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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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는 매카시가 있었다

- 패신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지음 | [문학동네] (2024)

 




코맥 매카시의 스텔라 마리스에 이어 패신저를 읽었다. 이 이야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텔라 마리스에서는 수학 천재인 얼리샤 웨스턴이 정신병원에서 담당 의사와 나눈 대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한편 패신저는 얼리샤의 오빠인 보비 웨스턴과 먼서 사망한 얼리샤 웨스턴 두 명의 이야기가 시간차를 두고 교대하는 형식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보비 웨스턴의 이야기는 현재, 얼리샤의 이야기는 과거를 대표하며 이 두 남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왕복운동하며 진행된다. 마치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교차하며 나아가듯, 두 남매의 서로 다른 현실이 과거와 현재라는 씨실과 날실이 직조하며 구성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특히 패신저는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초반에는 추리소설처럼 긴장감이 느껴져 몰입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과작의 작가라고 한다. 게다가 대중 앞에 자주 나서지도 않는단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평가할 단서는 작품 속에 있다. 작가의 유작이라는 이 두 작품을 읽으며 나는 밀란 쿤데라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을 자주 떠올렸다. 이들의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카시의 작품과 어딘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까닭이다특히 수많은 다중 세계 가운데, 얼리샤와 보비의 세계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하는 듯한 형식은 하루키의 최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와 라는 화자의 현실이 교대로 나아가는 1부의 형식마저 떠올리게 했다. 물론 형식뿐만 아니라 좀더 차근차근 찾아보면 매카시의 작품을 닮은 작품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접한 좁은 문학작품의 범주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짧은 독서 경험이나마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과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이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죽음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군가 이런 경험 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실의 경험은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때론 이들이 겪은 상실에도 제때에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살았던 시대의 역사나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크건 작건 배경이 되는 역사 속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깊은 내상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애초에 문학이란 것은, 이런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레 작가의 사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쿤데라는 68혁명과 러시아의 체코 침공 시기에 개인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처럼 동시대의 세계사적 상황을 일본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특히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전체주의의 흔적을 유지하고 심지어 이를 다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던 일본 사회 속의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전쟁들을 통해 재기하기에 이른다. 특히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의 대리자로 자처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 경제가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초고속 성장하게 된 배경인 셈이다. 이것은 극우 성향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본 사회가 타국의 전쟁을 발판삼아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 개개인들은 이 성장에 발맞추어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개인들은 점차 소외되어 갔고, 심지어 국가주도 사업의 부속품이 되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이들은 상실의 경험을 안고 더 고립되거나 표류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이런 개개인의 상실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하루키가 대학 신입생 당시 겪었던 전공투 사건이 그에게는 이후의 세계관을 결정할만큼 커다란 사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루키 세대의 상실과 좌절을 직접 체험한 청년으로서 그가 이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것이 이해가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국가가 주도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고도성장의 시대에 고립되고 상처를 입은 채 표류하던 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들이 받은 시대의 상처로 고통 받으면서 치유해나가는 과정 혹은 이들이 탈출구를 찾고자 방황하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스키너박스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60년대 세계인들의 무의식에 미친 영향은 미로에서 출구를 찾는 실험쥐들을 연상하게 하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가 4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깊은 우물 속의 어딘가에숨겨 놓았다가 꺼내온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상처받은 인물들의 출구 찾기 여정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카시의 작품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20세기에 세계 제일의 경제 및 군사 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전무후무한 거대 국가프로젝트와 이어지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 이와 동시에 시작되는 냉전시대와 맞물린 세계 공멸의 위기. 이제 미국은 적국뿐만 아니라 자국민들까지 실존적 위험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라는 괴물은 개인들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때론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보비 웨스턴과 얼리샤의 아버지 역시 이런 미국의 행보에서 선두에 섰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에서는 웨스턴의 아버지를 언급할 때, 끊임없이 아버지의 업보, 혹은 아버지들의 죄를 언급한다. 나치 독일에 투하하려던 원자폭탄은 갑작스러운 독일의 패망과 항복으로 그 사용 명분을 잃고 만다. 미국은 대신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리고 본격적인 냉전 구도를 설계하며 세계 패권을 쥐고자 했다. 이렇듯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서구 백인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과 반성의 시각이 작가의 시선에서 줄곧 느껴진다.


 

얼리샤와 보비의 할머니는 웨스턴의 집안에 저주가 들었다고 우려한다. 암을 고치러 멕시코까지 갔던 남매의 물리학자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홀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보비는 아버지가 묻힌 곳을 결국 찾지 못한다. 영원한 상실. 이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패신저의 시작이 얼리샤의 자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 그리고 오빠 보비가 동생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 역시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었던 보비와 얼리샤 남매 아버지의 업보가 집안의 저주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여길 만 하지 않은가. 이제 남은 사람은 보비 하나 뿐이다. 그는 가까운 두 사람을 잃는 상실을 겪으면서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슬픔에 잠식되어 버린 듯하다. 상실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웨스턴 집안이 겪는 불행(상실의 슬픔)은 백인들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백인 가문의 자녀인 얼리샤와 웨스턴은 집안의 저주라고 여겨진 상실의 고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전도유망하던 보비 웨스턴이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심해잠수부가 되는 설정에도 주목해볼만 하다. 물질세계의 질서에 주목하는 물리학이 아니라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직업을 택한 보비. 이 설정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물과 비교해볼만하다. 무의식의 세계를 암시하는 우물 아래 무의식의 세계와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보비의 상황이 유사한 심리학적 설정이라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보비는 깊은 바다로 잠수하면서 자기 내면의 깊은 속에 자리 잡은 무의식에 가 닿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긴 비행기에서 블랙박스와 한 명의 행방불명된 승객은 어쩌면 보비가 알아낼 수 없는 상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찾지 못하는 아버지의 묫자리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보비 웨스턴은 아버지의 죽음에 합당한 애도를 영원히 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얼리샤도 결국 비슷한 상황인 셈이다.

 


하루키 소설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제대로 애도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면서도 자신과 분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애도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깊은 내상을 입은 채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슬픔에 압도되어 허우적대기도 하는 것이다. 하루키나 쿤데라처럼 매카시 역시 애도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인간들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금 달리 볼 여지도 있겠다. 이런 상황은 백인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독자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처럼 희생자 코스프레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한 백인 가족이 입은 상처와 슬픔에 주목하고 있으나, 예컨대 원폭 피해자들의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시선은 백인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선이 드러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관점이라고 볼 여지도 있겠다. 혹은 내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너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른 독자와의 토론을 통해서 더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편 보비의 부모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혐오와 비난을 어느 정도 차단하려는 장치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대인은 오랜 역사를 통틀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죄의식을 느끼는 인간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아시아인이 서구사회에서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 대부분이 유대인인 상황에서 보비의 부모 중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매카시의 사려 깊고 치밀하게 고려한 결과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처럼 매카시도 거대한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표류하는 사람들이 치유되어가는 과정 혹은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긴 하는 것 같다. 물론 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출구를 찾는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패신저스텔라 마리스를 읽는 동안 종종 하루키를 떠올렸던 것이다.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 코맥 매카시가 있었다고 말이다.


 

책을 덮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구 하나는, 죽은 친구 존 셰던이 웨스턴을 찾아와 건네는 한 마디, “가볍게 여행해”(717)였다. 아마도 이 말의 앞에 생략되어 있는 단어가 바로 나그네처럼이 아닐까 싶었다. 이 말이 의외로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는 코맥 매카시가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매카시는 우리가 자신과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최대한 서로를 보살펴주도록 무언의 당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부터라고 말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닥친, 불가피한 상실에 대해 애도하며 조금씩은 앞으로 나가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내게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그 자체가 삶이라고 말이다. 인간이란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선 무척이나 나약한 존재들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취약한지 것인지 놀라곤 한다. 하루아침에 우리의 삶은 세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누군가 불치병 선고를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회적 안전망 속에 대비를 든든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런 불시의 습격은 이에 대한 대비를 얼마나 잘 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취약한 인간 존재를 향한 인간적인 관심과 연민, 공감의 시선을, 하루키뿐만 아니라 매카시에서도 발견한 것은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므로 한도 끝도 없이 무거울 수 있는 인간의 삶이지만, 내일부터는 조금 가볍게 산책도 해보는 삶을 살아가보고 싶어진다






[1]
(657-659)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스콰이어에게,
이 편지는 존슨시티 참전용사 병원에서 보내는 건데 좋은 소식은 아니야. 말을 탄 자가 내 문에 백묵으로 표시를 한 것 같아서 이 편지가 너한테 닿았을 때면 - 닿는다는 가정하에 - 나는 이 필멸의 똬리를 벗어버리는 중일지도 몰라."(657)
-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 P657

[2]
"어디든 우리가 내리는 곳이 늘 기차의 목적지였어. 나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배운 건 거의 없어. 그래도 최소한 친근한 얼굴 하나 정도는 합리적인 바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옆에 내가 지옥에 가기를 빌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거. 시간이 더 있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우리가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그것은 처음에 생각하던 그게 절대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 됐어. 나는 이 생이 특별히 살기 좋다거나 자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한 적이 없어. 내세가 있다면 - 없기를 정말 간절히 빌지만 - 노래는 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658)
- P658

[3]
"담대하라, 스콰이어. 이건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권고였는데 적어도 이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어. 네 역사가 불필요하게 쓰라리다고 내가 늘 생각했다는 건 알았겠지. 고난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견뎌야 해. 하지만 불행은 선택이야. 네 우정에 감사해. 이십 년 동안 비판의 말 한마디가 기억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너에게 깊은 축복이 있기를. 우리가 만에 하나 다시 만난다면 그곳에 술 빠는 데 비슷한 게 있어서 내가 너한테 한잔 살 수 있기를 바라. 아마도 너한테 그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지. 맞춤 가운을 입은 키가 크고 좀 건달기가 있는 녀석을 찾아오라고."(659)
- P659

[4]
"웨스턴은 자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손.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나한테 물은 적이 없어. 나와 상의한 적이 없어.
- 너 자신의 인생에 발언권이 없구나.
-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모든 게 사라진다면 내가 자유롭게 식료품점에 갈 수 있든 아니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
-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럴 거고.
- 그래.
-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680)
- P680

[5]
"그는 이비사의 문구점에서 줄이 쳐진 작은 공책을 한 권 사왔다. 곧 누레져 바스러질 싸구려 펄프 종이. 그는 공책을 꺼내 안에 연필로 썼다. 내 앞에는 시간이 없었고 내 뒤에도 없을 것이다."(688)
- P688

[6]
"그는 칼라사비나의 보데가 마당에서 자전거를 챙겨 망태기를 손잡이에 걸고 산하비에르와 라몰라의 곶으로 향하는 길로 나섰다. 길가 어둠 속에서 들판 가득한 새 밀이 부드럽게 허공을 베고 있다. 위로 소나무숲을 뚫고 올라간다. 자전거를 민다. 세상에서 홀로."(689)

[7]
"다가올 몇 년 동안 그는 해변을 거의 매일 걷게 된다. 가끔 밤에 해초가 밀려와 그린 선 위의 마른 모래에 누워 옛 뱃사람들처럼 별을 살핀다. 혹시 그도 자신의 항로를 그릴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또는 그 검고 영원하고 광대한 공간 위로 별들이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에서 지상의 어떤 일이 유리한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해서. 그는 건너편 해안을 따라 한 줄로 늘어선 피게레타스의 불빛들을 볼 수 있는 곳까지 건너나갔다. 검은 바다가 찰싹인다. 그는 바짓자락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밤의 캐롤라이나 해안. 여관 건물과 진입로를 따라 빛나는 불빛들. 그녀가 밤 인사로 입을 맞출 때 뺨에 느껴지던 숨결. 마음속의 공포."(692)

[8]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693)

[9]
"아버지. 절대적인 흙으로부터 악의 태양을 창조했고 사람들은 그 빛에 의지하여 서로의 몸에서 자신의 종말을 알리는 어떤 무시무시한 전조를 보듯 옷과 살 너머의 뼈를 보았다.
그는 멕시코 북부 쥐의 땅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696)

[10]
"그는 곶을 다라 걸어나갔다. 멀리서 천둥이 상자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두운 수평선을 가로질러 굴러갔다. 특이한 날씨. 번개는 여위고 빠르다. 땅 가운데 바다. 서양의 요람. 연약한 촛불이 어둠 속에서 비슬거린다. 모든 역사는 자기 소멸을 위한 리허설."(697)

[11]
"왜 그 사람을 묻지 못하는 거야? 그 사람 두 손이 그렇게 붉어? 아버지들은 늘 용서받아. 결국은 용서를 받아. 여자들이 이 세상을 질질 끌고 이런 참상을 통과해 왔다면 그 여자들한테는 현상금이 걸려 있을 거야."(700)

[12]
"한순간의 회상에 다 담을 수 있는 오랜 세월의 방랑. 텅 빈 극장은 너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모든 게 텅 비어 있는 거야. 이건 과거라는 비워진 세계의 은유야. 어쨌든 새 소식을 찾아서 올 법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지."(710)

[13]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바닥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적다고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걷는 내내 우리가 거의 알지도 못했던 과거가 수상쩍은 투자금처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굴러들어오지. 이 시대의 역사는 정리되려면 오래 걸릴 거야, 스콰이어. 하지만 우리의 이해에 공통의 용골이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는 거야. 그게 우리의 핵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군.
-우리에 대한 응분의 벌로는 부족하진, 물론. 하지만 맞아."(714)

[14]
"내가 이따금 신랄하게 굴긴 했지만 네가 사별을 그런 높은 위치로 끌고 가는 방식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늘 감탄스러웠어. 슬픔을 그것이 슬퍼하는 것을 초월하는 지위로 들어올리는 것. 아니, 스콰이어. 내 말을 끝까지 들어. 그게 상실이라는 관념이야. 그 관념이 모든 상실 가능한 것들의 무리를 포괄해. 그건 우리의 원초적 공포이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마음대로 뭐든 갖다붙이지. 그게 우리 삶에 침입하는 게 아니야. 그건 늘 거기 있었어. 네 방종을 기다리며, 네 양보를 기다리며.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싸게 팔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어."(715)

[15]
"하지만 잘 들어, 스콰이어. 어떤 것의 내용이 불확실할 때는 형식이 상황을 더 좌지우지할 수가 없어. 모든 현실은 상실이고 모든 상실은 영원해. 다른 종류는 없어. 게다가 우리가 탐구하는 현실은 우선 우리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우리가 뭐야? 십 퍼센트의 생물과 구십 퍼센트의 밤소문nightrumor이지."(716)

[16]
"-너한테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스콰이어. 어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짐을 벗는 일이야. 싸움에 과거를 지니고 가는 건 곧 죽음으로 달려가는 거야. 내핍은 마음을 고양하고 비전에 초점을 맞추지. 가볍게 여행해. 몇 가지 생각이면 충분해. 외로움에 대한 모든 치료책은 그걸 미루는 것에 불과해. 그리고 치료책이란 것이 아예 없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어. 물이 잔잔하기를 바라, 스콰이어. 늘 그걸 바랐어."(717)

[17]
"해변에서 동전 하나를 발견했다. 수백 년 동안 씻겨서 맨들맨들하게 닳고 일그러진 구리 원반. 그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외딴곳에 남은 사라진 세계들의 잔재. 북쪽 먼 바다의 암초들 사이에 있는 배의 뼈들처럼. 사람의 뼈들처럼."(720)

[18]
"그에게는 그녀의 사진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자신이 그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모르는 사람이 어느 먼지 낀 가게에서 발견한 학교 앨범에서 그녀의 사진과 우연히 마주치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갈지도. 그 눈을 다시 들여다볼지도. 오래된 동시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세계. 그녀가 채석장을 떠난 뒤 그는 혼자 앉아 있었고 마침내 깡통에 든 작은 불들이 펄럭거리다 하나씩 꺼졌다. 그러자 오직 전원지대의 어둠, 그 정적. 멀리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721)

[19]
"그는 램프 불빛에 의지해 작고 검은 책에 글을 썼다. 자비는 홀로 있는 사람의 영역이다. 집단적 증오가 있고 집단적 슬픔이 있다. 집단적 복수와 심지어 집단적 자살도. 하지만 집단적 용서는 없다. 오직 네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물을 붓고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를 우리 마음이 아니라 우리 손아귀에 고정한다. 남자들의 딸들은 어두컴컴한 옷장 안에 앉아 면도칼로 팔에 메시지를 새기고 잠은 그들 삶의 일부가 아니다."(729)

[20]
"그는 팔꿈치 옆 램프의 심지를 올리고 상자에서 공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다 멈추었다.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결국, 그녀는 말한 적이 있었다. 모방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게 특권의 마지막 박탈이 될 거야. 그게 다가올 세계야. 어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유일한 대안은 콘크리트로 검게 타들어간 사람들의 그 기괴한 형태가 주는 놀라움뿐이야.
무덤에서 무덤으로 뻗어 있는 인간의 시대들. 점판암에 새긴 회계. 피, 어둠. 나무판 위에서 죽은 아이들 씻기기. 형태와 수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한 화석 자국들을 간직한 세계의 돌 척층물. 내 아버지의 현대판 암면 조각과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길 위의 사람들."(724)

[21]
"마침내 그는 몸을 기울여 유리 등피 쪽으로 손을 오므려서 불을 불어 끄고 어둠 속에 드러누웠다. 죽는 날 그녀의 얼굴을 볼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지상의 마지막 이교도가, 그 아름다움을 어둠 속으로 데려가기를 바랄 수 있었다. 짚자리에 누워 미지의 언어로 작게 노래하면서."(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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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와 하루키, 코맥 매카시를 한 쾌에 엮으시다니
묵직하고도 얻어 갈 것이 많은 리뷰네요.
한동안 멀리했던 하루키를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