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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 Generation>

하비 피카/ 풀 볼 (글)

에드 피스커 (그림)

김경주 옮김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 모음]

 

미국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60년대는 그 언제보다도 역동적이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및 예술 등의 사회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충돌하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히피문화, 여권운동(성차별 반대), 인종차별반대 운동, 케네디 대통령 암살, 루터 킹 목사 암살,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 및 반전 운동 확산, 68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60년대를 특징짓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한 문화적 요소로서 '비트 세대'를 반드시 고려해야할 것 같다. '비트 세대'는 대체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를 관통하는 큰 문화적 흐름의 하나였다.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미국의 작가 들에게 좀더 색다르고 도전적인 시와 산문을 쓰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의 문학작품 및 생활에 큰 영향을 주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 비트 세대들은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징집 반대, 반전주의, 마약복용 허용 등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미국 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19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에 한정해서 조명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트 세대'들의 대표 인물인 잭 케루악(Jack Kerouac),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urg),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를 중심으로 이들을 둘러싼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비트 세대'에 대한 정보를 문학이나 역사를 통해 접하게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진'이라는 분야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57년 스위스 태생의 사진작가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찍은 사진들로 만든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사진집은 사진사적으로 기존의 근대 사진을 뛰어 넘어 현대 사진으로 넘어가는데 큰 영향을 준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대단한 테크닉이나 위대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의 모호한 연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의 부유한 시절을 보내던 미국에서 어떤 점에서 보면 기존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연작의 형태로 미국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호불호가 매우 강했을 것이다. 후에 잭 케루악이 이 사진집에 주목하고, 널리 이야기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와 잭 케루악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했지만, 이 <비트 제너레이션>에는 그 친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이 한 문장 나온다.

"케루악과 긴즈버그는 함께 썼던 시 <풀 마이 데이지>를 로버트 프랭크, 알프레드 레슬리와 함께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케루악의 나레이션은 최고였고, 독립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44면)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는 독립영화 제작도 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케루악과 긴즈버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줄 밖에 단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정보였다. 특히 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들의 작업을 찾아보면 케루악과 긴즈버그의 시와 이들의 영화화 작업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9월 미국 일간지 <New York Times>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에 대한 서평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1957년에 잭 케루악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The Americans>의 발간은 이미 비트 세대의 분출이 여러 분야에서 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트 세대'의 중심 인물들의 생활을 보면(마약과 동성애, 심지어 강도와 우발적 살인) 일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거부감을 야기할만하다. 마약을 한 상태에서 여자 친구의 머리에 유리잔을 올려놓고 윌리엄 텔 놀이를 하다가 여자 친구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인 윌리엄 버로스의 일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트 세대들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이들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면모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버로스의 유명한 소설 <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가 원래는 <벌거벗은 욕망 Naked Lust>였던 것을 앨런 긴즈버그가 잘못 읽었고 이 제목에 대해 잭 케루악이 비난한 사실로 인해 정해진 제목이라는 일화 등은 <비트 제너레이션>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픽 노블을 읽어나가니 영화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앨런 긴즈버그 및 루시엔 카의 젊은 시절을 배경으로하는 영화였다. '비트 세대'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가지는 데에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실제 있었던 사실과 다른 점들은 있을 수 있으니 당대의 배경을 이해하는 정도로만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한다.  

 

 

(불만스러운 점들)

책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가 너무 작아 읽기에 눈이 아팠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모두 시력이 좋은 사람들만을 가정한 것인지... 나는 책을 읽으며 상당히 불편했다. 일반 만화보다 글이 많은 그래픽 노블의 특성과 독자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나아가 책의 막바지에 이른 184페이지 부터는 잠깐이지만 글자 크기가 더욱 작아져있다. 이렇게 편집할 요량이면 왜 판형을 더욱 키워서 글자를 크게하고 가독성을 높이는데 좀더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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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자리에

(원제: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Oiver Sacks)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도서관 읽으며 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언젠가 아날로그(analogue)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를 써둔 메모지를 최근에 발견한 적이 있다. 내가 단어를 써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있다가 이유를 다시 깨닫게 순간이 있다. 바로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 읽을 , 메모지의 진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자서전 온더무브 On The Move 자신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라면 책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애착하던 모든 대상 담았다. 생소한 의학용어가 등장하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글쓰기와 옮긴이의 정성어린 주석을 통해 용어에 집착하지 않는 충분이 읽어 나갈 있다.

 

중에서  도서관편을 보면 올리버 색스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자신의 실험실외에 아버지의 서재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슬렁거리며 발견 책들과 책들을 읽으며 저자가 경험했던 달콤하고 강렬한 희열을 전한다. 3-4 이미 읽는 법을 익힌 올리버 색스에게 부모님의 서재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한다. 짜여진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는 올리버 색스는 아마도 이러한 자신만의 주도적으로 찾고 발견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상 물성을 가진 책을 찾지 않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위해 책들을 줄곧 보관하지는 않을 같다.

 

올리버 색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느낀 변화도 바로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곤 하던 올리버와 달리 젊은 학생들은 서가를 외면하고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해서 바로 찾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먼지가 쌓여 있던 도서들을 처분하고, 넘쳐났던 서가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정말 오래된 고서들이 파손되거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관심있는 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디지털화가 도움이 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디지털화되었기에 책을 처분해도 된다는 생각을 올리버는 일종의 분서갱유 비유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에서 책을 소유하는 모든 시민을 죄악시하고 책을 말그대로 불태우는소설 속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올리버에게 책과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한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터이다. 태어나서부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넘기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올리버가 느꼈던 상실감을 이해할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무엇보다 올리버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험,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되는 가능성을,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며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중고서점에서 잠시 일할 때를 기억한다. 마침 중고서점에서는 찾는 책을 검색할 있게 전산 목록을 만드는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때이고, 약간의 관심만 있었을 때였다. 1년에 읽는 책이라곤 4-5 정도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학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중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어느 분야가 주로 모여 있으며,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좋아하게 인문분야 책장에 주로 관심을 갖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책을 재배열하기도 하며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때의 경험이었을까, 나는 검색으로 원하는 책을 찾더라도 책방 주위를 배회하며 서가마다 정리된 책들을 구경하곤 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 주제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어린시절부터 도서관에 머물며 책이 꽂힌 대부분의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하고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 에피파니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언젠가 내가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어둔 이유는 아날로그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디지털 신문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단어였다. 내가 신문 구독을 언젠가부터 중단하게 이유는 사실 요즘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다보니 새벽에 배달되던 신문이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피곤에 지쳐 저녁에 집에 돌아와 맞는 신문을 읽을 기력이 없을 때가 많았다. 신문만 점점 쌓여가고, 신문을 보관하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가족들의 원성만 높아져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문의 장점은 원하는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여 효율적으로 찾아볼 있다는 점이 내게는 가장 장점으로 보인다. 반면  1면부터 종이를 넘기며 훑어보게 되는 아날로그 신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건, 흥미로운 책이나 행사에 관한 정보, 사회의 이슈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올리버 색스의 도서관 경험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문을 훑어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줄을 쳐가며 읽고, 스크랩하였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가져보던 때가 나의 호기심이 최고로 성장했을 때였다. 새로운 생각거리,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만들게 되는 우연한만남이 아날로그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과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의 우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내게는 전혀 다른 매체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매체는 서로가 갖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보완적일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메모지에 아날로그 에피파니 적어두었던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올리버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이러한 에피파니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는 대체될 없는 무엇,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7)  

 

서로 보완적일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함께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아날로그 매체를 곧바로 폐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까. 올리버 색스도 정기간행물과 책의 물성이 우리 몸과 상호작용하며 각인되어버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아울러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내는 우연한만남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허탈감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강력한 즐거움은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중년이 되어 좀더 진지하게 독서를 생각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을 적이 있다. 이제는 주변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을 보아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늦게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작을 우연한기회에 발견하고 인생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만나는 경험을 소망하게 되었다. 느릿느릿 소요하며 좋아하게 혹은 흥미를 유발한 책들을 우연히 만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저자의 존재를 느끼며, 책을 읽고 읽음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화면을 통해 어디서든 수많은 책에 접근할 있을 몰라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 순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 디지털 매체와 다른 아날로그 매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매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대체하는 성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에피파니 순간이 아날로그 매체에만 예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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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W. G. 제발트 (W. G. Sebald) 지음 |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독후기록-메모]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을 읽고 메모한 사항들

 


이 책에는 크게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는 <공중전과 문학>, 다른 하나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라는 제목의 글이다. 옮긴이의 소개에 따르면 <공중전과 문학>1997년 취리히 대학의 초청으로 네 번에 걸쳐 작가로서 강연한 내용을 후기와 함께 묶은 것이며,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1993년 세계문학 계간지에 발표한 논문을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우선 배경정보를 비롯하여 익숙하지 않은 이 강연원고와 처음 들어보는 독일 문학 원로 안더쉬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담은 읽을 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40년대에 연합군에 의해 독일의 주요 도시에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진 전모에 대해 사실 처음으로, 그 실상에 대해 피부로 느꼈다. 일본의 히로시마아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보다 대략 6배 이상되는 사망자를 낸 이 대대적인 폭격으로 전후 독일 시민들의 집단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이 사건이 방치되었는지를 조금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다


나는 표면상 독일인들이 그대로 일본인들과는 달리 세계2차 대전 중에 유대인들에게 가한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깊이 반성하고 전후 이를 기억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온 것으로 이해했으나, 아웃사이더 독일 작가 제발트의 비판과 지적을 통해 전후 독일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후손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독일인들의 행태에 제발트는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기회마져도 전무하다시피 했다는데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독일 정신분석학자 미처리히 부부의 표현대로 전후 독일 사회가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빠져 있었음을 환기시키고, 독일 사회, 지식인들의 행태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옮긴이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제발트는 고통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문학의 본령은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고 탐구하고 애도하는 있다고 본다.(209) 정리해준 표현에 제발트의 행방을 가늠해 있겠다. 번째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는 독일 문단의 원로 안더쉬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그의 작품과 함께 소개되는 안더쉬의 경력에는 공산당 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이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력만 본다면 안더쉬는 나치 정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지성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발트의 눈에 비친 인간 안더쉬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자신의 유리한 상을 만들어낸 타협주의자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대인 안겔리카 알베르트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렸지만, 19422월부터 부인 안게리카와 두 딸과 별거한 후 곧바로 이혼을 강요하여 194336일 이혼 절차를 마무리 한 사건 정황을 들여다보면 안더쉬의 면모를 좀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안더쉬는 이혼 절차가 마무리 되기 직전인 1943216나치스 제국문예부에 입회하기 위해 신청서를 내며 가족관계 항에 이미 이혼이라고 기재했던 것이다. 제발트에 의하면 입회 구비 서류에는 반드시 배우자 출신증명서가 첨부되어야 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더쉬의 개인적인 재능을 별도로 하고, 안더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나치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이력만으로 한 인물을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40년대 초에 나치 정권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때, 안더쉬가 내친 유대인 부인 알겔리카와 두 딸의 운명은 제발트의 표현대로 어떤 위험이 닥쳤을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일테다(160). 이미 19426월에 안더쉬의 장모는 뮌헨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체코의 테레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안더쉬의 동생 마르틴 안더쉬도 형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더 중요시했다(161)는 표현을 사용한 정황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안더쉬라는 인물이 좀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제발트는 안더쉬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하며 한 방 더 먹이고야 만다.

 

안더쉬는 기본적으로 항상 후방에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 1970년대 초에 그가 스위스인이 된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193)

문학작품은 내면생활을 감싼 외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저급한 안감은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법이다.(194)  

 

안더쉬가 전후 자신의 소설에서 유대인들을 내세워서 이들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신의 온 몸과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은 작품에서 독자의 진심어린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 어쩌면 안더쉬의 작품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점은 아직 안더쉬의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으므로 내게 주어진 숙제로 기억해 두어야겠다.  

 

끝으로 책의 뒤에 수록된 관련 인물 정보란을 읽다가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마가레테 미처리히, 알렉산더 하르보르트 미처리히에 대한 인물 정보가 담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이 보인다.

1946 연합군으로부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관찰하되 전범 의사들의 집단 책임을 무마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임무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전범 의사들의 책임을 숨기지 않고 기술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보고서는 <인간 멸시의 독재>(1947)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잊혔다.”(225)

 

부분이 내게 암시하는 내용은 연합군 혹은 미군이 일본의 전범 의사들에게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치에 복무한 독일인 의사들이 집단수용소에서 수행한 숱한 인체실험의 결과를 연합국에 전해주는 대신 이러한 요구를 미처리히 부부에게도 했을 같다. 마찬가지로 미군은 일본 731부대에서 행한 잔혹한 인체실험 결과들을 입수하면서 동일한 요구를 하는 움직임은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 맥어웬이 SF소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Spiral> 그러한 정황이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떠올렸던 내용이었다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다시 환기해주고 있다. 역사는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수 있으며, 과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없다면 역사는 허탈하지만 계속 반복될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더 낫게 현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집단의 교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조명하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그 함의를 나누고 기록되어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새롭게 확인해보게 된 계기였다.  




오늘날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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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Hier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1] (글쓰기에 대한 열망)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토비아스 호르바츠) 등장한다.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태생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 생애 대부분을 시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써냈던 인물이다. 그리고 소설의 토비아스는 작가의 아바타인 셈이다. 주인공 역시 가족과 고국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공장에서 일하며 글을 쓰곤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한 주인공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다르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글을 쓴다. (…) 나는 하루종일 머릿속에 썼던 글들을 저녁마다 종이에 옮겨적으면서 내가 이런 글들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16)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야망은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관찰 )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표면상 분리되어 있으나 분리될 없는 대상이다. 자신을 버린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도망쳐 나온 주인공은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49) 저자가 시계공장에서 하루 두시간씩 오랜 시간을 일하며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소설 주인공 또한 공장에서 그리고 저자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여전히 분리될 없는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걸었다. 간혹 다른 행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115)

 

소설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내던져진 운명은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분리될 없다. 이것이 그녀를 평생 지배해왔으므로.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고국을 떠난 이방인들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갖고 여러 군데에 그녀만의 스케치를 배치해두었다.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갖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 (…)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115-116)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 힘든 이방인들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기약할 없는 사람들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공백, 과거에 대한 상실감은 이방인에게 회복할 없는 무력감만을 안길 것이다. 오로지 현재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런 이방인의 실존적인 모습을 민감하게 포착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3] (인생의 깊은 상실감-꿈을 잃는다는 것의 슬픔)

자신의 이복동생을 사랑하게 토비아스의 결말은 순탄치 않을 것을 예비하였다. 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복동생 캐롤린은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키우는 주부였기에 더욱이 금지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린의 가족이 해체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되면서 토비아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 대해 말하자면 마디로 요약될 있다. 린이 왔다가 다시 떠났다라고.” (134)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과 자조, 우울감이 느껴진다.

 

토비아스는 린이 떠난 여자친구 욜란드와 결혼하여 린과 작은 아들 토비아스를 낳아 기른다. 그리고 여전히 주인공은 시계공장에서 일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간결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

 

아파트가 인생일대의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에게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의미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너무 뜽금없는 주문일까. 토비아스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이었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삶의 좌절 앞에 무너저 버렸다. 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달에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꿈꾸어야할까를 생각해보게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토비아스 호로바츠는 오늘날 꿈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꿈을 잃은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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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오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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