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겨레21에 실린 이동기 교수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라는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저널리즘이 무슨 사건만 일어나면, 기자든, 칼럼을 쓰는 학자든 '악의 평범성'을 들이미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진 않기 때문에, 이 글의 한계와 별개로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엔 동의한다.
2. 근데 나는 이동기 교수가 역사학자로서 '다른 사료'를 들어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는 식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는 걸까에는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제시하려는 그 사료라는 근거로 이 정도 의견밖에 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데 있어, 이동기 교수는 흔히 문화연구자들이 능동적 수용자론이 흥했을 때, 그 이후 정치적 연성화를 의심받은 이 학문이 돌연 정치적 강성화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수용자론에 담긴 '문화적/문학적 의미' 동원을 거부하자는 그 제스처와 동일한 논법을 쓰고 있다. 소비의 쾌락과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놈들을 뭐라고 연하고 부들부들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거칠게 말하자! 이게 능동적 수용자론에 대한 정치적 연성화, 그 회의감에서 온 주장이었다. 근데 이러한 정치적 연성화/강성화라는 이분적 구도에 매몰되어 문화연구는 이후 더 퇴보되었다.
3. 이 논지로 악의 평범성을 보았을 때, 이동기 교수는 자신의 '대안-사료'로 아이히만이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이 아닌, 능동적 가해자라는 구도로 바로 넘어가버리는 누를 범하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에서 우리가 왜 굳이 '주체적 가해자'라는 입장을 바로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입장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자아가 탈색된 채, 상부의 지시를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vs 실제로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운동으로서 자신의 나치즘을 실현할 마음이 있었던 주체적 가해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구도로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4. 외려 이런 구도는 고작해봐야 한 인간이 정치적 사건 앞에서 어떤 윤리/윤리학을 결정한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정성 게임으로 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타격을 주는 방식은 고작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에서 비롯된 수동적/능동적 주체의 행위와 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면서 범람하게 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라는 그 '역사적 접근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동기 교수의 논지 또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와 결을 같이 하는 견해일 뿐이다.
5. 이러한 심리적 이력 파악으로서의 역사적 접근은 지젝이 언급했던 홀로코스트 연구에 대한 '신비화'로 빠지는 귀결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앞에서는 연구자 네가 애써 찾은 그 모든 이야기 닥쳐!라는 경건한 태도. 이른바 지젝이 말한 그 "형언할 수 없는 악"이란 지점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러했을 때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문제적인 것은 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개인의 심리 드라마가 왜 이렇게 '신비스럽게' 대중화되었나 하는 메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동기 교수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동의하지만, 한겨레21에 소개된 견해는 그렇게 썩 유효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동기 교수의 이런 이분법적 견해는 자칫 교양으로서의 역사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