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서

미국 정신과 의사 윌리엄 글래서(William Glasser)의 현실 요법(Reality Therapy)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삼아 내담자의 요구를 고찰했다. 하지만 그 기법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오지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거나 혼란스러워한다.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원하는 것(want)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극히 일부분이다. 더 논쟁적인 지점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하는 것은 실상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유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정체성(동일시)과 욕망의 산물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수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회 정의와 충돌할 때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일베‘ 같은 여성혐오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성적자기결정권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라는뜻이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상하는 삶을 의미한다. - P218

사회가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문화이자 규범인 성 역할은 현행법으로는 불법인 성매매와 성격상 연속선(continuum)에서 작동한다. 성 판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곧바로 여성 전체에 대한낙인이 되는 것도 이 구조 때문이다. 1) 성 역할 → 2) 성별화된 자원을 기반으로 한 이성애 → 3) 이성애 관계의 제도화(가족) → 4)성매매(거대한 성 산업→ 5 성폭력 → 6) 인신매매(강제 임신, 장기적출). 이 연속선에서 자유로운 주체, 인생, 사회는 없다. 성 역할이성애-결혼-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은 "신성한 결혼과 매춘을 동일시하다니!"라는 분란을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연속선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교환 법칙의 공통점 때문이다. 어느 관계에서나 남성의 자원은 돈, 지식, 지위 등 사회적인 것인 데 비해 여성의 자원은 외모와 성, 성역할 행동(애교, ‘여우짓‘, 성애화된 행동)이다. - P228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게일 루빈은 이를 ‘여성의 교환‘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선물 경제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개인으로서 서로의 자원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 사회에서 증여되고 순환되는 남성들 사이의 교환품인 것이다. 우리사회의 흔한 현상인 ‘성 상납‘에서 남성은 남성에게 여성을 상납하지 자기 몸을 상납하지 않는다. 여성 억압, 성매매의 기원은 생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교환물로 삼는 사회 체계에 있다. 게일루빈은 여성이 처한 억압의 궁극적 위치는 상품의 매매보다 여성인신매매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P229

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현격하게 발견되는 분야는 기하, 즉 공간지각인데, 이는 여성이 대체로 수동적으로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하이힐이나 전족(纏足) 같은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여성의 움직임에 대한 제재 전략과 관련이 있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을 비롯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은 공간지각력을 상실하는경우가 많다. 고통(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 P239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경험을 한다. 남성의 폭력을 기억하는 여성의 몸은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의 능동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공간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의 관계, 즉 공간에서 자기몸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공간지각력 상실은 여성에 대한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고문 등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게서도 공통적으로발견된다). - P240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 명명되어 왔기에 여성의 신체 기관에는 대부분 공간 명칭이 있다. 남아가 사는 곳인 ‘자궁(宮)‘, 여성의 질을 뜻하는 버자이너(vagina)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머문다는 의미에서 ‘칼집‘이라는 뜻이다. 질의 한자 역시 방(室)이라는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 중세 영주가 농노의 아내에 대해 초야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논리 중의 하나인, 여성의 질이 남성의 성기를 잘라 삼켜버린다는(vagina dentata) 삽입 섹스의 공포도 여성의 질에 대한 공간화에서 비롯되었다. 성교를 의미하는 ‘삽입(intercourse)‘이라는 말 역시 여성을 ‘들어가는‘ 영토로 전제하는논리다. 아내를 일컫는 ‘집‘사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여성 비하적 언어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 ‘아줌마‘라는 말은 여성을 ‘아기 주머니‘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줌마가 ‘아기 주머니‘, ‘아주머니‘를 거쳐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 P246

‘일상‘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성폭력이 여성에대한 남성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 여성이 속하거나 피해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도 여성 몸을 남성의 영토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폭력의 발생 원인이자 성폭력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성폭력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이 문제가 남성과 남성 사이의 정치로 환원된다는점에 있다. 이는 남성은 정치적 주체로 전제하고 여성은 남성 집단간 정치의 희생자로 전제하여,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개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폭력 해결 과정에서 피해 사실 자체보다는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성폭력은 처벌되기도 하고, 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미군이나 경찰이면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아는 사람이나 가족일경우는 사적인 문제가 된다. - P249

피해자 중심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이러한 인식은 객관성이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마치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주의는 기존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성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남성의 객관성을 역사화하고 정치화함으로써 부분화하고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관계에따라 변화하고 유동하고 이동하는 정치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모든 피해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준다. - P259

가부장제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의미는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르다. 남성에게 섹스는 (당연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다."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차별적인 규범이 적용된다. 여성이 섹스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잘하거나 못할 때, 그에게는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걸레‘라는 낙인과 추방이 기다린다. 남성이 ‘더럽다‘고 평가받는 경우는 몸을 씻지 않아서거나 돈이나 권력 투쟁에서의 부정부패 때문이지 섹스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더럽다‘는 의미는 대개 성적인 측면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남성 권력의징표 중 하나는 성이다. 남성에게 섹스는 그의 사회적 능력의 검증대로서 ‘다다익선‘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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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깨어난 1970년대

케이트 밀릿 <성 정치학>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도리스 레싱 <금색 공책>
수전 손택 <수전 손택: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에세이들>
시그리드 누네즈 <우리가 사는 방식: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마거릿 애트우드 <신탁받은 여자>
실비아 플라스 <벨 자>
사변 시, 사변 소설
에이드리언 리치 시 선집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샬럿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허랜드>
앨리스 셸던/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보이지 않는 여자들> 외
어슐러 르 귄 <어둠의 왼손>
글로리아 스타이넘
앨리스 워커 <우리 어머니들의 정원을 찾아서>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맥신 롱 킹스턴 <여전사>

3부. 깨어난 1970년대

케이트 밀릿의 베스트셀러 『성 정치학』의 핵심 주장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여성이라는 종을 종속시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 P197

1960년대의 운동이 여성을 위한 성 해방론자들의 투쟁이었다면, 1970년대 말과 그 이후의 운동은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싸움이 되었다. - P199

여성들은 "정치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내 삶의 조건을 이루는 본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시작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획기적인 에세이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 나오는 다음의 발언은 1970년대의 현명한통찰을 포착한다. "의식이 각성되는 시대에 살아 있다는 것은 짜릿한 기쁨을 준다. 그것은 혼란스러울 수도, 방향감각에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 P200

책의 핵심부에서 밀릿은 군사, 산업, 기술, 대학, 과학, 정치,금융 분야에서 여성을 남성의 독점 행위에 굴복시키는 제도가 보편화되었다고 강조한다. 밀릿에 의하면 이런 구조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공격적이거나 가학적인) 남성적 특성과 (수동적이거나 피학적인) 여성적 특성을 만들어내는 제도가 있으니,바로 가족이다. 사실상 가족이 해부학적 성과 구분되는 심리학적젠더 역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신을 부양하는 사람에게 의존하며 사는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적대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신이라는 모범적인 ‘아버지‘를 곁에 둔가부장제는 기본적인 신화들을 (판도라나 이브가 이 세상에 악을 가져왔다는 식으로) 이용하여, 인간 삶의 해악들은 제멋대로 구는 여성 때문에 생겨났으니 그들을 반드시 남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굴종은 여성이 자신의 예속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 성 정치학 - P203

밀릿은 레싱에게 『금색 공책』에서 가장 의미 있게 다가왔던 장면은 여자 주인공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게 매달 일어나지만 어느 책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 생리가 시작되는시점에 화장실에 있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반응하며 레싱은 밀릿에게 자신의 어머니도 그녀가 책을 쓸 때마다 죽어버리겠다고 통보했으며, "언젠가는 어머니를 만족시키겠지 하는 희망을 계속 품지만 (…) 그래봤자 또 다른 죽겠다는 소동만 일으킬 뿐"이라고 고백하면서 글을 계속 쓰라고 격려했다. 밀릿이 7년간이나 항의했어도 베트남전쟁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을 때도 레싱은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효과는 덜할지 몰라도 당신들은 뭔가 다른 일을 더 주목받게 만들었어요.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 사이에서 거대한 시계추와도 같은 사회적인 힘이, 변화가, 운동이 지금 널리 퍼져나가고 있잖아요." - P208

문학비평가 테리 캐슬은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냉소적인 만가를 통해 그녀가 "거칠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미국인"이긴 했지만 "무녀 같고 유난히 감상적이고 보통은 엄청나게 지루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회고록 『우리가 사는 방식: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를 통해 이『해석에 반대한다』의 저자의 실체를 한층 아련하고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맨해튼 북서쪽에 있는 바퀴벌레가 들끓는 아파트에서 살고, 담배를 끊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들 데이비드 리프와 데이트 중이던 누네즈의 시어머니 역할을 연극적으로 해내던 그녀의 실체 말이다. 삶은, 지적이고 페미니즘을 은밀하게 견지한 사람의 삶이라 해도, 이상할 수 있다. - P220

열정적인 행동의 시대였던 1970년대는 강력한 사변思辨의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서 사변이란 사물을 멀리 이론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어원적 의미의 사변이기도 하고, 만약이라는 (만약상황이 다르다면, 더 좋다면, 훨씬 더 나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의 차원에서 묻는다는 의미의 사변이기도 하다. 이 시기 동안 에이드리언 리치와 다른 여러 운동가들이 사변 시를 창작했고, 그들의 많은 동료들이 남성 SF 작가들의 하드코어 SF보다 더 사변적인 페미니즘 SF를 창작했다. 열망을 지닌 여성들은 시, 소설 두 분야 모두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장르를 검토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 P251

오늘날 우리가 열정적으로 다시 읽기를 하고 있는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에서 캐서린 몰런드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는 "짜증나거나 지치게 만들지 않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교황과 왕이 전쟁을 벌이기만하고 남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여자는 아예 안 나온다. 정말 지루하다."" - P253

"우리가 그 사람이다."우리는 그 사람이다. 유일한 사람. 이들 부부 중 남은 사람이 바로 그 살아남은 사람이다. 내면에 파괴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재탄생의 희망까지 품고 있는 그한 사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리치가 새로운 종류의 사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결론짓지 않는다. 이성애를 그저 구석구석 배어 있는 제도가 아니라 "강압적인" 제도라고 규정한이후, 그녀는 자신이 "레즈비언 연속체"라고 부르게 되는 개념에 입각해 위치를 서서히 재설정하긴 했다. 그러나 이 시집은그녀가 갈망해온 개인적, 시적, 정치적 변화를 향한 자신의 진전을 축하하는 시들로 맺음한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는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보내는 시 편지 「어느 생존자로부터」다. 이 시에서 시인은 깨진 결혼 생활에 대한 눈 밝은 통찰을 보여주고("우리가 맺었던 계약은 평범한 계약이었지요/ 당시의보통 남자와 보통 여자가 맺는 것 말이에요"), 그의 고의적인자살을 애도하며 "당신의 죽음은 낭비랍니다"), 자신이 대변인이 되는 이 1970년대의 변화 궤적을 묘사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던 / 지금 하기에는 너무 늦은 / 도약을" 이혼일까? 개인적인 변신일까? - "내가 지금 하며 살고 있어요 / 도약이 아니라 - P265

/ 연이어지는 짧고도 놀라운 움직임들이죠 // 각각의 움직임은다음 번 움직임을 약속하고요." - P266

이 두 작품(누런 벽지, 허랜드)은 1960년대에 그리고 1970년대에 점점 더 많은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쏟게 되는 사변 소설의 등장을 예고했다. 1970년대의 ‘대각성‘을 우리 모두가 지배받으며 살아왔던성별 체제가 꼭 그래야 했던 길이 아니라 일종의 디스토피아였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와 대조적으로 페미니즘이 애써 목표로 삼았던 개정되고 수정된 체제는일종의 유토피아였다. 그리고 환상소설과 SF에 관심을 쏟았던리치의 동시대 작가들의 글에서, 가부장적 디스토피아에 대한반감은 페미니즘적인 (아마도 가모장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열 - P271

망만큼 핵심적인 주제였다. "현실에 기반을 둔" 소설가들과 달리 페미니스트 SF 작가들은 여성을 환상 속 행성이나 암울한디스토피아적 지형에 배치함으로써 여성이 받는 억압과 여성의 열망 모두를 극화시켰다. - P272

양성성에 대한 르 귄의 이 실험적 분석은 20세기 페미니즘SF의 가장 놀라운 성취였다. 그러나 르 귄의 겨울 행성은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얼음으로 덮인 이 세계의 정점에서 벌어지는 음모, 배반, 필사적인 도주, 그리고 서술자가 사랑하게 된 게센인의 죽음 등이다. 나아가 르귄자신도인정했듯이) 그녀의 양성성 묘사는 작품 내내 "그he"라는 대명사 사용으로 손상된다. 그녀의 게센인들이 남성이기도 하고여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그"라는 대명사는 그들을 (그저 임신을 하게 되었을 뿐인) 남성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몇 년 후 르 귄은 게센인에 관한 또 다른 소설(「겨울의 왕(1969))을 써서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반복됐던 문제 많은 "그"라는 대명사를 『바람의 열두 방향』(1975)에 실으면서 "그녀She"로 고치고 이렇게 설명했다. - P290

자매애라는 꿈에 도취되어 있던 여성들도 자신들의 ‘자매들‘과 불화를 겪으며 애석해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앨리스 워커, 오드리 로드는 미국의 제2물결 페미니즘 시기에 연결과 상처가 가져온 정치적 여파를 가늠했다. 한편 맥신 홍 킹스턴의 회고록과 주디 시카고의 설치미술 <디너파티>는 자매애 문제 (그리고 딸들의 우애 문제)를 더욱 생생하게 탐구했다. - P296

종은 이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다. "자기주장을 남성들에게 맞서 내세우지 못하니 우리끼리서로 맞서고 있다." 그녀는 은연중에 심리학자 필리스 체슬러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뜻을 내보였다. "우리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지도자들을 잡아먹었다. 이런 짓에 아주 능숙한 페미니스트들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다."체슬러 역시 이런 행동 방식의 작동 원리를 분석한 바 있다. "힘없는 다른 조직들처럼 우리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권력에 남성들식으로몸으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말로 맞서싸우거나 모욕을 주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308

이후 여러 해 동안, 로드는 레즈비언으로서 흑인 사회 내의동성애 혐오와 맞서 싸웠다.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유럽 중심주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녀는 딸과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분리주의 동성애자들을 꾸짖었다. 그녀는 백인 남성과 결혼했었고 백인 여성과 함께 아이를양육 중인 흑인 여성으로서 인종차별적 분리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그녀는 시인으로서 특권 계급 학자들이 번번이 무시하던경제적 불평등을 격렬히 비판했다. 암 환자가 되었을 때는 의료당국을 맹비난했다. 그녀는 아웃사이더의 분노를 분출시키며호전적인 자매가 되어갔다. 어울리기가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차이의 도가니들"을 대담하게 파고들었다. 이런 부단한 수고들이 에세이를 완성시켰다. (그녀는 시 작품으로 확보했던 독자층보다 더 광범위한 청중을 확보하기 위해 에세이에 공을 들였다.) - P311

로드의 격언적인 발언 대부분은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뉴욕 퀸스 지역에서 열 살 난 아이를 총으로 살해하고도 풀려난 백인 경찰을 맹비난한 시 「힘」에서 로드는 인종차별이라는불의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와 수사의 차이는 / 우리의 아이들 대신에 / 우리 자신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에 있다."52 그녀의 가장 유명한 발언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무너뜨릴 수 없다"는 그녀가 참가하지 않았다면 흑인 여성이나레즈비언이 전무한 행사가 될 뻔했던 한 학술 회의에 참가하면서 쓴 에세이의 제목이다. 로드에 의하면,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차별적 가부장제의 산물을 살펴보겠다고 하면서(…) 똑같은 인종차별적 가부장제의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모르는 척한다. "당신들이 페미니즘 이론을 다루는 학술회의에 와 있는 동안 가난한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이 당신의 집과 당신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인종차별적 페미니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 P315

1970년대 말, 페미니즘은 이미 완전히 적대 세력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경고해왔듯이 "권력이란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왔든 그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포기되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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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젠더들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터섹스는 에르퀼린 바르뱅(HerculineBarbin)일 것이다. 그/그녀가 직접 회고록을 남긴 데다 에르퀼린의회고록은 1980년 미셸 푸코의 서문과 에르퀼린에 관한 각종 자료, 에르퀼린의 생애를 모델로 한 단편 소설을 모아 재출간되었다."
이후 인터섹스의 중요한 자료로 널리 참조되고 있다. 1838년 프랑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에르퀼린은 집에서 소녀 ‘알렉시나‘로 자랐다. 여자로 길러졌지만 10대 후반까지 초경이 없고 유방이 발달하지 않아 신체적 통증에 시달리다가 이후 남성의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법적, 의료적으로 남성 판결을 받고 이를 ‘수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젊은 남성 정체성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매년 10월 26일은 세계 간성 인식의 날(intersex awareness day)이다. 에르퀼린의 생일을 기념해 1996년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소아과학회에서 간성 인권 활동가들이 벌인 시위가 계기가 되어 처음 제정되었다. 인터섹스로 태어난 에르퀼린 바르뱅의 존재는 성 정체성을 단순히 사회적으로만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생물학과 사회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 모두를 - P205

바꿔야 하는 일이다. 성정체성을 비롯해 몸 연구에서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 P206

성별 의제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차별을 정상화하는 성별 분업이는 곧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을 극복하기 위한 평등권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성 자체의 구분을 문제 제기하는것이다. 물론 이 두 의제는 상호 보족적이며 현장의 상황에 따라달라진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이고 의미 없는 차이인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차이는 그 자체로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의미 없는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게나 ‘다양성‘ 등으로 탈정치화된다. 차이는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기 위한 전제다. 세상의 어떤 차이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이 차이의 정치학이다. 그러므로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이해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고 또 연대해야 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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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6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6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부. 폭발하는 1960년대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 [아빠]
에이드리언 리치 [며느리의 스냅사진들]
니나 시몬 <해적 제니> <힘을 빼고> <네 여자>
글로리아 스타이넘 vs 헬렌 걸리 브라운
수전 손택 vs 존 디디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2부. 폭발하는 1960년대

이제 그녀는 날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게, 붉은
하늘의 상처처럼,
그녀를 죽인 기관차처럼 -
그 웅장한 무덤, 밀랍의 집 위를 나는
붉은 혜성처럼.

웅장한 무덤. 여성들이 갇혀 있는 역사의 무덤을 말하는 걸까? 곤충학 교수(『뒹벌과 그들의 생태』의 저자)였던 그녀의 죽은 아버지가 어쩐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상상 속웅장한 무덤일까? 그녀가 여덟 살 때 죽은 아버지인데도? 밀랍의 집은 또 어떤가. 실제 벌집을 가리키는 것에 더해, <레이디스홈 저널〉의 지면 속에서 영원히 손짓하며 유혹하는 1950년대의 가정생활이라는 가짜 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혹은 코트그린 그 자체, 남편이 런던에서 자신의 정부와 문우들과신나게 나다니던 동안 그녀가 두 아이와 함께 생매장당했던 그영국 역사의 환상이라는 바로 그곳일까? - P119

에어리얼이라는 이름의 주도적인 요정이 등장하는 『템페스트』에서 셰익스피어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탐구했는데, 그녀는 이 사실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히브리어 ‘아리엘 Ariel‘이 ‘신의 암사자‘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쓸쓸했던 2월 아침그녀가 책상에 놓아두었던 원고의 팩시밀리 모사본을 보면 두제목을 두고 그녀가 얼마나 오락가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아빠‘라는 제목으로 소녀 시절의 의존적 상황을 (아마 분노를 품거나 웃음을 지으면서) 되돌아본다는 의미를 담았고 다른하나는 격노한 암사자‘에어리얼‘로서, 또는 가부장적인 프로스페로"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율적인 자아를 지닌 존재나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적 존재가 된 요정으로서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 P124

동시에 플라스는 이 동년배에게 격렬한 경쟁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의 충동과 재능을 공유한 자기 세대의 유일한 여성이라고 제대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누가 라이벌일까?" 플라스는 일기 속에서 자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마 가장 근접한 사람은 에이드리언 리치일 것"이라고 자답했다. - P129

그 다음 여덟 개 단락은 에세이 같기도 하고 보고서 같기도하다. 어쩌면 리치도 베티 프리단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여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2의 성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가부장제 문화라는 기본법 아래에서 여성성의 신화를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그녀는 세 번째 단락 첫 문장에서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들과 함께 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꽉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여성은, 특히 주제넘게 생각이란 것을 하는 여성은 정말 괴물일까? - P131

두 번째 모욕적인 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리어드에서 레슨을 받던 시절에 일어났다. 커티스음악원이 입학을 거부한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들이흑인을 입학시킨다고 해도 무명의 흑인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약 무명의 흑인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게 무명의 흑인 소녀는 아닐 것이며, 만약 무명의 흑인 소녀를 입학시킨다고 해도 그게 몹시 가난한 무명의 흑인 소녀는 아닐 것이다." 이 입학 거부 사건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녀의 새 이름이 생겨났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애틀랜틱시티 바‘에서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 일자리의 요구 사항대로 노래도 같이 불렀다. 니나(남자 친구가 붙여준 이름) 시몬(프랑스배우 시몬 시뇨레를 오마주하며 사용한 이름)58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딸이 악마의 음악에 젖어 산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이름이었다. - P138

시몬이 발표한 <해적 제니> <힘을 빼고> <네 여자>는 (음조나 구성 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곡들이다) 인종의 성 정치에 관한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 P142

나중에 그녀가 "미합중뱀the United Snakes ofAmerica"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복수극 환상인 <해적 제니〉는, 흑인의 조국으로 탈출하기를 염원하는 시몬의 연출 기량을 보여준다. - P143

노래의 유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힘을 빼고>는 블랙 파워 운동에 참가한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편견을 겨냥한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 "자신들의 정치 활동을 남성성 행사와 혼동하는 (・・・) 흑인 남성 운동가들 사이에 퍼진 유감스러운 증상"이라고 칭했다. - P145

<네 여자>는 시몬의 친구인 제임스 볼드윈의 베스트셀러 산문집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른다』(1961)가 출간되고 나서 4년뒤에 나왔다. 시몬의 노래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애를 쓴다. "흑인 여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사항들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될 때까지 영원히 같은 곤경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이 노래의 취지였다"고 시몬은 『너에게 주문을걸 거야』에 썼다. 블랙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 니나 시몬은 블랙 페미니즘의 통찰을 표현해냈다. - P148

1980년대에 오면 스타이넘은 이런 설명과 함께 "본질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이론(성별이란 본래 생물학적으로 갖추고 태어나는 고유한 것이라는 이론)과 "사회적 구성주의"로 불리게되는 이론(시몬 드 보부아르가 표현했듯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은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이론) 간의 논쟁을 다룬다. 선견지명을 보여준 남녀공학에 다니는 여대생 베타의 도덕적 무장해제」의 결론은 "피임 혁명의 진짜 위험"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의 역할 변화에 상응하는 남성의 태도 변화 없이 여성의 역할 변화만 가속화될 때 위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 P157

성교가 아니라 자위 행위가 가장 강렬한 오르가슴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페넬로페*는 이제 태피스트리를 짰다

* 트로이전쟁에 출정한 남편 율리시스의 귀향을 20년 동안 베 짜기를 하면서 기다린, 그리스 신화 속 인물. - P161

풀었다 하면서 남편 율리시스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말,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의 성적 반응』이 확산시킨 주장(해방된 존재든 해방되지 않은 존재든 남성은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성의 성적 만족 면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의 의미를 널리 풀어놓게 된다. - P162

대학교 2학년 때 손택은 "1947년(열네 살 때)부터 1950년8월28일(열일곱 살 때)까지 사귀었던 연인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모두 합쳐 서른여섯 명이었다. 그녀의 전기 작가 벤저민 모저의 말마따나 ‘바이의 전진‘이라는 제목의 이 목록은 그녀가 "이성애자와 만나는 비율을 높여 이성애자로 변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는 짧은 구애 기간을 거쳐 사회학 강사였던 스물여덟의 필립 리프와 결혼했는데, 그때 그녀의나이는 겨우 열일곱이었다. 결혼 직전 그녀는 일기에 단순하고 엄숙하게 이렇게 썼다. "1951년 1월 3일 : 나는 내 의지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 자멸을 향해 가는 내 의지를 두려워하면서, 필립과 결혼한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녀는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 나오는 현학적인 안티 히어로에 빗대 이렇게 말하곤했다. "나는 캐저반 씨와 결혼한 것이었다." - P163

베트남에 갔던 여성 작가들은 시인 메리 매카시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아마 이 전쟁의 승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전쟁이 자신들의 모국과 언어, 그리고 때로는 역설적이게도 이들 자신을 좀먹으며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57 매카시는 1967년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특히 1968년 북베트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국인"으로서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잃었다. 손택의 「하노이 여행」이 발표되자 매카시는 자신과손택 둘 다 "양심의 시험에 이끌린 것"이라고 말했다. 59 동시대의 다수 남성들처럼 매카시와 손택은 미국의 전쟁광들을 비난하는 쪽에서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응원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 P178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의 항의는 일부 블랙 파워 운동 지도자들의 미소지니에 반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960년대 중반, 메리 킹과 케이시 헤이든은 민권운동 내에서 여성에게 보조적 역할을 맡기는 것에 반발하는 항의문을 돌렸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가정이 널리 퍼져 있고 깊이 뿌리박혀있으며, 여성은 흑인보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피해를 입는 것만큼이나심각한 피해를 받고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묘사하기 위해 1930년대에 부각된 ‘성차별주의"라는 단어가 "인종차별주의"에 상응하는 용어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내 저항 집회에서는 빈정거림과 야유 속에서도 ‘여성해방‘에 관한 결의가 논의되었다. 여성들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며 연대했던 남성들이 내보이는 성차별주의와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 P188

언론의 자유 운동조직, 신좌파단체, 반전운동 단체들 내의 성차별주의 역시 여성 운동가들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좌파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들이 전달하는 발언을 타이핑하거나, 직접 정책 수립을 하는 대신 커피를 타면서 ‘구질서‘를 대체하는정치를 하겠다는 남성들을 돕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68년 컬럼비아대학교 시위 때는 컬럼비아대학교의 남학생들과 바너드대학교의 여학생들이 함께을 합쳐 경찰의 야만적 행위에 용감하게 맞섰지만, 오직 여학생들만이 "겨우 공중전화 부스 크기만 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해 여름 이 반체제 학생들의 대변인이었던 마크 러드는 "여자 친구에게 자기는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니 가서 ‘병아리해방 전사‘ 수업을 들으라고 조언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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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발발>에서 만났던 고정희 시인의 시를 또 본다.
수지 오바크 <몸에 갇힌 사람들>

2장. 섹슈얼리티 정치학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고정희의 시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남자는 사나운 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자는 움직일 필요 없이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자의 기분과 이익만이 법이요 정의인 사자의 우리 안에서 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 졸이고 눈치보고 비위 맞추면서 끊임없이 사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자가 되는 길‘이다. 사회, 학교, 가정, 국가, 지구촌,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여자가 남자에게 맞춰야 하는 한남성은 "네 탓이오" 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는 추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사자 우리 안에서 변해야 할 것은 세상과 여자들이다. 사자는 자아 구조 조정이라는 고통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흑인이 흑인으로 사는 한 백인이라는 범주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구를 숭배하는 비서구가 서구의 권력을 지속시켜주는 것처럼, 남자를 남자이게끔 만드는 것은 여자다. - P125

버스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 걱정될 정도였다. 현재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하기도 한다. - P137

임신 중단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콘돔은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인구 조절이 가능해졌고 여성은 임신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평생을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는 여성이 더 많을 정도였다. - P140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출산 과정에 국한할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섹스의 전제는 출산이 아니라 피임이다. 계획에 따른 출산은 피임에서 시작돼야 한다. 지금은 순서가 반대다. 한국 사회는 포르노 산업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남성 성기 중심의 삽입 섹스에 집착한다. 이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성교는 성 활동의 극히 일부분이다. 성에는 다층적 차원의 사회성이 있다. 인간은 재생산(출산), 자아실현, 쾌락, 정체성, 건강, 친밀감 형성, 치유등 다양한 이유로 성 활동을 한다. 내 주변에는 무성애자(無性愛者, asexual)도 상당히 많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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