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와 담론분석 - 언어와 정체성에 대한 담화
크리스 바커.다리우시 갈라신스키 지음, 백선기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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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는, 언어가 세상을 이해하고 문화를 구성하는 중심수단이자 매개물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사회과학자들과 더불어 '언어적 전기(언어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된 계기)'를 가져다준 학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실제로 문화연구 내에서 언어를 바라보는 현재의 관심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며,'문화의 의미'를 보다 확장하는 경향을 지닌다.첫째, 문화는 그 어떤 다른 현상(예를 들면 생산양식 같은 것)에 귀속되지 않고 그 자체의 특정한 메커니즘과 논리로 탐구된다.-1쪽

둘째,이전에는 문화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여겨지던 사회구성체가 이제는 점점 문화적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문화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경제 권력'이 문화적으로 이해된다.왜냐하면 경제 권력은,'기획'과'마케팅'이라는 영역의 질의에 따라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는 일련의 의미 실천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 행동의 중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또한 인문과하과 사회과학의 주요 의제에 문화적인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다.-1쪽

푸코에게 주체는 고정된 보편적 실체가 아니라,규칙적 체계(문법)에서 '나'를 구성하는 담론의 결과이다.주체성은 담론(적)형성물로서 획득하며, 말하는 주체는 담론(적)주체 위치 이전의(선험적)존재,즉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에서 비어 있는 공간이 기능에 의존한다.살아 있는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유사하게 보이게 하는 데 필요한 담론에서의 주체의 위치를 '획득하는'것이 필요하다.주체적 위치란 담론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견해나 일련의 규제적 담론적 의미다.말을 한다는 것은 특정의 주체적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며, 담론의 규제된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다.-21쪽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게임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언어 게임이 행동을 제한하는 규칙이라면, 이 규칙은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것과 같이 언어의 추상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서 그것의 작용을 제한하는 구성규칙이다. 언어규칙은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화용적인 이해를 구성한다.-25쪽

권력은 비록 그것이 명확하게 그렇다고 해도,단순히 사회적인 것을 함께 보유하는 접착제,또는 일련의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종속하게 하는 강제적 권력이 아니라, 사회 행위의 형태를 생성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다.이러한 관점에서 권력은,비록 강제성이긴 하지만 또한 가능성이기도 하다.그렇게 말하면서 문화연구나 비판적 담론분석 모두 종속된 그룹들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지녀왔다.-41쪽

언어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우리의 문화화가 우리의 가치,의미,지식을 나타내기 때문에,언어의 한계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지적 이해의 경계를 표시하게 된다.-47쪽

로티주의의 화용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문화연구는 문화정치가 '이름 짓기'에 대한 투쟁과 자신을 재-서술하는 권력을 포함한다는 재-서술의 정치라는 것을 공유한다.문화는 세계에 대해 경쟁하는 의미와 서술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고,화용주의자가 권력의 양식 안에서 진실을 주장하는 투쟁의 장이다.-88쪽

문화연구에서는 현대 문화정치가 주체성과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집중해 왔다고 이해된다. 주로 문화정치는 성과 민족성이라는 이슈와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조건인 주체성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언어 습득인 문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 명백하다.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로서가 아니라,감정적으로 논쟁이(95)일어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서술로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정체성은 담론수행적인데, 이는 정체성이 명명되는 것을 규정하거나 생산하는 담론적 관습으로서 가장 잘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95쪽

분석의 첫 번째 단계는 분석이 반복 가능하고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점에서, 만약 어휘-문법적 분석이 유효하며, 그러한 분석의 사용이 문화적 맥락 내에서 '의사-객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분석자 자체가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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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문학이론 9
사라 밀즈 지음, 김부용 옮김 / 인간사랑 / 2001년 6월
품절


1장 서론 中-푸코의 작업에서 사용되는 담론이라는 용어가 발생시키는 의미들의 범위를 각각 규정해 볼 수 있다. 푸코가 제공하는 첫번째 정의는 가장 광범위한 것으로, 모든 언술들의 일반 발생 영역이다.즉 의미를 가지거나 실제 세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모든 발화는 담론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대략 정의로서 푸코가 특히 초기에 이론적 수준에서 담론의 개념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이러한 용법은 개별 담론이나 다수의 담론들에 대해서보다는 담론 일반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19쪽

두 번째 정의에서 그는 담론들, 즉 일정 방식의 규칙성을 갖는 것으로 보이고 정합성과 공통성을 유지시키는 힘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일군의 발화들을 개별화하여 규정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정의하에서는 여성성의 담론,제국주의의 담론 등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푸코의 세번째 정의인 다수 언술들의 설명 근거가 되는 규칙에 지배받는 실천으로서의 담론은 아마도 이론가들이 가장 공명하는 정의일 것이다.,나는 세 번째 정의에서 푸코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로 생산된 발화나 텍스트보다는 개별적인 발화나 텍스트를 생산하는 규칙들과 구조라고 생각한다.이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에 지배받는다는 담론의 본성이다.-20쪽

담론의 구조는 특별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관념, 견해, 개념, 사유 방식, 행동 방식의 체계성 덕분에,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행동 방식의 효과들 때문에 감지될 수 있다.따라서 우리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일군의 담론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은 그들 스스로를 성적 주체로서 정의하는 변수들의 일정 범위 내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담론적 틀은 어느 범위까지를 성적인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경계를 정한다.-35쪽

담론을 효과를 갖는 어떤 것으로 보는 견지에서는 진리,권력,지식이라는 요인을 고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담론이 효과를 갖는 것은 이러한 요인들 때문이다.푸코에게 진리는 발화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니며 인간의 갈망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인 추상체도 아니다.그는 진리를 훨씬 물질적이며 보다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중략)따라서 진리는 선험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각 사회가 작업을 통해서 생산해내야 하는 것이다. 푸코는 진리로 간주되는 것으로부터 특정 형태의 지식을 배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노력에 대해서 분석한다.(예 : 건강에 대한 '대체 지식'이 정통 의학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할 때)-36쪽

담론들은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담론들, 자신들에 대해서 진리와 권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사회적 실천과 다른 담론들과의 끊임없는 갈등 상태로 존재한다. -37쪽

제2장 담론과 이데올로기 中 - 푸코는 "진리"의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주체로서의 자신은 그 당시에 통용되고 있는 담론적 체계가 부과한 한계 내에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것이 비판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다만 이것은 사유될 수 있는 것, 특별히 "알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중략)푸코에게는 모든 지식은 사회적/제도적/담론적 압력의 결합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론적 지식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지식 중 일부는 지배적 담론에 도전할 것이며 일부는 지배적 담론과 타협할 것이다.-57쪽

담론과 실재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견해, 라클라우와 무페의 것 중- "모든 대상은 담론의 대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사유 밖의 세계가 있는지 여부나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지진이 일어나거나 벽돌이 한 장 떨어지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존재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상으로서의 고유성이 '자연적 현상'또는 '신의 분노 표현'으로 구성될지의 여부는 담론 영역의 구조에 달려 있다. 부정되는 것은 이와 같은 대상이 사유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대상들이 출현을 위한 어떤 담론적 조건 밖에서 스스로 대상으로서 구성될 수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다.(라클라우&무페,1985:108)-82쪽

따라서 푸코는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유의미하다고 자각하며 어떻게 대상과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 체계 내에 자리잡게 하는지는 담론 구조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담론 구조들은 대상과 사건을 우리에게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만든다.-82쪽

영역을 한정짓는 것은 담론적 실천의 집합을 성립시키는 첫번째 단계이다. 그러면 담론이나 대(83)상이 활성화되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식자는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담론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권위와 정당성의 질문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매번의 활성화는 어느 정도 그러한 언술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용법들과 그 이용을 위한 미래의 규칙들을 조정한다(물론 그러한 언술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필연적이지 않다 하더라도).각 언술은 다른 언술로 이끌고, 어떤 의미에서는 각 언술에 미래의 언술이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의 변수들이 깊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83쪽

담론은 단순히 개별 식물 집단들과 같은 물질적 대상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담론은 또한 어떤 사건이나 연속된 사건들을 개별 문화가 실제 사건이나 심각한 사건으로 깨닫게 되는 서사들로 구성한다. -86쪽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유일한 길은 담론과 담론 구조를 통해서일 뿐이라고 주장할 따름이다.이러한 파악의 과정에서 우리는 경험과 사건을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구조들에 따라 범주화하고 해석한다.그리고 이 해석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 구조들에 확고함과 정상성을 부여한다.우리는 이 구조들을 벗어나서는 사유하기 어렵다. 푸코는 이러한 구조들을,(87)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개념을 정립할 때 제안했던 것처럼 단순히 제도나 권력 집단의 개입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이 구조들이 단순히 추상적이고 임의적이라고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제도적/문화적 압력과 담론의 내적 구조가 결합되어 형성된 힘이 있으며, 이 힘은 항상 권력집단이나 제도의 의도와 욕망을 능가한다고 여긴다.-87쪽

언술은 푸코에게는 어떤 제도적 힘을 가지며,그리하여 어떤 권위의 형태에 의해서 타당성을 부여받는 발화들이다.(중략)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은 이러한 언술들의 생산과 질서화를 지배하는 지지 체계,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언술들이 "진리로"발화되고 그리하여 언술로 분류되는 것을 배제하는 체계에 관심을 갖는다.-97쪽

전체로서의 담론은 개별 담론들의 생산을 위한 규칙과 과정의 집합체이다.하나의 담론은 어떤 제도화된 힘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은 언술들의 집합체이다.이것은 언술들이 개별자들이 행위하고 사유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그러나 우리는 담론들이 동일한 힘을 갖는 언술들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즉 언술들은 어떤 제도적 압력,기원이나 맥락의 유사성 때문에,또는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이유로 함께 모여 있다.-98쪽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두 번째 배제 작용은 정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리하여 합리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담론들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진다.푸코는 여러 다른 역사적 시기에 광인의 말은 신적 통찰력의 수준에 이른 것으로 간주되거나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한다.-103쪽

배제적 과정에 더하여 푸코는 담론들의 구성 자체가 내(105)적 메커니즘을 갖는 것에 주목했다. 이 메커니즘이야말로 담론들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 순환적 메커니즘의 첫번째가 해설이다. 다른 이론가들에 의해서 해설되거나 비판,주해되는 담론들은 타당성과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105,106쪽

따라서 해설은 어떤 텍스트들이 계속해서 인쇄되고 교육 체계 내에서 가르쳐지고, 연구자들의 작업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해설자가 거의 쓰여지지 않은 텍스트들의 분석을 시작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담론의 두 번째 내적 통제자는 분과과학이라는 관념이다.이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일정 영역에서 사실 또는 진리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더 큰 질서의 담론적 집단이다.따라서 각 분과과학은 어떤 방법,어떤 명제와 논증의 형태,어떤 대상 영역이 참으로 간주될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108쪽

담론은 몇 명의 사람들이 어떤 유형들의 발화를 할 수 있는지를 한정하는 의례에 의해서 제한된다. 예를 들어 사제나 판사만이 합법적으로 결혼을 주관할 수 있다.(중략) 푸코는 교육 체제를 진리에의 자유로운 탐구가 격려되는 계몽적 제도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담론의 규제 형식으로 본다.-111쪽

담론의 규칙을 정확하게 준수하는 지식 형태는 비준받게 될 것이다.-112쪽

푸코는 독창적인 어떤 것이 말해지기는 매우 드물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에 생각되었던 것의 제약 내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논지를 펴면서 창조성의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게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개발되었을 때 푸코는 저작권의 관념에 대해서 질문한다 - 개인 이외에도 새로운 관념의 생산에 연루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코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수용 조건에 분석의 초점(114)을 맞추며, 아마도 사회에 의해서 인가받거나 사회의 준거틀 내에서 수용 가능한 것으로 분류되지 않는 고안이나 아이디어들을 분석하고자 할 것이다.-114,115쪽

제인 오스틴의 작품 전체는 일관성을 부여받고 초기 소설에서 후기 소설에 이르기까지 진보라는 용어로 말해지며, '미숙한','성숙한'이라는 형용사로 이 진보가 기술된다.(중략)푸코가 의문시한 것은 이러한 진보에 대한 서술과 작품 전체라는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우리가 전기적 정보에 대한 지식에 입각해서 텍스트에 부과한 질서는 아닌지 질문하기 때문이다. (중략)그는 우리로 하여금 저자의 생애에 입각해서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서 벗어나게 해준다. 저자의 생애는 푸코에게 또 다른 일단의 텍스트들이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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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문화, 언어
박해광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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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中 경제적 합리성의 영역이 투입과 산출이라는 효율성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면, 언어는 이 원이를 중심으로 의미작용의 영역을 구성한다.여기에는 의미의 산출과 재생산,지배적 가치의 생산,정당성의 구성,저항 언어의 형셩 등 복잡한,이른바 의미의 정치가 작용하고 있다.기업조직은 곧 복잡한 의미의 망이며,이 망을 따라 기호와 상징들이 산포해 있다. 그래서 문화와 언어는 기업공간의 의미작용의 영역을 좌표화하고,그 속에서 작동하는 의미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가 되는 것이다.-5쪽

또한 언어와 상징의 차원은 개인의 의식과 태도에 관련된 중요한 변수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문제의식에서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의식과 인식을 움직이거나 혹은 가로막는 비물질적 실체'로 이해되어왔으며, 궁극적으로 행위와 제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았다.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 개념은 그 모호성과 측정 불가능성 등의 이유 때문에 개념적 유효성을 상실해왔다. 언어와 담론의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이런 모호성은 극복될 수 있으며, 그 현실화의 효과도 측정할 수 있게 된다.담론은 이데올로기를 물질화하는 장이기 때문이다.-5쪽

담론은 단순한 언어적 반영물이 아니라,현실을 해석하고 규정하며 재해석함으로써 현실을 구성하고 또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힘이다.언어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지만, 담론은 언어에 부착되어 있는 중립적 도구의 이미지를 거부한다.(중략)언어에 부과되는 사회적 제약은 담론 형태를 통해 사회적 힘으로 전화한다.-5쪽

제2장 담론,권력,이데올로기 中 / 담론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중요한 영역이라고 한다면,이데올로기 담론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담론이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질문할 수 있다.-50쪽

'창문이 열려 있다'가 수행문이 되는 것은, 발화자와 수취인에 있어 발화자의 언표가 명령이 되는 경우다.이 언표가 연인 관계에서 남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남자의 권위가 여성에 대한 명령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진술문과 수행문의 구분이 논리적이고 맥락적인 문제였듯이, 순수한 수행문과 이데올로기적 수행문의 구분 역시 논리적이고 맥락적인 것에 불과하다.-56쪽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경우 수행문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언표가 행위로 실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표현하는 경우다. '5년 이내에 세계 일류 회사가 될 것입니다' '반드시장점유율 1위를 탈환해야 할 것입니다'등의 수행문은 행위실현을 미래로 유보하면서 그 언표의 실현과 상관없이, 말함으로써 행위를 유발하고자 한다. 언표의 실현은 발화자의 권력에 의해 직접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문 형식은 반복을 통해 권력적 언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데올로기적 수행문에 대한 청자의 거리감을 해소한다.-57쪽

일상적으로 경험되고, 중립적이며 일반화(64)된 것으로 이해되는 점, 주체를 포섭하면서도 주체가 그것을 스스로 이용한다고 여기게 하는 점 등이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공유하는 공통점이다.(중략)담론은 이데올로기가 현존하는 방식이자 재생산되는 통로이며, 동시에 언표적 힘의 행사를 통해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작용이 된다.또한 담론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담보하며, 자유로운 발화 주체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이다.-64,65쪽

여기서 기호와 현실의 경계, 나아가 담론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인식론적 논점이 제기된다. 그 하나는, 모든 사회적 현상이 기호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을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현실을 사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논리적 비약이 존재한다는 점이다.현실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의 환원과,현실을 기호와 담론으로 대체하는 환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마치 기호적 의미를 통해서만 사회적 사실이 현실화되는 것처럼 비약된 논리를 제시하는 이론들은 결국 사회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65쪽

담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언표를 순수 언어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언어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언어의 사회적 성격 혹은 구속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인데, 나는 이 문제를 담론과 사회 혹은 담론과 그 외부라는 문제설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담론 외부'라는 개념은 담론이 언어적 한계속에 머물지 않으며, 비언어적 현실과의 연관 하에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담론 외부는 담론과 연관되어 있는 사회적인 혹은 비담론적 실재를 지칭한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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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 : 스타일의 의미 - 문화교양 9
딕 헵디지 지음 / 현실문화 / 1998년 11월
절판


'청년문화'는 두 가지의 문화형태들에 대한 반발을 통해 생성되었다. 하나는 부모문화이며, 다른 하나는 지배문화이다. 부모문화와 지배문화는 한 사회 내의 지배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배적 문화의 위치에 있지만, 그것의 억압적 형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가령 노동계급 하위 청년문화가 노동계급 출신의 '부모문화'에 대해 반발하는 점은 그들이 오랜 동안 유지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윤리의식과 규범에 대한 것이고, 한편으로 부르주아 지배문화에 반발하는 점은 경제적,정치적 착취와 그로 인한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계급적 편견에 대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노동계급 청년 하위문화는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부모가 간직한 검열의 윤리의식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부모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노동력 착취를 거부하는 움직임 속에서 생겨났다.-11쪽

이러한 거부행위는 '세대의식 generational consciousness'과 '계급의식 class consciousness'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질적 부의 풍요와 그 풍요를 누리는 특정한 소비대상의 출현이라는 변화만을 내세워 하위문화의 단절적 의식을 '세대의식'으로만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영국의 하위문화의 출현은 사회적 계급 정체성의 동요와 세대적 동요에서 비롯되었다. 청년 하위문화는 그런 점에서 부모문화에 대해 그리고 지배문화에 대해 '이중의 접합'을 시도하는데 이 이중적 접합은 하위문화가 단절의 형태가 아니라 갈등의 형태임을 알려준다.-11쪽

언어의 신성함에 관한 통념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관념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용인가능한 언어적 표현들이 한계를 갖게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하게 보편적인 금기에 의해 규정받기 때문이다. 이 터부들은 의미의 지속적 '투명성'(자명성)을 보장한다. 따라서 추정컨대, 사회세계가 조직되고 경험되는 특권화된 약호를 위반하는 것은 도발적이고 교란을 일으키는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124쪽

스펙터클적 하위문화의 출현은 항상 언론에서의 신경질적인 파장을 동반했다. 이 히스테리는 전형적으로 양면적이다.그것은 공포와 매혹,분노와 유쾌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충격과 공포를 표현하는 헤드라인은 앞면을 수놓는 반면,안쪽의 사설은 적극적으로 '진지한 논평'(각주 5)으로 꽉 차있으며 접지면이나 부록물들은 최신 유행들 및 의식들에 대한 열띤 해설들을 담고 있다.(중략)스타일은 특히 이중의 반응을 유발한다:그것은 (패션 페이지에서)찬양을 받고 (하위문화를 사회문제로 정의하는 기사들에서)조소당하거나 비방받는다.대부분 경우 제일 먼저 미디어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하위문화의 스타일적 혁신들이다. 뒤이어 일탈적이거나 '반사회적인'행위들-반달리(126)즘vandalism(예술문화의 고의적인 파괴나 반문화적인 야만행위:역주),욕지거리,싸움,'동물적 행동'-이 경찰,사법권, 언론에 의해 '발견'된다.이 행위들은 하위문화가 애초에 의상약호들을 위반했음을 '설명하는 데'이용된다.사실 일탈행동 또는 독특한 유니폼을 똑같이 맞춰 입는 것(또는 보다 전형적인 경우로 이 양자의 결합)은 도덕적 공포감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126,127쪽

각주 5. 1977년 daily mirror 8월 1일자는 그러한 수상쩍은 사설의 예를 담고 있다. 킹즈 로드에서 있었던 테드-펑크족 사이의 폭력적 문제를 '진지하게'고찰하면서,필자는 그것을 명백히 지난 10년 전 해변 소요와 비교하고 있다: '모드족과 로커족이 몇 년전에 여러 해변 마을들에서 벌인 대결처럼 충돌이 극렬한 싸움으로 발전하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도덕적 공포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심지어 동일한 사건들조차도 동일한 분노감을 조장시키기 위해 동일한 예언자적 색조로 회상될 수 있는 것이다.-126쪽

스펙터클적 청년문화에 살기로 선택한 젊은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표상될 때 상식이 그들을 재단하고자 하는 장소로 되돌아 간다(확실히 '동물'로서,또한 '가족 품에 있는 것으로','실업상태로','최신 유행을 쫓는 것으로' 등등).틈새난 질서가 치료되고 하위문화가 지배적인 신화(그 신화에서 하위문화는 부분적으로만 발산한다)내에서 하나의 일탈적 광경으로('악마족 fork devil'으로,타자로)합병되는 것은 이 연속적인 회복 recuperation의 과정을 통해서이다. 회복의 과정은 두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취한다. 1) 하위문화 기호들(의상, 음악 등등)이 대량생산된 대상들(즉 상품 형태)로 전환되는 것.2)지배집단들-경찰,미디어,사법부(즉 이데올로기 형태)-에 의해 일탈행동이 '진리표'붙여지고 재정의되는 것.-128쪽

실로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와 확산은 불가피하게 생산,공공화 그리고 패키징 과정과 결부되어있으며 이 과정은 하위문화의 전복적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129쪽

'하위문화'를 의미화하는 본래의 혁신들이 상품들로 번역되어 일반적인 것으로 전화되지 마자,그 혁신들은 '동결'된다. 일단 소규모 사업가들과 그것들을 대규모로 생산해내는 거대 패션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그 혁신들의 사적 맥락들이 제거되면, 그 혁신들은 성문화되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되며 공공재산이자 수지맞는 상품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합병의 두 형태(의미론적/이데올로기적인 것과 '현실적'/상업적인 것)는 상품형태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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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르 동문선 문예신서 363
라파엘 무안 지음, 유민희 옮김 / 동문선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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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中 / 장르 카테고리의 경험적 성격은 항상 정의하기보다 인정하기가 더 자주 혼탁하다. 왜냐하면 장르의 혼합은 엄격한 분류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고, 많은 영화 장르는 다른 매체 속에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연장하고 재창조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론이 장르의 기본적인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한, 틀림없이 많은 장르는 이론에 있어 불완전한 대상인 것 같다.(중략) 우리는 영화에 있어 반대 명제를 주장할 수조차 있다: 영화 장르가 장르 영화를 한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대중문화 속에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그 강력한 정착과 같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 속에서 장르의 두드러진 성격은 영화를 예술적인 영역 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거의 불안전하기 때문에 역시 잘 찾지 않는 개념이다.결국 고정되고 변별적인 성격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장르이론이 아주 빠르게 이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피하고 특별한 사례 연구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르 문제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 적합하다. (중략)카테고리 논리란 영화 텍스트 전체의 일치에서 기인한 소산이나 이 영화 텍스트가 순응하고 있는 -11쪽

규범을 장르로 만들고 있다. 약 20년 전부터 몇몇 앵글로색슨 연구자들이 특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장르는 역시 담론적 행위이고, 커뮤니케이션 도구이(11)며, 문화적 /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매개물이다. 영화 세계의 다양한 관계자들인 프로듀서, 영화인, 비평가와 평범한 관객 등을 통한 장르의 명칭과 인정, 때로 부인 행위 역시 영화 텍스트의 비교 분석 만큼 '장르성'의 연구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영화 장르만이 아닌, 역시 제작과 해석의 카테고리이다.이런 관점에서 영화 장르 이론은 텍스트적 접근과 컨텍스트적 접근을 양립시켜야 한다.-11,12쪽

제3장 장르는 무엇에 소용되는가? 中 / 분류 혹은 분석적인 논리는 장르의 기능적인 차원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있다. 이 논리는 이것이 형식화시킨, 공통적인 특성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 전체를 장르로 간주하는 것이지 서술한 변화, 반복 작용을 장르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았다시피 장르는 공동체가 인정하면 존재한다 : 릭 알트만이 제시한 의미 / 통사론적 정의의 용어를 다시 취해, 장르는 안정된 통사론으로 의미론을 조직할 때, 다시 말해 대중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이 정돈될 때 나타나고 그 자체로서 인정된다. 이 영화는 다양한 장르성 층위로 영화적 형식에 연결된다. -87쪽

우리는 시네마에서 장르를 상업적인 작품의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르는 상업적인 작품에서 전제로 하고 프로그램 짜는 형식을 제작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주제에 영화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제작자들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작품을 합리화한다. 아주 흔한 이런 생각은 분명히 대중문화에 대한 경멸적인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88쪽

장르 영화의 제작은 특유한 자질들의 반복과 동시에 변화를 가정하고, 변증법적 표준화/차이화 속에서 새겨진다. 이것은 규범적인 논리와 대중문화 속에서 '문화적 재산'의 제작과 소비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개혁 논리 사이에, 결합 중 하나이다. -88쪽

사실 '꿈 공장'은 시네마토그래프 제작법의 상업화로 특징지어진다 : 표준화는 더 신속하고 더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제작하도록 해주는 것과 동시에 뛰어난 규범(아주 한정된 '표준화된' 작품)을 겨냥하고 있다. 반면 개혁은 차이화된 작품들을 생성하고 동시에 표준에 외부적 요소들을 통합시키고 있다. -89쪽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장르 명칭 회피 中 / 할리우드에서, 장르란 제작의 합리화 결과인 동시에 순조로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라고 말한 거짓이 아니라 해도, 할리우드 광고의 실천은 반대로 장르의 명칭이 훌륭한 판촉의 논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장르는 공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그 어떤 제작사에 의해 자사의 영화를 특징지우기 위해 내세워질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제작의 용이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것은 스튜디오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경쟁자들과 자사를 구분하는 마케팅 전략을 배치하도록 하지 않는다. 이처럼 장르는, 일단 몇몇 스튜디오에 의해 구성되고 공유하게 되면, 이것을 창조한 스튜디오의 특별한 이익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스튜디오는 영화에 대한 광거를 하기 위해, 그 영화의 독창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내세우기를 더 좋아한다 : 스튜디오와 계약을 체결한 영화의 간판 배우들, 저작권의 보호를 받은 연작물이나 등장인물 등이다. 따라서 장르의 경제적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 제작 행위로 그치지 않고, 스튜디오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장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스튜디오의 담론적 행위를 고-93쪽

찰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것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에 대해 자사가 했던 담화 속에서 두 개의 다른 '목소리'를 구분하면서 릭 알트만이 했던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의 성징을 띠는 하나의 목소리는, 이때 장르 영화에 단순한 장르의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사의 이미지와 이익을 옹호하면서, 특별한 스튜디오라는 식의 스튜디오의 또 다른 목소리는, 담론 속에서 자사의 스튜디오가 다른 스튜디오와(93)공유한 모든 것을 피하고 자사와 구별되는 모든 것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후자의 목소리는 고전 시대에 상급 회사들과 오늘날 여전히 대규모 회사들이 광고,포스터,예고편 등에서 자주 듣게 하는 소리이다. -93쪽

장르의 사회적 기능 中 / 우리는 현 시대는 스테리오타입, 이것의 윤곽 그리기와 고발 등의 시대인 동시에, 이것의 산업적이고 대중적인 확산의 시기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령 예술은 그렇게 간주됨으로써, 구별과 평범의 논리에 의거해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반면, 대중문화인 신문(97)연재 소설에서 텔레비전 연속극, '할리퀸'연애 소설에서 상업 영화,유명한 시네토그라프 장르에서 광고 영상과 슬로건 등의 문화는 집단의 표상과 스테레오타입을 품고 있다. -97,98쪽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이런 양면적인 의식은, 많은 비평가들이 상업 영화에 장르 명칭을 미리 결정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작가로 간주된 영화인들이 감독한 장르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작가들이 장르를 극복하고 초월하는지, 또 어떻게 작가가 습관적인 규칙, 클리셰,스테레오타입화된 장르의 모티프 등과 거리를 둔 사용을 하며, 어떻게 작가가 장르를 존중하는지 등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영화인들이 단순히 클리셰가 유통하도록 하는 것 대신, 초대받은 관객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인물에 대한 패러디나 독창적인 사용을 하기 위해 클리셰를 집어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99쪽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도구 中/ 장르는 이데올로기적인 틀의 효율적인 도구로 간주될 수 있다.이(99) 도구는 스테레오타입화되고 반복적인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해결책을 강요한다.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공연은 지배 계급들의 관심을 만족시키고 있다. 시네마토그래프 산업은 이들의 전형이고 중요 요인이며, 대중을 회유하고 대중에게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공유하도록 이끌고 있다. 장르는 이처럼 규범적인 사회적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사회,정치적인 단순한 현상유지를 보증할 수 있다.-99,100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를 신화로 간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 공연에 의식적인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으로 체계화된 한 사회의 가치 시스템의 연출을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 사회 구성원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대중으로 하여금 공통의 가치와 참조 체제 주위에서 공감하게 하고 동시에, 갈등을 잠재우고 사회를 유지하도록 돕는 매개물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 동일한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소비는 공동체가 장르에 빠진 것으로 해석되지만, 의식처럼 공통의 가치 전체를 인정하는 공유된 기쁨을 둘러싸고 그룹을 연합할 수 있는 그만큼 주기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110쪽

헐리우드 수사학의 진정시키고 규범적인 그물 속에 대중을 가두면서, 이데올로기적 굴레로서의 장르 개념에 반대하여 우리가 표명할 수 있는 주된 비난은 이 장르가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수동적인 관객을 가정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장르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석을 강요할 것이다. 장르 때문에 동질적인 모든 것으로 간주된, 영화 관객들은 할 수 없이 이 해석을 하게 된다. 정말로 대중의 아편과 같은 이 장르는 거의 천성적으로 덤불 속에 있고, 비평적이며, 상반되는 모든 해석, 여러 가지 모든 수용 가능성 등을 마비시킨다. -111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中 / 영화를 내보이고, 수용하거나 생각하기 위해 장르 카테고리에 호소하는 것은 영화에 '기대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115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장르 영화, 다시 말해 예측할 수 있는 도식을 따라가는 안정된 의미/통사론적 양식을 위해 자주 조사되고 연구되었다 : 이는 장르 개념을 축소하고 그 실제적 용법을 고려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비평가가 작가 영화에 대해 장르 명칭 자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수많은 연구가 프로듀서와 영화 텍스트들을 장르 의도의 유일한 수탁자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그리고 관객의 해석은 이 장르의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120쪽

영화 장르의 기대 영역은 두 개의 장르성 체제, 즉 소개하는 작가적 체제와 배열하는 관객의 체제를 통해 결정된다.그러므로 관객의 체제는 작가적 체제와 만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이런 경우 장르적 기대가 또 다른 해석 시스템으로 교대되지 않는다면, 어긋난 이 기대는 영화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중략)우리는 장르를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대중에게 영화를 수용하고 이해하도록 만드는(즉 대중이 장르 카테고리를 인식하고 인정함)매개물 중 하나로 정의할 것이다.장르 르 영화의 경우, 장르의 쾌락을 예견하는 장르라는 매개물은 가장 중요한 것일 터이다.그러나 작가,스타,게다가 영화가 상영된 영화관의 유형 등, 이처럼 영화와 그 대중 사이에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매개물들이 역시 존재한다. -121쪽

장르는 이렇게 영화로의 가능한 접근 중 하나이고,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가능한 조건들 중 하나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장르의 의도를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같은 영화를 장르에 모두 관계시키지 않음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데, 즉 우리가 존 웨인이나 존 포드의 영화처럼 <역마차>를 서부 영화로 간주할 수 있는 것과 같다.-121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의 기능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가지 고찰이 부여된다. 먼저 우리가 고찰한 기능이 어떻든간에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못한 대상이다. 즉 장르는 상업영화 제작에 유용하다 해도, 영화를 판매하기 위해 반드시 훌륭한 논거는 아니다 ; 공동체의 가치를 경축하는 그 의식적인 기능은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형식이다 ; 만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대를 구축하도록 도와준다면, 이것은 해석을 미리 결정하고 차단한다. -123쪽

두번째로 만약 우리가 관객에 대한 장르의 효과를 이론화시킨다면, 각 장르와 장르의 해석은 이것의 제작 /수용 상황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장르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의식적,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인정한다면, 이 기능은 역사적, 사회적 혹은 특정한 수용 상황 속에서만 구체화된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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