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 다>에 『정동 이론』에 관한 서평을 썼다. 정동 이론의 언어는 어떻게 정동연구자와 정동연구 비판자 양쪽에게 덫으로 작용하는가, 그 문제를 지적해보았다.




어느 날, 퇴직하고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인 A가 친구 B와 서울 연남동을 찾았다. A는 지인 D의 소개로 연남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C를 만났다. A는 C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연남동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물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곳이에요?” C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차피 그 옆에 금방 또 생길 거예요.” 대화를 듣던 B가 속으로 중얼댔다. ‘아니,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 건물이면 저 건물이라고만 얘기하지. 왜 저리 말한담.’ 

 

   사회심리학자가 대화를 들었다면, C의 말에 스며든 빈정거림은 요즘 사회에 팽배한 집단적 냉소가 전염된 예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향성을 다루는 정신의학자는 C의 인간 관계와 성격을 조사해 전두엽을 문제 삼으며, C의 빈정거림과 까탈스러움에는 세로토닌의 부족이 핵심이라고 진단할 것이다. 문화연구자나 문화사회학자들이었다면, 홍대 특유의 ‘힙스터스러움’과 젠트리피케이션의 연관성을 꼬집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런 감정을 하나하나 포착하고 진단하는 게 체제에 타격이라도 줄 것 같냐며, 다 개소리라고 성질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화를 진지하게 따져보려는 연구자들의 영토가 있다. 『정동 이론』은 그 영토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정동연구자들의 맥락을 따르면, 우리가 대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C의 빈정거림이 아니다. 정동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포문을 열 것이다. C가 왜 ‘아직 있지 않은 상황’을 자신의 현재로 언급했을까. 정동연구자들의 눈엔 C의 행동은 빈정거림 혹은 따스함이라는 감정의 유형에 쉬이 포섭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의 마주침에 집중하는 이 연구자들에게 C는 그저 ‘내뱉은’ 자 일 수 있다. 내뱉음은 ‘헐’ ‘대박’ ‘작살’ ‘열라’처럼 순간을 기념하되 금세 휘발될 가능성이 있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우발적이되 삶 가운데서 어떤 반복된 리듬을 확보한다. 내뱉음을 인정하는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의 에너지가 ‘자신도 모르게’ 삶의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고로 나는 내뱉는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내뱉는 자는 자신을 믿기 때문에 말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는다. 내뱉음은 자신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데 기인한 어떤 긴장감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적 분출이다. 

 

   정동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어떤 형태로 확정하는 언어보다는 순간적 분출에 매료된 자들이며, 때론 의심을 품는 자들이다. 책 속 표현처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편평하고 매끄럽게 해석하려 드는 자들에게 엿 먹이려 하는 자, 이들이 정동연구자다. 

 

   물론 이 예를 통해 정동 연구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만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들은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약속 가운데서 이 사회의 지배 체제에 내장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모순을 파헤치는 데 관심이 많다. 확신보다는 도래를 신봉하는 이들의 사유는 어쩌면 시대의 음모론을 음모론으로 맞서는 ‘맞불의 문화정치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동연구자들의 기술은 다가올 위험에 대한 편집증적 과장이 아니라, 부대낄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섭렵에 가깝다. 


 다만 확실보다는 불확실을, 달라붙음보다는 흘러내림을, 서 있음보다는 미끄러짐이라는 사고 체계를 따르는 『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액체적 언어에 대해 혼란을 느낄지 모른다. 

 

   가령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정동 이론은 결국 학자가, 혹은 이 사회를 깊이 고민하려는 독자가 가져야 할 ‘윤리적 당위’ 수준에 머물러버리는 건 아닐까. 이 책에선 정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와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정동 이론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사고가, 외려 연구자들의 언어를 불확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소묘의 기술’, 정동으로 가득 찬 세계를 두고 신경 써야 할 다채로운 맥락을 ‘수집·편집하는 기술’로만 인식되게 주저앉혀버리는 건 아닐까. 여기서 정동연구자들이 챙기는 근본적 사고는 정동을 특정한 마음의 양태로, 주체의 신체에 스며든 일정한 기운·에너지·정서로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정동연구자들의 말대로 (들뢰즈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잠재성’이란 가치는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내린 진단의 맛을 도리어 싱겁게 하며 주장의 선명함을 도려내는 ‘윤리적 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동이란 영토를 휘젓는 다채로움과 열림의 사고가 서로 스며들며 현란하게 맞부딪힐 때, 그 결과는 예상보다 헛헛한 구석을 남긴다. 

 

   나는『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아직 아님을 희망의 모토로 외치는 정동연구자들에게 잠재성과 가능성이란 정동의 주요한 가치는 덫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은 자칫 그들의 섬세한 노력을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 갖는 이색적인 태도로만 소비할 수 있다. 특히 정동을 둘러싼 이색적 언술이 우리의 닫힌 사고를 묘파해내는 실제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 의식하며 살아야 할 불확실한 미래의 설계도가 이럴 것이라고 되풀이하는 청사진으로만 기능할 때 더욱더. 정동연구자들은 이 미지의 세계를 미지로 수긍할 청사진으로서의 정동을 자주 언급한다. 이때 그들은 아직 학문적으로 제대로 꽃피지 않은 정동적 사고의 시간성을 언급하며 더 무르익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하는 자가 약속에 도취되었을 때, 약속은 자신이 정한 룰에 안주해버리는 허황된 말의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위험은 약속 자체를 견고히 하고자 누군가가 찾지 못했다는 데서 온 희소성에 희열을 느끼는 장이 될 수 있다. 마치 문화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마다, “그동안 00에 관한 연구는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로 소재주의에 안착하는 한계를 보였을 때처럼. 

 

   한편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모토는 이 연구 영역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정동연구자들을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는 ‘대세론’이다. 비판자들은 최근 몇 년간 국내에 정동 연구가 주류가 되었다는 식의 인트로를 내세우며, 정동 연구를 비롯한 감정에 관한 관심이 지배 세력의 효과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여기서 내가 갤럽이나 리얼미터에 의뢰해 정동 연구가 메인스트림에 올랐는지 수치화해보려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게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정말 이 연구가 대세인지 여부가 아니다. 자신이 비평하려는 대상을 대세로 쉽사리 선정한 채, 그 대세라는 위치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갖는 부정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자신의 논지에 시너지로 활용하는 사고다. 소위 ‘힙hip’에 예민한 국내 학문 사회에서 두드러진 이 사고는 정동 이론을 비판하는 데 안일하게 쓰이고 있다. 

 

   대세론 안에는 시급한 시국에 ‘마음 나부랭이’나 고민하고 앉았다는 ‘호전론’도 보인다. 호전론에는 자신은 냉철하고 파이팅 넘치는 관점을 내놓고 있는데 반해 마음을 다루는 연구자들은 그 어떤 갈등도 봉합한 채 고요하고 고귀하게 이 사회를 분석하고 있지 않냐는 의구심이 들어 있다. 이러한 호전론이 2008년 촛불 집회 당시, 미디어를 수용하는 사람의 쾌락과 욕망을 발견하며 지내는 문화연구자들이 그간 얼마나 물러 터졌는가, 다시 강성한 이데올로기로 돌아갈 때라며 문화연구를 비판했던 목소리와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닐 게다. 정동 연구를 꾸짖는 호전론은 정치에 관한 연성화를 꼬집는 거센 우려만큼이나 게으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동 이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책임을 입증한다. 정동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을 빌어 ‘아직 아닌’ 상황들을 예측하고 짐짓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해보고 싶은 점은 비평의 몰락이란 새삼스런 진단 가운데, 정동이론가나 이 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을 통해 발견되는 어떤 비평의 속성,  소위 ‘건강염려증’에 걸린 비평이다. SNS에 흩뿌려진 저 정체 모를 냉소와 혐오, 분노 / 근거 없는 긍정, 애정, 찬사 가운데서 우리는 저 두 유형 중 어느 쪽이든 쉬이 안주해 호응을 얻고자, 내가 받을 ‘반응 자체를 상상하며 염려하는’ 비평을 하고 있진 않은가.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희망 섞인 약속의 언어는 아직 오지도 않은 정동적 반응을 지정해 이 정도면 ‘먹히겠지’ 하는 안전한 비평어로 의도치 않게 변질되어버린 건 아닐까. 

 

   고로 지금 우리에게 환영받는 비평이라곤 사람들의 격노가 지나치면 자제하라고, 사람들의 분노가 모자라면 증폭시키라고 주문하는 ‘수위 측정의 비평’일 뿐이다. 아직 오지 않은 웃음, 아직 오지 않은 울음, 아직 오지 않은 냉소, 아직 오지 않은 분노를 종합선물세트처럼 떠안은 채 늘 상상하고 방어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비평이 ‘사이다’로 대접받는 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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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원 시절 김경만의 『담론과 해방』을 읽고 그에게서 어떤 '악마적 쾌감'을 느꼈다. 일단 나는 문화연구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내가 다루는 이론보다도 그 이론을 둘러싼 사회 주변의 맥락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론 자체에 집착해 치열하게 논증해나가는 방식에 감탄을 느꼈던 독자이자 연구자였다(문화연구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고 반박이 들어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화연구적 수업'이라는 것에서 나는 사회적 사건을 연구한다는 데서 나타나는 수다스러운 분위기가 많이 아쉬웠다. 이러한 수다는 분명 이론적 탐독을 방해하고, 김경만이 이번 신작에서 논했듯 그러한 대화를 가장한 수다(대화를 가장한 수다는 내 표현이다)가 이론에 대한 임의적 이해로 둔갑했다는 점은 동의하는 바다).
특히 나는 김경만을 '악마적 사회학자'라 혼자 부르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말 악마라서가 아니라 남들이 다 가는 방향 대신에 자신만의 고집으로 남들이 상찬하는 비판이론가들을 향한 쓴소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학문적으로 덜 여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뛰어난 이론가의 검술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재차 확인함과 동시에 김경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신작『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담론과 해방』이 나온 뒤 10년 만이다)을 읽고서 나는 김경만의 관점에 대해 적잖이 실망했다. 이러한 실망감은 『담론과 해방』을 다시 읽어나가며,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굳어나갔다.

1. 비판의 대상이 갖는 영향력이 여전히 지배적인가라는 의문

이번 글 뒤에 다룰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2015)도 그러했지만, 김경만이나 김종영 두 사회학자 다 자신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충분한 사전 논의가 부실하다. 일단 이번 글은 김경만의 신작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김경만의 책은 1부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신기루」- 2부 「글로벌 지식장 안으로」로 구성되어 있다. 김경만은 이번 신작에서 '한국적 사회(과)학 이론'을 주창하는 것의 한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부터 쭉 일관된 논리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서구적 지식의 이론에 대한 추종을 경계하고 우리 이론을 만들자라는 논의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빈약한가라면서, 그는 서구의 이론 자체에 대한 내부적 논증 투쟁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번 신작에서도 김경만은 자신이 비판 대상으로 삼은 논의를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각개격파하고 있다. 근데 문제는 김경만이 다루는 비판의 대상 혹은 대상자들이 취한 관점이다. 김경동, 강신표, 조한혜정, 강정인 등, 김경만이 비판의 대상자로 다루는 이들이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과 그 지식의 헤게모니가 강력한 상징폭력적 요소가 되는가. 김경만은 이 지점을 분명히 다뤄야 했다. 이론적 논파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김경만이라면, 이미 자신의 논의가 90년대 후반 조한혜정, 김영민, 김정근 등이 문제제기했던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와 이론'이란 쟁점의 재판이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으리라 봤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서 김경만은 자신의 논의 자체가 강력한 비판적 이슈가 되고 있음을 과신하고 있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나는 김경만의 비판에서 오는 이론적 논증의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이 논증이 가진 '시차'를 단순히 진부함/진부하지 않음이란 틀로 묶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시차' 자체가 논증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허물이라고 생각했다. 

2. '출판'이란 지식 형태에 대한 어떤 편견 

단순히 요즘 연구자들이 이 책이 다루는 민중사회학에서 비롯된 당시 사회학적 인식 체계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는가, 유교적 사상에서 온 한국적 언어를 가지고 한국적 사회학 이론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를 넘어, 김경만은 '토착화된 이론 자체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연구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관점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듯(여전히 토착화된 이론 자체의 성립 가능성, 한국적 사회과학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고수라는 식으로)이 확언하는 논법을 보이고 있다는 데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아울러 김경만의 이론적 내부 투쟁은 정치적 비판 행위로서의 이론을 지향하는 이론가들을 향해 늘 날을 세워왔는데, 여기서도 김경만은 늘 그들의 이론적 이해가 얼마나 부실한가를 내세운다. 김경만은 제대로 된 이론적 내부투쟁으로서의 대화 없이 그들이 임의적으로 손쉽게 이론을 전달하려는 차원에서 편의적으로 활용한다는 입장인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나는 여기서 김경만이 비판하는 '출판'을 매개로 한 학자들의 활동에 대해 그가 심층적인 분석을 해보기를 권한다. 김경만은 출판이라는 방식을 대중 친화적인 지식 전달이라는 층위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출판과 학자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론적 이해를 깊게 가져가지 못하는 한계로 본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출판의 과정에서 나타난 지식의 형태만을 보고 김경만이 비판하는 학자들에게서 이론적 몰이해라는 특성을 짚어내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묻고 싶다. 출판이라는 형식은 지식의 형태와 방향성에 물론 일정한 부정적 측면을 줄 수 있겠지만, 그러한 부정적 측면에서 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는 연구 문제에 대한 이론적 몰이해로 일관하다고 보는 데에는 저자-연구자의 위치에서 선택해야 할 진술의 선택 전략을 무시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한편, 그가 「여우와 신포도」에서 논한 조한혜정 식의 이론적 전달 방식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깊이 공감하지만, 그러한 수업 방식 자체를 통해 조한혜정 자체가 이론적 내부 투쟁 안에서 갖춰야 할 이론과 개념적 자원에 대해 자신보다 얕은 관심사를 갖거나, 공부가 미진하다는 차원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진술은 안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경만은 늘 이론에 대한 내부적 심층 논의가 부실하다는 관점으로 한국 학문 사회를 비판하는데, 이 또한 그의 치열한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간과하고 있는 시차는 아닐까. 다시 한번 묻지만, 이러한 김경만의 비판이 갖는 시차는 단순히 진부하다/후지다/식상하다라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갖는 어떤 안일함과도 직결되지 않을까. 그는 한 이론에 대한 내부 논리에서 오는 한계 지적에 몰두한 나머지, 거기서 자신의 소임은 끝났다며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 자체가 가진 동력만을 과신하고 있진 않는가.

3. '학자적 관점'에 대한 술책: 이론과 사회적 접촉면, 그리고 김경만의 비판이론 비판에 대한 아쉬움

김경만의 부르디외 비판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비판이론가를 비롯해 학문과 이론의 실천 효과에 대해 깊은 논의를 펼쳐왔고,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이론의 현실 적합성, 적실성에 대해 비판적인데, 이러한 문제제기가 이론사회학자라는 그의 스탠스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하더라도, 의문을 품게 된다. 일단 이 의문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가 늘 문제 삼는 전제를 언급해야 한다. 즉 그는 이론의 사회적 사용/적용/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사회학자의 '인식론적 권위'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체계 사이의 고리를 문제 삼는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학자의 언어에 속박되지 않은 연구를 강조하는 이들도 결국에는 사회학자라는 위치에서 온 언어 게임 안에서 사회적 개인 혹은 집단의 행위를 다루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부르디외의 제자인 바캉을 비롯해 여러 학자와 부딪친다(이번 신작에서 그는 『담론과 해방』에서 부르디외를 비판했던 그 관점을 제자인 바캉과의 이메일 논쟁을 통해 다시 강조한다). 

그런데, 이것이 부르디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 고유의 문제인가. 아니, 이것은 학문을 왜 하는가에 대한 일반론적 논의의 차원으로 확장시켜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김경만은 이것을 '사회학 고유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특히 비판이론가들이 이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아울러 김경만은 특히 부르디외가 비판이론가로서 자신의 비판이론이 대중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자주 신경써온 이로 부각시킴으로써, 이론의 현실적합성, 이론의 사회적 사용에 대한 한계라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 논의 또한 더욱 충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김경만은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결국 비판이론가들이 얼마나 대중을 '학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그 틈을 공략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비판이론가와 대중의 관계를 교란하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온전한 이론적 내부 투쟁에서 동원되는 '입장세'(학문적 언어 게임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를 이중적으로 쓰고 있는데, 비판이론가들이 이론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오는 태도에서 왜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입장세가 없는 마냥 구는가라는 딴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치뤄야 할 입장세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그는 부르디외가 이야기했던 '학자적 관점'을 부르디외 본인이 극복하려다 결국 실패한 것은 아닌가 따지면서도,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에서 오는 '학자적 관점' 관련 논의에 대해서는 이론적 몰이해라든지, 이론적 심층 논의가 한국 학문 사회에서는 부실하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론가인 자신과 대중의 관계에 대해 비판이론가를 향한 비판적 인식자라는 지점으로 함께 인식케 만드는 오해의 지점을 낳고 있다. 즉 김경만은 그가 비판하는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입장에 서 있다는 식의 생각을 주는 스탠스를 취한다. 

무엇보다 김경만은 비판이론가들의 이론을 통해 그 이론들이 갖는 사회적 접촉면에 대해서도 깊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즉 이는 김경만이 이론사회학자로서 주어진 이론의 내부 모순을 비판함으로써 갖는 장점 선취의 유리함이 분명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회의 현상을 구조화, 개념화하는 데서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사회적으로 접촉하는 가운데서 오는 다양한 논의의 발생 가능성은 가벼이 살핀 채, 하나의 이론이 '학문적 언어의 게임' 안에서 해석되고 가공될 때의 효과에만 이론적 내부 투쟁의 열의를 쏟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상당히 현란한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이론 자체의 진공 상태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이론적 내부 투쟁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가 이번 신작에서 강조하듯 학자들의 사회 지향성을 멈출 때, 그것이 온전히 이론적 내부 투쟁을 위한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그는 분명 책의 말미에서 "이제 우리도 미디어, 사회, 사회운동과 유리된 글로벌 지식장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연구집단을 발전시키고, 그 안에서 투쟁을 통해 단련된 지식장의 지배자를 배출할 때다"라고 썼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자들의 사회 지향성과 그로 인한 학술적 전략들이 이론의 내부 투쟁을 배제한 차원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아울러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이 갖는 입장세가 갖는 상징폭력은 간과한 채, 김경만 자신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비판이론가들이 행사하는 대중을 향한 상징폭력만 부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자신의 이론적 내부 투쟁을 통해 대중과 비판이론가의 세계에 '상징폭력'이란 요소를 이간질이 충분한 개념적 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가. 나는 의문스럽다.

4. 덧붙임) 김경만이 이번 신작에 쓴 '자기민속지로 살핀 글로벌 지식장의 동학'에 대하여

사실 김경만의 신작에서 가장 실망했던 챕터는 2부 2장 '자기민속지로 살핀 글로벌 지식장의 동학'이었다. 김경만은 분명 부르디외가 『파스칼적 명상』이나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학자들의 이론적 세계관을 내부적 논증으로 정면돌파하는 차원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에서 부르디외가 경계하려 했던 태도. 즉 '전기적 환상'의 차원을 이상하게 본 챕터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연구자 본인이, 특히 자신이 이론사회학을 하는 중견 학자라면 자기민속지학이 갖는 특수성을 분명 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갖는 한계와 장점을 명시한 뒤, 그 특색에서 오는 기술 효과description effect를 충분히 독자에게 설명해가며 자신의 학문적 궤적을 서술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런데, 김경만은 유난히 이 챕터에서 자신이 부딪쳐온 학자들과의 투쟁에서 굳이 언급해도 되지 않을, 혹은 언급했을 때 1부에서의 이론적 엄밀성과 자신의 논지 효과를 떨어뜨릴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그가 그토록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이란 차원을 주요한 테마로 밀착해 끌고 왔다면, 그가 만나고 대결했던  서구의 학자들이나 학회지에 붙는 '저명한' 식의 표현 하나하나도 신중히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표현을 붙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자신이 그런 학자들과 학회지에 갖는 감정 구조를 설명하고, 학문장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선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 그는 이러한 표현을 안일하게 써가며 마치 자신이 그토록 얼마나 외롭게 다른 학자와 달리 이론적 내부 투쟁을 해나가며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는 식의 자기 예찬을 '자기민속지학'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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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경만, 읽기(비판에 대한 반-비판)
    from 어느 골방사회학도의 아카이브 2015-06-01 20:33 
    선생님의 신간, <글로벌 지식 장과 상징폭력>(이하 <글로벌>)이 출간되었다. 책 내용에 대한 요약은 문학동네 편집부에서 적어준 소개글이 워낙 자세하기 때문에, 이 것으로 대체하여도 될 것 같다. 세계 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사회학자 김경만 서강대 교수의 논쟁적인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과학지식사회학, 과학철학 전공자답게 그간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영역의 난해한 이론서를 주로 출간했던 저자가 이번 책에서는 한...
 
 
Gladstone 2015-06-0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 한번 없는 비판이라.... 그리고 오독 하셨네요.

여백 2015-06-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책의 저자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고요. 모쪼록 제가 읽은 이 책의 감각과 비교해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이 책의 비판의 대상은 이론사회학계 내에서 이론적인 엄밀함을 추구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학자들입니다. 책에 언급된 학자들은 그 일부 표본일 뿐이고요. 따라서 그 개인개인의 영향력이 지배적인지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학술 장에서 쌓은 높은 상징자본이 학술 장 자체의 성격을 [서구와 비교하여] 왜곡되게 형성하게끔 했다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2. 보다 아래에 언급하신 ‘전략’ 이란 개념을 김경만 선생의 글에도 대칭적으로 사용하면, 먼저 출판이란 ‘매체’ 를 사용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현재 한국에서 상징자본을 많이 비축하고 있는 교수들과, 다른 한편 학계에 영향력을 계속해서 끼치는 명예교수들을 골고루 포함하여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부에 네 파트로 나눠 언급된 학자 혹은 학자들의 유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회학 학술 장의 이론적 논의를 심화시키기 어려운 조건들을 생산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3. 그리고 이러한 ‘전략’ 이 선제하는 것은, 사회학 이론의 장은 비록 사회학 학술 장의 일부이지만, 거기에도 일정한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이론적 작업의 엄밀함을 중요시하고자 하는 사회학자는 일단 이론의 장 내에서의 투쟁을 통한 상징권력의 획득을 통하여 - 거기서 획득된 상징 자본을 가지고 비로소 사회학 장 내에서의 이론에 관한 투쟁을 더 큰 차원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또한 그러한 투쟁이 활기 있게 사회학 학술 장 내에서 이슈파이팅 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의 중요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강조하게 만드는 효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4. 여기에서 만약 비판받는 학자들, 혹은 학자들의 유파들, 혹은 비판받는 학자들과 동일한 궤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이는 - 이론을 편의적으로 활용한다는 혐의를 받는 - 학자들은, 그럼에도 그들이 발딛은 곳이 이론의 세계인 이상, 여전히 자신들의 전략을 ‘이론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적 자원이 포스트-콜로니얼이든 무엇이든, 그 정당화의 논변이 정말 정당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는, 당위를 통해서가 아닌 이론적인 성찰을 통해 따져보아야 할 종류의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을 전략의 문제로 퉁친다면, 사회학자와 대중 활동가, 종교인, 정치인의 경계는 각자 서로 다른 제도적 영역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무규칙으로 하는 직업이라는 것 이상일 수 있을까요?

5. 그러한 장 내의 ‘규칙’ 을 따르는 것이 곧 학자의 정체성이며, 학문의 자율성을 가능케 하며, 자신이 속한 분과의 권위를 높여줌으로써 결국에는 이를 통해서만 다른 장에 성공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 책의 전반에 녹아있는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얼그레이효과님이 이를 시차의 문제 혹은 과신의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에 대한 특수한 느낌이나 당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론적인 논변을 통해 이를 지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6. 반면 ‘학문을 왜 하는가’ 에 대한 심층적인 답변에 김경만 선생이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기울이거나, 혹은 특수한 사회학주의를 바탕으로 그러한 물음을 ‘해소’ 하려 한다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담론과 해방>과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에서 수행된 문제 범위의 폭은 그 전 단계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곧 이 책들은 비판이론가들 혹은 한국의 학자들이 ‘그들이 공언하는 만큼’ 실제로 자신들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한정된 문제,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학문/학문윤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옹호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김경만 선생의 입장에서는 ‘학문을 왜 하는가’ 에 대한 일반적 논의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문[이론] 자체가 실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관한 파악과 동의가 선제될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이론의 실천적 역할에 관한 인지 위에서 수행되지 않는 “학문의 역할에 관한 당위적 논의” 는 그 자체로 무의미한 혹은 무효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 수 있을 듯합니다.[책에서 주로 이론가의 상징폭력만 부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론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 이론가의 실책일 수 있기 떄문입니다.]

7. 따라서 만약, 기왕의 이론가들의 이론적 작업이 말씀하신 ‘일반인’ 들의 실천에 아주 국지적으로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일반인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입장세’ 의 문제는 애당초 제기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훌륭한 학자도 일반인에게 개론 수준의 훌륭한 입문서를 펴낼 수 있으며, 개론의 개론, 개론의 개론의 개론에 관한 입문서 또한 펴낼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논의 자체를 체계적으로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게끔 개념들을 잡아주는 것 말입니다. 또한 선생이 비판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입장에 서 있다는 스탠스’ 를 언제 어디에서 취했는지는 얼그레이효과 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제게는 불분명한 것인데, 혹 그것이 어디에서였는지에 관한 인용을 부탁드립니다.

8. 이와 더불어 ‘이론 자체의 진공적 상태에 집착’ 하는 입장이라는 것 역시 그 논거가 불분명합니다. 학술 장에는 일정한 자율성이 있고 또 필요하고, 이론의 장에도 마찬가지라면, 단계적인 방식으로 상징권력을 획득하여 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는 학자의 상도 [예컨대 과거에 Hermeneutics and Human Science, Legislators and Interpreters 같은 이론적 작업을 엄청나게 수행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러한 이론 장의 상징자본을 통해 사회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처럼] 충분히 가능합니다. 만약 바우만의 요새 작업들과 책에서 비판받은 사회학자들의 작업이 이론적 층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대중적 저술이란 점에서 ‘같다’ 고 본다면 이후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어떤 얘기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9. 앞에서 언급했지만 부르디외의 작업과 이 책의 2부의 작업은 도모하고자 하는 독자층과, 또 목표가 다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전략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김경만 선생이 이 책에서 견지하는 입장의 일관성 내에서는, 2부의 작업은 결코 문제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문제될 수 있다면, 그것은 또다른 비판적인 이론적 논의를 통해 유효하게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 제가 보기에 이 책의 타켓 독자층은 [서문에 적힌 것처럼] 미래의 이론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입니다. 이차 타겟 독자층이 이론을 자기 밭에 물 대는 식으로 사용하는 기성 연구자들이라면요.
 














익히 알다시피, 사회학에서 구조/행위라는 개념 아래 진행되어온 수많은 논의는 자칫 진부할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해왔다. 행위자는 구조에 종속되는가, 행위자는 구조로부터 자유로운가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구조/행위 간의 관련성을 탐색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진리이자 골동품이 되었다. 모셔놓고자 하는 지식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활용하고 창안할 수 있는 지식의 소생술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몇 줄로 요약된 정의로 여기는 개념들이 이론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다른 말 가운데 공모자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의 논지를 비교해보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빙 고프만과 피에르 부르디외는 공공연히 비교되어왔고, 이들의 논의에서 빚어진 유사성과 차이점은 '행동의 이론'이라는 영역 안에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윤택하게 만드는 학술적 언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빙 고프만에게 행동이란 운명적 순간을 감지한 개인이 불확실한 결과와 실용적 이득이 없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사회에서 얻고자 하는 '성격적 특성'을 얻는다는 차원으로 정리된다. 그는 카지노 세계의 민족지적 연구를 바탕으로  운-사후 영향-운명성-실용적 도박-적응이란 단계로 개인의 행동 단계를 설명한다. 사회심리학적 속성이 강했던 어빙 고프만의 사회학적 논의에서는 개인의 성격으로 인해 나타나는 장면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는 '성격 게임'이란 용어를 즐겨 썼고, 사회 속 개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A란 사람이 B란 사람으로부터 '강한 성격'을 소유한다고 인정받을 때, 여기서 강한 성격이란 자신이 참여한 상황을 깨지 않기 위해 보이는 자제력, 냉정함, 차분함 등을 지칭한다. 그는 개인과 개인이 참여해 만들어가는 이러한 상황을 깨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인간의 속성이라 보았으며, 그 노력을 고프만은 '품행'이란 관점에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적응해가며 나름의 '품행기준'을 규범화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영향을 감안하고 예측해 실행에 옮긴다. 


그의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편집증적' 분위기까지 느끼게 하는 어빙 고프만 특유의 예민한 관찰력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따른 손실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쉽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지를 조망했다. 그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말 자체가 사회학적 풍경이 될 수 있다고 본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서 행동의 이론을 만들어나갔다. 어빙 고프만의 이러한 행동 이론과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나는 지점은 '환상'이다.


어빙 고프만은 '자기 결단력이라는 환상'에 주목했다. 개인이 왜 안정된 영역을 박차고 나와 모험을 무릅쓰며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지에 대해 고프만은 개인이 얻고자 하는 목표의식이란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러한 목표의식을 위해 하는 행동이 곧 자신의 온전한 결정에서 나온다는 말은 개인이 뛰어들었을 때의 손실을 막는 방어 기제일 뿐이라 여겼다. 반면 피에르 부르디외는 어빙 고프만에 비해 보다 '폭로의 스타일'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네가 사심 없이 행동하는 그 모든 흔적이 네가 속한 집단의 속성과 무단하다고 생각해?라는 식의 폭로를 통해, 부르디외는 그 유명한 일루지오와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행동의 이론을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행동 이론에서 환상이란 개인과 그 개인들이 속한 장의 관계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부르디외는 사심 없음 자체가 장의 목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그 입장이 순진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사심 없음 자체가 바로 장의 속성이라 주장하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장 자체는 장에 속한 개인의 특성을 제한하는 규범도 부과하지만, 그 규범을 넓혀나가는 개인의 의지를 통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부르디외는 즉, 왜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일로 경쟁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희열과 좌절을 혹은 순응과 저항을 의식하는지 등을 통해 개인이 참여하는 행동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는 정신의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 정신의 경제에서 개인이 '사회적 개인'이 되어가는 것은 자신이 속한 장의 속성을 체화하며 그 경향을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향을 변화시켜나가는 '아비투스'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어빙 고프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일면 타당하다고 보는 게 그가 고민했던 내기, 투자, 삶의 숙명과 돌파라는 용어와 관점은 분명 고프만이 이야기하려는 운명적 순간과 실용적 도박이라는 행동 단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부르디외가 상징 자본이라고 불렀던 지점에서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궁정사회'를 사례로 꺼낸 귀족들의 감정 양태는 고프만이 강한 성격이라고 정의했던 것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허나, 고프만의 행동 이론이 개인과 개인의 대면에서 오는 '존대와 처신'의 입장으로 '성격 문화'에 치중한 사회를 그려나갔다면, 부르디외가 파고든 지점은 달랐다.  부르디외는 성격을 넘어 개인의 '성향'에 집중했으며, 이러한 성향 자체가 갖는 독립적인 부분에서 규칙성을, 질서정연한 부분에서 자율성을 포착해 계속해서 개인이 자신의 장을 향해 '의미의 투신'을 하게 만드는 구조적 속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부르디외는 ACTION보단 PRACTICE란 표현을 즐겨 썼다. 즉 인간이 실행을 하는 데 있어 참고하게 되는 역사적인 궤적, 누적되어온 관습을 의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 관습은 사회 속 개개의 장마다 고유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부르디외는 인간을 지정된 목표를 놓고 그 목표라는 지향점 아래 실행해나가는 주체란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고로 사회학자로서 '전략'이란 용어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한 사람이기도 했다. 


고프만과 부르디외 둘 다 사회학이 좀처럼 건드리지 못했던 마음의 영역, 비가시적인 것이 사회학적 테마로 규명될 수 있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사람임은 분명하다. 다만 고프만은 자신이 관찰했던 사람들의 속성을 묘사하고 조망하는 과정에서 '관찰' 자체에서 오는 확증을 너무나 믿었다. 그 확증으로 인해 고프만이 설정한 개인과 개인 간의 '게임' 구도는 고프만의 눈에 보이는 언어와 실행 자체에 지나친 신뢰가 묻어나 있다. 이러한 신뢰는 곧 고프만 특유의 예리함에서 나온 개인의 행동에 묻어난 의중 파악까지 포함해서 나온 오류 가능성의 형태일 수 있다. 


반면 '폭로의 스타일'(부르디외 본인은 이러한 폭로자의 속성 또한 학문적 주제로 삼을 정도로 언급했지만)을 고수했던 부르디외는 하비투스를 통해 보다 인간의 행동 이론을 보다 유연하게 만든 것 같지만, 그의 사유엔 인간은 인간 자신이 하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모르나이다 식의 관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비껴갈 순 없었다. 부르디외를 공부하면 늘 따라다니는 의문이지만, 결국 그 또한 장에 속한 개인이 자신의 내기물을 걸고 이 놀이에 빠지고, 이 놀이에 사로잡히고 이 놀이가 해볼 가치가 있으며 놀아볼만하다는 일루지오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던 것이다. 학자로서 늘 부딪히는 측면이지만 그가 설명하려는 역동적인 사회상을 위해선 그 역동성 또한 조종될 수밖에 없었다. 


행동 이론이란 영역 안에서 고프만은 자신의 섬세한 눈 뜸을 너무 믿었고, 부르디외는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멂을 너무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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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 2월 13일(금) 오후 2시-오후 6시

장소: 연세대학교 위당관 301호 

주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뒤늦게 후기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서 쓰기 때문에 어떤 흐릿함이 있을 듯하다. 세 발표자(권명아, 정정훈, 쇼지 마키코)의 연구 중 권명아, 정정훈 선생의 연구는 진행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 스스로 무슨 논박들이 가능할지 감안하고 있는 듯했다. 질문을 하면 그것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보다는 감안을 통한 추후 전개가 필요한 발표였던 것 같아서 두 연구자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도시사대 쇼지 마키코 선생의 '평범한 재특회에서 보는 앎의 문제: 계속 질문을 만든다는 것'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생각도 품어보았다. 일단 이러한 주목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실제 거리에서 오는 언어상의 유리함을 상정하고 쇼지 선생의 연구물에 다른 생각을 표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그녀의 연구는 세 연구물 중에서 일단 가장 완성도가 있어 보였고, 시선이 예리했다. 물론 이렇게 느끼는 데에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충실한 한국어 번역도 한몫했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인류학적 글쓰기'가 갖는 몇 가지 장점을 알고 있다. 허나 그 장점이 관성에 빠지면, 단점보다 더 독한 단점이 되기 마련이다. 다른 연구자들이 차용하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형태상 하나의 정치/사회문제에서 나타나는 상징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러한 상징을 표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있다. 표층과 심층이 나눠지고, 인류학적 글쓰기는 현장성을 통해 표층에 나타난 정서가 과연 우리가 예상하는 일원화된 목적에 따라 나타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인류학적 글쓰기는 명랑을 내세운 집단에서 진지함을 찾아내고, 혐오를 내세운 집단에서 혐오와 상관없음을 찾아낸다.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구조에는 이처럼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이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 테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진짜 이유』그리고 쇼지 마키코 선생의 발표에는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을 따르고 있었다.

 

과연 혐오의 대상을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 일상 속에서 혐오의 대상과 아주 밀착된 관계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세 저자들은 그 관계를 해체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관계의 끈을 널럴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널럴한 관계가 하나의 앎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하나의 집단이 실은 그 이데올로기의 신도들은 아니며, 외려 자신 고유의 일상 속 신도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차원에서 멈춰 있는 연구 경향에서 좀 더 나아갔으면 싶다.

 

고작해야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퍼포먼스 속에서 그 집단 속 구성원의 얼굴(사정)을 파악하는 스케치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인류학적 글쓰기 더 나아가 질적 연구에서 에쓰노그라피가 기대고 있는 문학적 글쓰기의 정서적 기운을 담아내는 참여관찰이라는 방법이 "참여묘사"(클리퍼드 기어츠)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참여묘사"라는 용어를 통해 문학가/연구자라는 촌스러운 대립항을 만들고 싶진 않다. 나는 이런 두 정체성의 혼융을 바란다. 허나 어설픈 혼융은 연구자 본인이 갖고 있는 글쓰기적 재치와 재주로 주어진 현실을 탁월하게 조망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글의 힘으로 인류학적 현실의 멱살을 끌어와 연구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그 현실 분석에 굉장한 의미 부여가 된 듯한 지점에서 나는 일시정지를 권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연구자의 사고와 유/무관한가라는 지점은 따로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허나 적어도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은 저자가 주목하는 사토리세대의 정서적 둥지에 기대어 그 정서에 안주해 자신의 너스레떠는 문체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 문체가 행사하는 힘이란 고작 하나의 둔중하고 진지한 집회 속 얼굴을 뒤져보면 명랑한 얼굴들이 있다는 유/무관의 관계 포착에 지나지 않는다(여담이지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명랑'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날 쇼지 선생에게 "심정적 미안함"이라는 정서의 힘을 잘 씀(아마 이것은 질적 연구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성찰'이란 점잖은 용어로 둔갑되어 있을 것이다)으로 자신의 연구물에 대한 논지의 결핍을 보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날 나도 충분히 내 의사 표시를 못했기 때문에 질문과 답변은 어긋나고야 말았다. 이는 전적으로 질문자인 '나'가 의견을 다듬지 못해 발생한 어긋남이었기 때문에 쇼지 선생의 책임은 없다. 허나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이런 형태의 연구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는 하고 싶었다. 

 

정치 집단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그 구성원의 일상성에 지나치게 주목할 경우, 이것은 우리가 뻔히 아는 정치 행동 자체의 연성화를 가져오는 것을 넘어 "너네 이거 몰랐지?"라고 하는 차원으로 심층적 형태를 제한시키는 누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대한 연구자들 본인의 반박이 정치적 단죄라는 것은 이 연구에서 중요하다/아니다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연구자 본인은 이미 연구문 초기에 이 연구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 사건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단죄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시선의 입체화를 천명하나, 그 입체화가 구성원의 '속사정'을 수집함으로써 나타나는 상대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마지막으로 이런 '현장성'이라는 감각을 글로 뛰어나게 푸는 연구자들의 연구물이 기존 출판계의 '르포르타주'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들이 깎아지고 다듬어지는지에 대한 고찰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연구물과 상업 단행본의 우열을 매기고자 함은 아니다.

 

허나 하나의 에쓰노그라피가 소위 '괴짜사회학'류에 포획될 경우, 우리는 에쓰노그라피의 '탁월한 글쓰기'라는 감각과 그 감각과 상관된 연구자의 관찰력, 그 관찰력이 조망하는 연구대상자에 대한 인상적인 면면만 얻을 수 있을 뿐, 정작 에쓰노그라피가 보려는 '추상의 힘' '이론적 토대물의 힘'은 놓치고 만다. 에쓰노그라피가 연구자 본인을 '저자'로 만들어주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유리함은 불리함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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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21에 실린 이동기 교수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라는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저널리즘이 무슨 사건만 일어나면, 기자든, 칼럼을 쓰는 학자든 '악의 평범성'을 들이미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진 않기 때문에, 이 글의 한계와 별개로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엔 동의한다. 


2. 근데 나는 이동기 교수가 역사학자로서 '다른 사료'를 들어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는 식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는 걸까에는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제시하려는 그 사료라는 근거로 이 정도 의견밖에 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데 있어, 이동기 교수는 흔히 문화연구자들이 능동적 수용자론이 흥했을 때, 그 이후 정치적 연성화를 의심받은 이 학문이 돌연 정치적 강성화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수용자론에 담긴 '문화적/문학적 의미' 동원을 거부하자는 그 제스처와 동일한 논법을 쓰고 있다. 소비의 쾌락과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놈들을 뭐라고 연하고 부들부들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거칠게 말하자! 이게 능동적 수용자론에 대한 정치적 연성화, 그 회의감에서 온 주장이었다. 근데 이러한 정치적 연성화/강성화라는 이분적 구도에 매몰되어 문화연구는 이후 더 퇴보되었다. 



3. 이 논지로 악의 평범성을 보았을 때, 이동기 교수는 자신의 '대안-사료'로 아이히만이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이 아닌, 능동적 가해자라는 구도로 바로 넘어가버리는 누를 범하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에서 우리가 왜 굳이 '주체적 가해자'라는 입장을 바로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입장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자아가 탈색된 채, 상부의 지시를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vs 실제로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운동으로서 자신의 나치즘을 실현할 마음이 있었던 주체적 가해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구도로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4. 외려 이런 구도는 고작해봐야 한 인간이 정치적 사건 앞에서 어떤 윤리/윤리학을 결정한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정성 게임으로 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타격을 주는 방식은 고작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에서 비롯된 수동적/능동적 주체의 행위와 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면서 범람하게 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라는 그 '역사적 접근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동기 교수의 논지 또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와 결을 같이 하는 견해일 뿐이다. 


5. 이러한 심리적 이력 파악으로서의 역사적 접근은 지젝이 언급했던 홀로코스트 연구에 대한 '신비화'로 빠지는 귀결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앞에서는 연구자 네가 애써 찾은 그 모든 이야기 닥쳐!라는 경건한 태도. 이른바 지젝이 말한 그 "형언할 수 없는 악"이란 지점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러했을 때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문제적인 것은 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개인의 심리 드라마가 왜 이렇게 '신비스럽게' 대중화되었나 하는 메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동기 교수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동의하지만, 한겨레21에 소개된 견해는 그렇게 썩 유효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동기 교수의 이런 이분법적 견해는 자칫 교양으로서의 역사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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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은 건 속은 거지만 아렌트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 보는 지점에 아이히만을 둔 것인데, 이동기 교수 주장은 공격의 단순성이 되버렸네요. 기사 제목부터 그런 무모함을 여실히...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역시 그 당시 전체주의에 물들었고, 뇌과학과 심리학에 가까운ㅡ전체주의에 빠진 개인의 내부까지 파헤쳐가면 `악의 평범성`이란 城조차 과연 굳건할까도 의문입니다.
강성화/연성화, 수동성/능동성보다는 복잡성과 공격성이 모이는 집단성으로서의 욕망자 그들로 더 논의를 펼쳐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비로그인 2015-01-2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얼그레이효과님..~~
제 개인적으로는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라기 보다는 `환원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수동성은
`악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저 생각없이 (수동적) 으로 동참했다` 의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의 생각없음은 타인에 대한 입장의 고려, 상대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데 능동과 수동..... 당시 나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저항과 순응, 지지 등을 오가며 회색지대에 머무르기도 하는 모순적인 것이었지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은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니 결론이 아렌트의 논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흘렀지 않나 ?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그러한 사람들은..아예 그 어떤 생각도하지 않거나 못하는, 바로 이 의미에서의 수동성.. )광인들이거나 괴물들 일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라는 문제제기를 밀어부쳐서, 아이히만의 개인의 경우를 통해, 어쩌면 *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이 없이* ,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집단, 우리 의 이익에 적극적 소극적, 혹은 그어느 방식으로든 목적을 달성해내는 우리내 인간의 사악함을 본 것이고, 그것으로 악의 평범성을 논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히만의 이기심, 역지사지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그것이 자신의 이익추구를 위해 철저히 무시될만큼의 무지) 를 확인한것이지, 속은 것이 아닐테니까요. 단지 광인일 것이라는 자신의 가정에 배신당했을 뿐

《그녀가 가정한 악과 아이히만을 보고 도출한 악 의 사이 .. 그 간극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이끌어 낸 과정인데, 교수님은 후자의 악의 개념을 잠시 혼동하신것이 아닐까》
아마도 기고하신 교수님 께서는 작금의 현실, 수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저질러지는 악(?)이 아닌 너무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푸른집 아래의 개인들에 대해, 한말씀 하시고자 했던 의도이셨는데 글의 내용이 미끄러져버린것이지 않을카 싶습니다.
˝너희는 적극적 동참가들이다. 직업, 밥줄 운운하지마라. 어리석은 척도 하지마라. ˝

판을 펼쳐보면 프랑스 사건도, 전세계 많은 문제들도 결국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의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단촐한, 거친 ? 틀이라도 요즘 같아서는 `그 악의 평범성을 왜 《 나》에게는 묻지 않는가?` 가 두려워집니다.
오히려 가장 많이 자문 자답할 시기가 아닐까? 우리가 상대라 칭하는 저들에 대한 / 이편과 저편에 대한 group 을 정의하는 원소들에 대한 물음까지. 《물론......저 역시 그 누구보다도 ..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입니다. 악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두서없이 조금 긴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