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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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나들목에서 저항하기,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기


- 보후밀 흐라발의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모국어로 쓰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판매 금지된 이 작품은 작가가 66(1980)가 되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언어로 공식 출간되었다. 소설의 화자인 는 한탸라는 인물이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생쥐들과 함께 삼십오 년 간 책과 폐지를 압축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는 그는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들이고자 했다. 기계를 외삼촌 집의 정원에 두고 매일 폐지 한 꾸러미씩 만드는 삶을 꿈꾸었다.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지식인들이 겪었던 수난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압축기 속의 책과 폐지처럼 억압 받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소설 속의 철학교수, 중앙난방 제어실의 근무자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 청소부, 성당 관리자등이 그런 예다. 지식인들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체제가 강요하는 상식과 충돌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소설에는 하구수에 사는 회색 쥐와 검은 시궁쥐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수구는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은유였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쥐들은 전쟁을 벌였고, 결국 검은 시궁쥐가 패배했다. 시궁쥐는 추방당한 지식인들이었다. 나치가 대학을 폐쇄되기 전까지 흐라발은 법학을 공부했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이런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다른 지식인들처럼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폐지 작업공은 그 중 하나였다. 소설에는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탸는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들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 그는 단지에 받아 놓은 맥주를 마셨고,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곤 했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 이것이 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 작업 중 발견한 희귀 도서는 집에 가져가 쌓아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십오 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비록 목욕이라면 질색인데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머리는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웠던 이유다.


한탸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젊은 시절엔 그에게도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비록 똥에 얽힌 사건으로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라하 교외에 사는 옛 연인 만차를 보러 갔을 때, 한탸는 잿빛 머리가 된 그녀의 새 집을 보았다.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정신적인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남자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러브 스토리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쥐들이 책을 올려둔 천개를 갉아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했던 한탸는 젊은 시절 그의 삶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탸의 퇴근길에 따라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집시 여자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녀는 저녁 장작용 널빤지를 구해와 매일 불을 지피고, 스튜와 소시지로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사라졌다. 게슈타포에 붙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나들목 - 폐지 압축기


사랑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마다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되뇌었다. 이 말은 소설 전체에서 되풀이되어 발견된다. 무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을 응시하는 화자의 만트라였다. 마치 냉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한탸가 다루는 압축기에는 두 가지 색의 버튼이 있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44) 한탸가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이 표현은 언제든 삶의 관성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직관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에겐 세상만사가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69)이었다. 현실은 한탸의 삶에 결코 다정한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압축기의 왕복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기 이루어지는(37) 세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던 화자는 사람의 환영을 보았다. 성경도덕경의 주인공 예수와 노자였다.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하듯 예수와 노자는 각각 미래로의 전진/낙관의 소용돌이근원으로의 후퇴/출구 없는 원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에 대응하기도 한다. 폐지가 작업장에 도착하여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노자)이었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예수)인 셈이었다. 유명 화가의 복제화와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면, 폐지 꾸러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꾸러미는 이제 새로운 예술작품이 되었다.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물성을 지닌 책과 폐지를 맨손으로 꾸리는 작업은 한탸가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장이 자신의 뇌와 혈관에 스며들게 하고,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또 폐지 더미 속에서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으로 조기 출근과 2시간의 추가 근무를 삼십오 년째 마다하지 않았다.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작동시키며 폐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삶 자체였다. 연인과의 사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압축기와 함께하는 작업은 그에게 유일하고 온전한 러브 스토리였다. 그러므로 압축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삶의 구심점이었고, 세상만사를 통찰하게 해주는 사유의 토대였다. 세상만사의 원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기계를 통해 이해되었다. 기계 속의 책처럼 존재를 억압하더라도 한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꾸러미처럼, 모든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기는 모든 존재가 거쳐 가는 나들목이었다.




추방당한 이방인,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다


행복한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들어선 후 견고하게 보였던 한탸의 삶도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압축기를 보러간 그는 폐지가 지닌 종이의 감촉,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한 채 장갑을 끼고 일하는 작업자들에 모욕감을 느꼈다.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새 책 더미가 그대로 폐기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는 젊은 일꾼들에 용기마저 잃었다. 휴가 및 여가 계획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업자들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량을 채우느라 한 번도 휴가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99)라는 독백에는 평생 일해 온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좌절과 체념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거대한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한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기계부품처럼 다른 작업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제 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나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 온 일꾼들은 한탸의 압축기로 불과 한 시간에 다섯 꾸러미를 만들어냈다. 청년들을 칭찬하는 소장을 뒤로 하고 한탸는 피로감과 굴욕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새로운 상황과 기계는 그를 배신했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의 작은 기쁨을 짓밟았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산업 현장에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106)는 말에는 깊은 좌절감과 극도의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한 순간 삶이 뒤바뀐 한탸에게도 변화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비인간적인작업 방식을 거부했다. 작업장을 나와 여러 술집을 전전한 그는 맥주와 럼주를 번갈아 마신 뒤 다시 같은 카페로 돌아왔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미래로의 전진’, ‘낙관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로부터 떠올린 근원으로의 후퇴’, ‘출구 없는 원주변에서 맴도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한탸는 평생 동안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는 책과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러브 스토리에 온전한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일까.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131) 압축기에 들어간 한타가 절대 고독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듯 떠올린 이 말이 내게 못 박히듯 들어왔다. 평생 몸담아온 장소와 시간의 역사가 부정당한 존재가 저항하며 홀로 내뱉은 선언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작업 조건, 나아가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의 모순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허먼 멜빌이 창조했던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합리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한 일에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작업 거부를 통해 수동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만에 작업장 밖에서 방황하다가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죽음을 택했던 상황은 사망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의 행보와 대척점을 이룬다. 나아가 한탸와 바틀비의 비타협적인 거부 행위는 단지 행위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대되었던 순응적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무화한 것이다. 두 인물의 저항은 수동적이나마 자본가들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게임 규칙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탸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 백지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압축기로 들어가며 삶의 근원으로 후퇴하기로 한 선택, 감옥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틀비의 선택과 접점을 이룬다. 두 인물 모두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의 행위는 상식이 폭력으로 작용하며 존재를 소외시키고 추방하는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긍정행위다. 한탸가 간파했다는 그리스도의 냉혹한 말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37)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소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다. 흐라발과 멜빌의 소설은 정치 및 경제 여건의 변화로 추방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틀비와 한탸는 세상의 게임을 만든 설계자·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패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규칙과 상식을 거부했고, 인간적인 삶의 본질을 관통하며 흐르는 존재의 가치를 지켰다. 한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탸가 간 길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비인간적이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1]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9)

[2]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

[3]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

[4]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18)

[5]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37)

[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바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44)

[7]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46)
-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문구를 풀어서 되뇌는 화자의 만트라.


[8]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9]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93)

[10]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6)

[11]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129)

[12]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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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2-09 17: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처음 나왔을 때 한 번 읽고,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두 번 읽은 책이네요 ^^

확실히 고집스럽게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모습은 바틀
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네요.

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리뷰 당선 감축드리옵니다 ㅎㅎ *^^*

초란공 2022-03-09 11:20   좋아요 0 | URL
mini74님 감사해요. 리뷰 2관왕에 동영상까지^^ 저는 mini74님만 보고 따라갑니다^^

새파랑 2022-03-08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려요~!! 연속 당선이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3-09 11:21   좋아요 3 | URL
연속 2관왕 하기는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09 11:22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도 조심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3관왕 가즈아~~ 구호를^^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10 22:3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감사합니다. 3관왕 이전에 저는 가랑이 찢어집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7-11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의 리뷰를 읽고 책을 읽는 게 더 나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
 
환각 -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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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은 신체 및 신경계를 들여다보는 문이다

- 올리버 색스의환각(2013)

 



올리버 색스가 지난 2015830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6년이 다 되어 간다. 신경과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환각 증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약물을 직접 체험하여 증상을 기록하거나, 환자의 소견을 면밀히 듣고 기록했다. 오늘 읽은 환각은 색스가 여든이 다된 시기에 집필하여 80세가 되던 2012년에 출간한 책이다. 1958년에 그가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신경학자가 되었으므로, 의사가 된 지 54년이 지난 시점에 출간한 책이다. 내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을 오로지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공부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덮은 후 이런 정황을 생각해보니 더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성인기 전체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었다.


이번 환각은 꽤나 더디게 읽었다. 환각과 관련한 개념 및 용어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각(hallucination)'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듣는 현상을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환각 증상 중에서 내가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증상은 죄수의 시네마라고 알려진 감각 박탈 현상, 귀울림/이명, 몇 가지 편두통 전조 증상(안내 섬광, 요새 무늬와 같은 것), 부분(초점) 발작, 입면 환각(잠이 들 때 무늬와 형체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환각), 수면마비 정도다. 물론 문외한인 내가 책에 소개된 증상만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각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체 증상들이었다.


구정 연휴 전에 갑작스럽게 대상포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대상포진이라는 녀석은 어렸을 때 몸에 들어왔던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건강상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 이를 테면 피로가 쌓였을 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후각 신경을 포함한 신경을 공격할 때 환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러스가 신경에 손상을 입히거나 자극하면서, 예를 들어 후각 환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매우 둔한 편이라 대상포진을 겪기 직전에 전조 증상으로 특정한 냄새 환각을 경험했는지 잘 모르겠다. 특별히 불쾌한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가 내 후각신경에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점은 환각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흔히 간질로 알려진 뇌전증에 관한 설명이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키고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이로부터 나타난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은 만성적, 반복적으로 뇌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뇌에서 비정상적인 전기 방전이 갑자기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뇌 기능에 마비가 오는 상황이다.


우리는 역사상 여러 위인들이 간질을 겪었다고 알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색스에 따르면, 그는 무아경 발작을 겪었다. 이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만 맞는 것이 아니라 황홀감과 같은 초월적 기쁨을 공통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한 곳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역자가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시절, 어느 부활절 밤최초의 간질 발작이 있었다는 다분히 시적인술회를 남겼다.”(문학동네, 2020, 제2권 446)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간질 발작을 경험한 시점이 총살형 직전에 살아나 수감된 시베리아부터라고 언급했다.


반면 색스는 환각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최초 발작 시기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은 유년기에 시작되었지만,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 40대에 들어서야 빈번해졌다.”(198)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이미 유년기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인 소피아 코발레프스키가 유년의 기억 Childhood Recollections에서 쓴 것처럼, 최초의 발작은 어느 부활절 전야에 일어났다(알라주아닌은 도스토옙스키의 간질에 관한 논문에 이 책을 인용했다)."(198-199)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을 최초로 유발한 원인이 총살형의 공포로 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스의 설명이 옳다면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총살형의 공포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번역자의 해설에는 올리버 색스가 제시한 두 가지 사실이 뒤섞여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유년 시절 어느 부활절 전야에 최초로 경험했던 간질 발작에 관한 언급과 시베리아 유형 시절에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한 발작 사례를 섞어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정리하면 색스가 진술한 부분이 옳을 경우, 죄와 벌(문학동네, 2020)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발작을 겪은 시기를 총살형 집행 경험 이후 시베리아 감옥에 수감된 기간 중으로 오해한 듯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에 영향을 준 것이 총살형의 공포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인지, 혹은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색스의 서술이 옳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총살형의 공포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아마 유형지에서 경험한 발작에는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이미 어렸을 때에 발작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생물학적인 원인 혹은 어렸을 때의 어떤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번역자 혹은 출판사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검토하셨으면 하는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신경학자 게슈빈트의 논문 내용이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성격을 논문에 이렇게 묘사했다. “도덕성과 예의 바른 행동에 점점 집착하고 몰두한 점, ‘사소한 논쟁에 말려드는경향이 갈수록 강해진 점, 유머의 부족함, 상대적으로 성에 무관심한 점, 그리고 높은 도덕적 어조와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낸 점”(200). 게슈빈트는 이 증상을 발작 휴지기 성격 증후군이라고 언급했는데(현재는 게슈빈트증후군으로 알려짐), 이 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은 종교에 대단히 열중하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글쓰기 혹은 강한 예술적 열정을 보인다고 한다. 색스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이 증상을 보고 떠오른 사람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그 역시 간질을 앓았다. 또 고흐에 관한 영화, 그가 남긴 편지와 관련 서적에 기록된 고흐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그 역시 종교에 대한 열정, 강박적인 예술적 열정과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내는 행동을 보였다. 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무아경 환각을 수반한 증상은 측두엽 발작 초점의 활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측두엽 부위의 특정 부위에서 과도한 흥분 상태를 보인다는 말이다.


환각에는 환각 증상과 관련한 다양한 증세와 관련 설명이 나온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섬망이 기억난다. 이 증상은 고열을 수반한 감염병 또는 신부전, 피질환, 당뇨 조절 실패 같은 문제들로 인해 의식이 요동치는 상태”(227)를 말한다. 이 섬망을 겪는 경우 대개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징후라고 한다. 색스는 마이클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는 중증 간염으로 간에 손상과 경변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체는 단백질 소화 과정 및 부산물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색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치즈를 권고량보다 많이 섭취했다. 그 결과 그는 꿈을 꾸듯 불안정하고 무의식적인 운동을 경험했다. 단백질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성분들이 뇌신경을 중독시켜 섬망 증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소개하는 다양한 환각 증상은 섬망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 경험하기도 하지만, ‘입면 환각과 같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환각 증상이 있다. 특히 색스는 편두통과 같은 여러 신체 징후와 이를 통한 환각 증상을 몸의 신경계를 보여주는 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문외한인 내가 혼동할 수 있는 꿈과 환각은 엄연히 다르다고 덧붙인다. 그의 관점에서 환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여러 가지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뇌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색스는 신체가 드러내는 여러 징후가 신경생리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가 사회적·문화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색스는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자신이 경험한 출면 환각경험을 이야기했다. 출면 환각은 잠이 깨면서 겪을 수 있는 시각 환각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턱수염이 까맣고 소심하다기보다 싱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마흔 살의 내 얼굴이 보였다. (...) 선명하지 않은 파스텔색으로 희미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263) 여든 살에 가까운 저자가 잠에서 깨어보니 마흔 살 즈음인 자신의 모습을 환각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는 이 출면 환각경험에서 40년의 세월을 건너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출면 환각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신체가 드러내는 증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편두통을 앓았고, 이 증세가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면서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그와 같은 관심사를 신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몸에 드러난 증상은 나의 신경계를 비롯한 신체 현상의 보편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몸소 보여주는 기회였다


환각을 읽고 좋은 점 한 가지를 더 들 수 있겠다. 그건 문학작품에서 유령/환영 혹은 환각에 관련한 장면이 나올 때, 인물에 관한 심리적 문화적 배경을 한 층 더 깊이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리아드, 오디세이, 성경에 등장하는 환영과 환청 사례에 다른 맥락을 가지고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드거 앨런 포, 드 모파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만나게 될 때, 색스의 아이 같은 호기심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 "암페타민이 주는 김빠진 조증과는 달리,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은 진짜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이었다. 나는 다시는 암페타민을 먹지 않았다." (158)

[2] "나는 자신의 편두통 경험을 일종의 자동적인(그리고 운이 좋게도 거꾸로 복기할 수 있는) 자연의 실험,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169)

[3] "편두통의 기하학적 환각은 신경계 기능의 보편 원리뿐 아니라 자연 자체의 보편 원리를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172)

[4] "발작이 다른 형태의 의식,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느낀다." (185)

[5] "지금은 기억이 프루스트의 식료품실에 진열되어 있는 절임과일 병처럼 고정되거나 동결된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행위를 할 때마다 변형, 해체, 재조합, 재분류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7)

[6] "상기는 고정되어 있고 죽어 있는 파편의 흔적들을 다시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상기는 조직화된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의 살아 있는 덩어리 전체와 우리의 태도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상상력이 가미된 재구성 또는 구성이다. (...) 그러므로 상기는 사실 거의 정확하지 않다." (197)

[7] "입면 환각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나 어둠 속에서 보이고, 가상의 공간에서 조용히, 쏜살같이 지나가며, 대개 물리적으로 방 안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출면 환각은 눈을 뜬 상태에서 밝은 조명에서 나타나고, 외부 공간에 투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완전히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260)

[8] "유령, 죽은 자의 돌아온 망령을 보는 환각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 및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 유령 출몰과 환각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286)

[9] "애도 과정에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며 유족에게는 도움이 된다." (290)
- 웨일스의 일반의 W.D. 리스의 말.

[10] "드 모파상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분신, 즉 자기 환각의 상을 보았다고 한다. (...) 드 모파상은 당시 신경매독을 앓았고, 병이 악화됐을 때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고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고 악수까지 하려 했다고 전한다." (327)

[11] "뇌의 신체 표상은 서로 다른 감각들의 입력 정보를 간단히 휘젓기만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가기 일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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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5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는 어제 앱으로 읽고 댓글을 바로 못 올렸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초란공님께서 많은 문장을 할애하신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이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초란공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발병 시기에 대한 정확한 특정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 때문인지, 즉 문화인지 생물인지 혹은 얽힘인지의 문제까지 끌어가셨네요.
중요한 지적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팩트체크(?^^) 해볼 가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곁가지 이야기지만, 제가 작년에 올리버 색스 책들 한 달 정도 집중해 읽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올리버 색스가 본인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향정신성 물질과 친해진 이후 기억력이 확 나빠졌는지를 회상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책 2권에서(어떤 책들인지 기억 불명확하나 [온 더 무부]는 그 중 한 권으로 확실할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더라고요. 당시 책 읽으며 저는, 이렇게 머리가 좋으신 분도 자기 이야기하는데 기억이 혼란스러우시구나. 연세드셔서 그런가...하며 지나갔습니다. 간질 발병 시기에 대한 팩트체크가 의외로 싱거울 수도 있겠다는 경솔한 생각도 해보고요.

초란공 2022-02-05 09:26   좋아요 0 | URL
네^^ 책에서도 본인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ㅋㅋ^^;;

얄라알라 2022-02-05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각> 읽으신 후, 좋아하시는 문학 작품 속 환영 환청 사례를 다른 각도에서 보실 수 있을 거라는 말씀, 긍정의 말씀, 같이 책 읽는 온라인 친구로서 좋습니다.

저는 <환각> 읽은 후 <장판에서 푸코 읽기> <나, 나자신 그리고 그들> 등의 책을 읽을 때 확실히 질문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1/2정도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올리버 색스는 ˝병˝을 상실이나 쇠락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았더군요. 그런 관점이 <환각>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고,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주말 아침 시작하시기를.

초란공 2022-02-05 09:29   좋아요 1 | URL
<장판애서 푸코 읽기>는 궁금하던 책이네요. 이 책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확실히 책을 빨리 못읽지만 또 다른 책이 정해지면 열심히 따라가보겠습니다~! 정성껏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얄라알라 2022-02-05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대상포진 이겨내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몸 힘드신 와중에도 <환각> 읽으시며 리뷰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상포진 성인이 어린이와 같이 생활할 경우, 수두 예방접종 여부와 별개로 수두 옮길 수 있다 합니다. 하지만 괜찮으셨을테니, 참 다행입니다.

초란공 2022-02-05 09: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ㅜㅜ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로가 풀리는 정도가 이젠 다르더라고요 ㅋ

얄라알라 2022-02-05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쉬시는 주말이신데...^^;;

제가 제 서재에 ˝라 & 라 &란˝이라고 이름붙여 보았답니다.

여유되실 때,https://blog.aladin.co.kr/757693118/13317879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원히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 지음, 이지민 옮김 / 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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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울 레이터

: Forever Saul Leiter

사울 레이터 사진 | 이지민 옮김 | [윌북] | (2014)

 



컬러 사진의 대가 사울 레이터가 전하는 삶의 비결

 


몇 년 전 사진가 사울 레이터의 컬러 사진 몇 장을 처음 보았을 때 곧바로 매료되었다. 그 사진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빛바랜 프레임 속에 멈춘 상태로 비밀스럽게 담겨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붉은 코트의 여인, 혹은 붉은 우산을 들고 펑펑 눈이 내리는 길을 가는 여인,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서 있는 우아한 곡선의 초록색 롤스로이스와 같은 사진들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진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레이터의 사진집에 얽힌 한 사건으로 나는 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사람뿐만 아니라 책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다면, 사울 레이터는 참 독특한 인연으로 내게 찾아왔다.


 

아마 2018년이었을 텐데, 내가 이용하던 공공도서관에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 2018)이라는 사진집이 신간 도서로 도착했다. 이 책은 본래 20174월에 일본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으로 출판된 책이었다. 책을 대여할 때, 도서관의 사서는 내가 대출한 후 반납하자마자 이 책은 폐기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신간 도서가 바로 폐기될 예정이라니. 그 이유가 궁금하여 사서에게 물어보았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사서는 사진집에 노출사진이 있다는 이유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누드 사진 몇 장이 있다는 이유로 사진집이 도서관장서 보관 규정에 어긋난다고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이의를 제기해도 규정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단지 이 책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불편했기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한 끝에, 이 책을 분실했다고 신고했다. 도서 정가에 해당하는 벌금을 도서관에 내고 말이다. 이것이 내가 ‘OO도서관이라는 스티커와 분류 기호가 붙은 사울 레이터의 책이 내 책장으로 입양된 사연이다. 원래 있던 표지(빨간 우산을 쓰고 눈길을 걷는 표지 사진)는 사라지고, 도서 정보 칩이 심어진 후, 이제 분실로 변제된상태로 내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사울 레이터의 사진과 그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영원히 사울 레이터 Forever Saul Leiter역시 2018년에 출간된 전시 도록 형태의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책과 빼닮았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책은 과거에 선보인 작업이 아니라 주로 새로 발굴된사진들이 추가된 책이다. 레이터는 1948년부터 컬러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 40년이 지난 90년대가 되서야 그의 필름이 본격적으로 현상되었고,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직 현상되지 않은 수만 장의 사진들이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작업을 노출시키고 성공할 기회를 잡으려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야망의 도시 뉴욕에서, 레이터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으려 했던 사진가였다.


 

레이터는 패션 사진업계에 종사하면서 미국 사진 역사의 주역들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기준과 다른 자신만의 성공 기준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중요했던 것은, 책과 그림,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게 좋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좋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좋아서

내게 마음써주는 이에게 나도 마음을 준다.

내게는 이것이 성공보다 중요했다.”(155)


 

원문에서 레이터는 enjoy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했고, 그 일을 꾸준히 하며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이 행복감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사진가의 소소한 삶이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고 간결한 문장에서, 그리고 'enjoy'라는 표현에서 온전히 느껴졌다. 책에는 사진가의 글이 많이 담겨 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몇 마디의 언급만으로도 그의 일관된 삶을 그대로 짐작해볼 수 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레이터의 사진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대상을 그대로 촬영하기보다 유리창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면서 표현 효과를 의도하거나, 사진가와 대상 사이에 있는 물체를 화면의 구성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거리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던 앙드레 케르테즈나 카르티에-브레송, 혹은 워커 에반스, 윌리엄 클라인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레이터의 남다른 색에 대한 감각이 더해지는 것 같다.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사울 레이터에는 사울 레이터의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그가 찍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색(color)이 그의 사진에서 차지하는 남다른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자체가 지니는 추상성의 존재감이 아주 크게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색이 관람자와 상호작용하며 일으키는 심리적 역할이 컬러 사진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미국 사진사에서 컬러 사진의 대표주자인 스티븐 쇼어나 윌리엄 이글스턴과 같은 이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비교하면, 레이터는 이미 1948년부터 컬러 슬라이드 필름으로 묵묵히 작업을 했지만 이것이 타인의 인정을 받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비판(흑백 사진만이 예술 사진이라는 생각으로 컬러 사진 작업을 무시했던 경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던 점에 주목해본다. 그는 그저 쭉 계속하기만 하면 선구자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가 컬러 사진의 선구자가 된 비결이었다.


 

60년 넘게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살면서 줄곧 같은 장소에서 꾸준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면서, 여기에서 무한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재능이라 할 수 있다면, 레이터는 이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출간된 미공개 사진들 역시 한 장 한 장이 삶의 경이를 발견하는 하이쿠를 연상하게 한다. 젊은 시절 그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업과 사진을 인상 깊게 보았던 것, 그가 모은 책과 그림에 일본 관련 서적이 많았던 것 역시 그의 사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또한 이번에 출간된 레이터의 사진집은 그가 직접 사진 선별과 전체적인 사진집의 성격, 흐름에 직접 관여를 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출간된 것이기에 다소 아쉬운 점은 남는다. 나아가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을 섞어서 배열한 점은 개인적으로 그의 느긋하고 고요한 사진을 감상하는 데 산만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출간한 정식 사진집 Early Colors(2006)을 아직 감상하지 못했기에 나의 아쉬움과 주관적인 판단은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이 사진집은 35 mm 슬라이드 필름으로 40-50년대에 작업한 사진들을 담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지는 사진집이다. 앞으로 레이터의 사진들이 더 빛을 보게 되어 소개되기를 바란다.


이번에 출간된 사진집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그의 삶과 생애에 좀 더 다가간 것으로 만족한다. 개별적으로 말하는 레이터의 수록 사진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 이 때부터 사진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사진가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그의 사진들은 겉으로 드러나고 인지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현실의 이면을 관람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간결한 텍스트(text)를 제시하되, 화면의 맥락, 콘텍스트(context)는 오로지 사진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매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또 이 책에는 자신의 모습과 2살 터울의 여동생 데버라(Deborah)에 대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앳되고 명민한 동생의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데버라는 안타깝게도 20대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하여 보호시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 같은데, 다시금 레이터가 담은 어린 동생의 모습에서 동생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있는 듯하다. 인생의 덧없음과 더불어 말이다. 사진은 대상의 부재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대상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주는 매체다.


 

사울 레이터의 동생 데버라(왼쪽)와 평생의 연인 솜스 밴트리(오른쪽)

(출처: 영원히 사울 레이터, 윌북, 2021)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레이터가 동생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여성의 사진도 수록되어 있다. 그는 패션모델로 일했던 솜스 밴트리를 50년대 말에 만났다. 그녀가 2002년에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40여 년 간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서 함께 살았다. 사진가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사진이 최고라고 인정해주었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 곁에는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던 모습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었기에 레이터가 솜스를 담은 사진들을 보면 외설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친밀한 신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 책이 모두 고인이 된 사람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이나 밀착 인화지를 조금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독자의 호불호는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레이터가 여러 여성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고 인화한 사진들을 거칠게 명함 크기로 잘라 만든 조각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렌즈 앞에 마주한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존중하는 마음 없이 결코 나올 수 없는 사진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울 레이터의 삶은 물질적 가치가 최우선시 되고 있는 시대에 그림이나 사진, ,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함께 평생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물론 삶에서 어려운 국면은 누구나 겪을 테지만, 이를 견디는 힘이 단지 물질이나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기도 한다. 사울 레이터가 보여준 모습에서 삶의 비결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직 아이패드로도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며 즐거워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호크니가 그저 네가 좋아하는 걸 그려라고 했을 때, 그는 사실 인생에서 행복의 비결을 알려주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젊어서 화가가 되고 싶었던 레이터는 그림 그리는 일을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견디고 보다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울 레이터는 60년 넘게 한 장소에서 살면서, 55년 넘게 사진을 끊임없이 찍고, 40여년 넘게 같은 여인 곁에서 사랑과 돌봄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살았던 행복한 사진가였다. 그는 82세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첫 단독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의 사진과 삶이 내게 건네는 말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에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를 아끼고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레이터가 남긴 사진과 그림, 그리고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었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세상과 사람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보고 기쁨과 경이를 발견하기로 한다.  



도서관에서 '입양'한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 2018)과 

이번에 출간된 영원히 사울 레이터(윌북, 2021)




[1]
"책을 소장하는 게 좋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좋다.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좋아서
내게 마음써주는 이에게 나도 마음을 준다.
내게는 이것이 성공보다 중요했다."(155)

[2]
"사진은 찾아내는 것이지만 그림은 만들어내는 것이다." (78)
- 사진과 회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결하게 설명한 말.

[3]
"우리는 색채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97)
- 사울 레이터는 색이 갖는 추상성에 대한 본능적이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사람 같다.

[4]
"신비로운 일은 친숙한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늘 세상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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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2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기지로 사울레이터의 흔적이 폐기될 재앙이 막아졌네요. 이런 입양 스토리라면, 한 번 듣고도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psyche 2022-02-04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출 사진이 있으면 도서관에 둘 수 없군요! 옛날도 아니고 2018년인데!
초란공님 덕에 폐기될 처지에 있던 책이 구출되었으니 다행이에요.
 
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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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는 행위

-모리스 블랑쇼카오스의 글쓰기(2012) 읽고



 


카오스의 글쓰기는 비평가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가 남긴 단상 형식의 글 모음집이다. 17세기의 수학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남긴 팡세의 형식과도 유사하다. 제목의 카오스재난, 재앙을 의미하는 désastre에 대한 번역어를 옮긴이가 무질서와 같은 국면으로 해석하여 채택한 용어로 이해된다. 옮긴이가 선택한 용어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타당하다. 그는 용어 선택을 고심하고 이와 관련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드러난 결과물은 저자뿐 아니라 번역가의 손을 떠난 것이고, 용어의 정합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카오스를 이따금씩 파국이라는 의미로도 읽었다. 불시에 들이 닥치는 것, 정체가 파악되거나 통제될 수 없기에 완전한 수동성을 지닌 무질서,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국면에 가깝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국에는 부정적인 암시가 있기에 온전한 대안은 아니다. 한편 카오스는 도래한 기점에서 어김없이 진행되는 상전이 현상의 경계같은 것, 하지만 존재의 비가역적인 변신이자, 환골탈태의 전조이기도 하다. 질료는 그대로이나 동일체는 사라지고 다른 성격의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 그 전후가 결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카오스는 주체가 자신의 뜻대로 불러오거나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거대한 물결 속에 뒤섞여 흘러갈 수밖에 없는 쓰나미와 같다.


 


죽음과 글쓰기


이 책에서 블랑쇼는 여러 유형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언어의 부정성이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죽음존재가 사라지는 결정적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이 두 유형의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자에 따르면 언어가 가져오는 죽음이란 구체적 시공간이 추상적 관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결정적 죽음은 몸이 구체적 공간(세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두 유형의 죽음은 모두 일종의 분리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고독을 초래하고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에 전자는 후자를 예고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262-263).


작가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고 이를 글쓰기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블랑쇼의 글쓰기는 그가 통과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대인과 이들의 메시아사상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데, 그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글쓰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으로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이를 고발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친구로 만나 평생 교제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 역시 유대인이었다. 블랑쇼는 동료가 겪은 고통과 공포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레비나스의 가족을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피신시키고 보호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저자는 불시에 들이닥친 카오스의 공포와 죽음을 말하는 글쓰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블랑쇼가 겪은 재난’, ‘카오스의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라고 썼다. 이 문장의 영역문에 'take care of란 표현이 보인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주체가 제공하는 돌봄과 배려의 의미를 갖지만, ‘책임과 영향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도 고려해볼 수 있다. 곧 카오스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들이닥친다는 사실, ‘카오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는 의미로서 말이다. 따라서 배려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카오스가 미치는 무차별적인 오지랖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을 포함하여 재난과 반드시 마주하고야 만다. 카오스’, ‘재난혹은 파국은 광야에서 칠흑 같은 밤이 다 가도록 천사와 몸싸움을 벌였던 성서 속의 야곱처럼,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무질서와 혼란의 국면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야곱은 천사와 힘겨루기를 했을까. 어쩌면 야곱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도 카오스의 국면에서는 상대와 힘겨루기 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오스’, ’재난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렸다. 이 젊은이는 자기 가족을 화장터로 데리고 가야 했고, 목을 매달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친위대가 총살형을 집행할 때 그는 희생자의 머리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목덜미에 총알이 잘 들어가도록 말이다(147).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성적으로 진술하리라 기대하긴 불가능하다. 처음에 극한 공포감이 찾아왔어도, 역치를 넘어버린 자극이 만성화될 때, 모든 것이 무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집단학살을 목격하고 기절했다는 나치의 2인자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의 빈도를 늘리고 가스실을 사용하도록 명령한 것처럼 말이다. 생명이 대상화되고 사물이 되어버린 순간, 아우슈비츠에 있던 젊은이는 공포감 대신 판단 중지가 찾아오고, 기억 상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젊은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폭력이 남긴 무()의 흔적이다.


블랑쇼에게도 재난혹은 파국의 경험이 갑자기 찾아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블랑쇼 역시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서 나치에게 처형당하기 직전, 아군의 폭격과 레지스탕스의 선제공격으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순간을 자서전적인 책 나의 죽음의 순간에 기록해두었다고 한다(12). 극한 경험을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석방 직후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겪었던 것처럼, 블랑쇼에게도 불가항력으로 찾아온 경험은 그의 몸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두 사람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면, 재난 속에서 재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118)


앞에서 언급한 두 작가의 사례처럼 글쓰기는 일상이 전복되어버린 자들,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는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프라두에게 재난은 비밀경찰 멩지스와 함께 예기치 않은 상태로 도래했다. 죽어가던 멩지스를 살려낸 후 그를 찾아온 경고는 이웃 사람들이 뱉었던 침, 사람들의 경멸어린 언어와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유대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내쳐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도 열어주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던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고향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기와 글쓰기


블랑쇼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광기에 대해 언급한다. 다만 광기가 곧 카오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번역자가 재난이란 표현 대신 카오스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 역시 이것이 규정하기 힘든 무질서의 상태처럼 파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도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해 있는 것’(23)이며 재난(désastreuse)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전락(轉落)의 신호’(24). 하지만 카오스는 그 자체로 긍정과 부정의 판단과는 무관한 듯하다. 그는 카오스가 다만 재난을 가져오는 불행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173)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경고처럼 작용한다. 다만 바깥에서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뿐. 이 때 추방당한 자의 글쓰기는 광기에 대항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행위로 보인다.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89)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199)


블랑쇼에게 작가는 단지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낮에도 수면이 불가능한자다. 그들은 광기가 수반하는 고통 속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카프카의 글쓰기가 광기에 맞서는 광기의 제스처였던 것처럼, 인간의 광기에 대응한 균형유지(글쓰기)는 인간이 지불해야하는 대가였다. 이것이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내 안의 광기와 마주하고 이에 맞섬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광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103)


글 쓰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의 광기를 다듬은 결과로 이해된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주로 사회 혹은 규범으로 정해지는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다. 경계 내에서 인간의 광기는 으레 규제되고 억압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일정 부분 다듬어 지고 경계 내로 받아들여진 인간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사진론을 이야기했던 롤랑 바르트가 광기를 다루는 예술로서의 사진을 이렇게 이야기한바 있다.


사회는 사진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할 위험이 있는 광기를 완화시키고,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밝은 방, 동문선, 2006, 143)


앙리 마티스는 사진이 기록에 적합한 매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될 가능성을 부정했던 반면, 바르트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완화되고 다듬어진 광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사진이 예술임을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광기에 맞서는 예술 행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글쓰기 -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기


나의 읽기와 쓰기의 시작은 내가 속한 사회에 내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나름의 열심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열심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허둥댔으나, 그럴수록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부유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쓸모없음을 되새기는 나와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행위였다.


옮긴이 해제에서 번역자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말을 빌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기에 대해 언급한다. 르클레르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간다는 것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혹은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269). 이때 살해를 위한 무기가 바로 언어.


경계 밖에서 부유하던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했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 닥친 파국앞에서 나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나를 숨기려고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를 인정하고 긍정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망할 수 없었고, 내 삶이 자명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카오스의 글쓰기나의 쓸모없음, 그리고 실패한 삶에 방치되어 있는 나를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나의 타자와 어쩔 도리 없이 힘겨루기를 하고 기진해버린 야곱이었을 뿐이다.


르클레르의 언급을 참고하면, ‘재난의 경고가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안의 아이를 살해하지 못한 셈이다. 이 아이는 생명의 움직임이기에 결코 죽을 수 없음에도 나는 이 아이를 살해했어야 했다.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그를 살해하지 못한 것, 나아가 살해된 아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데서 나의 위기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나에게 강력한 무기인 언어가 주어졌음을 안다. 블랑쇼에게 글쓰기는 인간을 통해 드러난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에 맞서고, 고통 속에서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던 언어의 죽음과 사람들의 결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101)


도스토옙스키나 블랑쇼,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 프라두는 자신의 예상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경계 밖으로 내쳐진 자들, 완전한 수동성으로 삶에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카오스의 국면에서 이들의 글쓰기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살해하기이면서 동시에 살해된 아이를 위한 애도하기였다. 블랑쇼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와 가스실, 홀로코스트를 빈번히 글로써 호명하는 이유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고, 이것과 분리되기 위해서 죽음을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는 블랑쇼의 말에는 작가가 겪었던 고통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블랑쇼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192)라며, 동시에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우라고(239) 제안한다. 나 역시 글쓰기를 통해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할 수 있기 바란다.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살해된 아이를 애도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임박한 카오스앞에서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

[2]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 (118)

[3]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4]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 (89)

[5]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6]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은 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 (199)

[7]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 (103)

[8]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 (101)

[9]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10]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울 것."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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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건강은 많이 나아 지셨나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 대신 SNS이미지 놀이 할것 같습니다 ㅎㅎ

설연 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초란공 2022-01-30 11:06   좋아요 1 | URL
네~ 이제 통증은 없고 찐한 별자리 같은 수포자국이 남아있네요 ㅜㅜ Scott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이 책은 애초에 이해가 불가능(?)한 책이었다.

하지만 블랑쇼라는 사람과 그의 글을 처음 접하고 받은 인상을 

남기는 정도로 시작해볼까 한다.

훗날 오늘 쓴 글이 엉터리(?)였음을 확실히 알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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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글을 남기는 것,

텍스트 '바깥'의 모호함이 바로 '카오스', '재난'이다.


그 가운데 언어를 붙드는 행위, 텍스트와 씨름하기.

이 텍스트와 나와의 상호작용이 곧 '내 안의 어린 아이',

'결코 죽지 않는 생명력'을 끊임없이 살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건 재난에 대한 부단한 긍정, 깨어있기다.


그러므로 언어를 붙드는 자, 작가는 고통 속에서 결코 잠들 수 없는자,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다.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의 참모습.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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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2-01-28 10:06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래도 이 책 때문에 대상포진이 온 것 같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던데요.... ㅜㅜ 그러니 지난 두 주간 피로에 쩔어 있는데 누우면 따가워서 잠이 잘 안오고 ㅋㅋ ㅜㅜ 작가는 아니지만 불면의 고통이 이 책 때문인듯 합니다 ㅋㅋ

stella.K 2022-01-28 10:10   좋아요 3 | URL
앗, 그렇군요. 이제부턴 재밌고 즐거운 책을 읽으십시오. 다시 건강해지실 겁니다.😄

초란공 2022-01-28 10:15   좋아요 3 | URL
네. 그래야겠어요^^
그런데 이 책은 덮고 나면 묘하게 다시 생각나는 매력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신기하지요. ㅋ
stella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stella.K 2022-01-28 10:26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런 지뢰가 있었네요. 앞으로 초란공님 말씀은 끝까지 잘 듣고 24시간 숙성 시간을 거친 다음 말씀 드려야겠군요.🤣
네, 초란공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2-01-28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어를 붙들다˝ 뭔 말이 이렇게 멋진가? 감탄하다가 댓글을 읽다보니 초란공님, 최근 대상포진을 앓으셨나봅니다. 후유증도 생길 수 있는 힘든 병이라고 들었는데 쾌유하셔서 컨디션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초란공 2022-01-29 07:59   좋아요 1 | URL
네 ㅜㅜ 이제 다 나아갑니다. 그나마 통증은 약한 상황이라 다행입니다^^;; 주말에는 <환각> 정리해야겠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