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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진희 저/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저 / 느낌이있는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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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er)

셰익스피어 원작 | NT Live(국립극장 상영) |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입장하며

연극 관람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대학시절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인상깊게 이후로 20 년이 지났지만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연극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연극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적확하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도 않았기에 연극인들이 그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치부했던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잠자리에 들때면 가끔씩 내가 내일 아침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삶의 유한성을 보다 느끼게되는 나이.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모든 연극(희극, 비극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비극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필멸한다 전제가 연극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연극은 인간이란 존재의 삶에서 길어낸 비애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배우들은 반드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정독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고전을 수십 읽고, 작품 속의 인물이 되려고, 부단히 자신의 자아와 일으키는 충돌을 경험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게된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국립연극단이 공연한 실황 녹화 작품이다. 현대적인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카이사르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제목과 달리 브루투스가 주인공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연극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장군으로서 반역자로 치부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브루투스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일까?

연극이 시작하고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영웅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배신한 암살자로 알려진 브루투스에 주목을 하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마지막도 충분히 비극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1 독재를 포함한 황제정치에 반대했기에 암살이라는 거사의 주동자인 브루투스를 주목했던 것일까. 연극에서 브루투스가 사용하는 책상에 독재자였던 스탈린(Stalin)’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름이 적힌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은 극단 연출자의 의도일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세심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같아 보였다. 혹은 셰익스피어가 승자의 기록으로만 남는 역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암살자/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셰익스피어는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같다. 가지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했을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진실 유사해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듯, 역사적 사실은 하나일지 모르나 진실은 무한할 있다고 본다. 카이사르의 진실과 브루투스에 유의미한 진실은 분명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과거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연극은 인생의 유한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모든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연극이라는 오래된 예술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아닐까한다. 오늘 끄집어내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러한 또는 연극의 대전제로부터 분기된 구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만만하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중심이 공화정 형태의 로마에서 절대권력을 갖는 황제가 되기를 야망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로원의 보수파와 충돌하는 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탄탄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숱한 정적(政敵) 보이지 않는 대결 국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영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라 브루투스의 파멸을 배신자가 겪게되는 역사의 인과응보로 치부하기 쉽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성의 전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이러한 상투성과 거리를 두기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배신자/암살자 혹은 패배자의 진실을 새로이 들여다보기로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브루투스에게도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충분한 명분에 주목했고 이를 상상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의 입을 통해 명예와 공익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의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관점을 통해 떠오른 생각은 역사라는 무형의 실체가 개개의 인간들에게 요청하는 소속에의 강요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떠올려보자.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명분(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어느 편이든 소속하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 편이 되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이적행위자를 밀고할 것을 폭압적으로 강요받는다. 그러나 밤에는 빨치산의 영향력 아래 이들 편이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고 적대행위를 하는 이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브루투스의 명예과 공익이라는 대의는 분명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것이며, 역사에서 선택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브루투스의 암살 행위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의 1 독재, 황제정치를 반대할 것을 요구하며 입장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 행위로 있겠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성난 군중으로부터 달아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은 세력을 규합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연합군과 맞서 필리피 평원에서의 전투를 치른다. 2차례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브루투스 측의 패색은 점점 짙어지게 된다. 수세에 몰린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이제 자신들이 운명의 요구에 의해 각자의 입장을 선택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생일날 자결을 하고, 브루투스 역시 부하의 도움을 구하여 카시우스가 길을 따른다. 필리피 평원의 결전이 있기 전날 브루투스는 자신의 막사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망령과 조우하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역사의 요구에 의해 분명한 정치 행위를 실행해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라는 당대의 영웅을 암살한 공모자들 역시 각자 상당한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들이었으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시대와 역사의 산물임을 부인할 없다.  

 

 

시인킨나의 죽음에 주목하며

이번 실황녹화 연극에서 잠시 지나가듯 처리된 시인킨나의 죽음 장면을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던 시인킨나는 안토니우스의 추도사로 흥분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인킨나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공모자킨나와 동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짧은 장면을 셰익스피어가 추가했을까? 나는 점이 궁금해졌다. ‘시인킨나의 죽음이란 사건은 분명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이나 브루투스의 파멸과 어떤 개연성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지적인 개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었을 집단이 보여주는 무감각한 잔인성을 몸소 겪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잔인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만이보여주는 폭력성이라 있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앞서 브루투스가 공언한 명예와 공익이라는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지 주의할 점은 인간의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닐 있다.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영장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저서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저자는 줄곧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폭력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가? 집요하게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의 폭력 행위는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다시 밝히자면 인간이란 생물이 보여주는 폭력은 여타 영장류가 보여주는 폭력의 층위와 결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 또는 번식의 유리함을 얻기 위한 위력 행사의 과정인 반면, 인간에게는 다른 층위, 명분 대의 같은 허구의 실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롭게 발현되는 잔인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양상이란 결국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이데올로기, 명분, 대의 등등) 위해 구성원들이 헌신하는 사회성, 이타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폭력의 잔인성 설명해주는 본질이란 생각도 해본다.

 

 

다시 시인킨나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본다. 그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인간집단이 공유하는 명예혹은 대의 대한 집단의 이타성이 잘못 발현된 사례로 읽힌다. 집단의 이타성은 무형의 경계(또는 대의) 만들고 안과 밖을 구분하며(편가르기), 경계 밖의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표출한다.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명예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느 가족 혹은 집단이 침해받은 명예 대한 복원 욕구, 집단에 대한 헌신(이타성)이라는 반작용의 결과로 있을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진화생물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시인킨나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분명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해 관심있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녔다는 의미로 읽혔던 것이다

 

 

브루테! (et tu Brute!)

암살 공모자들로부터 일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에서 브루투스와 대면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남겼다는 유명한 대사이다. 줄곧 영어로 말하던 카이사르 역의 배우도 대사만은 라틴어 그대로 전달했다. 직역하자면 그리고 브루투스도!정도가 것이다. 대사를 들었을 나는 신뢰받던 브루투스의 배신과 카이사르에 대한 도전 행위가 다름아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코 넘을 없을 같던 강력한 대상(카이사르)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행위는 부친살해 모티브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영웅들 대부분은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이 극복해야하는 거대한 상대와 대결해야하는 운명을 공통적으로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라야 상대를 이겨내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황제 권력을 염원하던 카이사르를 극복함으로써 자유와 해방 같은 대의를 추구하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재현으로 있지 않을까.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소설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웅 카이사르에 배신한 반역자 브루투스를 새롭게 주목한 작품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누군가 셰익스피어로부터 얻은 접근법을 유사하게 적용해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2007 미국의 도움으로 독재자가 되었다가 다시 미국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다면 하나의 비극을 만들 있을 것이다. 오히려율리우스 카이사르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경우라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물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이 역사에서 여전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있을 것이다.

 

 

퇴장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율리우스 카이사르 원전으로하여 현대적인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NT Live <줄리어스 시저> 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원전에 매우 충실한 같다. 물론 록콘서트를 연상하게 하는 연극의 도입부나 독특한 연출방식이 현대적으로 적용된 부분은 있지만 원전의 의도와 줄기를 변형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대의 문화를 충실히 복원하지 않고 시대성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일부 소품의 변화를 주는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각본 자체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기 보다는 원전의 기본적인 의도를 오히려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연출의 범위나 방식을 어떤 범위에 한정하고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있을 것이다. 이번 연극의 연출은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이고 짜임새있게 활용한 참신한 진행기법에 많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있다. 연극의 무대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있다. 로마 시민으로도 참여하는 관람객들은 제레미 벤담의 원형 감옥 연상케하는 무대 주위에서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되거나 연극의 참여자로서 함께한다. 아울러 관람객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하는 현장에서 공모자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암살장면을, 그리고 시인킨나가 성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우리는 영상 화면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가지가 안타까웠다. 영미권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조가 남긴 문학 유산(비록 고어이긴 하지만) 직접 1 자료로 읽어내고, 연극이나 저술에 활발히 재해석하고 이용하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훈련받지 않는 이상 조상이 남긴 한문 서적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깞다. 그나마 번역된 작품도 풍부하지 않은 같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이라는 조선시대 대문호가 있으나 번역이 되지 않으면 그의 산문 한편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때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화 유산을 활발히 재해석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당시 미개했던 서유럽 문명이 이슬람 서적 문물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이를 번역하고 공부함으로서 이슬람을 극복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반면 우리는 훌륭한 언어를 가지고도 다양한 지혜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듯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이번에 보게 NT Live공연이 광고문구처럼 브루투스가 파멸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어김없이 반복될 당신의 속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혹은 당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길 원하는가?’ 우리에게 묻고자하는 같다. 결국 메멘토 모리’,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원전이 재해석되고 연극이 공연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주제에 대해 정답없는 답을 구하는 행위라고 있겠다란 생각을 해본다. 혹은 연극이란 호모 사피엔스의 결코 끝나지 않을 고뇌의 흔적이자 몸부림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우리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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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항상 연기가 폴폴 날아다니던 맨하탄을 걷다가 찍어둔 필름 사진으로
시아노프린트용 필름을 다시 제작하고, 감광유제를 직접 만들어
붓으로 바르고 노광한 후 얻어낸 이미지.
 
 
 
아직은 많이 서툴지만 암실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흑백톤의 인화보다 
제약이 더 많고, 그 만큼 더 간단하게 작업할 수 있다. 
흑백사진은 암실에서 후처리 작업을 의도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좀 더 넓은 만큼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기술을 읽혀야한다.
 
시아노프린트는 제작한 필름을 인화지 바로 위에 밀착인화지를 만들듯이 밀착하여 노광하므로 필름과 인화지 사이에서 후기작업을 할 여지가 없다.
필름을 만들 때, 애초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수는 있겠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산책하던 어느 저녁
서로에게 집착하듯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표현하던 커플을.
이 커플은 분명 한 시간이 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산책하러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도 같은 강도의 입맞춤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진의 왼쪽 끝에 내 그림자가 부러운 듯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땐 그랬다. 해가 넘어가는 석양으로 늘어진 긴 그림자를 보며
이들도 마치 물처럼 길게 흘러흘러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사진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사진과 많이 띄어놓은 이유는 사진을 볼 때 텍스트를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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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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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 지음 | 김병욱 옮김 | 미래인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번에 만나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네덜란드,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떠돌았던 방랑자 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련한 요절 화가의 삶을 따라가면서 떠올렸던 사람은 니체였다. 이들은 시대를 너무 앞섰다는 대가로 우울증과 간질, 발작을 자신의 앞에 지불했어야 했나하는 생각마져 들었다. 물론 역사 앞에 이런 가정과 의문은 억지스러운 나만의 상상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들의 삶의 어느 부분을 들여다보면 유사해보이는 점들도 많이 발견된다. 목사 집안의 자녀로서 본인들도 자의로 혹은 타의로라도 목사가 되려는 과정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는 , 그리고 이들 모두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은 점도 그렇다. 가식없는 . 고흐와 니체 모두 자신의 또는 신념과 자신들의 작품들과 주인공들의 삶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언젠가 빈센트   고흐의 편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겪고, 알코올 중독 증상에 정신착란 증세 등으로 내가 고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고흐는 명민하고 매우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양심적이었던 것인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과 육체로 감당하려다 괴로워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고흐라는 제목의 영화에서는 빈센트의 자존심강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성마른 성격과 아버지와의 불화가 드러났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성격과 삶을 이루는데 영향을 주었을 법한 초기의 경험들에 대한 소개가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읽고 새롭게 느낀 점이다.

 

     고흐가 상대적으로 유복한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사회성이 부족하고 침울하게 광신적인그리고 성마른 성격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정황을 좀더 엿볼 있었다.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고흐가 11 되던 어느 가족은 빈센트를 어느 기숙학교로 보냈던 것이다. 책의 저자 프레데릭 파작이 지적하고 있듯이 기숙학교 이후의 삶은 빈센트에게 고독 의미했고, 스스로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흐를 소개하는 전기나 책자는 너무나 많지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담담한 어조로 고흐가 마주대했을 법한 고뇌들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랑자로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고흐의 침울하게 광신적인인물의 삶이 전보다도 , 그리고 고흐의 눈빛이 이해가 된다. 아들 빈센트에게 더러운 짐승이라고 말했던 아버지와의 불화는 고흐가 스스로 서서 고난과 절망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한 , 평생을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저자인 파작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는 우울한 방랑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고 있다.”(89)

 

     너무나 알려져 있듯이 6 어린 남동생 테오와의 관계는 고흐의 삶에서 제외하고 생각할 없는 주제다. 고흐의 편지가 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가 많았던 만큼 형제의 관계와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던가를 속속들이 아는 데는 이들이 교환했던 서신을 참고하면 것이다. 고흐는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던 테오의 지원을 받으면서 짧은 생애에 이루기 매우 힘든 업적을 남긴셈이다. 특히나 화상을 하던 테오로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과 화가들을 만날 있었던 , 그리고 고흐의 화풍에 영향을 일본판화 작품들을 접하게 것들 모두 사실상 테오의 역할이라고 있다. 고흐도 그의 편지에서 인정하듯, ‘무조건적인 테오의 애정 대한 반대급부로서 고흐는 편으로 자신은 어쩔수 없는 실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괴감의 감정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흐의 삶에서 되풀이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은 실패했다는 절망, 열패감이었다. 바로 사회 속에 자리를 갖지 못한 , 앞으로도 영원히 갖지 못할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로서 말이다.

 

     환대받지 못하던 방랑자의 이미지를 다른 문학작품들에서 떠올려본다. 바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나오는 홀든 콜필드를 먼저 생각해낸다. 콜필드는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한 , 뉴욕 맨하탄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자다. 한편 고흐는 콜필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세속적 성공과 사회 전체를 경멸한다. 또다른 방랑자 이미지로서 고흐를 닮은 캐릭터도 있다. 바로 <좀머씨 이야기> 주인공 좀머씨이다. 물론 좀머씨는 성가신 미술 도구 대신 길다란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한 끊임없이 광야를 걸어가는 캐릭터이다.

입에 파이프를 물고, 모직 팬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성가신 미술 도구들과 보따리를 하나 짊어지고, 그는 호헤베인 역가지 걸어간다. 주민들의 욕설과 야유를 들으며, 작은 마을들을 가로지른다. 눈과 바람을 무릅쓰고, 절망으로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 쓸쓸한 광야를 시간 동안이나 걸어간다.”(116)

 

물론 콜필드든 좀머씨이든 허구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인데 반하여, 고흐는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에 낯설어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언급해보자면, 작가이자 화가인 저자의 그림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들은 정방형 프레임을 갖는 중형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보인다. 혹은 타인의 혹은 뒤에서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무관심해 보이는 풍경을 포착한 사진처럼 제시되고 있다. 흑백의 단색 판화같은 파작의 그림들을 책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본문의 텍스트와 매치가 되지는 않는 듯하다. 마치 영화에서 대사와 배우들의 입모양이 어긋나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풍경의 배열은 마치 점점 환각과 정신착란을 겪게되는 고흐의 내면 풍경과 추억의 편린들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프레데릭 파작의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절망과 방랑의 짧은 삶을 살다간 고흐의 삶을 치밀하게 재현해놓았다. 고흐의 슬픔과 우울은 자신이 세상을 구해야한다는 믿음 내지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그럴 존재가 도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파멸시키게 원인이 것은 아닐까. 단순히 광인이라는 단어로 빈센트를 평가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평생동안 가족, 특히 동생 테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며 자신을 다그쳤을 고흐의 모습을 책을 읽어나가며 상상해볼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빈센트가 아버지를 죽였다 비방한 누나와 냉담하던 어머니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빈센트를 좀더 환대해주고, 격려의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어떠면 빈센트가 술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환대 받지 못한 세상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행동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책은 작가이자 화가로서 프레데릭 파작이 빈센트의 그림과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한 흔적의 결과이다.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 등으로 다소 부족해보이는 보다 면밀한 화가에 대한 낯선 기록이기도 하다.

 

 

30년이나 떠돌아다녔기에, 내겐 갚아야 부채와 완수해야 과업이 있으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는 오직 내가 감사의 표시로 추억거리를 하나 남기는 한에서인 것이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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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 (2015.12.01-12.13)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내려가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입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 시릴라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된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