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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평점 :
환각은 신체 및 신경계를 들여다보는 문이다
- 올리버 색스의《환각》(2013)
올리버 색스가 지난 2015년 8월 30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6년이 다 되어 간다. 신경과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환각 증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약물을 직접 체험하여 증상을 기록하거나, 환자의 소견을 면밀히 듣고 기록했다. 오늘 읽은 《환각》은 색스가 여든이 다된 시기에 집필하여 80세가 되던 2012년에 출간한 책이다. 1958년에 그가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신경학자가 되었으므로, 의사가 된 지 54년이 지난 시점에 출간한 책이다. 내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을 오로지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공부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덮은 후 이런 정황을 생각해보니 더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성인기 전체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었다.
이번 《환각》은 꽤나 더디게 읽었다. 환각과 관련한 개념 및 용어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각(hallucination)'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듣는 현상을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환각 증상 중에서 내가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증상은 ‘죄수의 시네마’라고 알려진 감각 박탈 현상, 귀울림/이명, 몇 가지 편두통 전조 증상(안내 섬광, 요새 무늬와 같은 것), 부분(초점) 발작, 입면 환각(잠이 들 때 무늬와 형체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환각), 수면마비 정도다. 물론 문외한인 내가 책에 소개된 증상만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각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체 증상들이었다.
구정 연휴 전에 갑작스럽게 대상포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대상포진이라는 녀석은 어렸을 때 몸에 들어왔던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건강상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 이를 테면 피로가 쌓였을 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단순포진 바이러스가 후각 신경을 포함한 신경을 공격할 때 환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러스가 신경에 손상을 입히거나 자극하면서, 예를 들어 후각 환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매우 둔한 편이라 대상포진을 겪기 직전에 전조 증상으로 특정한 냄새 환각을 경험했는지 잘 모르겠다. 특별히 불쾌한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가 내 후각신경에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점은 환각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흔히 간질로 알려진 뇌전증에 관한 설명이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키고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이로부터 나타난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은 만성적, 반복적으로 뇌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뇌에서 비정상적인 전기 방전이 갑자기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뇌 기능에 마비가 오는 상황이다.
우리는 역사상 여러 위인들이 ‘간질’을 겪었다고 알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색스에 따르면, 그는 ‘무아경 발작’을 겪었다. 이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만 맞는 것이 아니라 황홀감과 같은 초월적 기쁨을 공통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한 곳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역자가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시절, 어느 부활절 밤’ 최초의 간질 발작이 있었다는 다분히 ‘시적인’ 술회를 남겼다.”(문학동네, 2020, 제2권 446)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간질 발작을 경험한 시점이 총살형 직전에 살아나 수감된 시베리아부터라고 언급했다.
반면 색스는 《환각》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최초 발작 시기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은 유년기에 시작되었지만,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 40대에 들어서야 빈번해졌다.”(198)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이미 유년기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인 소피아 코발레프스키가 《유년의 기억 Childhood Recollections》에서 쓴 것처럼, 최초의 발작은 어느 부활절 전야에 일어났다(알라주아닌은 도스토옙스키의 간질에 관한 논문에 이 책을 인용했다)."(198-199)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을 최초로 유발한 원인이 총살형의 공포로 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스의 설명이 옳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총살형의 공포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번역자의 해설에는 올리버 색스가 제시한 두 가지 사실이 뒤섞여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유년 시절 어느 부활절 전야에 최초로 경험했던 간질 발작에 관한 언급과 시베리아 유형 시절에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한 발작 사례를 섞어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정리하면 색스가 진술한 부분이 옳을 경우, 《죄와 벌》(문학동네, 2020)의 번역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로 발작을 겪은 시기를 총살형 집행 경험 이후 시베리아 감옥에 수감된 기간 중으로 오해한 듯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에 영향을 준 것이 총살형의 공포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생물학적/유전적 원인인지 아니면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인지, 혹은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색스의 서술이 옳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총살형의 공포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아마 유형지에서 경험한 발작에는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이미 어렸을 때에 발작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생물학적인 원인 혹은 어렸을 때의 어떤 심리적/문화적 경험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번역자 혹은 출판사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검토하셨으면 하는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신경학자 게슈빈트의 논문 내용이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성격을 논문에 이렇게 묘사했다. “도덕성과 예의 바른 행동에 점점 집착하고 몰두한 점, ‘사소한 논쟁에 말려드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진 점, 유머의 부족함, 상대적으로 성에 무관심한 점, 그리고 높은 도덕적 어조와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낸 점’”(200). 게슈빈트는 이 증상을 ‘발작 휴지기 성격 증후군’이라고 언급했는데(현재는 게슈빈트증후군으로 알려짐), 이 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은 종교에 대단히 열중하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글쓰기 혹은 강한 예술적 열정을 보인다고 한다. 색스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이 증상을 보고 떠오른 사람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그 역시 간질을 앓았다. 또 고흐에 관한 영화, 그가 남긴 편지와 관련 서적에 기록된 고흐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그 역시 종교에 대한 열정, 강박적인 예술적 열정과 사소한 모욕에 쉽게 화를 내는 행동을 보였다. 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무아경 환각’을 수반한 증상은 측두엽 발작 초점의 활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측두엽 부위의 특정 부위에서 과도한 흥분 상태를 보인다는 말이다.
《환각》에는 환각 증상과 관련한 다양한 증세와 관련 설명이 나온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섬망’이 기억난다. 이 증상은 “고열을 수반한 감염병 또는 신부전, 피질환, 당뇨 조절 실패 같은 문제들로 인해 의식이 요동치는 상태”(227)를 말한다. 이 섬망을 겪는 경우 대개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징후라고 한다. 색스는 마이클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는 중증 간염으로 간에 손상과 경변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신체는 단백질 소화 과정 및 부산물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색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치즈를 권고량보다 많이 섭취했다. 그 결과 그는 ‘꿈을 꾸듯 불안정하고 무의식적인 운동’을 경험했다. 단백질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성분들이 뇌신경을 중독시켜 섬망 증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소개하는 다양한 환각 증상은 섬망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 경험하기도 하지만, ‘입면 환각’과 같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환각 증상이 있다. 특히 색스는 편두통과 같은 여러 신체 징후와 이를 통한 환각 증상을 몸의 신경계를 보여주는 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문외한인 내가 혼동할 수 있는 꿈과 환각은 엄연히 다르다고 덧붙인다. 그의 관점에서 환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여러 가지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뇌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색스는 신체가 드러내는 여러 징후가 신경생리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가 사회적·문화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색스는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자신이 경험한 ‘출면 환각’ 경험을 이야기했다. 출면 환각은 잠이 깨면서 겪을 수 있는 시각 환각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턱수염이 까맣고 소심하다기보다 싱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마흔 살의 내 얼굴이 보였다. (...) 선명하지 않은 파스텔색으로 희미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263) 여든 살에 가까운 저자가 잠에서 깨어보니 마흔 살 즈음인 자신의 모습을 환각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는 이 ‘출면 환각’ 경험에서 40년의 세월을 건너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출면 환각’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신체가 드러내는 증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편두통을 앓았고, 이 증세가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면서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그와 같은 관심사를 신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몸에 드러난 증상은 나의 신경계를 비롯한 신체 현상의 보편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몸소 보여주는 기회였다.
《환각》을 읽고 좋은 점 한 가지를 더 들 수 있겠다. 그건 문학작품에서 유령/환영 혹은 환각에 관련한 장면이 나올 때, 인물에 관한 심리적 문화적 배경을 한 층 더 깊이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리아드》, 《오디세이》, 《성경》에 등장하는 환영과 환청 사례에 다른 맥락을 가지고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드거 앨런 포, 드 모파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만나게 될 때, 색스의 아이 같은 호기심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 "암페타민이 주는 김빠진 조증과는 달리,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은 진짜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이었다. 나는 다시는 암페타민을 먹지 않았다." (158)
[2] "나는 자신의 편두통 경험을 일종의 자동적인(그리고 운이 좋게도 거꾸로 복기할 수 있는) 자연의 실험, 신경계를 보여주는 창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신경과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169)
[3] "편두통의 기하학적 환각은 신경계 기능의 보편 원리뿐 아니라 자연 자체의 보편 원리를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172)
[4] "발작이 다른 형태의 의식,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느낀다." (185)
[5] "지금은 기억이 프루스트의 식료품실에 진열되어 있는 절임과일 병처럼 고정되거나 동결된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행위를 할 때마다 변형, 해체, 재조합, 재분류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7)
[6] "상기는 고정되어 있고 죽어 있는 파편의 흔적들을 다시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상기는 조직화된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의 살아 있는 덩어리 전체와 우리의 태도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상상력이 가미된 재구성 또는 구성이다. (...) 그러므로 상기는 사실 거의 정확하지 않다." (197)
[7] "입면 환각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나 어둠 속에서 보이고, 가상의 공간에서 조용히, 쏜살같이 지나가며, 대개 물리적으로 방 안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출면 환각은 눈을 뜬 상태에서 밝은 조명에서 나타나고, 외부 공간에 투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완전히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260)
[8] "유령, 죽은 자의 돌아온 망령을 보는 환각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 및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 유령 출몰과 환각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286)
[9] "애도 과정에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며 유족에게는 도움이 된다." (290) - 웨일스의 일반의 W.D. 리스의 말.
[10] "드 모파상은 소설을 쓸 때 자신의 분신, 즉 자기 환각의 상을 보았다고 한다. (...) 드 모파상은 당시 신경매독을 앓았고, 병이 악화됐을 때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고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고 악수까지 하려 했다고 전한다." (327)
[11] "뇌의 신체 표상은 서로 다른 감각들의 입력 정보를 간단히 휘젓기만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가기 일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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