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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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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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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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미국 단편소설의 코드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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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규정되기 어려운, 그러나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개념



그로테스크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미술문화] (2024)

 



문학 혹은 보다 포괄적인 범주로서의 예술에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말할 때 무엇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까? 그로테스크를 읽기 전에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뭔가 음침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정도 이해도 틀리진 않겠지만, 지극히 제한된 이미지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학술적이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거칠게 조사해본 바로는 우선 어떤 기준으로부터의 일탈에 해당하는 요소가 이 개념에 담겨 있다. 고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져 있던 기이한문양들은 해괴한 생물의 형태를 띠는 것이 많다. 사람 몸에 뱀이나 말이나 사자 다리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 혹은 기묘한 형태의 덩굴 식물처럼 보이는 대상들이 보는 이에게 무언지 모를 스산함을 일으킨다.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고대의 그로테스크적인 것들은 무엇보다 자연 질서에서 벗어난 것 혹은 이 질서의 와해를 가져오는 요소를 지닌다. 곧 질서로부터의 일탈,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이해된다. 결국 어떤 대비되는 요소들의 병치와 혼합이 가져오는 낯설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는 문학에서 대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의 우스꽝스러움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이 예술가들에게는 점차 뜻하지 않은 어떤 상황에서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등장할 때를 의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웃음이라는 인간적인 행위를 천박하고 조야한 것으로 여겼던 귀족들의 절제되고 엄숙했던 규범을 조롱이라도 하듯, ‘귀족이 아닌 계층들의 웃음 코드는 기존의 질서를 와해하는 요소로서 그로테스크의 외연이 확장되어 온 정황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귀족이나 식자층만이 향유하던 문학 혹은 예술 향유의 세계에 점차 민중이 침투하고 얽히면서 그로테스크 개념은 불가피하게 변형 혹은 확장의 단계를 거쳤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개념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섬뜩함을 여전히 함께 유지한 채 말이다.

 


그로테스크의 저자는 19세기 정도까지 형성되어 유지되어온 고전적인그로테스크의 개념 이후 변화 혹은 확장된 개념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미국 근현대 단편소설로부터 보다 현대적인 그로테스크개념을 찾아내고 있어 내겐 신기하고 무척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저자는 미국 문학에서 미국적 그로테스크의 코드를 추적하고 있다. 미국 근대 단편소설의 전범이 되었던 에드가 앨런 포에서 출발하여 현대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까지, 10편의 대표 미국 단편을 뼈대로 두고,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개념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나의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 대한 논의다.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미국의 서해안과 동해안 지역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적인 정서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학술적으로 검증된 의견은 아니다) 대신 미국적인 정서를 들여다보려면 남부로 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미국적 그로테스크개념을 추적하며 언급하는 작품 가운데 연작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20세기에 들어 산업화되어가던 미국 남부의 정서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남부 그로테스크southern grotesque'라고 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이 특수한 개념은 미국 국토의 양쪽 해안가 주변의 대도시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반면 깊숙한 미국 내륙, 흔히 남부라고 지칭되는 곳의 중소도시로 방향을 틀어, 이 시기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여파로 한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농촌 사회가 결국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기의 인간 소외와 고립의 문제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 이전까지는 정상성으로부터 일탈한 존재, 규범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괴물 같은 그로테스크적 존재가 관심의 대상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의 불일치’, ‘불편함’, ‘낯설음의 정서를 새롭게 주목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그로테스크한 특성은 더 이상 주로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소외와 고립이라는 정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왔다는 의미”(74)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유럽 문화 및 예술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고전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은, 이제 신대륙의 내륙 깊은 곳에 자리 잡으며 삶에서 분리되어 파편화하는 개인들”(67)에 대한 개념으로 새롭게 확장되어 갔던 셈이다. 이러한 미국적 그로테스크가 개인의 내면을 비추고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자아 안에 동화되지 않은 타자로서 여성적인 것”(70)과 같은 퀴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저자가 소개하는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소설 가운데 <>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런 점들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을 또 잘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인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남부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한국 독자로서 이 작품의 그로테스크적 성격을 처음부터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탈옥수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살해되는 가족과 살인자들이 나누는 종교와 구원에 대한 기이한 상황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때 고려해야할 부분이 남부 근본주의(종교적 극단 혹은 광신이라는 뉘앙스로서)이며 여기에 다크 유머가 추가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른바 총구 앞에서 남부적인 정서로 살인자와 미소지으며 대화하는 기이함에 주목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문학에서는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이 뒤섞여 있고, 숭고함이 추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이러한 다크 유머가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141)

 


남부의 그로테스크가 잘 드러나는 오코너의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물론 한국의 독자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다크 유머와 비극,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병치되고 얽혀 있는 상황에 주목해본다. 피 구덩이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한 할머니의 시체. 물론 이 장면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만, 이 소설은 여기에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코너의 소설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적 정신 혹은 교리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유한 정서와 같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곧 오코너의 단편이 그로테스크한 것은, 단순히 살인이라는 소재나 기독교적 소재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낯설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미국 남부의 정서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텍스트 너머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큰 제약을 느낀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오코너의 1960년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 역시 소외되고 단절된 인간 내면의 풍경을 하나의 그로테스그적 요소로 제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자는 이후의 미국 문학에 관한 논의에서 토니 모리슨이라는 걸출한 작가의 포스트모던 그로테스크나, 그로테스크 개념을 젠더화한 조이스 캐럴 오츠, 베트남 전쟁 시기 이후의 인간들의 내면과 감정, 불안 등에 주목하는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 속 그로테스크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고 있다. 각 작가와 작품에 대한 독서 역시 앞으로의 영미 문학 작품 감상에 좋은 참고가 되겠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국 단편 소설들에서 찾아본 그로테스크 개념은 결코 정의되지 못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야말로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진 자연 질서의 와해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문양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도록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재생산, 확장, 변형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마치 마르지 않는 찰흙처럼 문학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는 한, 시대와 호흡하며 공진화해가는 개념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규정되기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작의 요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닌가 자문해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음악에서의 어떤 일탈적인 시도(형식적이든 기교적이든) 역시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새로움 혹은 낯설음으로 다가와 그 순간의 그로테스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새로움이나 낯설음을 느끼지 않을 테고, 그러면 또다시 이 국면이 앞으로의 새로움, 혹은 파격을 예비하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는 결코 정의되지 않을 무언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어쩌면 창작하는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어떤 내적 충동의 결과일수도 있지 않을까. 진부함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욕구, 혹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정신과 같은 것 말이다. 그로테스크를 읽고 나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에 대해 정리해본 바는, 우선 이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존재 혹은 진부함을 거부하는 예술가의 창작 충동과 더 관련이 있을 법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의 형식과 작품에서 우리는 그 시대와 호흡하며 작품에 입김을 불어 넣었던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적인 창작 원리로서의 그로테스크개념을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것 같다.

 

 



#그로테스크 #한동원 #미술문화 #예술감상을위한미학세미나 #남부그로테스크 #미국식그로테스크 #남부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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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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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모른다로부터 문학은 시작한다.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박희진 옮김, 솔출판사, 2019

 




마침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과 만났다. 쉽게 읽힌 책은 아니었다.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 가운데, 1부에서는 램지 씨네 가족이 주로 등장한다. 이들은 저명한 교수인 듯 보이지만 아내/여성으로부터 인정과 관심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램지 씨와 그의 부인 램지가 주로 등장한다. 이들은 매년 스코틀랜드의 서쪽에 있는 어느 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낸다.

 

램지 부인은 바다 건너에 외로이 서 있는 등대에 가보고 싶어 하는 아들을 세워두고, 등대에 갈 경우 등대지기 아들에게 줄 양말을 짜는 장면이 나온다. 부인은 아들을 모델로 양말 길이를 어림해 보는 중이다. 짜던 양말 길이를 꼼지락거리는 어린 아들의 몸에 대보는 잠깐의 시간 동안, 램지 부인의 의식은 확장되어 몇 페이지나 이어진다. 몇 페이지나 지났을까, 부인은 다시 생각에서 벗어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들을 타박하고는, 다시 양말의 길이를 잰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느 순간 바뀌어 있다. 각 화자의 내밀한 의식이 제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은 타인들에 의해 파악된 일부 특징들이 단서가 될 뿐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타인을 규정하는 방식이 늘 이렇지 않은가.

 

영문학 전공자들은 울프의 문장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울프 입문자가 처음부터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겠지만, 기회가 되면 원문으로도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이다. 단 울프의 소설에 대한 첫인상은, 울프의 실험적인 문체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점이다. 램지 부인이 바라보는 풍경처럼 화자의 의식이 불현 듯 확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의식이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의도를 염두에 둔다면 울프의 문체는 정말 탁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영어가 익숙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램지 부인은 가족을 위해 이타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인간적인 내밀한 욕망과 소망을 간직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잊기 쉽다. 가족의 일을 정신없이 돌보는 가운데 내밀한 그녀의 바램이 스쳐지나간다.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혼자 남아 사색에 잠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작가는 램지 부인의 욕구와 자의식을 주목하고 있었다.

 

반면 소설에는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더 놀라운 부분은,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한 문장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심지어 결혼한 딸이 출산에서 죽은 사건과 참전한 아들(작품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소설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 집필되었다.)이 전사한 사건도 한 문장으로 처리할 뿐이다. 작가에게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섭리였음에도, 그녀는 작품에서 아주 간결하게, 마치 일상의 루틴처럼 처리하고 있어 오히려 충격을 준다. 이에 비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면은 여러 인물의 내면이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표류하는 과정이 이루고 있다. 2부에서는 여러 등장 인물들의 죽음이 아주 간결하게 처리되며 축소되어 있다. 무엇보다 1부와 3부를 잇는 전환점으로서의 역할이 더 클 것 같다.

 

3부는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램지 가문의 지인인 화가 릴리 브리스코우는 이들 가족의 여름 별장에 초대받은 식객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침내 등대를 향해 배를 타고 간 램지 씨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건 인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면의 스크린을 비추는 작업에 초점이 맞추어진 듯하다. 아이들과 함께 부산하던 램지 가족이 등대로 떠나고, 램지 씨로부터 무언의 청혼 압력을 받던 릴리는 비로소 혼자남게 된다. 이제 오래전 사망한 램지 부인의 초상화 작업을 다시 시도한다. 등대로 가는 배를 바라보던 릴리는 캔버스를 향해 돌아서서 자신이 무언가 시도한 흔적을 알아본다. 이 무언가를알아차린순간이 그녀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녀는 그림의 한가운데에 선 하나를 그려 넣으며 나는 드디어 통찰력을 획득했어(I have had my vision)."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는 장면으로 작품은 끝난다. 우리는 릴리가 알아차린 통찰력 혹은 시각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역자는 해설에서 이 소설의 서사가 이기적 세계에서 이타적 세계로의 여정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타적 세계에서 이기적 세계로의 여정이 더 어울린다고 느꼈다. ‘개인의 발견과 자아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다. 단독자로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 무언가 되어가는 과정, 그 순간 순간의 표류하는 여정, 혹은 그 순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릴리가 마주하는 이 에피파니의 순간이 내게는 동시에 인간 존재가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무목적성과 공허, 타자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으로 다가온다. 홀로 고립되어 있고,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등대로 나아가는 램지와 아이들의 배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각자 삶의 여정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듯 해서다. 아울러 램지 부인이 남편의 결핍과 단점을 알아보면서도 남편의 훌륭한 점들 또한 함께 생각해 보는 장면은, 모든 존재를 한 가지로 규정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는 물론 작가 울프의 인간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이었기에 가능하지 않겠는가.

 

인적성 검사니, MBTI니 하면서 이런 잣대만으로 처음 보는 나를 함부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의 이런 인식과 가벼움을 거부하고 싶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우리는 이 모른다로 만나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울프가 창조한 인물들이 타자를 생각할 때, 이들의 의식이 끊임없이 표류하면서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기도 하는 과정이, 마치 램지 씨와 아이들이 작은 배를 타고 등대로 나아가면서도 때론 조류에 떠밀리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존재임을 자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러나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처음 만난 버지니아 울프가 내게 가르쳐준 바다.

 

 

#버지니아울프 #등대로 #박희진번역가 #솔출판사 #버지니아울프전집 #우리는타자를이해할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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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 1950-1955
카지이 노보루 지음, 정미영.박소영 옮김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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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 교사가 남겨 놓은 희망의 씨앗

 


카지이 노보루,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정미영/박소영 옮김, 몽당연필, 2023

 



코로나19가 급속하게 전파되던 20203월 즈음 읽었던 기사 한편이 기억난다. 일본에 있는 어느 중소도시에서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에 코로나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면서 조선학교 유치부를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내용이었다. 내 눈을 믿기 힘들었다. 이건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4년 전의 기사였다. 21세기에 공공기관이 솔선수범하여 배제와 차별에 앞장서는 졸렬함이라니! 심지어 기사는 시 직원이 ‘(조선인은) 마스크를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 모른다는 취지의 폭언도 스스럼없이 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관련 사건에 대한 사설을 읽어보았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은 이미 오랜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깝게는 2013년 아베 신조 정부의 고교무상화정책과 관련한 사례가 있었다. 이 정책은 고교수업료를 무료화 하겠다는 취지라 명목상 많은 일본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정책에 조선학교만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를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차별을 제도화한 것은 우려스러웠다. 이 조치는 몇 년 전 조선학교 유치원 및 보육원에 인도적 차원에서 마스크를 배포하는 일에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한 근거가 되었다. 일본 사회에 염치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제는 왜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학교에서 5년 간 근무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책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를 읽으며 내내 궁금했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는 일본이 패망한 후 재일조선인들이 교육 현장에서 겪었던 수난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겼다. 귀한 기록물이다. 그가 조선인학생들과 함께 한 경험들은 단순히 교육 현장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2020년 당시 조선학교 유치원생들에게 공공기관이 주도한 합법적차별은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문제와 얽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학교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무엇보다 일본의 정치권과 공권력, 권력의 눈치를 보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언론까지 가세하여 만든 총체적 결과물로 응어리진 결과다.

 

일본의 패망 후 연합군사령부(GHQ)의 교육담당 장교 듀렐이 도쿄의 조선인학교를 시찰하며 개 잡듯이 죽여야지.”(62)라고 했던 대상은 누구였던가. 그리고 조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조선인학교 문제를 치안 문제로 이야기하던 이들은 누구인가. 저자가 같은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기도 했다. 나아가 일본 식민주의 지배세력의 조선인 혐오, 그리고 미국의 세계패권 야욕과 철저한 반공주의가 결합하며 찾은 희생양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1951228일 오전 630분에 무장한 경찰 예비대대 520명이 도립조선중고등학교 건물과 기숙사에 침입했다. 훗날 이 사건을 2·28사건이라고 불렀다. 도둑처럼 학교에 급습하여 학생들의 교과서나 숙제, 미술작품, 수첩까지 압수하며,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75)라고 고함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곤봉까지 휘둘렀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자가 당시의 광경을 묘사한 이미지를 군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의 일본의 모습과 겹쳐놓으면 아마도 어긋난 곳을 찾기 힘들 것”(77)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은 또다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올해로 101주기를 맞은 간토대학살 사건(19239)이었다. 일본 군부의 주도하에 일본자경단들이 일본도뿐만 아니라 죽창으로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사건이 아니었나. ‘그들의 구호가 조선인을 다 죽여라!”였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조선인학교의 폐교는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현재 및 미래의 타자를 숙청하는 방법이었다.

 

엄혹했던 일본의 식민지 시절, 한인들은 일본의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도 있지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패전 후 조선인들에 대한 속죄는커녕, 보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지우는 일에 몰두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흔적지우기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정황을 엿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등한 대우를 말하며 동일한 책임을 요구했지만, 조선인들은 정작 받아야할 혜택에서 언제나 제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대의 젊은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중학교에 부임하여 마주했던 것은 학생들의 냉냉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일 조선인들의 박탈감을 이해해야 넘을 수 있는 선이었다. 조선인학교에 온 신임 일본인 교사들은 달아매기라는, 학생들의 불신어린 심문을 받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자신들의 학교를 망가뜨렸다는 반감으로 가득한 학생들로부터 일본의 문부성 및 교육위원회의 스파이로 간주된 것은 저자가 조선인학교에서 처음 마주한 현실이었다.

 

조선학교에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지 않은 사례 역시 저자가 그토록 맞서 싸웠던 조선인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학교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몇 년 전 조선학교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하고 충동적인,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야만으로 치달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였다. 이를테면 식민주의, 제국주의/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의 이념이 인류에게 가한 폭력의 세계사적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된 대목 하나는, 조선인학생들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해 저자가 성찰한 대목들이었다. 조선인에게 올바른 민족교육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조선인학교 문제가 곧 일본의 교육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119)을 간파하고 있던 소수의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 아이들 12만 명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한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을 아래에서 엿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 해야만 한다.”(138) [홋카이도에서 온 요시다 하츠미 씨의 언급 재인용]

 

여기에서 교사는 교육자로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문제부터,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해국의 국민과 평화를 위한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배경에 속한 집단의 친선을 도모하고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일이 우선 요구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흉터는 남아도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줄곧 추구하던 민족교육의 문제는 양국의 건강한 평화와 독립을 위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이런 지점까지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인간으로서 후손인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는 교육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통해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따라간 여러 일본인 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조선인 교사와 조선인학생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립조선학교는 결국 1955331일부로 폐쇄되었지만, 이 책이 남겨놓은 것은, 결국 희망의 씨앗이라 여긴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를 비롯한 여러 참여 지식인들의 존재 덕분이다. 그가 남겨 놓은 이 씨앗이 책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계속 전달되고 읽히고 기억된다면, 언젠가 새롭게 싹이 트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감해본다.





[책 속으로]

[1] "새로 채용된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들의 분노와 슬픔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 한 학교에 교장이 둘이나 있는 이상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조선인학교에 근무하고 나서다."(24)

[2] "그 아이들이 일본에 영주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이미 역사를 통해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인이 원해서 조국을 버리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도일한 이가 많기에 조선이 평화롭고 완전한 독립국만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35) [도교육위원회에 제출한 청원서 재인용]

[3] "선생님! 우리는 조선인이에요.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말도, 나라도 빼앗겼어요. 얼굴은 조선인이지만, 조선말도 역사도 모른 채 살아왔어요! 선생님, 누가 선생님에게 일본어를 써도 안 되고 배워도 안 된다면서 학교 문을 닫아버리고 감옥에 집어넣으면 화가 나지 않겠어요?"(41)[일본인 교사 S의 기록]

[4] 4·24 교육 투쟁-재일조선인연맹 강제해선-전국 조선학교 폐쇄-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필름 위에, 남북의 분단과 일본 국내에서 미 점령군의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비민주적 행태를 아무런 설명도 수식도 없이 겹쳐놓고 보았을 때, 내 나름대로 도립조선인학교의 위치에 대해 깨닫게 된 것 같다."(62)

"문부성이 ‘조선인학교는 학교교육법에 따라 사립학교로 취급할 것’(1948년 5월)이라는 통달을 발표한 직후, 도쿄도 내 조선인학교를 시찰하러 온 GHQ 도쿄군 교육담당 장교 듀펠은 군홧발로 교실에 들어와 김일성 초상화를 보며 "개 잡듯이 죽여야지."라고 중얼거렸다. 조선인에 대한 감정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도 드물 것이다. 그는 교원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의 숙청을 강하게 추진했던 자타공인 철저한 ‘빨갱이 혐오자’였다." (62)

[5]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내려 한 교사에게까지 "교사면 다야?", "감히 국가 권력에 불만을 품어?",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라고 고함쳤습니다."(75) [3·7사건에 대한 기록 재인용]

[6] "수색 영장도 없이 3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무기 하나 없는 학교에 쳐들어와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에 과연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게다가 무저항 상태의 학생들과 사태를 수습하려던 교사들까지 폭행한 것은 물론이며 신문사 카메라맨과 의사까지 폭행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폭력단이나 다름없었다."(77)

[7] "인식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99)

[8] "지금까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여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인식함과 동시에 현재 일본이 처한 상황과 겹쳐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해야만 한다."(138)

[9] "내가 상당히 고심해서 완성한 구상은 두 가지 기둥으로 이뤄졌다. 첫째, 고교 이하는 의무교육으로 하고 운영도 공비로 하지만, 교육 내용은 재일조선인이 자주적으로 실시하는 것, 둘째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지키는 일이 일본인의 민족교육을 확립하는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142)

[10]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시설 등 제반 운영에 필요한 조건 마련은 일본 정부가 하고, 교육 내용과 조직을 만드는 일은 조선인 스스로 책임지고 확립해 가는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재일조선인 교육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44)

[11] "일본의 아이들이 풍요로운 일본인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아이들도 역시 풍요로운 조선인으로 자라나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대한 속죄로서 일본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토록 단순명료한 논리가 5년간에 걸친 조선인학교 생활을 지탱해준 논리다."(206)

[12]"언어가 가장 고도로 승화된 것이 문학작품이라 생각한 점과 난독 학습을 하다 보니 36년간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의 비극을 맞은 조선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확실한 실마리가 문학 속에 훨씬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그 무렵부터 다시 20년이 지났다. 나의 공부는 마치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하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조선을 알아가는 일은 어쩌면 나에게 남겨진 반생의 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나를 뒤따라올 것 같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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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4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심이 살아있으면 일본인이든 누구든 정의는 지켜지는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