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le of thumb(눈대중)이 이런 뜻이었어?!!!

머리말_모든 것의 시작

1970년대 미국 사회 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발본적(拔本的), 근본적이라는 의미의 급진주의(radical) 페미니즘은 기존 페미니즘이공적 영역에 한정돼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적인 문제로 여겨지던 성과 사랑, 가족을 정치학으로 이론화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권력의 폭력만이 ‘정치적 문제가 아니고, 소위 ‘부부 싸움‘은 대칭적인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남성 폭력의 중립적 표현이며, 여성에게는 국가보다 남성과 맺는 ‘사적‘ 관계가 정치와 권력의 근본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은 거의 파트너

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 시달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그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특권‘을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배려와 관용. 나는 이 부정의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고통, 폭력, 슬픔이 연구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사의 산물이라는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 점에서 학문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저는 오늘꽃을 받았어요
-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가정 폭력 생존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작품이며, 신혜수의 번역문을 다듬어 수정했다.

1장 ‘아내 폭력’, 가부장제의 축도

‘아내 폭력‘이 비정치적 문제라는 전제 아래, 그것이 사회적 이슈여야 하는 이유를 심각성에서 찾고 있다. 폭력 문제를 고려하는 데가장 기본적인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몸이 아프고 고통을 당한다는 여성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우려와 문제 의식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아내 폭력‘은 언제나 아내(여성)에 대한 폭력이아니라 가족에 대한 폭력으로 환원된다. 즉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 폭력(domestic violence, family violence)이 원래 의미인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violence in the family)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family)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아내 폭력‘에 대한 접근 방식은 주로 ‘폭력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자‘
는 가족 유지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 P28

이러한 시각은 같은 가정내 폭력인 아동 학대를 한 ‘인간‘의 미래를 짓밟는 행동, 노인 학대를 미래의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접근하는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는 대다수 가정 폭력 연구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점인데, 아동/노인 학대는 피해자개인의 권리 침해로 이해되지만, ‘아내 폭력‘은 여성의 인권보다는가족 해체에 대한 우려가 더 우선시된다. 그래서 아동/노인 학대는사회의 즉각적인 개입이 강조되지만 ‘아내 폭력‘은 부부 간의 심리 - P29

적인 문제로 경시되면서 ‘비바람은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집안에 들어갈 수 없다‘15)는 논리가 강조된다. - P30

이처럼 가정 폭력이 왜 근절되지 않을까 하는 문제는 가정 폭력이 왜 근절되어야 할까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일반적인 통념은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가족이 파괴되기 때문에 가정 폭력이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뒤집어보면가족은 무조건 소중하다는 생각, 혹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은 해체되면 안 된다는 가족 유지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폭력으로도 (남성 중심적) 가족이 빨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 실은 더 큰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 여성들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폭력가정을 떠나지 못해서 가정 폭력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현재의 가족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을피해자, 가해자, 사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한, 우리가 그토록 지 - P31

켜야 하는 가족이 과연 누구를 위한 가족인가를 새롭게 질문하지않는 한, 가정 폭력은 근절되기 힘들다. - P32

19세기 영국의 관습법 (common law)은 ‘엄지손가락 법칙(rule of thumb)‘이라고 하여 매의 굵기가 남편의 엄지보다 굵지만 않으면아내 구타는 정당하다는 원칙을 발전시켰다. 대략적으로 잰다는 뜻인 영어의 ‘rule of thumb(눈대중)‘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26)18세기 프랑스 법은 구타를 인정하되, 날카롭거나 위협적인 도구의사용은 금지하고 때리고 차거나 뒤에서 누르는 것으로 제한했다고 한다. - P35

리처드 겔즈의 연구에 따르면, 5년간 미국에서 ‘아내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와 비슷하며 미국의 소아마비 환자 모금 본부(March of Dimes)에 의하면 임신중 남편의 구타가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 원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36)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기혼 여성의 5퍼센트는 ‘아내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호소하였다. - P38

한편, 여성의 경험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명명(naming) 작업은 여성주의자에게 딜레마를 안겨준다. 여성학에서 명명은 현상을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것과 정치적 지향을 동시에 포함하는(double-edged) 작업이어야 하는데, 아내 폭력 개념은 이 점에서 한계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단지 아내로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는 현실에 대한 분석과 여성의 정체성이 더는 아내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동시에 하고자 하는데, 아내 폭력 용어는 이러한 관점을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 즉, 이 개 - P45

념은 아내 폭력이 아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본 연구의 입장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 정치학의 대안적 가치를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한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아내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으로 표기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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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몸 2권. 1권 만큼 임팩트가 크진 않았지만, 2권의 부제처럼 ‘몸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1권의 부제는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

생리중단시술도 가능하고, 탐폰도 생리컵도 가능하고, 머리도 밀어보고, 바이크도 타보고, 막춤도 춰보고, 사고도 치고, 늙어가고 배 나온 내 몸도 받아들이며, 작가 요조의 말처럼 말랑말랑하게 늙었으면 좋겠다.

<월경컵 사업가 심윤미의 몸>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저지르세요. 제가 저지르는 인생을 47년 살았는데요, 큰 사고는 안 나요. 물론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가, 이것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고민은 충분히 해야겠지만 누군가가 말린다는 이유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고 치세요. 다가오는 해에는 사고친 여성들의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P313


작가 정지민의 말처럼 내 안에 내재된 ‘한국 남자‘ DNA에 뜨끔하다. 우리집 권력 1순위(비공인?)로 가부장적인 남성처럼 되지 않기 위해 페미니즘을 계속 읽어야 한다.

<작가 정지민의 몸>
저는 결혼하면 남편이 가사를 안 도와주거나 시가가 저를 충분히존중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제 안에 내재된 ‘한국 남자‘ DNA를 발견했어요. 아빠에게 배운 걸 그대로 집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밖에서 일하고 남편이 프리랜서로 집에 있는 상황인 게 큰 이유일 텐데요. 밖에서 일하는 입장이 되니까 저도 별다를 바 없이 다른 남성들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단순히 여성이라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듯이 자기가 조금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서 성찰 없이 행동하면 누구나 다 가부장적인 남성처럼 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남편이 전기밥솥에 밥을 넘칠 정도로 해둬요. 밥을 조금만 더 하면 밥솥이 폭발하겠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맛이 없었어요. 한번은 짜증을 냈어요. ˝왜 이렇게 밥을 한 번에 많이 해, 나눠서 하지.˝ 그런데 남편도 집에서 일을 하거든요. ‘나눠서 하면 밥을 너무 자주 해야한다. 나는 한 번에 많이 해놓는 게 좋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순간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맨날 밥해줬어˝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남편 얼굴을 봤더니 ‘매우 빡침‘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저한테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라고 했어요. 그게 결국 남편들이 아내에게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해줬다. 우리 엄마처럼 해달라‘고 하는 말이랑 똑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큰 반성을 했죠.-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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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1-19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정지민의 말을 읽으며....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큰 빡침의 제공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숙연해집니다.
햇살과함께님 덕분에 좋은 책을 찾았네요. 함 찾아봐야겠어요!!

햇살과함께 2024-01-19 14:31   좋아요 1 | URL
제 안에 아직 많습니다. 한국 남자, 상남자, 거친 남자, 마초...
2권보다 1권이 더 좋긴 했어요!
 

공포. 결핍과 공격성. 공포증과 강박증 그리고 도착증. 경계례

까만 건 글자🙄

2장. 무엇에 겁먹는가

이와 같은 이론을 따른다면, 공포란 한 마디로 균형을 이루던 생물학적 충동의 단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대상 관계의 형성이란, 때에 따라서는 가장 적절하지만 일시적인 균형 상태가 번갈아 가며 공포의 반복을 이루는 상태일 것이다. 공포와 대상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할 때까지 함께 전진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 누가 완전히 억압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 P67

그 결과 충동적인 공격성은 ‘순수한‘ 상태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결핍과 공격성은 연대기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공존한다는 사실을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격성은 이른바 1차적 나르시시즘‘의 환영으로부터 느끼는 원초적 박탈감에대한 응수로 나타난다. 그것은 처음에 느낀 욕구 불만에 대해 끊임없이 복수하려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핍과 공격성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결핍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강박적 공격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결핍을 배제한 채 공격성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이를 편집증화하는 것이 된다. - P74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언어 및 공포증과의 관계와 성인의 그것을 비교 고찰해 볼 수 있다. 성인 공포증 환자의 특징은 극도의 예민함에 있다. 그러나 성인 환자의 숙련된 언어 구사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심연의 저 아래에서 정서만의 기호가 아닌 신호를보내면서 전속력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나타난다. 마치 의미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의미를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공포증에서처럼 언어가 실패한 내부 투사적인역할로 원초적인 결핍의 번민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언어는 반(反)공포증적 대상이 된다. 이처럼 성인 공포증 환자에 대한 언어 분석은, 폐쇄된 지점에서부터 담론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무언의 그물로 교묘히 접근한다. - P77

공포증과 강박증, 그리고 도착증의 교차점인 아브젝시옹은 공포와 매혹의 나르시시즘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아브젝시옹에서 암시되는 혐오는 히스테리로 전환되는 양상을 가지지 않는다. 히스테리는 ‘나쁜 대상‘이 그 한계를 넘쳐날 때의 자아의 증상이며, 자아를 포기하고 삭제해 버리며 게워낸다. 반면 아브젝시옹 안에는 말하는 존재를 완전히 차지한 반항이 있다. 이를테면히스테리가 상징계를 선동하고 유혹하거나 아니면 토라져 있으면서도 정작 상징을 생산하지는 않는 데 반해, 아브젝시옹의 주체는발군의 문화적 생산자이다. 아브젝시옹의 증상이란 언어를 파기하고난 이후의 재구축인 것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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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월담 공동대표 리조의 몸

움직임의 시작은 내 몸이지만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관계예요.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건강과의 관계, 또는 예기치 못했던 관계. 저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관계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경험을 해요.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교육이 가능했고요. 그래서 우리는 늘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배움을 풍성하게 하고 삶을 지탱하는 힘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찾는 게 저희에게 항상 필요한 것 같아요. - P116

암 생존자 정지혜의 몸

저는 암을 치료한다기보다는 암에 대한 인식과 싸운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제 투병은 인식과의 투쟁이에요. 아픈 사람에게도 욕구가있고 아픈 사람에게도 일이 필요해요. 아파도 일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고요. 저도 아직 임금노동을 못 하고 있어요.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거든요. 젊은 암환자 중에는 완치 판정을 받았음에도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아팠던 사실을 숨기는 분들도 많고요. 이런 공감대를 가진 분들끼리 일을 서로 품앗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도 그런 모임에 나가볼까 알아보고 있어요. 임금노동을 못할 거면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최근엔 여성 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 ‘WSW‘를 하고 있어요. ‘We are still working‘의 약자로,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 P131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의 몸

다만, 그룹에 속해 있거나 신인일 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솔로활동을 하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요. 아이돌이라는 직업 특성상 조금만 움직여도 반응이 뜨겁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려운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목소리를 내는 여성 아티스트가 늘고 있다는 것이 무척 긍정적이고 고맙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인지 너무 잘 알아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여성 아티스트를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 P146

배우 김꽃비의 몸

배우 김꽃비는 커다란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녹음실에 나타났다. 그의 별명은 바이크 전도사로, 운전자 성별, 바이크 기종, 운전기량 등으로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바이크 문화를 꿈꾸고 있다. 김꽃비의 이야기 중 내 마음 깊이 박힌 표현은 "바이크가 페미니즘적 수행처럼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사륜차들이 달리는 도로위에서 바이크 운전자는 ‘어디 감히 이륜차가!‘라는 차별적 시선을 받는다. 이는 ‘어디 감히 여자가! ‘와 비슷한 인식 아닌가. 여성운전자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반면 페미니즘적 해방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온몸에 힘을 실어 기체를 통제하며 질주할 때의 터질 듯한 희열은 그가 말할 때 표정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김꽃비의 수행을 칵테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아일랜드의 바 메뉴 중에서 골라보았다. 탐험가, 등산가, 사진가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기억하기 위한 술이다. 오래 숙성해 풍미가 깊어진 럼에 시럽과 각종 향신료를 섞은 뒤 큼직한 사각 얼음을 빠뜨린다. 잔에는이런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밧줄을 짧게 매고 도끼를 꽉 쥔 채깊은 심호흡을 한다. 발걸음을 내딛는다. 저 비명을 지르는 허리케인의 한가운데로!" - P161

군인권센터 활동가 방혜린의 몸

그런데 어느 날 상급자가 저를 부르더니 "넌 남자냐여자냐?" 물어보는 거예요. 그 질문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는 뭐지? 나를 고쳐야 하나? 군생활 끝날 때까지 고민했죠. 제 몸을 그대로 인정하기까지 페미니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몸과 제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고, 군생활 내내 답답했던 부분들에 대한 답을 줬어요. 질서가 모두 만들어진 것이고 이를 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잖아요. 페미니즘 활동에서 시작해 활동가의 삶으로 이어진 것도 내가 나일 수 있는 세상에 보탬이되고 싶은 욕망이 담긴 거죠. - P181

대학원생 김유빈의 몸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용기에 관한 것이에요. 제가 최근에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거든요. 처음 다가갔을 땐 아이들이 저를 피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저멀리서 제가 나오는 모습만 봐도 막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오는 거예요. 제겐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어요.
밥을 한 번 주면 계속 줘야 하잖아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담도 생기고, 또 제가 며칠 놀러가는 일이 생기면 그 아이들은 굶어야하는 거잖아요.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도 있고요. 나이드신 분들은 이해를 못하시고 화를 많이 내시죠. 이런 상황에 맞서야 할 때 용기가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해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너무 신기했어요. 물론 그들은 제가 주는 밥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요. 하지만 제가 밥을 주지 않아도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양이들은 - P198

밥을 먹고 나면 배를 보여주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거든요. 그런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아요.
우리는 다 달라요. 많이 다르냐 조금 다르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에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해도 그게 자기 자신을 슬프게 할 이유는 못 되는 것 같아요. 너무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지만,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어요. 용기를 내면 기쁜 일도 많이 생기거든요. - P199

사진가 황예지의 몸

사진을 찍을 땐 무조건 피사체에 맞추려고 해요. 그들이 불편해하는 순간 무조건 카메라를 내려요. 나중에 그들이 사진을 봤을 때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 사진을 삭제해요. 당연한 것이에요. 여태까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고요. 많은 여성 모델들이 남자 사진가가 자기 몸을 만지거나 여기서 더 벗으면 사진이좋아질 거라고 강요했다고 제게 말했어요. 그런 말들을 듣고 명확해졌어요. 내가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은 그런 것이구나. - P223

다큐멘터리 감독 김보람의 몸

내 몸을 받아들이려 노력해도 쏟아지는 광고들, 길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 몸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고 아름답지않다는 생각에 다시 빠지게 되더라고요. 몸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 혐오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내 몸을 비교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도 허기는 밀려오죠. ‘그래도 나는 아름다워‘라는 생각은제게는 좋은 방법 같진 않았어요. 다만 매일매일의 싸움이란 생각이들었어요. 어느 순간 깨닫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나의 욕망과 싸우는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허기를 느끼는 제 모습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과매일매일 싸우는 게 저를 훨씬 더 외모 중립적으로 바라보게 하더라고요. 광고나 드라마, 영화 같은 이미지와 맞서려면 그것과 싸우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읽고 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미국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끊임없이 다른 몸과 다른 존재들이 나오거든요. - P230

월경컵 사업가 심윤미의 몸

‘페미니즘‘이란 학문을 처음 만난 건 2015년이었다. 그 무렵 대학 내 독립언론 기자로 교내 성폭력 사건을 취재중이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성 언론 기사가 없었다. 한계를 느낀 나는 책의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때 읽은 책은 정희진 작가가 쓴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이었다.
내가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일들이 이미 글과 학문으로 질서정연하게 설명돼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동안 겪었던 적지 않은일들이 내 잘못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겪은 것이었단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책에는 군사주의를 남성성과 연결하여 여성주의적 시선으로분석한 챕터가 있는데, 그 대목은 내 시야를 확장해주었다. 여성주의는 마구 가지를 치면서 평화학으로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니까여성주의로 나와 같은 여성의 개인사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군사주의와 폭력 같은 거대 담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처음 여성주의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나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주의는 어떤 목표를 위해 도달해야만 하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나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해주는 통로에 가까웠다. 책을 읽고 여성주의자로서 궁극적으로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군사주의적 문화에 저항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폭넓은 해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P305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저지르세요. 제가 저지르는 인생을 47년 살았는데요, 큰 사고는 안 나요. 물론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가, 이것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고민은 충분히 해야겠지만 누군가가 말린다는 이유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고 치세요. 다가오는 해에는 사고친 여성들의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P313

작가 정지민의 몸

저는 결혼하면 남편이 가사를 안 도와주거나 시가가 저를 충분히존중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제 안에 내재된 ‘한국 남자‘ DNA를 발견했어요. 아빠에게 배운 걸 그대로 집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밖에서 일하고 남편이프리랜서로 집에 있는 상황인 게 큰 이유일 텐데요. 밖에서 일하는 입장이 되니까 저도 별다를 바 없이 다른 남성들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단순히 여성이라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듯이 자기가 조금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서 성찰 없이 행동하면 누구나 다 가부장적인 남성처럼 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남편이 전기밥솥에 밥을 넘칠 정도로 해둬요. 밥을 조금만 더 하면 밥솥이 폭발하겠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맛이 없었어요. 한번은 짜증을 냈어요. "왜 이렇게 밥을 한 번에 많이 해, 나눠서 하지." 그런데 남편도 집에서 일을 하거든요. ‘나눠서 하면 밥을 너무 자주 해야한다. 나는 한 번에 많이 해놓는 게 좋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순간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맨날 밥해줬어"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남편 얼굴을 봤더니 ‘매우 빡침‘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저한테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라고 했어요. 그게결국 남편들이 아내에게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해줬다. 우리 엄마처럼 해달라‘고 하는 말이랑 똑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큰 반성을 했죠.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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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연구자 염운옥의 몸

도대체 불법과 합법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렇게 서류 한 장으로 불법과 합법의 인간이 갈리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UN 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불법illegal‘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해요. ‘불법 체류‘ 대신 ‘미등록undocumented‘ 혹은 ‘초과 체류overstayed‘라는 말을 쓰자는거예요.
이주자에게 체류자격은 너무나 중요해요. 체류 자격이 흔들리면 노동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아이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없죠. 아이를 학교에보낼 수도 없거든요. 체류 자격이라는 것은 등록되는 서류잖아요. 이서류를 갖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구분해서 ‘당신의 몸은 오늘까지는 합법이지만 내일부터는 불법이야‘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걸까요?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 P18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몸

제가 충격을 받았던 건, 백화점 같은 경우엔 3천여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있는데요. IMF 이후엔 90퍼센트 정도가 아웃소싱되어서 파견직으로 바뀌게 됩니다. 2700명 정도가 파견직 노동자가 되는 거죠.
백화점에 소속된 게 아니라 입점 매장에서 각각 따로 계약을 맺어 파견직으로 근무하게 하거나, 아니면 백화점 안에서 단기 고용으로 일용직 노동자처럼 활용하면서 백화점 정규직의 지위는 주지 않았죠. 이 파견직 여성 노동자 그룹은 거의 대부분 담배를 피워요. 반면 정규직 여성 300명 중에서는 흡연자가 한 30명, 10퍼센트밖에 안 됐는데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중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본 적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승진에 대한 기대가 있고 직장 안에서 인사 평가와 관련된부분을 의식하는 여성들은 사람들과 같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얘기죠. 혹은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그런데 언제 잘릴지 모르는 취약한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워요. 콜센터 같은 경우에는 담배 피우는 시간을 확보해주기도 해요. 그것이 가장 쉽게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여성의 흡연이 완전히 계층화되어 있는 거죠. - P29

작가, 뮤지션 요조의 몸

말랑말랑하게 늙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신념이라는것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 신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다보면 이게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되 그것이 나를 딱딱하게 만들지 않게끔 말랑말랑해지려는 노력을 실천하면서 늙으면 참 좋겠어요.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잖아요. 페미니즘, 환경, 생명, 종교, 여러 가지 다양한 입장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거대해지고, 강해지고, 유일한 진리처럼 될 때 그것이 또다른 혐오를 낳고 또다른 공격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맞고 너는 다 틀려‘ ‘너희는 정의가 아냐‘라는 식으로 더 좁아질 수 있겠더라고요. 저부터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 P43

피디 김영미의 몸

신입 피디 시절, 김영미를 섭외한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출연을부탁했는데, 조금 곤란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끝내 수락했다. 그런데 다리를 절뚝이며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상태였다고 했다. 거절하시지 왜 나오셨냐 물으니 그는 이렇게답했다. "어린 피디가 고생하는데, 섭외 물먹으면 안 되잖아요. 이 시절엔 하나씩 성취해보는 게 중요한데."
김영미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근거는 단순하다. ‘나는 저널리스트다‘라는 생각. 그 생각으로 몸이 아파도 인터뷰를 하러 나오고, 멀고도 위험하지만 분쟁지역으로 떠난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가 아니다. 단 하나의 중요한 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낯설고 위험한 곳으로 주저 없이 발을 내딛는 것이다. - P68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의 몸

여성은 머리 없는 살덩이라고 느끼는 것이 강간 문화의 아주 밑바 - P79

닥에 깔린 의식이죠. 고기를 집어먹듯 여성의 몸을 만지고, ‘그냥 만진 것뿐인데‘라며 그게 성폭력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먹다‘라고 표현하고요. 남의 살을 함부로 대하는게 습관이 된 상황이에요. 문화화된 차별이 정말 무섭죠.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말하는 몸‘이 되어야 해요.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차별이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툭 나와요. 저도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없이 다짐하고 스스로 주의하려고 노력하지만, 저도 이 문화 속에서 차별을 공기처럼 마시고 밥먹듯이 먹으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조심하기에 좋아요.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위험하죠. 우리가 차별적인 언어들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서로 조심하도록 만들더라고요. - P80

기타리스트 반향기의 몸

머리를 그냥 한번 밀어보고 싶었어요. 짧은 머리는 워낙 많이 해서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20대가 가기 전에 삭발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어차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니까 별생각없이 밀었죠.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또 밀고 싶어져서 한 번 더 밀었더니, 이번엔 아빠가 막……… 저를 안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놀라기도 했는데, 저는 "그런 이유로 안 볼 사람이면 아예 안 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 P87

생리중단시술 경험자 임의 몸, 제의 몸

서랍에서 생리대를 꺼내서 여봐란듯이 들고 가는 것, 여성 휴가를 쓰는 것, 그냥 몸이 안좋다고 말하기보다 ‘생리통 때문에 몸이 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리 가시화를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생리를 멈추는 시도를 한 여성들이 있다. 피임 시술을 통한 것인데 목적이 ‘생리 중단‘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몸에 장치를 삽입하는 게 마냥 가벼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고작 생리 때문에 그런 시술을 해?"라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생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솔깃하게들렸다. 이 고통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리를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리도 내 생활의 일부인데 왜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못할까. 생리 자체가 초래하는 불편과 고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생리하는 채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리할 때 들어가는 비용, 시간, 에너지가 아깝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는 경쟁선상에서 뒤처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의 고통과 불편을 줄이는 선택지를 통해 이 사회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리중단시술은 여성의 생리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타협이기도 하다. 저항과 타협, 우리는 그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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