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
구회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구판절판


필름(film):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필름으로부터 시작한다. 필름은 빛이 닿으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이 입혀진 띠모양의 셀룰로이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실재하는 물체이다.(중략)그러므로 영화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여러 방식 - 빛과 소리에 의한 한순간의 영상으로서, 관객의 기억과 무의식의 단편으로서,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통하여 재현된 모습으로서 - 중에서 필름은 가장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7쪽

한 편의 이어진 필름은 또한 한 편의 영화와 동의어로도 쓰인다. 어떤 영화가 지금/여기에 있느냐없느냐를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 아마도 유일한 - 기준을 우리는 필름의 존재에서 찾는다. 그래서 <장군의 아들>은 지금 우리에게 있고 - 20여개의 프린트가 전국의 극장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네가(negative)가 보관되고 있으므로- 나운규의 <아리랑>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아리랑>을 보았던 수많은 선대의 관객들의 증언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민족의 노래'가 된 그 영화의 주제가가 끊임없이 불리워지고 있음에도, 그러므로 영화가 일단은 필름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는 믿음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며, 영화 = 필름이라는 등식이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받아들여짐은 이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7쪽

그러나 필름은 아직 '움직이는 그림' 곧 활동하는 사진 또는 무비(movie)가 아니다. 필름이 복제하는 현실의 모습은 아직은 정지된 세계, 정사진(still photograph)으로 구성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필름은 영화 특유의 기계 장치를 거쳐 관객의 감각기관에 빛과 소리로서 전달될 때 비로소 우리가 영화라 기억하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7쪽

무비(movie;motion picture;활동사진)(전략) 영화가 등장하자마자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활동사진으로서였다. 대중은 일단 '움직임'을 보고 싶어하였고, 소리나 색채에 대한 요구, 혹은 이야기나 등장인물에 관한 흥미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 아니듯이, 그리고 영화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인 '움직임을 보는 즐거움'이 사실은 일종의 눈속임에 의하여 가능하듯이, "영화=무비/활동사진"이라는 등식에는 영화 자체가 사람들에게 속임수로서- 체제,권력,자본의 유지와 이익을 위하여 -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8쪽

시네마(cinema)(전략) 영화를 '습관적'으로 보는 관객집단이 형성되고 영화제작이 대규모,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어감에 따라 영화는 더 이상 관객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가 배급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 - 영사기를 돌리기 위한 전기시설, 필름을 운발할 수 있는 교통편, 그리고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할 만큼의 여유를 가진 관객들- 이 충족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크고 작은 시네마가 들어섰고, 관객들은 영화를 찾아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TV가 관객들의 극장가기 습관을 허물어뜨리기 전까지는, 극장 설계자들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관람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객석수를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주말의 관람인파를 모두 받아들이기 위하여 새로 지어지는 대도시의 극장들은 점점 커졌고(9) 그 규모에 걸맞게 또한 호화로움을 더해갔다.-9,10쪽

시네마는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중략) 하나는 다양한 도시공간을 게릴라처럼 뚫고 들어가는 소극장 (중략) 또 하나는 '구경거리'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테크놀로지들 / 이러한 두 경향은 그것들의 현대성과 첨단기술 /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영화 초창기의 / 관객을 찾아 상영공간을 만들어가는 소극장 / 영화가 신기한 구경거리임을 새삼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10쪽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텍스트의 안과 밖에 드러난 몇 가지 '증후군'을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90년대의 보다 근본적인 변혁의 '조짐'인지 따져봄은 가능할 것이다. 그 첫번째 증후는 "경계 무너뜨리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중심과 주변, 대회사(MAJOR)와 독립영화(indies),주류(mainstream)와 소수파(cult)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장르와 장르 사이, 관습(convention)과 새로운 감수성 사이를 '넘나듬'이 예삿일이 된 것이 80년대말의 할리우드 사정이다. 그러나 더욱 문화사적 의의가 큰 경계 무너뜨리기는 창작자/수용자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80년대의 가장 큰 영상혁명을 가져온 비디오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86쪽

엘리트 비평가와 무식한(?) 대중 사이의 간격도 좁혀져왔다. 대중은 비디오와 케이블 TV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아닌 나름대로의 안목과 지식을 가진 특성화된 소집단들로 변모해갔다. 처음 비디오에 적대적 입장을 취했던 헐리우드의 우려와는 달리, 80년대는 대중이 '영화관'을 재발견한 시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디오 보급률과 비례하여 극장영화의 총관객수가 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이 가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보아도 되리라.-87쪽

60년대 후반에 소년기를 보낸 홍콩영화팬 첫세대는 중국무사들의 고풍스런 의상과 그들이 펼치는 '의협'의 세계를 기억한다. 그 다음 세대 관객들은 이소룡의 날렵한 몸놀림과 쌍절봉의 바람 가르는 소리에서, 혹은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의 좌충우돌 액션 속에서 홍콩영화를 만났다. 그리고 비디오의 탄생과 함께 자라난 첫세대인 80년대의 가장 새로운 관객들은 주윤발-장국영-왕조현-유덕화로 이어지는 '신드롬'을 형성하며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에 '홍콩'이라는 고유명사를 깊이 새(227)겨 놓았다.-227,228쪽

그리하여 1990년대초, 서울은 어쩌면 세계에서 홍콩 다음으로 많은 홍콩영화를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도시가 되어 있는 듯하다. 직배된 미국 영화, 몸살을 앓는 한국 영화, '고급' 관객을 유혹하는 '예술' 영화 광고들 사이에 칸막이처럼 끼어있는 홍콩영화 광고의 이미 친숙해진 이미지, 그리고 재개봉관 영화광고란의 수많은 홍콩영화 제목들과 비디오가게마다 붙은 무수한 홍콩영화 포스터.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영화관객, 그리고 미래의 한국 영화를 끌고나갈 새로운 세대들의 '영화환경'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228쪽

컬트 무비 / 영화광을 위한 진혼곡 中 (1)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도대체 컬트 영화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컬트(cult)'라는 외래어를 정의함으로써 답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컬트 '현상'을 가능케 하는 '문화/하위문화(subculture)'와 그 문화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를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우회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컬트는 쉬운 해답을 갖지 않은 문제라 생각하는 편이 컬트를 이해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컬트의 의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고, 그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컬트는 사전이라는 동어반복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컬트가 아니며 고정불변의 컬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29쪽

(2) 컬트 영화는 관객이 만든다. 관객만이 마지막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중략) 관객들은 재해석을 통하여, 관람경험의 '제의(ritual)'화에 의하여, 혹은 애증/찬탄/야유가 뒤섞인 관심으로써 컬트 영화를 길러낸다. 컬트는 상업영화의 생산/소비 메커니즘 속에 관객이 능동적으로 자신들만의 자리를 확보하는 유효한 방식이다. 관객만이 컬트를 결정하고, 최후까지 결정권을 지니는 것이다. -229쪽

(3)컬트 영화의 관객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발적이고, 열광적이며, 때로는 광신적인 소수이다. 다수의 관객 대중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한 영화는 컬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229)진다. 그것이 소수의 지지자/후원자들에게 발견되면서 이 '미운 오리새끼'는 컬트 영화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만이 그 영화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다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컬트 영화에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이 극장 저 극장을 쫓아다니며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보고,주인공들의 분장과 몸짓과 대사를 흉내내고, 주위사람들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전도'에 열을 올리는 소수의 '광'들이 컬트 영화의 진정한 주인들이다.-229,230쪽

(4)컬트 영화의 자격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과 관계가 없다. "관객동원('동원'이라는 말에 숨은 이데올로기에 주목할 것)"에 실패한 영화는 일단 '소수'만을 위한 영화라는 컬트의 조건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모두 컬트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영화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반대로 첫개봉에서 '떼돈'을 벌었다 하여 그 영화가 컬트 영화가 될 자격을 자동적으로 상실하는 것으도 아니다.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 대다수 관객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 영화광들이 그 영화를 '재발견'할 때, 그것은 '대작흥행영화'에서 컬트영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한 영화가 수용되는 문화의 차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진다. 한 나라에서의 '흥행' 영화가 국경을 넘어가면 '예술'영화가 되듯, 문화적 차이에 따른 관객의 오해(?)가 때로는 컬트 영화를 낳는 근거가 된다. -230쪽

(5) 컬트 영화는 반드시 관객공동체의 문화를 반영하며, 관객공동체의 대변자가 된다. 컬트 영화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관객들은 언제나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다(때로는 거꾸로 컬트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집단은 공통된 기호와 취향과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지며 공통의 정서로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이다. -230쪽

(6) 컬트 영화는 얌전한 영화가 아니다, 컬트 영화는 논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컬트 영화는 상식을 벗어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상식은 '영화는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충고로부터, '영화는 이러이러한 것을 다루어서는(230)안된다'는 경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을 깨는 곳에서 컬트 영화는 출발한다. 기존의 영화형식을 거부하는 영화, 그 사회의 정치적, 윤리적 금기를 건드리는 영화, 소외집단의 편에 서는 영화, 영화의 존재 자체가 '사건'이 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은 언제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논쟁 속에서 컬트 영화는 태어난다. -230,232쪽

(7)컬트 영화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함은 일종의 제사/의식에 참여함과 같다. (전략) 관객들은 컬트 영화를 한번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다른 영화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과 공간은 마치 일상을 벗어난 신비로운 체험의 자리와도 같다. 그것은 관객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마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마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232쪽

(8)컬트 영화는 비평가들을 속이고, 영화이론을 믿지 않으며,제작자들을 배반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한다. 비평가들은 대부분 가장 많은 사람이 동의하리라고 여기는 기준으로 영화를 잰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그 기준에 '미달'됨으로써 비평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영화이론 또한 컬트 영화를 예상하지 못한다. 이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컬트영화를 뒤쫓아오며 '설명'하고 '해석'할 때 뿐이다. 제작자들은 전혀 엉뚱한 관객들의 반응에 당황한다. 흥행의 공식을 컬트 영화는 여지 없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주인인 관객들은 이렇게 고정관념을 깸으로써 영화가 이론과 자본과 '여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컬트 영화는 자신들이 '불온'하고 '불건전'하다는 딱지를 받기 일쑤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영화라는 문화현상이 사라져버리지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나가는 데 기여한다. 비평가들과 영화이론과 제작자들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232쪽

(9)컬트영화는 멈추어 있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발견, 재해석,재평가된다. 컬트 영화는 소수의,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영화이다. 그러면서 컬트 영화 자(232)체도 소수파가 된다. 컬트 영화라 불리울 수 있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어렵사리(!)컬트의 대열에 낀 영화가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후략) (10) 컬트 영화는 부정을 통하여 긍정으로 가는 영화이다. 영화문화의 한쪽 모퉁이에 뚫린, 미래로 열린 창이 컬트 영화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232쪽

컬트 영화의 발생은 한 사회의 극장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한 사회의 극장문화는 또한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컬트 영화라 불리우는 현상은 각 사회의 극장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중략) 기존의 보수적인 배급망을 타기 어려웠던 이 영화들은 처음 대학 캠퍼스나 소규모의 시네클럽들에서 틀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관객층을 확보하게 되자 주로 대도시의 학생 거주지역, 예술활동 중심지, 그리고 캠퍼스타운 언저리에 하나둘씩 레퍼토리 시네마(repertory cinema)라 불리우는 영화소극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계열화되어 있던 기존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이 소극장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돈을 벌겠다는 목표보다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더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영화광들의 소박한(?)의도와, 자신들만의 문화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가 맞아 떨어져 생겨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34쪽

컬트 영화 출현의 기반인 소극장들이 '멸종'되어갔던 반면, 헐리우드는 컬트 영화시장에 주목하고 기존의 배급망을 통하여 컬트 영화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 나온 <록키 호러 픽쳐 쇼우(Rocky Horror Picture Show)의 대성공이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중략)그러나 <록키 호러..>의 성공은 흔치 않은 예외에 속한다. 컬트 영화가 보여지는 공간은 갈수록 줄어만 갔는데, 비디오의 출현과 함께 컬트 영화광들은 비디오가 축복인 동시에 저주임을 깨닫게 된다. -236쪽

컬트 영화의 요람이자 보금자리였던 레퍼토리 소극장들이 거의 자취를 감출 무렵인 1980년대 초반, 비디오라는 새로운 영상매체가 등장하였다. 상류계층의 '노리개'정도로 인식되었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점차 가격이 낮아지면서 급속히 일반에게 보급되었고, 이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비디오 대여점은 사람들이 영상매체를 대하는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으로는 영화-비디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영화사의 창고에서 잠자던 숱한 필름들이 -걸작이고 졸작이고 가릴 것 없이-비디오에 옮겨졌고, 한편으로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문화적인 의미가 새로워졌다.-237쪽

컬트 영화팬들에게 비디오는 복음처럼 들렸다. 이제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나, 마음껏 볼 수 있었고, 아직 그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주위사람들에게도 손쉽게 일차 관람하길 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흥행으로 근근히 유지해오던 소극장들에게 비디오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일부는 아예 비디오 대여업-주로 외국영화, 독립영화,컬트 영화를 취급하는 -으로 방향을 돌려 새로운 갈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디오는 컬트 영화를 보는 기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공동체의 관람경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소극장들이 없어지고, 영화광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밀실에서 텔리비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컬트 영화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진짜 컬트 영화와 진짜를 흉내내어 장삿속으로 만들어진 가짜 컬트 영화의 구별도 이제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컬트 영화라는 현상이 처음 나타났던 유럽과 미국의 경우이다. 컬트 영화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애당초 없었던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될 수도 있다. -237쪽

영화의 경우는 우리나라 영화보다도 엉뚱하게도(?) 외국 영화에서 컬트 현상이 나타났으니, 다름아닌 '홍콩 느와르'의 선풍이 그것이다.그리고 여기에는 80년대 들어 소극장의 형태로 급속히 불어난 '재개봉관'들의 존재와 비디오의 광범위한 보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의 홍콩영화붐에 불길을 당긴 것은 <영웅본색>이었는데, 이 '전설적' 영화의 개봉관에서의 흥행성적은 사실 신통치 않았다(서울의 경우 화양,명화, 대지극장에서 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 9만 4천 604명을 동원). 그러나 <영웅본색>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프로가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옷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청소년 집단-'주윤발 신드롬'에 걸린(?)-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238쪽

'개봉관 실패 -> 재개봉관 성공'의 과정은 <천녀유혼>의 경우에도 반복되었는데, 여기에 '극장에서의 실패 -> 비디오로 재평가'라는 새로운 현상을 <열혈남아>가 보태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한국적인 '컬트'현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과는 별도로,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에 홍콩 영화가 파고들어온 과정,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관객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이해하는 데 이들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비디오문화의 또 하나의 부산물은 쏟아져나오는 프로 테이프 덕분에(?) 우리들이(238) 말로만 듣던 '그들'의 컬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에게 컬트인 것이라 해서 '우리'에게도 컬트 영화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컬트 영화가 존재하느냐 혹은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데 있지 않다. 컬트를 이야기함은 진지하게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고 '읽는' 방법의 깊이와 너비를 더해 줄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지한 사람들'속에는 상투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영화의 '재미'를 찾으려는 '영화광'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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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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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 속의 어린 시절,1932~1946 중 / (전략)이 시기부터 그의 주요 피신처는 스크린, 즉 캄캄한 영화관이었다.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각주 4: 이 표현은 또한 트뤼포의 '영화광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에릭 로메르가 사용하기도 했다)는 트뤼포의 문구는 이 유년 시절의 열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관객으로서의 트뤼포에 대한 첫 각인, 즉 조숙하고 비밀스럽고 날카롭다는 인상은 이 마법의 장소, 바로 앙리-모니에의 아파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외로프 광장의 연속 상영영화관에서 형성되었다. -51쪽

점령기의 프랑스 영화에 대한 애정은-예컨대 1940년대 중반 어린 트뤼포가 남긴 수첩 기록에 의하면, 그는 <까마귀>를 14번, <인생 유전>을 9번, 클로드 오탕라라의 <연인Douce>를 7번 보았다-1946년 여름부터 시작된(53) 미국 영화의 대대적 상륙에 따라 또다른 천체의 발견, 즉 감독과 뱅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때때로 증오로 바뀌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모니크 이모를 따라 처음 간 이후, 트랑스아 트뤼포는 친구 로베르 라슈네, 클로드 티보다와 어울리면서 동네 영화관을 휩쓸고 다녔다.클리시 광장과 로슈슈아르 가 사이에는 20개가 넘는 영화관이 있었다. 클리시,아르티스티크,트리아농,게테 로슈슈아르, 팔레 로슈슈아르,록시,피갈,시네아크 이탈리앵 외에도 6,000석의 객석을 자랑하는 유명한 고몽 팔라스 극장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점령기의 속박과 궁핍을 잊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 꿈의 장소들을 에워쌌다. 다른 종류의 삶처럼 보이는 이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젊은 시네필에게 학교나 가족, 또는 사회보다 더욱 풍요롭고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것이었다. 부모들은 점령기의 환경을 감수하면서 영화관,극장,쇼 무대를 찾아-53,54쪽

꿈속으로 도피했지만,자식들은 더 이른 낮 시간대에 바로 같은 장소에 틀어박혀 모의하고 학교 수업에 빠지고 가족과의 식사를 멀리했다. 트뤼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처음 본 200편의 영화는 학교를 빠지거나 돈을 내지 않고 슬쩍 영화관에 들어가 몰래 본 것들이다. 나는 이 멋진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심한 복통이나 소화불량으로 치렀다. 이 증상은 모두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죄의식은 영화가 야기하는 감정을 증대시킬 뿐이었다. 나는 또한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간절히 느낀 나머지 점점 더 화면 가까운 쪽에 앉음으로써 영화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다."부모가 연극 구경을 갈 때면 12세의 소년은 잠든 척 남아 있다가, 영화 시작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동네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때로는 부모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 위해 영화가 끝나기 전에 빠져 나왔다. -54쪽

13세 때 그는 피갈의 영화관에서 나올 때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 남자들은 해질 무렵 명확한 이유도 없이 어린이들을 노리고 뒤쫓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당히 음산한 느낌이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두려움을 즐겼다."트뤼포에게 숨어서 본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영화보기의 조건이기도 했다. 당시의 문화 상황 안에서 영화애는 이때부터 레지스탕스의 게토와도 같은 것이 되어간다. 다시 말해 반문화라는 조직망을 결성하고 비밀장치와 암거래 등으로 조금씩 사적인 일기장의 형태를 갖춘 뒤, 충실한 입문자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동체 바로 그것이었다.-55쪽

정성일의 추천사 중 /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그 유명한 테제,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한 다음, 그 말을 실천한 사람이다. 트뤼포는 영화의 모든 것을 시네마테크에서 배운 첫 번째 세대이다.그는 본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그는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그런 다음에도 책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다.하지만 트뤼포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모든 것을 걸었다. – 6쪽 -6쪽

청소년기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하루 3편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3권의 책을 읽는 일에 명예를 걸었다. 혼자서든 친구와 함께든 상관은 없었지만 판단만은 스스로 내려야했다. 트뤼포는 라슈네에게 독학자의 극단적 자세를 옹호하는 고백을 했다.(중략)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트뤼포는 즉시 분류 방식을 습득해 각각의 영(72)화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파일을 만들었다."그것은 프랑스 감독 마르셀 아부케르에서 시작해 미국 감독 프레드 지네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이 파일 속에는 그는 <에크랑 프랑세>,<시네비>,<시네 보그>,<시네 미루아르>,<파리 시네마>,<시네 다이제스트>,<시네 몽드>등의 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정리해놓았다. 나바랭 가 아파트의 작은 붙박이장은 트뤼포가 쌓아놓은 자료로 금세 꽉 차버렸다. 1947년 가을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그는 자료를 로베르의 방으로 옮겼는데, 이 자료는 여기서도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곳에서 두 소년은 자료와 책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이것은 그들의 포위된 정신구조에 대한 공간적 은유이자 축적된 지식의 물리적 증거였고,또한 1950년대와 1960년대 '시네필'의 황금기를 특징짓는 영화 리스트 작성, 등급-72,73쪽

매기기, 필모그래피 수집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숭배 현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트뤼포는 전후 영화 주간지 가운데 내용이 충실했던 <에크랑 프랑세>에서 지식의 공백을 채울 또 하나의 수단을 찾아냈다. 1948년 4월 13일부터 12월 7일 사이의 독자 투고란에는 '파리 나바랭 가 33번지 f 트뤼포'라고 서명된 글을 15편 이상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펜을 빌려주세요'라는 이름의 이 독자 투고란은 33세의 젊은 평론가 장 샤를 탸겔라가 담당하고 있었다. 타겔라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했고 새로운 작품 소개를 끝없이 요청했다. 나는 그의 열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당시 생활의 절반은 영화해설 일로, 나머지 절반은 영화관 안에서 보내고 있던 나로서는 최고의 독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 열정은 엄청났으니까."-73쪽

이런 형태의 수련은, 당시 젊은 영화광들과의 경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곧 놀랄 만한 '인간 시네마테크'로 간주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73쪽

더 어리고 더 반항적이고 더 가난한 트뤼포는 이 까다롭고 폐쇄적인 작은 시네필 집단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보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즉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자신의 충동을 어는 정도 절제한 후 토론을 거쳐 확신을 세우고 최종 자료 분석과 글을 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연구 능력에 있었다. 그는 시네마테크 상영회에 리베트, 두셰,고다르,쉬잔 클로샹들레르와 함께 가장 충실히 참석했을 뿐 아니라,기사와 자료를 오려내 분류해 모아놓거나, 전문지를 읽고 많은 주석을 다는 일에 욕심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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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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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문화원 막내 세대 중 - 영화에 관심이 옅은 관객이라면, 굳이 극장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취향이 독특한 관객일수록 점점 극장에 가는 것이 귀찮아지는 시대를 맞고 있다. 영화를 꼭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면서 영화관에 모여 일종의 동지에를 갖고 영화를 즐기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돼가고 있다. 영화를 DVD 플레이어나 컴퓨터로 보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특정한 영화공동체도 사이버 공간으로 상당 부분 옮겨갈 것이다. 이럴 때 영화는 특유의 주술적 마력, 집단 최면의 감흥을 잃어버리는 대신 단속적인 관람이 가능한 다른 매체가 돼버린다.-17쪽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듯이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 화면을 정지시킨 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메모를 할 수 있고, 보다가 흥이 떨어지면 다음에 볼 수도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dvd는 책과 같은 기능(17)을 부여받은 채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미래를 위해 불행한 현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어쩌면 이렇게 변화된 환경에서 대안의 영화를 꿈꾸는 이들의 또다른 창작수용공동체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각자 발품을 팔아 특정한 시간에 특정 공간에 모여 영화를 보는,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적극적인 관람의지는 당장은 드러나지 않아도 장차 형성될 영화 문화의 에너지를 위해선 여전히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17,18쪽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스무 살을 전후해 거의 출근하다시피 프랑스 문화원에 드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무렵에는 영화를 보러 따로 갈 데가 마땅치 않았고 저질 시비에 휘말린 한국 영화나 <람보>류의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제외한 다른 영화를 볼 데라곤 외국문화원이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지금은 제작자가 된 모 시가 그 당시 프랑스 문화원에서 일하면서 토요일마다 일종의 시네클럽 비슷하게 모임을 운영했고 기술적으로 열악한 누군가의 단편영화를 상영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청년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소아병적인 관념의 성찬이 대다수였지만 그때 그곳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영화계로 유입돼 90년대 이후 한국 영화계의 일부를 차지했다. -18쪽

그 당시에 관한 기억은 꽤 많다.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들어온 어느 선배가 소중히 품에 지니고 들어온 오손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 비디오테이프를 프랑스 문화원의 조그만 강당에서 프로젝트로 상영하고 난 후 자막도 없이 본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교환하느라 허름(18)한 중국 음식점방에서 술과 혼탁한 말들로 보낸 밤은, 훗날 돌이켜보면 허접한 말의 수준 때문에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엔 미숙한 각자의 관념을 정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귀중한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18,19쪽

그때 영화를 좋아하고 심지어 나중에 영화로 밥을 먹고살 욕심이 있었던 또래들 사이에선 영화 지식과 정보를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지니고 있는 몇몇 청년들에 관한 전설이 돌고 있었고 문화원 시사실에서 그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면 과연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 솔깃 귀를 세워 엿듣곤 했다. -19쪽

그 당시의 내게 외국 문화원은 일종의 시네마테크였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바로 이렇게 극장 안에서, 그리고 극장 바깥에서 조금씩 쌓이는 공동체의 우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훗날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인들이 20대 초반 시절 시네마테크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내공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낀 동질감도 이와 비슷했다. 세상은 몰라주는 영화를 우리들만 발견한 것 같은 그 은밀한 희열의 축적 속에서 일종의 영화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21쪽

천대받던 미국 영화를 제멋대로 재평가하고 주류 언론에서 크게 대답하지 못했던 막스 오퓔스와 같은 감독에 열광하면서 새로운 비평적 기준을 세웠던 1950년대의 프랑스 청년들이 글로, 영화로 자신들의 영화관을 증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영화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발견하는 일, 거기서 새로운 의미와 감성을 건져내는 일, 그걸 오늘의 감성으로 번역해 재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시네마테크,또는 그와 유사한 극장 체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21쪽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은 서울아트시네마이지만 자주 가보지는 못한다. 그곳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씨와 사적으로 친하다면 친한 사이여서 사역 비슷하게 상영작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자리에 곧잘 불려나가는데도 그렇다. 가끔 그곳에서 관객들과 대화하면서 문득 현재의 시네필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동시에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되면서, 그리고 가정사에 매달린 생활인이 되면서 예전보다 훨씬 영화(21)를 덜 보게 된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집 서가에서 챙겨봐주길 기다리고 있는 dvd와 비디오에 더 눈이 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시점부터 이런 영화관람 공동체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렸던 것이다.-21쪽

영화를 정말 열심히 보던 시절,나는 프랑스 문화원이나 서강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 이외의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문화원밖에 없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옛날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오자투성이의 엉터리 번역 영화이론서가 한 줌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도서관에 서구의 영화이론서가 수백 권 꽂혀 있는 데가 별로 없었으니까. 나는 다분한 지적 허영기로 뜻도 모르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꽤 열심히 훑어보기는 했다.그때 몸에 받아둔 지식과 정보가 훗날 9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영화비평의 계몽주의 시대에 쓸 만한 먹고살 거리가 됐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제는 영화지식과 정보의 독점보다는 해석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영화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35쪽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있다. 감독도,관객도 함께 변하고 있다. 미국 영화계의 '신동 세대'를 대표했던 스필버그가 이제 할리우드의 어른이 됐다. 그 세대만 해도 전통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데이비드 린의 영화와 겨루고 싶다는 야심 말이다.이제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다.나는 좀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인간이다. 60년대가 영화가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대라고 생각하며 그 시대의 감독에게서 오히려 동질감을 느낀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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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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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이야기의 소비 중 요약 /90년대의 오타쿠들은 일반적으로 80년대에 비해 작품세계의 데이터 자체를 고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서는 극히 무관심하다. 반대로 90년대에는 원작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그 단편인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그 단편에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이입을 강화해가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이 대두해왔다. 이 새로운 소비행동은 오타쿠들 자신에 의해 '캐릭터 인간'으로 불리고 있다. 후술하듯이 거기에서 오타쿠들은 이야기나 메시지와는 거의 관계없이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하고 있다.-76쪽

<에반겔리온>의 팬이 추구하고 있었던 것 중 - (전략) 많은 건담 팬들은 건담의 세계를 정밀조사하는 데 욕망을 쏟고 있다. 즉 거기에는 가공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정열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에반겔리온>의 팬들, 특히 젊은 세대(제3세대)는 그 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에반겔리온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처음부터 2차창작적인 과도한 읽어내기나 캐릭터 모에의 대상으로서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설정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서는 건담의 세계 같은 커다란 이야기=햐구는 이미 환상으로서도 욕망되고 있지 않았다. <건담>의 팬은 '우주세기' 연표의 정합성이나 메카닉의 리얼리티를 이상하게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쪽

5. 데이터베이스 소비 중 요약 /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90년대에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모에'란 원래 80년대 말에 생긴 말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 또는 인기 연예인 등을 향한 허구적인 욕망을 의미했다고 한다. 특정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관련 상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제작자에게는 작품 그 자체의 질보다 설정이나 일러스트를 통해 모에 욕망을 어떻게 환기할 것인가가 기획의 성패를 직접적으로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길게는 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그 중요성은 90년대의 미디어믹스의 흐름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대되게 되었다.-90쪽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중 요약 -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만화,애니메이션,게임,소설,일러스트, 트레이딩 카드, 피규어, 기타 여러 작품이나 상품의 심층에 있는 것은 이제는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90년대의 미디어믹스 환경에서 그 다양한 작품이나 상품을 묶는 것은 캐릭터밖에 없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 전제 위에(95)서 이야기를 포함한 기획(만화나 애니메이션 또는 소설)과 이야기를 포함하지 않는 기획(일러스트나 피규어)사이를 마음대로 왕복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개의 기획은 시뮬라크르이며 그 배후에 캐릭터나 설정으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가 있다.-95쪽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우리의 세계상은 이야기적이고 영화적인 세계시선에 의해 지탱되던 것에서 데이터베이스적이고 인터페이스적인 검색엔진에 의해 읽어내지는 것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일본의 오타쿠들은 70년대에는 커다란 이야기를 잃어버렸고,80년대에는 그 잃어버린 커다란 이야기를 날조하는 단계(이야기 소비)에 이르렀으며, 계속되는 90년대에는 그 날조의 필요성조차 폐기하고 단순히 데이터베이스를 욕망하는 단계(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맞이했다.-97쪽

(전략)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의 추구,그가 말하는 '동물로의 회귀'이며 또하는 일본적인 스노비즘이다./'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는다.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이것의 궁극의 스노비즘이다.(119)-118,119쪽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의 자연과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의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순수하게 의례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은 되지 않는 것이다.-119쪽

포스트 역사의 인간 = 오타쿠들은 오타쿠계 작품의 가치와 패턴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굳이 취향을 분리해낸다. 즉 '형식을 내용에서 계속 분리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에서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방관자로서의 자기(='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121쪽

스놉하고 냉소적인 주체는 세계의 실질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형식적 가치를 믿는 척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며,때로 그 형식=겉모습 때문에 실질을 희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코제브는 이 '그렇기때문에 더욱'을 주체의 능동성으로 파악했지만, 지젝은 그러한 전도가 오히려 주체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제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복을 자행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탈린주의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싫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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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 뉴요커의 페이소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우디 앨런 외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2월
품절


앨런은 영화의 모(79)습과 색채를 일관성 있게 조율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많은 관객들이 그것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알아본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이 작업은 중요한 일이다. "사실, 그저 극소수의 관객만이 영화의 외적인 모습에 제대로 관심을 갖겠지요."그가 말했다. -79쪽

우리는 아마도 한 시대의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걸 거에요. 집에서 영화 보는 게 편리하고, 경제적이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시대가 오는 건 그저 시간문제에요. <애니 홀>의 l.a 로케이션 촬영을 하면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도 그거였어요.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영화보는 데 푹 빠져 있었죠. 그들의 집에 있는 30인치 스크린이 70인치 스크린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에요. 그런 시대가 오면 굳이 불편하게 극장을 가기 위해 외출할 필요가 없죠. 더구나 극장의 프린트 질이 좋지 않고, 스크린이 집에서 보는 화면과 비교해 그리 크지 않다면 말입니다.-79쪽

저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극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건 노스탤지어일 뿐이에요. 어릴 때 자라면서 매 주말마다 극장에(79)갔고, 그곳에서 겪은 수많은 즐거운 경험들에서 비롯된 거죠. 이젠 습관적으로 극장을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영화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오락 형식에서 이젠 좀더 예술적인 것으로 변모했죠.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느냐, 그리고 그 영화를 어디서 보느냐를 두고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걸 탓할 순 없어요. Gary Arnorld, Woody Allen on Woody Allen, The Washington Post,17 April 1977.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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