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생태학 사상 - 문화, 기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케이시 맨 콩 럼 지음, 이동후 옮김 / 한나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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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쿤스의 후기 산업 사회 예언자들은 사회 내 빠르게 전개되는 기술적 혁신과 확산의 도전과 기회에 관한 일종의 공적 논의에 참여했다. 기술적 혁신과 확산의 속도가 빨라지면서,20세기는 충격적이진 않더라도 다수의 근본적인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변화가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도 치러야 했다. 세계 환경이 점차 악화되는 것이었다. 천연 자원은 빠르게 고갈되었고,한때 묻지 않았던 수로가 지금은 산업의 화학 유해물로 오염되었으며, 숲과 습지대는 파괴되었다. 더 많은 고속도로가 지어지면서 도시 거리는 더욱 나빠진 교통 상황으로 막히게 되고, 도심의 공기는 자동차와 산업 배기물에서 나온 오염 물질로 가득 찬다. 인간의 희생 또한 확대된다. 예를 들어 미국 자체에만 매년 자동차 관련 사망자가 수십만명이 된다. 이러한 사망자는 산업 관련 사망, 상해, 그리고 온갖 종류의 사회적, 심리적 질환과 같은 수천 명의 또 다른 기술적 사상자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더 열거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반에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생겨난 환경적 결과를 삶의 문제와 상호 연결해 생각해 보는 생태학적 -58쪽

패러다임 혹은 방식을 촉진시켰다는 점이다.(58) "전자 혁명"이란 용어는 캐나다에서 맥루언과 함께 가르쳤던 토마스 L.맥파일이 1950년대 부르기 시작한 "전자 식민주의"와 동시에 생겨났다. 맥파일에 따르면, 전자(60)식민주의는 "저개발국이 엔지니어,기술자,관련 정보 규악과 함께 커뮤니케이션 하드웨어와 외국산 소프트웨어를 수입하면서 만들어진 서구와의 의존 관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국내의 문화,습관,가치,사회화과정 자체를 다양하게 바꿔 놓는 일련의 이질적인 규범,가치,기대를 정착시킨다.(61) -58,60,61쪽

요컨대, 1960년대 말 미디어 생태학이 이론 집단 및 이론적 시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20세기가 되면서 시작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지적 맥락 내 변화와 미디어 기술에 관해 비슷한 관심을 공유하던 사상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생겨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학제적 측면 혹은 이론 집단의 갈등 모델의 시각에서 살펴볼 때, 그것은 비판학파가 북미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반대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인 주류(매스 미디어 내용)효과 전통에 대한 일종의 대응이었다. -63쪽

감각 환경으로서의 미디어 : 생리-지각적 수준에서 우리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감각 환경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사용해 당면한 환경을 지각한다. 우리가 생리적 수준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 우리의 환경을 지각하는지는,부분적으로 우리가 물려받은 감각 기관에 의존하게 된다. 다른 감각 기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을 다르게 지각(78)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들의 감각이 주변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예를 들어,시각 장애자는 보통 시각의 부재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강화된 청각,촉각,후각 미각을 갖게 된다.-78,79쪽

맥루언(1964)이 지적했듯이,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감각의)확장이다.모든 미디어는 일련의 감각적 특성을 구현한다.각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사용할 때,사용자는 이러한 미디어의 특성이 정의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감각을 쓰게 된다.읽기 행위는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거나 중시한다.라디오를 청취하는 행위는 우리의 청각을 확장한다.비디오 게임은 시각,촉각,청각이 결합된 것을 확장시킨다.다르게 표현하자면,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느끼거나 재/구성하는 현실은 우리가 환경과 우리 중간에 놓인 무언가로서,미디어의 지각 기관적 특성에 따라 여과된 현실판이다.-79쪽

물론 이 점은 변화된 감각을 보상하려는 시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예를 들어,우리가 라디오의 야구 경기를 시각화하려고 하는 것)그렇지만 특정 미디어를 사용하는 행위는 우리의(생물학적으로 정의된)감각 기관을 재구조화한다.이것은 맥루언(1964)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관찰한 근본적인 지각 수준이다.이러한 경구를 통해 맥루언은 미디어의 변화가 어떻게 우리의 감각 기관을 재구조화하는지,그리고 그러한 감각 변화로 인해 우리가 주변 세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감각적 정보를 수용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가리킨다.이러한 수준에서 환경으로서의 미디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특히 우리의 미디어(혹은 주어진 미디어)가 부호화 혹은 해독화하는 감각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할 때 관여하는 감각 환경을 살펴보는 것이다.-79쪽

상징 환경으로서의 미디어 : 두 번째 상징적 수준엣,우리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일련의 독특한 부호와 구문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된 상징 환경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표준 성문 영어를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사용하기 위해,우리는 단어(즉 그것의 상징과 지정된 의미)와 문법(의미의 구성을 지배하는 문장 구성의 규칙과 규정 등)을 습득해야 한다.'능숙한'영화 제작자가 되기 위해,우리는 영화 언어 및 문법의 시청각적 요소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하지만 이러한 미디어 또는 어떤 다른 미디어를 습득하게 될 때,우리는 미디어 자체의 상징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우리가 시각,청각,후각,촉각,미각 등을 통해 주변의 물리적 세계를 느끼지만,미디어의 상징 세계로부터 그것을 생각하고,지각하고,이야기하거나 재현하게 된다.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우리 언어의 한계가 우리 세계의 한계이다.언어 내부의 상징적 구조 혹은 논리는 규정 요소로서,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 주변 세계라고 믿는 것,즉 우리가 '생각하는'세계와 '아는'세계에 대해 개념화하고 생각하게 된다.-80쪽

위와 같은 시각에서,작가에게 세계는 책처럼 '쓰여 있고' 영화 제작자에게 세계는 일련의 병치된 이미지와 소리처럼 '보인다'. 이렇게 '환경으로서의 미디어'를 미시적 상징 수준에서 이해해 본다면,우리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사용'할 때,그것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 한가운데 있게 된다. 이 점에서 미디어 생태학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본질적인 상징 구조가 인간의 지각,의식 또는 생각 과정에 맡는 역할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예를 들어 특정 쓰기 체계가 사용자 경험의 개념화와 표현 방식을 어떻게 구조화하거나 정의하는지에 관심을 보인다.-80쪽

현실에서 사람들이 정보를 수집하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미디어를 사용할 때,감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상징적 수준의 연구는 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미디어를 두 가지 종류의 환경(감각 환경과 상징 환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구성하는 데 이 두 환경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81쪽

환경을 미디어로 이해하기 : (전략)전통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디오,신문,텔레비전,영화,녹음기,컴퓨터 등과 같은 정보 기기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미디어 생태학은 이런 것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만,사회적 환경과 같은 환경의 상징적 구조가 인간의 상호 작용 또는 문화의 생산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이와 같은 수준에서 환경은 이론상 미디어로 간주될 수 있다.포스트먼의 말을 빌리자면,학교라는 제도는 독특한 언어와 규칙은 거기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일하는 방식,서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러한 환경 바깥의 모든 것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 등을 특정 짓는다.(중략)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극장,참배장소,사교클럽,침실 등과 같은 사회-상징적 환경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디어로 개념화해 볼 수 있다.-82쪽

첫 번째 개념은 커뮤니케이션 학문의 정규 과학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주로 라디오,tv,신문,cd 플레이어 등과 같은 정보 기기로 이야기한다. 반면,두 번째는 미디어를 환경으로,또는 환경을 미디어로 이해하는 미디어 생태학적 개념이다.이러한 개념에 따르면,우리는 미디어의 상징적 구조 안에 놓이게 된다.즉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목적을 위해 미디어에 관여하게 된다.-83쪽

"환경으로서의 미디어"에는 세 가지 서로 연결된 이론적 명제가 있다. 이론적 명제 1 : 우선 미디어 생태학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가 자료나 정보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중립적이거나,투명하거나,객관적인 연결 도관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대신 미디어 본래의 물질적 구조와 상징적 형태가 정보의 부호화는 내용 및 방식 또한 해독되는 방식을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이러한 이론에 있어,미디어의 상징적 형태는 정보가 제공되는 부호의 특성(예로 들어,유추적 상징 대 디지털 상징)그리고 상징이 결합되는 구조(예를 들어,명제적 구조 대 표상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미디어의 물리적 구조는 부호를 운반하는 기술의 특성과 정보의 부호화,전송,저장,회수,해독화,유포 등을 위해 필요한 물리적 조건을 가리킨다.-83쪽

이러한 이론적 명제가 중요한 이유는 미디어의 구조가 정보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미디어 생태학 패러다임의 주된 측면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영화가 잘못 각색했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독자를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은 각색이 영화의 극작가,감독,제작자,배우 등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불평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인 설명일지 모르지만,미디어 생태학의 첫 번째 이론적 명제는 소설과 영화라는 두 미디어에 담긴 것을 똑같은 정보라고 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제안할 것이다. 대신 소설과 영화는 서로 다른 상징적 물리적 구조나 형태를 구현하고 있고,따라서 이들이 똑같은 정보원(소설 속에 담긴 이야기)에 기반을 하더라도,수용자,독자,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일련의 서로 다른 정보 혹은 현실이다.-84쪽

이론적 명제 2 : 본질적으로 모든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개념과 발전 뒤에는 항상 어떠한 인간적 근거와 의도가 있다.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근거와 의도는 문제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물리적,상징적 형태의 결정을 돕는다. 이론적 명제 3: 두 번째 명제의 연장선상에서,미디어 생태학은 미디어의 본질적 편향성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결과가 촉진된다고 가정(85)한다.이러한 이론적 명제는 미디어 생태학의 주요 이론적 쟁점 중 하나인 기술과 문화의 관계(혹은 그 반대의 관계)특히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론적 연속체: 연성 결정론, 기술/문화 공생론.경성 결정론 참고.-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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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3-31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캐리 : 문화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의식(ritual)으로서의 미디어 / 닐 포스트만 : 미디어 생태학, 미디어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심 / 해롤드 이니스 : 커뮤니케이션 편향성(bias).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적응의 의미.
 
사회학의 문제들 동문선 문예신서 234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신미경 옮김 / 동문선 / 2004년 4월
절판


사회학과 연계 학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당신의 저서 <구별짓기>는 사회학이 사회정신분석학과 흡사해지는 것은 사회학이 기호와 같은 대상에 직면할 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그 뒤를 이어 통계표와 설문조사 요약, 그리고 발자크나 졸라, 프루스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학적 유형의 분석이 나온다. 그 두 양상이 어떻게 분절되고 결합될 수 있는가?-32쪽

그 책은 소수의 케이스에 의존하고 있는 민족지학적 관찰과,관찰된 케이스들을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우주 속에 위치시켜 그 규칙성을(32) 성립시켜 주는 통계학적 분석이라는 두 양식의 지식을 통합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예를 들어 부르주아 식사와 민중의 식사 사이의 대조적 성격은 다음과 같은 항구적인 특질들로 요약된다.민중들이 행하는 일체의 소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기능이다.음식물의 경우 음식물은 든든할 것을, 속을 채워 주기를,스포츠에서 요구하는 힘(보디빌딩의 단련된 근육들)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부르주아의 경우 우선권은 형식(격식을 차린다)에게 돌아간다. 형식의 우선권은 기능을 억압하고 검열하는 일종의 미학화를 내포하는 것으로,이것은 포르노그래피를 부인하고 승화시키는 에로티시즘이나, 기능에 우선한 형식의 특권으로 정의되는 순수 예술에서 잘 나타난다. 강우량 측정의 통계학 자료처럼 그저 엄격하게 확인된 자료들을 실제로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적 분석,(심하게 표현하면)문학적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질적 분석은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관찰된 모든 실천들의 원칙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32,33쪽

사회학자의 모순 중 일부 - 경험주의 이론은 현실로부터 구조를 차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건설주의 이론은 대상을 구축,건설함으로써만이 대상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으로 서로 대립해왔다.(중략) 사회계급이나 사회적 분화란 학자나 기타 사회적 행위자들에 의해 구축된 하나의 구성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계급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사회 계급은 사회학적 구성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사회 계급을 만들어 내려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 계급이 존재하는 셈이다.-96쪽

사회적 세상에 대한 재현은 현실 속에 이미 존재하는 분류를 단순히 기록한 것일까,아니면 분류적 도구를 적용해서 얻어진 건축물일까? 행위자들은 일생 동안 스스로를 분류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이미 그 자체로 분류된 사물들(행위자의 계급에 결부된 사물들)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자들은 타인들을 분류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타인들이란 그 행위자들이 분류한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적용시켜 감으로써 스스로를 분류하는 사람인 것이다.따라서 연구 대상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의 분류 그 자체이다. -102쪽

청춘은 단어에 불과하다 중 / 청춘과 노년을 논리적으로 분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권력의 문제,공유한다는 의미에서 권력 분할의 문제이며, 이것은 다른 영역(性)에서 도 나타난다. 연령(성,계급)에 따른 분류는 경계선을 긋는 일로서, 각자가 스스로의 자세를 정하고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질서를 생산하는 일이다.-158쪽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청춘과 노년 사이의 경계는 단순히 젊고 나이 들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과 나이 든 이들 사이의 투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적 나이와 생물학적 나이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158쪽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 / 여론조사가 내포한 세번째 전제는, 만인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합의, 즉 그것이 질문을 던질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라는 하나의 동의를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241쪽

모든 경우에 있어서 힘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 힘을 행사하는 사람의 권력의 합법화를 목적으로 하는 담론을 동반한다는 것, 이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힘들의 역학 관계는 그것이 은폐되면 은폐될수록 더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중략)오늘날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발언의 등가물은 곧 여론이 우리와 함께한다이다. 여론 조사가 행사하는 근본적인 효과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의 통일된 의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243)게 만드는 것,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합법화이며 그 정치를 형성시켰던 힘들의 역학 관계,혹은 그 정치를 가능하게 만든 힘들의 역학 관계를 강화하는 일이기도 하다.-243쪽

여론 조사의 효과는 질문을 부과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도덕적인 응답을 정치적인 응답으로 변형시킨다. -245쪽

여론 조사가 제기하는 질문들은 응답자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제기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여론 조사에서 얻어진 응답들은 다양한 사회적 범주의 응답자들이 현실에서라면 기꺼이 대답하게 될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248)고 해석된다는 점, 이것이 바로 모든 여론 조사와 모든 정치적 질문(선거 여론 조사)의 유발시키는 문제 부여 효과이다. -248쪽

여론이 형성되는 상황,특히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존에 형성된 의견들, 달리 말하자면 특정 사회집단들이 지지하는 여러 의견들과 직면하게 된다.따라서 그 의견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상이한 의견을 주장하는 사회 집단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된다. 이것이 위기 상황이 생산해 내는 정치화 효과 원칙이다.(중략)실제 상황에서 의견들이란 곧 힘들이다. 의견들의 관계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힘들의 갈등인 것이다.-250쪽

여론 조사는 이미 형성된 의견들에 대해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며 또 그렇게 생산된 의견들을 단순히 통계학적으로 취합해서 여론이라는 인공물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설명했을 뿐이다.-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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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 한 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 Film Story 총서 1
정종화 지음 / 한국영상자료원 / 2008년 3월
품절


8장 암흑속의 모색 1980년대 한국영화(1980~1989) 중 일부 - 1. 제작 자유화 그리고 할리우드 지배 저지투쟁. 1980년대는 우리 영화를 '방화'로 부르던 시대였다. 영화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계와 그 영화를 냉소하고 자조하면서,언론들은 외국영화에 주도권을 내주고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렀던 한국영화를 꼬집으며 그렇게 불렀다. 관객들 역시 외화에 비해 재미없고 만듦새가 뒤떨어지는 우리 영화를 방화라 부르며 불신과 멸시를 담았다. 항상 성우들의 후시녹음 목소리가 입혀지는 그 영화에 말이다. 방화는 '변방의 영화'라는 뜻으로,일제시기 '대동아연방'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지칭이다. 그러고 보면 1919년 이후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한국영화를 호명하던 방화는 우리 영화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하는 좀 더 자기비하적인 표현이었다.-190쪽

198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수식한 유행어는 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일컫는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1980년대는 우리 영화가'방화'라는 이름을 벗고 한국영화로 탈바꿈하는 쇄신의 시기였다.-190쪽

1979년 유신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통제정책을 이어받았고 사전,사후 이중의 검열로 영화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의 영화정책은 단지 20여 개 영화사만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외국영화를 수입하도록 한 1973년 제4차 개정영화법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국산영화의 제작권은 연초에 각 영화업자에 의무제작편수를 배정하고 제작능력에 따라 추가 배정하는 방식이었다.-190쪽

한편 외국영화의 수입권은 우수영화 선정작,대종상 그리고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만든 영화사에 배정되었다. 1985년 영화법이 다섯번째로 개정되었다. 제5차 개정영화법의 핵심은 영화사의 등록방식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한 것이다. 예탁금 납부라는 단서 조항이 있었지만 기재나 촬영소 같은 과거의 허가 요건 없이 누구나 영화사 등록을 하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하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독립영화제작제도 역시 도입했다. 제작,수입,수출을 독점하던 과거 20개사의 허가 받은 영화업자가 아닌,그간 영화제작의 문호에서 차단당했던 감독,시나리오 작가,배우,프로듀서 등 영화인이 제작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191쪽

제작 자유화로 인한 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곧이어 미국영화의 시장개방 압력이 닥쳤기 때문이다.1986년 12월 31일 공포된 제6차 영화개정법으로 외국영화사의 국내 영화업이 허용되었으며,1988년 다국적 영화배급사인 UIP를 시작으로 미국의 20세기폭스사가 국내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영화시장에 진출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직접배급은 한국영화산업의 배급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기존의 영화배급구조는 제작사나 수입사가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흥행권을 흥행업자에게 넘기면 흥행업자는 다시 지방의 영화관들과 상영 계약을 맺는 간접배급 형태였다. UIP는 서울,지방 가릴 것 없이 영화관과 직접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새로운 유통 질서를 시도했다.-191쪽

올림픽 기간 중인 1988년 9월 24일 추석 프로그램로 UIP 직배 1호 <위험한 정사>(1987)가 개봉하자,영화계는 한국영화의 존립 기반이 무너졌다며 격렬히 저항했다.대부분의 영화사는 여(191)전히 한국영화 제작에 공을 들이기보다 외화 흥행 수익에 더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88년 9월 19일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철야농성으로 시작한 영화인들이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서 점거농성을 하며 더욱 격양되었다. 1989년 3월에는 정진우 감독이 운영하는 씨네하우스에서 UIP 직배 영화 <007리빙 데이라이트>를 개봉했다. 5월 씨네하우스 극장에 뱀 자루가 발견되었고,8월에는 방화마저 일어나는 등 직배 반대투쟁은 극에 달했고 정지영 감독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191,192쪽

그로부터 7년 후인 1996년,UIP 직배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이면에는 직배 영화 배급권을 둘러싼 극장주들 간의 암투가 작용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이 복합관 공사를 진행하던 중 씨네하우스가 먼저 직배망에 가담하자 방화사건을 배후 조종했던 것이다. 직배 반대운동의 막후에서 비밀리에 UIP와 영화 수급 계약을 맺었던 그는 1990년 12월 UIP의 <사랑과 영혼>을 서울극장에 내걸었고,이어 워너브라더스,20세기폭스,월트디즈니 등 직배 3사의 배급 대행을 맡으며 미국 직배사가 한국시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 구실을 했다.-192쪽

2.1980년대 대표 장르 일부 / 1970년대는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인 호스티스 영화가 주류였다면 1980년대에는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3S정책'과 맞물려 성애영화,즉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데 주력한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으로,이른바 부인 시리즈의 원조가 되었다. 한 여대생의 성적 탐험을 그린 <무릎과 무릎 사이>,에로영화의 전통적인 대상을 성매매 여성을 다룬 <매춘> 등이 이어지며 성적 스펙터클의 표현 수위는 한층 더 진보해졌다.-193쪽

에로영화들은 현대극뿐만 아니라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양반집안 씨받이 여성들의 수난을 다룬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자녀목>,<씨받이> 등과 가난 때문에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을 다룬 <뽕>,<땡볕>,<감자>등이 그 대표작이다. 이른바 '토속에로'장르는 <피막>,<여인잔혹사 물레야물레야>,<씨받이>처럼 해외영화제의 주목과 수상을 끌어내기도 했고,<뽕>,<어우동>처럼 '상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산딸기>,<변강쇠> 처럼 토속에로들은 대부분 시리즈의 양산을 흥행 방편으로 삼았다.-193쪽

'공윤'과 검열 파문/ 1980년대 영화계는 특정 집단의 압력과 경직된 검열 정책으로 인해 영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일쑤였다. 1981년 <도시로 간 처녀>가 운전기사와 버스 안내양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운수노조와 한국노총의 시위로 상영이 갑작스레 중단되었고,1984년 전국 비구니들의 단체 행동으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중광의 허튼 소리>를 둘러싼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와 영화계의 마찰이 극에 달했다. 심의에서 열 군데나 가위질을 당한 김수용 감독은 은퇴를 선언했고,표현의 자유라는 해묵은 논쟁이 되풀이되었다.-196쪽

1985년 1월부터 영화 검열 업무가 문공부에서 공윤으로 이관되며 검열이라는 명칭을 심의로 바꾸었지만,화면 삭제,화면 단축,대사 삭제 등의 표시로 불온 사상,반사회적,공안질서 저해라는 낙인을 찍는 국가의 통제는 여전했다. 심의를 통해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은 더 멜로드라마적인 구성으로,<어둠의 자식들 2>가 원제인 이장호의 <바보선언>은 블랙코미디라는 궤도 수정으로 리얼리즘 화법을 탈색시켰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다 보니 <애마愛馬부인>이 <애마愛麻부인>으로 <영웅만들기>가 <영웅연가>로 바뀌었다. 1987년 6월 1일 결국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대폭적인 소재 개방이라기보다 외설적 내용에 대한 '가위질'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했다.1988년 공윤의 심의를 마친 한국영화 84편 중 35편이 이른바 '벗기는 영화'일 정도로 에로티시즘 영화가 판을 쳤다. 외설물에는 관대하고 사회적 발언에는 가혹한 것이 공윤의 검열 기조였다.-196쪽

3.영화문화의 변화 / 1980년대는 극장 중심의 전통적인 상영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1980년 12월 컬러TV가 등장해서 각 가정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VTR의 보급은 비디오 시장이라는 새로운 수의 창구를 마련하였다. 영화매체는 더 이상 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린트로 한정되지 않았다. TV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외화 프로그램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였고,비디오 매체 역시 인기가 높았던 외화의 극장 흥행을 잠식했다. 1986년 여덟 기구에 한 대꼴로 보급되었던 비디오는 1960년대의 TV수상기처럼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신매체였다.-197쪽

비디오 판권을 제작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슨 1980년대 중반이다.비디오 시장이 영화 관객을 일부 빼앗아감으로써 영화시장을 축소시키는 요인도 되었지만 제작자본의 새로운 공급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극장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나 심지어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영화로부터 수익을 기대할수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 시장은 영화제작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87년을 전후로 한국영화의 비디오 판권료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강수연의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계기로 <씨받이>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뽕>,<어우동>,<변강쇠>,<내시>등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5,000개 이상 팔렸다. 이즈음 방화가 장사가 된다는 통념 아래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비디오 판권이 팔리기 시작했다.비디오 매체의 출현은 한국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쪽

반면 극장가는 계속되는 불황으로 대작영화의 리바이벌,심야극장 개관 등 다양한 흥행방식을 모색하였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197)TV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펼쳤던 전략이 와이드 화면과 공포영화였던 것처럼,컬러TV에 빼앗기는 관객을 붙들기 위해 대형영화의 리바이벌 상영과 <망령의 곡>,<월녀의 한>,<귀화산장> 등 괴기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 <닥터 지바고>가 75일의 롱런과 함께 3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벤허>같은 70MM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 1982년 3월 13일 밤 11시 30분 스카라극장에서 <엄마 결혼식>시사회가 열리며 심야상영이 처음 시도되었고,이어 <애마부인>의 심야상영은 젊은 연인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197,199쪽

1980년대 영화문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81년 공연법 개정으로 인한 소극장의 등장이다.300석 미만의 소규모 극장이 자유롭게 설립되자 그동안 개봉관,재개봉관,3~4번관 순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추세에서 시설이 좋은 개봉관과 집 주변의 신축 소극장으로 영화관람문화가 재편되었다.1986년2~3개관짜리 복합상영관의 등장 역시 극장가의 지형 변화를 초래했다.제작자유화와 수입 개방으로 쏟아지는 물량을 소화해낼 많은 극장이 필요해지자 대형극장들은 덩치를 현실에 맞개 축소하고 스크린 수를 늘리는 쪽으로 실리를 추구했다.-199쪽

4.영화운동과 독립영화 중 일부 / 저예산,기동성,간편한 조작법,대량복제 가능 등의 장점을 지닌 비디오카메라는 1980년대 영화운동의 판도를 바꾸었다.특히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광주민주화항쟁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비디오가 영화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실천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202쪽

시네필 문화의 생성 :1980년대 비제도권 영화운동이 독립영화로 이어졌다면,외국 문화원의 영화클럽을 중심으로 시네필 문화는 제작과 비평 양쪽에서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자양분이 되었다. 1977년 프랑스문화원을 거점으로 한 시네클럽과 1978년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연구회를 통해 전양준,정성일,강한섭,김홍준 등 이른바 문화원세대가 형성되었다.1983년 여름방학부터 서구 고전 영화제를 개최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도 시네필들의 메카가 되었다.박찬욱이 영화광으로 살며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곳을 통해서다.-203쪽

1989년 장산곶매의 <오!꿈의 나라>로 민중운동 도구로써의 영화의 기능이 정점에 달하자 시네필 문화는 위축되었다.이후 시네필 문화는 비디오테크가 보급되면서 1992년 문화학교 서울을 비롯한 사설 시네마테크를 통해 다시 명맥을 이었다.2002년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서울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센터에 안착하며 시네필문화는 다시 만개했다.-203쪽

4장 다시 르네상스,한국영화(1990~1999):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1990년대 초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게 된 맥락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성,대우 등의 가전회사는 비디오 프로그램 확보를 위해 일정 부분 영화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직배 이후 홈비디오 시장마저 할리우드 직배사가 장악하자,대기업들은 비디오 판권 확보에 다급해져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든 것이다.(212)(중략)1995년과 1996년 흥행 순위 톱 텐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의 전체 혹은 부분 투자 작품일 정도로,대기업 자본은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지방배급업자의 자금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충무로 제작 시스템은 비디오와 케이블TV 판권을 매개로 대기업과 결합했다. -212,213쪽

5.영화청년의 시대 : 1970년대 후반 프랑스,독일 문화원의 영화 모임을 통해 출현한 영화광 출신들이 이른바 '문화원세대'라면,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열혈 영화마니아들은 시네마테크세대라 부를 수 있다. 외국의 문화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가영화,예술영화 감상 공간은 영화공간 1895,씨앙씨에,문화학교 서울등 복사판 비디오를 상영하는 소규모 비디오테크 공간으로 이어졌고,이를 통해 성장한 영화청년들은 말로만 듣던 고전영화를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로 결집했다.-228쪽

영화청년들의 속에는 늘 영화잡지가 들려 있었다.1995년 5월,한겨레의 저널리즘 감각으로 영화광 문화를 증폭시킨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과 이보다는 좀 더 마니아층을 겨냥한 월간지 키노가 창간되었고 12월에는 할리우드 기사와 사진을 직송받는 라이선스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이어졌다. 영화전문지를 통해 영화문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고,영화비평 담론은 일상화되었다.문화학교서울,민예총아카데미,한겨레문화센터 등의 대중 영화강좌 역시 영화청년들의 갈증을 풀어주며, 영화비평의 대중화에 물꼬를 텄다.-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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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품절


2008년 3월에 일어난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06년,성인용DVD의 자주 심사 기관으로 35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비디오윤리협회는 음모 노출에 관한 심사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그 결과 몇몇 작품의 내용이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제작사 두 곳과 심사를 담당했던 책임자들이 음란물 배포 방조 혐의로 경시청에 체포되는(2007년 8월 23일 적발)일이 발생했다.-13쪽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식자회의(대표 :시미즈 히데오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 명예교수 겸 변호사)가 결성되고,2008년 6월에는 사미즈히데오를 최고고문으로 추대한 일본영상윤리심사기구(도쿄도 지요다쿠)가 발족했다. 이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을 둘러싼 재팜은 2009년 봄부터 진행중이다.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 작품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도 밝혔듯이, 이전까지 성인 비디오의 내용이 점점 과격해지는 영향이 있었는데, 사건 이후 표현 수위가 조금 낮아진 듯한 느낌이다.-14쪽

영화계도 1960년대 후반부터 TV에 밀려 관객 수가 감소하고 포르노 영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포르노 영화 1호라 할 수 있는 <여체의 신비>(구 서독)가 상영되었고,연이어 <여자의 환희>,<완전한 결혼>(스웨덴) 등이 상영되는 등 일본내에서도 포르노 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그리고 전국의 영화관이 7대 1의 비율로 성인 영화관으로 전환했다.(중략)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재판을 놓고 많은 지식인들이 격론을 벌였으며 1978년 6월의 1심 재판에서는(24)'성기 노출과 성행위로 간주되는 묘사의 허용 기준은 시대의 변화와 사회 통념에 의거한다'는 기준 아래 위의 4편 영화는 대담하고 노골적인 묘사는 있으나 음란하다거나 지나치게 선정적이지 않으므로 사회 총념상 음란물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도쿄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1980년 기각되어 이 영화들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24,25쪽

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사건은 이후 성적 표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체제라는 이유로 문학, 영화, 음악 등에서 성에 대한 표현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전후에 스트립이나 <카스토리>잡지 같은 성적 내용을 담은 것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하지만 전후의 혼란기의 궁핍한 경제 사정으로 국민들은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 데다가 당시만 해도 성적인 도덕관념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음란물 단속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따른 군수 특수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생고도 해결되자 사(25) 람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5쪽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말고도 또 하나의 포르노 재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다.(중략)당시 일본 영화는 침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닛카쓰가 로망포르노로 노선을 바꾸었듯이 다른 영화사들도 포르노 비디오 영상 산업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닛카쓰는 당시 최대의 비디오 점유율을 자랑했던 도에이에 맞서 닛카쓰 오리지널 포르노로 승부를 하려던 차에 기소를 당했다.(26)(중략)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에 가려 언론에 별로 보도되지도 않은 이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영화와 관련해서는 닛카쓰가 사운을 걸고 재판에 나섰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얻어냈으나,비디오는 포르노비디오라는 음성적 이미지 때문에 재판에 졌다는 의견이 있다.또 한편에서는 영화처럼 심사 기관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결과야 어떻든 이 닛카쓰 포르노비디오 재판으로 사람들은 포르노 비디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6,27쪽

특히 1970년대 초반에는 일명 러브 호텔 등 모텔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서 고객 유치 수단으로 흑백tv를 컬러 tv로 바꾸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tv에 연결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는 모텔이 급증했는데,이를 계기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영화사들은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해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말하자면 포르노 비디오 산업은 영업용 비디오 플레이어의 보급과(27)함께 발전한 셈이며 비디오 플레이어 역시 tv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27,28쪽

1968년 5월에 JVC와 소니가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출시했고,이듬해인 1969년 1월에는 후지산케이그룹이 비디오 소프트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매스컴은 1969년을 '비디오 원년'이라고 명명했다. 그해 컬러TV가 가전제품 생산액의 34%를 차지하며 수위에 올랐다.그런 본격적으로 가정용 플레이어가 시판된 것은 1977년 8월이었다. 그 사이에 1975년 소니가 가정용 베타 방식의 VTR을 내놓았으며 1976년에는 JVC가 VHS방식의 VTR을 발매했다. -28쪽

처음에는 소니의 베타방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듯 했으나 이후 사용하기(28) 편한 JVC의 VHS방식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게 되었다.비디오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발매되자 가전업체들은 비디오 플레이어에 포르노 비디오를 끼워 파는 판매전략을 세웠다. 소비자층으 도시 거주 독신 남성으로 잡고 포르노 비디오를 덤으로 주면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비디오가 보급되던 1980년대는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때로 서양식 욕실이 딸린 원룸의 수요가 늘면서 비디오 플레이어의 수요도 늘었다.-28,29쪽

한편 1977년에는 아베다 사건을 소재로 한, 일/불 합작 영화인 <감각의 제국>의 시나리오와 스틸 사진을 한데 묶어 출간한 동명의 단행본을 둘러싸고 저자인 오기마 나기사 감독과 산이치쇼보 출판사 사장이 음란물판매죄로 기소되지만, 현 사회의 통념에 비춰볼 때 음란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1982년 6월 무죄판결을 받았다.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성적 표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크게 달라진 시기이기도 하다.-29쪽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를 위한 가전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포르노 비디오산업은 수많은 수요자를 확보하게 된다.그전까지만 해도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모텔에 판매하던 영화사들과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메이저 영화사를 뛰쳐나온 이들이 만든 독립 영화사들은 영화배우를 기용하기 위해 이야기가 있는 제품을 제작했다.-29쪽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 사건을 꼐기로 1977년에 업자들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심사 기관인 일본비디오윤리협회가 발족했고,1996년에는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셀이라는 판매용 비디오 중심의 미디어윤리협회가 탄생했다.그리고 오늘날에는 업체 간의 자주적인 규제 아래 연간 약 1만2000편에서 1만8000여 편을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30쪽

포르노 비디오에서 성인 비디오로 옮겨간 시기는 언제쯤일까.그것은 포르노 영화의 종언과 깊은 관계가 있다.드라마(극영화)안에 성행위 장면이 삽입되는 형태의 포르노 영화는 섹스 장면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중략)수많은 감독들이 포르노 영화라는 이름 아래 사회를 향해 메시지(31)를 전했다. 그런데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영화가 막을 내리기 2,3년 전부터 포르노 영화에는 더 이상 사회저긴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으며,섹스 자체를 직접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포르노 영화를 뒤에서 지원사격하는 형태로 제작되던 포르노비디오도 같은 노선을 걷게 되면서 성인비디오라고 하는,드라마적인 요소를 배제한,즉물적인 섹스를 표현하는 영상으로 대체된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다.-31,32쪽

섹스에 대한 묘사도 도가 지나치면 폭력이 개입된 성행위가 되고 만다.더구나 드라마적인 요소가 배제된 성인 비디오와 폭력은 물감이 물에 풀리듯이 쉽게 융합되었다.그리고 이런 폭력성 강한,그것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나 강간 등 여성을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을 발기시키는 내용의 성인 비디오가 인기를 끌었다. -33쪽

이런 경향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에 따른 도시 인구 집중과 가족 형태의 변화로 자녀 양육 방식,특히 남자아이의 양육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핵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선을 보이면서 형성된 남녀의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녀 양육은 조부모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나 혈연이나 지연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핵가족화하면서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 근교에 사는 어머니가 혼자 가사와 육아를 맡아온 것이다. 게다가 자녀는 하나 아니면 둘이고,아버지라는 존재는 잠을 자기 위해 밤늦게야 귀가해 잠깐 집에 머물 뿐이다. 또 지방으로 전근(33)이라도 가게 되면 아버지 홀로 떠나는 것이 당연시된 사회 분위기에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 환경에 놓였다.-33,34쪽

잘 가꾸어진 잔디 정원이 있고,레이스 커튼이 하는 거리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엄마가 직접 간식을 준비해놓고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주부의 모습인 양 매스컴에서는 떠들어대고,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주부들은 자식 교육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판 맹모라는 야유까지 받으며 자녀 양육에 헌신했다. 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녀들은 학원에 가야 하고,미래 또한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그런 자녀들은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워갔고,그 부정적 이미지는 모든 여성에게 확대되어 남존여비 사상이나 여성을 멸시하는 사고를 갖게 되었다.(중략)1960년대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이 청춘기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였다. 어쩌면 그들은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 비디오를 찾았는지도 모른다.-34쪽

저예산에 따른 단기 결전형 제작 방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왔다.제작만 하면 무조건 팔리는(43)거품경제 시대의 현상,아무 거라도 일단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시대 상황의 후유증,업체 난립에 따른 경쟁 등이 맞물려 저예산으로 적당히 만든 작품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44)1970년대는 모텔들의 고객 유치 경쟁에,1980년대는 가전업체들의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 경쟁에 이용되며 성장해온 AV산업이 21세기인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나 컴퓨터 같은 통신기기의 수요 증대 전략에 다시 이용되고 있다.-43,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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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의 거래
비비아나 A. 젤라이저 지음,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6월
절판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 중 일부 - 사회 비평가와 학자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왔다.가장 대다수인 첫 번째 그룹은 오랫동안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라는 견해를 제시해왔다. 경제 활동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구별된 이 두 영역은 서로 접촉할 때 불가피하게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두 번째 좀 더 작은 그룹은 "별것 아니다"라고 답해왔다. 두 모순적인 원칙은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고, 경제적 활동과 친밀함의 혼합은 단지 정상적인 시장 활동에 대한 또 다른 견해, 또는 문화적 표현의 한 형태, 또는 권력의 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사 속해 있는 훨씬 더 작은 세번째 그룹은 처음 두 입장이 모두 잘못된 것이며 친밀함과 경제활동을 혼합하는 사람들은 "연관된 삶"을 구성하고 협상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고 답해왔다.-41쪽

그 첫 번째 관점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하나의 전통은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의 존재를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친밀한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거리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우리는 한편으론 감정과 결속의 영역을,다른 한편으로는 계산과 능률의 영역을 발견한다.각각은 그 자체로 원칙에 따라 다소 자동적으로 그리고 잘 작동한다. 그러나 그 두 영역은 서로 적대적인 채로 남아 있다. 그것들 간의 접촉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한다.-41쪽

돌봄 관계 중 일부 - 돌봄 서비스의 가족 집중화 현상이 가족이라는 산만하고 감성적이고 비상업적 세계와 가족 밖의 전문적이고 비인격적이고 상업적인 세계의 재화 그리고 서비스 사이의 명확한 구분에 대한 가설을 강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232쪽

현대 미국의 학생들은 가족을 단지 소비 영역으로만 생각해왔으며, 기본적으로 소비를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가족 자산의 관리와 이전에 수반되는 경제 활동의 풍족함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가족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정밀한 조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비평가들은 소비를 가족의 도덕적 근간에 영향을 미쳐 잠재적으로 붕괴시키는,다소 가치 없고 경솔한 경제 활동의 차원으로 간주하였다.이러한 문제는 물론 때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가족의 가장 중요한 상호 작용에서 소비의 두드러진 관련성과 필요성을 획득하지는 못하였다.-298쪽

대규모 구매 중 - 미국인은 비단 주택뿐 아니라 화려하고 낭비적인 소비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 특히 자동차,전자제품,가전제품,가구 같은 내구성 소비재에 흔히 집착한다. 이러한 과소비를 개탄할지라도, 이러한 아이템을 취득하고 사용하는 것은 소비가 가족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활성화하고 형성하는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 간의 협상과 어떻게 관련되고 외부인에게 가족의 사회적 위치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깔끔하게 보여준다. -304쪽

보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가족 생산에서 어떤 부분을 수행하고 있는가? 소비에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가족이 그 경제적 기능을 잃어왔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또 다른 오해,즉 아이들이 가족 경제에 더 이상 기여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함축한다. 게다가 아이들이 수행하는 가사일은 아동의 특성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되지,진지하게 그 부모를 돕는다고 인식되지 않는다. (중략)그러나 가족 생산은 단지 어른만의 일도 아니고,단순히 교육 장치도 아니다.아이들의 기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전체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상당한 경제적 관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여기서-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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