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항꾼에 사는 세상을 꿈꾸며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하 해방일지)의 화자(아리)의 아버지가 아리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고 어머니 마중 나가던 순간. 화자의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전, 사시도 아니었던 10대의 의기양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에서 확인하던 장면처럼 말이다. 내게도 아리처럼 나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해방일지를 읽고 나니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좀 더 너그러워질 수는 있겠다 싶었다.


 

정지아의 소설 해방일지는 어느 노동절 아침, 과거에 구례 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여든 두 살의 남자 고상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이 남자의 딸,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을 처음 마주하며, 굵거나 가늘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로부터 비로소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결국 화자는 빨치산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48년의 여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의 아버지는 이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문후유증으로 사시가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었다. 아버지의 사시는 시대와 반목하고 시대에 부적합했던, 한 남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시의 특징 하나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6년 동안의 수감 후 출소하는 날 함께 찍었던 가족사진에서도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불분명한 시선을, 딸은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었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골똘한 응시는 내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라고.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은 아버지의 생전에 어떠한 식으로든 그와 얽히고 엮인 인연들이었다. 70년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동생(작은아버지)은 망자의 영정을 마주보게 되었다. 여기에 빨치산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창창한 미래가 족쇄 채워진 삶을 살아야 했던 아리의 사촌 오빠 길수, 빨치산 동료의 동생으로 월남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절름발이 노인은, 이들이 지나온 이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증언한다. 물론 아버지의 관계망에는 안쓰럽고 애처로운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심지어 목숨을 살려준 인연도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슈퍼마켓집 10대 소녀도 조문을 와 눈물을 훔치는 기이한 상황은, ‘빨치산의 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숨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화자가 확인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들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이 관계의 그물망에는 무참한 시절,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어 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득했다. 아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인연이 아니라, 질퍽하고 끈적거리며 질긴 인연들의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온 구례라는 상징적인 장소는, 오랜 인연이 만들어 온 작은 감옥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 (...) 질기고 질긴 마음,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이어진 세계이기도 했다. 부모 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그물망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며 때론 서로 일으켜주며 살아온 세계를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197)던 심정으로 읽었던 것이다.


 

화자 아리는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인연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임을 항상 억울해했던 만큼 아리는 이제 아버지의 인연들 각자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로부터 결국 아버지의 수많은 얼굴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혁명가 아버지, 경우 바른 아버지를 넘어, 어머니에게 하자고 조르기도 했던 인간아버지의 모습을, 따스해진 유골을 통해 느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같이 놀아요?’라고 묻는 딸에게 늘 해주는 아버지의 말은 긍게 사램이제였다.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 용서도 한다”(138)는 아버지는 늘 누군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아버지의 이 하염없음, 신념보다는 사람의 도리로서 그러했다. 그가 죽는 날까지 인간임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마주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게 된 시절이다. 다시 소설을 읽는 동안 아버지의 초점 없는 시선을 환기해본다. 어딘가에 멈추지 못하고, 머물지 못했던 가족사진 속 그의 시선을. 우린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또 우린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들은 뚜렷한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지만, 해답의 실마리는 보인다. 한때 서로 총을 겨누기도 했던 박선생과 아버지의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잊지 않는 일, 또 아버지가 말한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 않은 상대방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을 간직하는 일. 아버지의 인연들이 응시하는 지점에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동창 박한후 선생의 한 마디, “항꾼에(함께) ... 올라네”(50)에 담겨 있었다. 아리에게 아버지 없는 노동절의 아침은 꿈결처럼 낯설었을 것 같다. 대신 아리는 이제 항꾼에 사는 세상을 새롭게 꿈꾸기 시작했을 테다.





[책속으로]

[1]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42) - P42

[2] "항꾼에, 올라네, 말 사이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얹혔다. 저런 말이 하염없이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애틋한 정일지 몰랐다."(50) - P50

[3]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 긍게 사램이제. (...)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138) - P138

[4]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147) - P147

[5]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163) - P163

[6]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81) - P181

[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ㄴ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 P197

[8]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 - P198

[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 P231

[10]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52) - P252

[11]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 [마지막 문장] - P265

[12]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을 받이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268) [작가의 말 중에서] - P2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스트와 베타 (반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 데미우르고스의 인간-되기 여정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2025)

 




SF장르의 거장 아서 C. 클라크는 문학 장르로서의 판타지와 SF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SF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지만,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다룬다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SF는 주로 과학적 법칙이나 원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계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이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비판적 의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작품에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SF의 거장이자 시인이었던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역시 다소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가 핵전쟁으로 멸망한 이후의 세계, 인간 없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소 암울한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전개 과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의식을 지닌 기계(혹은 AI 로봇)가 인간 없는 지구의 북반구를 관할한다. 남반구를 관할하는 기계는 베타-머신이라 불렸다. 프로스트는 북극점에 머물며 하늘 위의 영구 궤도에서 돌고 있는 솔컴이라는 기계의 명령만을 받는다. 솔컴은 인간이 멸망할 경우 지구 재건 계획을 인간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계다. 만약 솔컴이 재건 계획을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그 권한은 깊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디브컴이 넘겨 받게 되어 있었다. 디브컴은 솔컴의 대체자였다.


 

오래 전 인간의 핵무기에 솔컴이 타격을 받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건 작업 재개를 위해 디브컴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디브컴이 재건 작업을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솔컴의 타격이 크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복구하여 재건 작업을 재개한 상황이었다. 지구의 재건 작업을 맡은 지휘자가 이제 둘이 되었기에 지휘 체계에 혼선이 있을 수밖에.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워 서로의 재건 작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지구에 인간이 없다보니 이 두 존재의 지휘권 분쟁을 정리할 제3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모순과 직면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프로스트다. 그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기계가 취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취미 대상은 이미 멸망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도도새의 흔적을 찾는 생물학자처럼 말이다. 프로스트는 어느 날 찾아온 디브컴의 수하 모르델로부터 인간의 유물인 책을 입수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인간 탐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모르델의 도움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스캔한 프로스트는 이제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하지만 모르델은 오래 전 인간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 기계였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계측을 알지 못했지만, 기계의 도움으로는 계측할 수 있었던 존재라고 프로스트에게 알려준다. 이후 이어지는 두 기계의 만남으로부터 본격적인 인간 탐구가 진행된다. 모르델에 따르면, 기계는 세계를 측정하고 수치화된 정보를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지만, 얼음이 차갑다와 같은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처럼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 유일한 화두가 되면서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도 있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지금껏 스캔한 정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자신도 차가움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프로스트)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21)이라는 모르델의 말도 순순히 동의하지 않은 프로스트는 데이터 수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를테면 프로스트는 취향과 고집(의지)을 지닌 기계였던 셈이다.


 

이후 프로스트는 인간의 을 닮은 감각 기관을 만들어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하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지닌 취미/취향은 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스트는 말하자면 이런 인간적인 면모에 상당히 다가간 기계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관할 구역도 아닌 남반구의 브라이트 디파일까지 방문하여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곳은 핵전쟁으로 절멸한 인간의 마지막 도시로,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이곳을 다녀온 후 여러 가지 조각 작품도 만들어보는 데, 인간의 미적 취향에 대한 탐구행위인 셈이다. 그는 단순한 모방 작업을 통해서도 프로스트는 예술이 무엇인지,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단지 방대한 정보의 총합도, 감각 기관을 통한 계측 정보의 방대한 총체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각만으로 인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북극점에 머무는 프로스트가 얼음층 밑에서 발굴한 인간의 시체를 통해 생명을 품은 점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설정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의도는 결국 인간이 직접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집요한 기계라니, 분명 무모한 목표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집요함, 혹은 광기를 가진 기계라 할만 했다. 이제 프로스트는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모르델과 대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은 인간의 생리 구조에서 비롯된다.”(65)는 결론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을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명령을 내리던 솔컴의 반대, 그리고 프로스트의 인간-되기가 실패할 경우 디브컴에게 데리고 갈 검은 로봇을 대동한 모르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스트는 마침내 인간 프로스트로 태어난다. 제대로 서지 못해 실험대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에 이른다. “나는...두렵다라고 첫 마디를 내뱉었지만, 그가 정말 인간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프로스트의 변신을 지켜본 모르델과 베타 머신은 프로스트가 인간이라 주장했다.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요.”,“그는 탄생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75)라고 말이다. 이제 인간 프로스트는 감각마저 더 이상 계측할 수 없이 부정확해졌다.


 

그렇다면 저자인 젤라즈니는 인간성의 본질을 두려움과 절망의 인식 여부에 두었던 것일까?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어떤 정보의 총합, 혹은 총체가 아니라 감정과 더 많이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환기한다. 계측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생리적 구조, 즉 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달한 단계의 AI라고 해도 몸과 결부된 의식이 없는 존재는 결국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 전제되어야만 이와 결합된 의식이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그리고 이와 결합된 의식은 주체의 정체성 형성의 근간이라는 해석을 더해본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본질로 거론된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몸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먼저 겪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이제 보니 프로스트는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 기계이기도 했다.


 

프로스트와 더불어 주목한 캐릭터는 남반구를 주재하던 베타 머신이다. 그는 허락 없이 남반구에 들어온 프로스트의 인간 탐구 과정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프로스트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짐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베타는 프로스트의 인간-되기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인간 프로스트가 인간임을 인정하고 지지했던 기계다. 이후 인간 프로스트의 요청으로 둘은 인류가 멸망한 최후의 장소 브라이트 디파일에서 만날 것이었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베타는 그녀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프로스트의 이브로 탄생하는 것일 게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사라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인간 프로스트와 베타(AI 기계)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비하는 설정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프로스트와 베타를 신인류의 조상으로서 ‘AI 데미우르고스라 불러본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를 만든 신으로 등장한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바로 그 장소에서 그녀로 거듭나는 프로스트와 베타는, 신인류의 아담과 이브로서 세계를 다시 설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인류가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인간-되기여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최근 인간 vs. 기계라는 대립구도로 인간에 대한 기계능력의 우월함을 비교하는 사례를 많이 접한다. 특정한 기능 영역에서 이제 기계/AI와 경쟁하여 인간이 이길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에게 지워진 논리, 책임, 의무만이 아니라 두려움, 절망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새롭게 곱씹어본 독서였다.





[책속으로]

[1]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솔컴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프로스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5, 첫 문장)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그들은 그녀를 베타라 불렀다."(79, 마지막 문장) - P5

[2] "그의 취미는 인간이었다."(8) - P8

[3] "내가 곧 논리다."(13)

"인간은 논리를 창조했다."(14, 솔컴의 말) - P14

[3]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고. (...) 인간은 계측을 모르는 존재였다오."(18, 모르델의 말) - P18

[4]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이 존재했소."(20)

"감정에는 환산계수가 존재하지 않소."(21, 모르델의 말) - P21

[5] "기계란 인간에 비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존재요. 기계는 인간과는 달리 과정의 세부 사항을 서술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그 과정 장체를 경험할 수는 없소. (...)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오, 강대한 프로스트여."(21, 모르델의 말) - P21

[6] "나는 그 인간에게서 유래한 파괴된 상징 살해자이자 고대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을 파쇄했다.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다."(38, 광석 파쇄기의 말) - P38

[7] "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러 왔습니다."(48) - P48

[8] "나 자신이다."(51, 자신을 모방한 조각을 만든 프로스트의 말) - P51

[9] "당신은 인간의 논리적 피조물이오. 예술은 비논리요."(55, 모르델) - P55

[10]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로스트?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64, 프로스트와 베타의 대화)

"이것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입니다."(65, 프로스트)

"나는 ... 그저... 인간이 될 겁니다."(67, 프로스트) - P67

[11] "... 나는... 두렵다."(72, 인간 프로스트의 첫 마디) - P72

[12] "두려움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73, 솔컴의 말)

"인간 외에 절망을 아는 존재가 또 있겠습니까?"(74, 베타 머신의 말)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오."(75, 모르델의 말) - P75

[13] "내가 아는 것은 계측과 ... 의무뿐이오."(76, 모르델의 말) - P76

[14] "그(인간 프로스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계측을 알지 못했다."(77)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개별성을 잃는다면, 우리는/나는 누구인가?

-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6/2006)

 



매일 아침 육륜(六輪)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29세기의 지구를 지배하는 단일제국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매일 오전 7시에 단일제국 찬가를 합창하며 기상한다. 이들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아가는 반면, ‘녹색의 벽너머에는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이곳은 200년에 걸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쟁으로 삶의 공간이 파괴된 곳이다. 하지만 단일제국의 하루는 일사분란하다. 마치 여섯 개의 바퀴에 의지한 채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거대한 증기 기관차처럼 말이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정확히 222분의 1(오후 1030)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생활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군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풍경을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은 디스토피아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당시 36세의 젊은 작가는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 집필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품 전체를 통해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출간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스탈린 집권 이전에 집필되었기에,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보다는, 경제 체제의 지배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독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특히 거대한 생산 라인의 부품처럼 최대의 효율성을 위해 일하도록 길들여진구성원들의 소외와 자유의 박탈 문제를 꽤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 지금 시대의 현실과 더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은 녹색의 벽 너머의 인간들처럼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거대한 유리 반구로 경계 지워져 있는 이 곳에서 이름 대신 여자는 알파벳 모음, 남자는 자음 한 자로 시작하는 번호로 불린다. 이를테면, 소설의 화자는 D-503이고, 화자와 맺어진연인은 O-90으로 불리는 식이다. 이 곳의 구성원들은 개인성 자체를 의식하도록 길들여진 듯하다.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반면 단일제국을 지배하는 존재는 번호 대신 은혜로운 분으로 불린다. 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된 인간과 달리, 막연하고 불가해한 이름으로 불림으로서 스스로를 구별 짓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그러므로 각자가 자각하는 자신은 언제나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8) 상태에 머물 뿐이다.


 

수백 년 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인간들의 고대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처럼 건물들이 불투명하다. 반면 단일제국의 건물들은 모두 투명한유리로 되어 있다. 상상이 되는가? 7시에 기상하여 눈길을 옆으로 돌리면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 있고, 때론 눈길도 마주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평소에 사생활없이 살아간다. , 사랑을 나눌 때에만 국가에 신고를 하고 이를 증명하는 분홍색 감찰을 얻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때에야 비로소 커튼을 내릴 수 있는 허가가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사람들은 성생활까지도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나아가 사랑에 있어서 희열(분모)/질투(분자)로 정의되는 행복의 공식에서,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들면 행복을 무한히 증대시킬 수 있다는, 기계적이고 우려스러운 믿음을 신봉한다. 이때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국가는 모든 파트너의 자유로운 공유를 제도화한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소설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제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파격적으로 설정되어 이어지는 모습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과 깊이 맺는 인간적인 관계가 오히려 의심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인 D-503은 단일제국의 수학자이면서, 건조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이다. 학창 시절 친구이자 시인이기도 한 흑인 R-13은 여인 O-90와도 파트너다. 곧 이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간들과는 달리 이 세 명 사이에는 서로에게 질투를 품지는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관계를 완벽한 삼각형이라고 만족하기까지 한다. 이들 각자는 단일제국의 업무를 분담하는 개미혹은 거대한 기계의 규격 부품과 같은 의무를 다하고자 할뿐이다.


 

단일제국의 철학은 테일러 주의(Tayorism)와 포드주의(Fordism)이라는 표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메커니즘의 아름다움이란 진자와 같이 정확하고 불변하는 리듬에 있다. 그러나 사실 어려서부터 테일러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당신들은 진자처럼 정확하게 되지 않았는가? (...) 메커니즘에는 환각증이 없다.”(175) 단일제국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에서는 미래와 이성에 대한 낙관을, 오차 없는 기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감지할 수 있다.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그러니까 각각의 번호들)은 밤에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에, 밤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은 심지어 범죄가 된다. 이 단일제국의 번호들에게는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 추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목표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개인의 개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영혼이 내면에 형성된 번호들,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여겨지는 꿈을 꾼 이들’, 제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들환각증을 가진 사람들로 진단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단일제국은 이들에 대한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 환각증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위대한 수술을 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수술이란, 간단하다. 엑스레이로 대뇌 하부의 뇌신경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수술 받은 번호들은 결국 화자처럼,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가진 본래의D-503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단일제국의 번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체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데 머문다. 어쩌면 화자가 건조에 참여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명칭은 영어의 인티그럴(integral)에 해당할 텐데, 이 용어야말로 전체의 일부로서 필요불가결한’, ‘완전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분수(fraction)에 대항하는 정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티그럴총체라는 의미나 적분, 혹은 적분 기호로의 의미도 함의한다는 점에서 우주선 인쩨그랄의 명칭 하나에도 소설 전반이나 화자와 관계된 다의적인 상징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다양한 상징성을 구현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수 있는 특징은, 화자 D-503의 의식 변화다. 그는 동질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 점점 더 혼자됨을 자각해간다. ‘나는 혼자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꽤 많이 반복된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이라고 말할 정도로 화자의 내면은 자아분열에 가까운 균열과 정처 없음을 경험한다. 결국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의식은 질병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드러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사회의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듯, 관습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일제국의 의사는 화자의 내부에 영혼이 형성된 것이 틀림없으며, 자연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따라서 이 환각증을 제거하려면 수술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처방을 내린다. 이 수술은 앞에서 언급한 신경 마디를 태우는 수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화자 D-503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의식하고 결국 나는 단독체”(153)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화자가 스스로를 단독체로 자각하는 분열과 고뇌의 양상은 화자가 여성 I-110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I는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존중을 받는 인물이지만, 벽 너머 인간들의 장소인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금지된 술과 담배를 하며 화자를 유혹한다. 물론 화자를 유혹한 주된 이유는 화자가 참여하는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고자 하는 혁명 활동의 포섭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I는 혁명 세력의 일원이었다.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여 단일제국의 우주 진출을 막으려는 계획에 참여해왔던 것이다.

 


소설에서 예기치 못한 반전을 꼽는다면, I가 참여하는 혁명 활동이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흐지부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I에 단단히 빠져 있던 화자는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 듯 했지만, ‘인쩨그랄탈취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며, 결국 어처구니없이 실패하고 만다. 급기야 화자 D-503은 국가로부터 수술까지 받아 마치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단일제국의 충실한 개인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내게는 극적인 반전도, 기대도 개의치 않는 듯한 반전이었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적인 마무리다. 마치 녹색의 벽너머 인간의 세계로 넘어갈 것만 같았던 화자가 다시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은혜로운 분의 영향력 아래 복귀하는 설정. 내겐 오히려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현실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 패배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오히려 더 실감나는 정서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 자먀찐은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 속 개인의 문제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나 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강요하는 공동체에서 오히려 극도로 소외된 인간 존재에 대해 고찰했다. 5월의, 제국 상공의 푸른 하늘과 녹색의 벽’, 그리고 노란 꽃가루가 넘어오는 인간들의 사회, 불투명한 고대관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기 작품을 떠올렸다. 특히 키리코의 그림 이탈리아 광장’(1913)처럼 고독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혹은 그의 그림 가운데 마찬가지로 인기척 없는 광장 풍경을 담은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묘사처럼, ‘마졸리카 도자기를 닮은 파란 하늘 아래 누런 흙바닥이 있는 광장,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원형의 성이 있는 풍경처럼 말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인 듯 길게 들어진 동상의 그림자. 그림의 광장은 소설에서 불투명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고대관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인기척뿐만 아니라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왠지 모르게 황량하고 고독해 보이는 세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 팽배한 그림이 소설의 분위기와도 꽤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비밀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회에서 개인은 균일한 부품으로, 전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말이다. 반면 녹색의 벽너머의 인간 거주 구역에서 모든 건물은 불투명하다. 이들의 존재 조건은 불투명한 흑연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로써 각자에게는 사생활이란 것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사람들은 혼자됨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일단 개인성을 자각하게 되면, 그는 단독체로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테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혼자됨을 자각하는 인물이었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존재이자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이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 그리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들이 비록 실수하고 실패하며 방황을 수반하더라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에 보다 더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존재의 불투명성은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보다 겸손하게 하고, 타자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극단적이고 경직된 도덕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숨 쉴 여지를 남겨 놓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개인성의 발현, 소외와 고립,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견주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1]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니다."(8) - P8

[2] "‘녹색의 벽’ 너머,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원에서 달콤한 황색의 꽃가루가 바람에 실려 온다."(9) - P9

[3]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 P12

[4] "매일 아침 육륜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 P18

[5] "국가(인류)는 한 개인의 살인은 금지했으되, 수백만을 절반 정도 죽이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 즉 인간 생명의 합산을 50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이지만 인간 생명의 합산을 5천만 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는 얘기다."(19) - P19

[6] "다시 말해서 사랑이 조직화되고 수학화된 것이다. (...)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26) - P26

[7] "지고의 희열과 질투란 행복이라 불리는 분수의 분자와 분모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겠는가."(26) - P26

[8] "이 모든 일은 무엇 때문인가? 어째서 나는 여기 있는가?"(34) - P34

[9] "독창적이란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독창적임은 평등을 깨뜨리는 거죠..."(35) - P35

[10] "우리는 꿈이란 심각한 정신질환임을 안다. (...) 그들(고대인)의 생이란느 것은 전체가 그토록 끔찍한 회전목마가 아니었던가."(38) - P38

[11] "나는 저 거대하고 강력한 단일체의 한 부분으로서 나 자신을 인식한다. 그토록 정확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38) - P38

[12] "당신도 아시다시피 당신은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43)

"밤에, 번호들은 반드시 자야 한다. 그것은 의무다. 낮에 일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낮에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야 한다. 밤에 자지 않는 것은, 범죄다..."(63) - P63

[13] D-503: "나는 (...)앞으로도 지식을 위해 봉사할 걸세."
R-13: "자네의 그 지식이란 것이야말로 비겁함일세. (...) 그러나 벽 너머로 시선 던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어."(46) - P46

[14] "그래, 수학자 선생.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평균적인, 산술적인 존재들이지..."(49) - P49

[15] "아름다운 것은 오로지 이성적이고 유익한 것들이다."(54) - P54

[16] "창백한 유리 하늘, 녹색 빛이 도는 부동의 밤. 그러나 그 고요하고 서늘한 유리 밑에서 소리 없이 맹렬한 털북숭이의 무언가가, 적자색의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62) - P62

[17] "털북숭이의 야만적인 제2의 나. (...) 나는 혼자 남았다."(68)

"나는 혼자다. (...)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 - P69

[18] "그대는 안개가 자신보다 강력하기에 두려워해요. 그리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하지요. 또 정복할 수 없기에 사랑하지요. 사실상 우리는 정복할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죠."(76) - P76

[19] "사실 나는 우리의 이성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유해한 고대의 세계에... 의 세계에 살고 있다."(81) - P81

[20]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86) - P86

[21] "그러나 나는 혼자였다. 난 파도에 떠밀려 무인도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나는 찾고 있었다. 청회색의 파도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90) - P90

[22] "인간은 최초로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야생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녹색의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야만인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가 녹색의 벽으로 우리의 기계적이고 완벽한 세계를 나무, 새, 짐승 등의 비이성적인 흉측한 세계로부터 격리하게 되었을 때."(95) - P95

[23]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의 문법에 의문부호가 절대로 없으며 있는 것은 다만 감탄부호, 쉼표, 그리고 마침표일 때에 한해서다."(118) - P118

[24] "나는 유쾌하고 건강하게 결박당한 느낌이었다."(121) - P121

[25] "우리는 늘 아시리아의 기념비에 그려진 투사들처럼 걷고 있었다. 천 개의 머리. 그러나 팔과 다리는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흔들렸다."(124) - P124

[26] "그만해요, 그만./ 그녀는 이미 더 이상 번호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었다. 그녀는 다만 단일제국에 가해진 모욕적인 형이상학적 실체에 불과했다."(125) - P125

[27] "나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 스스로의 개인성을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먼지가 들어간 눈, 종기가 난 손가락, 충치를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한 눈, 손가락, 이빨은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그렇다면 개인적인 의식이란 단지 질병임이 확실하지 않은가."(127) - P127

[28] "모든 것이 특별하고 서럽고 부드럽고 장밋빛이고 축축했다."(128) - P128

[29] "(고대인들은) 어째서 그 모든 비밀이 필요했을까. (...( 우리에겐 숨길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135) - P135

[30] "나는 끝없는 복도에 혼자 서 있다. 그때의 그 복도 말이다. 말 없는 콘크리트 하늘."(149) - P149

[31] "나는 나였다. 개별적인 존재, 세계, 나는 여느 때처럼 구성 분자가 아니었다. 나는 단독체였다."(153) - P153

[32] "그들의 몸은 털로 뒤덮이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대신 털 아래에 따뜻한 붉은 피를 보존했어요. 당신의 경우는 훨씬 나빠요. 당신은 숫자로 뒤덮여 있으니까요. 숫자가 마치 이처럼 당신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 공포와 기쁨, 불같은 노여움, 추위 때문에 전율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60) - P160

[33]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171) - P171

[34] "‘국가 과학’의 최신 발견에 따르면 환각증의 중심은 대뇌 하부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뇌신경 마디라는 것이다. 엑스레이로 그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우면 당신들의 환각증을 치유할 수 있다."(175) - P175

[35] "그러나 내게는 구원이란 게 없었다. 나는 구원을 원치 않았다..."(182) - P182

[36]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도 뜻밖이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안에 팽팽하게 조여 있던 용수철이 곧 망가져 버렸다. (...) 나는 그때 개인적 경험을 통해 웃음이 가장 무서운 무기임을 알게 되었다. 웃음으로 모든 걸 죽일 수 있다. 살인까지도 할 수 있다."(206) - P206

[37] "어호, 우린 행동을 개시했어요!/ 우리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215) - P215

[38] "이전에 나는 웃음에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웃음이란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의 먼 메아리일 뿐이다."(216) - P216

[39] "나는 미소 짓는다.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에서 무슨 가시 같은 걸 뽑아냈으므로 머릿속은 가볍고 텅 비어 있다."(227) - P227

[40] "우리는 40번가의 횡단로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임시 벽을 건축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228) - P2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