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품절


2008년 3월에 일어난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06년,성인용DVD의 자주 심사 기관으로 35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비디오윤리협회는 음모 노출에 관한 심사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그 결과 몇몇 작품의 내용이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제작사 두 곳과 심사를 담당했던 책임자들이 음란물 배포 방조 혐의로 경시청에 체포되는(2007년 8월 23일 적발)일이 발생했다.-13쪽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식자회의(대표 :시미즈 히데오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 명예교수 겸 변호사)가 결성되고,2008년 6월에는 사미즈히데오를 최고고문으로 추대한 일본영상윤리심사기구(도쿄도 지요다쿠)가 발족했다. 이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을 둘러싼 재팜은 2009년 봄부터 진행중이다.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 작품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도 밝혔듯이, 이전까지 성인 비디오의 내용이 점점 과격해지는 영향이 있었는데, 사건 이후 표현 수위가 조금 낮아진 듯한 느낌이다.-14쪽

영화계도 1960년대 후반부터 TV에 밀려 관객 수가 감소하고 포르노 영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포르노 영화 1호라 할 수 있는 <여체의 신비>(구 서독)가 상영되었고,연이어 <여자의 환희>,<완전한 결혼>(스웨덴) 등이 상영되는 등 일본내에서도 포르노 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그리고 전국의 영화관이 7대 1의 비율로 성인 영화관으로 전환했다.(중략)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재판을 놓고 많은 지식인들이 격론을 벌였으며 1978년 6월의 1심 재판에서는(24)'성기 노출과 성행위로 간주되는 묘사의 허용 기준은 시대의 변화와 사회 통념에 의거한다'는 기준 아래 위의 4편 영화는 대담하고 노골적인 묘사는 있으나 음란하다거나 지나치게 선정적이지 않으므로 사회 총념상 음란물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도쿄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1980년 기각되어 이 영화들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24,25쪽

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사건은 이후 성적 표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체제라는 이유로 문학, 영화, 음악 등에서 성에 대한 표현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전후에 스트립이나 <카스토리>잡지 같은 성적 내용을 담은 것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하지만 전후의 혼란기의 궁핍한 경제 사정으로 국민들은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 데다가 당시만 해도 성적인 도덕관념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음란물 단속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따른 군수 특수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생고도 해결되자 사(25) 람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5쪽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말고도 또 하나의 포르노 재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다.(중략)당시 일본 영화는 침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닛카쓰가 로망포르노로 노선을 바꾸었듯이 다른 영화사들도 포르노 비디오 영상 산업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닛카쓰는 당시 최대의 비디오 점유율을 자랑했던 도에이에 맞서 닛카쓰 오리지널 포르노로 승부를 하려던 차에 기소를 당했다.(26)(중략)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에 가려 언론에 별로 보도되지도 않은 이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영화와 관련해서는 닛카쓰가 사운을 걸고 재판에 나섰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얻어냈으나,비디오는 포르노비디오라는 음성적 이미지 때문에 재판에 졌다는 의견이 있다.또 한편에서는 영화처럼 심사 기관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결과야 어떻든 이 닛카쓰 포르노비디오 재판으로 사람들은 포르노 비디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6,27쪽

특히 1970년대 초반에는 일명 러브 호텔 등 모텔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서 고객 유치 수단으로 흑백tv를 컬러 tv로 바꾸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tv에 연결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는 모텔이 급증했는데,이를 계기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영화사들은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해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말하자면 포르노 비디오 산업은 영업용 비디오 플레이어의 보급과(27)함께 발전한 셈이며 비디오 플레이어 역시 tv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27,28쪽

1968년 5월에 JVC와 소니가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출시했고,이듬해인 1969년 1월에는 후지산케이그룹이 비디오 소프트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매스컴은 1969년을 '비디오 원년'이라고 명명했다. 그해 컬러TV가 가전제품 생산액의 34%를 차지하며 수위에 올랐다.그런 본격적으로 가정용 플레이어가 시판된 것은 1977년 8월이었다. 그 사이에 1975년 소니가 가정용 베타 방식의 VTR을 내놓았으며 1976년에는 JVC가 VHS방식의 VTR을 발매했다. -28쪽

처음에는 소니의 베타방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듯 했으나 이후 사용하기(28) 편한 JVC의 VHS방식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게 되었다.비디오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발매되자 가전업체들은 비디오 플레이어에 포르노 비디오를 끼워 파는 판매전략을 세웠다. 소비자층으 도시 거주 독신 남성으로 잡고 포르노 비디오를 덤으로 주면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비디오가 보급되던 1980년대는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때로 서양식 욕실이 딸린 원룸의 수요가 늘면서 비디오 플레이어의 수요도 늘었다.-28,29쪽

한편 1977년에는 아베다 사건을 소재로 한, 일/불 합작 영화인 <감각의 제국>의 시나리오와 스틸 사진을 한데 묶어 출간한 동명의 단행본을 둘러싸고 저자인 오기마 나기사 감독과 산이치쇼보 출판사 사장이 음란물판매죄로 기소되지만, 현 사회의 통념에 비춰볼 때 음란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1982년 6월 무죄판결을 받았다.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성적 표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크게 달라진 시기이기도 하다.-29쪽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를 위한 가전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포르노 비디오산업은 수많은 수요자를 확보하게 된다.그전까지만 해도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모텔에 판매하던 영화사들과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메이저 영화사를 뛰쳐나온 이들이 만든 독립 영화사들은 영화배우를 기용하기 위해 이야기가 있는 제품을 제작했다.-29쪽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 사건을 꼐기로 1977년에 업자들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심사 기관인 일본비디오윤리협회가 발족했고,1996년에는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셀이라는 판매용 비디오 중심의 미디어윤리협회가 탄생했다.그리고 오늘날에는 업체 간의 자주적인 규제 아래 연간 약 1만2000편에서 1만8000여 편을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30쪽

포르노 비디오에서 성인 비디오로 옮겨간 시기는 언제쯤일까.그것은 포르노 영화의 종언과 깊은 관계가 있다.드라마(극영화)안에 성행위 장면이 삽입되는 형태의 포르노 영화는 섹스 장면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중략)수많은 감독들이 포르노 영화라는 이름 아래 사회를 향해 메시지(31)를 전했다. 그런데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영화가 막을 내리기 2,3년 전부터 포르노 영화에는 더 이상 사회저긴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으며,섹스 자체를 직접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포르노 영화를 뒤에서 지원사격하는 형태로 제작되던 포르노비디오도 같은 노선을 걷게 되면서 성인비디오라고 하는,드라마적인 요소를 배제한,즉물적인 섹스를 표현하는 영상으로 대체된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다.-31,32쪽

섹스에 대한 묘사도 도가 지나치면 폭력이 개입된 성행위가 되고 만다.더구나 드라마적인 요소가 배제된 성인 비디오와 폭력은 물감이 물에 풀리듯이 쉽게 융합되었다.그리고 이런 폭력성 강한,그것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나 강간 등 여성을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을 발기시키는 내용의 성인 비디오가 인기를 끌었다. -33쪽

이런 경향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에 따른 도시 인구 집중과 가족 형태의 변화로 자녀 양육 방식,특히 남자아이의 양육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핵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선을 보이면서 형성된 남녀의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녀 양육은 조부모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나 혈연이나 지연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핵가족화하면서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 근교에 사는 어머니가 혼자 가사와 육아를 맡아온 것이다. 게다가 자녀는 하나 아니면 둘이고,아버지라는 존재는 잠을 자기 위해 밤늦게야 귀가해 잠깐 집에 머물 뿐이다. 또 지방으로 전근(33)이라도 가게 되면 아버지 홀로 떠나는 것이 당연시된 사회 분위기에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 환경에 놓였다.-33,34쪽

잘 가꾸어진 잔디 정원이 있고,레이스 커튼이 하는 거리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엄마가 직접 간식을 준비해놓고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주부의 모습인 양 매스컴에서는 떠들어대고,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주부들은 자식 교육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판 맹모라는 야유까지 받으며 자녀 양육에 헌신했다. 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녀들은 학원에 가야 하고,미래 또한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그런 자녀들은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워갔고,그 부정적 이미지는 모든 여성에게 확대되어 남존여비 사상이나 여성을 멸시하는 사고를 갖게 되었다.(중략)1960년대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이 청춘기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였다. 어쩌면 그들은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 비디오를 찾았는지도 모른다.-34쪽

저예산에 따른 단기 결전형 제작 방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왔다.제작만 하면 무조건 팔리는(43)거품경제 시대의 현상,아무 거라도 일단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시대 상황의 후유증,업체 난립에 따른 경쟁 등이 맞물려 저예산으로 적당히 만든 작품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44)1970년대는 모텔들의 고객 유치 경쟁에,1980년대는 가전업체들의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 경쟁에 이용되며 성장해온 AV산업이 21세기인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나 컴퓨터 같은 통신기기의 수요 증대 전략에 다시 이용되고 있다.-43,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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