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자 염운옥의 몸
도대체 불법과 합법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렇게 서류 한 장으로 불법과 합법의 인간이 갈리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UN 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불법illegal‘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해요. ‘불법 체류‘ 대신 ‘미등록undocumented‘ 혹은 ‘초과 체류overstayed‘라는 말을 쓰자는거예요. 이주자에게 체류자격은 너무나 중요해요. 체류 자격이 흔들리면 노동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아이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없죠. 아이를 학교에보낼 수도 없거든요. 체류 자격이라는 것은 등록되는 서류잖아요. 이서류를 갖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구분해서 ‘당신의 몸은 오늘까지는 합법이지만 내일부터는 불법이야‘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걸까요?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 P18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몸
제가 충격을 받았던 건, 백화점 같은 경우엔 3천여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있는데요. IMF 이후엔 90퍼센트 정도가 아웃소싱되어서 파견직으로 바뀌게 됩니다. 2700명 정도가 파견직 노동자가 되는 거죠. 백화점에 소속된 게 아니라 입점 매장에서 각각 따로 계약을 맺어 파견직으로 근무하게 하거나, 아니면 백화점 안에서 단기 고용으로 일용직 노동자처럼 활용하면서 백화점 정규직의 지위는 주지 않았죠. 이 파견직 여성 노동자 그룹은 거의 대부분 담배를 피워요. 반면 정규직 여성 300명 중에서는 흡연자가 한 30명, 10퍼센트밖에 안 됐는데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중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본 적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승진에 대한 기대가 있고 직장 안에서 인사 평가와 관련된부분을 의식하는 여성들은 사람들과 같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얘기죠. 혹은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그런데 언제 잘릴지 모르는 취약한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워요. 콜센터 같은 경우에는 담배 피우는 시간을 확보해주기도 해요. 그것이 가장 쉽게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여성의 흡연이 완전히 계층화되어 있는 거죠. - P29
작가, 뮤지션 요조의 몸
말랑말랑하게 늙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신념이라는것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 신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다보면 이게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되 그것이 나를 딱딱하게 만들지 않게끔 말랑말랑해지려는 노력을 실천하면서 늙으면 참 좋겠어요.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잖아요. 페미니즘, 환경, 생명, 종교, 여러 가지 다양한 입장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거대해지고, 강해지고, 유일한 진리처럼 될 때 그것이 또다른 혐오를 낳고 또다른 공격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맞고 너는 다 틀려‘ ‘너희는 정의가 아냐‘라는 식으로 더 좁아질 수 있겠더라고요. 저부터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 P43
피디 김영미의 몸
신입 피디 시절, 김영미를 섭외한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출연을부탁했는데, 조금 곤란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끝내 수락했다. 그런데 다리를 절뚝이며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상태였다고 했다. 거절하시지 왜 나오셨냐 물으니 그는 이렇게답했다. "어린 피디가 고생하는데, 섭외 물먹으면 안 되잖아요. 이 시절엔 하나씩 성취해보는 게 중요한데." 김영미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근거는 단순하다. ‘나는 저널리스트다‘라는 생각. 그 생각으로 몸이 아파도 인터뷰를 하러 나오고, 멀고도 위험하지만 분쟁지역으로 떠난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가 아니다. 단 하나의 중요한 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낯설고 위험한 곳으로 주저 없이 발을 내딛는 것이다. - P68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의 몸
여성은 머리 없는 살덩이라고 느끼는 것이 강간 문화의 아주 밑바 - P79
닥에 깔린 의식이죠. 고기를 집어먹듯 여성의 몸을 만지고, ‘그냥 만진 것뿐인데‘라며 그게 성폭력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먹다‘라고 표현하고요. 남의 살을 함부로 대하는게 습관이 된 상황이에요. 문화화된 차별이 정말 무섭죠.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말하는 몸‘이 되어야 해요.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차별이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툭 나와요. 저도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없이 다짐하고 스스로 주의하려고 노력하지만, 저도 이 문화 속에서 차별을 공기처럼 마시고 밥먹듯이 먹으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조심하기에 좋아요.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위험하죠. 우리가 차별적인 언어들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서로 조심하도록 만들더라고요. - P80
기타리스트 반향기의 몸
머리를 그냥 한번 밀어보고 싶었어요. 짧은 머리는 워낙 많이 해서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20대가 가기 전에 삭발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어차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니까 별생각없이 밀었죠.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또 밀고 싶어져서 한 번 더 밀었더니, 이번엔 아빠가 막……… 저를 안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놀라기도 했는데, 저는 "그런 이유로 안 볼 사람이면 아예 안 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 P87
생리중단시술 경험자 임의 몸, 제의 몸
서랍에서 생리대를 꺼내서 여봐란듯이 들고 가는 것, 여성 휴가를 쓰는 것, 그냥 몸이 안좋다고 말하기보다 ‘생리통 때문에 몸이 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리 가시화를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생리를 멈추는 시도를 한 여성들이 있다. 피임 시술을 통한 것인데 목적이 ‘생리 중단‘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몸에 장치를 삽입하는 게 마냥 가벼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고작 생리 때문에 그런 시술을 해?"라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생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솔깃하게들렸다. 이 고통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리를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리도 내 생활의 일부인데 왜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못할까. 생리 자체가 초래하는 불편과 고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생리하는 채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리할 때 들어가는 비용, 시간, 에너지가 아깝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는 경쟁선상에서 뒤처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의 고통과 불편을 줄이는 선택지를 통해 이 사회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리중단시술은 여성의 생리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타협이기도 하다. 저항과 타협, 우리는 그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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