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혁명
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 성은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구판절판


2장 문화의 분석 중 일부를 옮겨본다 / 문화의 정의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는 '이상'이라는 정의로서,문화는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가치의 견지에서 인간의 완성 상태 혹은 완성 과정이다.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문화의 분석은 본질적으로 삶과 작품들 속에서 영원한 질서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는, 혹은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대해 영속적인 관련을 갖는 가치들을 발견하고 묘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록'이라는 정의로서 ,문화는 세밀한 방식으로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다양하게 기록하는 지적이고 상상력이 깃든 작품의 총체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문화의 분석은 비평활동이며, 이를 통해서 생각과 경험의 본질, 언어의 세부 사항들, 이러한 것들이 작동하는 형식과 관례 등을 묘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83쪽

그러한(83)비평은 '이상'의 분석,즉 '이 세상에서 생각되고 씌어진 것 중 최상의 것'(매슈 아놀드의 말)의 발견에서부터,전통에 관심을 두면서도 연구되는 특정한 작품(연구의 주된 목적은 작품을 명확하게 해주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강조하는 과정을 거쳐, 특정한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 그것들을 그 작품들이 출현했던 특정한 전통이나 사회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역사적 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84쪽

마지막으로 문화에 대한 '사회적'정의가 있다. 이 경우 문화는 예술이나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제도나 일상적 행위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표현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문화의 분석은 특정한 삶의 방식,특정한 문화 내에서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가치들을 해명하는 것이다.그러한 분석은 이미 언급한 역사적 비평을 포함할 것이며,이때 지적이고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은 특정한 전통이나 사회와 연관되어 분석될 것이지만,문화에 대한 다른 정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문화'가 아닌 삶의 방식의 요소들 - 즉 생산의 조직,가족의 구조,사회관계를 표현하고 지배하는 제도들의 구조,그 사회구성원이 의사소통하는 형식들-에 대한 분석도 포함할 것이다. -84쪽

또한 그러한 분석은 '이상'에 대한 강조,즉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혹은 적어도 고상하고 비천한 의미와 가치들을 발견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명하고자 하는 '기록'적 측면에 대한 강조를 거쳐,특정한 의미와 가치들을 연구함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등급표를 만(84)드는 방식으로 비교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변화 양식을 연구하여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하나의 전체로서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법칙들이나 경향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84,85쪽

과거의 시대를 연구하는 데서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의 특성을 체감하는 것-다시 말해서 특정한 활동들이 하나의 사고방식,생활방식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삶의 조직에 대해 기본 윤곽 정(91)도는 꽤 복원할 수 있다. 심지어 프롬이 '사회적 성격'이라 부르는 것, 혹은 베네딕트가 '문화의 패턴'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복원할 수 있다. 사회적 성격-행동과 태도의 가치체계-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배운다. 그것은 이상인 동시에 양식이기도 하다. 문화의 패턴은 하나의 뚜렷한 조직,하나의 생활 방식을 만들어내는 이해관계와 활동들의 선택과 설정이며,그에 대한 특수한 가치 부여이다.그러나 이런 것들도 우리가 복원해내면 보통 추상적인 것이 된다.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또다른 공통요소,그러니까 성격도 패턴도 아닌,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이 체험된 실제적 경험에 대한 감각까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 실제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사실 우리는 어떤 시대의 예술에서 그러한 접촉을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다. 그 예술을 그 시대의 외면적인 성격과 대비해보고 개별적인 변종들을 감-91쪽

안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쉽게 자리를 정할 수 없는 중요한 공통의 요소가 있다.나는 이것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자신이 공유하고 있는 생활 방식에 대한 비슷한 분석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특수한 감각,거의 표현할 필요도 없는 특정한 경험의 공동체를 보며,그것을 통해서 외부의 분석가도 묘사할 수 있는 우리 생활 방식의 특성들이 관통하면서 그들에게 특수하고도 개성 있는 색깔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91쪽

(중략)감정의 구조(the structure of feelings)이다. 그것은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 활동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의 구조는 한 시대의 문화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조직 내의 모든 요소들이 특수하게 살아있는 결과이다. -93쪽

새로이 조직되고 있던 노동자들이나 중산층 개혁가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전혀 새로운 제도 속에서 다른 공동체 이미지, 다른 형식의 관계들을 서서히 창조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그만큼 중대하게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과 제도를 통한 이러한 활동을 무시하고서는 문화의 창조적 부분도 이해할 수 없다. 산업과 제도는 주요한 예술이나 사상만큼이나 강렬하고 가치있는 인간과 감정의 직접적 표현이기 때문이다.-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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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문화 현대문화론선 19
마이크 페더스톤 지음 / 현대미학사 / 1999년 2월
품절


요약하자면,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고, "왜 어떻게 우리가 특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강력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포스트모던 개념과 포스트모던의 출현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던 조건을 탐구해야 한다.-10쪽

1장: 모던과 포스트모던: 정의와 해석 중 일부 / *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 이 용어의 의미쌍은 시대적인 용어임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던에 대한 언급은 시대적 변화나 명확하게 조직화된 원리를 지닌 새로운 사회의 출현과 연관된 '모던과의 단절'을 뜻한다. 이는 보드리야르,료타르,제임슨의 저서에서 확인가능한(18) 질서의 변화이다(19)(켈너,1988)9 / 제임슨(1984)은 좀더 제한적으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시기화개념을 사용하지만,포스트모던을 '시기적 전환'으로 인식하기를 꺼리고,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2차대전 이후에 기(19)반을 둔 자본주의의 세번째 단계인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혹은 문화적 우세종이라고 설명한다.(20)-18쪽

*모더니제이션-포스트모더니제이션 : 이 용어쌍은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사의에 불편하게 끼여 있다. 모더니제이션은 전통사회구조와 가치에 대한 경제적 발전효과를 지적하는 발전사회학에서 사용되었다. 이 이론은 산업화,과학과 기술의 성장,근대국민국가,자본주의적 세계시장, 도시화와 다른 인프라구조에 기반하는 사회발전 단계를 설명한다.(이러한 쓰임은 위에서 논의했던 첫번째 의미의 모더니티와 강한 유사점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특정한 문화변화는(세속화와 자아발전의 중심인 근대적 정체성의 출현) 근대화과정에서 야기된다는 느슨한 토대-상부구조 모델을 가정하였다. 만약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제이션에 관심을 갖는다면,특정 사회과정과 제도적 변화에 공존하는 세부적인 개요가 이론화되어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22쪽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용어는 포괄적인 문화적 복잡성을 나타내고자, 모더니즘은 '모더니티의 문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티가 출현하는 문화'로 쓰였다. -25쪽

변화는 (1) 예술,지식,학문분야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특수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경쟁적인 투쟁에서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는 이론화,재현,유포방식의 변화) (2) 내적,초-사회적 수준에서의 집단과 계급 분파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균형과 상호독립성의 광범위한 전환과 관련되는 상징상품의 생산,소비,유통방식의 변화이다(3) 위에서 검토한 일련의 변화과정의 결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지배체계를 사용하고 새로운 정체성구조와 발전을 지향하는 상이한 집단의 일상적 실천과 경험의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몇년동안 문화에 관한 관심은 급속하게 증가해왔다.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의 주변부에 속했던 문화는 오늘날 중심부로 부상했으며,사회과학과 인문과학간의 장벽은 없어지고 만다(페더스톤,1988)-30쪽

2장 소비문화 이론 -첫번째 관점은 소비문화는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팽창에 따라 구매와 소비를 위한 소비상품과 소비장소의 형태로 막대한 물질문화의 축적을 야기하였다고 본다. 그 결과 현대 서구사회에서 여가와 소비활동의 두드러진 증가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일부에게는 인류평등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으로 환영받지만,다른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조정 능력이 증가해 사회구성원을 유혹함으로써 보다 나은 사회관계의 대안을 봉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두번째 관점은 보다 엄격한 사회학적인 견해로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상품에서 파생한 만족은 차이의 연출과 유지에 따라 지위와 만족이 달라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접근과 연관된다. 여기서의 초점은 사회적 연대나 차이를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상품을 사용하는 상이한 방식에 있다. 세번째 관점은 소비에 따른 정서적 즐거움의 문제, 즉 소비문화의 환상과 욕구, 직접적인 신체적 흥분과 심미적인 즐거움을 다양하게 일반화하는 특정한(31)소비국면과 관련 -31쪽

보드리야르 이론의 특징은 소비가 기호의 적극적인 조작을 수반함을 보이려고 기호학을 강조한 것이다. 기호는 상품과 결합하여 '상품-기호'로 생산되는데 이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핵심적인 특징이다. 예를 들어 매체와 광고에서 기호의 조작을 통한 기표의 자율성은 기호가 대상물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결합관계의 복수적 사용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보드리야르의 기호학적 상품논리의 발전은 마르크스이론의 관념주의적 왜곡과 유물론적 강조에서 문화에 대한 강조로 필연적으로 이동한다. (중략) 후기저작의 강조점은 생산에서 이미지와 실재와의 차이를 부식시키는 매체를 통한 기호, 이미지, 시뮬레이션의 끊임없는 반복재생산에 있다. 그리하여 소비사회는 사회생활이 비규제적이고,사회관계가 보다 가변적이며 안정된 규범으로 구조화되지 못함에 따라 본질적으로 문화적이 된다. 기호의 과잉생산과 이미지, 시뮬레이션의 재생산은 안정적인 의미의 소멸과 끊임없는 기묘한 병력의 흐름으로 대중을 현혹하고 보는 사람을 안정된 감각너머로 유도하는 실재의 미학화를 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제임슨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깊이없는 문화'이다.-34쪽

예술대상,즉 어떤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고, 의식을 위해서 생산된 대상은 교환에서 배제되거나 상품지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반대로 전문적이고 신성한 지위나 세속시장 및 상품교환의 거부가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이용 가능성의 결핍이나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은 상품가격과 갖고자 하는 욕구를 높이기 때문이다. / 상품은 사회적 장벽을 없애고 개인과 사물 사이에 오랫동안 확립된 연계를 와해시키는 반면에, 상품교환을 제한,통제, 전환시키려는 탈상품화 경향도 있다. 특정 사회의 안정적 지위 체계는 상품교환이나 신 상품의 공급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보호되고 재생산된다.-36쪽

현대 서구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품흐름 때문에 상품이 지니는 서열을 파악하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특정 집단이나 범주의 사람들이 신상품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취향, 차별적인 판단이나, 지식 또는 문화자본은 중요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상품이 사회적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소통자로 기능하는 방식을 고찰한 부르디외(1984),와 더글라스와 이쉬우드(1980)의 저작을 들수있다.-37쪽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소비용어가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파괴,소모,낭비,고갈이었다(윌리엄스,1976:68).소모, 과잉 지출로서의 소비는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가 어떻게 해서든지 통제된다는 생산주의적 강조속에 역설적인 실재를 규명한다. 희소성과 결합된 경제가치개념, 즉 생산과정내의 축적동기 때문에 불가피한 훈련과 희생은 소비자의 욕구와 즐거움이 충족되면 궁극적으로 희소성의 축복을 야기할 것이라는 전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모두에게 강력한 모티브와 문화이미지 동기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간계급, 특히 전통 경제전문가 사이에서는 19세기의 자립적인 자아치료적 개인주의와 20세기 후반의 대처리즘에 의해 고양되었던 내세적으로 세속적인 금욕행위라는 규율의 고된 노동개념을 지향한다. 즉 소비는 규칙적이며, 숭배할 만하며, 보수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42쪽

바타이유의 일반경제 개념에 따르면, 경제적 생산은 희소성이 아니라 잉여와 연관된다(바따이유,1988) 요컨대, 생산의 목적은 파굉며, 핵심문제는 상품과 물건과잉으로 변형시키는 물자풍부,한계에 도달하는 성장과정과 관련된다. 효과적으로 잉여를 관리하고 성장을 통제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은 게임,종교,예술,전쟁,죽음의 형태로 과잉을 파괴하거나 정리하는 것이다.이것은 선물,포트래취,소비,축제,과시적 소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증오할 만한 부분을 완전한 경제 성장으로 전환시키려고 끝없는 성장을 시도한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몇몇 수준에서 지속적인 손실과 한계가 존재하며,자본주의는 과잉쾌락을 부여하는 소비국면과 이미지를 생산한다. 소비국면과 이미지는 일상생활간의 경계를 와해시켰다. -43쪽

때문에 우리는 1)소비문화 내에 지속되는 전-산업적 카니발의 전통적 요소 2)축제의 전통요소들을 매개하는 이미지,디자인,광고,록 비디오,영화로의 변형과 대체 3)휴일 리조트,스포츠 경기장,테마공원, 백화점과 쇼핑센타와 같은 특정 소비국면에서 이루어지는 카니발적 요소의 지속과 변형 4)축제요소들이 광범위하게 공중에 대한 '위세'적 스펙타클 형태나 특권적인 상층지위 형태를 띠면서 국가나 기업에 의해 과시적 소비로 이동하고 통합함을 연구해야 한다.-43쪽

4장 문화변동과 사회관행 中 / 대다수 비평가들처럼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의 종말로 보는 료타르가 직면한 문제는, 복합단절을 야기하는 사회와 사회를 발전이론으로 설명하고자 거대서사를 지나치게 주장한 것이다.(켈너,1988) 공인된 사실로 간주되었던 것과 사회과학내에서 인과관계 정도로 취급했던 철학,문학,인문학이론의 반실재주의,반증거논리라는 포스트모던의 이론화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방만하게 다루어졌다. 지나치게 표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명증성 소멸을 주장하는 증거의 도상적 사용과 일상적인 역사와 진행되는 어떤 작업을 정당화한다. -86쪽

우리는 문화생산보다는 생산의 문화개념(the culture of production)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89쪽

지식인의 경우처럼 특정 분야의 변화는 두 단계에서 작동하였다.(1)현존하는 상징위계를 탈안정화하려는 도전집단에 의해 확립된 압력으로부터의 개방 (2)일반적으로 국가 관리자의 지식상품에 대한 수요상의 변화결과에 따라 상황을 보다 광범위한 문화소비시장으로 전달하는 민주화되는 효과로,지식인이 모험의 가치,목적,목표를 다시 고려하여 추구하는데 참여하게 한다.후자의 경우,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보편적 기획을 하는 입법자의 위치에서 인간적 문화성취로 생활세계와 언어게임의 다양성을 확대된 일시적 대중을 위해 번역하고, 이들과 유희하는 해석가의 위치로 변화시키는 지식재화에 대한 수요감소의 결과, 지위와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지식인 경험의 직접적인 조율로 본다(1988).-99쪽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 논리의 구성수준에서만 이해되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경제적 전문가와 상징생산을(102)하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간의 상호독립성과 경쟁적인 투쟁,변화하는 권력균형의 역학관계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102,103쪽

5장 일상생활의 미학화 : 래쉬(1988)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라 고 본 의미화의 표상체계를 통한 일상생활의 미학화는 19세기 자본주의 사회 대도시의 소비문화 성장에 기원을 둔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취시키는 꿈의 세계,상품,이미지,배회자 등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장소이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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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파워 - 200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제임스 커런 지음, 김예란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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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미디어 역사 - 미디어사를 기술하는 상호 경합적 서사 구조 중 중요한 부분을 옮겨본다./
미디어의 자유와 권력 부여 : 자유주의적 서사 구조(4), 자유주의적 미디어사의 중핵을 이루는 테제는 이러한 민주화 과정이 근대적 대중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엄청나게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테제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 중 첫 번째 명제는 미디어가 성공적인 투쟁을 거쳐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5)/ 여성의 진출 : 여성주의적 서사구조(11), '두 개의 영역(two spheres) 이데올로기'(13) / 문화적 민주주의 : 대중주의적 서사구조(22), 미디어의 대중화는 대중적인 선호가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하나의 민주적 위업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평등주의(egalitarianism)로 인해 위계제의 가치가 서서히 파괴된 '대중의 반란(revolt if masses)'의 일부로서도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대중화라는 것은 미디어가 대중적 즐거움의 주요한 원천으로 탈바꿈한 진정으로 비약적인 전진으로 표상된다.(23)-4~23쪽

무엇보다도 이 계열의 서사구조는 각각의 미디어-영화,라디오,전축,텔레비전-가 어떻게 광범위한 경이와 흥분의 대상이 되었고, 가족 생활 및 사회생활의 의례 속에 흡수되었으며, 일상 대화의 재료로서 기능하였는가에 대한 상당히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한다.수용자의 상상적인 생활과 맥이 닿고, 능동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풍부하게 교직된(richly textured)의미 또한 대중 미디어가 전달하였다는 점도 강조된다. 미디어가 의미 있는 대중적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38쪽

문화전쟁 : 자유 의지론적 서사 구조(39),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당시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1979~1990)의 노골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그전 시기의 관대한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조직적인 시도가 취해졌다. 비디오에 대한 더욱 강력한 검열이 1984년에 도입되었으며, 도덕적 금지명령(moral injunctions)을 통해 프로그램을 '정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깔고, 1988년에는 방송표준심의회[Broadcasting Standards Council, 나중에 위원회(Commission)로 바뀜]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재도덕화(remoralize)를 위한 이러한 시도는, 핵심적으로는 당시 행해졌던 탈규제 조치로 인해 텔레비전이 더욱 상업적인 압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990년대에 들어 그전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섹스물과 폭력물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 전통적인 도덕 가치를 권장코자 했던 움직임이 시장 자유를 육성하려는 욕망에 의해 부지중에 약화된 것이다. 자유 의지론적 서사구조는 이렇게 전통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미디어 그리고 그것에 대한 통제 방식 양자를 통해 어떻게 싸움을 벌였는가를 기술한다. -39쪽

대중주의적 서사구조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자유 의지론적 서사구조는 1960년대의 주제가였다.(39), 나라 건설하기 :인류학적 서술 방식(46), 미디어사에 대한 이런 설명 방식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긴다. 이는 민족국가의-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s)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진' 본성이, 지구화가 진척된 결과로 의문에 직면하게 된 시점에 등장하여 새로운 탐구방법과 뉴미디어사 서사구조를 활짝 열어젖혔다.(58)-39쪽

자유주의적 미디어사 : 미디어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민중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는 것이 미디어에 대한 자유주의적 역사학의 핵심 주제이다. 이런 해석에 대한 도전은 급진주의적 역사학과 사회학으로부터 나온다. 요컨대 미디어가 사회의 권력구조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대중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기구로서 충분히 기능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증거까지 갖춘 충분히 강력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미디어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다시 평가해볼 필요성을 정당화시켜준다.-71쪽

대중주의적 역사의 중심 주제는 엘리트의 문화적 통제를 깨고 미디어가 자유로워졌으며, 그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제공되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온정주의(paternalism)대 존중, 그리고 도덕적 고양(uplift)대 즐거움이라는 이항 구분(binary distinctions)을 동원하여 전개되어왔다.이렇게 틀지어 보면 마치 이 서술이 그전에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지닌 고상함(condescending worthiness)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것이 패배하고 마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시장에 대한 판단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이 접근법의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73쪽

4장 미디어 문화연구의 신수정주의 중 일부를 정리해본다 /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수정주의 모델 - 급진주의 연구 결과의 주요 기틀이 되는 계급 갈등적 사회 모델에 대한 회의가 증폭됨에 따라, 급진주의 진영에 대한 지지가 점차 약화되었다. 이러한 각성을 촉진시킨 중요한 요인 중에 미셸 푸코의 연구가 있다. 그는 상이한 상황마다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푸코에게 있어 이렇듯 다양한 권력 관계들은 이분법적이고 보편적인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단순화될 수 없으며, 생산양식 및 사회구성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중략) 푸코식 접근 방법은 마르크스주의 접근법과 다른 축 위에서 미디어연구를 구축하려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이것 역시 자명하게 급진적인 형태를 띤 것이었다. 미디어의 역할은 여전히 보다 폭넓은 사회적 갈등이라는 맥락 안에서 검토되었지만, 그 갈등이란 우선적으로 계급 권위보다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의 유산은 양면적이었다. 이 복잡한 권력의 이론은 모든 '근본적인 이론들'과 '지배 내러티즈'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연구 시각과 연계되었다.-190쪽

이러한 포(190)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은 문화 및 미디어 연구의 탈중심화를 촉진하였다. 일부 연구는 미디어의 역할을 분별적 계기들로 해체된 사회적 맥락이나 또는 담론 외부의 권력 작용이 대체로 배제된 사회적 맥락에서 독자-텍스트 간 만남의 연속적인 과정인 것으로 축소하였다. 교류의 연속인 것으로 축소하였다. 이것은 미디어가 권력 관계와 분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권력이 분열되고 광범위하게 분산된 사회 모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였던 미국 자유주의적 전통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존 피크스의 중요하고도 풍부한 저술에서 이러한 공통점은 대체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가 찬양하는 기호학적 민주주의에서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하위문화 및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인 문화적 경제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 의미를 구성해내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소비자 주권주의적 다원주의의 핵심 주제를 열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191쪽

수정주의 연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의미의 생산 및 수용자의 해독에 관련한 문제 영역이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급진주의 진영은 대체로 의미 분석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 견해를 지녔다. 이러한 상황에서 텍스트 내 불일치, 모순, 간극, 심지어 내재적 대립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 경향이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196쪽

중요한 변화는 수용자를 능동적인 의미 생산자로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널리 신화화된 미디어 연구 분야이다. (중략)여기에서는 우선 일부 형식주의자들의 분석에서 발견되는 바, 수용자가 텍스트 내 고정되고 이미 구성된 의미에 대해 정해진 방식대로 반응한다는 전제가 의미는 텍스트,사회적인 것, 그리고 수용자의 담론적 위치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주장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는 점 / 이러한 논지는 가장 탁월하고 저명한 수정주의 논자 중의 하나인 데이비드 몰리가 수행한 <네이션와이드>> 수용자 반응을 분석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훌륭히 제시되었다. / 미디어가 단지 제한적인 영향을 가진다는 암묵적인 결론은 일부 연구자들의 관심의 초점을 이동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미학이 대중적 미학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의(197)재현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투쟁을 전진시키거나 지연시키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왜 매스미디어가 대중적인 선호를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로 연구의 관심사가 이동하였다.이러한 변화에 자극받아 사람들의 즐거움의 본질을 유추하기 위한 미디어 내용의 해독 연구 및 수용자의 즐거움의 -197쪽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수용자 대상의 민속지학 연구가 이루어졌다.(197)단언적으로 말하자면 앞에서 살펴 본 수정주의는 지금까지 오류로 인해 혼동에 빠져있었던 사항들이 해명될 수 있었던 지적 발전의 한 사례로서 흔히 제시되곤 한다. 이런 시각에서 몰리는 이용과 충족 연구가 능동적 수동자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이전까지 미디어 효과이론 전통 전체가 피하주사식 효과 모델에 의해 주도도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몰리의 주장은 전 세대에 걸쳐 진행된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역사를 숨막힐 정도로 압축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실제로 재발견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마치 새로운 창안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러한 신비화는 자유주(198)의 전통에서 발전한 과거 미디어 연구와 급진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발전한 신수정주의 간에 다수 진행된 상호작용의 연결선들을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즉 효과이론이 어떠한 유의미한 관점에서 보아도 피하주사식모델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효과이론의 핵심적인 진의는 1940년대 이래 미디어 수용자의 독립과 자율성을 주장하고, 사람들이 미디어의 영향을 쉽사리 받아들인다는-198쪽

식의 당시 확산되어 있었던 사고방식을 제거하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비록 지금과 다른 기술적 언어를 사용하고 의미에 대해 보다 단순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1980년대 수용연구영역에서 새로이 주장되는 바와 일치하는 생각들을 다수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효과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지니는 선유 경향들이 그들의 텍스트 해독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상이한 선유 경향들은 다른 해석을 낳는다는 주장을 이미 오래 전에 해왔던 것이다. -199쪽

수용자의 상대적 자율성을 증명하는 경험주의적 연구는 미디어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정립하기 위한 핵심분아였다. 경험주의적 연구의 발견은 미디어를 계급이나 엘리트 집단의 통제 기구로서 이해하는 미디어모델을 공격하는 데에 상당 정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사회를 소규모의 집단들로 이루어진 벌집으로 개념화는 시각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사회 내에 권력이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고 여론은 개인적 영향 및 일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일견 이와 유사한 주장이 상이한 개념틀 안에서 일부 수정주의 연구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에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미디어가 사회적 질서에 대한 동의가 구성되는 주요 도구라는 미디어관에 도전하기 위해 수용자들의 선별성을 입증하는 성격의 수용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신수정주의는 때때로 사회를 이동적인 정체성과 독창적인 하위문화를 지닌 사회집단들로 이루어진 유동적 복합체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곤 했다. 지배적 담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다성의 기호학적 민주주의가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다.-205쪽

문화적 가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평가 : 수정주의 이론의 또 하나의 기여점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바, 급진주의 전통 내 중요한 흐름을 구성하고 있던 대량문화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비관론을 거부했다는 점에 있다.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회적-경제적 위치와 예술 및 음악에 대한 취향의 유형 간에 밀접한
상응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 미디어 소비의 맥락에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인식이 점증함에 따라 상대주의적 경향이 보다 강세를 띠게 되었다. 이는 논리적으로 수용자가 대중문화로부터 질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210)-209쪽

5장 미디어 사회학의 논쟁사 中 /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미국식 커뮤니케이션연구의 지배적인 전통에 반대하며 미디어에 관한 진보적인 관점이 발전하였다. 이는 단시간 내에 유럽 일부 지역에서 미국식 커뮤니케이션 연구 전통을 잠식하며 한동안 거의 새로운 전통이론으로 확립되었다. 이 용감한 해석은 세 개의 핵심적인 주장을 근거로 성립되었다. 그것은 미디어는 시장 검열, 국가의 영향력,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사회적 질서를 옹호하는 선별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동의를 획득하며 그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강력한 설득의 기제인 것으로 주장되었다.-217쪽

1970년대와 80년대의 전통은 이용과 충족 연구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입장에서는 사회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기능주의적 질문(및 대답)이 제시되었다. 이는 대체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암묵적인 전제 위에서 촉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미디어로부터 무엇을 얻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된다. 포커스 그룹과 서베이를 이용하여 연구자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미디어 기능(즉 사용방식)을 발견하였으며, 여기에는 수용자 구성원의 목표, 심리적 필요와 사회적 경험이 반영되었다. 미디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충족의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소속감의 획득, 동반의식 확충, 인간적인/->251상호작용의 활성화, 자신 및 타인에 대한 이해, 바람직한 자기 정체성 강화, 원하지 않는 현실로부터 탈피, 휴식을 위한 도구 등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정보전달, 교육, 오락이라는 표준적인 범주는 미디어로부터 획득하는 즐거움의 다양한 형태들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와 욕망을 반영한다.-250쪽

1980년대와 90년대에 뒤르케임 사회학 및 사회학적 인류학이 부활하자 그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대신 이용과 충족 연구 전통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새로 등장한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의 핵심 주제는 미디어가 사회적 통합의 행위자라는 것이다. 제임스 캐리는 품위 있게 씌어진 저서에서 매스미디어 대부분이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계속성을 확인하는 의례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251쪽

미디어 이벤트에 대한 문헌이 왕성하게 증가한 현상은 자유주의적 기능주의 부활의 한 가지 양태에 불과할 뿐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는 일상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연구이다.(실버스톤,1994). 이 연구는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친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원이 감소하는 대신 추상적인 상징과 비인간적인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에서 텔레비전은 편안함(전이적대상)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은 그 신화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보상적인 확신성을 안겨준다. 또한 텔레비전은 질서와 안정에 대한 감각을 전달해줌으로써 일상생활의 숨겨진 흐름 및 반복적인 리듬에 통합될 수 있도록 정서적인 정박지로서 기능한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 및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계속성을 부여한다.(이는 기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론적 안정성이다.) 텔레비전은 분산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을 구조화되고 안정된 세계와 연결시켜 준다. -253쪽

외형적으로 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실버스(253)톤은 텔레비전이 가정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은 가족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중심적인 공간으로서, 과거의 거실 벽난로에 상응하는 현대적 등가물인 것이다. 보다 심층적인 심리의 수준에서 본다면 텔레비전은 주택을 안전과 소속의 장소,그리고 자아의 표현 장소로 만들면서 주택을 가정으로 변화시키는요소의 일부가 된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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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2010-02-0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조리있게 풀어내지 못하는 내용.
기본이 중요합니다 ^_^
 
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 -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이호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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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의 밀월 관계 : 전기의 출현을 계기로)에서는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란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sublime of technology)'의 은유로 집약되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계몽사상은 테크놀로지의 지위를 과거 어느 때보다 격상시켰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비롯된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지식, 과학, 그리고 합리성과 함께 사람들에게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산업혁명은 사람들에게 테크놀로지가 물질의 풍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신념을 갖게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 공학'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면서 사회의 모든 분야를 테크놀로지에 근거한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사회 발전, 나아가 사람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식되었다.-6쪽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차용하여 데이비드 나이는 디지털 매체의 출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디지털의 숭고함'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과 '디지털의 숭고함'은 모두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대변하는 은유로, 저자는 두 은유에서 사용되고 있는 '숭고함'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칸트에 의해 논의가 시작된 숭고함의 개념은 웅대한 자연에 대해 사람들이 존경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갖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레오 마르크스는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지대(middle scape)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는 근대성의 시작에서 비롯된 자연의 대상화와, 사람들이 갖게 된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경이로움의 정신 상태가 테크놀로지에 반영되게 되었을까?-6쪽

은유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공중에게 알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오늘날의 대중매체에서는 수많은 과학적인 발견과 테크놀로지들의 발전이 보도되고 있다. 과학적인 성과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대개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파격적인 혁신으로 묘사되곤 한다. 은유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은유는 다양한 담론들을 연결시키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할 뿐더러 토의를 위한 공통의 장을 제공한다(Maasen&Weingart,1995.각주 12번)-11쪽

테크놀로지를 은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은유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오히려 언론인들이나 광고인들이 과학에 의해 나타난 테크놀로지들을 설명하기 위해, 현재의 문화적인 이야기(narrative)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은유들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해당 테크놀로지들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테크놀로지와 대중매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희망과,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를 표현하는 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매체는 은유들을 통해 어떠한 주제를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하고, 고착화시키며 또한 극적으로 만든다.(Burke,1989,각주 14번)-12쪽

사람들이 대상의 정확한 실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은유는 대상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즈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출현하면 바로 등장하는 것이 해당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은유들이다. 우리에게 소개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해당 매체를 소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수용케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이때 은유는 생경한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또한 사회에서 회자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이나 사회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에 대한 상상을 투영하기도 한다. 새로운 매체 혹은 테크놀로지를 묘사하는 은유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나타나는 매체가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물질과 이상이 결합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물질을 수용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꿈이 현실화된다는 믿음, 나아가 신화 속에 살게 된다.-13~14쪽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은유들은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수 있는 혼란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종종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왔지만, 그것들을 설명하는 은유들은 과학자나 전문가에게만 친숙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일반인들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근대성에 방향을 제공한 것은 바로 유토피아 논의이다. 즉, 근대성이 칸트가 주장한 계몽이라고 하였을 경우에는, 비록 그가 실천 이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어떠한 실천적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진보 개념의 등장은 근대성의 방향을 설정하면서 이상향의 논의를 공간의 유토피아에서 시간의 유토피아로 전환시켰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디에 있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유토피아 이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점을 잊게 하고, 그것들이 미래에 해결될 것이라는 허위의식 역할을 하였다.-23쪽

근대의 이상향 논의는 과학적 합리성과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인해 과거와는 달리 실천성을 갖게 되었다. 과학적 합리성은 약 16세기에 나타났는데, 이는 현실은 사람의 추상적인 이성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했던 이상향은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한층 구체화되었다.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한 꿈의 실천성보다 더 이상 현실적인 논의는 없다. 테크놀로지는 현재화되어 있으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자연과 사람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며, 불완전한 사람들이 미래에는 완전한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바로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진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의 논의의 결합은 기술 결정론을 낳게 되면서기술과 사회를 동일한 차원에서 고려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헐어 버린 전신의 출현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외감과 사회에 대한 유기체 모델과 결합하면서 당시의 사회 질병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매체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4쪽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인식론으로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주고 있다.-24쪽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세상에서 매우 복잡한 체계의 네트워크이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을 단지 마음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감각기관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해한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무의식적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는 단지 자신들이 창조한 상징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단지 이름이 있는 것만이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해당 사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생각들만을 반영하고 있다. 상징들은 해당 사회에서 지적으로 용인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바로 사회의 제반 권력관계에 의해서 상징이 결정됨을 의미한다.-27쪽

근대성 이후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현재 조건이란 예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변화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의식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사람들을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의 환경 변화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개조함으로써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일종의 계획이 되었으며, 이상향의 개념은 처방이 되었으며 또한 바람직한 목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즉, 과거의 이상향 철학은 단순히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공간의 유토피아를 기술하는 차원이었으나 근대성 이후의 이상향은 시간의 유토피아를 위한 처방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38쪽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학자로서 자크 에륄(Jacques Ellul)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테크놀로지를 논의한 많은 학자들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학자로서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를 강조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지구에 천국을 건설하지 않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이 아니라 역으로 강제 수용소와 같은 전체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들을 규정하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조성된 감옥은 바로 전체주의와 같다. 이는 사회가 테크놀로지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 아래 에륄은 결과적으로 사회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테크놀로지를 위하여,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자크 에륄은 테크놀로지를 거론할 때, 전체성, 합리성, 효율성 등의 용어를 종종 사용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기술적인(technical) 과정은 독립적인 합리성, 즉 자체 내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합리성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합리성의 결말은 삶의 모든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43쪽

따라서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방법-과학, 탐구, 생산 등-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에 의해 이용되는 수단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방법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집약적/이다. 테크놀로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심층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사람들, 자연, 과학 행위, 인간성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뿐만 아니라 예술과 정치 등이 테크놀로지의 횡포에 의해 재구성된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바로 자크 에륄은 테크닉(technique)과 기술적인 사물(technical objects)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도구, 무기, 자동차, 컴퓨터 등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산품이 에륄의 테크닉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테크닉은 독립적인 사회 과정이다. 테크닉은 삶이 합리적이고 단계적인 절차성의 특징을 갖게 한다. 이러한 테크닉은 공장, 관료제, 연구와 발전을 위한 집단, 도시 계획, 위원회 등에서 지배적으로 관찰된다. 여기서 테크닉은 일종의 생각의 유형(mode of thinking)이라 이해함이 적절하다. 에륄은 일반적으로 물질의 테크놀로지보다는 테크닉을 강조하면서 자연스-43~44쪽

럽게 영향을 주는 생각의 유형을 경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러한 테크닉에 근거한 사고방식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남들에게 과시한다. 전문가들은 어떠한 문제를 평가하고 해결할 때 그들의 자신감으로 인해 해당 분야를 정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사고방식을 강요하면서 그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44쪽

테크닉은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과거의 모든 신성함을 부정한 근원적인 독특한 개체이다. 이러한 테크닉의 영향력은 신성함이라는 인지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운영하는 관료제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분업화, 행정의 규칙들, 형태 그리고 절차 등이 많은 사회 과정을 위한 현대의 권위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효율성, 접근과 탈출의 속도감, 전문가의 지식이 관료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이 학계에서도 관찰되고 있다.-45쪽

이러한 테크닉 가치는 특히 현재의 산업계에서도 활발하게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갈브레이스(Galbraith)는 현재의 시장은 전혀 자유롭지가 않다고 주장한다. 만약에 자유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정부 혹은 관료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경쟁이 만연한 시장에서 테크놀로지가 사용되면 될수록, 세분화, 자본, 그리고 시장의 조작 등이 더욱더 그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갈브레이스는 테크노 구조(techno-structure)라고 명명하였다.(Galbraith,1967,각주 101번)
이러한 테크노 구조는 예를 들면, 규모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모든 기업의 조직의 경영에 커다란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46쪽

에륄은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개인화 차원까지 변화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을 일컬을 때 흔히들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정보를 공정하는 체계 혹은 복잡한 기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주라는 실체를 관장하고 있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원인과 효과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을 이렇게 기계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계의 효율성으로 대체하게 된다.(자크 에륄,각주 102번)-46쪽

에륄 이외에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관적인 사고는 신마르크스주의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버마스는 Technology and Science as Ideology(1970)에서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중략)/ 하버마스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제고시키기 위해서 사회에 개입하는 정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킴으로써 국가는 경제 발전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 결과,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억압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유토피아의 주장과 같이, 국가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한 부자유는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전체주의적이지도 않다. 다만 여가, 부, 그리고 향상된 지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하버마스,각주 105번)-46,47쪽

테크놀로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들은 공히 기술결정론의 시각을 갖고 기술과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긍정적으로 보건 그것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건 간에 거기에 내재된 기술결정론은, 테크놀로지가 외생적인 요소이며 자발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회관계와 조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Williams&Edge,1996,각주 109번) 또한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주어진 것이고 사회와 조직의 변화를 위한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계기를 제공하며, 그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알려진 방향과 예정된 경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은 정부와 산업의 공적 담론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그들은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불가피하고 그것의 속성상 특정한 사회 변화를 촉진시킨다.(Edge,1994,각주 109번)-48쪽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은 단지 테크놀로지를 독립변인으로 설정하여 그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종속변인으로 간주함으로써 과연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49쪽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이상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인식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들을 집약해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technology sublime)이라 일컫고 있다. 이하 각주 114번 내용 -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테크놀로지를 심미적이고, 감정적이고 감동적인 실체로 바라보고 있으며 심지어 테크놀로지를 경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논의들은 사람들이 자연과 테크놀로지를 놀랍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50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사람들이 제작한 테크놀로지를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연에서 느낀 경외심과 놀라움의 감각을 어떠한 비판적인 시각 없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험과 동일 차원에서 취급한다. 존 러스킨의 연구에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러스킨에게 근대 문화의 맥락에서 도시와 테크놀로지는 바로 모든 사회 집단을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분리시켰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낭만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였으며, 테크놀로지와 도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그림과 같은 특성을 감상하게 하였다.(Ruskin,1979, 각주 120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담론들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감정과 경험은 잠정적이고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현재 사람들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도덕 그리고 물리적인 틀에 포함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카슨, 각주 121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테크놀로지, 민주주의, 그리고 목가적인 이상주의 등을 물질의 득이 영혼의 완성이라는 등식으로 치환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 '사람들이 테크놀로지가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것이며 영혼의 삶 또한 향상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제일 중요하게 간주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로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숭고함의 신화는 세계 박람회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일반인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숭고함의 신화는 테크놀로지, 자연 그리고 인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며 그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정치, 도덕,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급격한 산업 성장, 그리고 정치 현실의 변화로 인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의 경험이 개념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래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은 기존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숭고함이, 테크놀로지와 전기의 발전이 모든 사회의 악을 없앨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면서, 테크놀로지에 옮겨간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숭고함의 개념이 테크놀로지가 노동자들과 주부들의 잡일을 -53쪽

경감시킨다고 하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사회에 국한된 숭고함에서 일상생활의 숭고함으로 확장되게 되었다.(데이비드 나이,각주122번)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은 기술의 숭고함에 대한 중산층의 에토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숭고함은 "커뮤니케이션 ,교환, 움직임이 인류애, 계몽, 그리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고립과 떨어짐은 야만성의 증거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제임스 캐리,각주 123번)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53쪽

거시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속이며 계몽주의와의 단절을 도모하지는 않았다. (중략)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이 이룩한 원칙들과 업적들을 환영하였다. 예를 들면 낭만주의는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신으로부터의 사람들의 해방과 개인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환영하였다. 비록 중세시대의 향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중세시대에 대한 향수는, 계몽사상이 개인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중세시대에 있던 공동체의 미덕을 잃을까 우려한 데서 빚어졌기 때문이다.-57쪽

숭고함이라는 용어는 1674년 보일로(Boileau)가 롱기누스를 번역하면서 문학계에 소개하였다. 낭만주의에서의 숭고함은 신의 세계를 대치하는 개념으로서 초월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몽주의에 의해서 과학이 신의 세계를 대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초월성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낭만주의자들은 숭고함의 은유를 이용하여 자연의 위대함을 관조함으로써 사람을 경외심과 존경의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이로부터 초월의 세계를 느끼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졌던 숭고함의 의미는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사람의 마음과 감상의 대상의 숭고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숭고함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의 숭고함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논의의 초점이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성격에서, 사람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관계로 이행되었다(crowther,1989,각주 149번). 숭고함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이 숭고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67쪽

낭만주의들의 숭고함은 사람들의 마음과 자연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없애고자 하였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자연을 생명이 없는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은 사람의 마음과 멀어지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자연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유럽에서 시작한 낭만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의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 숭고함의 레토릭은 사라져/가는 농경사회의 전원적인 이미지를 대체하기 위해 나타났다. 숭고함의 담론은 산업화의 영향력과 산업화가 초래한 진보에 대한 놀라움과 공포심을 공히 포함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바로 대중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변혁에 대한 자본주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장하였다.(Porter,1986,각주 161번)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개인들을 소유적인 개인주의(posessive individualism)로 전환시키면서 산업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을 하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소유하였을 때 테크놀로지에 내재되어 있는 미-70쪽

적인 가치를 동시에 얻게 된다고 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테크놀로지를 미화시킴으로써 정부의 경제 발전 계획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 계획에 대한 당시 미국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즉, 산업화로 인해 나타난 모순들을, 국민들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소유/소비함으로써 자신들도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하였다.(Wilson,1992,각주 162번)-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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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는 없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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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를 넘어 비아냥으로,꼬집다 못해 발기발기 찢고 흔적조차 드러남 없이 불태워 버리고팠던 지배계급의 못된 게으름과 패덕을 고발하기 위해 그림으로 도발한 당대의 까발림은 혁명 그 자체보다도 한껏 드라마틱한 일들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형국 아래 치부의 치부가 꺼풀을 벗고 모순의 모순이 뚜껑을 열고 제 발로 기어 나오는 극단의 현실 앞에서 도망갈 귀족도 도리질할 왕도 이제 더는 없었다. 안팎을 뒤집어 버리고, 기다리며 참고 있던 자들이 급기야 전부를 부정, 접수하려는 혁명적 변혁상황 속에서 오랜 감시와 관찰이 빚어준 정치적 직간은 이미 민중 본연의 자산이었고 결코 권력도 빼앗지 못할 주관적 가치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성은 이처럼 의도적 고안물로 정착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계략의 하나로 이해해야만 했다.-9쪽

1장 : 소프트코어의 정치전략과 황색매체의 문화전술 중 / 첫째, 현 단계 한국 사회의 소프트코어 문화는 하드코어의 정치적 대용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소프트코어의 문화적 대리만족 정도는 어디까지이며 그 표현의 한계치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둘째, 소프트코어의 경계확장 및 파괴욕구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적 장애와 정치적 통제는 문화적으로 서로 관계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셋째, 한국의 소프트코어 유통 미디어는 무엇으로 대표되고 있으며,그 현실은 어떤가? 넷째, 만일 한국 소프트코어 문화의 정책적 방임이 하드코어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때 나타날 문화적 컨텐츠의 실상은-25쪽

행여 이 땅에서 하드코어가 그 본연의 생생한 의미, 즉 거칠지만 솔직하고 난잡할망정 처절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용기로 인정, 유통되길 기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꾸로 보면 소프트코어만으로도 명분이 서지 않는데 하물며 하드코어의 표현의 한계를 지적한다든지 제작과 유통불가의 조건을 지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동영상과 영화형식의 경우, 연기단계로까지 격상된 하드코어의 계발이 저지되었던 것도 문제고, 더 나아가 성을 매개로 한 미디어들의 사회적 유통 자체를 외형적으로 홀대하거나 문화단위로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인식의 양면성도 더 큰 문제로 방치되어 왔다는데 우리는 당분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29쪽

60년대의 박승훈과 염재만이 대표작가들이었고, 마광수와 장선우 감독의 경우는 90년대를 달군 좋은 예였다. 어쩌면 이미 시시해져버린, 그래서 왜 또 이즈음 다시 외설과 예술의 쟁론인가 하는 역비판 대상이 될 만큼 이들의 이름은 이제 솔직히 질릴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외설, 주조의 여전한 꼬리표?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하드코어 유통욕구의 예비방출? 소프트코어와 하드의 전략적 동거? 사회계약론적 합의 도출을 의식한 문화적 이반과 문자 및 영상매체의 항거?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재창출과 재생산구조를 의식한 임의적 스캔들라이제이션?-31쪽

발음조차 크게 차이나지 않는 외설과 예술의 병치는 결국 그 배치나 사용 의도의 고의성 여부를 떠나 자칫 둘 가운데 하나는 극히 불온하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메뉴임을 주입시키려는 또 하나의 폭력적 파시즘으로 이 땅에 뿌리깊이 자리한다. 그리하여 모랄리티의 인간적 엄존이 무시당하거나 사회집단 고유의 도덕적 자기통제 자체가 자율신경에 의해 적합히 담보되지 않을 경우, 국가는 늘 개입하거나 처벌공간을 향한 임의동행 주체로 나설 만반의 준비가 끝난 뒤임을 과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도덕적 판단기준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판가름하는 척도의 하나로까지 발전하는 기이한 양상을 낳는다. -32쪽

성정치적 지배논리 확산은 고스란히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 사이의 이상스런 균열논리를 양산해낸다. 사실상 갈라지거나 찢어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단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하드코어의 지하화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편승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지하화와 정치적 편승개념은 사실상 권력의 억압과 이를 강력히 의식한 문화생산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 결과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이들 사이의 현실관계가 진정 생존을 위한 전략적 공모인지, 아니면 비동시적 요소들의 동시적 혼존이거나 필연을 가장한 우연적 변인들의 유약한 결합인지는 분명치 않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는 수 없이 잠시 끌어안고 있는 불안한 공존인지, 혹은 아무 상관없는 단위와 아웃풋의 강제 진열인지 의문 그 자체는 풀기가 매우 모호하다. -39쪽

자신의 존재양식에 관한 그 어떤 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에로 비디오는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중재수단으로 이 땅에 자리한다. 동시에 이 땅의 대표적 영상 소프트코어임을 자처한다. 그것은 일단 하드코어의 급진성을 강력히 의식하되 소프트코어의 유연성을 내세움으로써 권력과의 타협점을 끝없이 모색한다. 물론 여기서 정치적 중재라 함은 인적, 물적 공세에 기반한 실질적,가시적 전략수행의 부산물로 구체화된 게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문화의 간접 잠식과 장르별 공존을 의식한 시장점유 방식의 우회성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 공헌이나 문화적 기여 따위의 공공담론을 의식할 겨를 없이 치고 빠지거나 챙기고 다시 만들 궁리를 하는 동안 자의든, 타의든 유통망에 인입된 인구들에게 모종의 잠정적 배설감을 제공하고 그로써 일정량의 대리만족과 사후 예감을 성적으로 담보한다는 점에서 그 공격 효과 역시 의외로 크다. -44쪽

'빨간 마후라'를 '빨간 보자기'로 바꾸거나 이미 업힌 뒤 다시 기대려는 의도는 예술성과 상업성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추구하려는 진/영의 정치진술과는 다른 의도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빠른 투자와 이탈전략 속에는 이미 작가주의의 심각함도 버거운 부담일 뿐 전혀 힘이 되지 않고 있고 대박용 상업주의가 추구하는 거대 인기의 자원으로 기술과 자본도 매력의 변수로 끼어들 틈이 없다.-54~55쪽

국가의 포르노그라피 인식이 늘 통제의 강박과 단속의 예고 속에서 스스로 경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그렇게 강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알고도 방임하고 일정한 도를 넘어설 때 '칼끝'만을 살짝 보이고 칼집에 도로 넣거나 살점 일부만을 도려 무작위로 상처낸 후 흐르는 피의 향기와 흔적에 놀라/알아서 치우도록 시장 주변의 공포효과만을 극대화시키려는 모종의 억지정책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면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합리주의의 기본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81~82쪽

2장 한국의 문화통제와 하드코어 중/ 논쟁의 현장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분할되는 치열하을 드러내기도 했고, 관찰과 분석주체가 성의 대립으로 한층 격화, 진화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커져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물론 서양의 경우로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페미니즘과 그 외곽의 입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분화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지적 담론은 어느덧 제작과 유통 당사자들의 욕망이나 정치경제학적 자기 지탱논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도의 논쟁구조를 튼실하게 확보해 나간다. -125쪽

급진적 반포르노그래피론이 페미니즘의 요새를 분열시키고 투쟁의 거점분산과 세력분할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궁극적으로 자유의지론자들까지 포함, 이들 모두를 또 다른 비판대상으로 몰아넣은 진영은 막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실상 좌파의 포르노 비판은 비교적 명쾌한 계기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과 부르/주아 비판론 위에서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물적 토대를 근본부터 분쇄, 개선 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 한 반남성적 포르노론을 주창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이나, 이들과 의식을 공유하되 성적 자기본능의 문제를 투쟁과정에서 변별해내려는 자유의지론자들 모두는 근본은 놔둔 채 지엽에만 집착하려는 허구의 존재들일 뿐이라는 게 사회주의적 포르노 비판론의 기본이었다.-130쪽

이제까지 진행된 포르노 논의구조는 도덕론적 결정론, 즉 극단의 배격과 폐기론으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남성과 여성 진영의 다양한 성정치적 주관주의, 그리고 적극적 수용과 교화를 목적으로 삼는 예외적 예찬과 순수를 바탕으로 삼는 폭력적 저항 담론에 이르는 등 일련의 진동과 왕복의 궤도를 반복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정당한 성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변명하거나 타자의 논리에 제동과 반격을 가하는 진지한 사고를 잃지 않았고, 추종과 동의의 부피와 관계없이 논리적 자존의 세계를 고수해 왔다.-146쪽

에로물이라 지칭하는 개념은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본격적인 핑크화 경향에 편승, 노골적인 하드코어의 유포를 차단, 대행하고 민중부문의 문화적, 감각적 욕구를 원색적으로 해소하는 대리매체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성인물이란 용어와 이음동어의 용례로 유포되기 시작했고, 노골적으로 지하 유통된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나 그 복제망을 은폐하면서 문화적 두둔의 매체로 움직인다. 뒤집어 보면 복제 포르노의 대속장치이자 감시와 처벌주체인 권력의 의도적 비의도성을 노골적으로 변명해주는 편리한 도구로 이들 매체는 본격 기능한다.-183쪽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문화지평 안에서 음란과 외설의 반어는 건전이란 형용사였다. 한번 더 뒤집어 말하면 이 땅에서 음란은 건전치 못한 일체의 것들이었고, 건강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 인식과 언동, 혹은 자세마저 그것은 다 외설적이거나 방탕한 기류에 편승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공권력이 음란성이란 편리한 잣대 하나만으로 정치적 통제력을 확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주지하는 것처럼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 차단과 장치다.-185,186쪽

대체 음란성과 유해성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등치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음란물의 유통과 청소년 의식발달의 저해? 지하유통을 통한 시장의 황폐화와 여리고 순수한 10대들의 교육적 역기능 확장? 학업의 저해와 성의식 왜곡의 자동적 등치? 옐로우 미디어의 범람과 사회질서 유기의 일방성, 무책임성 강화? 국가의 직무유기와 지역사회의 혼돈 지속?-192쪽

온라인상의 하드코어가 무분별한 폐쇄성이나 배타적 공간을 요구한다면, 오프라인상의 소프트코어는 제한적 음란성과 유약한 본능 충족의 아쉬움을 유통과 수요 촉발의 원천으로 삼는다. 영상의 하드코어가 다 보여주고 모조리 까발려버림으로써 욕구의 처참한 재생산을 촉발하는 데 관심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소프트코어를 주조로 삼는 성인물은 성애의 현장을 차마 다 드러내지 못하는 대신 미진한 욕구의 중복 충족을 통한 독자적 문화양식의 창출을 도모한다. 그것이 지하 B급 비디오 양식이든, 아니면 별도의 빨간 딱지든 이/미 격조와 고상함에서 자유로워진 성인물들은 대사와 색상, 풀롯과 감흥, 그리고 의상과 조명이란 영화적 기본 변수와도 굳이 엄격한 관계를 지키려 들지 않았다.-208~209쪽

몇 가지 사법적 준칙만으로 통제와 자율의 기틀을 다잡기 어려울만큼 이미 거대하게 커져버린 음란물 유통시장이나 자본주의 기층문화와 모호하게 겹쳐진 환경의 윤곽은 사실 권력이 헤집고 들어가 질서를 외치고 범법을 색출한다는 것 자체가 극히 무모한 일임을 잘 반증한다. 그것은 성인 전용의 핑크산업 통계를 위해 국가의 공권력이 단순한 경로로만 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등급을 마련하여 유통과 관람을 제한하려는 규제안 작성의 행정적 기초로 활용되거나 시민사회를 향한 국가의 경고를 대집행하려는 치밀한 의도 또한 적절히 은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은근한 공포효과의 확산과 정치적 학습효과의 유포를 절충,배합하려는 국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었다.-220쪽

황색매체의 범람과 이들을 통한 음성적 정보 컨텐츠의 교류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개입은 일단 건전성과 계몽성이라는 보수적 기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 자기엄숙성을 전제로 깐다. 게다가 정부의 입장은 늘 단호하며 한치의 오류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자기완결성 혹은 무결점주의의 강박을 통해 한층 근엄하며 공포효과의 예비를 암시하려는 모종의 긴장구도 또한 배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세는 바로 정치행정적 경직성과 적실성 약한 완벽주의 사고체계를 양산해낸다. -221쪽

음란의 형식이 영상 미디어를 거치든 아니면 인쇄매체로 전달되든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본능 구가를 허용할 수 없다고 공언한 당국의 통제 도구는 물론 권력이다. 이를 더욱 공고히 포장하고 강제적 적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권력이 법체계 보완과 구속력을 담보하려 드는 것도 논란의 여지는 없다. 강제력을 동원하여 서가에서 색깔 있는 책들을 솎아내고 압수,수색하거나 인터넷망을 역추적하여 하드코어의 임의(혹은 악의적)유포를 적발해내는 힘의 사용 기반은 크게는 사회윤리이고,좁게는 질서유지를 핑계삼는다.-265쪽

끝간 데 없이 벗기고 질펀하게 향락의 현장을 전달하려는 사람들과 숨든 도망다니든 그들의 작업결과를 기어이 보고 즐기겠다는 시각적 쾌락주체의 본능적 공모는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만드는 이들과 보는 자들 사이의 계약론적 관계가 감각적 합의와 이윤 축적으로 기막하게 맞바뀌는 이익 교환으로 설명된다면, 이들 사이를 불특정하게 파고드는 국가의 정치적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268쪽

90년대 초에도 음란과 외설의 변별보다 무의식적 동일시 효과와 그 의도치 않은 문화적 해악이 암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군 역시 명쾌한 분류기준이 없고, 그에 따라 해석과 계도의 문화 인프라가 있을 수 없다는 무의식적 안일의 사회심리를 말해 주기도 했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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