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원 시절 김경만의 『담론과 해방』을 읽고 그에게서 어떤 '악마적 쾌감'을 느꼈다. 일단 나는 문화연구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내가 다루는 이론보다도 그 이론을 둘러싼 사회 주변의 맥락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론 자체에 집착해 치열하게 논증해나가는 방식에 감탄을 느꼈던 독자이자 연구자였다(문화연구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고 반박이 들어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화연구적 수업'이라는 것에서 나는 사회적 사건을 연구한다는 데서 나타나는 수다스러운 분위기가 많이 아쉬웠다. 이러한 수다는 분명 이론적 탐독을 방해하고, 김경만이 이번 신작에서 논했듯 그러한 대화를 가장한 수다(대화를 가장한 수다는 내 표현이다)가 이론에 대한 임의적 이해로 둔갑했다는 점은 동의하는 바다).
특히 나는 김경만을 '악마적 사회학자'라 혼자 부르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말 악마라서가 아니라 남들이 다 가는 방향 대신에 자신만의 고집으로 남들이 상찬하는 비판이론가들을 향한 쓴소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학문적으로 덜 여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뛰어난 이론가의 검술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재차 확인함과 동시에 김경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신작『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담론과 해방』이 나온 뒤 10년 만이다)을 읽고서 나는 김경만의 관점에 대해 적잖이 실망했다. 이러한 실망감은 『담론과 해방』을 다시 읽어나가며,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굳어나갔다.
1. 비판의 대상이 갖는 영향력이 여전히 지배적인가라는 의문
이번 글 뒤에 다룰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2015)도 그러했지만, 김경만이나 김종영 두 사회학자 다 자신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충분한 사전 논의가 부실하다. 일단 이번 글은 김경만의 신작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김경만의 책은 1부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신기루」- 2부 「글로벌 지식장 안으로」로 구성되어 있다. 김경만은 이번 신작에서 '한국적 사회(과)학 이론'을 주창하는 것의 한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부터 쭉 일관된 논리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서구적 지식의 이론에 대한 추종을 경계하고 우리 이론을 만들자라는 논의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빈약한가라면서, 그는 서구의 이론 자체에 대한 내부적 논증 투쟁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번 신작에서도 김경만은 자신이 비판 대상으로 삼은 논의를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각개격파하고 있다. 근데 문제는 김경만이 다루는 비판의 대상 혹은 대상자들이 취한 관점이다. 김경동, 강신표, 조한혜정, 강정인 등, 김경만이 비판의 대상자로 다루는 이들이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과 그 지식의 헤게모니가 강력한 상징폭력적 요소가 되는가. 김경만은 이 지점을 분명히 다뤄야 했다. 이론적 논파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김경만이라면, 이미 자신의 논의가 90년대 후반 조한혜정, 김영민, 김정근 등이 문제제기했던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와 이론'이란 쟁점의 재판이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으리라 봤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서 김경만은 자신의 논의 자체가 강력한 비판적 이슈가 되고 있음을 과신하고 있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나는 김경만의 비판에서 오는 이론적 논증의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이 논증이 가진 '시차'를 단순히 진부함/진부하지 않음이란 틀로 묶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시차' 자체가 논증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허물이라고 생각했다.
2. '출판'이란 지식 형태에 대한 어떤 편견
단순히 요즘 연구자들이 이 책이 다루는 민중사회학에서 비롯된 당시 사회학적 인식 체계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는가, 유교적 사상에서 온 한국적 언어를 가지고 한국적 사회학 이론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를 넘어, 김경만은 '토착화된 이론 자체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연구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관점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듯(여전히 토착화된 이론 자체의 성립 가능성, 한국적 사회과학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고수라는 식으로)이 확언하는 논법을 보이고 있다는 데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아울러 김경만의 이론적 내부 투쟁은 정치적 비판 행위로서의 이론을 지향하는 이론가들을 향해 늘 날을 세워왔는데, 여기서도 김경만은 늘 그들의 이론적 이해가 얼마나 부실한가를 내세운다. 김경만은 제대로 된 이론적 내부투쟁으로서의 대화 없이 그들이 임의적으로 손쉽게 이론을 전달하려는 차원에서 편의적으로 활용한다는 입장인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나는 여기서 김경만이 비판하는 '출판'을 매개로 한 학자들의 활동에 대해 그가 심층적인 분석을 해보기를 권한다. 김경만은 출판이라는 방식을 대중 친화적인 지식 전달이라는 층위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출판과 학자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론적 이해를 깊게 가져가지 못하는 한계로 본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출판의 과정에서 나타난 지식의 형태만을 보고 김경만이 비판하는 학자들에게서 이론적 몰이해라는 특성을 짚어내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묻고 싶다. 출판이라는 형식은 지식의 형태와 방향성에 물론 일정한 부정적 측면을 줄 수 있겠지만, 그러한 부정적 측면에서 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는 연구 문제에 대한 이론적 몰이해로 일관하다고 보는 데에는 저자-연구자의 위치에서 선택해야 할 진술의 선택 전략을 무시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한편, 그가 「여우와 신포도」에서 논한 조한혜정 식의 이론적 전달 방식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깊이 공감하지만, 그러한 수업 방식 자체를 통해 조한혜정 자체가 이론적 내부 투쟁 안에서 갖춰야 할 이론과 개념적 자원에 대해 자신보다 얕은 관심사를 갖거나, 공부가 미진하다는 차원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진술은 안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경만은 늘 이론에 대한 내부적 심층 논의가 부실하다는 관점으로 한국 학문 사회를 비판하는데, 이 또한 그의 치열한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간과하고 있는 시차는 아닐까. 다시 한번 묻지만, 이러한 김경만의 비판이 갖는 시차는 단순히 진부하다/후지다/식상하다라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갖는 어떤 안일함과도 직결되지 않을까. 그는 한 이론에 대한 내부 논리에서 오는 한계 지적에 몰두한 나머지, 거기서 자신의 소임은 끝났다며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 자체가 가진 동력만을 과신하고 있진 않는가.
3. '학자적 관점'에 대한 술책: 이론과 사회적 접촉면, 그리고 김경만의 비판이론 비판에 대한 아쉬움
김경만의 부르디외 비판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비판이론가를 비롯해 학문과 이론의 실천 효과에 대해 깊은 논의를 펼쳐왔고,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이론의 현실 적합성, 적실성에 대해 비판적인데, 이러한 문제제기가 이론사회학자라는 그의 스탠스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하더라도, 의문을 품게 된다. 일단 이 의문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가 늘 문제 삼는 전제를 언급해야 한다. 즉 그는 이론의 사회적 사용/적용/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사회학자의 '인식론적 권위'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체계 사이의 고리를 문제 삼는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학자의 언어에 속박되지 않은 연구를 강조하는 이들도 결국에는 사회학자라는 위치에서 온 언어 게임 안에서 사회적 개인 혹은 집단의 행위를 다루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부르디외의 제자인 바캉을 비롯해 여러 학자와 부딪친다(이번 신작에서 그는 『담론과 해방』에서 부르디외를 비판했던 그 관점을 제자인 바캉과의 이메일 논쟁을 통해 다시 강조한다).
그런데, 이것이 부르디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 고유의 문제인가. 아니, 이것은 학문을 왜 하는가에 대한 일반론적 논의의 차원으로 확장시켜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김경만은 이것을 '사회학 고유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특히 비판이론가들이 이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아울러 김경만은 특히 부르디외가 비판이론가로서 자신의 비판이론이 대중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자주 신경써온 이로 부각시킴으로써, 이론의 현실적합성, 이론의 사회적 사용에 대한 한계라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 논의 또한 더욱 충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김경만은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결국 비판이론가들이 얼마나 대중을 '학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그 틈을 공략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비판이론가와 대중의 관계를 교란하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온전한 이론적 내부 투쟁에서 동원되는 '입장세'(학문적 언어 게임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를 이중적으로 쓰고 있는데, 비판이론가들이 이론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오는 태도에서 왜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입장세가 없는 마냥 구는가라는 딴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치뤄야 할 입장세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그는 부르디외가 이야기했던 '학자적 관점'을 부르디외 본인이 극복하려다 결국 실패한 것은 아닌가 따지면서도,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에서 오는 '학자적 관점' 관련 논의에 대해서는 이론적 몰이해라든지, 이론적 심층 논의가 한국 학문 사회에서는 부실하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론가인 자신과 대중의 관계에 대해 비판이론가를 향한 비판적 인식자라는 지점으로 함께 인식케 만드는 오해의 지점을 낳고 있다. 즉 김경만은 그가 비판하는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입장에 서 있다는 식의 생각을 주는 스탠스를 취한다.
무엇보다 김경만은 비판이론가들의 이론을 통해 그 이론들이 갖는 사회적 접촉면에 대해서도 깊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즉 이는 김경만이 이론사회학자로서 주어진 이론의 내부 모순을 비판함으로써 갖는 장점 선취의 유리함이 분명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회의 현상을 구조화, 개념화하는 데서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사회적으로 접촉하는 가운데서 오는 다양한 논의의 발생 가능성은 가벼이 살핀 채, 하나의 이론이 '학문적 언어의 게임' 안에서 해석되고 가공될 때의 효과에만 이론적 내부 투쟁의 열의를 쏟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상당히 현란한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이론 자체의 진공 상태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이론적 내부 투쟁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가 이번 신작에서 강조하듯 학자들의 사회 지향성을 멈출 때, 그것이 온전히 이론적 내부 투쟁을 위한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그는 분명 책의 말미에서 "이제 우리도 미디어, 사회, 사회운동과 유리된 글로벌 지식장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연구집단을 발전시키고, 그 안에서 투쟁을 통해 단련된 지식장의 지배자를 배출할 때다"라고 썼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자들의 사회 지향성과 그로 인한 학술적 전략들이 이론의 내부 투쟁을 배제한 차원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아울러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갖는 입장세가 갖는 상징폭력은 간과한 채, 김경만 자신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비판이론가들이 행사하는 대중을 향한 상징폭력만 부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대중과 비판이론가의 세계에 '상징폭력'이란 요소를 이간질이 충분한 개념적 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가. 나는 의문스럽다.
4. 덧붙임) 김경만이 이번 신작에 쓴 '자기민속지로 살핀 글로벌 지식장의 동학'에 대하여
사실 김경만의 신작에서 가장 실망했던 챕터는 2부 2장 '자기민속지로 살핀 글로벌 지식장의 동학'이었다. 김경만은 분명 부르디외가 『파스칼적 명상』이나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학자들의 이론적 세계관을 내부적 논증으로 정면돌파하는 차원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에서 부르디외가 경계하려 했던 태도. 즉 '전기적 환상'의 차원을 이상하게 본 챕터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연구자 본인이, 특히 자신이 이론사회학을 하는 중견 학자라면 자기민속지학이 갖는 특수성을 분명 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갖는 한계와 장점을 명시한 뒤, 그 특색에서 오는 기술 효과description effect를 충분히 독자에게 설명해가며 자신의 학문적 궤적을 서술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런데, 김경만은 유난히 이 챕터에서 자신이 부딪쳐온 학자들과의 투쟁에서 굳이 언급해도 되지 않을, 혹은 언급했을 때 1부에서의 이론적 엄밀성과 자신의 논지 효과를 떨어뜨릴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그가 그토록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이란 차원을 주요한 테마로 밀착해 끌고 왔다면, 그가 만나고 대결했던 서구의 학자들이나 학회지에 붙는 '저명한' 식의 표현 하나하나도 신중히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표현을 붙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자신이 그런 학자들과 학회지에 갖는 감정 구조를 설명하고, 학문장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선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 그는 이러한 표현을 안일하게 써가며 마치 자신이 그토록 얼마나 외롭게 다른 학자와 달리 이론적 내부 투쟁을 해나가며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는 식의 자기 예찬을 '자기민속지학'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