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족문화의 오늘과 내일
여성한국사회연구회 엮음 / 사회문화연구소 / 1995년 3월
절판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가족 : 이효재 중 일부 / 가족사회학에서는 가족을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체제에 종속된 하위집단으로 추상화하여 기능론적으로 설명해 왔다. 파슨즈의 구조기능론이 이것을 대표하고 있다. 핵가족은 현대 산업사회체제에 적합한 기능을 하는 하위집단으로 인식한 것이다.그리하여 통계적 조사방법에서는 자료의 분석적 체계에서 가족을 종속변수로 삼고 있다.대체로 계층적 지위사 사회 경제의 구조적 지표를 독립변수로 삼아 가족구성이나 관계의 형태,행동 및 태도의 경향을 분석하여 제시함으로써 사회구조가 혼인과 가족을 규정하고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이러한 사회학적 방법은 가족의 형태와 생활의 경향을 양적으로 파악하고 예측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가족연구의 주류적인 방법론이 되어 왔다.-11쪽

그러나 이 입장은 가족을 단순히 체제유지를 위한 질서안정에 있어서 보수적 기능을 하(11)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파슨즈의 역할구조론은 여성학에서 비판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성차별과 저임금 노동력의 재생산에 기능적으로 그 보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이러한 역할구조는 인간가족의 본질이라기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하겠다.(중략)문제는 가족을 이렇게 사회구조에 종속적인 재생산적 하위집단으로서만 전제하고 접근하는 데 있는 것이다. 가족이 공동체적 삶의 욕구를 지닌 사회의 기초집단임을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한 입장이기 때문이다.가족은 사회구조와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동시에 자율적인 인간공동체이다.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며 사회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며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기초공동체이다.-11,12쪽

가족과 경제생활 : 문소정 중 일부 / '주머니돈은 쌈지돈'이라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한 가족끼리의 경제적 관계는 '내것 네것 따지지 않는 경제적 자원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흔히 우리는 가족을 '사랑과 공유'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래서 가족구성원 사이의 경제적 관계를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따져 봤자 '주머니돈은 쌈지돈'의 관계이니 다른 특별한 의미가-135쪽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내것 네것 따지는 '주머니돈은 쌈지돈'이라는 가족경제학의 논리는 현대사회와 가족생활에서 점차 위기를 맞고 있다. 현대화와 함께 개인의 업적과 능력에 기초한 개인주의가 사회조직 원리로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확산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적 단위인 가족의 관계에도 개인주의의 가치가 점차 침투해 들어가서 과거의 사회처럼 개인의 개성과 욕망을 매몰시킨 가족집단 우월주의는 지양되고 있다.(중략)가족생활에서 가족구성원의 경제적 욕망과 자유를 공평하게 존중하는 부부별산제 문화가 나타나고 있다.(중략)더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우리의 의식과 정서를 지배해 왔던 '주머니돈은 쌈지돈'이라는 공유 논리가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이는 지난 1993년 8월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를 통해 일어났다.-136쪽

가족의 자녀교육 : 조성숙 중 일부 / 기적적이라 할 만한 단기간의 성장과정에서 교육수요의 폭발적 증가는 사회적 필요에 적절히 인력공급역할을 해 왔다. 그러는 가운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출세의 발판이 됨으로써 입시과열경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풍토에서 자녀의 명문대진입이 곧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짐에 따라 과외공부를 통한 '수재 만들기'에 부모들이 온 정력과 재정을 기울이는 이른바 '자녀교육의 가족사업화'경향을 띠게 되었다.-166쪽

일과 가정생활 정은희 중 일부 / 지난 60,70년대 한국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기업체에서는 밤늦도록 불을 밝히며 일하였다. 남성의 직장에서의 성공은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책임이 부과되는 업무에 시간과 정력을 쏟을수록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어,직장에 헌신적인 남성일수록 가정에서는 '돈버는 기계'로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었다.'새벽에 별보고 나가서 밤중에 별보며 돌아오는'아버지는 가족들과의 정서적 교감은 물론 자녀들의 교육에도 거의 무관하게 되어 가장 부재의 가정에서 여성은 가정의 중심이 되어 왔다.-218쪽

경제성장을 어느 정도 달성한 80,90년대에 이르러 소외되었던 가정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어 가고,특(218)히 젊은 세대의 경우 출근 후 동료끼리의 한잔보다는 가정에서 가족과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을 중시하는 가정중심의 생활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정중심의 생활방식에 대한 의식은 확산되고 있으나 8시간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어 가장역할의 부담감만 가중시키고 있다. 즉 가정중심의 생활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고 있으나 일의 세계의 빈약한 현실조건은 가정중심생활이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게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218,219쪽

중산층 전업주부의 역할은 단순한 가사노동의 범주를 벗어나 가구전체에 관련되는 일로 가계에 대한 경제적 기여,자녀교육에서의 역할,사회관계망의 형성과 유지 등을 담당하기도 한다.즉 자녀교육,사회관계망의 유지,다양한 비공식적 경제활동을 통하여 가구의 지위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활동범위 또한 가정의 사적 영역의 범위를 벗어나 지역사회,친족관계,투자 및 재산관리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문화일보,1992.8.27)-220쪽

여가란 흔히 일의 세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가와 일의 구분에는 미묘한 점이 많이 있다. 오늘날에는 직업활동의 영역과 종류가 세분화되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이 점점 모호해지는 추세이기 때문에,통상적으로 여가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것들이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전문적인 일의 개념으로 잡히곤 하는데 사진작가 운동선수,바둑기사 등이 하는 일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여가의 개념을 정의한다면 일하지 않는 자유시간 가운데서도 그 활용이 개인적 자유의사에 맡겨지면서 결과적으로 즐거운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영복,1991)-229쪽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일과 여가가 거의 분리되지 않았고,생산지향적인 산업화 초기에는 부단한 노동만이 요구되어 왔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의식주의 간편화가 추구됨에 따라서,공업화의 진전으로 생산현장에서 전반적인 기계화로 노동시간이 단축됨에 따라서,또한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대중들(229)의 여가에 대한 대중매체의 침투도와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서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상승됨에 따라서 여가는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의 가족은 의식주 해결에 급급해 오던 '여가 부정'의 시대를 지나 내구재 소비와 더불어 '여가 인식'의 시대를 거쳐서 여가 긍적적인 '대중여가'의 시대를 맞이하였고,이제 여가를 중시하며 '여가 개성시대'로 향하여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229,230쪽

우리 자녀들에게 tv나 비디오 시청이나 컴퓨터게임,게임오락기가 놀이 등 수동적인 여가 외의 건전한 여가놀이 공간이 없다.몇 년 전부터 서울의 대학로가 청소년들의 문화광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나 이곳에 나가는 청소년들을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이 있는 한 진정한 청소년의 여가공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여의도의 자전거광장은 청소년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여가공간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공원이나 고궁들이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폐쇄적인 여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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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고급문화 나남신서 142
허버트J.갠스 / 나남출판 / 1998년 4월
품절


허버트 갠즈의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중 일부를 옮겨본다. 당시 우리나라 언론학자들의 문화에 대한 일정한 보수성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역자의 말 : 지금 우리는 건국 이래 유례없는 국가적 경제위기에 처해 있다. IMF의 긴급구제금융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사회의 모든 면에서 지난날의 생활에 있었던 거품들을 걷어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그 동안 우리는 선진국 국민이라도 된 것처럼 세계의 유명 브랜드,최신의 유행, 값비싼 제품들을 수입,유통,소비하는 데만 열중하며 우리 현실과는 동떨어진 거품생활을 해 왔다. 우리 사회는 생산의 사회가 아닌 유통과 소비의 사회,거품으로 가득한 낭비의 사회였다.-7쪽

대중문화 비판론은 도시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의 생활시간이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으로 구분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생겨났다.로웬달과 피스크가 지적했듯이 대중문화 비판론은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대중적 문예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던 18세기부터 기원한다.-22쪽

대중문화 비판론의 재등장을 일으키게 한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실상 비판론의 존재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내용의 변화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특히 지식인들이 사회에서 '기존질서의 지도적 위치'에 속하거나 속하고 있다고 느끼는(25)그들의 의식과 관련된다. 지금까지 대중문화 비판론의 등장을 보면,지식인들이 권력이나 그 권력을 표현해줄 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상실될 때 나타났으며, 그 권력이나 신분을 획득했을 때에는 점차적으로 사라졌다.-25,26쪽

확실히 매스 컬처란 말은 경멸조의 말이다. 매스는 개인이나 집단의 성원이라기보다는 분별 없는 군집이며,심지어는 폭도라는 뜻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그래서 매스 컬처란 폭도의 비문화성을 뜻하게 된다.-29쪽

대중문화 비판론은 약 2백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현대의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현대적 비판론은 다음 네 가지 주제의 주장들이다. (1) 대중문화 생산의 부정적 측면 :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와는 달리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대중문화는 수용자에게 쾌락만을 주기 위해서 영리추구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기업인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37쪽

(2) 고급문화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로 이인해 고급문화가 저속해진다. 또한 고급문화를 창조할 많은 재능있는 사람을 빼내감으로써 고급문화의 재능있는 자원을 고갈시킨다.-37쪽

(3)대중문화 수용자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 대중문화 내용물의 수용이 가져오는 결과는 가장 좋은 의미라 하더라도 피상적인 만족은 가져다주는 정도이며,가장 좋지 않은 의미는 수용자의 정서에 대단히 유해한 결과를 일으킨다.-37쪽

(4)전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 대중문화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파급되면,문화,문명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수동성을 조장하여 전체주의에 이르게 될 위험성을 가중시킨다. 수동적인 수용자는 독재자의 선동을 위한 대중설득 기술에 쉽게 말려들게 된다.-38쪽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창작자 지향적인 사람들이다.그래서 이들 비판론에 따르면 문화사용자들은 창작자들의 뜻에 따라야 하고,그렇기 때문에 창작자와 그 사용자 사이의 견해차는 있을 수 없으며,문화를 창작자의 견해에 따라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7쪽

미디어 효과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가 모두 의식적인 효과만 측정하고 있을 뿐,있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더구나 그러한 연구들은 소수의 특정한 유형이나 특정내용에 대한 단기적 영향만을 다루고 있을 뿐,그러한 내용이 결정되는 배경이나 상황이 미치는 영향,미디어 자체의 영향 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68쪽

현재로서는 잠정적이지만 미디어 효과와 관련해서 적어도 한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즉,대중문화 비판론자에 의해 가정된 미디어 효과와 실증적인 조사연구가 밝혀낸 미디어의 실제 효과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결과적으로 비판론자들의 미디어 효과의 정도,강도,해독 등에 대한 추리는 부당한 것으로 증명되었다.이같은 증명에도 불구하고 비판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를 싫어하며,고급문화를 대하는 심미적 기준으로 대중문화를 보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듣고 읽는 대중문화 내용물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이들 비판론자들은 매스미디어 수용자도 그들과 같은 심미적 기준을 갖고 있고,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매스 미디어 수용자에 대해 자신들의 비판적 견해를 필연적으로 강요하게 된다.-71쪽

보수주의자는 수용자를 무능력자나 무자격자들로 봄으로써 대중문화의 문제원인을 설명하려는 데 비대해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사회와 문화를 공급하기 위해 시장의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데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가 민속문화를 말살시키고,사람들이 원하지는 않지만,저헝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는 상업적 대중문화로서 대치되었다고 대중문화의 문제원인을 설명하려 한다.보수주의자들은 이른바 대중이 갖는 정치,경제,문화적 면에서의 점증하는 권력에 대해 분개하여 대중문화를 공격한다.반면에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니즘으로부터 해방된 이들 대중이 고급문화를 받아들이여 하지 않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대중문화를 공격한다.-86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나 서로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두 개 정도의 문화를 취향문화로 선택하고 있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선택한 두 문화의 위계가 서로 인접해 있지 않고 아주 차이가 많을 수도 있어서 고급한 취향문화와 아주 저급한 취향문화를 함께 선택,수용하기도 한다.그러한 두 문화의 층에 함께 걸치는 문화현상을 '문화적 양각(cultural straddling)'이라 부르는데,이 현상은 하향적으로 두 층의 문화에 두 발을 걸칠 수도 있고, 상향적으로 두 층의 문화에 두 발을 걸칠 수도 있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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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위험 현대문화론선 15
메리 더글라스 지음, 유제분.이훈상 옮김 / 현대미학사 / 1997년 10월
품절


메리 더글라스의 한국어판 서문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순수와 위험>은 원시인들의 이성적 행위를 옹호하였다. 다시 말해서,금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행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는 관심으로 판명되었다. 이단자가 날씨를 망치고 번개로 죽이거나 바다에 폭풍을 일으킨다고 비난받을 때,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논리 절차에 있어서의 결함이 아니라 책임을 묻는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나는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의 위험을 사용하는 금기의 사고와 우리 현대의 접근방법 사이의 어떤 연관을 맺지 못하였다.-8쪽

이 책의 주제는 모든 장소에서,어디에서나,세계는 도덕화되고 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공기와 흙을 더럽히고 물을 더럽히는 재앙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설명으로 돌려진다.다시 말해서 이미 인기를 잃은 누군가가 그것 때문에 문책을 당할 것이라 것이다. 이처럼 변론적인 위험 이론은 내가 옥스퍼드에서 훈련받은 1940년대의 인류학에서 나왔다.그것은 너무나 잘 인정받고 있는 것이어서 내가 이것에 썼을 때, 내 동료들은 그것이 이미 너무 잘 알려진 것이라고 논평해싸.그렇기 때문에 더 확신을 갖고 나는 그 의미를 전개해 나갔다.-9쪽

질문은 사람들이 불운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이 죽는다. 장례식 참석자들은 그녀가 죽은 이유를 묻는다. 인류학자는 일련의 사례를 목격한 후, 모든 불운에는 고정된 종목의 가능한 이유(9)가 있고 그 가운데 그럴듯한 설명이 선택되며 고정된 종목의 의무 행위가 뒤따른다는 것을 주목한다. 공동체는 어떤 지배적 설명 형태 위에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9~10쪽

한 유형의 설명은 도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조상을 화를 나게 했거나, 금기를 깼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설명을 따르면, 행위는 속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어떤 정화 제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공동체는 법을 따르도록 권고된다. 만약 이것이 지배적 형태의 설명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는 희생자를 탓하지 않는 공동체와는 매우 다르게 구성된 것이다.-10쪽

불운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은 불운을 개인의 적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도덕적으로 말하자면,생존자는 그녀의 적수보다 우수할 필요가 있다.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녀가 죽은 이유가 그녀가 자신의 이익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거나 똑똑치 못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경쟁자의 마술이 그녀의 것보다 강렬했다고 할 것이다.그녀를 죽인 경쟁자는 의혹의 손가락이 그들을 향할 때라도 거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이 정치화되었어도 도덕적 관심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후에 일어나는 결정은 한 공동체를 이룬다. 다시 말해 각 구성원이 경쟁자에 의해 시달릴 것을 예상하고 최소한의 보상과 보복을 위한 행위까지 요구하는 공동체,다시 말해서 개인의 경쟁 상대에 대한 보복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10쪽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또 다른 것은,불운을 초래한 책임을 외부의 적에게로 돌리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대답은 그녀는 집단의 적대자 때문에 죽었는데, 이 적은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 감추어진 불충한 반역자라는 것이다. 이 같은 집단에 따르는 행위는 반역자를 찾아서 그에게 집단 처벌을 받아내고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책임을 돌리는 세 가지 유형의 방식은 처벌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아니 차라리, 영향은 양쪽 모두에게 미친다고 할 수 있는데, 책임을 돌리는 것과 처벌체계는 모두 사회가 형성되는 방식의 징후이다.-10~11쪽

이름도 없이 전혀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공동체도 있다. 여기에서 책임은 모든 방향으로 예측할 수 없이 돌려진다.비행접시와 화성의 침입자,마술,도덕적 실패,기술적 실패,다시 말해서,그 어떤 것도 그럴싸하게 모든 불운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되는 처방이 없다면,요구되는 기준 행위도 없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한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하면 강할수록,자연의 재앙은 더욱더 비난받아야 할 행위의 징표로 의미되는 것이다. 모든 죽음과 대부분의 병은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위험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정의되고, 책임의 발생은 구성원들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설득하려고 조정하는 하나의 부산물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염은 강력한 변론적인 공급원이 된다.책임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곧장 돌리는 것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공동의 위험이 구성원들에게 조작하게 만들며 공동체 규모의 오염의 위협은 상호간의 위협의 무기가 된다. 공동체의 존속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이 관점에서 책임을 묻지 않는 희귀한 공동체는, 단지 타협이라는 영웅적 프로그램에-11쪽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11) 지난 1950년대 후반에 '순수와 위험'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에는 원자력이 세계에 영구한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희의 분위기가 일반적으로 깔려 있었다.과학이 정말로 사물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생각되었다. 타당한 실험과 이론의 권위에 의해 이유가 객관적으로 밝혀지는 실재의 위험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우연과 신비와 악의는 과학이 아직 밝히지 않은 작은 모퉁이에 잠적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세상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강력한 기술공학 덕분에, 책임을 묻는 행위는 조직을 지원하는 기능으로 굴절하는 대신 실재 이유를 물었다. 이른바 '진짜 책임묻기'가 가능했던 것이다.진짜 책임은 지식의 객관적인 기초로 보장받아서 이데올로기의 탄탄한 작업에 매일 수 없었다.-11,12쪽

오염에 대한 원시인들의 태도와 우리 현대인들의 태도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한때 모든 곳에서 있었던 도덕과 위험 간의 관계가 서구의 진보된 지식으로 인해 해체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사고였다.즉,현대에 있어서 도덕은 도덕적 설득에 의해 진지하게 강화되며,위험은 과학 기술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전에는 과학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무모한 책임묻기가 행해졌으며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영적 대리인이 고안되었어야 하며, 마술이나 금기는 무지에 기인했다는 것이다.이러한 가정의 자기 만족은,영혼의 자기 실현이라는 헤겔 철학으로부터 온 유산이었고 이 가정은 막스 베버를 통해 헤겔을 보다 가깝게 계승함으로써 사회학자들에게로 이어졌다. 자아 인식을 높이고(15) 인지를 넓히는 것은 과학기술의 통제가 증가하는 것과 함께한다고 생각되었다. 그와 같은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은 내가 사전에 오염에 관한 항목을 썼던 1968년에도 여전히 지배했었다.-14,15쪽

보다 높은 지식과 보다 나은 의사소통이 우리와 종족사회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는 나도 그들과 같았다. 암묵적으로 아직도 많은 동료들은 이와 같은 도덕적 진보이론을 지지한다.(중략)그런데 갑자기 과학기술 그 자체가 위험의 원천으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원시 위험과 도덕 사이의 오랜 관계가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중략)과학은,서로를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또한 산업화는,위험을 공공의 이익으로 보호하는 수사학으로 이용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차이는 지식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기를 원하는 종류의 공동체나 만들 수 있는 공동체 혹은 과학기술이 가능하게 해준 공동체에 있는 것이다.-15쪽

동시대의 위험분석은 위험을 변론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꾸려서 시야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내가 기존의 위험 분석자들을 대화에 참여시키려고 했을 때, 나는 곧 이러한 의심스러운 위험의 용도들을 강조하는 것이 그릇된 것이고 정결한 과학적 주제에 대해 말하는 더러운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정치학의 검댕과 열기가 위험의 주제에 내포된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끈덕지게 분리시킨다.이들의 직업적인 목표는 관심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기 이전의 위험인지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17쪽

위험연구는 많은 수수께끼와 역설을 들추어왔다. 대중은 결정적으로 전문가가 보는 방식과 같이 위험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대중과 전문가 간의 의견 차이는 위험심리학의 아주 새로운 소분파와 성인 교육의 아주 새로운 전문화된 영역과 위험을 전하고 이름을 붙이는 아주 새로운 학문과 위험의 목록을 만드는 기업을 일으켰다.그러나 범람원을 매입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지진보험을 드는 것을 거절하고 위험한 도로를 건너거나 몰고 다닐 가치가 없는 차를 몰거나 사고를 내는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위험에 관한 교육을 듣지 않는 일반 대중의 좌절스러운 행위는 모두 예전과 같이 계속된다.-17쪽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 사용하기 위해 그다지도 많은 무기가 필요한 것만큼이나, 육체의 위험과 어린아이들의 위험과 자연의 위험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위험에 대한 담론이 정치화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요즈음 너무 순진한 일일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가치에 대한 자유 논쟁이 없을 것이다.공유된 이(18)/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한 공개토론의 장도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소외된 개인들만의 위험 인지의 심리학이론에 나타나는 인간의 이상을 충족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그 같은 인간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다.-18,19쪽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피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데 너무 비효과적이어서 무심결에 엄청난 위험을 택한다고 말해진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바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직업적인 위험심리학자들에 의해 설명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나는 위험이 우리와 함께 하며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가 그다지도 선천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어떻게 우리가 이 지구 위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순수'와 '위험'은 모든 공(19)동체가 그 자신의 구조에 관한 모든 대화 속에서 상대에게 열정적으로 던지는 압축된 논의인 것이다.-19,20쪽

본판 서문 중 일부 / 위생법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연구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알다시피,오염은 기본적으로 무질서이다.절대적인 오물이란 것은 없다.오물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존재한다.우리가 오물을 피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며, 더욱이 무서움이나 성스러운 공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질병에 걸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는 부정을 청결하게 하거나 기피하는 우리의 행동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 부정은 질서에 반대하여 감정을 상하게 한다. 따라서 오물을 배제하는 것은,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환경을 조직하는 적극적인 노력이다.(중략)우리가 병을 피하려는 불안에 지배되어 오물을 제거하고,벽을 도배한다거나 장식한다든가 또는 정리 정돈하는 것은 아니다.환경을 적극적으로 재조정하려는 것은 우리 이념에 따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이 오물을 기피하는 데에는 두렵거나 비합리적인 요소가 일체/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창조적 행동이며 형식을 기능에 연결시키고 경험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이다. 우리들이 격리하고,정돈하고,청결히 하는 행동이 그러하듯이,원시인들이 행하는 청결법과 -23,24쪽

예방법도 같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순수(purity)와 부정(impurity)의 제의들이 경험의 통일을 창조한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그 같은 종류의 제의는 결코 종교의 중심 과제에서 일탈한 것이 아니고, 속죄에 적극 공헌하는 것이다. 그 같은 수단에 의하여 상징적 형식은 완성되고 공식적으로 표시된다. 이들 유형 속에서 공통점이 있는 요소들이 연결되고, 공통점이 없는 경험도 의미가 부여된다.-24쪽

오염의 관념(pollution ideas)은 사회생활에는 두 차원에 걸쳐 작용한다. 그 하나는 주로 수단으로서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표현의 차원이다. 보다 명백한 첫 차원에서 우리는 오염의 관념으로 사람들이 상호 행동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 것을 발견한다. 신앙은 사회 압력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죽어가는 한 노인의 마지막 희망을 보증하고 어머니의 권위를 지키며 그리고 약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기위하여 우주의 모든 힘을 불러들인다. 정치 권력을 장악한 이는 대개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은 원시사회의 지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그리하여 지배자의 정통적인 권위는, 자신의 인격에서,직무의 표정에서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거대한 능력에 의하여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사회 질서는 이를 침해하는 자들을 위협함으로써 위험을 방지한다. 이와 같은 위험에 대한 신앙은 자신이 정의에서 벗어남으로써 초래할까 두려워하는 위험만큼이나, 타인을 위압하는 데도 이용되는 위협이다. 이것은 상호간에 경계하는 강력한 언어이다. 이 차원에서 도덕률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자-24쪽

연 법칙을 끌어들인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병은 간음이 원인이고, 저런 종류의 병은 근친상간이 원인이며, 이러한 천재지변은 정치적 배신의 결과이고(24) 저러한 천재지변은 불경의 결과라는 식이다. 모든 우주가 상호 좋은 주민을 만들려는 시도에 이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간통자의 시선이나 접촉이 이웃이나 아이들에게 병을 가져온다고 믿어지는 것처럼, 위험한 접촉에 대한 신앙에 따라 어떠한 도덕 가치가 지지되고, 어떠한 사회 규범이 결정되는 것이다.-24,25쪽

신분에 대한 주장과 이에 대하여 역으로 요구하는 것에 있어서 오염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염의 신앙을 조사할 때, 재화를 가져온다고 생각되는 종류의 접촉들이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음이 판명된다. 이것은 오염의 신앙이 사회생활에 연결되는 보다 흥미로운 차원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오염은 사회질서에 관한 일반적 견해를 표현하는 비유로서 이용되었다고 믿는다.-25쪽

사회는 외부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와 일체화되지 않고,사회의 일부가 되지 않고,사회의 규범에 따르지 않는 것은,잠재적으로 사회에 반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경계와 주변부에 대한 그 같은 압력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내가 사회를 실제 이상으로 체계적으로 묘사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의 신앙들을 설명하는 데 그와 같이 지나치게 체계화된 표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격리와 정화, 경계의 설정,침해에 대한 징벌 등에 관한 관념은 본래 무질서한 경험에 체계를 부여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부와 외부,위와 아래,남성과 여성,찬성과 반대와의 차이를 확대하고 강조해야만 질서와 유사한 것이 창출되는 것이다.-26쪽

어느 문화에 살더라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힘과 위험에 관한 관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이 기여했을 수도 있는 작은 부분적인 수정은 무시해 버린다.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이 모국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며,일생 동안 모국어가 겪는 변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시한다. 인류학자도 만약 그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문화가 오랫동안 고정된 가치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청결과 접촉 감염에 대한 관념의 발생이 경직된 정신적 시야나 경직된 사회제도를 의미하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아마 그 반대가 진실일 것이다.-27쪽

접촉 감염과 정화의 관념들에 의해 풍부하게 이루어진 문화에서, 개인은,기피의 규범과 형벌 등에 의하여 엄격하게 보호되는,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사상의 범주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같은 개인이 자신의 관념을 자신의 문화의 보호된 습관과 관례에서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사색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일지 모른다.어떻게 그가 그 자신의 사고 과정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살펴볼 수 있겠는가?그러나 또한 그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의 종교를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28쪽

제1장 제의의 부정 - 오염에 관한 우리들의 관념은, 위생에 대한 배려와 관습에 대한 존중, 이 둘로 혼합되어 있다. 물론 위생 규범은 우리 지식이 변화하면서 변한다. 오염을 기피하는 관습적 측면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오염의 규범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히려 그 반대로 우정을 표시할 수 있다. -29쪽

우리에게 성스러운 물건과 장소는 오염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신성과 부정은 대극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굶주림을 포만과, 잠자는 것을 깨어 있는 것과 혼동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종교의 특징은 성성과 부정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 선조 사이에, 우리와 동시대의 원시인들 사이에 거대한 심연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는 매우 광범위하게 주장되어 왔고 오늘날까지 은밀한 형태로 가르쳐지고 있다. -30쪽

다윈 이후 세대에 속하는 로버트슨 스미스는, 현대 문명인이 오랜 진화 과정을 표상한다는 관념을 계승하였다. 그는 우리가 아직도 행하고 믿는 것 중 어떤 것은 화석과 같아서, 일상생활의 업무에 부착된 무의미한 화석화된 부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용인하였다.그러나 로버트슨 스미스는 사멸된 잔존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간 역사의 성장점에 양분을 주지 못하는 관습은, 불합리하고 원시적이라고 기술하면서 이것이 그에게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했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현대에 존재하는 원시 문화들에 달라붙은 자갈과 먼지를 긁어내여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살아 있는 기능으로 진화 상태를 입증할, 생명을 전할 경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39쪽

로버트슨 스미스의 학술 관심에 일층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사상의 조류가 있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과 전통 기독교의 계시를 양립시킬 수 없는 사상가들에게 닥친 신앙의 위기였다.종교에 대한 어떤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신앙과 이성의 모순은 절망적인 것 같이 보였다. 더이상 계시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고 초월적 신앙 없이는 살 수도 없는 일단의 철학자들은 새 공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교리의 계시적 요소들을 조금씩 줄이고 그 자리에 참다운 종교의 주요 핵심으로서 윤리 원칙을 강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40쪽

그는(얼그레이효과 :뒤르켐은) 특히 스펜서로 대표되는 영국 정치철학의 결함이 그에게 제기한, 사회 융합과 같은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개인의 심리가 사회 발전을 설명한다는 공리주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뒤르케임은 사회의 본질이 옳게 이해되려면 일련의 공통 가치, 즉 한 집단적 양상에 공통된 책임인,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바로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프랑스인 르 봉 역시 만연된 벤담의 전통을 수정하는 동일한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그는 뒤르케임과 마찬가리조 집단 심리 이론을 전개했다.-48쪽

성스러움과 세속의 영역, 비종교적 행위와 종교적 행위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하는 뒤르케임은, 로버트슨 스미스의 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 로버트슨은 반대되는 관점을 취하여 종교 영역과 일상 생활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움과 세속 사이를 대조하는 것은 뒤르케임의 사회 통합 이론에서는 필요한 단계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와의 대립을 표현했다. 사회적 양심은 사회의 개인 구성원을 넘어서 그 위에 뭔가 전혀 다른, 외적이며 엄청나게 강력한 그 무엇으로 투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뒤르케임이 분리의 규율은 성스러움의 뚜렷한 표식이며, 세속과는 상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뒤르케임은 어째서 성스러운 것이 전염성인가를 묻는 논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뒤르케임은 종교 실체들의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언급하면서 대답한다. 종교란 사회 경험에 의해 각성되는 단순한 사고들이고 외부로 투사된 집단의 사고이며 윤리의 단순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50쪽

2장 세속의 오염 중 / 의학 물질주의란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 경험을 설명하려는 경향, 예를 들면 비전이나 꿈을 약물이나 소화 불량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위해 만든 말이다.이러한 접근이 다른 해석을 배제시키지(63)만 않는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다.의례를 소홀히 하면 닥칠 통증이나 고통으로 환산하여 그들의 제의 행의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한,대부분의 원시인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의학적 물질주의자이다.필자는 여러 가지 제의의 규범이,이것을 파괴하는 특정의 위험을 초래하는 신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를 밝혀 보겠다. 나 자신이 제의에 있어서 재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 같은 믿음을 액면 그대로의 가치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의학 물질주의와 대립되는 견해에 있어서는,다시 말해서 원시적 제의는 청결에 관한 우리들의 관념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것 역시 제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로 해롭다는 것을 필자는 개탄한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우리들이 씻고,문지르고,분리시키고,소독하는 것은 제의에 있어서 정화와는 단지 피상적인 유사성만을 지닌다.-63,64쪽

우리들의 관습은 위생법에 절대적으로 기초하는 반면 이들의 그것은 상징적이다.우리들이 병균을 죽이는 데 대하여 그들은 악령을 막는다.이것은 한결같이 대조되며 매우 분명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의 상징적 의례와 우리들의 위생법은 때때로 기분 나쁠 정도로 밀접하다.(64) 오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체계가 존재한다. 질서가 부적절한 요소를 거부하는 의미가 있는 한,오물은 사물의 체계적 질서와 분류들의 부산물이다.이러한 오물에 대한 사고는 우리를 곧바로 상징 체계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서 오물과 청결의 상징 체계와의 관련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64,69쪽

이례적인 사건에는 위험하다는 명칭이 붙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례적인 것과 직면한 개인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사회제도의(74)경우,이것이 마치 개인의 자연발생적인 반응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취급한다면 잘못된 것이다.이례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신념은 개인의 해석과 공동체의 해석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왔음직 하다.(중략)만약 부정이 부적절한 물질이라면, 우리는 질서의 관념을 통하여 부정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어떠한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정이나 오물은 포함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일컬어진다.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결에 대한 통찰의 첫걸음이다.-74,75쪽

제3장 레위기에 있어서 기피 중 일부 / 오염(defilement)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관념의 체계적 질서와 연관될 때 생겨난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 있어서 오염의 법칙에 대한 해석을 부여할 때,이것이 단편적인 것이면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염 관념의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그 근본 원리와 외적 경계,변경 및 내적 경계 등등이 격리의 제의(rituals of seperation)에 의해 상호 관련되는 사고의 전체 구조를 참작할 때이다.-77쪽

우리가 어째서 원시 문화는 오염-성향(pollution prone)이며 우리 것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에 직면할 수 없다면 제의상의 오염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우리에게 있어서 오염은 미학,위생학,그리고 교양의 문제이며 이것이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한,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오염에 대한 우리들의 제재는 사회 제재이다.다시 말해서 경멸,사회 추방,뒷소문 심지어 경찰의 조치이다.그러나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집단, 다시 말해서 거대한 집단인 원시인들에게 있어서는,오염의 영향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중대한 오염은 종교적 죄악이다.무엇이 이 차이의 근원인가?이 질문을 피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원시 문화와 현대 문화,이 두 문화 사이의 객관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차이를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124쪽

마침내 우리는 경제적 상호 의존이 현재까지 인류가 도달한 것 중 가장 최고점에 와 있는 현대 세계에 살고 있다. 사회적 분화 작용의 필요 불가결한 부산물은,사회적 제의의 발생인데,이는 곧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갖가지 과정을 대상으로 한 자의식의 발생이다. 다시 말해서 분화 자굥은 특수한 형식의 사회적 강제를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구성원을 사회에 동조하도록 하는 특수한 금전적 유인과 특별한 형태의 형벌이며,또한 구성원의 행동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한 경찰과 감독과 진행계 등이며,요컨대 소규모이며 미분화된 경제적 조건 아래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전체인 것이다.이것은 유기적 연대의 경험이며, 그 경험으로 인하여 우리는 원시적 사회 기구의 약점을 극복하려 한 사람들의 노력을 이해하기 어렵다.-150쪽

무질서가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질서는 또한 형식의 소재를 제공하기도 한다. 질서는 제약을 의미한다. 실현 가능한 모든 소재로부터 일정한 선택이 이루어졌고 가능한 모든 관계로부터 일정한 조합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어떤 형식도 무질서 가운데 실현되지는 않지만 형식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 이것이 우리가 질서를 창조하고자 하지만 단순히 무질서를 부정하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무질서가 현존하는 형식에 파괴적인 것을 인정하지만, 또한 잠재력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무질서는 위험과 능력 양쪽 모두를 상징한다. 제의는 무질서의 잠재적 능력을 인정한다.-153쪽

이제 오염을 정의할 때가 되었다. 모든 영적 능력이 사회 체계의 일부라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모든 영적 능력은 사회 체제를 표현하며 사회 체계를 조직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다.이는 우주에 속하는 능력이 결국 인간 사회와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갖가지 변화가 어떠한 형태의 사회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과는 다른 종류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이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으킬지 모르는 것이며,이는 정령의 일부에 속하지 않지만, 성인의 제의와 수련 등에 의하여 구입하거나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오염의 능력들이며, 이들은 관념의 구조 그 자체에 내재하여 결합하여야 할 것을 격리하고 격리하여야 할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 행위를 벌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오염은 우주 구조이든 사회 구조이든 구조의 윤곽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위험이다.-182쪽

어떠한 문화도,사회 형태,가치관,우주관,그리고 일체의 지식을 포함하며 그것을 통해 모든 경험을 결합하는 일련의 상관적 체계이다.어떠한 종류의 문화 주제는,육체를 교묘히 조작하는 제의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러한 매우 일반적 의미에서 원시 문화는 자기 순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제의의 목적은,현실로부터의 소극적 도피는 아니다.그들의 제의의 목적은 유아들이 현실을 도피하여 손가락을 빨거나 자위하는 것과 비유되어서는 유익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제의는 사회 관계의 형식을 제정하고 사회 관계에 가시적 표현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사회를 숙지하게 한다.바꾸어 말하자면 제의는 육체로 표명되는 상징적 매체를 통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작용하는 것이다.-204쪽

오염의 신앙이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일종의 비인격적 처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은,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도덕 체계를 뒷받침하는 수단이다.-210쪽

정화 의식만이 도덕적 잘못을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여겨질 때,오염과 도덕 간에 새로운 종류의 관계가 출현한다.그러면 오염과 정화를 포함한 복잡하게 얽힌 전체 관념은,사회구조의 시점에서 보면,일종의 안전망과 같은 것이 된다.(216) 우리는 오염과 도덕을 연결하는 마지막 문제점에 이끌리게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복잡하게 얽힌 상징 체계들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문화적 생명을 가질 수 있고 사회제도의 전개를 선도할 수도 있다.-216,217쪽

델리아 콤플렉스 : 요부 공포감. 삼손을 유혹하여 그의 막대한 힘이 머리칼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는 머리칼을 잘라 버린 구약성서의 여인.-240쪽

오염의 공포는 성을 포함하지 않는 모순 주위에는 모이는 것 같지 않다.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회답은 아마도 성관계를 규제하는 사회적 압력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것은 없을 것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새로운 기독교 사회에는 남성도 여성도 없어야 할 것이라는,성 바울의 비상한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244쪽

오염은 정신의 식별 작용에 의하여 창조되어,질서 창출의 부산물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식별 작용의 이전 상태에서 단서를 출발하여 식별 작용을 통하여,어떠한 질서를 위협하는 임무를 맡으며 마침내 그것은 그의 진정코 구별할 수 없는 본래의 특성으로 돌아간다.그러므로 무정형의 혼돈은,붕괴의 시작이 되면서(250) 이와 함께 발단과 성장과의 적절한 상징인 것이다.-249쪽

역자 유제분의 <메리 더글라스의 오염론과 문화이론>중 일부 - 이 저서는 종교적 오염의 기본 개념, 다시 말해서 순수와 불결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상징과 문화의 체계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더글라스에게 있어서 종교적 오염은 인간 문화의 특성이 된다. 요컨대,어떤 특정한 종교에 있어서 오염과 순결의 개념은 총체적인 인지구조의 맥락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더글라스는 원시의 오염 관념이 사회의 상징체계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대의 오염 관념도 단지 위생학적인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모든 사회의 복잡한 상징체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문화적 분류와 사회 질서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영역의 경계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한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이는 이 저작의 중요한 논의의 하나로,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 간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286쪽

그리하여 무엇이 더럽게 또는 깨끗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것은,사회의 도덕 질서의 가장 깊은 비밀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오염으로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것들과 오물은,사회의 분류체계와 규율을 나타나기 때문이다. 질서와 실재의 감각을 이해하고 귀속시키기 위해 인간은 종교적 체계에 의하여 사회 범주를 개발하고, 이 범주들에서 빠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불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286쪽

따라서 불결이나 오물은 분리된 문제가 결코 아니며 순전히 인식론만의 문제도 아니다. 분류의 문제와 옳고 그름을 정하는 도덕적 영역은 공존한다. 도덕률은 사회의 현실과 완전히 겹치는 것으로,사물은 사실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에 공존하는 것이다.도덕 질서는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는 데 스며들어 있다.다시 말해서,분류하거나 정화하거나 또는 정돈함으로써,사회현실의 구조뿐 아니라 도덕 감정도 강화되는 것이다.현실을 다른 범주에 배정하는 행위에 내재한 도덕 요소는 사물이 제자리에서 벗어날 때 특히 명백해진다.(286)그 지점에서 우리는 사물의 구조를 재조정할 의무를 느끼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와 도덕 질서의 구조는 강화되는 것이다.-286,287쪽

더글라스에 의하면,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들을 일탈자나 전복자,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재분류하도록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집단은 사실상 일탈을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집단 사회는 개개인들이 도덕적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개인을 경계 밖에 있는 것으로 재규정하기 위해 경계를 옮기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 정체성을 추구할 때, 사회 내에서 적을 찾는 것이다.-288쪽

더글라스가 언어적 기호와 제의,사회의 연대를 연결시킨 것은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첫째는 집단의 연대나 공동성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언어 기호는 더욱 제한될 것이라는 것,둘째는 집단의 연대나 공동성이 낮으면 낮을수록,언어 기호는 더욱 정교(복잡)할 것이라는 것이다.-291쪽

더글라스는 한 개인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다양성은 그룹과 그리드라는 사회성의 두 영역으로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룹은 한 개인이 결합된 구성 단위에 통합된 정도를 의미한다.통합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선택은 보다 그룹의 결정에 달려 있다.(중략)그리드는 한 개인의 삶이 외적으로 부과된 규범에 의하여 제한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규범의 범주가 넓고 구속력이 높을수록,개인이 협상할 수 있는 삶의 여지는 더욱 적어지는 것이다.-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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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
요시미 순야 지음, 박광현 옮김 / 동국대학교출판부 / 2008년 10월
절판


1990년대 초엽까지 일본에서는 문화연구가 총체적으로 거론된 바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문화연구는 일부의 매체 연(9)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비판적 수용자 연구의 하나로 해석되고 수용되는 데 그쳤다. 그런 수용 과정에서 논자들은 주류의 사회심리학적인 효과연구를 비판하고 '해석'과정에서 수용자가 의미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텍스트의 기호론적인 다의성을 강조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연구의 요점을 수용자의 의미해석이라는 차원으로 환원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이용과 만족에 관한 연구와도 통합이 가능할 것처럼 이해하는 태도는 일상생활의 총체적 비판으로서 문화연구가 지니고 있는 비판적인 범주를 너무나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9,10쪽

1990년 후반 이후 일본에서 문화연구를 둘러싼 상황은 일변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유행품이 되었던 것이다.더구나 그것은 수용자 이론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유행했다.오히려 1990년대 일본에서의 문화연구는 매체연구의 하나로서 주변화되고,포스트콜로니얼한 표상분석의 조류로(10)서 수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국민국가로 비판으로서의 성격이 문화연구에 부가되기 시작했고,또한 '피억압자'들의 저항운동과도 결부되기 시작했다.지금의 문화연구는 10여 년 전 매체연구 분야에서 수용되었던 때와는 달리 일종의 표상의 정치학으로서 젊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연구의 시야 확대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가령 마지막에 언급한 피억압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여러 차례 비판했듯이,문화연구가 피억압자의 주체성을 본질주의적으로 고정화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0,11쪽

문화를 이미 거기에 존재하며 고유한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영역이 근.현대에 존립하는 그 자체를 되묻는 것.문화를 경제나 정치로부터 분리된 고정적 영역으로 여기거나 또 그런 경제나 정치에 종속적인 표층의 질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이 작동하고 경제와 결합하여 담론의 중층적인(22)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문제화해 나가는 것.문화연구가 단순한 문화의 실증주의적인 연구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문화연구는 역사 이해의 불가결한 차원으로서 문화에 주목한다는 것뿐만 아니라,그러한 문화는 차원 자체의 존립 기제,즉 그것이 일정한 담론과 권력의 소재적인 구성으로서 성립하며 재생산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그것을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로 문화를 문제제기하는 연구인 것-22,23쪽

이와 같은 의미에서 문화가 인류학적,역사적 기술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중대한 문제로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어났다. 더욱이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일정한 독자적 사회영역을 제시하는 말로서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이기 때문에,문화가 문제시될 수 있는 전제 조건 그 자체가 19세기 전반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23쪽

스크루티니(scrunity)그룹: 1932년 리비스그룹에 의해 출범한 비평전문지 '스크루티니'를 통해 케임브리지 영문학을 주도한 그룹으로,영문학의 지도를 다시 작성했다고 평가된다. 엄격한 비평적 분석의 중요성과 '페이지 위의 단어들'에 대한 잘 훈련된 집중을 강조했으며,문학을 근대 상업사회 어디에서나 수세에 몰리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들의 보호캡슐로 간주했다. 또한 단순히 문학적이기만 한 가치들을 거부했으며,문학작품의 평가방법은 역사 및 사회 전반의 성격에 관한 보다 통찰력있는 판단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27쪽

스크루티니 그룹은 훗날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일상 속 문화적 실천의 정치성을 문제제기한 것과는 다르게 어디까지나 서구의 엘리트주의적인 가치에 근거해 대중문화의 침투를 비평하는 입장에 그쳤다.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몇 가지 점에서 문화연구의 문제를 구성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드워킨은 이 스크루티니 그룹으로부터의 연속성을 다음 세 가지 점으로서 정리하고 있다. 첫째,그것은 문학작품의 범주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적 실천,광고나 대중 잡지,대중음악,영화 등에 대해서도 비평적인 방법을 적용해 나갔다.-29쪽

둘째,그것은 기존의 문학연구와 같은 작품론이나 작가론의 차원을 넘어서 문화(29)적 텍스트나 미디어,언어,역사를 포괄적으로 문제 삼는 지평을 개척했다.셋째, 그들은 이런 비평적인 실천을 실제 학교에서의 교육실천과 결부시키고 미디어연구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하나로 통합해 발전시킬 방도를 제시했다(드워킨,1997).-29,30쪽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에서 미국의 중층적인 작용을 절묘하게 파악한 딥 헵디지는 이러한 오웰의 아메리카니즘 비판과 '읽고 쓰는 능력의 효용'(1958)에서 보여준 호가트의 관점이 지닌 연속성을 지적하고 있다.리비스나 엘리엇이 영국의 엘리트적인 문화전통을 옹호하면서(34)그런 토양에 야만적으로 침투해오는 미국류의 대중문화를 비난한 데 반해,오웰이나 호가트는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견고한 생활을 옹호하면서 그런 생활세계에 매스 미디어와 소비주의로 대표되는 아메리카니즘이 침투해오는 것을 위험시했던 것이다(헵디지,1988).이렇게 문화연구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문화'를 문제시하는 관점이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세계에 내재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때, 아카데미즘이나 전문영역의 주변,예를 들면 성인교육의 현장과 같은 교실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34쪽

호가트는 현대사회가 특별한 기능으로 "평범함에 만족하는 테크닉"을 발달시키고,이미 "거대하고 새로운 설득 기계를 가진 통속화의 사도들이 넓게 펼쳐진 무인의 평원을 점령"하고 있다고도 논하고 있다.거기에서는 진보의 관념이 "오늘날의 복잡하게 뒤엉킨 상업적 생활의 압력에 짓눌린 채 확대되어 거의 제약 없는 물질적인 '진보주의'에까지 미치고"있다.특히,이러한 진보주의의 수용에는 "대중적인 선전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영화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호가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영국의 노동자 계급(36)사이에서 미국류의 진보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 광범위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36,37쪽

호가트의 관점은 노스탤지어로 이상화된 계급문화에 의거하면서 현재진행중인 문화변용을 가치의 퇴락으로서 파악했다는 점에서,엘리트주의적인 입장에서 현재의 변화를 비판한 스크루티니 그룹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아니다. ->41 : 드워킨은 홀과 화넬의 공저 <대중예술(1964)>이 상업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관점과는 다르며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치관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서 문화현상을 평가하고자 했던 점에서,1970년대 이후 하위문화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논하고 있다.단지 그 한계는 그들이 재즈의 문화적 가치를 열심이 인정했던 것에 비해서 록큰롤은 부분적으로 평가하는 데 그쳤고,블루스와의 연속성이나 60년대 이후 록의 실험성에도 민감하지 못했다는 식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방법론적으로 홀과 화넬은 그 시점에서는 아직 음악이나 영상 텍스트를 분석하는 수법으로서 기호론이나 정신분석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고,수용자가 그런 텍스트를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해 민족지학적인 조사를 시도하지도 않았다.오히려 홀과(41)화넬은 절차적으로는 스크루티니 그룹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일정한 가치 척도-38,41쪽

를 끼워 맞춰서,예컨대 재즈의 문화적 가치를 록의 상위에 두고 있었다.(42) / 3.문화주의와 구조주의? - 유의해두고자 하는 것은 1960년대 중반까지 문화연구와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의 관계는 아직 유동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분명 E.P톰슨과 같이 이른 단계부터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여했던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윌리엄즈나 홀 등 버밍엄대학의 연구소 사람들이(43)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알튀세르나 그람시를 도입하기 시작하는 1960년대 말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1968년에 일어난 세계적인 문화 소요는 문화연구의 발전에 대단히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그 소요로 인해 그때까지 문화나 사회에 관한 사고를 지탱해왔던 무엇인가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빈틈으로 한꺼번에 이입되기 시작한 것이 그람시나 알튀세르를 비롯한 대륙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이었다.또한 프랑스의 구조주의는 기존의 영국 문화연구에 결여되어 있었던 텍스트에 관한 구조분석의 지평을 열고 1970년대 이후 문화연구의 지적 생산력의 기반을 만들어갔던 것이다.(44)-42,43,44쪽

문화주의적인 문화 이해에 대해서 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나 경험은 이미 제1차적인,의미나 가치가 거기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기원일 수 없다. 왜냐하면,이러한 접근 방법에서 보자면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과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 지평에서 제시했듯이 우리들은 정해진 기호론적인 코드에 따라서만 비로소 무엇인가 의미를 창출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사회를 구조화하는 코드의 작용은 사람들의 경험을 집합적인 무의식의 차원에서 관통하고 있다.사람들의 직접적인 경험이나 생(46)생한 의미는 그 자체로 근원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러한 코드화 작용의 효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분명,문화주의도 문화나 경험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이나 세대 등이 교차하는 집합적인 과정 안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에게는 경험의 주체로서 그러한 사회적 집합이 보다 본질적으로 전제되었던 것이다.-46,47쪽

구조주의는 오히려 그러한 주체 그 자체를 언어나 담론의 구성 효과로서 이야기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이러한 접근법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그것에 의해 에이전트로서 구성되는 과정 안에 편입되어 있는지를 일러줬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를 크게 진전시켰다고 홀은 말한다(홀,1980).-47쪽

넓은 의미에서 사회가 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을 취하면서도,홀은 역사 안에서의 주체,즉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를 형성하는 주체적인 것에 계속 집착했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푸코의 권력 분석이 구조주의적인 전제에서 출발하면서도 문화주의에서 강조해온 역사의 구체적인 장면에 대해 면밀히 기술한 점을 평가하는 동시에,푸코가 미시적인 담론의 장에 관심을 집중시켜 대문자의 권력과 국가에 대한 관점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비판하기도 했던 것이다.이런 푸코에 대한 비판이 타당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1970년대 문화연구의 전개에 관해 문화주의적인 계보로붙의 단절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일은 삼가고 싶다.폴 윌리스의 하위문화연구나 오디언스 민족지학을 비롯해,문화연구에는 문화주의를 계승한 결과물이 적지 않다.-49쪽

4. 대중문화와 경계의 정치학 - 존 피스크의 견해는 명백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대중적인 것'의 구성 계기를 각각의 복잡한 매개과정(55)으로부터 발췌하여 지배적인 것과 대항적인 것을 이항대립시키는 도식에 빠져 있다.모든 대중문화의 구성 계기를 균일성을 지향하는 헤게모니적인 권력과 이질성을 지향하는 대중적인 저항의 대립 도식에 끼워맞추는 그의 분석 틀은 너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어서 실제 현상의 역동성을 파악할 수 없다. -55,56쪽

특히 다음 두 가지가 문제적이다. 첫째,피스크의 견해에서 대중적인 것은 지배적인 것에 대해서 항상 대항적인 가능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중략)다음으로 피스크의 견해는 의미론적인 레벨에서의 대항성이 정치경제적인 시스템의 작용이나,젠더나 인종을 둘러싼 제도적인 구조 등 다른 문맥적인 힘으로부터 벗어나 논의되어 있다.-56쪽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대중문화연구로서의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이항대립적인 구도로부터 조금씩 해방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점차 대중적인 것을 단순하게 대항문화적 성격에 의해서 정의하거나 계급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담론적 실천을 매개로 하는 미세한 권력 작용에 집중하면서 계급과 인종,젠더 등의 여러 차원이 교차하는 다층적인 항쟁의 장으로서 파악하게 된다.-61쪽

문화를 다시 읽다 중 / 초기 시카고학파의 경우'하위문화'라는 용어 그 자체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무엇보다도 그들의 관점은 그것들을 사회병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일탈이라는 방향으로 회수되어 버렸던 것이다.(68) 현재의 관점에서라면 하위문화는 단순히 기능적인 의미에서 사회 시스템의 하위체계인 것도 소집단의 가치체계인 것도 아니고,오히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상대화하는 계기가 포함된 일정 집단의 문화적 세계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지금까지 전적으로 비행이나 일탈로 이야기되어 왔던 청년들의 문화를 하위문화로 재정의하는 관점을 뚜렷하게 보인 것은 역시 베커의 레이블링 이론으로부터일 것이다.-68,69쪽

청년들을 쾌락으로 파악한 관점은 1950년대에 풍족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지니게 되면서 광고나 대중잡지의 담론으로부터 부상했다.특히 이 시기에는 미국적인 상품이나 유행에 대해 강한 애착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틴에이지(십대')라는 용어가 수입되고 청년문화의 상업적인 측면을 초점화했었다. 헵디지는 두 가지의 이미지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말하는 데에 반대한다.오늘날 청년들의 반항은 소비의 스타일을 통해 표현한다.거기에서 상업적인 쾌락의 영역과 정치적인 반항의 영역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현대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가공하고 패션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영역을 정치화하며 그 아이덴티티의 정치학을 조직하고 있다(헵디지,1988)-97쪽

하지만 1970년대까지의 하위문화 연구는 1980년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비판을 받게 된다.예를 들어,그들의 연구에서는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하위문화의 대항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상품화되고 대중적으로 소비된 하위문화에 대해서는 충분한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확실히 헵디(98)지는 문화산업이 하위문화를 문화상품으로 대량생산해낸 과정이나 저널리즘이 하위문화에 레테르를 붙여나간 과정에 대해 논하면서 지배적인 문화가 하위문화를 순치하고 시스템 안으로 통합시킨 과정을 문제 삼았다.하지만 전체적으로 1970년대의 문화연구에서 하위문화는 우선 저항의 윤리를내포한 것으로서 본질주의적인 파악이 주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그 때문에 문화의 상업적인 소비형식으로서 하위문화가 발달한 과정이나 하위문화 내부의 모순과 어긋나는 점,그리고 그것들이 어떠한 매개작용 속에서 증식하고 변형되고 붕괴되었는가 하는 등의 물음에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98,99쪽

항쟁의 장으로서의 미디어 / 윌리엄즈는 효용연구로 대표되는 미국의 매스컴 연구의 한계를 명확하게 비판하게 된다.이러한 효용연구는 대중매체의 현상을 다양한 힘들이 서로 복잡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문맥으로부터 분리하고 단순한 효과의 원인으로부터 추상해 버린다.문화를 다루는 많은 사회학적 연구들이 대상을 사회적,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하거나 당사자의 의도나 관찰자의 상황에 관여하는 것을 중시해 왔던 것과 달리,매스컴 연구에 관해서는 이해학적 계기가 배제되고 사회적 기능이나 사회화라는 개념과 결합된 과학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이와 같이 탈문맥화된 지평에서 매스미디어가 폭력이나 비행과 같은 일탈행위,혹은 투표행위나 소비행위의 원인으로서 어떻게 기능하고(110)있는지가 측정되었던 것이다.-110,111쪽

윌리엄즈가 비판하는 것은 이와 같은 효용 연구의 시각이 기존의 미디어 체제를 이미 주어진 독립적인 변수로 간주해 버린다는 점에서,그러한 기존 미디어의 실상을 근저에서부터 의문시할 가능성을 처단해버린다는 것이다.따라서 그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효용연구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맥루언의 미디어론에도 매우 엄격한 평가를 내린다.윌리엄즈의 관점에 의하면 맥루언은 미디어를 처음부터 존재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특성이 우리들의 감각질서를 이방적으로 변용시킨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중략)이처럼 윌리엄즈는 역사사회적인 구성력이 결여되어 있는 맥루언의 미디어 파악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11쪽

윌리엄즈는 또한 '텔레비전이 있는 생활'을 공간적인 차(113)원으로부터 포착하여 '이동적 사생활화'와 결부시킨다.그는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동향을(1)이동성의 확대와(2)사적 생활영역의 중심화에서 찾고,텔레비전은 그 두 가지 동향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고 있다고 논한다.20세기 초에는 철도와 같은 공공교통과 영화와 같은 미디어,도시화된 생활양식이 결합되어 일상생활을 성립시켰다면 20세기 중반 이후 이 결합은 자동차교통과 교외주택지의 생활,텔레비전과 같이 미디어가 조직해내는 기술시스템으로 전환했다.우리는 오늘날 텔레비전 영화를 통해서 세계라는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이러한 전자적인 창으로서의 텔레비전이라는 존재는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빈번하게 광범위한 이동을 필요로 하게 되고,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생활이 점점 교외의 사적영역으로 둘러싸이는 상보적 운동을 매개한다(윌리엄즈,1977) -113,114쪽

윌리엄즈의 접근법은 사회생활의 구체적인 컨텍스트로부터 추출된 추상적인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또는 테크놀로지의 자율적인 힘에 미디어연구의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컨텍스트,즉 일상생활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일상이 컨텍스트화되는 과정 속에서 미디어가 어떻게 구성되고 소비되는지(114)를 고찰하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일상적 경험에 준거한 문화유물론적 접근이야말로 문화연구에서 미디어연구가 차지하고 있는 원점인 것이다.-114,115쪽

홀의 관점은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매스컴연구에 대해 두 가지의 근본적인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첫째로 매스컴연구의 전달 모델은 상이한 입장이나 집단의 차이를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사회적인 대세를 통해 기본적인 가치에 관한 합의가 성립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효용연구가 문제 삼은 것은 미디어의 정보가 수신자의 선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었다. 미디어의 효용이 측정 가능한 수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질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도 '선호'의 양적인 차로 환원될 수 있다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었다.-120쪽

효용 연구의 패러다임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치의 대립을 선호의 차로 환원해 버리는 시장주의적 사회이해,예컨대 파슨의 사회시스템론으(120)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회이해가 사회과학 전반에 지배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이 모델에서는 권력의 문제가 영향력의 문제로 환원되고 개인적인 선호의 차이를 초월한 가치의 시스템 차원에서는 사회가 단일한 방향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맞고 있었으며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규범과 모순된 행동은 이질적인 가치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일탈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었다.-120,121쪽

이데올로기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해나가는 담론적 실천의 문제이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메타담론의 문제는 아니다.미디어는 동시대의 현실을 분절화하고 정의하며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담론의구조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역사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러한 구조가 처음부터 사회에 공유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립과 갈등,항쟁속에서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또한 새롭게 조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중매체의 담론실천은 이러한 종류의 헤게모니적인 현실 구성의 기간을 이루는 것이다.또한 이러한 미디어를 둘러싼 관점의 언어론적 전회를 통해 우리는 내용분석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언급대상과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미디어가 현실의 틀을 구성하는 암시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문제를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124쪽

1970년대 초 윌리엄즈와 홀은 모두 주류의 매스 커뮤니케이션론이나 기술결정론에 대항적인 입장에서,커뮤니케이션이 사회적인 경쟁 속에서 구축된다는 점을 강조하며,대항적 미디어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윌리엄즈의 논의는 분명 텍스트의 다성적인 읽기보다도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구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역으로 홀의 논의는 후자보(124)다도 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24,125쪽

피스크는 '프로그램'과 '텍스트'의 개념을 구별하자고 제안한다. 우선 '명확하게 규정되고 의미가 부여되어 텔레비전에서 출력된 것이 프로그램'이다.프로그램은 유니트로서 판매되고 시간 단위로 분배된다.그에 비해 '시청자 한 사람 한 사람과 프로그램과의 상호작용이 프로그램에 숨겨진 여러 가지 의미작용과 즐거움을 창(128)출할 때,프로그램은 독해라는 요소를 통해 텍스트가 된다.즉,하나의 프로그램은 그것이 수용될 때의 사회적 제반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이한 텍스트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128,129쪽

문화연구는 텍스트의 구조에 특권성을 부여하는 '텍스트중심주의'에는 반대하지만 텍스트 읽기가 오(135)디언스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135쪽

문화연구의 오디언스 민족지학은 실제로 실증적인 매스컴 연구 속에서 성과를 쌓은 수용자연구의(137)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등장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제임스 커런에 의한 비판으로,그는 몰리의 오디언스 연구를 신수정주의라고 부르고 그것들은 효용연구의 추세에 의해 선취된 것이지 몰리가 주장하는 수준의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커런은 효용연구가 이미 1940년대부터 수용자가 단지 미디어에 수동적으로 조작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율성을 갖춘 능동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조해왔다고 논했다.커런에 의하면 효용 연구에서는 상반된 입장의 사람들이 같은 텍스트에 극히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왔다. 잘 알려진 라자스펠드의 커뮤니케이션의 2단계 흐름 모델도 이러한 미디어에 대한 수용자의 상대적인 자율성에 주목해왔다고 말한다.몰리의 시점은 분명 텍스트 중심주의적인 구조주의와 대비시켜 보자면 새로운 것인지 몰라도,거기에 선행하는 실증적인 효용연구로의 격세유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136,137쪽

하지만 이와 같이 문화연구를 주류 매스컴 연구와 중첩시키는 것은 그 기저에 착오가 있다.예컨대 몰리는 이미 <네이션와이드 오디언스>에서 오디언스가 미디어를 다의적으로 독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모든 해석에 똑같이 열려 있는 것은(137)아니며 우선적인 읽기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화연구가 텍스트의 다성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결코 이용과 만족연구가 전제하는 다원주의를 승인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또한 몰리는 이용과 만족연구의 배경에 있는 개인의 사회심리적인 특성에서 추상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위문화적인 질서로 문맥화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137,138쪽

커런의 비판에 대해서 몰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우선,최근의 역사학 논의가 보여주듯이 과거는 현재에 의해 소환되고 이야기된다.초기의 효용연구에는 분명 수용자의 자율성을 강조한 얼마간의 연구가 있으며 그러한 계보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커런이 그와 같은 흐름을 통해 매스컴 연구의 과거를 말할 때, 그 역사는 그가 말한 '신수정주의'적인 연구의 경향이 없었다면 논의될 수도 없었던 역사인 것이다. 요컨대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논의 선점이 있고,커런은 문화연구가 확장한 전망에 입각하면서 그것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연구를 채택하여 전자가 후자의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138쪽

앙 역시 수용자의 능동성을 핵으로 하여 문화연구를 이용과 만족 연구에 접근시키는 것이 허위라고 말한다.그녀는 주류 연구와 비판적인 연구의 차이는 양자가 입각하고 있는 의견의 차이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문화연구나 이용과 만족연구는 텔레비전 시청자가 반드시 발신자의 의도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며 텍스트에 능동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면서도,결정적으로 그러한 능동성을 성립시킨 사회적 문맥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있다.이를테면 이용과 만족연구가 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에 기반한 채 개인을 원리적으로는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간주하는 것과 달리,문화연구는 후기구조주의를 배경으로 주체를 계급이나 젠더,에스니시티 등을 둘러싼 사회적 권력의 불균등한 배분 속에서 구조화된 것으로 간주한다.후자의 경우 텍스트의 외부에 있는 것은 자유로운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중층 배치인 것이다.이것은 주체가 처음부터 변경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결정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주체는 결정되지 않는(139)것도, 결정되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중층결정되는 것이다.(앙,2000)-139쪽

1980년대 이후,지금까지 지역이나 내셔널,민족 등에 의해 규정될 수 있었던 문화의 기반이 획기적으로 변용하고,다양한 경계가 교차하며 충돌해가는 가운데 문화연구는 이 끊임없는 탈영역화/재영역화된 글로벌/로컬한 변동의 과정에 초점을 맞춰 파악해왔다.이 때 한편에서는 다국적기업의 초국가적인 자본의 전략과 세계동시적인 미디어가 문제시되고,다른 한편에서는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두해 온 반세계화와 로컬리즘,신자유주의가 문제시되었다.게다가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이항대립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차원에서 크레올,디아스포라,혼종,다문화주의 등을 둘러싼 포스트콜로니얼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149쪽

실제,월러스틴의 인종주의를 둘러싼 논의는 현실의 인종차별에 입각해 생각해 보면 역동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문화가 단순히 집단 사이의 차이를 식별하는 표식이 아니라,그 담당자에게 고유한 의미를 지닌 실천이라는 점을 간과할 여지가 있다.발리바르도 인종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이 '사회적 논쟁의 복합성'에 형식적인 적어도 획일성과 상대성을 강요하(155)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발리바르의 생각에는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시스템의 일원적인 작용이 아니라,각각의 로컬한 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논쟁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다양한 형태인 것이다. -155,156쪽

몰리에 따르면,가정이라는 공간 안에 이미 전지구적인 것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문화연구가 민족지학적인 다양한 연구 안에서 탐구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텔레비전 소비를 거시적인 이데올로기나 권력 편제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전략적인 틀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오늘날 미디어 전체에 있어서 편제의 중심은 전지구적을 우리들의 경험을 단편화하는 미디어로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편화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오히려 젠더나 네이션을 둘러싼 경계서이 새롭게,중층적인 방식을 통해 공간적으로 조직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사적 공간이나 가정이라는 공간과 같은 미시적 공간이 전지구적인 공간에 우선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의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전지구적인 공간과 서로 작용하면서 재창출되어가는 것이다(몰리,1992)-179쪽

한편,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 문화연구가 유행하는 속에서 피억압자에 의한 저항의 새로운 이론적 무기로서 그(188)것을 도입하자는 입장도 매우 강조되었다.이러한 입장은 흔히 문화연구의 가치를 피억압자의 급진적인 저항운동과 결부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분명 아카데믹한 제도화에 비판적인 거리를 견지하며,스스로의 지를 어디까지나 동시대의 사회 모순과 갈등,그리고 운동과 같은 문화정치적 투쟁 상황의 중심에 두려고 하는 문화연구의 입장을 정당하게 표현하고는 있다.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문화연구의 핵심이 피억압자의 주체성을 본질주의적으로 고정화하는 데 대한 비판에 있다는 점은 이미 다양한 논의를 통해 검토되어온 바 있다.일상의 평범하며 분산적이고 단편적인 문화실천 속에서의 정치와 다른 한편의 저항과 운동,그리고 억압과 배제와 같은 보다 직접적인 정치의 발현은 어디까지나 연속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현재화한 저항과 운동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일상적 실천 안에 다양한 차이와 아이덴티티가 구성되고 또 실정성을 띠는 정치의 장이 무수히 중복되어 있는 것인데,그러한 장의 내부로부터 문제 제기-188,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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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 1880~1980 - 2010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김영희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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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언론사 연구 또는 커뮤니케이션사 연구에서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고 보급되는 과정이나 새 메체 출현으로 형성된 미디어 수용자들과 관련한 연구 다시 말해서 매체 수용 현상과 수용자의 매체 접촉 현상에 관한 연구는 1990년대 이전에는 이런 주제의 연구가 거의 없었다.-머리말5쪽

서론 : 한국사회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수용 역사 -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전체적인 미디어 발달 과정은 로웬스타인과 메릴(1990)이 설명한 E-P-S곡선(Elite-Popular-Specialized)을 그리며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새로 출현한 미디어는 새로운 개혁요소로서 체제구성원들이 그 개혁요소를 어느 정도 채택하여 채택 속도가 스스로 지속성을 갖는 시점 즉 결정적 다수(critical mass)가 형성되면 채택 속도가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다(로저스,2003/2005)(중략)한편 새로운 매체가 출현하면 그 매체를 접촉하는 수용자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때 수용자의 미디어 이용 양상은 대체로 사회 발전 정도와 미디어 접근 가능성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해 규정되기 마련이다.수용자의 미디어 이용은 일상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큰 틀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과정이기 때문이다(맥퀘일,2000/2002)-1쪽

미디어가 출현하고 보급이 확산되면서 이를 매개로 한 공동체의 성격도 주목된다. 앤더슨은 "민족이란 일종의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라 하였다.(앤더슨,1991)민족을 상상된 것으로 보는 이유를 그는,민족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서로 모르고,만나지도 않으며, 전혀 얘기 들은 적도 없지만, 그들 각자의 생각에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를 재표현하는 수단이 18세기 유럽과 그 이후 세계 각 지역에서 발전된 소설과 신문이라고 설명했다. 몰리와 로빈스(1995)는 이 개념을 텔레비전에 확대,적용했다. 텔레비전이 수용자들에게 상상의 전자공동체(imagined electronic community)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2쪽

기술적으로 같은 속성의 매체가 보급,전파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각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면들이 있지만, 기본적인 유형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은 한국사회에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고 보급되는 과정과 그에 따라 새로 형성되는 수용자의 성격 및 한국사회에 미디어가 출현하며 대두된 사회적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3쪽

로웬스타인과 메릴에 의하면 엘리트 단계의 사회는 경제적인 빈곤과 문명이 일반화되어 있는 대체로 농경사회의 모습이다. 미디어의 수도 적고 전달되는 정보량도 적다. 이에 따라 미디어 소비비용은 상대적으로 높다. 미디어의 주 수입원은 구독료이다. 미디어의 내용은 주로 계도적이며,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예물과 정치기사가 그 중심이다.따라서 미디어의 주요 향유 계층은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소수 엘리트층이다.미디어 발달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이 단계가 대체로 1883년 근대적인 신문 <한성순보>가 출현한 이후, 1950년대 제1공화국 시기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4쪽

제1공화국 시기까지의 한국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대체로 대인 커뮤니케이션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공적인 문제에 대해 수용자에게 전해지는 정보의 양은 매우 적었고,정보의 흐름은 미디어로부터 의견지도자를 거쳐,일반 수용자에게로 흐르는 2단계 유통의 유형이 많았던 기간이었다.사회집단에 속하는 수용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정보의 2단계 유통이라기보다는 구매력 부족으로 매체를 직접 접촉하기 어려운 데서 비롯된 정보의 2단계 흐름이었다.-5쪽

그런데 한국사회에 매체 보급이 대중화되기 이전 전국적인 상황과는 매우 다른 예외적인 지역은 서울이었다. 개화기에서 제1공화국 시기까지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전국적으로는 미디어 보급이 매우 부진했지만, 수도 서울에는 상대적으로 신문,잡지,라디오,영화 등 여러 매체들이 먼저 보급되었고,전기,교통,통신 등 사회간접시설의 설치와 확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5쪽

대중화 단계 / 로웬스타인과 메릴의 e-p-s곡선에서 두 번째 단계인 대중화 단계는 대체로 산업사회의 모습이다.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수용자의 경제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이 향상된다. 이에 따라 미디어 구매력이 증가하여 다양한 매체가 출현하고, 수용자의 규모도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유통되는 정보의 양도 많다. 이 단계는 특히 라디오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져 대중화 단계 진입을 견인한다. 라디오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미디어 대중화 효과를 그들은 도약효과(leapfrog eff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엘리트단계의 미디어 보급 장애물이었던 빈곤과 문맹을 짧은 시간에 극복하고 대중화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6쪽

텔레비전과 영화도 대중화에 기여하지만 프로그램 제작시설과 제작비용, 극장 설립, 텔레비전 수상기 구입비용등이 많이 필요해 라디오보다는 대중화 효과가 적은 편이다. 이 기간의 매체 내용은 대체로 대중이 선호하는 오락이나 인간적 흥미를 일으키는 내용이 많아 선정적,소비적인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 기간의 미디어 주 수입원은 미디어 대량 보급에 따라 광고비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이 단계의 수용자는 개별 미디어의 수용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대중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한편 미디어 광고의 소비자이며 동시에 광고주에게 판매되는 시장으로서의 수용자 즉 수용자 상품의 성격을 띠게 된다.-6쪽

미디어가 보급되는 과정으로 말할 때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비로소 대중화 단계에 진입한 연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특히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의 군정당국과 제3공화국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이를 홍보하고, 국민들의 참여와 협조를 이끌고 동원하는 수단으로서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하고 그 보급을 지원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이에 따라 이 시기에 민간 라디오 방송,텔레비전 방송 등 여러 종류의 방송매체가 출현하고, 그 보급이 전반적으로 크게 증가했다.-7쪽

이처럼 미디어 보급이 급속히 증가하고,그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미디어의 접촉에서 당시 한국인은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스 미디어가 매개하는 대중문화 시대 곧 라디오,주간지,영화 등을 매개로 한 소비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시기와 전쟁을 겪으며 궁핍 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근검절약의 가치관이 소비가 미덕이며, 성공과 행복의 지표로 인식되는 가치관 소비 이데올로기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한국사회에서도 대중화 단계의 수용자는 엘리트 단계의 독자와 청취자로서의 수용자와 함께 시청자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고, 대중으로서 그리고 대중적인 소비자이며 동시에 광고주에게 판매되는 상품으로서 수용자의 성격이 주목받기 시작했다.-7쪽

전문화 단계 / 전문화 단계는 대체로 정보사회의 성격을 보인다. 그들에 의하면 전문화 단계는 대체로 정보사회의 성격을 보인다. 그들에 의하면 전문화 단계는 전문화 가속 요인인 고등교육,경제적 풍요, 여가시간, 인구규모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서 도달하게 된다.대부분의 국민들이 고등학교 교육을 이수하고, 다수의 국민이 대학교육을 받는 단계이다.이 단계의 미디어 수용자는 대중화 단계보다 수용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그 대신 미디어와 내용이 보다 다양화,전문화되어 수용자의 세분된 지적 욕구, 정보 수요와 취향에 부응하게 된다. 이 단계 미디어와 주 수입원은 수용자의 사용료(구독료, 정보이용료 등)와 광고비이다. 전문화 단계의 수용자의 성격은 개별 미디어의 수용자인 독자, 청취자,시청자로서의 모습, 대중으로서의 모습과 함께 공적인 시사문제에 대해 적극적,조직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공중으로서의 수용자 (8) 모습이 나타난다. -8쪽

한국사회의 미디어 보급에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 첫째, 경제소득수준 둘째, 미디어 테크놀로지 기술과 미디어 생산능력 셋째, 교육수준 넷째, 정부의 미디어 보급 정책과 의지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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