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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102-135, 685-8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한달 동안 보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읽어나가려고 했는데, 새해가 시작된 일주일 동안 지인의 부모님 장례식을 다녀오게 되었다. 몸보다 마음이 울적한 주로 새해를 시작했다. 이번 달에는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벌인 일들은 많고 해서일러스트 모비딕 읽기를 느긋하고 꾸준히 해나가기 힘들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속도를 내어 11일만에 완독하게 되었다. 빨리 읽어서 좋은 것보다는 소설 속의 사건 전개에 따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관조하듯, 혹은 파헤치듯 텍스트를 따라가지 못한 같아 아쉬운 점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출판사 작가정신의 모비딕 읽은 다음, 이번에 문학동네의 일러스트 모비딕 처음 읽게 되었다. 오늘 드디어 일러스트 모비딕 읽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결말을 쥐고 독서 일기를 마무리하는 만큼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책을 덮은 지금 모비딕을 쫓는 번의 대추격 과정에서는 내가 마치 바로 옆에서 모비딕의 분수공에서 나오는 물보라와 꼬리지느러미로 내리칠 넘실거리는 물보라를 같이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102장에서 104장에 이르는 부분은 지금까지 고래의 외형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오늘 이야기는 고래의 내부로 들어가 뼈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뼈들이 남아 화석으로 전해지는 고래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겠다.



오직 급박한 위험의 한복판에서만, 녀석의 성난 꼬리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만,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 위에서만 완전히 살이 붙은 고래, 살아 숨쉬는 고래의 진면목을 발견할 있다.” (693)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이다.” (695)



멜빌 자신도 고래에 대해 가능한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집대성하려는 야심찬 목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고래와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된 방대한 사실들을 거대 서사와 함께 집대성하는 작업이다. 물론 멜빌이 고래의 지식에 대해 천착하고자 하지만 그에게 고래는 여전히 신비함이 많고 모르는 것이 많은 신의 피조물이다. 빼대 이야기를 끝낸 이슈미얼은 이어서 고고학적, 화석학적, 대홍수 이전의 원시적 관점에서 고래의 자취를 들여다보려 한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거대하고 자유로운 주제가 지닌 미덕, 모든 것을 확대하는 엄청난 미덕이다! 우리는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된다. 웅장한 책을 쓰려면 반드시 웅장한 주제를 택해야 한다. 벼룩에 대한 책을 쓰려고 시도 해본 이들은 많겠으나, 주제로는 결코 불후의 명작을 없다.” (696)



모비딕 당시(1850) 허먼 멜빌은 상선, 포경선, 군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해본 경험이 있던 31살의 청년 작가였다. 멜빌의 작품인 타이피 오무 나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인용문을 보면 야심 있는 청년 작가의 포부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가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되듯이 멜빌의 독서와 글쓰기도 이와 같았을 같다. 말하자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서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 이런 확장하는글쓰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고래의 진화와 멸종에 관한 멜빌의 확증편향


확증편향’(確證偏向)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말한다. 소설 전반을 걸쳐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어떤 존재나 사물의 현상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마치 마법에 걸린 받아들이고 있다.  주제는 공교롭게도 고래의 진화와 멸종 대한 내용(105)이다. 흥미로운 장에서 멜빌은 고래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가를 자문했고, 북미 대륙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아메리카들소와 같이 멸종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 본인의 논리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멜빌은 우선 다음과 같이 반문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의 고래가 이전 모든 지질시대의 고래보다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의 시대 이후로는 크기가 줄어든 아닐까?” (700)


사실이 이러하므로 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유독 고래만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없다.” (701 )


리바이어던이 그처럼 광범위한 추격과 그처럼 무자비한 피해를 오랜 기간 동안 견뎌낼 있을 것인가, 결국 바다에서 절멸해버리지 않겠는가” (703)


하지만 고래 사냥은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에게 그처럼 불명예스러운 종말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703)



인용해놓은 논리를 따라가보면 멜빌 자신은 고래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멸종 위기에 처한 미국 들소와 달리 고래는 일단 포획의 수가 적다는 점을 가지 근거로 든다. 과거에는 소수의 파트너가 모여 다녔던 반면, 이제는 향유고래가 거대한 행렬을 이루어 다니면서도 서로 떨어져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해안에서 고래를 보지 못하면 다른 외딴 해안에서 구경거리가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생각보다 허술해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고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론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멜빌의 확증편향 해석이라고 것은 고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문제 제기 단계에 이미 정해 놓고, 다양한 사례와 근거를 결론에 적합하게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상의 양면을 보려고 노력했던 멜빌을 생각해보면, 사례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진실을 놓고도 계속 회피하는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그도 위대한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이기에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멜빌의 확증편향 사례는 소설에서 부분이 아마도 거의 유일하거나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물 사이에 맺어진 운명 같은 연결고리


소설에서 에이해브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인물이 페달라(파르시) 듯하다. 페달라는 소설의 전개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슈미얼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페달라를 통해 해결할 있기 때문이다. 에이해브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로서 역할을 하고, 어쩌면 조용하고도 굳건히 악의 하수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전제군주처럼 보였고, 파르시는 그저 그의 노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하나의 멍에에 메인 듯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가 하나는 깡마른 그림자이고 다른 하나는 견고한 늑재인 그들을 나란히 몰고 있는 듯했다. 파르시가 어떤 존재이건 간에, 옹골진 에이해브는 순전히 늑재와 용골로만 이루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 (821)   



소설 중에서 고래해체 작업을 묘사한 장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바다 위에 죽은 고래를 떠있도록 묶어 두고, 이를 해체하던 장면에서 고래 위에 퀴퀘그가 올라가 작업을 하고, 모선 위에선 작업자가 바다에 빠져도 곧바로 건져 올릴 있도록 서로 밧줄을 묶고 작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밧줄은 원숭이 밧줄이라고 불리는데 퀴퀘그에 묶인 밧줄의 다른 끝에는 바로 이슈미얼의 몸이 묶여있다. 이들 에이해브와 파르시(페달라) 관계도 보이지 않는 원숭이 밧줄로 연결된 공동운명체였다.



페달라가 에이해브에게 말해주는 예언에서 자신이 선장의 수로 안내인으로 선장보다 먼저 가게 되며, 에이해브가 죽게되면 자신이 선장 앞에 나타나 안내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지만, 이교도-기독교인(미국인) 조합으로서 퀴궤그와 이슈미얼이 원숭이 밧줄 연결되어 있었다면, 페달라와 에이해브 역시 공동운명으로 묶여있는 관계로 이해해볼 있다.



대립하는 인물과 인물들의 고뇌


소제목은 양심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스타벅과 피쿼드호를 위험에 몰아넣는 에이해브 선장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것이다. 스타벅은 에이해브 선장에게 끊임없이 고래에 대한 복수를 위해 추적하는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반복하며 설득한다.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눈이 에이해브 선장은 스타벅의 제안에는 안중이 없다. 일본해 근방에서 강력한 폭풍으로 돛이 찢겨나가는 소동을 맞은 선원들은 상황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이를 보고하러 내려간 스타벅은 선장실에서 지난 선장과 대립할 선장이 자신에게 겨누었던 머스킷 총을 발견한다. 선장의 머스킷 총을 들고 혼자 생각하던 스타벅은 잠이 들어 있는 선장 앞에서 갈등한다.


그래도 미친 영감이 배에 선원 모두를 자신과 함께 파멸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꼴을 가만히 참고 지켜봐야 하나?” (784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신 건가요?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786)



대목은 운명의 선택 앞에 고민하는 햄릿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멜빌이 소설을 셰익스피어를 발견하고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문장에 셰익스피어가 썼던 표현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영국 문호가 사용했던 유명한 구절을 활용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히려 대목에서 멜빌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로 문장을 떠올렸을법하다.



다시 선장 앞에서 총을 들고 있는 스타벅에게 돌아가자. 페이지에 걸쳐서 고민하던 스타벅은 총을 놓고 선장실을 뒤로 하고 갑판으로 나온다. 아마도 장면은 총을 들었으면 격발해야 한다 소설의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독자의 뒷통수를 안되는 소설의 장면일 것이다. 그러면 소설이 사건 없이 끝나가는 길목에 발생한 극적인 사건이었텐데. 하지만 멜빌은 보다 극적인 결말을 예비해두기로 했던 모양이다.



한편 선장 에이해브는 뱃전 너머로 몸을 구부린 바다를 내려다보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린다. 에이해브는 옆에 있던 스타벅에게 자신이 40 18 처음 고래에 작살을 던지기 시작하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에이해브는 58 정도였다. 육지에서 보낸 3년을 제외하고 지난 37년의 바다생활을 회상하는 에이해브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중압감이 가득히 담겨있다. 밥벌이로서 지탱해온 삶의 지난함, 지겨움도 느낄 있다. 역시 저와 함께 갑시다라며 에이해브를 설득하는 스타벅의 말을 듣고 선장은 잠시 고뇌한다.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나인가, 신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구인가?” (833)



하지만 결국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처음 발견하게 되고, 최후의 추격을 시작한다. 에이해브의 곁에서 죽음의 수로 안내인 예언한 페달라의 모습이 스쳐간다.



페달라의 꺼진 눈에는 창백한 죽음의 빛이 깜빡거렸고, 입가에는 끔찍한 경련이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837)



잠깐의 내적갈등을 겪었던 에이해브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는 숙명론자가 된다.



이봐,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야, 연극에서 이번 전체는 바꿀 없도록 이미 내용이 정해져 있어. (…) 운명의 여신을 모시는 부관이야.” (860)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추격하던 셋째 , 추격 보트에 오르기 직전 스타벅과 굳은 악수를 나누기도 한다. 소설의 후반에서 모비딕 추격을 전후하여 인물의 대립 갈등과 고뇌가 어지럽게 얽히고 있다.



모비딕 덮으며 떠올랐던 생각은 이야기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였다. 사람의 지도자가 이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수도 있겠다. 혹은 공동체에 스타벅과 같이 집단의 운명을 예견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다면 보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해석될 있는 여지가 있는 법이니까.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도 특별한 사건 없이 고래뼈나 화석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고래의 크기 변화나 멸종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보면서 결말에 대해 더욱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밥먹는 것도 잊고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원고를 써나갔을 멜빌을 상상해본다. 모비딕을 추적해서 작살을 꽂아버리고 말겠다는 에이해브와처럼 멜빌에게서도 작가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느낄 있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호의 에이해브이기도 했다. 에이해브는 마치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광기어린 사람으로만 비춰질 모르지만, 에이해브 선장 자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살펴볼 있었다. 이는 스토리만 뽑아놓은 버전에서 없는 소설읽기의 묘미이다. 이번에 손에 묵직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던 일러스트 모비딕 완역본에 록웰 켄트의 유명한 그림이 곁들어져 있다. 켄트가 그렸던 그림 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그림들은 대부분 암울하면서도 광기어린 표정과 눈빛을 담고 있는 에이해브의 모습들이었다. 그가 지녔을 법한 눈빛의 절반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며 여인의 집에서 빛나던 초록색 불빛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던 장면에서 상상해볼 있는 눈빛과 닮지 않았을까. 변화와 파국을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눈빛에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이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로 동안 예상했던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딕읽기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빨리 읽은 만큼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이부분은 다른 출판사의 모비딕읽기를 통해 계속 진행하며 생각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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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84-101, 568-6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이제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있지만, 오늘 읽은 부분까지도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멜빌은 역시나 향유고래의 다양한 면모에 천착하고 있고, 고래를 잡은 일련의 해체작업 이후 기름을 얻는 작업, 그리고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한 부분 등을 탐사보도하듯 파헤치고 있다.  오늘은 읽은 범위가 제법 되기 때문에, 나의 흥미를 붙드는 대상을 가지로 추려서 생각해보았다.

 



[1] 소설 속에 작가가 개입하는 순간

 

멜빌은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 대해서도 () 할애하고 있다. 이슈미얼이 거대한 고래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수증기와 물기둥을 흩뿌려왔으며, 고래들이 내뿜는 물기둥이 정말 물기둥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이슈미얼이 축복의 순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시간정보를 쓰고 있다. “1850 12 16 오후1 15 15”(573) 모비딕 워낙 특이한 소설이다보니, 멜빌의 시대에 책을 읽어본 독자들에겐 너무나 낯설고 생소한 소설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1850 초여름부터 집필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12 16 오후에 멜빌은 향유고래의 물기둥에 대해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망망대해에서 인물들이 바다 고래와 싸우는 상황 속에 느닷없이 자신의 존재를 소설에 개입시키는 것이다. 부분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마치 이슈미얼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잠시 방심한 사이 멜빌의 목소리가 나온 것처럼 말이다


 

대목을 읽으면서 비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이지만 연암 박지원 선생이 열하일기 대목을 떠올렸다. 연암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여름을 나고 있는 베이징 북쪽의 열하지역으로 다시 급히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동경로에 만리장성을 통과해야했는데, 고북구 지역의 장성에 하루 묵을 연암은 장성의 어딘가에 마시고 남은 술에 먹을 갈아 다음과 같이 낙서를 하는 것이다.

 


건륭45(1780) 경자년 8 7 삼경, 조선의 박지원 여기를 지나가다.

(열하일기2, 496, 김혈조 옮김, 돌베개 )  

    


여행기에서는 연암이 한밤중에 고북구라는 전쟁터를 지나며 느낀 감회를 낙서로 남겨두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여행기는 줄곧 연암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기록이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역사의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후대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멜빌의 시도와 연암의 행위가 비슷한 결로 내게 다가왔다. 참고로 새해가 연암이 고북구에서 낙서를 했던 경자년 같고, 240년이 지난 해이므로 연암 이후 경자년은 4번째 반복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무튼 멜빌의 모비딕이든 연암의 열하일기이든, 나는 부분을 좋아한다. 저자가 글을 쓰는 순간을 기록한 흔적이며, 후대의 독자인 나와 만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 경계인의 시각

 

지금까지 여러 멜빌이 소설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경계인의 시각을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는 경계인의 시각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표면과 이면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세상의 기준에 따르기에 앞서 자신이 판단한 결정에 따르는 태도 내지는 관점이라고 말할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경우와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직접 서술한 듯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

 


인간 허먼 멜빌이 경계인의 시각을 갖게 정황은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아마도 카톨릭 집안)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이었던 어머니가 이룬 가정환경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같다. 인용한 부분은 멜빌이 비록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이긴 하지만 오히려 무신론자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표현이다. 중요한 점은 멜빌이 세상사에 대해 공정한 시선 갖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의 독서에서 반복하여 언급했듯이 소설 전반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이슈미얼에게 말을 걸고 있는 소설 이면의 멜빌을 느낄 있었다.    

 

 


[3] 가련한 조난자,

 

소설에서 피쿼드호는 여러 차례 다양한 국적의 포경선과 사교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국적의 포경선과 마주친 피쿼드 호의 선원 가장 대수롭지 않은 사내에게 가장 대수로운 사건 일어나게 된다. 사건의 주인공은 고래사냥에 역할을 하지 않는 흑인 소년 이라는 인물이다. 앨라배마 출신의 핍이 어린 나이에 피쿼드호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없다. 다만 소설에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명민하지만 겁이 많은 핍은 고래사냥 과정에서 작살이 연결된 줄이 목에 감겨 바다에 빠진 상황에서 고래를 따라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핍은 미쳐버리게 된다. 멜빌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인물에 장을 마련하여 조명했다.

 


불운한 찐방이 천성적으로 둔하고 맹한 머리를 지닌 반면, 핍은 마음이 너무 여리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명민했고, 그의 종족 특유의 유쾌하고 따스하고 명랑한 총기를 지니고 있었다.”(63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핍과 짝을 이루는 사환 찐빵 존재다. 찐빵은 백인이며, 흑인 핍과 달리 우둔한 인물로 등장한다. 백인인 멜빌의 시선에서는 찐빵이 보다 명민하고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핍이 우울하거나 둔한 머리를 지닌 인물로 묘사했을 법하다. 물론 비틀기의 대가멜빌은 현실 세계의 질서를 소설에서는 뒤바꾸어 버린다. 소설에서는 백인을 낮추고 유색인종, 이교도를 높인다. 물론 멜빌의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한 경계인의 시각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현실을 소설 속에서나마 대등하게 놓고 보려는, 다시 말해 균형감각을 갖추고 소설에서 이를 구현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것이다.

 


그의 종족(흑인) 어느 인종보다도 멋지고 자유롭게 모든 휴일과 축제를 즐긴다.” (633)

 

내가 검둥이 소년 또한 환히 빛났다고 쓰더라도 웃지 마시라. 흑색도 나름의 광채를 지니기 때문이다. ” (633)  

 


같은 장에서 멜빌이 이렇게 부분에서 보아도 멜빌이 흑인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혹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고자 했던 정황을 엿볼 있다.

 


 

[4] 영원회귀의 구조

 

소설을 읽으며 흥미롭게 느껴지는 가지는 멜빌이 소설에다 이교도적인 개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교도적이라함은 기독교의 흔적이 아닌 인류의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윤회관도 포함된다. 인간의 윤회와 영혼의 부활을 믿었던 피타고라스도 언급할만큼 이교도적인 면모가 풍부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든, 자연을 대상으로 하든, 소설에는 이러한 반복과 순환의 구조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오오! 친구들이여, 이것이 사람잡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런게 인생이다. 우리 인간들은 오랜 노역을 통해 세상이라는 거대한 고래 몸뚱이에서 적지만 귀한 경뇌유를 뽑아낸 , 피곤한 와중에도 인내심을 발휘해 더러운 몸을 싯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깨끗한 육신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닫자마자, 별안간 들려오는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은 또다른 세계와 싸움을 벌이러 출항해야 하고, 젊은 시절과 똑같은 일상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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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67-83, 477-567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장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해부학적인 특징을 마치 돋보기를 들이대고 살펴보듯 고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모든 과정에 빠질 없는 것이 과정으로서의 삶과 경험에서 길어낸 멜빌 만의 통찰이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멜빌의 통찰은 환하게 빛을 발한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세상에 살되 속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계속 피가 흐르게 하라. (…)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483)


아마 문장은 지금까지 읽은 일러스트 모비딕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같다. 따뜻한 피를 가진 포유동물 고래의 독특한 생물학적 지위와 지식으로부터 주조된 멜빌의 통찰이다. 멜빌은 북극 고래의 피가 여름철 보르네오섬의 흑인들의 피보다 더욱 따뜻하다 사실을 강조한다. 오늘 읽은 부분의 후반부인 82장에서는 포경업에 관련된 신화 성경 속의 풍부한 이야기들 곁들이며, 포경업이 육지의 사람들이 비난하듯 천한 백정의 결코 아닌, 명예로운 일임을 강변한다. 멜빌은 포경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같다.




우리의 , 원숭이 밧줄에 대한 비유


그러니까 우리는 가늘고 끈을 통해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셈이었다.”(499)


고래 해체작업이 한창인 현장이다. 퀴퀘그는 바다에 떠있도록 매어둔 고래 사체 위에 직접 올라가 해체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그가 물에 빠지더라도 바로 건져낼 있도록 배에 사람과 줄을 연결해두고 있다. 누구에게 연결되어 있을까. 바로 죽음이 이들을 떨어뜨릴 때까지 함께 하겠다던 퀴퀘그의 , 이슈미얼이다. 이들은 가늘고 끈을 통해 쌍둥이처럼 연결되게 되었다. 사람은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과 죽음 앞에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가 것이다.


한층 깊이 생각해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 없다는 알게 되었다. 다만 대다수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과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만일 당신의 은행이 파산하면 당신도 꼴까닥 죽는다. (…) 나는 퀴퀘그에게 묶인 원숭이 밧줄을 무척 조심스럽게 다뤘음에도, 그가 밧줄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뱃전너머로 미끄러질 뻔한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뜻대로 조종할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없었다.” (500)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70 전에 멜빌은 모비딕 초고를 쓰고 있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구성원들 사이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멜빌의 자각을 떠올려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나간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대화할 , 멜빌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며 말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성적인 나타니엘 호손과 부인 소피아 호손이 부담스러워할만큼 말이다. 모비딕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초고를 쓰고 나서 멜빌이 호손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플롯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중요한 호손이 좋은 청자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호손과 멜빌이 퀴퀘그(에너지 넘치는 멜빌) 이슈미얼(관조하는 호손) 사이의 운명공동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읽는 모비딕 만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래와 향유고래의 비교, 그리고 고래의 형이상학


74장과 75장에서는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머리를 해부학적인 면에서 비교한다. 향유고래의 귀가 바깥으로 뚫려 있다면, 참고래의 귀는 평평한 막으로 뒤덮여 있다는 점도 언급한다. 향유고래의 머리가 로마시대 전차의 넓고 둥근 앞면을 닮았다면, 참고래의 머리는 구두코가 넓고 네모진 갤리선 모양의 구두처럼 생겼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향유고래의 분수공은 이마 앞으로 향하며 개만 있는 반면, 참고래의 경우 분수공이 개나 있다는 차이가 있다. 향유고래에게는 참고래 내부에 있는 수염(당시 부인의 코르셋 살대/보강제로 사용되던) 없다는 것도 차이점이라고 있다.


하지만 책에 나온 지식만을 열거하는 것은 멜빌의 방식이 아니다. 이분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독서를 통해 짐작할 있는 사항이다. 멜빌은 기존의 지식을 다르게 보려 시도한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이를 비틀기도하고, 성경과 신화의 이야기를 가져와 변형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해부학적 차이를 가지고 멜빌 만의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더욱 인상적이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는 죽음을 초연하게 여기는 명상적 태도에서 생겨난 대초원 같은 평온함으로 가득한 같다. 하지만 또다른 머리의 표정에 주목해보라. 어쩌다보니 뱃전에 눌러 턱을 감싸게 놀라운 아랫입술을 보라. 머리 전체가 죽음을 대면했을 때의 위대한 실천적 결의를 대변해주는 듯하지 않은가? 나는 참고래는 스토아 철학자였고, 향유고래는 플라톤주의자였다가 말년에 이르러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522)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이성과 실천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숙명 받아들이며, 이성에 따라 실천적인 선택을 하려했던 금욕주의자의 면모를 이르는 것일 테다. 턱을 감싸듯한 참고래의 야무진아랫입술을 떠올리면 단호한 성격을 가진 금욕주의자 면모를 떠올릴 법하다. 고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곁들어진 멜빌의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반면 멜빌은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서 애초에 죽음이란 염두에 적이 없었던 듯한 평온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멜빌은 관념론을 대표하는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면모를 향유고래의 머리 표정이 주는 인상과 연결짓는다. ‘말년에 스피노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향유고래의 면모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주저 에티카에서 언급한 자유인 관한 철학에서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리67] 자유인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관조(meditation, 명상) 아니라 삶에 대한 관조이다.

(290, 스피노자 에티카, 4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 중에서,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인간의 감정과 여기에 예속되는 기작(mechanism) 들여다보고 노예 자유인 이야기한다. 참고로 번역자가 관조라고 번역한 용어에 해당하는 영역본의 용어는 meditation이었다. 나는 관조를 명상이란 표현으로 인용문과 연결지어보려 했다. 멜빌에게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던 자유인처럼, 향유고래의 이마가 죽음에 대해 가장 적게 생각하는 자유인 면모를 닮았다고 생각되었을 법하다. 물론 실제로 죽음 초연한 생물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다만 멜빌은 고래의 해부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고래의 모습에서 형이상학적인 특징으로 이어지는 발상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러한 상상력 다르게 보기내공은 멜빌 만의 특징이자 장점인 듯하다. 여기에 배울점이 하나 있다면,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판단해보려는 노력, 지적인 성실함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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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51-66, 374-476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피쿼드호가 다른 포경선과 사교적 방문을(gam) 하는 이야기와 타운호호라는 포경선에서 벌어진 선상 반란에 대한 이야기, 고래 그림들, 그리고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처음 향유고래를 잡아들이는 사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이 호흡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큼 불길한 상황을 암시하는 징후들 역시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이어지는 불길한 징후와 죽음 이미지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하나의 공동 운명체가 선원들은 사소해 보이는 사건도 불길한 징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앞서 언급한 내용들처럼 관련한 대상이 죽음 이미지로 연결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달빛에 피쿼드호가 상앗빛이라고 대목은 페달라의 터번 하늘에 달과 결부되어 신비스럽고 음울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피쿼드호가 다른 포경선 앨버트로스호와 만났을 , ‘ 고래 대해 누군가가 묻자마자 앨버트로스호의 선장이 꺼낸 나팔이 바다에 빠진 일은 피쿼드호의 선원들에게 역시 불길한 징후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징후의 등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크림색 거대한 오징어와 만났을 이등항해사 스터브가 오징어를 이들이 살아서 항구로 돌아간 이가 거의 없다 예언에 가까운 불길한 이야기를 스치듯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편 에이해브 선장이 한쪽 다리에 고래뼈를 깎아 만든 의족을 일정한 소리를 내며 걷는 모습에서 이슈미얼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의 살아남은 한쪽 다리가 갑판 위에 활기찬 울림을 만들어내는 동안, 죽은 다리는 매번 움직일 때마다 관이라도 두들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노인네는 삶과 죽음 위를 걷고 있었다.” (376)


멜빌이 묘사하는 에이해브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이처럼 삶과 죽음을 몸에 지니는 모순을 지니는 인물로서 생생하게 드러나는 같다. 에이해브 선장에게는 삶과 죽음의 영역이 그의 내부에서 서로 요동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이해브의 인물을 드러내는데 멜빌의 탁월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다만 표현의 번역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되는데, ‘관이라도 두들기는 듯한 소리 sounded like a coffin-tap 번역한 것이다. 만약 coffin-tap 단순히 관을 두들기는 소리라고 하기보다는, (시신을 관에 안치하고) ‘관에 못을 박는 소리라는 점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했다면 독자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멜빌의 서구 문명 비판


스터브가 처음 향유고래 사냥에서 고래를 죽이고 나서 꼬리부분의 고래고기 요리를 맛보는 대목이 나온다. 65장에서는 스터브 같은 인간이 고래의 기름으로 밝힌 등불 옆에서 고래를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이한 일로 보이기에”(470) 시작하며 고래 요리의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한다. 멜빌은 이슈미얼의 생각을 통해 고래를 잡은 곧바로 고래의 기름으로 밝힌 등불 아래에서 고래고기를 먹는 것은 고래를 해치고 사체를 모욕까지 상황아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생각은 문명인(서구인) 동물 살해 관습으로 이어지는데, 멜빌은 문명인이 과연 식인종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있을지를 반문하고 있는 듯하다


토요일 밤에 정육 시장에 가서 살아 있는 두발짐승 무리들이 죽은 네발짐승들이 길게 내걸린 모습을 오렬다보고 있는 보라. 식인종도 입을 벌리게 만들 광경이 아닌가? 식인종? 식인종이 아닌 , 누구란 말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야윈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저장해둔 피지 사람들이 참아줄 만하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일이 닥쳐오면, 거위를 땅에 못으로 박아놓고 간이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여 만든 파테드푸아그라를 포식하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그대 대식가들보다 검약한 피지 사람들이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472)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 조상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멜빌의 동물살해에 대한 문제의식은 남다르고 솔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문명 사회가 식인종들을 미개한 사람들로 무시하고 낮추어 바라보지만, 멜빌은 과연 서구 문명이 윤리적으로 우월한가에 대해서 반문하고 있는 같다. 멜빌이 관습의 경계에 서서 양쪽을 들여다보려는 경계인 시각을 갖춘 인물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에게 이러한 성찰이 가능할 있었던 것은 작가가 포경선에 승선해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포경선이라는 제한되고 특수한 공간은 식인종-문명인, 유색인종-백인의 구분없이 모두가 공동운명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역할이 모두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매우 드물게 멜빌은 보다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한 셈이다. 소설에 언급되어 있듯이, 포경선은 멜빌 자신에게 예일대학이자 하버드대학 다름없는 배움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들


오늘 읽은 범위에서 재미있던 부분은 포경선이 망망대해에서 상선과 조우할 , 군함을 만날 , 혹은 노예선을 만날 , 그리고 해적선을 만날 이들이 보이는 반응들이었다. 예를 들면 포경선이 해적선을 만났을 , 이들이 가능한 빨리 서로에게서 멀어지려는 이유는 양쪽 지독한 악당들이라 서로가 서로의 악랄한 모습을 너무 오래 지켜보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55장에서 멜빌은 문헌에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고래 그림들 대해 이야기하는데, 재치있는 스터브가 고래의 지느러미에 대한 해부학적인 사실을 이용하여 농담을 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지느러미에 대한 해부학적인 사실이란, 고래의 지느러미뼈는 엄지만 제외하고 나면 인간의 손뼈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느러미에 개의 손가락에 해당하는 검지, 중지,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들어있는 셈이다. 점을 염두에 두면 스터브의 농담에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래가 때로 아무리 무모하게 우리에게 덤벼든다 해도, 권투 글러브를 벗고 우리를 손봐주겠다는 말은 절대 없을 거야. ”(422)    



고래를 쫓는 과정에서 작살잡이들이 보트의 선두에서 노를 힘껏 저은 다음 고래에 다가갔을 , 기진맥진해진 작살잡이들이 작살을 있는 힘껏 던질 있겠냐며 작업의 비효율성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작살 던지기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확보하려면 세상의 작살잡이들은 잔뜩 고생만 하다가 벌떡 일어날 것이 아니라, 잔뜩 게으름을 부리다가 벌떡 일어나야 것이다.” (456)


이슈미얼이 지적하고 있는 말은 재미있으면서도 하나의 있는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효율성만을 최우선으로 번아웃되는 현대인들에 대한 충고로도 받아들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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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44-50, 325-373)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의 주요 사건은 피쿼드호가 처음 향유고래떼를 만나 추격하는 장면이다. 번째 추격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직접 고래추격용 보트의 키를 잡는데, 배에 독자들 뿐만 아니라 피쿼드호의 선원들까지 처음 보는 이교도들 5명이 등장한다. 오늘  읽은 범위에서는 크게 가지 사항에 주목해봤다. 하나는 페달라라고 하는 이교도 노인과 일당들이 등장한다는 , 다른 하나는 향유고래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증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적짜기와 인간의 사이의 유비에 관한 사항이었다.

 

 

향유고래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

 

모비딕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 실화가 있다. 바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난파사건이다. 사건은 성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은 에식스호가 침몰한 사건이었는데, 향유고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소설 이슈미얼의 독백처럼 망망대해에서 향유고래와 대면해본 없는 육지의 사람들은 향유고래가 포경선의 바닥에 구멍을 내거나 추격용 보트를 날려버린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멜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