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
박찬욱 지음 / 삼호미디어 / 1994년 4월
절판


한국판 비디오에는 셀리나가 캣우먼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빠져 있다. "여보, 나 왔어요...아 참, 난 독신이지"의 독백이 처절한 느낌으로 되풀이되고, 평범하 여성의 행복과 희망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파괴되고, 스스로 PVC의 상을 지어 입는 과정들 모두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 진행에 무리는 없으되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 한 묶음이 사라진 꼴이다. 특히, 네온 싸인으로 벽면에 쓰여진 문장 '안녕 hello there'의 두 글자가 깨지면서, '여기는 지옥 Hell Here'으로 변하는 재치는 더욱 아까운 것. 단지 두 시간짜리 카세트에 영화를 구겨넣기 위해 이런 악행까지 서슴지 않는 상흔이니 만큼, 마지막에 붙어 있는 멋진 주제가 [face to face]역시 남아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팀 버튼,배트맨 2]-89쪽

고다르는 평소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였던 [조용한 미국인](조셉 맨키위츠 감독)이 성우들의 더빙 때문에 그 다중언어의 묘미가 사라진 것에 심한 혐오감을 가져왔다. 그래서 그는 제작자의 여비서를 4개 국어 동시 통역자로 설정함으로써 영,불,이, 독어의 뉘앙스를 온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마저도 이태리,미국 개봉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배급업자들이 한 나라 말로 모두 통일시켜 더빙해 버렸던 것. 미국판을 수입해 찍어낸 한국 비디오는 그래서 엉터리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들이 그림에도 손을 댔다는 사실이다. 있을 장면은 다 있으되, 지루함을 피한답시고 몇 초씩 줄여낸 쇼트들 때문에 배우들의 동작은 마구 튄다.[고다르, 사랑과 경멸]-112쪽

시작부터 서부극 팬은 배신 당한다. 광활한 평원의 아이드 스크린 - 물론 한국 비디오로는 TV 연속극과 다름이 없는 종횡비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으로 펼쳐지면 우리는 잠시 느긋하게 그 롱쇼트의 풍경과 곧이어 따라나올 장중한 남성합창을 감상할 준비를 하게 된다.[세르지오 레오네,석양의 무법자]-128쪽

최근에 [스팔타커스]는 오리지널 196분으로 복원, 전미 재개봉되었다. 여기에는 감독 의사와 무관하게 무식한 제작사에 의해 삭제되었던 부분이 추가되었는데, 그 내용은 로렌스 올리비에[크랏수스]가 자기의 노예 토니 커티스[안토나이너스]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이다. 권력의 본질에 관한 큐브릭의 이 야심적인 해부가 우리나라 비디오판에는 당연히 없다.[스탠리 큐브릭,스팔타커스]-148쪽

경찰서 장면을 눈여겨 보면, 짐이 형사의 방으로 옮겨가면서 넥타이 길이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 가장 저질러지기 쉬운 실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튿날 등교길의 짐이 실내에서는 넥타이를 매고 있다가 집밖으로 나올 땐 노타이 차림인 것까지 실수로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수이다. 실내 마지막 쇼트 끝에서 짐은 넥타이를 풀면서 프레임 아웃한다. 다만 화면이 좌우로 잘려나가는 바람에 그 동작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부르주아 가정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짐의 반항심을 표현하는 중요하는 코드가 비디오업자의 무지에 의해 파손당한 경우, [반항]은 무엇보다도 시네마스코프 미장센의 탁월함으로 유명한 작품이므로 마땅히 '우편함'처리를 했어야 옳았다.[니콜라스 레이, 이유없는 반항]-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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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자유주의자들 - 요한복음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1
김진호 지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12월
품절


특히 현대신학은 <요한복음>의 종말론적 입지를 '실현된 종말론' 혹은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말론적 신앙담론과 세속적 근대사회 사이의 어정쩡함을 벗어나는 신학 내적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복음서는 '현대신학의 꽃'이 되었다.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가장 빛나는, 현대화된 신학적 의미가 넘쳐나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28쪽

"로고스가 '살덩이(싸륵스)가 되었다"(14절a), '몸'(소마)이 아니라 살덩이다. 성/승화된 혹은 성/승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화된 몸이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적나라함 그 자체다. 반면 '소마'는 미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육체/존재를 가리킨다. 예컨대 영웅의 몸, 예언자의 몸 등과 같은 것이다, 허나 어떤 영웅인들, 어떤 위대한 예언자인들 그 속이 곪아터지지 않은 육체를 갖고 있으랴. 다만 그 시대의 언어가 그렇지 않은 듯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31쪽

그런 점에서 '살덩이'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전제한 존재의 실체적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이상화된 궁극인 '로고스'와 결코 이상화될 수 없는 현실의 존재인 '살덩이(싸륵스)' 사이에는 공유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로고스는 싸륵스를 통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로고스의 육화('소마'화)를 자부했다. 또 장로와 예언자와 감독과 교사 등, 지도자들은 '승화된 육체'였다. 그렇게 믿었다. 궁극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에서 파생된 무엇이라는 일종의 '잠재적/예(31)비적 궁극'이었다. 그렇기에 분쟁이 있을 때 교회는 분쟁의 조정자가 될 수 있었고, 지도자들은 갈등의 해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재판관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한 예비적인 거룩한 몸이었다. 신이 덧입혀짐으로써 그 육체가 '예비적인 거룩의 몸'이 된 것이다. -31,32쪽

한데 실재 그런가. 도대체 누구의 몸이,감독인들 장로인들 예언자인들 교사인들, 타인과는 조금이라도 거룩한 무엇이 있으랴? 실재를 들여다보면 한시라도 추잡한 욕구를 떨칠 수 없는 약한 육체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육체가 싸륵스이면, 다른 누구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육체, 승화된 소마를 주장하는 이(들)가 있다.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이 말은 그런 주장을 부끄럽게 한다. 그런 주장의 효력을 절멸시킨다.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빌려서 상투적인 신조적 나열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서언은 바로 이 대목에서 통념을 전복시킨다. -32쪽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를 지시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요한복음'은 이런 대비법에서 한 편의 메시아주의가 가짜 메시아주의임을 강변하고 있을 뿐, 자신의 메시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44쪽

주류 사도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기의식에도 불구하고, 요한계 공동체는 유대교를 모방하여 독자적 발전을 기획하는 주류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추세를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운동은 로마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혈통적,육정적,남성주의적 메시아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대중적 구원담론이 패권주의와 겹쳐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는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모두를 비판하는 제3자로서 남아 있으려 했다.그것을 '자발적 소수자'가 되려는 선택이다. 그것은 권력 게임의 정당한 비판자로 남아 있기 위함이다.또한 자신들도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한 그 강렬한 욕망, 그 권력 본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체하려는 것이다.-49쪽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의 합리성이 닮음꼴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아무튼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대단히 획일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배타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다. 미궁 속에 가두어둔 자신의 괴물적 속성은 이들 이질적인 존재를 희생양 삼아 존재하는 우리 내면의 야수성인 셈이다.이질적인 약자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르스는 우리 문명이 낳은 우리 자신의 괴물적 속성인 것이다.-59쪽

한데 역사적 교회는 영을 억압하였다. '영의 정치'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였고, 순화된 영만을 주변부로 포용하였다. 오늘날 주변부에서 일어나 새로운 중심을 형성할 기세로 확산되는 이른바 성령파 그리스도교는 영의 제도화이지 제도를 넘어서는 '영의 정치'가 아니다. 아무튼 교회가 영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자기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신앙 내적 잠재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교 신학은 영이 부재한 교회의 변증론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을 넘어서고자 할 때조차도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시도하지 못해왔다.-69쪽

'축도한다'는 표현을 들으면서 예수의 축도 행위가 빵을 불리는 마술적 능력을 낳았다고 연상하였을 것이다. 한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빵을 받아먹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렇다면 예수가 빵을 늘리는 마술을 행했다기보다는 작은이에게서 나온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 제각기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내놓아 서로가 먹게 되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95쪽

그 거대한 담론들은 고통 받는 이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체계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115쪽

확실성에 관한 기억, 그 환희어린 '각'의 체험은,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순 명확하게 그 색깔을 드러내리나는 믿음이 그 환희어린 정체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선명함 속에 인류의 만행이, 인간이라는 종의 그 잔혹성이 존재의 속성으로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143쪽

안병무 선생이 촉발한 이 복음서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신랄하다. 왜 우리 신앙은 자신도 모르게 배타적인 심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가,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241)오를 낳고 싸움을 낳고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문제시하는가,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고, 왜 대안적 신앙에 대한 바람을 그토록 강력하게 타전하고 있는가.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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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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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中-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협소하고도 규범적인 의미의 '교양culture'을 문화인류학적 의미의 '문화'culture의 포괄적인 맥락으로까지 확대하지 않는다면,그리고 극히 세련된 대상에 대한 미려한 취향을 음식 맛에 대한 기본적인 취향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문화적 실천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21쪽

때로 전형적인 '현학적'용어로 예술작품에 대한 '독해'라고 불리는 행위의 논리가 위와 같은 대립의 객관적인 토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경우 소비는 의사소통과정의 한 단계 즉 판독 또는 해독 행위로서, 이를 위해서는 암호나 약호에 실천적으로 통달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은 지식 또는 개념 즉 단어들에 의해 측정되며, 지식이나 개념들은 보이는 것들을 명명하며, 따라서 지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예술작품은 오직 문화적 능력, 즉 해독의 기준이 되는 약호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고 오직 그런 사람의 관심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3쪽

회화나 사진에 대한 대중적 평가는 칸트 미학과는 대극에 놓여 있는 '미학'(이것은 실제로는 에토스이다)에서 유래한다. 미학적 판단의 특수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칸트는 기쁨을 주는 요소와 희열을 가져다주는 요소, 더 일반적으론느 대상을 주시하는 말 그대로의 미학적 특징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요소인 무사무욕과 선을 규정하는 이성의 이해관심을 구분하려고 노력한 반면 민중계급은 모든 이미지가 분명하게 하나의 기능을 하기를(단지 기호로서만 가능하더라도 마찬가지다)바라며, 도덕규범이나 기꺼움 등을 참조로 하여 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흔히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난하건 칭찬하건 이들의 음미는 항상 윤리적 토대를 갖고 있다.-28쪽

취향과 문화 소비를 연구하는 과학은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침범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시작된다. 즉,음악이나 음식,회화,스포츠,문학과 헤어스타일에 대한 선호도처럼 얼핏 보기에는 전혀 같은 잣대로 잴 수 없어 보이는 '선택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 관계를 이해가능한 형태로 드러내려면 정통 문화를 고립무원의 독립된 우주로 분리시키고 있는 성스러운 경계선을 없애버려야 한다. -30쪽

제1장 문화귀족의 칭호와 혈통 中 - 측정된 능력이 학교 교육제도에 의해 공인될수록, 그리고 측정기술(39)이 '학교적일수록' 수행 능력performance과 학력자격 titre scolaire간의 관계는 밀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규 학교교육을 받은 햇수를 표시하는 지표로 기능하는 이 학력자격은 가족으로부터 상속되는가 아니면 학교에서 획득되는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문화자본을 완벽하게 보증해주며, 이 문화자본의 지표가 된다.-39쪽

학력 귀족이 보기에 '교양인'의 본질에 스스로의 삶을 일치시킨다는 이야기는 곧 교양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 교양인이라는 말 속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가 되는데,각 칭호의 위광이 높아질수록 이러한 조건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학교 교육체계가 정통적인 독학을 목표로 제시하고 그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주는 것은 전혀 역설적인 일이 아니다.-58쪽

'일반 교양'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이러한 정통적인 독학은(각 부문,과목,전공 또는 등급간에 존재하는) 교육의 위계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그만큼 강력하게 요구된다. '정통적 독학'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는 모순적인 표현인데,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높이 평가되는 학력자격증 소지자의 '자유 교양'과 독학자의 비정통적인 자유 교양 간의 종적인 차이를 가리키 위해서다.-58쪽

비정통적 자유 교양의 사회적 부가가치는 오직 기술적 효율성의 정도만큼만 가치화되며, 따라서 사적 공간이나 가정이라는 우주를 벗어나 공인된 능력과 경합을 벌일 때마다(무자격 의사에 대한 제재처럼) 법적인 제재에 노출된다. 그러한 교양이 독학에 의해 축적된 지식이건, 아니면 요리법이나 식물재배법, 공예가의 기술 또는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58)할 수 없는 전문지식처럼 실천 속에서 또 실천을 통해 그리고 특히 특정한 실천을 주입하고 그러한 실천의 획득여부를 공인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의 통제 밖에서 획득하는 '경험'이건 상관이 없다.따라서 이것은 공식적으로 특수한 능력을 보장하는 학위증(고급기술자 자격증을 예로 들 수 있다)의 암묵적인 규정 속에 명기되는데, 이러한 자격증은 그 소유자가 '일반 교양'을 즉 자격증의 권위가 보장해주는 만큼 폭넓은 일반 교양을 소유하고 있음을 실제로 보증해준다.-58,59쪽

학력이나 등급 구분에 의한 공식적 차이는 분류되는 각 개인들에게 누구나 그러한 차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실제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또는 재강화하는)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실제적인 존재를 공인된 존재와 일치시키려는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일기를 쓰거나, 진한 화장을 하는 일, 극장에 가는 일, 또는 댄스홀에 가는 일, 시를 쓰거나 럭비를 하는 일 등 제도의 명확한 요구사항과는 전혀 무관한 행동들도 다양한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되는 암묵적인 요구로서 교육기관 안에 할당된 위치 안에 각인될 수 있다. -60쪽

이러한 매개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교사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대와 동료집단의 압력을 꼽을 수 있는데, 다시 이들의 윤리적 성향 자체는 교육기관에 의해 도입되고 재강화되는 집단적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할당효과와 이 안에 담겨있는 신분배분 효과는 분명 학교 안에서는 가르치지도 않고 심지어는 명확하게 요구하지도 않지만, 신분(60)이 가리키는 위치에 부여되는 속성과 그러한 위치가 부여해주는 각종 자격증이나 또는 이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 등으로 구성된 문화적 실천을 성공적으로 강제하는 데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60,61쪽

의문의 여지없이 이러한 논리는 특수한 부류의 작품들, 즉 학교의 기본도서목록에 의해 공인된 문학작품이나 철학저서와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획득한 정통적 성향이 예를 들어 아방-가르드 문학처럼 그보다는 덜 정통적인 작품이나 또는 영화처럼 그보다는 학교의 공인을 적게받는 영역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중략)영화감독의 이름처럼 '쓸데없는'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수입이나 주거장소 그리고 나이에 따라 크게 빈도수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영화관람보다는 학력자본과 밀접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61쪽

영화감독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영화관람보다는 문화자본고 한층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중략) 영화관람도 학력자본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만(하지만 박물관 관람이나 연주회에 가는 일만큼 그렇게 크(62)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소비형태의 차이만으로는 다양한 학력자격증 소지자간에 나타나는 영화감독에 대한 지식의 차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결론은 재즈,만화,추리소설 또는 공상과학(sf)소설처럼 이제 막 문화적으로 성별되기 시작한 장르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62,63쪽

이러한 능력은 본질적으로는 일부 '영화광'이나 '재즈 팬들'이 몰두하고 있는 '아카데믹한' 노력(예를 들어 영화의 판권 안에 언급되는 내용을 카드식 상자에 일일이 베껴놓는 일을 들 수 있다)을 통해서는 획득할 수 없다. 이런 능력은 흔히 가정이나 학교에서 정통 문화를 몸에 익히거나 주입받으면서 획득한 성향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의식적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 결국 이러한 성향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련의 지각도식과 평가도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도 이항가능하며, 따라서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다른 문화적 경험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로 대하도록 하며, 각 경험을 상이하게 지각(64)-64쪽

하고, 분류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똑같은 영화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버트 랭커스터가 나오는 서부 영화'라고만 이야기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존 스터게즈 감독의 초기작품'또는 '샘 펙킨파의 최신작'이라고 말한다. 이때 어떤 부분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따라서 제대로 영화를 보는 올바른 방식을 정할 때, 각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계급 전체("그 영화 봤니?"나 "그 영화는 꼭 봐야 돼"하는 식의 말을 통해 지침을 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그리고 각 집단에 의해 정통적인 분류 방법과 거명할 만한 예술적 향유에는 반드시 따라다니게 되는 담론을 생산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비평가 집단의 협력을 통해 지침을 얻는다. 따라서 학교에허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문화적 실천들이 학력자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변화하는 이유 또한 이런 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65쪽

극히 헌신적인 '영화광'은 문화자본을 물려받은 쁘띠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감독이나 영화배우에 대한 이들의 지식은 해당 영화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훨씬 넘어선다. 공무원의 약 31%가 보지도 않은 영화배우의 이름을 거명했으며, '의료보건 서비스직 종사자'의 약 32%가 보지도 않은 영화감독의 이름을 거명했다. -64쪽

작품이해와 평가는 분명히 소유자의 의도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지만, 이 의도 자체는 이미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실천적 규범과 이러한 규범에 적응할 수 있는 소유자의 능력 즉 예술적 훈련의 산물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예술작품을 '순수하게'예술 작품 자체로 지각한다는 이상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 영역에 자리잡게 되는 진정 미학적인 정통성을 구성하는 원리들이 공표되고 체계화된 결과란 점을 간파하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 미적 지각 양식은 '순수한'형식을 획득했지만 이 형식 자체가 이미 예술 생산양식의 특정한 상태에 조응하고 있다. 기능에 대한 형식의 절대적 우위.-68쪽

'교양 있는'관람객들의 구별distinction에 관심을 갖는 것은 외적인 요구(이것은 수수료라는 형태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에 맞서 자신의 자율성을 고수하고, 기능보다 자신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고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을 통해 순수한 형태의 예술로 나가도록 이끌어주는 형식을 우선시하려는 예술가의 관심(생산의 장의 자율성이 높아질수록 이것도 증가하게 된다)과 비견될 수 있다.-72쪽

대중 '미학'中 - 문화자본이 전혀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분파들이 모든 종류의 형식 실험recherche formelle에 대해 갖게 되는 적대감은 연극과 회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이 두 부분보다 훨씬 더 정통성이 없는 사진과 영화에서는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73쪽

사진의 가치는 각 사진이 전달하는 정보에 대한 관심과 이러한 정보전달 기능을 명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정도, 간단히 말해 정보의 가독성에 의해 측정되는데, 이 가독성은 그 자체가 정보의 의도나 기능의 가독성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각 정보에 대한 평가는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표현상의 적합성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사진에는 제목이 붙어있으리라고 기대되며,또는 실제로 사진에는 표제가 붙어있어 사진으로 찍힌 내용이 의미하려는 내용을 제대로 드러내고 전달해주는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준다. -90쪽

'통달한 사람'connaisseur의 능력은 문화획득 도구를 무의식적으로 완숙하게 다루는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대상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통해 이러한 능력을 획득하며,바로 이것이 작품과 친숙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 능력이 바로 기예로 이것은 사유방식이나 생활양식처럼 결코 지침이나 처방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실제적인 숙련을 의미한다.-132쪽

모든 제도화된 학습은 어느 정도의 합리화를 전제하는데, 이것은 소비되는 재화와의 관계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유미주의자의 지고지순한 쾌락은 얼마든지 개념규정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초심자'의 아무 생각 없는 쾌락(이것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눈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찬미된다)만큼이나 쁘띠 부르주아와 '벼락부자'parvenu의 소위 무쾌락적인 사유와도 대립된다. 이들은, 막상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정말 시시콜콜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화광처럼 항상 경험보다는 지식을 우위에 놓으며, 작품에 대한 논의를 위해 작품감상을, 다시 말해 훈련askesis을 위해 감각aisthesis을 희생하는 금욕주의적 타락의 형태에 노출되어 있다. -133쪽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의복,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 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노골적인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취향에서는 주간여성지나 '이상적인 가정'을 단골 주제로 다루는 잡지처럼 정통적이지 않으면서도 정통성을 실현하기 위한 심급들instances말고는 취향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나 요구를 찾아볼 수 없다.-155쪽

문화적 자기투자(예를 들어 독학)-163쪽

구식 독학자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문화에 대한 경외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실제로 이 경외감은 어릴 적에 급격하게 정통적인 학교교육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항상 문화에 대해 열렬한, 하지만 터무니없는 숭배의식을 갖고 있지만, 정통 문화의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숭배를 기이한 충성서약으로 생각하게 된다.-165쪽

자신의 창의적인 노력에 의한 철저한 사숙이나 독학을 통해 너무 이른 시기에 야만적으로 단절되어버린 궤적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려는 독학자들이 정통 문화와 그 문화의 담당자인 교육기관 당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는,배제된 사람들로 하여금 본인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줄 수 있는 체계의 낙인이 찍혀 있다. 이와 반대로 신식 독학자들은 흔히 교육체계에서 상당히 놓은 수준에까지 적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처럼 오랜 기간 고생만 하지 제대로 대가를 돌려받지 못하는 재학기간을 통해 정통 문화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서서히 미몽에서 깨어나, 이 문화와 친밀한 동시에 환상에서 깨어나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멀리서 경외감을 감추지 못하는 구식 독학자들의 태도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물론 구식 독학자들처럼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자기 투자를 하지만, 전혀 다른 영역 즉 학교 교육체계에 의해 외면당하고 무시되는 영역에 투자한다.-166쪽

고전음악이나 재즈, 연극 또는 영화 등에 대한 특수한 능력은 상이한 시장 즉 가정, 학교 또는 직업시장이 그 능력을 축적하고 응용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기회의 크기에 따라, 다시 말해 각 시장이 이러한 능력의 획득을 강화하고, 새로운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이윤을 약속하고 보증해줌으로써 그러한 능력을 획득하도록 촉진시킬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170쪽

영화나 재즈, 더욱이 만화나 SF 소설 또는 추리소설과 같은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거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172쪽

분석도구에 대한 성찰적 분석은 인식론에 특유한 섬세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얻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것이다. 실증주의적인 태만함에 몸을 맡기면 확인된 관게의 측정조건 자체를 문제시하는 대신 그러한 관계의 강도를 소극적으로 검증해보려는 노력으로 그치고 말게 된다.측정 조건 자체를 문제시하는 경우에만 다양한 관계들의 상대적 강도를 설명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184쪽

문화 능력은 각 능력의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인 사회적 시장에서 획득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장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되며, 따라서 문화를 둘러싼 모든 투쟁의 목표는 행동양식을 통해 획득조건의 몇몇 특수한 요인들 쪽으로, 즉 특수한 시장의 특징이 뚜렷이 새겨져있는 생산물에 가장 유리한 시장을 만들어내려는 쪽으로 집중된다. 따라서 오늘날 '대항문화'라고 불리는 것은 학교시장의 제약요소(신식 독학자들만큼은 자신감이 없는 구식 독학자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의 특징을 미리 규정짓는 이러한 제약요소에 그대로 복종하고 만다)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유형의 독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187쪽

이들은 전혀 다른 시장을 창조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사교계나 지식시장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독특한 서열화와 성별을 행하는 기관과 행위자들을 갖고 있는 이 시장은 문화상품 시장을 완벽하게 통일함으로써 학교시장이나 또는 최소한 극히 '학교적인'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능력과 행동 방식의 평가원리를 강요하는 학교 교육체계의 의도에 도전할 수 있다.-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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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엄벌하다
로익 바캉 지음, 류재화 옮김 / 시사IN북 / 2010년 5월
품절


지난 20여 년간 제1세계 및 제2세계에 이르는 경찰, 법원, 감옥의 부흥과 번영은 신자유주의 혁명의 결과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어떤 장애물이든 제거하며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저임금 노동시장의 규제 완화는 복지 제한 조치를 필연적으로 가져왔고, 이것이 다시 불안정 고용을 강화해 후기산업사회의 신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냈다.-26쪽

미국 형벌 형식의 세계적 순환을 추적하다 보면 미국 예외주의라는 개념적 덫을 피할 수 있게 되며,사회 스펙트럼은 정치적,경제적 굴성에 영향 받기 쉬워 그에 따라 형벌국가으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메커니즘을 강조하는 '최신 모더니티'의 애매한 논리도 피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미국 형벌국가의 성장을 특이한 사례로만이 아니라 악성 사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의 불안을 형벌로서 통제하고, 그것을 가속화하고 강화하는 다수의 요소들 때문이다. 가령 기술관료 현장의 파편화, '개인의 책임성'을 주문처럼 외우는 도덕적 개인주의, 전체적으로 열악해진 노동 환경, 계급 및 인종 간의 심한 차별화, 최저 임금 노동에 굴복하는 흑인 계층 및 도심 게토화, 복지 축소 및 형벌(29)강화 수렴 프로그램에 적절한 타깃이 되는 게토.-29,30쪽

이 책에서는 연계-발전하는 복지(31)및 형벌 제도 문제를 공공정책의 도구적,표출적 기능이라는 하나의 이론 틀에 담음으로써 처벌의 정치경제라는 표준 매개변수를 버린다. 대신 지난 사반세기 동안 선진국가의 사회복지 및 형벌 정책의 변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관료적 분야'개념에 따라 논지를 전개한다. 인색한 워크페어, 후덕한 프리즌페어는 도덕행동주의라는 철학 아래 빈자를 훈련하고 감독하는 단 하나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안을 만들어냈다.-31,32쪽

윌리엄 브래튼은 과거에 썼던, 그 지역에 연고가 있어 주민을 잘 아는 경찰이 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지역 경비'방식이나 문제 해결 중심형 경찰 활동과는 정반대인 불관용형 경찰 활동 방식을 택했다. 개별 범죄자보다는 집단을 소탕하고 각종 특수 무기 및 장치들을 개발하고 재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런데 그의 진짜 혁신은 다른 데 있다. 경찰의 전통 유산인 둔한 보신주의 관료 체계를 혁신한 것이다. 그는 당시 최신 경영 이론이던 '리엔지니어링'과 피터 드러커의 '목표관리론'을 적용했다. 우선 경찰 조직의 군살을 빼기 위해 서장의 4분의 3을 퇴직시켰다. 또한 서장 평균 나이를 60대에서 40대로 낮췄다. 그는 경찰을 '이윤 센터'로 변모시켰다.여기서 이윤이란 범죄 등록 건수를 감소시킴으로써 발생한다. 이 단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치안 업무 성적표를 만들었다. -47쪽

국가가 비용을 들여서라도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면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안의 사회적,경제적 원인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책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책임은 이제 사회보장이나 경제 정책의 영역에서 철수한 국가가 아니라 그런 "반사회적 행위가 횡행하는"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여 앞으로는 자기 책임 하게 자기가 사는 사회를 자신의 손으로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51쪽

톨레랑스 제로 정책의 타깃은 노동시장에서 밀려나고, 복지국가한테도 버림받은 빈민층이다. 이들 빈민층은 경찰이 그들을 들볶는 데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마구 쓰면서 법원은 소송이 급증하는 바람에 예산이 없어 쩔쩔매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불균형 현상을 바라보면서 국가가 실천하겠다는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의아할 것이다.-60쪽

사회계급론은 말소되고, 이제 '능력자'와 '무능력자','책임자'와 '비책임자'간의 대조적인 기술적,도덕적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이제 개인의 인성 차이, 즉 인지 능력(아이큐)의 차이-머레이와 헤른슈타인에 따르면-에 따른다. 그러니 이런 개인적 사안에 공공복지 정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울트라 리버럴한 시각은 신기하게도 부권국가의 독단주의와 딱 맞아떨어진다. 부권국가는 기본적 시민성을 준수하도록 독려해야 함과 동시에 이를 원치 않는 자들에게는 낮은 임금과 처우를 부여하는 일까지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복지 업무와 경찰 업무는 불량하고 무능한 노동자 계층 인자들의 통제 및 재정비라는 논리를 순순히 따랐다.-68쪽

사회보장 정책 개혁 이후 능력 위주 사회에서 능력자와 무능력자라는 정체성은 이제 새로운 사회 계층 질서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의 계층적 차등을 가린다. 안락하고, 책임감 다하는 생활을 하는 자가 '부자'라 지칭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빈자'라 지칭된다. 이런 정체성은 어떤 사회 구조를 개혁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새로운 정책으로는 수입이나 계급이 아닌 인성 자체가 한 사람의 자질과 능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단층은(70) 부자와 덜 부자인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있다.-70,71쪽

'감옥-복지-상업 복합체'는 막 탄생한 자유 형무국가의 선도자다. 그 임무는 새 경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인구를 감시하고 구속하며, 필요하면 처벌하고 무력화하는 것이다. 노동 성별 분할에 따라 형벌 부분은 우선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원조 및 후원 감독 부분은 이 남자들의 여자와 아이를 대상으로 한다. 이 혼합 양식 제도는 미국의 정치적 전통을 따라 공공,민영 분야의 상호 침투가 그 하나의 특징이라면, 국가 차원의 도덕적 재무장, 그러지 않으면 탄압과 낙인찍기, 그 두가지의 융합이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120쪽

원치 않는 잉여 인간을 창고에 쟁여 넣기, 후기산업사회 프롤레타리아를 조(192)련하는 수단,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관리,통제하는 도구적 수단, 물리적 수단으로 감옥을 보는 것이 마르크스적 입장입니다. 반면 피에르 부르디외까지 이어져 오는 에밀 뒤르켕 학파들은 감옥을 통제 도구라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의 도구, 즉 소통의 도구, 표상화의 도구, 연극화의 도구로 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좋은 시민인 '우리'와 나쁜 시민인 '그들' 사이에 상징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연극적 장치로 봅니다.-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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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바리에테 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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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는 근대문학 이후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 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또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닙니다.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43쪽

내 자신이 일본에서 문학비평을 해온 경험으로 말하지만,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끝났다는 실감이 있습니다. 소위 버블,소비사회,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던 시기입니다.-46쪽

고진이 녹색평론 김종철에게, /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가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나는 동감을 표했습니다.-49쪽

이제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단순한 읽을거리였던 '소설'에서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르지만,보다 인식적이고 실로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소설은 '공감'의 공동체,즉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의 기반이 됩니다.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을 형성하는 것입니다.-51쪽

근대소설은 말하자면 음성이나 삽화에서 독립한 것인데,그것은 글쓴이에게도 독자에게도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청각적 미디어가 나오게 되자,그런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58쪽

일본적 스노비즘은 역사적 이념도(72)지적이고 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생활양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통지향도 내부지향도 아니며 타인지향의 극단적인 형태인 것입니다.거기에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습니다.-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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