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병일기_ 발터 벤야민의 '신열'
발터 벤야민,「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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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병일기는 자신에게 다가온 병을 함부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예전에 사둔 약을 찾거나 병원에 가 진료를 받는다. '에이 좀 자면 낫겠지'라며 긴 잠을 약으로 생각하는 이조차도 사실은 병의 존재를 가벼이 보지 않는다. 허나 병에 걸렸다고 해서 누구나 그 아픈 순간을 깊은 혹은 색다른 사유로 돌아보는 기록으로 일일이 남기진 않는다. 다행히도 저자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를 공유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어떻게든 공유하기 위해 생을 시작한 사람들이자, 그것을 밥벌이의 숙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 공유 대상에 병도 포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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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뒤져보다 우연히 실제로 병을 앓았던 작가, 철학자, 사회학자 등 세상을 조금 범상치 않게 살았던 이들이 병을 겪으면서 남긴 기록이 꽤 있구나 생각했다. 살면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든 그냥 범인凡人의 생을 사는 사람이든 아프면 사람들은 기록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왜 아픈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병의 심각성이 더해지면 이를 어떻게든 감추고 살려는 이도 있지만, 가족과 친지부터 시작해 연인과 친구에게까지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위안을 얻는다. 때론 자신에게 찾아온 이 병이 신이 주신 벌이 아닐까 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잘못된 기억을 곱씹으며 자책한다. 그러면서 그 침잠된 우울함에 자기 자신을 맡겨보기도 한다. 치병일기는 이러한 상태를 거치면서도 병을 자기 내면과의 폐쇄적인 싸움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모은 작업이다.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순간, 그 누구도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아픔을 기록의 힘을 빌어 뱉어냈을 때 외려 그 이해와 공감의 폭이 커지는 서사와 사유의 시간. 병의 완쾌라는 귀결이 꼭 아닐지라도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혼란을 주는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써내려갔던 이들의 서사가 기록되는 시간. 그것이 내겐 치병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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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다시피 발터 벤야민은 어린 시절 자주 아팠다. 하지만 그는 아픈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외려 느긋하게 병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교육에 별 매력을 못 느꼈던 유년기, 그는 베개로 산등성이를 만들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어두운 갱도의 정적을 즐겼다. 그 정적 가운데 혼잣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했다. 침대에 가깝게 붙은 벽은 그림자놀이를 위한 극장이었다. "명랑한 어린이들은 저녁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법 없이 그림자를 이용해서 재미있는 놀이를 합니다"라는 놀이 책의 구절을 간직하던 벤야민은 손가락으로 늑대 아가리를 만들며 놀았다. 그는 소아병에 걸린 자신을 향해 "내 방에서 나는 세계의 파괴자로 늑대 상을 등장시켰던 것이다"라고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회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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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병에 걸려 신열이 심했던 벤야민이 가장 그리워했던 건 이야기였다. 
"내 몸은 이야기를 탐하고 있었다. 이야기로 가득 찬 강한 물길이 내 몸을 통과해 흐르면서 몸 안의 병의 징후들을 부유물처럼 씻어내렸다. 통증은 이야기의 진행을 막고 있는 댐이었지만 나중에 이야기의 힘이 커지면 통증의 바닥이 파이면서 망각의 심연으로 씻겨내려갔다."
이야기의 결핍을 채워준 이는 벤야민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벤야민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선조의 인생 행로, 할아버지의 좌우명 등을 벤야민에게 이야기함과 동시에 하루에 두 번씩 체온계를 직접 관리하며 일찍 죽는 것이 얼마나 성급한 것이며, 삶에서 잃는 게 많은 것인지를 납득시키려는 양 행동했다(이런 추측은 벤야민이 직접 느끼고 기록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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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그리워했던 벤야민은 자연스레 책 없이는 못 살았던 사람이었다. 의사의 진찰 뒤 당분간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들은 벤야민은 독서를 금지당했다. 좀 괜찮겠지 싶을 때 매일 밤마다 의사의 소견을 어기며 책을 읽은 뒤 베개 밑으로 책을 밀어넣어 감추기도 했지만 병이 심해지면서 책을 읽지 못할 정도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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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의 몸에서 병이 물러난 것을 깨닫자, 가장 먼저 귀 기울인 것은 그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들의 양탄자 터는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가 인상 깊었는지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애인의 목소리보다 더 깊숙이 새겨졌다고 표현한다. 병과의 인연을 잊으려고 할 즈음 그가 정말 아팠구나 확인해준 것은 결석한 시간의 합계가 적힌 학교 성적표였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 결석의 시간들이 우중충하거나 단조롭게 보이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결석의 173시간을 일련의 명예훈장이라고 생각했다. 
피부에 약간 반점이 생기고 구역질이 나는 정도였다고 생각했던 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자신이 아팠던 순간을 이렇게 정리한다.

"매번 병이 날 때마다 그것은 항상 다음과 같은 점을 가르쳐주었다. 불운이 얼마나 정확한 박자에 따라, 그리고 얼마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빠르게 내게 일어나는지를. 그것은 남의 주목을 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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