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 서문 2화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을 읽고
(1화에 이어서)
패션과 예술의 결합. (과장을 좀 보태서) 이러한 패션잡지의 매 페이지는 시각문화의 첨단을 뽐내려는 전시자의 공간이다. 이 공간 하나하나가 모여 '이 달의 박람회'를 개최한다. 패션은 전시장을 벗어났고, 예술은 스스로 늘 정의내리고, 누군가에게 정의내림 당하는 그 ‘예술적’이라는 표현 안에서 일상을 꾸민다.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저 극에 달한 주관의 벽도 있지만, 사회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 참여를 도모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도 등장한다. 고로 패션 잡지는 패션 세계 외부의 풍경도 신경 써야 한다. 오늘날 패션 잡지는 진보적인 언어들이 소위 ‘섹시하게’ 진열되는 곳이기도 하다. 패션 잡지가 개인의 자아도취만이 넘실대는 ‘나르시시즘의 목욕탕’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구린 좌파’이자, ‘핫하지 않은’ 진보주의자이다. 물론 이러한 틀은 패션 잡지 에디터, 광고주, 디자이너, 그리고 사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이를 통해 촛불집회와 관련한 기사를 읽을 때면 늘 등장했던 ‘의식 있는 여자’라는 말처럼, ‘의식 있는’ 패션 잡지는 이제 전혀 신기하지 않은 아이템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 있는’ 패션 잡지가 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의식이 없는’ 상황을 연출해야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정치적 자극에 민감하며, 되도록 자신이 편안한 상태로 정치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래서 패션 잡지가 만들어가는 시각 문화는 정치를 최대한 ‘정치스럽지’ 않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매우 ‘정치스럽게’ 나아가서 그것에서 나타나는 부담감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잡지가 보통이 아니란 걸 강변하는 수밖에.
그래서일까. ‘멋지다’, ‘쿨하다’라는 표현을 자아내게 하는 패션 잡지는 나름의 ‘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포장용’ 언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노골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노골적인 이 패션 잡지 속 사물의 세계는 어차피 자신이 소비자임을 아는 독자들의 빠른 눈치와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 않은가. 소비자이자 독자인 ‘나’는 넉살좋게 오늘도 ‘뻥’많은 패션 잡지를 유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유영은 ‘경험의 바다’ 안에서 이루어진다. 패션은 미학적이지만 ‘쓸모 있는’ 미학이다. ‘실용’, ‘기능’ 이런 말을 패션은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패션의 언어는 사람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이제 등산을 할 때도 땀 문제를 해결해 줄 기능과 함께, ‘쿨하고 섹시한’ 아마추어 등산가임을 보여주는 외관이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패션의 경험은 기능과 외관을 통해 연출된 이미지를 '착용'하는 것이다. 패션 잡지는 옷을 팔고 가방을 파고 구두를 팔지만, 무엇보다 옷을 통해 할 수 있는 경험, 가방을 통해 할 수 있는 경험, 구두를 통해 할 수 있는 경험을 판다. 내가 미처 해보지 못한 저 수많은 경험은 패션 잡지 속 광고를 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 된다. 나는 ‘핫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명사(celebrity)와 어느 기부 파티에 동석하고, 바다의 알몸이 보이는 푸르른 외딴 섬에서 나를 더 도드라지게 하는 최신 선글라스와 수영복을 입은 채로 일광욕을 한다. 시각을 통해 경험을 상상하고 소비하는 곳. 패션 잡지는 경험이 샘솟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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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한계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진리를 얻어 결국 인생을 달관하게 되는 사람이 물론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한계 지점 이상의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한계 밖에 있는 가능성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습니다(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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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데이즈드> 38호의 서문 격인 편집장 칼럼을 통해 다른 읽기를 시도해 볼 차례다. 이 시도는 <데이즈드>가 던진 언어에서 내 스스로 생각하는 문제를 언급하는 차원 하나, 그리고 이 차원 대신 <데이즈드>가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게끔 도와주는 자들과의 협연을 위해 시도한 귀여운 ‘뻥’전략을 언급하는 또 다른 차원이다.
‘경험의 한계’는 ‘도전하다’라는 말이 쉽게 떠오를 정도로 오늘날 경험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다. 오죽하면 ‘경험 경제’, ‘체험 경제’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사람들은 돈을 주고서라도 경험을 사고 싶어 한다. 거칠긴 하지만 현대인의 삶을 노동과 여가로 구분한다면, 이제 ‘여가도 노동처럼 하라’는 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모토’가 되었다. 여행은 경험의 대표 상품이다. 무엇보다 여행은 ‘의미 있는’ 소비다. 아니, 더 나아가 ‘의미를 요구하는’ 소비 행위가 되었다. 무념무상, 무색무취의 여행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는 그런 여행이 당신의 스펙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젊은이에게 여행이란 ‘일’을 할 자격을 얻는 자소서용 도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접관은 내가 다녀온 여행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피면접자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능력 여부를 평가한다. 꼭 여행만이라고 꼬집을 수 없지만, 요즘 주변인을 둘러보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음에 대해 불안해 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경험하지 않아도 경험한 것처럼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년 아저씨'의 말솜씨는 이제 모두가 갖춰야 할 미덕이다.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중견 집사는 된 것처럼 교회 내 일상을 다 훑고 설명하는 것을 즐긴다.
경험의 '스토리텔링'. 이것은 내가 노동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실력이자 노동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권리로 칭송받고 있다. 물론 나는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험 강박 사회'에 즐겁게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좀 학술적인 표현을 쓰자면, '여가의 식민화'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휴식은 휴식으로 즐기자는 것, 여행은 여행으로 즐기자는 것, 여가는 여가로 즐기자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래서 그 공간만은 백지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어 기어이 나중의 노동에 쓰일 아이디어로 여가를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한다. 오히려 내가 쉬고 있기 때문에 다가오는 의외의 자극들은 마음 속에 메모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그 메모는 쉬는 기간 동안만 활용하고 싶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 메모지는 찢어버릴 것이다. 경험하지 않음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청의 열의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 자체를 바라봐 주는 것. 누군가가 하고 있는 그 경험 자체를 그대로 놓아두는 일을 수긍한다면 각각이 갖는 경험의 차이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냉정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인정하고, 내가 이미 하고 있는 경험의 공간을 더 멋지게 꾸밀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안나윤 편집장이 말한 "경험의 한계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습니다"(16)란 표현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칼럼은 '한계'와 '한정'을 쉽게 뒤섞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이 내가 <데이즈드>의 서문을 통해 하고 싶은 두번째 차원의 견해다. 패션은 사물의 세계이다. 그렇기때문에 '소유'와 '수집'이라는 인간의 행위는 패션과 가까이 한다. 패션 잡지는 소유와 수집을 자극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한정'은 수집가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이 로망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의 공동체'이다. 불안하지 않다면 한정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긴장감은 '한정판'이라고 하는 사물의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러한 긴장감은 누군가가 그 한정된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갖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 구축을 질투하는 '나'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정의 풍경이다.'경제적 인간'의 규범은 '한정'에서 무너진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더라도 살 수 있는 제약. 한정판은 결국 '제약'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다분히 주류 경제학자들이 강변한 학설의 울타리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패션 세계의 수집가들은 더 많은 돈이 들더라도 제약이 주는 긴장감을 사고 소비하는 것 자체가 나름의 희소가치가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최대 효용'을 발휘하고 있음을 설파하는 전도사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복음서를 만들어 '제약을 소비하라'는 핵심 구절을 실천할지도. 고로 '한정천국, 풍요지옥'이란 말을 만들어 백화점 앞에서 전단지를 뿌릴지도. 그러나 이런 전단지를 뿌리는 일도 삼가야 할 것이다. 이 제약은, 이 한정은 '나만'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중요하며, 정보 획득의 순차에 따라 예약은 소비자의 센스이자 지위를 드러내는 권력의 기술이다.
하지만, <데이즈드>38호에서 경험의 '한계'를 고찰하는 철학적 사색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비라는 경험의 '한정'을 도와 많은 물품 대신 지금 당신이 우월해 보일 수 있는 사물 하나를 소비하라는 '한정의 미덕'을 안내하는 페이지만 있을 뿐이다. 경험의 한계가 '한정'상태의 사물을 만난다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패션 잡지는 경험의 찬미자이다.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서 그 라이프스타일의 풍요를 배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데이즈드>는 '한계'와 '한정'을 뒤섞어 또 하나의 경험을 계발해 내는 전략을 펼친다. '한정판'을 산다는 것은 경험의 한계가 아니라, 또 다른 경험으로의 인도이다. 한정판은 사물의 사연을 덧입혀 수집가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실수는 사물의 결함이 아니라 그 사물을 소유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자극하는 광고의 기술이 되었다. (누군가의 경험, 그 경험에 녹아든 사연은 한정판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
<데이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은 패션 잡지의 명암을 다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암'을 혼줄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바닥에서 '뻥'은 애교이자, 미덕이다. 어치피 패션이란 포장이 생명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인기지만, 이 바닥이 말하는 진정성은 '뻥'을 잘 칠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언급하는 '허세'라는 말이 패션 잡지를 수놓더라도, 패션 잡지의 진정성은 그런 '허세'에 얇은 귀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패션 잡지의 애독자로서 '뻥'을 칠거라면 조금 더 '엣지있게' 쳐줬으면 하는 바람은 갖고 있다. 한계와 한정을 깊이 탐색해보는 작업, 그 둘의 차이가 소비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드러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작업은 그동안 <데이즈드>가 보여준 사회에 대한 열의를 감안해 보건대, 충분히 가능한 듯 싶다. 그러면 나처럼 경험하지 않음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의외의 철학적 사색도 하고 페이지에 담긴 물건 하나라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사색의 비용'으로서 말이다. - 끝 -
덧붙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를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엣지 있게' 읽고 싶다고? 그렇다면 서동진 선생의 《디자인 멜랑콜리아》중 '메타현실의 세계로 가는 마법의 거울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의 필독을 권한다. 다음 이야기가 서동진 선생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