엄마가 늘 하던 말이다. 로빈이 궂은 날씨를 싫어하는 마음과 거의 비슷하게 엄마는 폭풍우를 좋아했다. - P65

누군가 걱정을 하면, 로빈의 아빠는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도 50퍼센트지"라고 말하곤 했다. 로빈의 엄마는 그 말을 정말 좋아했다. 요즘 아빠는 그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50퍼센트의 불행이 닥쳤을 때도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믿기는 힘들다. 그래도 시벨을 자기 의지로 거부한 건 잘한 일이었다. 경험을 쌓고 싶지만 아무한테나 목매달고 싶진 않았다. - P84

위니는 토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내가 네 아빠라면 좋겠다."
"우리 서로 아빠가 되어 주면 되지."
둘은 서로에게 엄마이기도 했다. 늘 서로 밥은 먹었는지,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 챙겨 주었다. 한번은 토미가 위니에게 스케이트보드 기술을 가르쳐 주다가 말했다.
"넌 내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아들이야."
위니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좋았다. - P9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인종도 성별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아." - P99

"우리 엄마가 그 사람들 편을 드는 건 그 사람들도 권리가 있어서래. 너도 들었잖아. 우리 아빠랑 결혼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 편을 드는 거야."
"네 아빠랑 결혼한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이번에는 내가 짜증이 났어.
"우리 아빠 흑인인 거 까먹었냐?"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마리아를 바라보고는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렸어. 작은 파도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 쪽으로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어. 마리아가 말했어.
"아, 그런 거였구나."
"우리 엄만 상관 안 할 거야." - P124

로이스 라우리 Lois Lowry
나는 1937년에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살았고, 중학교는 도쿄, 고등학교는 뉴욕, 대학교는 로드아일랜드에서 다녔습니다. 결혼하면서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코네티컷, 사우스캐롤라이나, 매사추세츠, 메인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다가 1979년에 이혼하고 난 뒤로는 보스턴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은 아주 평온합니다. 주중에는 도시에서 살고, 주말은 시골에서 보냅니다. 나는 책과 꽃, 개, 영화, 음악을 좋아합니다. 같이 사는 남자는 유머 감각이 넘치며 해리 트루먼을 영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아들과 딸이 둘씩 있는데, 이제는 모두 다 컸습니다. 넷 다 눈이 파랗고 혈액형이 Rh 음성입니다. 그리고 모두 유머 감각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닮은 점은 그게 전부입니다. 둘은 곱슬머리이고, 둘은 아닙니다(한 아이는 한때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셋은 기혼인데 그중 하나는 두 번째 결혼입니다. 한 아이는 아직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하나는 공화당원이고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둘은 아이가 있고, 하나는 앞으로 부모가 되고 싶어 하며, 하나는 절대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애인이고, 둘은 운동을 좋아하며, 하나는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입니다.
나는 사람들 저마다의 차이를 존중합니다. 1994년 뉴베리상 수상작인 <주는 사람 The Giver>에도 이러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 P144

모든 시선이 애브너에게 꽂혔다. 그러고는 바로 록시와 나한테로 옮겨 왔다. 선생님이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우리가 늘 강조하는 거 잊지 않았지? 누구도 억지로 커밍아웃할 필요 없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신할 필요도 없다는 거." - P165

"캐런, 그날 일……… 미안해."
"나도, 엄마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래도 에이즈에 대해선 엄마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 그건 나한테 중요한 문제야. 그렇지만 뭐, 엄마에게도 엄마 생각을 말할 권리는 있는 거니까."
"아냐, 내 생각이 잘못된 거라면 고집해선 안 되지. 요 며칠 책을 찾아봤는데, 나 자신이 좀 부끄러워지더라. 내가……… 애초에 내가 왜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잊어버리고 산 것 같아. 그동안 난 동성애라는 것이 좀 거북했어. 그런데 이제는…………." - P175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형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내가 볼 때 넌 참 매력이 많은 애인데 지금은 아주 혼란스러운 것 같아."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동안 널 지켜봤으니까. 시작은 늘 그래, 마이클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알게 되더라고."
"뭘 알게 된다는 거야?"
월트는 그저 웃기만 하더니 마이클을 보면서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마이클은 가슴속에서 비상벨이 울리는 걸 느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월트 옆으로 갔다. - P199

나도 그래. 나도 다른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 좋아해 보려고 했거든. 그러면 애들이 날 좋아해 줄 것 같아서. 근데 아무리 해봐도 유치한 파티에 가는 거랑 쇼 프로그램 보는 건 너무 싫어."
베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랑 나는 남들하고 다른가 봐."
마이클은 눈물이 가득 고여 앞을 가렸지만 가까이 다가가 베키를 와락 끌어안았다.
"베키야, 사랑해."
마이클은 한없이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벅찼다. 베키를 지켜주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순간은 베키가 마이클을 지켜 주고 있었다. - P203

실라가 내 팔에 손을 얹자 내 마음 한가운데에서 다시 실라의 손길이 느껴졌다. 내 마음을 저 깊은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실라가 불쑥 자신이 아니라 나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테리야, 너도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거야."
이 말이 매기 없이 농구 캠프에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실라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밖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용기만 낸다면 얼마든지 따라 들어갈 수 있게. - P227

앨런 하워드
나는 거의 평생을 오리건주에서 살다가 1990년에 남편 척과 함께 미시간주의 캘러머주로 이사를 왔습니다. 딸이 넷 있는데, 지금은 다 자랐습니다. 그중 셰일리라는 딸이 레즈비언입니다.
부모 노릇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셰일리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달리기>의 주인공처럼, 난 딸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서 도망치려고만 했습니다. 딸이 레즈비언인 게 창피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려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딸은 자신을 찾기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비겁한 엄마를 두었는데도 말입니다. - P228

오솔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던 데이비드는 이상하게 날아갈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앨런과 헤어지면 허전함이 밀려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떤 충만감과 깊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데이비드는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앨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P265

대화는 사실 추한 거짓말들뿐이었다. 여자 몇 명을 꼬셨고, 몇 명이 넘어왔는지 등등. 피트와 리 둘 다 거짓말에 능숙한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둘을 부추긴다. 사실 이 대화는 남자든 여자든, 스트레이트든 게이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빈칸은 알아서 채워 넣으시길. 운이 좋은 애들은 곧 성숙해져서 이따위 거짓말이 필요 없어진다. 강인한 애들은 애당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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