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 한 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 Film Story 총서 1
정종화 지음 / 한국영상자료원 / 2008년 3월
품절


8장 암흑속의 모색 1980년대 한국영화(1980~1989) 중 일부 - 1. 제작 자유화 그리고 할리우드 지배 저지투쟁. 1980년대는 우리 영화를 '방화'로 부르던 시대였다. 영화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계와 그 영화를 냉소하고 자조하면서,언론들은 외국영화에 주도권을 내주고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렀던 한국영화를 꼬집으며 그렇게 불렀다. 관객들 역시 외화에 비해 재미없고 만듦새가 뒤떨어지는 우리 영화를 방화라 부르며 불신과 멸시를 담았다. 항상 성우들의 후시녹음 목소리가 입혀지는 그 영화에 말이다. 방화는 '변방의 영화'라는 뜻으로,일제시기 '대동아연방'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지칭이다. 그러고 보면 1919년 이후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한국영화를 호명하던 방화는 우리 영화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하는 좀 더 자기비하적인 표현이었다.-190쪽

198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수식한 유행어는 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일컫는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1980년대는 우리 영화가'방화'라는 이름을 벗고 한국영화로 탈바꿈하는 쇄신의 시기였다.-190쪽

1979년 유신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통제정책을 이어받았고 사전,사후 이중의 검열로 영화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의 영화정책은 단지 20여 개 영화사만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외국영화를 수입하도록 한 1973년 제4차 개정영화법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국산영화의 제작권은 연초에 각 영화업자에 의무제작편수를 배정하고 제작능력에 따라 추가 배정하는 방식이었다.-190쪽

한편 외국영화의 수입권은 우수영화 선정작,대종상 그리고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만든 영화사에 배정되었다. 1985년 영화법이 다섯번째로 개정되었다. 제5차 개정영화법의 핵심은 영화사의 등록방식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한 것이다. 예탁금 납부라는 단서 조항이 있었지만 기재나 촬영소 같은 과거의 허가 요건 없이 누구나 영화사 등록을 하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하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독립영화제작제도 역시 도입했다. 제작,수입,수출을 독점하던 과거 20개사의 허가 받은 영화업자가 아닌,그간 영화제작의 문호에서 차단당했던 감독,시나리오 작가,배우,프로듀서 등 영화인이 제작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191쪽

제작 자유화로 인한 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곧이어 미국영화의 시장개방 압력이 닥쳤기 때문이다.1986년 12월 31일 공포된 제6차 영화개정법으로 외국영화사의 국내 영화업이 허용되었으며,1988년 다국적 영화배급사인 UIP를 시작으로 미국의 20세기폭스사가 국내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영화시장에 진출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직접배급은 한국영화산업의 배급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기존의 영화배급구조는 제작사나 수입사가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흥행권을 흥행업자에게 넘기면 흥행업자는 다시 지방의 영화관들과 상영 계약을 맺는 간접배급 형태였다. UIP는 서울,지방 가릴 것 없이 영화관과 직접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새로운 유통 질서를 시도했다.-191쪽

올림픽 기간 중인 1988년 9월 24일 추석 프로그램로 UIP 직배 1호 <위험한 정사>(1987)가 개봉하자,영화계는 한국영화의 존립 기반이 무너졌다며 격렬히 저항했다.대부분의 영화사는 여(191)전히 한국영화 제작에 공을 들이기보다 외화 흥행 수익에 더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88년 9월 19일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철야농성으로 시작한 영화인들이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서 점거농성을 하며 더욱 격양되었다. 1989년 3월에는 정진우 감독이 운영하는 씨네하우스에서 UIP 직배 영화 <007리빙 데이라이트>를 개봉했다. 5월 씨네하우스 극장에 뱀 자루가 발견되었고,8월에는 방화마저 일어나는 등 직배 반대투쟁은 극에 달했고 정지영 감독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191,192쪽

그로부터 7년 후인 1996년,UIP 직배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이면에는 직배 영화 배급권을 둘러싼 극장주들 간의 암투가 작용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이 복합관 공사를 진행하던 중 씨네하우스가 먼저 직배망에 가담하자 방화사건을 배후 조종했던 것이다. 직배 반대운동의 막후에서 비밀리에 UIP와 영화 수급 계약을 맺었던 그는 1990년 12월 UIP의 <사랑과 영혼>을 서울극장에 내걸었고,이어 워너브라더스,20세기폭스,월트디즈니 등 직배 3사의 배급 대행을 맡으며 미국 직배사가 한국시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 구실을 했다.-192쪽

2.1980년대 대표 장르 일부 / 1970년대는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인 호스티스 영화가 주류였다면 1980년대에는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3S정책'과 맞물려 성애영화,즉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데 주력한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으로,이른바 부인 시리즈의 원조가 되었다. 한 여대생의 성적 탐험을 그린 <무릎과 무릎 사이>,에로영화의 전통적인 대상을 성매매 여성을 다룬 <매춘> 등이 이어지며 성적 스펙터클의 표현 수위는 한층 더 진보해졌다.-193쪽

에로영화들은 현대극뿐만 아니라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양반집안 씨받이 여성들의 수난을 다룬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자녀목>,<씨받이> 등과 가난 때문에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을 다룬 <뽕>,<땡볕>,<감자>등이 그 대표작이다. 이른바 '토속에로'장르는 <피막>,<여인잔혹사 물레야물레야>,<씨받이>처럼 해외영화제의 주목과 수상을 끌어내기도 했고,<뽕>,<어우동>처럼 '상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산딸기>,<변강쇠> 처럼 토속에로들은 대부분 시리즈의 양산을 흥행 방편으로 삼았다.-193쪽

'공윤'과 검열 파문/ 1980년대 영화계는 특정 집단의 압력과 경직된 검열 정책으로 인해 영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일쑤였다. 1981년 <도시로 간 처녀>가 운전기사와 버스 안내양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운수노조와 한국노총의 시위로 상영이 갑작스레 중단되었고,1984년 전국 비구니들의 단체 행동으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중광의 허튼 소리>를 둘러싼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와 영화계의 마찰이 극에 달했다. 심의에서 열 군데나 가위질을 당한 김수용 감독은 은퇴를 선언했고,표현의 자유라는 해묵은 논쟁이 되풀이되었다.-196쪽

1985년 1월부터 영화 검열 업무가 문공부에서 공윤으로 이관되며 검열이라는 명칭을 심의로 바꾸었지만,화면 삭제,화면 단축,대사 삭제 등의 표시로 불온 사상,반사회적,공안질서 저해라는 낙인을 찍는 국가의 통제는 여전했다. 심의를 통해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은 더 멜로드라마적인 구성으로,<어둠의 자식들 2>가 원제인 이장호의 <바보선언>은 블랙코미디라는 궤도 수정으로 리얼리즘 화법을 탈색시켰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다 보니 <애마愛馬부인>이 <애마愛麻부인>으로 <영웅만들기>가 <영웅연가>로 바뀌었다. 1987년 6월 1일 결국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대폭적인 소재 개방이라기보다 외설적 내용에 대한 '가위질'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했다.1988년 공윤의 심의를 마친 한국영화 84편 중 35편이 이른바 '벗기는 영화'일 정도로 에로티시즘 영화가 판을 쳤다. 외설물에는 관대하고 사회적 발언에는 가혹한 것이 공윤의 검열 기조였다.-196쪽

3.영화문화의 변화 / 1980년대는 극장 중심의 전통적인 상영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1980년 12월 컬러TV가 등장해서 각 가정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VTR의 보급은 비디오 시장이라는 새로운 수의 창구를 마련하였다. 영화매체는 더 이상 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린트로 한정되지 않았다. TV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외화 프로그램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였고,비디오 매체 역시 인기가 높았던 외화의 극장 흥행을 잠식했다. 1986년 여덟 기구에 한 대꼴로 보급되었던 비디오는 1960년대의 TV수상기처럼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신매체였다.-197쪽

비디오 판권을 제작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슨 1980년대 중반이다.비디오 시장이 영화 관객을 일부 빼앗아감으로써 영화시장을 축소시키는 요인도 되었지만 제작자본의 새로운 공급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극장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나 심지어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영화로부터 수익을 기대할수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 시장은 영화제작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87년을 전후로 한국영화의 비디오 판권료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강수연의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계기로 <씨받이>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뽕>,<어우동>,<변강쇠>,<내시>등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5,000개 이상 팔렸다. 이즈음 방화가 장사가 된다는 통념 아래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비디오 판권이 팔리기 시작했다.비디오 매체의 출현은 한국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쪽

반면 극장가는 계속되는 불황으로 대작영화의 리바이벌,심야극장 개관 등 다양한 흥행방식을 모색하였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197)TV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펼쳤던 전략이 와이드 화면과 공포영화였던 것처럼,컬러TV에 빼앗기는 관객을 붙들기 위해 대형영화의 리바이벌 상영과 <망령의 곡>,<월녀의 한>,<귀화산장> 등 괴기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 <닥터 지바고>가 75일의 롱런과 함께 3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벤허>같은 70MM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 1982년 3월 13일 밤 11시 30분 스카라극장에서 <엄마 결혼식>시사회가 열리며 심야상영이 처음 시도되었고,이어 <애마부인>의 심야상영은 젊은 연인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197,199쪽

1980년대 영화문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81년 공연법 개정으로 인한 소극장의 등장이다.300석 미만의 소규모 극장이 자유롭게 설립되자 그동안 개봉관,재개봉관,3~4번관 순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추세에서 시설이 좋은 개봉관과 집 주변의 신축 소극장으로 영화관람문화가 재편되었다.1986년2~3개관짜리 복합상영관의 등장 역시 극장가의 지형 변화를 초래했다.제작자유화와 수입 개방으로 쏟아지는 물량을 소화해낼 많은 극장이 필요해지자 대형극장들은 덩치를 현실에 맞개 축소하고 스크린 수를 늘리는 쪽으로 실리를 추구했다.-199쪽

4.영화운동과 독립영화 중 일부 / 저예산,기동성,간편한 조작법,대량복제 가능 등의 장점을 지닌 비디오카메라는 1980년대 영화운동의 판도를 바꾸었다.특히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광주민주화항쟁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비디오가 영화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실천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202쪽

시네필 문화의 생성 :1980년대 비제도권 영화운동이 독립영화로 이어졌다면,외국 문화원의 영화클럽을 중심으로 시네필 문화는 제작과 비평 양쪽에서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자양분이 되었다. 1977년 프랑스문화원을 거점으로 한 시네클럽과 1978년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연구회를 통해 전양준,정성일,강한섭,김홍준 등 이른바 문화원세대가 형성되었다.1983년 여름방학부터 서구 고전 영화제를 개최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도 시네필들의 메카가 되었다.박찬욱이 영화광으로 살며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곳을 통해서다.-203쪽

1989년 장산곶매의 <오!꿈의 나라>로 민중운동 도구로써의 영화의 기능이 정점에 달하자 시네필 문화는 위축되었다.이후 시네필 문화는 비디오테크가 보급되면서 1992년 문화학교 서울을 비롯한 사설 시네마테크를 통해 다시 명맥을 이었다.2002년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서울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센터에 안착하며 시네필문화는 다시 만개했다.-203쪽

4장 다시 르네상스,한국영화(1990~1999):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1990년대 초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게 된 맥락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성,대우 등의 가전회사는 비디오 프로그램 확보를 위해 일정 부분 영화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직배 이후 홈비디오 시장마저 할리우드 직배사가 장악하자,대기업들은 비디오 판권 확보에 다급해져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든 것이다.(212)(중략)1995년과 1996년 흥행 순위 톱 텐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의 전체 혹은 부분 투자 작품일 정도로,대기업 자본은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지방배급업자의 자금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충무로 제작 시스템은 비디오와 케이블TV 판권을 매개로 대기업과 결합했다. -212,213쪽

5.영화청년의 시대 : 1970년대 후반 프랑스,독일 문화원의 영화 모임을 통해 출현한 영화광 출신들이 이른바 '문화원세대'라면,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열혈 영화마니아들은 시네마테크세대라 부를 수 있다. 외국의 문화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가영화,예술영화 감상 공간은 영화공간 1895,씨앙씨에,문화학교 서울등 복사판 비디오를 상영하는 소규모 비디오테크 공간으로 이어졌고,이를 통해 성장한 영화청년들은 말로만 듣던 고전영화를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로 결집했다.-228쪽

영화청년들의 속에는 늘 영화잡지가 들려 있었다.1995년 5월,한겨레의 저널리즘 감각으로 영화광 문화를 증폭시킨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과 이보다는 좀 더 마니아층을 겨냥한 월간지 키노가 창간되었고 12월에는 할리우드 기사와 사진을 직송받는 라이선스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이어졌다. 영화전문지를 통해 영화문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고,영화비평 담론은 일상화되었다.문화학교서울,민예총아카데미,한겨레문화센터 등의 대중 영화강좌 역시 영화청년들의 갈증을 풀어주며, 영화비평의 대중화에 물꼬를 텄다.-2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