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중영화, 특히 '천만영화'로 비롯되는 작품에서 정권과 정치, 시대/당대의 분노와 좌절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려는 건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자 거부하기 어려운 매혹이다. 며칠 뒤 학생들과 '천만영화라는 감정'의 테마로 이야길 나눠야 하는데, 사실 나는 이 확신과 자신이 묻어날 수 있는 테마에서 꽤 오래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지금도 혼란스럽다.
2. 평자가 비평의 초반부에 어떤 무력감이나 곤경을 표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나, 여전히 완료된(그것이 유사-의 형태로라도) 귀결점(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넓히든, 안온한 윤리적 소실점의 제시든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목소리를 '예리하다'는 평으로 보고 싶어하는 도착지로서)이 익숙한 가운데, 그럼에도 그 곤경과 무력함을 숨기지 않는 쪽은 내게 어떤 모험으로 다가온다.
3.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최근에 영화평론가 김경욱이 쓴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국제시장'에서 생긴 일》을 읽고 많이 실망했다. 쉬이 정의하기 어렵지만 소위 '정치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최근 대중영화의 한 장르에서 정작 '정치적 탈색'이 일어나고 있음을 논하는 이 비평집은 평자가 대상으로 삼은 너무 쉽게 정치를, 사회를 들이미는 요즘 영화들만큼이나 비평 또한 그러했다. 차라리 신중함 측면에선, <부러진 화살> <도가니>를 통해 고다르의 관점 "정치에 대한 영화"/ "정치적인 영화"를 숙고해본 남다은의 옛글 <정치영화는 정치적인가>(《에프》기고)가 나았다.
4. 하나 남다은 또한 예술=이데올로기라는 투박한 관점의 개입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대중적 "분노의 드라마"를 고찰하는 데 대한 허술함을 잘 털어놓았으면서도, 자신이 대안적 모델로 삼은 영화들에 내재된 실험성과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그 목소리를 영화의 정치적 실천으로 내세운다. 남다은은 '불온한 실험성', 그 또한 글에서 경계하려 하지만, 여전히 매혹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 특유의 '유사-멸망'의 정서에서 오는 답없는 공간들의 은근한 자기 확신에 대해 쉬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 물으면서 나는 또 방황하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
5. 그리고 여기 노무현을 관통하는 두 영화평론가의 글이 있다. 하나는 <변호인>을 다룬 허문영의 <살균과 표백>이고, 다른 하나는 김선일 피랍 영상을 논한 정성일의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다. 두 글 다 비평가로서 어떤 곤경과 난색, 괴로움을 표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두 글은 토로로 시작하면서 자신이 무얼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은지란 고백이 예상외로 평문의 열쇠가 된다. 어떤 불안과 무력감으로 시작하는 두 글은 결국 선명한 정치적, 윤리적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비평의 테크닉이기보단 둘 다 쓰면서 작동하는 감정들에 자신을 내맡긴 결과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6. 다만 허문영의 글은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가 실화 속 인물을 신화로 가두게 되는 사회적 단계가 어떻게 정치를 삭제할 수 있는가란 차원에서, 정성일의 글은 윤리적으로 역겨운 것을 봄으로써, '봄(seeing)'이 어떻게 정치적 타개책이 아니라, 더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가, 보기를 수행하면서 정치를 행한다고 확신하는 눈이 실은 '탈정치적 눈'이라 주장한 점에서. 여전히 영화와 정치적 독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곤경은, 정치에 대한 살균과 표백이 일어난 영화상의 '재현, 선택, 배제'의 문제임을 의도치 않게 제시해버렸다. 그나마 정성일이 '보지 않음'이란 실천을 정치적 행위이자 윤리적 결단으로 확언하는 바는 투박했지만 필요로 한 지점이긴 했다.
7. 그러나 정성일이 피랍된 김선일의 비디오 영상을 보지 않음을 외치는 것과 다른 맥락일지라도, 여전히 볼 수밖에, 아니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지 않음'이란 이 정치-윤리적 실천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야구팀을 향해 무관중 시위를 보여주자는 헛헛한 결의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8. 지난주 샹탈 애커만의 회고전을 다녀와서 마음에 남는 한 작품으로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보는 중이다. 1999년 발표된 <남쪽>이란 작품이다. 텍사스 주 캐스퍼 시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범죄'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류의 '법의학적 눈'으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사건 이후, 보통 영화들은 사건을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하며, 그 가상의 세심함으로 관객 앞에 '사실이란 허구'를 내놓는다. 그러나 애커만은 재현하기 위해 단서를 찾지 않으며, 증언의 목소리는 관객의 울분과 애도를 동원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애커만이 집요하게 잡아대는 이 '트래킹 숏'에서 비춰지는 길에 백인들에게 죽임당한 제임스 버드 주니어라는 인물을 둘러싼 흔적은 없다. 영화는 속된 말로 '그것이 알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다. 여기서 밀어붙이는 어떤 무심함에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읽고 싶은 유혹과 아니, 삼가야지 하는 유혹이 서로 스며들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9. 그렇다면, 이 어지러운 마음, 뭔가 정의하기 어려운 이 마음은 정치적인 것일까. 다시 돌아와 <국제시장>에서 덕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절삭된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며, 여전히 국가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세대론의 헤게모니 각축전 으로 대중영화에서 정치를 읽어내며, 탈정치적인 것을 색출해내는 이 확신 어린 비평은 정치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정의할 수 없는 아니, 이 좀비 같은 현대인에게서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아니 읽어내기가 두려운 영화의 실험성과 그 비서사적 제스처들, 거기에 내재된 세계관의 징표를 우회하는 비평은 과연 정치적인 것일까.
10. 여전히, 그 어느 쪽이든 확신에 찬 말들 속에서 나는 <남쪽>의 집요한 트래킹 숏이 담아내는 길을 떠올리며,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 '그것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일까?'라고 묻는 영화의 질문에 대해, 영화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본다, 보려고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아는 것에 무심하다. 괘씸하지만 고마운 영화다. 그 괘씸함을 통해 나는 다시 영화를 통한 정치의 발견을 더듬거려본다. 물론 더듬거리기 때문에 확신에찬 대답은 금물이며, 이미 실패를 예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