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열만 되는 근심거리, 구경하는 고백, 안전한 성찰
이제 고백의 계보학을 통해 다다르려는 고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성찰은 성찰 자체로 추앙받아야 하는가?'이다. 이는 즉, 성찰을 성찰하는 메타적 성찰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백과 해방을 등가화시키려는 진리를 해체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고백을 통해 자기 수행적인 요구를 자가 생산하는 성찰이라는 것 또한 비판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찰의 무효화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찰도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영역 안에서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것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서 성찰이 이용된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에 대항할 성찰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성찰적 근대화와 생활 정치라는 개념으로, '성찰'을 현실 사회의 개입을 위한 사회학적 대안으로 사유했던 앤서니 기든스의 논의에 숨겨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러한 비판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성찰 문화를 점검해볼 것이다.
과연 성찰이란 무엇인가. 김홍중은, "성찰한다는 것은 단순한 내성이나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초월적 의식이 정립되어 그 의식을 통하여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는 체험의 구조화를 가리킨다"(김홍중,2007,186쪽)라고 정의한다. 이성이 단순히 대상에 투여되는 지향임을 넘어서 자신의 지향성마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성찰성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김홍중,2007,195쪽). 성찰성의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든스에 의하면 소위 후기 / 재귀적 / 성찰적 모더니티의 전기 속에서 행위의 전통적인 준거를 상실한 개인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성적, 일상적 삶의 제도화와 의미를 구성해야 하는 존재로 변모하는데(김홍중,2007,191쪽), 기든스는 바로 이러한 존재들을 '반성적 개인'으로 주목하고, 그들의 잠재성과 (사회학자라는) 전문가의 개입이 결합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 결합의 대안이 '생활정치'다.
그러나, 바우만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생활 정치'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는 '반성적 존재'이며, 행동의 결과에 만족하는 법 없이 열심히 수정을 가한다"(Bauman,2000/2009,p.40)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찌된 일인지 그러한 반성이 우리 행동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규명하는 복잡한 절차를 포괄해낼만큼 심화되지는 못한다"(Bauman,2000/2009,p.40)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생활정치의 사적인 이상향들을 상기해내어 다시 한 번 좋은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을 얻어내려는 일들이 어려워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벗어던지고 이를 생활정치가 떠맡게 되며, 법률상 개인이 실제상 개인이 되려는 노력 속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도무지 서로 더해질 수도 쌓일 수도 없게 되고, 그리하여 공적 영역에는 그저 사적 근심거리들이 토로되고 대중이 열람할 수 있도록 진열되는 현장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게 될 것이다(Bauman,2000/2009,p.82-83). 바우만은 특히 고백의 과학화와 접목된 오늘날 자기계발의 범람과 개인성에 대하여 푸코와 유사한 시선을 던진다. 그는 그 예로 상담 과정을 비유로 들어, 진열만 되는 사적 근심거리들을 추동하는 생활정치의 한계를 지적한다.
질병은 개인적이고 그 치료 역시 그러하다. 근심은 사적이며 그 근심을 싸워 물리치는 수단 역시 그러하다. 상담자들이 제공하는 상담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를 거론한다. 그들은 상담 받는 사람들이 그들 혼자서 혹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거론하며, 그들 혹은 그녀들 각각에게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가 힘을 합치기만 하면 서로를 위해 함께 이루어낼 수 있는 것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중략). 상담이 끝나고 나면 상담 받은 사람들은 그 상담이 시작될 때나 매한가지로 혼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혼자임이 일층 배가된다는 점이다. 자기가 만든 덫에 걸려 버림받을 것이라는 본능적 직감은 자꾸만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확산에 가까워진다. 어떠한 충고를 들었든지 간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상담 받은 사람은 혼자의 몫이다. 즉, 그 충고를 알맞게 실천해야 할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해도 이는 오직 자신의 잘못과 태만 때문이므로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cf.Bauman,2000/2009,p.105-106).
익히 알다시피, 기든스는 상담이라는 심리학적 의례 속에서 고백을 하는 입과 고백을 들어주는 입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요법의 정치', '본보기의 정치'들을 옹호했다. 그는 요법이 "의존성과 수동성을 조장할 수 있지만, 참여와 재전유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Giddens,1991/1997,p.291)라는 주장과 함께, 의존성과 수동성이 조장된다는 것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서, 고백을 들어주는 입의 위치에 있는 "요법사는 기껏해야 마땅히 해야 할 자기 요법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촉매에 불과하다"(Giddens,1991/1997,p.137)고 말한다. 그러나, 기든스는 요법사의 위상을 너무 낮게 본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요법사'라는 직업적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요법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권력의 입들, 즉, 개인에게 고백을 추동하도록 하는 입들의 존재를 더 광의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든스는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고백이 과학화 되는 과정 속에서 "신체가 행정 권력의 초점이 되었다"(Giddens,1993/1996,p.67)는 푸코의 견해를 수긍하면서도, 푸코가 '캘리포니아적 자아 종교'(Giddens,1993/1996,p.56)라고 불렀던 고해의 의례들에서 "신체가 자기 정체성의 가시적인 매개체가 되어가고 따라서 라이프 스타일이나 개인들이 선택한 결정으로 점차 통합된다는 사실이 보다 중요하다"(Giddens,1993/1996,p.67)라는 주장을 펼친다.1) 이는 사실상 기든스가 개인의 성찰을 촉진하는 의례, 그 의례들을 추동하는 생활 정치의 개념 확립을 위해, 고백이 과학화됨으로써 현실 권력의 통치 양식에 포섭되었음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푸코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기든스는 요법사의 위상과 현실 권력의 통치 양식에 대한 접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분석을 수행했어야 했다. 그는 『현대성과 자아 정체성』,『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통해 자신이 내세운 구조화이론의 외적 정합성을 강조하기 위해, 생활세계의 모순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행위자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뢰가 무한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박을 피하기 위해, '이중해석학', 즉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행위자들의 해석을 보완하기 위한 전문가들- 즉 사회학자들-의 해석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가 결국 기든스 스스로를 푸코가 의혹에 눈길을 보내는 '요법사'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김경만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기든스는 외부에서 행위자들에게 자신이 이론적 잣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설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기든스가 말하는 설득 과정이라는 것은 합리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서로 동등한 인식능력을 가졌다고 가정된 이론가와 행위자가 서로의 입장에 대한 상호비판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대화과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김경만,2005,167쪽). 곧, 기든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서 고백을 추동했던 고해 신부의 역할을 시인한 꼴이 된 셈이다. 이것은 도리어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행위자의 성찰을 동등한 입장에서 존중한다는 기든스의 애초 목표가, 결국 자신이 푸코가 말했던 '권력 /지식'의 영역 안에 속해 있지 않은 '순수한 지식'을 설파하는 지식인이었음을 강조한, 전도된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이는 부르디외의 재귀 사회학이 파헤치는 학구적 이성의 오류가 부르디외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부르디외 스스로 간과했듯이, 기든스도 이러한 재귀 사회학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무오류성의 지식인으로 상정하여, 일상 세계의 행위자들의 성찰과 자신의 성찰을 차별적으로 바라본 게 된 셈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기든스의 이중해석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생활정치 내 행위자의 성찰은, 그가 초점을 둔 행위자의 자기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보다는, "본보기와 조언, 안내를 구하는 것은 하나의 중독이다"(Bauman,2000/2009,p.116)라는 바우만의 명제로 전도된 듯하다. 대표적으로 '본보기의 정치', '조언의 정치'가 발견되고 있는 토크쇼와 같은 장르는, 전술하였다시피 그동안 고백과 치료의 윤리 차원에서 푸코의 논의를 토대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펙은 이러한 흐름에 더하여, 고백을 현실 권력의 기술로 여겼던 푸코의 '원-사유'에 근접한 저작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를 내놓는다. 이 책은 단순히 오프라 윈프리의 쇼에 출연하는 개인들의 사사로운 대화와 그 대화를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윈프리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관계를 묻는 관점에서 벗어나, 오프라 윈프리라는 문화 엘리트가 표방한 고백을 통한 자기 치유의 전략이 미국의 정치권력과 조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기든스의 생활 정치에 근거가 되는 이야기들과 펙의 저서에서 분석된 오프라 윈프리라는 문화 엘리트의 전략이 서로 상관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그럼으로써 현실 권력으로서의 테크놀로지로서 성찰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했던 기든스의 논의를 반박함과 동시에, 이 반박이 성찰에 대한 냉소주의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메타적 성찰의 거점을 찾아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토크쇼라는 장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그 장르를 채우고 있는 고백의 의례들을 어떻게 현실 정치와 관련지어 바라볼 수 있을까. 우선, 토크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회학자 바우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토크쇼에 관하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수고로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바우만의 주장처럼 토크쇼가 ‘사적 문제들에 대한 공적 담화를 합법화’(Bauman,2000/2009,p.111)시키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바우만이 계속해서 일갈하는 것처럼,
이 장르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들을 점잖은 것으로 만들어주며, 추한 비밀을 자긍심의 문제로 변모시킨다. 꽤 중요한 정도로 이 쇼들은 악령을 물리치는 의식과도 같다. 그것도 대단히 효과적인 의식이다. 토크쇼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수치스럽고 창피하다고 생각해 비밀로 묻어둔 채 말 못하고 끙끙 앓던 것들을 이제는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다. 내 고백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기에 나는 고통에서 면제되는 것 이상의 위안을 얻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창피해지거나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진 않을까. 뻔뻔하다고 손가락질 받거나 배척당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게 결국, 사람들이 수백만 시청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그런 문제일 뿐이다. 그들의 사적 문제들, 그와 비슷한 내 자신의 문제들은 공적으로 토론을 하기에 적합하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 이슈라는 테두리 안에서 토론된다. 아무리 길게 토론을 해도 그것들은 표범의 얼룩반점처럼, 결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제들은 사적인 것으로 재확인되며, 그 사적인 특성이 강화된 양상으로 공개석상에 오르게 된다. 결국 모든 화자는 개인적으로 삶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한, 이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맞서고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인다."(Bauman,2000/2009,p.111)
'명백하게 정치경제적 이슈인 빈곤이나 노숙자 문제, 사회복지, 실업 같은 문제들은 다루는 윈프리 쇼의 태도'(Peck,2008/2009,p.27)에도 토크쇼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이 적용된다. 펙은, "정치적 문제를 심리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윈프리의 프로그램은, 레이건의 반동적 정책과 모든 것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흉내내며 이를 정당화하는데 일조하였다"(Peck,2008/2009,p.27)는 견해를 펼친다. 80년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주도했던 레이건식 개혁은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반동적 정책, 문제적 자아, 회복 치료'(Peck,2008/2009,p.27)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 레이건식 개혁이란 부의 불공정한 재분배에 매진하는 경제 프로젝트이자 계급동맹을 조직하고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 가난한 자들을 겨냥한 반동적 정책을 강행하는 것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이러한 반동적 정치는 가족의 위기라는 유령을 통해 연출되었고, 이에 따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의 가치를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았다. 즉 집 없는 노숙자, 빈곤, 편모, 가정, 범죄, 배우자 및 아동학대가 늘어나는 것은 흔들리는 개인의 가치관 탓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바로 전통적 가족의 위기에서 비롯된 불평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회복운동과 연계되어 병리학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회복운동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개인의 불행을 '문제 가정'의 틀 안에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eck,2008/2009,p.27). 이러한 틀은 비단 레이건 시대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프라 윈프리의 쇼에 출연한 적이 있는 빌 클린턴은 가치, 치료, 기회, 책임, 공동체, 권한 등의 단어를 자신의 정치연설문에 단골로 등장시켰다. 가치 정치학 혹은 의미 정치학이라고 불리는 그의 연설은 개인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로 연결된다는 테라피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Peck,2008/2009,p.213).2) 펙은 윈프리가 현재와 같이 남다른 문화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녀가 생각하는 자아의 정체성, 질병에 대한 생각 및 그 치유기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Peck,2008/2009,p.79) . "생활정치와 능동적 신뢰라는 자아 테크닉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현재의 위기에 대해서 참여적이고 주도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것을 제안한"(김종엽,1997,82쪽), 기든스의 이론은 윈프리 쇼가 표방하는 가치와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기든스는 '요법의 정치'와 '본보기의 정치'를 표방하는 심리학적 수양을 고취시키는 "자기계발 도서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기실현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지침을 알려준다는 점 때문"(전상진,2008,112쪽)에, 자기계발 도서를 해방적이라고 봤지만, 오히려 이러한 성찰적 주체들은 "자유의 윤리, 자기주도성의 윤리를 받아들이며, 통치 가능한 주체로 주체화"(전상진,2008,119쪽)하는 과정 속에서, "괜찮은 인생을 사는 비결과 그에 사용될 장치들은 유효기간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한이 되기도 전에 잘 쓰이지 않게 되고, 위축되며 가치가 떨어져서 더 나은 신상품과 경쟁할 때는 완전히 그 매력이 사라지게 된다"(Bauman,2000/2009,p.117)는 바우만의 지적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도들의 명백한 외부는 개인적 생애의 내부"(Beck,1986/1997,p.215)가 되어가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반성적 개인'은, "자아를 중심에 놓고, 자아에 대해 행동기회를 할당하고 열어주며, 이런 식으로 자아는 자신만의 생애와 관련하여 결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 깊게 운용할 수 있게 된다"(Beck,1986/1997,p.222)지만, 오히려 이것은 ‘자기 주도성의 윤리, 혹은 기업가적 자아의 이미지를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전상진,2008,119쪽)하는 것에 귀속된다3). 기업가적 자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을 양성하려는 것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훈련가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비애를 관통하는 진솔한 '반성문'을 쓰기보다는, '진솔한 반성문으로 보이는 것 같은 반성문을 쓰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오늘날 중대한 사건 앞에서, 진열만 된 근심거리를 보는 것에 만족하고, 그 근심거리를 구경하면서, 안전한 성찰을 추구한다.4) 오늘날 기든스가 성찰성 안에 강조했던 자기 자율성의 타자를 위한 배려는, "각자의 잠재성 계발이 결코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Giddens,1993/1996,p.279)는 차원에 그치고 만다. 안전한 성찰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분노를 포섭하고, 그 분노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사유를 검열한 채, 오늘도 광장에 다녀왔다는 '출석의 정치'로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자위한다.
[결론을 대신하는 보론] 관객의 윤리, 깔끔한 입, 소멸하는 열정의 시대
애도가 두려운 것이 될 때 우리의 두려움은 애도를 재빨리 해소할 욕구를 불러 일으켜 상실을 회복하고 애도를 추방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종전의 세계 질서로 돌아가거나 이 세계가 옛날에는 정돈되어 있었다는 판타지를 소생시키려는 권력을 투여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Butler,2004/2008,p.59).
관객의 윤리가 자연스러운 현대인에게, 사건이 주는 파장은 빨리 소모되고, 그러한 파장을 짚는 말과 글들은 파장 자체가 망각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사라진다. 세넷이 이미 이십 년 전에 갈파했듯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동이 아닌 의도와 감정만을 소비할 것을 권하는 정치적 배우를 바라보는 수동적 관객이 된 것이다(Bauman,2000/2009,p.175). 이런 환경에서 나오는 성찰은 오래 전 엘리아스가 유럽의 궁정사회에서 발견한 ‘재귀 관찰’의 형태를 띄고 있다. ‘사회적, 사교적 교류를 수련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 속에서, 엘리아스가 바라보던 궁정인들의 재귀 관찰이란, 결국 궁정사회의 규율과 예법을 내면화하기 위한, ‘자기 통제’로서의 재귀 관찰이 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교류’로서의 자기 관찰이, 공공성의 가치를 지향하는 성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과 단기적인 반성만 있는 사무적 세계'(Bauman,2000/2009,p.38)라는 레떼르가 잘 어울리는 오늘날. 소비되는 성찰은 그 레떼르에서 풍기는 찝찝함을 잠시나마 감출 수 있는 상품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소비되는 성찰의 존재는, 물건을 사용하면서 체감되는 열정의 퇴색처럼, ‘소멸하는 열정’(Sennett,2006/2009,p.164) 안으로 포섭되어버리는 나약한 운명과 가까이 있다. 앨버트 허쉬먼이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추적한 결과처럼, 종교 권력에 복속된 시대의 사람들은 열정을 부정한 것으로 인식했지만, 근대로 넘어가는 시간의 진행 속에서 그 열정을 (경제적) ‘이해관계interest’라는 개념으로 대항, 변형시키면서 충족의 세계를 만들어놓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의 열정은 이미 ‘이해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감정의 이윤’을 촉발시키기고, 그러한 촉발을 위해 ‘나와 너’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만드는 것에 일찌감치 동의했는지 모른다. 결국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열정이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유념하는 변덕스러운 생체 리듬을 점검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내밀성의 독재’는 “공공적이고 시민사회적 관점이 개인적 심리적 차원의 관심과 관점에 주권을 내준 것 같은 상황”(천선영,2008,52)을 제공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고백이 종교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산포되는 과정 속에서, 개인의 죄는 언어가 되고, 그 언어를 치유할 언어를 만들어내는 권력자들은 고해라는 영역 안에서 죄의 언어를 제거한 것처럼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정작 죄의 언어는 사라지기는커녕 전시됨으로써 권력자는 그 전시 효과를 통해 고해자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도록 길을 터놓는다. 그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길에 가지 않기 위해 죄의 언어로부터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결국 그 혼란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귀결된다. 언제일지 모르는 밝은 미래, 하지만 신이 가져다주리라고 믿는 희망 속에서, 자신의 악전고투가 감내하는 상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인에게 남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식의 정치, 대문자로 시작되는 정치, 사적 문제들을 공적 현안으로 해석하는 소임을 짊어진 행위의 죽음일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해석의 노력은 서서히 멈추게 되었다"(Bauman,2000/2009,p.113). 지식인들이 사회의 폐부를 찌르기 위해 사용하던 칼의 언어는. 정작 지식인 스스로의 얼굴로 향하고, 그들은 더욱 더 예쁘고 착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취향의 관대함'이라는 용어로 대중에게 투항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비판했던 '신속한 두뇌들'(Bourdieu,1994/1998,p.47)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들의 임포텐츠는, '일상적인 경험을 지배하는 경계들에 맞서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는 경험'(이승철,2004,36쪽)인 푸코의 '한계 경험'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만든다. 한계 경험의 추구 대신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너와 나가 함께 대면해야 할 현실의 고통을, '단조로움, 반복성, 예측 가능성'(Bauman,2000/2009,p.90)으로 구성된 질서의 존재로 바꾸는 것이다. - 소비되는 성찰의 단조로움, 반복성, 예측 가능성으로의 귀속과 아울러!- 그 과정은 위에서 인용한 버틀러의 주장처럼, 이 세계가 옛날에는 정돈되어 있다는 판타지를 소생시키려는 권력을 투여한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이 행동의 정체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망각의 입으로 보고 있다. 이 순간 역사는 현재를 소거시키기 위한 깨끗한 과거로 규정되거나, 깨끗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더러운 과거를 소거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차원을 뛰어 넘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함은 마땅하다. 우리가 '누구'를 묻는 노력에 소홀한다면, '반성적 개인'이 써내려간 성찰적 서사는, "고충의 체험에 합류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이득이라곤, 홀로 고난에 맞서 싸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매일 하는 일임을 서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뿐이다"(Bauman,2000/2009,p.58)라는 내용만이 남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공약과 그것을 지킬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를 메저키스트로 단련시키는 방법일지 모른다. 필자는 권력자들을 메저키스트로 만드는 것은 조루의 운명을 지닌 분노로의 환원과 안전한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딱 그만큼의 고백, 딱 그만큼의 성찰이 권력자의 규율기술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자격-게임'이 소일거리이자 유일한 위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넷이 '르상티망'Ressentiment5)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적 감정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르상티망은 겉으로만 베푸는 지배층에 대한 원망을 낳고, 유대인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온갖 혜택을 훔치고 있는 것으로 비치는 사회 내부의 또 다른 적들에 대한 분노를 유발한다(Sennett,2006/2009,p.159). 세넷은 이러한 르상티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르상티망을 통해 경제학과 정치학을 연관지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계속된 이유를 덧붙여보면, "끊임없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악마로 몰아간다고 해서 시급한 당장의 물질적 불안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Sennett,2006/2009,p.159) 고로 우리에게는 보다 준비된 '준엄한 분노'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분노는 수직 화살표의 운명을 수긍한 채, (권력자에 대한)상승된 분노의 무기력증을, (노동자에 대한) 하강된 분노의 무관심을 의례의 영역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하강된 분노가 초래하는 무관심에 우려를 표한다. '하강된 분노'라는 말은 사실 모순적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외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외면의 모순에 남모를 안도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가 서열로 매겨진다는 것에 우리는 여전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역사는 이미 그 불편한 진실이 아주 예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에드워드 톰슨이『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갈파한 것처럼, 예전 유럽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빈민과 타락한 속중은 물론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빈민들의 난폭성은 그들이 은총의 테두리 바깥에서 살고 있다는 징조인 셈이었다. 곧, 선택받은 깔뱅주의자들은 일종의 편협한 친족동아리로 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Thompson,1980/2000,p.41). 깔뱅주의의 소명의식에 귀착한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고,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동거하는 하층계급민 여성을 매춘부로 분류해놓기도 했다.
에드워드 톰슨이 '인상에 의한 계산'(Thompson,1980/2000,p.80)이라고 명명했던 분류의 진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Thompson,1980/2000,p.80). 오늘날 자신을 신성 가족으로 여기는 깔뱅주의의 언어는 도처에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적 게토 속으로 들어가 '탈세적 절대성'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소비함으로써 '억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이상한 '용기'를 가진 자가 된다"(김진호,1999,147쪽).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억압은, "권력기관들은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다. 선택자의 비위를 맞추며 유혹하고 살살 꼬드길 뿐이다"(Bauman,2000/2009,p.104)라는 바우만의 푸코적 시각에 포획될만한 (적당한 분노가 가미된) 소모되는 성찰과 섞여, 권력이 유도하는 언어의 생산과 결부된다. 이것은, 당시 무산자들의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유산계급이 인상의 수치로 간주한 죄인들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를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Thompson,1980/2000,p.83)와 유사하다. 정작 이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고백은, 우리가 들어야 하는 언어가 아닌, 듣고 싶어 하는 언어로 채워진다. 애도의 서열과 가치를 매기는 무시무시한 세상, 죽음을 통해 스스로를 상실하면서까지 하나의 고백을 남기고 싶었던 이들의 언어를 외면하거나 구경하는 다른 입들은, 깔끔한 입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6) 그러나, 그 입 속에서 나오는 고백의 언어들에는 깔끔한 것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심한 구취가 난다.
‘아홉 켤레의 구두를 가진 권 씨’는 들어올 수 없는 예배당이 되어버린 광장,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기쁘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착한 사람'(cf.Rusell,1996/2004,p.139)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화연구는 여전히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일반'으로 치부하는 '착한' 언어를 생산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그 '일반'이 주도하는 쾌락을, 저항으로 치부한 채, 오히려 '저항의 연골'을 닳게 하지는 않았는가. 문화연구자들 간의 '성찰 게임'이 주는 쾌락은, "문화연구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당위적 강령으로 받아들인 채, 도리어 지식의 '순혈주의'를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토록 인간과 광장을 중시하고, 인간과 광장의 열기를 두껍게 기술하는 것을 자부하던 문화연구자들이 내놓은 발견이란, 과장된 감탄으로 장식된 '정체성 확인의 놀이', '다학제적이라는 꼬리표 아래 숨어든 후발주자들의 진부한 자책적 제언'이 아니었던가. 문화연구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가로새겨진,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진부한 특화, 그 특화의 환영이 만들어놓은 대상화, 고착화된 편린들의 목을 벨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는 과연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강조했던 심리학 박사 탬킨을 떠난 토미가, 전혀 알지 못하던 자들의 장례식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7)를 포착할 수 있는 ‘미문’을 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다가오는 사건들 속에서, '깔끔한 입‘의 위안이라곤 결국,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외면, 부인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는 것이다”(Elias,1982/1996,p.18). 어쩐지 아직 필자의 입에서 심한 구취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