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Beat Generation>

하비 피카/ 풀 볼 (글)

에드 피스커 (그림)

김경주 옮김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 모음]

 

미국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60년대는 그 언제보다도 역동적이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및 예술 등의 사회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충돌하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히피문화, 여권운동(성차별 반대), 인종차별반대 운동, 케네디 대통령 암살, 루터 킹 목사 암살,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 및 반전 운동 확산, 68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60년대를 특징짓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한 문화적 요소로서 '비트 세대'를 반드시 고려해야할 것 같다. '비트 세대'는 대체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를 관통하는 큰 문화적 흐름의 하나였다.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미국의 작가 들에게 좀더 색다르고 도전적인 시와 산문을 쓰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의 문학작품 및 생활에 큰 영향을 주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 비트 세대들은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징집 반대, 반전주의, 마약복용 허용 등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미국 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19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에 한정해서 조명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트 세대'들의 대표 인물인 잭 케루악(Jack Kerouac),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urg),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를 중심으로 이들을 둘러싼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비트 세대'에 대한 정보를 문학이나 역사를 통해 접하게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진'이라는 분야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57년 스위스 태생의 사진작가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찍은 사진들로 만든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사진집은 사진사적으로 기존의 근대 사진을 뛰어 넘어 현대 사진으로 넘어가는데 큰 영향을 준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대단한 테크닉이나 위대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의 모호한 연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의 부유한 시절을 보내던 미국에서 어떤 점에서 보면 기존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연작의 형태로 미국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호불호가 매우 강했을 것이다. 후에 잭 케루악이 이 사진집에 주목하고, 널리 이야기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와 잭 케루악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했지만, 이 <비트 제너레이션>에는 그 친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이 한 문장 나온다.

"케루악과 긴즈버그는 함께 썼던 시 <풀 마이 데이지>를 로버트 프랭크, 알프레드 레슬리와 함께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케루악의 나레이션은 최고였고, 독립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44면)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는 독립영화 제작도 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케루악과 긴즈버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줄 밖에 단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정보였다. 특히 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들의 작업을 찾아보면 케루악과 긴즈버그의 시와 이들의 영화화 작업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9월 미국 일간지 <New York Times>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에 대한 서평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1957년에 잭 케루악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The Americans>의 발간은 이미 비트 세대의 분출이 여러 분야에서 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트 세대'의 중심 인물들의 생활을 보면(마약과 동성애, 심지어 강도와 우발적 살인) 일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거부감을 야기할만하다. 마약을 한 상태에서 여자 친구의 머리에 유리잔을 올려놓고 윌리엄 텔 놀이를 하다가 여자 친구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인 윌리엄 버로스의 일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트 세대들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이들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면모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버로스의 유명한 소설 <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가 원래는 <벌거벗은 욕망 Naked Lust>였던 것을 앨런 긴즈버그가 잘못 읽었고 이 제목에 대해 잭 케루악이 비난한 사실로 인해 정해진 제목이라는 일화 등은 <비트 제너레이션>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픽 노블을 읽어나가니 영화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앨런 긴즈버그 및 루시엔 카의 젊은 시절을 배경으로하는 영화였다. '비트 세대'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가지는 데에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실제 있었던 사실과 다른 점들은 있을 수 있으니 당대의 배경을 이해하는 정도로만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한다.  

 

 

(불만스러운 점들)

책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가 너무 작아 읽기에 눈이 아팠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모두 시력이 좋은 사람들만을 가정한 것인지... 나는 책을 읽으며 상당히 불편했다. 일반 만화보다 글이 많은 그래픽 노블의 특성과 독자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나아가 책의 막바지에 이른 184페이지 부터는 잠깐이지만 글자 크기가 더욱 작아져있다. 이렇게 편집할 요량이면 왜 판형을 더욱 키워서 글자를 크게하고 가독성을 높이는데 좀더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 1606-1669) 1606년에 태어난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이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에 얽힌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 읽던 중에 이와 얽힌 이야기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해부학 수업이 있던 (1632 1),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제발트는 소설에서 우선 상황의 의전적 성격에 주목한다. 저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해부 행사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실험실이 아닌, 암스테르담의 화물계량소에서 공개 해부행사가 열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로 인해 당시에는 암스테르담의 하우트흐라흐트에 있는 유대인 구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무역이 활발했으며, 따라서 수입과 수출하는 물류의 계량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구역에서 1639년부터 1658년까지 19 살았다고 한다.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자.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직접 시연하던 해부 행사의 실험 대상인 시신은 해부 행사 당일 새벽에 절도죄로 사형을 당한 사형수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존, 일명 아리스 킨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교수형을 당한 직후 그의 시신이 화물계량소로 이송되어 공개 해부 행사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모자를 쓰고 깔끔하게 입은 튈프 박사의 옷차림과, 해부 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다른 참관자들(의사들) 또한 호화로운 정장차림이다. 소설가 제발트는 자료 조사를 통해 의전적인 해부 행사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 주목하는 부분은 일반적인 해부 절차가 하복부를 절개하고 가장 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내장을 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시신의 손과 부분의 해부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도죄로 사형을 내린 정황도 황당하긴 하지만, 제발트가 주목한 부분은 해부작업이 범죄를 저지른 손을 먼저 해부함으로써 의식이 갖는 보복적인 성격과 대중 교화적인 목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보이는 손은 시신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한다 제발트는 지적하고 있다. 행사가 의전적인 성격이라는 점은 해부작업이 끝난 엄숙하고 상징적인 연회가 개최되었다 사실이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왕립미술관에 있는 가로 2미터 세로1.5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느낄 있을 같다.

 


한편 참관자들의 시선은 대개 시신의 해부 부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튈프 박사 너머의 해부학 서적에 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유가 그림에서는 시신의 중심을 천으로 가리고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알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제발트는 이유보다는 시신의 부러진 목과 뒤틀어 놓은 손이라는 육체성이 이미 해부학 교과서에서 보이는 하나의 도표, 하나의 인간 도식으로 환원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림을 보고 생각을 해보니 의미를 조금 깨달을 있었다. 시신의 해부에는 이미 죄인의 몸을 사용한 것이고, 하나의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육체의 도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토성의 고리 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행사 당일(1632 1), 당시 36세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는 데카르트의 초상을 참조해볼 , 데카르트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 같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학문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저서 방법서설  5 41세가 되던 1637 출판했을 ,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부학에 관한 내용을 여러 쪽에 걸쳐 언급할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경험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축적되었기 때문임을 있다.

 


하나 흥미로운 연결점은, 렘브란트가 그린 해부학 행사가 이루어진 10개월 후인 1632 11월에 렘브란트가 7 살게 하우트흐라흐트의 포르투갈-유대인 공동구역의 같은 블록 내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렘브란트이 공동구역에 1639년부터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스피노자가 7 되던 해에 이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렘브란트가 스피노자보다 26 연상이므로, 아마도 렘브란트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고 유명한 상인인 스피노자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자들과 대화가가 이런 공간에서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스피노자보다 36 연상이었던 데카르트와는 아마도 만났을 가능성 보다는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데카르트의 저서를 통해 그를 멀리서 보았을 같긴하다. 하나의 그림과 텍스트를 가지고 옆길로 빠져 나름의 상상을 엮어보았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을 가지고, 해부학 행사가 있던 , 데카르트(당시36) 렘브란트(당시26) 같은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활동에 몰입했을 광경을 아울러 상상해보았다





[참고도서]

[1]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2] 스피노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경 옮김 | [텍스트]

[3]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지음 |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엔가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
를 다시 읽었습니다.

제발트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경건
하게 읽었는데 이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캄포 산토>도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읽고
이번에는 리뷰를 쓰야지 싶었는데... 생각대
로만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초란공 2019-12-08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이번에 렘브란트의 그림이 나왔던 부분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였어요. ^^ <캄포 산토>는 저도 읽고 싶네요. <기초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국에 있다는 ‘제발트 길‘도 걸으면 제발트가 묘사한 우울한 분위기가 다시 떠오를것 같네요.
 




깃털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소설인 알고 읽기 시작했으나 실화를 바탕으로 나온 책이라고 한다. 이라크 난민이 재정착을 있게 돕는 일을 하던 커크 월리스 존슨은 골치 아픈 문제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플라잉 낚시를 하곤 했다. 어느 저자는 플라이 낚시 가이드로부터 해괴한 깃털도둑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사건에 집착하게 되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영국 왕립음악원의 유학생이자 장래가 촉망받던 플루티스트가 희귀한 조류 가죽 299점을 훔쳐 달아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점이라도 훔치려고 해도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문을 가졌을 텐데말이다. 책을 통해 영화에서 플라이 낚시 외에 플라이 낚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내가 송어와 연어를 잡는데 다른 플라이를 써야 한다는 사실도처음 알게 되었다. 새로 알게 이들의 세계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세계였다.   



     문제는 플라이 낚시 자체가 아니었다. 연어나 송어의 습성과 생태까지도 면밀하게 고려한 미끼, 그러니까 화려한 색의 깃털을 사용한 플라이 제작이 하나의 오타쿠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작 문제는 플라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깃털이 문제였던 것이다. 실제 새들 중에서도 깃털 색이 아주 화려한 극락조, 집까마귀, 케찰 등의 새들이 욕망의 대상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집까마귀의 경우는 가슴팍에 조금 있는 빨간 깃털을 플라이 제작에 사용하기 위해 많은 집까마귀가 필요하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여인들의 모자에 박제 처리된 극락조 마리를 통째로 올려 놓은 패션마져 등장한 것을 보면 오싹하게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깃털도둑 이야기는 인류가 이성으로 대표되는 자신감의 극단적인 사례, 예컨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있다는 자신감과 같이 인간의 독단이 얼마나 강력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보면 미국인들이 수많은 들소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자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미국 들소는 6 마리에서 300마리까지 줄었다고 한다. 길게 잡아 19세기 후반부 50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산해도 50 매일 3 마리가 넘는 들소를 죽여야 나올 있는 수치이다. 이것은 기차를 타고 가던 개척민들이 심심풀이로 들소들을 쏘아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십억 마리였던 여행비둘기는 1901년경 거의 멸종될 정도로 총질을 당했는데, 1914 마지막 여행비둘기가 동물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여행비둘기는 이제 멸종하고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런 일들의 맥락은 중단되거나 의식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말하듯, 인간의 과오, 아니 인간의 오만한 독단은 되풀이 되어 역사에 등장할 뿐이었다. 극락조 마리를 모자 장식으로 죽이게 , 그리고 책에서 등장하는 플라이 제작에 희귀한 깃털을 사용하는 등의 사례는 여행비둘기나 들소에게 심심풀이로 총질을 해대던 인간의 빗나간 인간중심주의, 독단이 다소 다듬어진 사례에 불과하다고 보인다.

 


    깃털도둑 흥미로운 소재와 스토리텔링을 전달하는 논픽션이다. 실제 사건을 통해 희귀한 깃털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오래된 (혹은 이미 멸종되었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의 가죽을 보관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더해져서 발생했다고 있다. 하지만 가지 부분은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처럼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저자가 책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부분이 나온 뒤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나 로스차일드 경의 박물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다소 장황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울러 저자가 조사하여 제시한 여러 배경 지식이나 사건을 재구성하여 연결함에 있어서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점이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글이 장마다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훔친 새들이 사람들에게로 팔려나간 저자가 이를 다시 추적하는 과정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팔려 어디론가 사라졌기에 되돌릴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작업의 마무리 혹은 결론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인간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어느 동물을 멸종의 위기로 몰아넣게 것이다. 책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서 확인하듯 그릇된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의 단면을 비추어 주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이지유 외 9명 지음 |  [바틀비]



요즘 들어 서평글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우선 이유는 내게 익숙한 독후감과 서평과의 차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은 느낌 뿐만 아니라, 책에 언급된 사항에 대한 서평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학책에 대한 서평을 읽어보는 최근에 시도해보는 일이다. 과학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과학지식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라 과정을 들여다보면 곧바로 인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있다. 최근에 알게 과학책방 갈다’(갈릴레이와 다윈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고, 밭을 갈다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에서 여러 과학자 과학 저술가들이 읽은 과학책 혹은 과학에세이에 대한 서평을 모은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틈틈이 읽고 있다. 오늘은 여러 작가 중에서 과학 논픽션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지유 작가의 서평글을 읽었다.  호프 자런이라는 과학자가 랩걸 읽고 이지유 작가가 서평이었다.  오늘 내가 서평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다른 저자들이 읽은 책들 보다 책의 제목을 많이 들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2017 국내에서 출판된 책은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식물에 대한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과정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책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지구물리학자로 보이는데, 하와이에서 화석삼림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야에 대한 글쓰기와 여성 과학자라는 모델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은 같다. 아울러 과학자로서 경험을 쌓은 이지유 작가의 이력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더욱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관심을 부분은 과학 지식이나 험난한 과학적 발견의 서사, 혹은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움을 극복한 승리의 과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언급한 것은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요소는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대상, 모든 세계가 자신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 감수성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가 당장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인류가 달에 있었을까?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주의 다양한 기본 입자들에 대한 정보도 여전히 가설로 존재했을 것이다. 쓸모를 갖춘 무언가를 얻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쓸모를 얻는 과정에도 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직 랩걸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게 되면 이지유 작가가 지적하고 있는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주는 호기심 관한 관점도 염두에 두고 읽게 같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호프 자런의 연구는 되는 연구가 아닌연구라고 한다. 하지만 연구에는 돈이 필요하다.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통되고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호기심과 연구비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사이에서 고민한다. 호프 자런과 같이 호기심 쫓으려면 그만큼 어려운 여건과 비판적인 견해를 극복해야할 일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앎에 대한 욕구, 의지 같다.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오래되지 않았다. 요새 부쩍 주변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한 고민거리를 많이 듣는다. 학교 현장에 관한 이야기며, 학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기만 해도 나의 학창 시절과 다른 장면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야 삐삐라는 것을 보았던 시절이다. 내가 요즘들어 부쩍 안타까워하는 중의 하나가 공부 대한 오해다. 내가 의도하는 공부는 시험 공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진짜 공부 학창 시절에 맛보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혹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가 앎에 대한 의지 발견하는 경험이 학창 시절에는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부분을 알고 싶다라거나, ‘평생 이것에 대해 천착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세우고 의지를 두텁게하는 말이다. 혹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명이 물론 학업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자신의 발견하고 이를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진짜 공부 해보고 싶다. 오랜 시간 호기심이란 영역이 내게는 무관한 영역인 느껴지는데, 이제는 사회 경험과 독서 경험이 다시 호기심 되찾게 해주는 같다. 내가 겪은 일들, 사회현상은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해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고민한 발자취를 발견할 것이다. 아마도 거의 예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소 늦게 치열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이제야 발견하고 따라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물론 늦게 시작한 것이 아쉽지만, 내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지점에 호기심을 갖고 몸을 움직였을지는 의문이다. 이지유 작가가  랩걸에서 찾은 호기심 요소는 인생 후반의 화두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전에 읽었던 시인의 중에서 기억에 특히 남았던 부분은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저자인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선생과의 따뜻한 만남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한국 학생들과의 교감을 나눈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쿤체 시인이 어느 한국 학생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학생은 쿤체 시인이 지은  <자살>이라는 시를 언급하며 죽음 대한 시인의 생각을 물었다. <자살>이라는 짧은 시의 전문은 이렇다.

 


모든 문들 마지막

그렇지만 아직 번도

모든 문을 두드려본 없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시는, 자신을 자신을 자제하기 위한, 자신을 엄격히 지켜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마 다른 분들께도 격려가 있지 않을까요. 누구도 이미 모든 문을 두드려 보지는 않았거든요.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주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정은 오로지 고달픔입니다. 그런데 길을 자꾸 가노라면 사는 것이 만하게,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옵니다. 지점들 사이의 구간이 길면 길수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그만큼 소중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시인의 (199)

 


시인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자살 대한 태도를 짧은, 어쩌면 하이쿠를 닮은 절제된 문장에 온전히 담았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 앞에 닫혀 있는 문들 뒤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읽는 이들에게 고달픈 여정에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한번씩 두드려보길 제안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했던 시인이 이제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더한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백분의 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특히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백분의 초에 다가가고자 함께 노력하고, 백분의 초를 향해 살아가고, 백분의 초를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해당되지 않는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몹시 나이가 들었거나 불치의 병이 들었을 말이지요. 외에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계속 있습니다. 순간을 위해서 일하고 살고 생각해야 것입니다.시인의 (199)

 


우리는 나이가 들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비로소 우리 삶에 그동안 행복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행복한 순간은 카메라 셔터 속도 만큼이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짧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순간을 위해 일하고 살고 생각하는 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쿤체의 부인 엘리자베트 쿤체는 체코 출신의 의사였는데, 사람의 소설같은 만남과 아름다운 인연을 가꾸어온 이야기를 모처럼 읽었다. 책에서 쿤체 시인과 부인에 대해 부분을 읽노라면 이들 부부처럼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극진히 대하며, 인간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정도다. 해를 마무리하며, 12월이 시작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담긴 쿤체 시인의 말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