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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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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인류의 모습

- 이것이 새입니까?

 


아르노 네바슈 글·그림 | 박재연 옮김 [바람북스] (2024)

 



영화 <록키> 시리즈 중에서 유명한 장면이 몇 가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록키가 긴 계단을 올라 계단 아래에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아닐까. 그리스 신전을 닮은 건물에서 마치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받은 승리의 신탁을 만끽하는 듯한 그 장면 말이다.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한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을 떠올린 이유는, 젊은 시절 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작품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5년도 더 된 내 기억을 다시 열어 준 계기는 이것이 새입니까?라는 책이 마련해주었다. 이 책은 루마니아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연루된 재판을 주제로 한다. 그의 추상적인 조각 작품이 미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책의 부제인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이 일러주듯, 이 재판에서는 브랑쿠시가 제작한 한 작품이 수입될 때 발생한 과세 문제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문제의 본질은, 당대에 어느 작품을 혹은 무엇을 예술로 볼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닿아 있었다. 예술 작품을 수입하는 경우는 면세가 되지만, 일반 수입 제품이라면 판매 가격의 40%가 세금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던 중 갑자기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떠올렸던 이유는, 아무런 정보나 기대없이 방문했던 미술관에서 브랑쿠시의 작품 하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미술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키스 Kiss>라는 제목의 작품. 이 밋밋하고 네모난 조각품과의 만남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미술관을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던 내가 알 정도로 브랑쿠시의 <키스>라는 작품은 유명한 작품이다. 어쩌면 미술 필기 시험을 준비할 때 교과서에서 보고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브랑쿠시의 작품은 높이가 내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아담했다. 게다가 작품이 바닥에 바로 설치되어 있어서 대개는 시선을 수평선 언저리 혹은 그 위를 향하게 되는 공간에서 이 조각이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 소박한 조각상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돌조각에 새겨진 요철만으로도 이렇듯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추억과 정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런 찰나가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작품과 감상자가 만나 상호작용하는 접점의 순간들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 조각상의 주인공인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그래픽 노블 형식의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되살아났다. 당대의 예술 담론 공간에서 화제이자 관심 인물이 되었던 재판이 소개가 되고 있다. 이 세기의 재판에서 논의의 중심이 된 그의 작품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브랑쿠시로부터 구매한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라는 작품이었다. 스타이켄이 이 작품에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국의 세관이 이 작품에 세금 4000달러를 청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해당 금액에 대한 관세율이 40%라고 나오니까, 이 재판이 있던 1926년 당시에 거의 1만 달러에 해당하는 대금을 지불하고, 추가로 4000달러(지금도 큰 돈이지만 100년 전인 당시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타이켄은 예술 작품으로 구매했기 때문에 당연히 면세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이 물건을 예술로 볼 것인가, 금속으로 제조된 일반 상품으로 볼 것인가를 따지는 재판이 되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볼 때 법원에서 어느 작품이 예술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상황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제기된 물음은 언젠가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상황이기도 했다. 예술의 역사를 좀 단순히 되돌아보면, 예술 사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개선에서 나아가 비판과 반동의 움직임을 통해 그 정의가 끊임없이 변하고 외연이 확장되어 온 것이 아닌가. 브랑쿠시의 재판은 당시에 이미 현대 미술사에 큰 전환을 가져왔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 <Fountain>(1917)이 등장한지 9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브랑쿠시 작품에 대한 재판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아직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새로 등장한 결과물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를 마주하게 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우선 브랑쿠시와 작품을 구입한 스타이켄 측이 법정에서 해당 작품이 지닌 닮음의 정도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받았다는 점이다. 판사들은 공간 속의 새라는 제목에서 이 작품이 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여러 창작자들을 불러 묻고 답변을 듣고자 했다. 물론 이 문제만으로도 이 문제는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아주 섬세하게 어느 새의 모습을 닮게 조작한 작품을 먼저 떠올려보자. 그리고 같은 새를 대상으로 새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조각 작품으로부터 점점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추상성이 점차 증가하면 어느 순간에는 브랑쿠시의 작품처럼 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전혀 닮지 않은 결과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과 얼마나 닮아야 예술작품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을 텐데,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절대적이고 특정한 기준이 존재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예술이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실천된 전통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창작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미메시스(모방)’의 전통이야말로 인류에게 오래 전해진 예술작품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상을 실제와 닮게(완벽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게나마) 형상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 기술만으로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 셈이다. 제욱시스라는 그리스 화가가 벽에 그린 포도나무에 새들이 진짜인줄 알고 내렸다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재판에서 변호사 측(스타이켄)에게 요구된 답변은, 해당 제품이 과연 유일무이한 원본인지를 입증해달라는 요구였다. 재판부는 브랑쿠시 작품의 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했던 셈이다. 복제될 수 없는 화가 고유의 색깔이 담겨있는 작품이 훌륭한 예술의 전제조건이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금속 공예 장인들도 브랑쿠시의 금속 조각 작품을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복제해낼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장인의 복제품과 브랑쿠시의 작품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무엇이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이 질문이 당시 재판이 해결해야 했던 질문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함께 읽었던 책 한권을 떠올려 보자.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 What Art Is>이란 제목의 책이다. 단토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도를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읽기 쉽지 않았던 단토의 책에서 기억나는 내용을 가져와 보면, 그는 예술의 정체를 구현된 의미로 판별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다시 말해 예술의 정의는, 예술가(창작자)의 의도가 어떻게 물성화(구체화)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이해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작품처럼, 상점에서 파는 제품으로서의 소변기와 뒤샹이 사인을 하여 눕혀 놓은 작품 은 외관상 구별이 불가능하다. 기성품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토가 평가하는 뒤샹의 공적은 그가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다른 방식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뒤샹의 후원과 격려를 받은(따라서 예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을 법한데) 브랑쿠시의 작품이 일으킨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일련의 재판과 대중 앞에서의 담론 형성 과정은 당대 사회의 동시대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 같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놀랐던 또 다른 한 가지는, 브랑쿠시의 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결하기 위해 밟아간 공부 혹은 탐색의 과정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을 예술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과정이었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판결 기준을 살펴보면 예술로 인정할만한 기준에 제약이 많고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복제품이 두 개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조건부 원본의 제약이나, 예술 작품의 조건이 전문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단순 기계 공정을 통한 제작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지엽적인 조건들인 셈이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판사가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진 결과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본 법정은 이 물품이 면세 대상임을 판결합니다.”(117)라는 결말이 정말 놀라웠다. 이 장면은 한 사회가 성숙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이러한 과정이 인식과 지평을 넓혀가는 사회적 리터러시의 문제로서 읽힌 대목이었다.


 

예술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을 되돌아 볼 때, 브랑쿠시의 재판과 아서 단토가 언급한 뒤샹및 앤디 워홀의 작업을 통해 한 가지 더 배운 점은 예술의 범주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는대상만을 예술의 범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름답지 않은 대상, 심지어 추하거나 역겨워 보이는 대상도 예술의 범주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통찰에 대해 동의할만한 여지가 있다면, 그건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만들어 온 대상들을 예술로 여길 수 있도록 경험과 사유의 폭을 확장시켜온 과정에 힘입은바 클 것 것이다. 이런 모습이라면 이후의 예술 역시 기존의 전통이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예술이 계속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예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맹점을 새롭게 발견하여 비추어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현대 미술을 개념 미술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작품 감상에서 이제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사유/개념을 발견하는 경험으로의 나아감을 이르는 말일 테다. 이 과정은 결코 직관적으로 다가오거나 이해되는 과정은 분명히 아니다. 현대 예술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자가 예술을 접할 때 단토가 언급한 작품에 구현된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 의도에 다가가는 과정에 예술의 본령이 있지 않을까. 작품에 투영된 예술가의 의도에 조응하는 감상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행위로서 말이다. 따라서 관람자로서의 우리는 더욱 구현된 의미의 모호함과 마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브랑쿠시의 재판은 후손들에게 우리의 맹점을 발견하고 새롭게 바라보도록 길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Bird in Space'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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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2-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좋아했는데요...^^
제 기억으로는 브랑쿠시의 작품이 통관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래서 예술품이 아닌 주방용품으로 통과했다는,,, 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이 책 궁금합니다

초란공 2024-12-24 00:13   좋아요 1 | URL
아, 이 작품을 이미 알고 계시군요! 책에서는 통관 과정에서 ‘주방용품’이라는 구채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40%관세를 부과했다고 나오네요. 백년 전에 4000달러 세금이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 같은데요!
 
세계-사이 - 찢어진 예술, 흩어진 문학, 남겨진 사유
최정우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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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존재의 세계 사이에 무한에 가까운 경로가 있고, 그 한 가운데 우연히 마주치고 부대끼는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창작을 하는 저자는 이 세계와 세계 사에의 시간을, 혹은 사건을 어떻게 보내고 마주하는 사람일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디. 곧 저자와 마주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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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스’, 의례로 충만한 하루하루 만들기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주연: 야쿠쇼 코지 (국내개봉 2024)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스>를 통해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했는데, 나는 그의 사진집 <한번은, (Onc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마다 딱 ‘그의 시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사진처럼 풍경을 바라볼 때 마치 그 풍경을 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은 감상자가 바로 풍경에 몰입되어 스며드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대상을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화면 가득히 담기는 사람의 얼굴은, 한 단독자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대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이러한 시선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나오지 못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진집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대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시에 소속된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지루해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이불을 개고, 화분을 모아둔 작은 방에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으면 출근 준비가 얼추 끝난다. 현관 옆에 놓아둔 지갑과 공공화장실의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작은 접시에 놓아둔 동전들을 챙기면 현관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면 항상 하는 작은 의식이 이어진다. 문을 열면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고나면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서 한 모금 마시면 출근 준비가 끝나는 것. 



공공화장실에서 누가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모습은 인상깊다. 매일의 지루한 업무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맥락상 히라야마는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마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일찍 독립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누가 봐도 인정받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설정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매일 같은 점심 시간에 같은 샌드위치로,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꺼내드는 자동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바라보는 대상과 마주하며 자세히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그만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주인공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하루하루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것만 같지만 말이다. 삶의 리듬(반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기에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매일 같아보이는 일상 속에 작지만 변화무쌍한 변화가 일상에 침입하고 끊임없이 교란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고 포용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점심시간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찍는 나무의 모습, 특히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같아 보였다. 이런 장면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빔 벤더스 감독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일 것 같다.



 똑같아 보이는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매일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이 젊은 동료는 우리 사회의 경우로 보면 갓생을 사는 N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니 ‘돈이 없어서 데이트도 못한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인공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이런 동료와의 헤프닝으로 일상은 언제고 궤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는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이 ‘얽힘’을 환기하는 장치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안정적으로 반복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얽혀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인공이 양아치 같이만 보이던 젋은 동료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좋았다. 이 젊은 동료는 어느 정신지체 청소년이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며, 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모습말이다. 물론 빔 벤더스의 시선과 의도일테다. 모든 사람에겐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또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여러 공간이 존재하고, 이 여러 면들이 등을 맞대고 유동하는 복잡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이러한 시선이 좋았다. 



주인공은 매일의 루틴이 있지만, 조금 더 긴 터울의 루틴도 있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단골 이자까야 집에 가서 익숙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맛본다. 중고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한 권을 골라온다. 한 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아와 이를 분류하고 골라 자신만의 상자에 모아두는 일 등이 그런 활동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한 인간의 의식으로 가득차있다. AI가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하루 속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문득 슬픔을 느끼다가도 화장실의 작은 메모지를 통해 누군가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지루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의례/의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를 지루하게 보느냐 아니면 매일매일이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자신의 일상적 의식 속에 이 미묘함을 알아차리는 시선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의식은 삶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계 인류학 및 심리학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칼라타스의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김미선 옮김, 민음사)에서 바로 이러한 의식/의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습관’과 ‘의례’를 구분한다. 습관은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가 그 목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각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궤도를 이탈하거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반면 ‘의례’는 보편적이지 않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한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며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정성들여, 일정한 절차에 따라 변기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닦는 행위는, 젊은 동료가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대충 청소해도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텐데말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과 절차를 미련해보일 정도로 준수한다. 책의 저자 지칼라타스는 이런 상황을 ‘인과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의례 행위에 보다 주목하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례’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절차와 반복, 루틴을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이 루틴의 힘이야말로 우연과 예기치 못한 일탈의 요소를 품고 있는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심리적인 기능, 그리고 삶의 스트레스를 완충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도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반복에 집착하고 의례에 의지 혹은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89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이 이야기하는 ‘편집증’은 삶의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들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증상은 아닐까.


 

영화 속의 인물 히라야마에게도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가족과의 갈등이 있었다. 타인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여동생과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 가지 단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에 노예 아닌자가 누가 있는가?”라는 세네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말한 이 ‘노예’의 조건에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를 우선 떠올릴 수 있지만, 나아가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관계, 이 ‘얽힘’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상처와 교란의 요소들 속에서 자신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일상의 의식들이 아닐까. 개인적인 의례로서의 작은 의식은 마치 하루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삶은 반복적인 리듬이 지속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존재의 장(場)이다. 이 의식/의례는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자신만의 작은 의식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눈,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버무려져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이 흐른다. 동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하루다. 중인공 히라야마는 운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의 삶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오랜 기억이 소환되어 상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젊은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싶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의 미묘함과 존재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화 <퍼펙트 데이스>는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의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의례/의식으로 가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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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퍼펙트 데이즈‘
정말 좋더라고요^^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히라야마의 과거가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결국 루틴이란 것도 많은 경험과 각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초란공 2024-08-15 13:4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죠~!! 빔 벤더스 감독 인터뷰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창비] (2020)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솔닛의 글을 읽다보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자연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에서 서구 백인들의 정치적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백인)이 원래 살던 터전으로부터 밀어내어 요세미티의 숲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원주민들에 대한 무시와 폄하를, 솔닛은 서부의 광대한 자연 풍경 사진으로부터 읽어 낸다. 자연에서 원시성, 새로움을 찾으려는 백인들의 열망은 원주민들과 관련한 이슈들과 오버랩되는 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사진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백인들은 애초에 이 땅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우리들이 찾아내 차지한 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런 시선이 요세미티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자연 풍광을 담아내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강력한 프리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요세미티를 비롯한 지역이 국립공원이 된 배경에는 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한 무시와 역사 지우기 행적을 덮어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캘리포니아 자연의 새로움과 원시성을, '타락하고 쇠퇴해가는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며, 미국인들이 느끼는 '문화적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한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지표로 활용했다고 지적하는 지점도 인상 깊다. 이런 주제를, 한 사진가의 삶을 다루는 글에서 자연스럽고도 치밀하게 녹여 낸 솔닛의 탁월한 글쓰기에 또한번 반하게 된다.

 

머이브리지는 사진의 역사에서 단순히 연속촬영과 영화 매체를 견인한 기술적 선구자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국내에서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적인 시선만 크게 부각되어버린 듯한데, 역사학자이자 사진연구가, 사진 비평가로서의 면모와 놀라운 통찰, 예리한 안목을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그림자의 강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철도 건설을 중심으로 서구 백인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과 동물 학살에 대한 주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부조리한 관계, 식민주의/제국주의의 문제 등이 하나의 큰 강처럼 이어지고 흘러가는 듯하다. 소수자/타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지배와 폭력적 시선이 한 인간과 사진의 역사와 더불어 층층이 교차하고 있는 글로 읽었다.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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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후지모리 데루노부.미나미 신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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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눈으로 거리를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

- 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 외 지음 |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 (2023)

 




노상관찰학 입문이란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일종의 계시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하 구보 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거리 사진에 관심을 두었던 기억 때문이다. 소설 구보 씨에서는 거리에서 관찰하기라는 행위가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이 고현학을 모데로노로지오(modernologio)라고 옮기고 있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옷차림 등을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로 등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노상관찰학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바로 일본의 20-30년대를 풍미했던 고현학에 있었다.

 


고현학은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일본을 강타했던 간토대지진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간토대지진은 재일조선인 66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낳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고현학이 지진 직후 시작했다는 기록에는 보다 다른 호기심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고현학을 시작한 이들도 거리에서 간토대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그 의구심을 거두어 들였다. 이들은 오히려 폐허가 된 도시와 사람들을 돌보고 이를 재건하는 일에 힘을 모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14명의 공저자 대부분은 예술분야를 공부한 이들이었다. 대부분 50년대 전후에 출생한 베이비부머 세대였기에, 1923년에 고현학을 시작한 세대와는 대략 한 세대가 차이 한다. 고현학을 보다 일상의 활동으로 가져온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고현학이란 이름 대신, ‘노상관찰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상관찰학 입문에는 대담 형식을 정리한 텍스트와 관찰 기록을 서술한 형식의 글 등 다양한 활동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노상관찰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과 유머감각이었다. 노상관찰이란 표현대로, 이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관찰기록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때로는 수집활동이 더해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수집가들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도 재미있다. ‘노상관찰자들이 수집가들과 달리 스스로를 차별화는 지점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데 있었다. 수집활동은 기본적으로 소유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 많다. 노상관찰들은 이 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집가는 다종의 희귀한 아이템(따라서 대개는 교환가치가 높은 사물들)을 소유할수록 환호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노상관찰자들은 이러한 물성을 소유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비물질적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대상들을 알아보고, 분석하고, 역사를 읽어내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대적 문화적 코드를 사물로부터 읽어내는 작업에 더 가깝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대상들 각각이 모두 하나의 문화적 기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관찰학방법적으로는 기호론에 가깝다”(33)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상관찰자들에게는 소유가 중요한 활동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학창시절부터 평생 맨홀 뚜껑을 관찰하여 기록한다던가, 먹이를 주며 거리의 강아지의 반응을 보거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강아지똥을 조사한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해체된 건물의 파편들을 집으로 가져온다던가, 심지어 여고 교복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선 이들이 하는 활동은 집에 아무리 천사 같은 부모 혹은 아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환영받기는 매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이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속하는 이런 활동들을 보노라면 나 역시 이들 뒤를 따라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저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60-70년대이다. 일본의 경제가 급속하게 팽창하는 한편,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가 추구하던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세대가 나오기 시작하던 시대.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투쟁하던 청년들과 이들의 깊은 좌절이 함께 했던 시대가 아닌가. 저자들은 이제 대부분 70-80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호기심과 에너지를 분출하던 청년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쩌면 일본 사회의 경직성과 고독, 그리고 상실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리로 눈길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20년대에 간토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삶을 응시하고 회복을 꿈꾸었던 한 세대 전의 청년들처럼 말이다. 고현학이 이들에게 간토 대지진과 같은 일상의 파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상상력을 동원하는 행위였던 것처럼. 달리 말해,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삶의 공간으로 탈주하고자 한 욕구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노상관찰활동을 엉뚱하고 쓸모없게 여기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내게는 무척 흥미롭다. 아니 흥미 이상이다. 한때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곤 했던 나는 우연히 구성되는 사건들에 무척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편이었다. 자주 가는 장소의 계절 변화를 지켜보는 일, 혹은 주변의 건물들에 생긴 변화들 등을 알아차리면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어쩌면 나도 언어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저자들과 만나 무척 엉뚱하고도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노상관찰활동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일환으로 건물이나 거리의 사물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가들은 많을 것 이다. 이러한 노상관찰자들의 활동이 지속성을 지니게 되고, 이들의 관찰 결과가 일관되게 기록되어 일종의 아카이브로 남겨질 수 있다면, 이 자료들은 특정 시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문명의 코드를 담은 역사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라진 건물의 잔해로부터 이 과정을 목격한 노상관찰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은 특정 시공간의 맥락을 형성하고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단순한 공간으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은 이 기억과 기록이 더해지며 비로소 역사성을 획득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관찰과 기록의 전통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60-70년대에 청년이었던 저자들은 꾸준히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때로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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