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비평지《말과활》9호에 머리글을 썼다.


이하 전문.



어느 '문학 쪼렙'의 고백


소스sauce와 소스source


몇 년 전 내게 소설은 소스sauce였다. 텁텁한 논문에 풍미를 더할 향신료였다고 할까. 연구 주제를 맛깔나게 살릴 글귀를 논문 서두에 인용한 뒤, 흡족하다는 듯 모니터를 쳐다보곤 했다. ‘아, 글이 좀 몽글몽글해졌어.’ 허나 인용한 작품 몇 줄이 삼십 쪽 넘는 주장보다 예리하다고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소설을, 시를 읽는 데 재미가 붙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읽는 중입니다, 하면 “그 작가를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으로 시작하는 훈수를 잘 따라가진 못한다. 게임 용어를 빗대면 나는 아직 문학 ‘쪼렙(초보 단계)’이다. 여전히 눈으로 페이지만 넘기는 작품이 많다. 등장인물의 긴 이름, 역사적인 무대가 이리저리 횡단하는 소설은 일단 오른손으로 넘길 페이지를 고정시킨다. 그리곤 왼손으로 읽었던 앞 페이지 구절을 짚어가며 재차 읽어야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 씨름했던 작품은 김솔의 소설집『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 번째』다. 읽자마자 기가 죽었다. 동원된 재료가 촘촘하게 짜인 문장 때문이었다. 김솔이 쓴 온갖 재료에는 읽은 기록, 읽지 않은 기록이 수없이 등장했다. 그 점이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작품 속에서 넘실거리는 재료의 인용·(재)활용이 글쓴이의 독서력과 여행력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그 일 또한 작가에겐 서글플 것이다. 감탄과 시샘의 초점을 잠시 옮긴다.


오늘날 소설가에게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란 무엇일까. 새삼스럽지만 논문 쓰기와 소설 쓰기를 비교해본다. 논문에서 재료는 사실이 입증된 정보다. 가령 내가 1980년대 국내 소설가의 창작 환경을 연구하고자 문학사회학자 루시앵 골드맨의 한 논문을 인용했다면? 그 논문 자체는 사실로 존재하는 재료다. 한데 소설에서 재료는 꼭 사실일 필요가 없다. 소설가는 재료를 허구로 만들 수 있다. 소설가가 작품을 위해 찾아낸 소스source는 작품성을 북돋우는 사실적 정보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가 김신식이 등단작 소재로 1982년 2월 27일 부산 동대신동에서 일어났던 일을 당시《부산일보》사회면 기사를 참조해 썼다고 치자. 1982년 2월 27일의 일이 ‘정말 벌어졌던 일’이라 할 까닭은 없을뿐더러, 그 전개에 따라 기사도 허구로 설정되어 주석이나 본문에 배치될 수 있다(나는 후자의 묘미 때문에 문학이 부럽다!). 소설가들에게 더 이상 소스는 이곳, 현실을 입증하기 위한 출처가 아니다. 소설에 쓰이는 주석, 작품 본문을 유영하는 『』속 이름을 유심히 챙겨보는 이유다.






시간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평단에선 이처럼 소스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작가들을 ‘라이브러리 키드’라 부른다고 들었다. 도서관·문서고를 휘저어 작품으로 내놓지만, 정작 이들이 다녀온 지식 창고는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 가능한 사실과 허구의 조합이다. 도서관이나 문서고 하면 일단 시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그리고 보르헤스가). 하고 싶은 이야길 산드러지게 뽑아줄 책을 찾아 입으로 먼지를 털어내면 드디어 발견했다는 통쾌함, “이미 이야기되었다는 슬픔”이 함께 찾아온다. 프랑스 문학 연구자 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는 이 슬픔을 연구했다. 그녀는 14~15세기 중세 문인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폈다. 자클린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문인은 창조력의 고갈을 함函, 즉 상자란 은유로 풀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글을 즉시 꺼내는 데 점점 주저했다. 대신 상자에 고이 담아두었다. 상자에 쌓인 기록은 주제가 고갈된 나머지, 재활용을 시인해버리는 작가의 운명이었다. 한편으론 새것을 향한 즉각적인 소란에서 벗어나 언젠가 인정받으리라 꿈꾸는 작가의 모색이었다.





그렇다고 상자 안 기록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무관심에 묻힌 기록을 반가워하는 쪽도 있다. 대중음악에서 유행하는 샘플링sampling은 상자에 담긴 실패담을 환영한다.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몇 마디 따고 싶은 음원이 많은 이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좋은 샘플이다. 음악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유명하지 않은 비트·그루브만 좇는 음악인을 ‘도굴꾼’에 비유했다. 레이놀즈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음악 도굴꾼들은 남들이 되도록 듣지 않았을 법한 음반을 구입하고자 중고품 가게, 벼룩시장, 바자회를 돌아다니고 가방에 담는다. 샘플링 과정에서 음악은 여전히 귀와 친숙하지만 도굴꾼이란 비유에서 보듯, 샘플링은 채취採取이기도 하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희귀한 약초를 캐내듯이 되도록 희소한 음악 샘플을 찾아 캐내려는 행위가 샘플링의 시작이다. 문서고에서 아무의 손때도 타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기록을 집어든 작가처럼. 샘플링이 과해 표절 문제가 거론되면 흔히 귀를 의심하지만, 사실 귀만큼이나 손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인에게 손의 성실성은 귀의 그것만큼이나 자신의 독특한 음악 취향을 선보일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이든 문학이든 갈수록 새로운 매체 환경과 친숙해져 가는 이때, 문학은 대중음악에 비해 손의 성실성, 진실성을 믿는 편이다. 문학에서 손은 곧 ‘장인의식craftmanship’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아직 (맨)손의 가치에 무게를 둔 감정을 신봉한다. 가령 작가에게 필사는 단지 키보드 쓰기에 사라져간 손글씨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게 아니다. 필사는 자신이 빚어내려는 작품보다 먼저 태어난 작품에 대한 예우다. 때론 맹목적인 가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어떤 정수精髓를 지키겠다는 결심이다. 사람들은 이를 따라 작가의 필사를 장인의 마음으로 해석했다. 소설가는 자연스레 외로이 손수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방에 위치했다. 허나 익히 알다시피 오늘날 문인의 손은 공방이란 은유에 묶여 있지 않다. 그러했을 때 문인들의 손은 미셸 푸코의 이 말을 불러낸다.




“나는 문학적 분석은 오직-우리가 언어와 시간을 혼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제껏 사로잡혀 있었던 이 모든 시간적 도식을 망각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도식들 중에는 특히 창조의 도식이 있습니다. 만약 비평이란 것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이 최초의 창조 순간, 작품이 태어나고 자라는 순간의 회복을 자신의 기능과 역할로 삼아왔다면, 그것은 다만 비평이 언어의 시간적 진화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평의 향수, 필요성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문인을 공방에 가둘 때, 창작은 순수한 창조creation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의 신화를 옹호하든 벗겨내든 시간에 집착하는 문학 비평은 여전히 ‘영향에 대한 불안’을 의식한다. 선구자를 지목하고, 거스르며, 오독을 권장한다. 누가 먼저 그 주제에 관한 생각의 우선권을 소유했는가, 후세의 작가는 어떻게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순차적 시간을 창작으로 거스르는가 주목한다.



그러나 지금 비판가들 사이에서 영향에 대한 불안, 이미 이야기되었다는 슬픔은 엉뚱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평자의 비판을, 평자는 작가의 비판을 금세 식상함/식상하지 않음이란 틀에서 검사한다. 서로의 비판은 제대로 읽히지 않은 채, 일단 품바 타령 취급을 받는다(‘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누군가의 입장에서 진부함을 솎아내는 비판은 상대의 논의를 ‘또 그 이야기냐’는 피로로만 읽어낼 뿐이다. 문학의 그늘에 대한 폭로는 그런 취급을 당하지 않길 바라지만, 외려 문학계 비판이 이를 부추기는 형국이다. 폭로를 피로라는 코드로 접근했을 때, 폭로에 대한 반응은 결국 누가 그 작가의 숨겨진 필화를 더 많이 알고 있느냐, 더 나아가 당신이 들은 문학의 위기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기를 알고 있다는 ‘정보값’ 자랑으로 와전되고 만다. 이 흐름이 ‘이제야 그 이야기를 알았느냐’는 냉소에 기대고 있음은 자명하다.





논쟁적 사안을 두고 창작의 주제 고갈만큼이나 비판의 관점 고갈에만 몰두할 때, 비판가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론적 성직자”라 부른 모습을 자연스레 닮아간다. “이론적인 성직자는 이론적 오류를 먹고 살아간다. 이론적 오류를 고치고, 비난하며, 내쫓는 것은 그의 몫이다.” 학자가 이론적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당연하다. 부르디외가 굳이 성직자라는 비유를 쓴 것은 “영업허가를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임한 이들 때문이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 성직자들은 마르크스의 예언을 이해하며, 오독하고, 반역할 수 있는 권한이 스스로에게만 있다는 듯 행동했다. 문학이라고 다를 리 없다. 비판가가 자신도 모르게 성직자가 되었을 때, 문학판은 서로의 윤리적 제스처를 검사하는 위생소衛生所가 되어버린다.


이 와중에 ‘젊은’ 작가들은 이 형국을 무마시켜줄 심판으로 대책 없이 ‘소환’된다. 소환하는 자들은 자신의 피로를 젊은 작가들에게 전가한다. 먹을 밥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기성 작가와 평단은 외려 굶은 자에게 새 밥을 차려 달라 아우성친다. 그런 사이에 비판가들은 괜히 제조manufacturing라는 은유에 기대어 문학의 현실을 ‘출판상업주의’로만 몰고 간다.




결국 문학은 흡수하고 뒤돌아본다, 작품으로





“문학은 이 이해 가능성 양태를 해석과학들에 전달했는데, 이 과학들은 역으로 그것을 문학에 적용하여 문학으로 하여금 숨겨진 진리를 자백하도록 강요한다. 발송인에게 환송은 너무 쉬운 것이고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과학들이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문학을 탈신비화하겠다고 주장하는 그 방법론은 사실 문학 스스로가 제공했으며, 또한 이 비판들의 개입 없이도 문학은 스스로를 진단과 수정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과학에 의문을 제기해왔기 때문이다.”

_자크 랑시에르







문학을 계속 하려는 자들, 앞으로 하고 싶은 자들, 읽고 싶은 자들을 위한 배려 없는 논쟁들. 결국 이 따가운 말들을 양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문학 작품이라 생각한다. 앞서 라이브러리 키드라 불리우는 소설가들의 경향에서 살펴봤듯 문학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표절의 논의와 전혀 다른 말의 공간을 스스로 모색해왔는지 모른다. 이 모색은 문학의 현실을 자가 진단한다. 어느 기록, 어느 사건, 어느 경험을 ‘담았다’는 작품의 세계가 그 작품을 읽는 내가 접한 기록·사건·경험들과 ‘닮았다’는 해석이 무색해지는 공간. 작가들은 그 무색함을 전하기 위해 작품을 통해 인용·재료·출처를 꾸며내고 있다. 이로써 현실을 마땅히 그려내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정보의 사명감은 사라진다. 문학의 정보는 그 자체로 허구의 생명력을 얻어 뻗어나간다. 어쩌면 이 논쟁 또한 누군가의 작품 속 재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 사건을 기초로 쓰인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작가가 코웃음 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이 코웃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말대로 이처럼 문학이 스스로 진단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이 순간 《말과활》은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입만 아프지’ 하며 넘어가는 질문 하나를 독자들에게 꺼낸다. 과연 비평이란 무엇일까. 이 글이, 이 잡지가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다면 오만일 것이다. 다시 비평의 처지를 돌아본다. 비평은 지금 텔레비전 시트콤에 등장하는 관객의 인공 웃음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작품을 읽으며 울고 웃어야 할 독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진 않는가. 비평은 울어야 할 작품은 울어야 한다고, 웃어야 할 작품은 웃어야 한다며 독자의 기분을 세심히 상상하며 쓰는 기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했을 때 어느새 정서적 지식으로 덧대어나가는 평문에 마냥 좋은 비평이란 지위를 부여하고 있진 않는가. ‘착한 비평’이란 지목 아래 작품을 향한 ‘어떤 긍정’인가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긍정 자체가 무조건 문제라는 식으로 비평을 단순히 판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문제들을 껴안은 채 문학을 읽는다. 비평을 읽는다. 아니, 문학을 계속 읽을 것이다. 비평을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의 기분을 달아오르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감정의 자백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_페터 한트케, 『관객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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