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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마침내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책을 보고 늦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언가의 마지막에는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허투루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언제나 지나고보면 좀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작년 말 처음 알라딘 서재 문을 열자마자 신간 평가단을 발견하고 신청했던게 덜컥 되어버려서...한마디로 초짜가 리뷰를 하니 많은 답답함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마지막 리뷰도 늦었습니다만, 부족하나마 좀더 고민을 하고 쓰고 싶었는데, 내공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제 수준에서 해 볼 수 있는대로 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이 참으로 즐거웠던 것은 꼭 밝혀두고 싶네요. 글을 정말 못쓴다는 것은 제 스스로가 잘 아는 일입니다. 다만 앞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지리라는 기대로 꾸역꾸역 따라왔던 것 같네요. 리뷰를 써본 경험도 없는 저에게 신간 평가라는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도 감사를!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문 분야 책에서 어려운 책들을 많이 만났지만 또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좋은 책들입니다. 리뷰 과정에서 흠을 잡거나 비판적인 시각에서 쓴 부분도 있을 텐데, 책을 만드는데 참여하신 분들이 혹시나 제 어줍짢은 평을 보고 언짢으셨을 분들이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평한다는 것이 많은 분들의 시간과 노고가 들어가는 일이라 한 마디의 말로 쉽게 평하려고 했던 제가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좋은 책을 꾸준히 만들고 계시는 분들께 또한 고마움과 격려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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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그람시가 남긴 자취에 내가 처음 접하게 계기는 그람시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썼다는 한편의 이야기였다.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문장이 담겨있는  <생쥐와 >이라는 동화책이었다. 그람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몰랐지만, 감옥에서 썼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싱거워보이기까지 동화책이 과연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하고 무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갖힌 지성인이 있었던 글인지 의심스럽고 더욱 궁금증이 생겼던 기억이 있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지지한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어린시절 꼽추와 유사한 신체적 질병을 앓은 적이 있고, 그로 인하여 징집이 면제되었다고 한다. 한편 성인이 되어 토리노 대학에 입학, 언어학과 철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한 기록이 있다. 개인적인 신체적 장애, 크고 작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설립자 명으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불법 정당으로 지목된 이후 20년이 넘는 감옥형을 받았다고 하며, 남긴 기록은 <옥중수고>라는 제목으로 남아있다. 정도면 인간을 규정하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람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산문들은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을 넘어 행동으로 실천하려 했던 인간의 자취다. 물론 여러 주제에 따라 구분한 글들의 모임이고, 주제마다 대체로 시간 순에 따라 배열을 놓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관성이나 글의 유기성이 하나의 주제 아래 저술된 책에 비해 떨어진다. 여러 군데에서 언론 검열 대한 비판을 하는 것처럼 저자의 관심이나 사안에 따라 일부 중복된 내용이 나오는 것은 감안 하고 읽어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람시의 자체보다도, 책의 편집상 특징에 기인하는 특징이라고 봐야하겠다. 6개의 주제어 아래 주제마다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라 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사이의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는 점을 제외하고 그람시의 날카롭고 지성적인 면모는 산문 전반에 걸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책에 실린 글들은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1921)하기 , 1917-1920년에 대부분 씌여진 것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이데올로기적인 주장보다는 기득권과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사회와 대중을 계몽하려는 의지, 그람시의 지성적인 면모를 보다 보여주고 있다. 그람시가 사회에 대해, 정치나 교육 등에 대해 파악하고 분석하는 대목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교육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 언론 검열제도 비판 표현의 자유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지구촌에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그람시의 목소리는 우리가 더욱 귀기울여 듣고 생각해볼 있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100 혹은 150 전의 지성인(헨리 데이빗 소로, 프리드리히 니체 )들이 글들만 봐도 당대에 이들이 비판했던 문제점들이 여전히 문제점들로 남아있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나의 좁은 소견이지만 보편적인 삶의 조건, 삶의 양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같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특권 계층은 언제나 존재했고, 나머지 계층과는 달리 분명한 대우와 경제적 혜택을 받아왔다. 그람시가 공무원을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였다(142) 언급한 대목처럼 말이다. 공산주의자로서 그람시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많이 보인다. 그람시가 자본주의의 투기적인 속성’(127) 꼬집어 내는 , 부르주아라는 특권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고 누릴 있도록 만든 경제적 형태가 바로 자본주의다’(162)라고 언급하는 부분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있다. 예를 들어 2003 월마트의 풀타임 조합원 연봉(18000달라) 966배를 받은 월마트의 CEO 스콧의 사례를 들어볼 있다. 스콧은 기본급, 보너스, 스톡 옵션을 합하여 2003 1740 달라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례는 아직까지는 극히 일부이며 극심한 격차를 보여주는 사례이긴 하지만, 과거 100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다. 국내에서도 물론 정도의 격차는 아니지만 연봉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는 정부의 공식 발표자료를 통해서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결국 고용 불안정, 노동 인권 침해와 같이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에 관하여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목은 좀더 나의 피부에 닿는다. 특히 학력이라는 교육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면 그람시가 우리 사회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대학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 응시자가 30 수준인데 비해, 이제 한국사회는 매년 박사인력만 1 3천명이 배출되는 사회에 접어들었다. 박사학위가 새로운 상품 항목 처럼 되어가고 있다. 인구가 남한 인구의 20 수준인 중국과 인도와 비슷한 ( 15만명 수준) 미국 유학생 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높은 교육열이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시킨 원동력이기도 하겠으나, 그만큼 제대로 교육의 기회와 같은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교육이 그만큼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상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고등학교 교육마저도 제대로 많이 받지 못하던 시대에 그람시는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한 우려를 했던 것일까. 학위증서라는 것이 부적격인 이들에게도 자비롭게 수여되고, 공공의 공정한 삶을 망치는 상태로 이끄는 유용한 제도가 되어, 불투명하고  부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활용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노동자들이 흘려 거둬들인 생산성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관료 계층만을 증가시킬지도 모른다.”(83)라고 그람시는 말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매개체는 권력 혹은 특권 계층을 양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서만 기능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해준 글들이었다.

     자본주의 비판: 그람시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간에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언제든 발발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데, 역사상의 모든 정쟁을 자본주의와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만 제국주의 시대에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태리 관세동맹과 같은 일들은 제국주의의 연장선 혹은 대체물이 자유무역주의나아가 신자유주의 연속성을 갖고 현대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1918 그람시가 글에서 자유무역주의라는 용어가 나오고 있는 또한 이미 초기 형태의 신자유주의적인 개념이 적어도 이미 20세기 초에는 잉태되고 있다는 단서로 봐야하지 않을까. 다시 정리해보면 그람시는 전쟁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의 탐욕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저자는 분명히 어떠한 전쟁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경제 전쟁을 위해 무역보호정책을 요구하는 산업계의 경영자들과 군수산업의 고용인들 그리고 공포 유포자들의 음로를 피하면서, 모든 가면을 벗겨내 진실을 알리고 전쟁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170)”라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글에서는 전반적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대중을 계몽하고 사회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열정도 고스란히 느낄 있다. 반면 (불공평하긴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그람시의 사상을 고려하면 비판할 만한 점도 많을 것이다. 사회의 문제점 내지는 현상을 과연 계급의 문제로서만 파악하고 평가할 있을까? 다른 설명 방식도 분명히 존재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우매하고 계몽해야한다고 보는 관점도, 현대 사회에서야 교육 기회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나, 그람시의 시대는 분명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전쟁과 자유에 대해: 1914년에 발발하여 1918 11월에 끝난 세계 1 대전은 4 군인만 1000 명이 사망하고, 2000 명이 넘는 군인들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당했던 인류 역사상 인명 물적 피해가 어마어마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승전국 나라였음에도 전후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 전쟁을 통해 경제가 부흥한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시대적 상황하에 1922 10 무솔리니가 파쇼단을 이끌고 로마 행진 성공적으로 이끈 ,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배경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있다. 김현우의 저서 <안토니오 그람시>에는 당시 무솔리니 세력의 영향력이 어떠한지 단서가 나와있다. 퇴역군인과 소상인, 소농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파쇼단은 국가권력과 독점자본가 집단의 비호 아래 민중들과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 무법적인 린치와 방화를 가했다. 1920 5월에 3 명에 지나지 않았던 파시스트 세력이 1922 10월에 이르러서는 30 명으로 성장했다.’ (30) 이와 관련하여 그람시는 전쟁은 모든 위선적이고 상징적인 추상성이 자연적으로 결합된 화학작용이며, 과정에서 모든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174)라고 대목은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를 염두해둔 하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파시스트 정부에 의한 언론의 검열은 당시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열에 대해 그람시가 말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검열제도를 운용한다는 것은 언론에서 중국인들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이탈리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삭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자유가 그들 체제에는 위협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각종 SNS 구들과 같은 종합 검색 사이트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긍이 가면서도 아이러니하다.

     책의 말미에 보면 하원에서 결사와 조합설립 관해 그람시와 무솔리니가 나눈 대화의 일부가 등장한다. 일부분이긴 하지만, 그람시를 공격하는 무솔리니와 여러 의원들의 근거가 희박한 논리에 비해 그람시의 지성이 더욱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그람시는 무솔리니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결국 20 4개월 형을 받아 수감되게 된다. 그러던 널리 알려져 있는 <옥중수기> 남기고 11 째인 1937 사망하게 된다. 아마도 그람시는 우리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는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닐 같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키아벨리 읽고 있으며, 그람시는 <옥중수기>에서 수차례 마키아벨리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론의 답습을 넘어 그람시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있을까. 앞으로 그람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방향을 좀더 염두해두고 고민하게 것같다.    

     그람시는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살아있는 사람은 삶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람시에게 무관심한 사람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며 따라서 진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증오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무관심을 증오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라!’라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책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참여하라> 같은 호소의 100 버전이라 있다. 그람시는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무능함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주변 상황과 사회 부조리에 눈감은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50)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선거철만 되면 선거를 해야한다고 떠들지만, 선거에 참여한 사람들도 선거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얼마나 것인가.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라도 당선되면, 선거 운동 당시 걸었던 공약은 모두 잊는 모양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지켜내기 위해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국회의원들 정치인들의 활동을 주목하고 견제해야만 한다. 우리가 다시 무관심 속에서 지내게 때가 바로 우리의 삶이 또다시 정치인 자본가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에서 그람시는 시민으로서 우리 각자가 정치적인 것을 그람시는 의도하고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정치적인 이란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나오듯, ‘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스스로 지킬 있는 으로서의 정치적인 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삶에 직접 관심을 갖고참여하라라는 것이 그람시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그람시의 외침은 우리가 진실로 살아있는 삶을 살기위해 각자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일깨우는 목소리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도시에는 이방인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시민일 수밖에 없으며, 무언가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면)

"나는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면)

[파업 투쟁에 참여해 패배한 피아트 노동자들에 대한 변론과정에서]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무능함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주변 상황과 사회 부조리에 눈감은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50면)

[검열제도에 대해]

"검열제도를 운용한다는 것은 언론에서 중국인들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이탈리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삭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의 자유가 그들 체제에는 위협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119면)

[공무원을 비론한 관료에 대한 비판]

"더 중요한 사실은 공무원들이 국가 안에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그 국가는 공무원들의 비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전횡을 통해 시민들을 억압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142면)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일상적 연대기를 시와 낭만적 서술로 다소 무리하게 꾸민다는 것은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0면)

→ 우리의 역사 서술은 현재 어떠한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전쟁을 반대한다`에서]

"부르주아라는 특권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고 누릴 수 있도록 만든 경제적 형태가 바로 자본주의다."(162면)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간에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언제든 발발할 수밖에 없다."

"경제 전쟁을 위해 무역보호정책을 요구하는 산업계의 경영자들과 군수산업의 고용인들 그리고 공포 유포자들의 음모를 피하면서, 모든 가면을 벗겨내 진실을 알리고 전쟁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170면)

"전쟁은 모든 위선적이고 상징적인 추상성이 자연적으로 결합된 화학작용이며, 이 과정에서 모든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1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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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새로운 계급 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다재다능한 영화배우이자 영화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배우 줄리 델피가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영화 <2Days in Paris>에서 프랑스 여자로 나오는 줄리 델피의 역은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 남자친구에게 파리에 테러는 없어!(No terrorism in Paris)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 대사가 사용된 맥락은 뉴요커인 남자친구에게 파리는 뉴욕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이제 2015 11월에 일어난 파리 테러 사건을 보고 줄리 델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에 읽게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 투쟁> 지금으로부터 불과 6개월 전에 일어난 파리 테러사건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폭탄테러가 일어나곤 했던 파키스탄이나 탈레반 점령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사건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장이었을 테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테러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기 힘든 프랑스 파리에서, 그것도 대중문화가 소비되는 현장에서 예고없이 벌어졌기에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파리 테러의 상황을 보며 충격받고 있는 나에게 지젝의 책을 읽은 지금, 내가 얼마나 편중된 기사와 제한된 정보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다.

     언젠가 칼레드 호세이니의 < 개의 찬란한 태양> 고통스럽게 읽으면서 특히 기억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주인공 소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폭격을 맞아 소녀의 앞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이었다. 소설은 읽는 내내 너무나 고통스러움이 느껴졌던 소설이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면 나의 조부모님 세대가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소용돌이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인의 아버님께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의 폭격을 맞아 대가족이 거의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망한 분도 계시고, 북한군에 의해 부모님과 가족을 잃은 교수님도 계셨다.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고, 당장 내일을 기약할 없는 환경에 처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드물게 일어난 파리 테러를 매일 같이 테러가 일상화된 곳과 굳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폭력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얼마나 제한된 정보에 접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2015 11월에 발생했던 파리 테러에 대한 지젝의 견해는 , ‘난민과 테러는 모두 기본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이고, 이러한 문제들의 바탕에는 (새로운 양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 점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기반한 자본주의 맥이 닿는다. 지역을 초월하여 전세계의 경제적 장벽을 철폐하고 무한 경쟁의 플랫폼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를 의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세계화’, ‘사유화’, ‘현대화라는 이름에 가려진 획일화’, 좀더 구체적으로 ‘(기업을 위한) 적은 세금’, ‘ 적은 규제’, ‘보조금 삭감등의 구호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전세계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이제와서 지젝은 글로벌 자본주의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긴한다. 지젝은 지붕 모든 것을 장악한 잔혹한 폭력이라고 묘사한 글로벌 자본주의 정치에 그치지 않고 인종, 종교 그리고 섹스에까지 폭력성을 전파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여기서 지젝이 의도한 섹스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자행되는 폭력 성차별에 기반한 폭력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럼 시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글로벌 자본주의 난민과 테러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는 점이다. 지젝이 말하는 단서는 콩고에서 일어난 부족 분쟁의 배우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있다. , ‘부족 분쟁으로 치장된 싸움의 배후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 군벌 지도자들은 각자 외국기업과 연결되어 있고, 외국기업들은 이를 이용하여 콩고의 천연자원을 앞다퉈 착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난민의 경우,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바라보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시스템의 내부에서 보호받는 계급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지젝은 전세계적인 새로운 계급 분리현상을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에 다름 아니다라고까지 진단하고 있다. 다시 난민 문제와 연관지어 보면,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군사개입이 결정적으로 난민을 발생시키고 있는 주요 원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난민과 테러에 까지 맥을 추적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을 언급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상황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하나는 국제결혼의 증가로 인한 다문화 가족의 꾸준한 증가, 그리고 남한에 정착하게된 탈북민들의 현실이 번째이다.   <결혼원정기>라는 영화가 나올만큼 대한민국 노총각들의 결혼 상황의 일부를 한동안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제는 젊은 남녀 세대의 성별을 불문하고 백인이 배우자인 국제결혼이 주변에서 부쩍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과거보다는 국제결혼의 양상이 매우 다양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배우자가 아시아 인과 백인의 크게 가지 경향을 생각해볼 있겠다. 어떤 이유인지 납득하기 어렵지만, 배우자가 아시아인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이 백인이 배우자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보다 분명하게 놀림을 받거나 차별적인 시선을 많이 느끼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경향이 세월이 좀더 지나고 더욱 굳어져서,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지젝이 언급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틀이 형성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한편 탈북민들이 부대껴야하는 현실은 다문화 가족이 안고있는 어려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너무나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남한에서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탈북민이 정착하도록 정부와 기업에서 지원하던 사업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하며, 아이들의 학교 자퇴율 혹은 중도 탈락률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적이 있다. 다문화 가족의 서로 다른 유형화 양상을 통해, 그리고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국 로더럼에서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느낄 청소년 집단이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한가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니시다 료스케의 저서 <무업 사회> 읽으며 알게된 일종의 히키코모리생활을 하는 경제적 난민또한 세계화 지구촌에서 주목해야할 새로운 계급이라고 있겠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가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유무역협정 체결한 이후, 외국 기업, 특히 세계 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영향력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기업들이 전세계에 침투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난민 일본이나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도 세계적으로 획일화, 패턴화 충실히 따라가는 모습을 있다. 인도의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물전쟁>에서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업고 인도에 들어온 서양의 다국적 기업이 새우 양식 물산업으로 전통적인 지역사회가 파괴되고 지역 주민들이 난민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 폭력 아래 세계화 문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미FTA체결 이후, 농업투자 보조금 삭감 선진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하여 많은 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다. <물전쟁>에서 난민화된 인도인들처럼, 우리의 농어민들도 농어업의 글로벌화 인하여 많은 농부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더욱 어려울 것이다. 농어민의 난민화 문제이지만, 나라의 식량 확보와 관련한 문제를 외국의 기업에 의존한다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은 다른 문제의 씨앗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새로운 양상이 기존 사회의 유행을 대체해버리면,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현실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지젝이 의도하는 것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글로벌 자본주의 의해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이 맞아야할 투쟁이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지젝이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야한다라고 언급하고 뒤이어 3세계 국가들의 식량위기가 농업의 글로벌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라고 덧붙이는 대목을 보면, 결국 반다나 시바가 <물전쟁>,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에서 지적한 바대로 인도의 농어민 아니라 인도 국민이 안고있는 식량위기 문제는 지젝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세계의 식량위기를 야기한 것은 우리 서구사회다!” 클린턴이 식량 문제에 관해 언급했다는 한마디는 지젝이 의도한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책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표현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급효과가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피부에 닿는 예를 통해 통찰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 당장의 경제 활동에 미치는 파급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대지에 어떠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넘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평범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줄기를 잡아내기 힘들다. 더불어 다시금 느끼게 되는 점은 우리가 이제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잇닿아있다는 점을 넘어서서 네트워크라는 무형의 존재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속되어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하나의 정보로서 존재하고 정보가 각자의 정체성으로 되어버린 듯하다.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존재증명을 하게된다.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라는 게임판에서 하나의 상품가치를 갖게된 존재로 느껴진다. 그리고 지젝은 여기에서 나아가, 시장성을 갖지 않고 도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글로벌자본주의 영향력 아래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있는 것이 아닐까?”(62) 현재 나와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서가 관심을 갖는 공통적인 문제점들 이외에 지젝이 지적하는 난민 문제, ‘테러 문제는 사실 별개의 사건과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개별적인 현상들을 놓고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여 낱개의 현상들을 하나의 줄기로 묶어 낸다.      

     저자는 새로운 계급 투쟁 다시 철저하게 바라보고 이를 수행할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과 함께, ‘세계적인 연대의식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 지젝이라고 해도 거대한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젝 자신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117)라고 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다소 무성의한 결말로 보일 있겠으나, 비교적 간결하게 지젝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놓은 책은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의도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생각거리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짧은 나의 지식과 제한된 정보로 판단하자면, 지젝이 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진보좌파와 대중영합주의자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좀더 시원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나의 이해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양측을 비판하고 제시하는 의견이 과연 새로운 것인지 혹은 진보 좌파의 견해와 분명히 차별이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이데거 철학의 과거와의 대결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단순히 변증법적인 구조를 따르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에는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진보 좌파의 견해와 대동소이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지젝의 철학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좀더 생각해보면서 실마리를 찾을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0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 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었다."


(24면)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64면)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다."

(107면)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76면)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 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93면)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남에게서 나를 보는 인간적 보편성이다. 즉 정치적-종교적 기호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 모두 동일한 두려움과 열정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아는’것이다."

(100면)
"난민이 우리와 다를바 없이 조바심을 내고 폭력적이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 인간인데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109면)
"이런 혼란기에는 국가주권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협력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인에게 평등한 이주의 자유’라는 애매한 용어가 아닌 정교하게 계획되고 잘 조직된 변화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난민의 주 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지정학적 게임이다."

(117면)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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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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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Marriage & Morals)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 이순희 옮김

 

 

 

결혼이란 것이 남의 같이 느껴지기만 했던 노총각이 결혼식 전날 읽는 <결혼과 도덕> 참으로 묘하게 다가온다. 앞을 펼치니 문명인들은 성적인 행위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9)라고 대목이 눈에 띈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 책이 과연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한 수학자/사상가/저술가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책이 맞는지 다시 이름을 확인해본다. 게다가 책이 출판된 것은 1929년이라하니 거의 90 전에 씌여졌다. 책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러셀이 흔히 말하는 전복의 철학자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징병 반대 문건으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거나, 이와 관련한 벌금 납부를 거부하여 대학 강의권마저 박탈당했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투옥까지 사람. 러셀은 흔히 말하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자신이 독자석으로 사유한 결과에 따른 신념을 평생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지 15년도 넘은 지금, () 관련한 담론은 여전히 껄끄럽기 마련이다. 하물며 100년이 가까운 시간 전에 이렇게 도발적인 결환과 성에 관한 글을 러셀은 아마도 거센 비판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나다를까 책으로 그래도미국에서 개방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뉴욕 소재 대학의 임용에 취소되었던 전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이를 굳은 신념으로 지켜나가려는 자세는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그리고 러셀이라는 사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러셀이라는 인물은 영국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영국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있다. 최상의 기득권층의 가문 출신이라는 말이다. 특히나 보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영국, 귀족가문,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가운데에서 성장했음에도 이처럼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결혼과 성에 관련한 도발적인 책을 있었던 배경 내지는 환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흔히 전복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니체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가져다준 영향이 컷던 것처럼, 러셀에게도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게 사건이 크게 영향을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부모, 기성세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되는 것도 부모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아울러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인상은 러셀이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교 자체라기보다 바울의 결혼관에 대한 언급처럼 신이 말한 교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된 교리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바울이 말한 결혼관이란, ‘결혼은 자손의 생산을 주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결혼관을 말한다. 여기에 가족이나 자식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러셀의 말에 따르면 바울의 결혼관에는 생물학적 목적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란 오로지 간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결혼관에는 당시 남자의 시각에서 나아가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수련해야하는 종교인에게 여성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있는 대목이다. 바울에게 여성이란 남성의 간음을 피할 있게 도와주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흔히 성인 반열에 오른 기독교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양심에 따르고 자유로운 사고를 있었던 러셀의 입장에서 문헌에 근거하여 바라보는 종교인의 이중적인 모습에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역시나 니체와도 같이 러셀은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바울이 결혼을 오로지 간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간통을 나쁘게 생각하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하기도 한다. “( 바울의) 주장은 빵을 굽는 이유가 사람들이 케이크를 훔치는 것을 막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신랄하면서도 무릅을 치게 만드는 재치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재치는 러셀의 특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보면 버트런드 러셀은 영국 출신의 지식인들, 특히 신과 종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리차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에게 영향을 사람이 아니었을 추측해본다. 특히 도킨스나 히친스는 모두 영국 출신이며, 어려서 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로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미국보다 영국이 많은 느낌을 주는 이유도 지식인들이 만든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일종의 탈선으로 인하여 많은 비난의 화살을 감당해야하는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소수자들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인물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종교에 대해 이렇게나 비판적이고 신랄함을 유지했던 러셀이 낭만적인 사랑 대해 매우 무게를 실어 주고 있는 점은 의외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점이라 있다. 러셀에 따르면 낭만적인 사랑이야말로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71)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낭만적인 사랑에는 열정과 상상력, 그리고 배려심을 바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 관계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라고 가중치를 두고 있기에 상당히 흥미롭다.

책을 읽고 다시금 생각해보면 종교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도구를 만들고 사람들을 강제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나 러셀이 말하고 있듯이 성에 무지한성인이 결혼할 경우, 이혼이 성행하고 행복한 결혼이 어려울 있다라고 하는 대목은 크게 동의하게 된다.  특히 대해 비정상적인 관념을 통한 죄의식 종교라는 제도를 통해 주입시키게 드러날 있는 재앙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사유하고 있다.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러셀의 책에는 기독교에서 싫어할만한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므로  러셀은 인간의 해석을 거친 종교제도와 관습에 대해 의심하고 반문한다. 러셀이 바라보는 인간관은 아마도 완벽한 혹은 완벽한 악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모호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선과 악이라는 것을 굳이 나눌 있다면, 요소가 혼재한 인간성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모습일 같다. 인간이란 존재의 욕망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억압하고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훈련해야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을 길들이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과 강점을 알고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종교와 같은 어떤 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억합하기 시작하면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잘못된 성교육 혹은 관련 주제를 회피하고 은폐하는 경우가 이러한 위험성을 안고있다는 말이다. 러셀의 논리는 현대인들에게 상당부분 맞지 않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명 사회에서 인간이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되는 원인으로 잘못된 성교육 언급하고, “성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인간이 누릴 있는 기쁨’, ‘쾌락 금지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선견지명과도 같은 사유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노총각의 결혼 전날 읽는 <결혼과 도덕> 흥미로움과 혼란스러움이 섞인 짦은 여정이었다. 크게 수긍을 하게 되는 논리와 노총각을 당황스럽게 만들만큼 앞서가는주장들, 독실한 종교인들이라면 불편해했을 종교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사실들로 인하여 흔히 이야기하는 결혼의 현실 견주어 보게 된다. 우리의 결혼문화에는 불합리한 점이란 없을까. 결혼이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이 계속 이어진다. 버트런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 읽으면서 어떤 지식이 아닌 배우게 점이 있다면, 바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힘이라고 있다. 인습적인 가치들에 대한 의문제기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볼 있을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은 90 전에 지식인이 주장한 새로운 견해들 대한 흥미로움과 기존의 가치관과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로 혼란스러웠던 여정이었다. 책에는 새롭고 튀는저자의 견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사랑 중요성을 설파하는 대목에서와 같이 저자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읽을 있었다. 아울러 결혼식준비가 아닌 결혼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번쯤 결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61-62면 ) 과거 카톨릭 종교에 대한 비판의 근거
"교황 요한 23세는 근친상간과 간통 외에도 수많은 죄악을 범한 것 때문에 처벌을 받았고, (…) 성 아우구스틴은 1171년에 시행된 조사 과정에서 어느 한 마을에서 열 일곱 명의 사생아를 둔 것으로 밝혀졌으며, 스페인의 수도원장 성 펠라요는 1130년 정부를 무려 70여 명이나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리에주의 주교인 앙리 3세는 1274년 65명의 사생아를 둔 것 때문에 해임되었다. (…) 중세의 저작에는 사창가나 다름없는 수녀원과 수녀원 구내에서 자행되는 무수한 영아 살해와 성직자들의 고질적인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근친상간이 어찌나 성행했던지, 성직자는 어머니나 누이들과 동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엄격한 법력이 거듭해서 공표되었다."

(71-72면)
"결혼은 부부가 반려 관계에서 느끼는 기쁨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서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의 긴말한 구조의 일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제도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기초로 한 결혼은 바람직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적어두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속시키고 결혼의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친밀하고 다정하며 현실적인 사랑이다."

(83면) 러셀의 재치가 담긴 신랄함/비판
"가장 먼저 교육을 통해서 미혼 여성들을 우둔하고 무지하며 미신에 의존하는 여성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교육은 교화의 관리하에 있는 학교들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다. (…) 하지만 나는 권력 남용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경찰들과 의료진들을 거세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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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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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원제: The Faraway Nearby)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현우 옮김 | 반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위대한 인물도, 유명한 인물도 아닌 바로 평범한 독자의 이야기를 물으며 자신의 이야기부터 풀어나간다. 우리의 삶은 숱한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탄생은 부모님의 선택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우리가 성장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의 책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다른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많이 들었지만, 왠지 뜨끔 마음에 아직까지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멀고도 가까운> 무척이나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특히나 저자 자신을 있게한 어머니와의 관계와 기억이 책의 중심구조를 이룬다. 저자 리베카 솔닛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을 있다. 저자 소개에 의하면 리베카 솔닛은 역사가이기도 하고, 예술평론 문화 비평을 비롯하여 환경, 반핵, 인권운동에 직접 나서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저서들로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기도 했다는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다재다능하고 완전해보이는 저자가 책에서는 자신을 흔들던 인생의 가운데에서 솔직하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읽는 내내 공감하게 되었다.    

       우선 목차를 보면 매우 특이한 점을 (누구라도) 알아낼 있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13개의 () 일곱 장인 매듭 중심으로 정확히 뒤로 거울대칭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거울의 구조적인 면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듯한 책은 다른 편으로는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 추억 등을 회상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히나 어머니의 아들들,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럽고 긍지의 대상이 되었던 아들들과는 다른 반응을 자신에게 보이던 어머니와의 애증어린 관계가 끊임없이 묻어나고 있다. 저자는 어머니의 로서 시기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저자의 키와 금발머리를 결핍했던 어머니의 시기와 분노는 평생 저자를 괴롭혀왔다고 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달리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일종의 경쟁심과도 같은 것일까. 리베카 솔닛과 그녀의 어머니의 관계는 내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평생 친구 같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 너무나 다르고 생소한 관계여서 놀라웠다. 특히 저자가 뜯어지는 같다라고 표현한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증후의 변화와 삶의 모습은 비슷한 환자들에 대한 수많은 병례사를 썼던 올리버 색스의 환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뇌의 부위의 손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인간은 매일, 매주 저자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되어가는 과정. 그렇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유럽의 철학자들이 바라본 대로 일종의 기계 뿐일까.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살구나무에서 따온 살구 100파운드는 어머니의 분신이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고,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과 다른 소박하고 무심한 유산이었다. 살구가 집안에 들어 부터 물러지고 썪어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황은 자신의 삶을 매일같이 보듬고 보살펴야 함을 내게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매주 다른 사람, 다른 인격으로 변해가는 어머니가 마치 아이가 되어가며 보살펴야할 대상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을 매일 그렇게 살구를 솎아내듯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그러고보니 책의 제목 멀고도 가까운’, 원제로 <The Faraway Nearby> 어떤 맥락에서 씌여진 것인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책의 중반에 이르러서야 단서를 찾을 있었는데, 조지아 오키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에 넣곤 했던 인사말 표현이라고 한다. ‘멀고도 가까운 에서 보내는 편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지만, 편지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누군가와,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책의 군데군데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에 관해 언급한다. 저자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와 쓰기의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101)  읽기와 쓰기는 고독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해도, 읽는 책의 저자와 , 그리고 나와 미래의 독자와의 연대의 행위라는 것이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어떤 과정이든 타인에게 공감하게 된다면 이는 자아의 확대를 경험하는 이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하고 있다. 아주 공감이 되는 말이다. 문학이든 사회문제를 다룬 책이든, 사람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선행되면, 우리는 대상에 공감할 있고, 그것이 우리가 지니고 있던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가 확장되는 경험이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한편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고, 글쓰기를 거울삼아 자신을 되돌아 보게된다. 거울 대칭적인 책의 구조와 글쓰기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어머니와의 애증어린 관계를 되돌아보고, 추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삶을 보듬고 보살피게 된다.  책의 제목인 멀고도 가까운(Faraway Nearby)’ 어머니와의 오랜 애증섞인 심리적 거리를 상징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축복을 받든 저주를 받든 아니면 다를 받든, 모든 일은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선택을 끝까지 쫓다 보면 지금 바로 순간 우리의 삶이란 매우 희귀한 것임을 알게 된다.”(107) 나는 대목을 읽으며 내가 언젠가 어떤 장소에서 순간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떠올릴 있었다.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의 가운데에 섰던 순간, 나는 리베카 솔닛이 언급한 말이 전달하는 감정을 느낄 있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어느 특정한 장소에,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삶의 희박한 기적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단순히 기계일 뿐일까라는 다소 암울한 의문을 지니고 있던 나로서는 우리 자체에 대한 존엄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다.

     전반을 통해 저자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죽음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책의 전반을 통해 죽음 이미지가 숨어있다고 말할 있다. 극심한 추위에 갇혀, 남편과 자신의 아이 셋의 사체를 먹어야 했던 어느 이누이트 원주민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면서도, 많은 의문과 생각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저자는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어떤 방식으로 식인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타인으로부터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상징적인 식인자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책의 시작도 결국 알츠하이머를 앓던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의 무상함, 유한성을 재인식한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106)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희귀한 것이며, 절대적으로 일어나는 죽음 대척점에 있다는 인식. 아울러 죽은 인간의 사체 부위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 탄생시킨 메리 셸리 개인의 인생사 또한 남편과 아이의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는 인식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있음을 나는 책을 통해 깨달았다.

       <멀고도 가까운> 저자 자신의 솔직한 삶과 독서, 글쓰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에세이이다. 가지 기억나는 일화는 젊은 시절 그랜드 캐년의 계곡에서 보트를 타는 타지못한 일화와 20년이 지나고나서야 다시 보트를 타게 일화이다. "그동안 애가 했던 일들이 결국은 모두 고무보트에 몸을 싣는 사람이 되기 위해 했던 일처럼 느껴진다."(366)라고 말하고 있듯이, 책을 통해 저자는 삶을 배우고 변화되어온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과정은 저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젊은 시절 스스로 내면화한 부모님의 모습을 찾아내고,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젊은 시절 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알면서도 지나치고, 후회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의 어께에 내려앉은 사회적 의무 나의 욕망과의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수도 있다.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원칙은 심오한 것이 아니다.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라는 .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고민들을 하며 선택을 하게되는데 리베카 솔닛의 충고를 떠올려봄직하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에서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 대해 쉽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삶이 풍성해졌던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쓰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되어 어머니와의 애증과 상처가 점철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으며 어머니와의 화해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다."(35면)

- 여기서 ‘후회’는 일종의 ‘회한’이 섞인 감정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스페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40년 이상 품고 있던 전쟁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어하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신체적 특징만큼이나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했다."(46면)

책읽기/쓰기에 관하여

"가끔 재능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96면)

(100-101면)글쓰기에 관해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다. 읽을 때만큼 조용하게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조금씩 읽었다. ... 아는 침묵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고 청중 앞에서 낭독할 때라도 여전히 부재하며 사라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 (115면)

#공감,감정이입, 연대에 관하여

"내 안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신경처럼 감정이입, 연대, 지지 같은 것이 자아를 신체의 경계 너머로 확장해 준다."(218면)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86면)

"그동안 애가 했던 일들이 결국은 모두 그 고무보트에 몸을 싣는 사람이 되기 위해 했던 일처럼 느껴진다." (366면)

"우리는 슬픔을 먹고 살고, 이야기를 먹고 산다. 그 이야기가 열어주는 널찍한 공간에서 우리는 한계를 넘어 상상력을 여행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자아의 가능성을 넓혀 보라고 재촉한다. 남동생이 종이 박스 세 개에 담아온 살구 더미, 그것도 눈물이었을까. 이 책도 눈물일까. 누가 당신의 눈물을 마시는 걸까. 누가 당신의 날개를 가지고,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걸까."(3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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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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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How to Read Literature)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문학 작품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인간에 대한 작업이다. 문학 작품이 드러내고 우리에게 묻곤 하는 삶의 양상에 대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같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런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어야할까라는 갈증을 느껴왔다. 때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스스로 터득할 것이라는 막연한 결론으로 나의 독서력의 부족을 탓하곤 했다. 이공학도였던 나에게 분명한정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문학작품을 읽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을 탐험하는 일이다.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문학 작품을 거론하며 문학작품을 읽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구분하자면, 일상적인 방식으로 문학작품을 읽는일에 관한 길이 아니라 문학비평 관련한 길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보다 면밀하고 주의깊은문학 작품 읽기 혹은 비평적 읽기 관한 방법일 것이다. 저자는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쉽게 읽을 것인가하는 지름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책을 읽는 일은 꽤나 도전적인 경험이 수도 있다. 책에서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문학비평과 관련한 여러 전략들 중에서 내가 주목하게되는 공통적인 원리는 바로 언어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이다. 문장의 느낌표 하나에도 문장의 비평적 논평에 달하는 가치가 있을 있다는 말은 텍스트속의 콘텍스트 파악하는 일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문학비평의 측면은 극소한측면인데 저자에 의하면 보다 문학비평의 문제들로서 인물, 플롯, 주제, 서사 등을 생각해볼 있다고 저자는 언급하며, 곧바로 저자는 도입부를 거쳐 인물, 서사, 해석, 가치라는 주요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몇가지 비평적 도구 일반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비평적 분석이 문학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제정신일까? 아뭏든 약간의 의혹과 약간의 믿음을 가지고 읽어나가보았다.

 

문학 이론가이자 정치 평론가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내가 읽지 못했으므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감수하지 못했다. 나아가 저자는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며 앞에서 이야기했던 다른 작품들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 작품과 작품을 평론가의 관점에서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고있다. 예컨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등장 인물인 (Pip), <올리버 트위스트> 올리버,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 등장하는 제인, 그리고 심지어 근래에 들어 세계적으로 성과를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시리즈 인물인 해리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식이다.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부모의 결핍이라는 맥락에서 다시말하면 고아라는 관점에서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라는 것이다. 물론 고아라는 주인공의 입장을 고려한 글들은 많지만 테리 이글턴의 경우,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사유와 지식을 통해 염주를 꿰듯 낱낱이 떨어져 무관해보이는 사실들을 본인의 고유한 시선으로 엮어낸다.   

 

조지 오웰의 <1984> 대한 문장에대한 분석부터 심상치 않다.

사월의 화창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시계가 열세 시를 울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팍에 턱을 붙이고는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미끄러지듯 지났다. 그렇지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진 못했다.”

 

테리 이글턴은 시계의 열세 지적한 , 먼지와 모래 그리고 바람/소용돌이까지 의미를 따진다. 평론가이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파고드는 것은 아닐까?(너무나 세심하고 주도면밀한 분석이기는 하지만). 읽어가며 불현듯 떠오른 나의 의혹과 우려를 미리 집작이라도 한듯, 테리 이글턴은 바로 틈을 치고 들어온다.틀림없이 어떤 독자는 이런 해석이 터무니없이 기발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해석이란 엄밀히 말해서 당연히 기발한 것이이 깨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나의 불편함을 달래고 있다.

 

오웰이 먼지를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려 했거나 그런 생각을 혹시라도 떠올린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의 의도일 거라고 짐작하는 바에 순응해서는 된다는 것을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라고 걸음 나아간다. 한편 테리 이클턴에게 보다 주목을 하게 되는 점은 본인이 독자로서 혹은 비평가로서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되는 사실과 맞지 않을 있습니다. 바람이 언제나 악의 이미지로 제시된다는 것을 알게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럴 경우에 회의적인 독자들은 그것이 텍스트에 대한 엉뚱한 해석이라고 판단할 다른 근거를 찾아야 겠지요. 결론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쯤에서 나는 테리 이글턴의 견해에 공감을 하게되고, 이것이 나아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작품은 아무리 오랫동안 정성들여 퇴고를 거듭하고 작가의 사상과 의도로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일단 책으로 만들어져 서점에 진열되고 나면 작품은 더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은 이미 작가의 수중을 벗어나 작품을 익는 독자의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작가가 이것은 이런 의미이고 저것은 다른 이런 의미이다라고 모든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와 독자가 받아들이는 간극, 혹은 각자가 받아들이는 진실은 언제나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읽게되는 문학작품은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된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의 잘못을 우려하거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독자는 언제나 옳다. ‘언제나 독자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읽어나가면 것이다. 그리고 독자의 특정 해석, 감성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분명히 자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있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독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학작품이 나아가 10, 20, 30 다른 나이에 다르게 다가오고 다른 감흥을 있단즌 사실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 있듯이, 자신의 감성과 해석의 정당성을 믿으며 읽어가면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점은 당신은 언제나 옳다라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문학작품을 읽는 전략이나 폭넓은 문학작품을 섭렵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부분보다(사실은 내가 읽지 않은 작품이 많아서) 문학작품 자체의 읽기 관한 대목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읽기의 문제는 스스로 일반 독자로서 그리고 문학작품에 경험이 적은 초보 독자로서 관심의 대상이다. 분석적인 읽기 방식으로서 문학 비평의 길을 제시해주는 테리 이글턴은 천천히 읽기 방식을 언급하고 있으며 천천히 읽기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 평론가로서는 의외로 짧게 서문에서 읽기의 전통으로서 100년도 더된 니체의 슬로리딩 언급한 점이 흥미롭다. 슬로리딩 전통이 현재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아마무라 오사무가 <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다독가이자 속독가인 평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읽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는 처럼, 과도하게 정보화되어있는 현대 사회에 다시금 천천히 읽기 가치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다시 얻는 같다. 책을 많이, 빨리 읽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읽기라는 행위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에 대한 기대치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책을 보고, 중요한 정보를 얻는 행위로 책읽기를 의도한다면, 방식이 분명 효율적일 것이다. 반면 저자가 나누고 있는 생각과 지식, 경험을 들여다보고 나에게 즐거움을 있는 책읽기를 의도한다면 분명 책을 천천히 읽어야할 것이다. 

 

아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성과내지는 (quantity)’ 대한 집착이 아니라 모두 천천히 읽기 대하여 가치를 전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한 것처럼 장르에 따라 혹은 목적에 따라 다르게 책을 읽을 있다는 점에는 수긍이 가지만, 쓸모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언제나 동의하긴 어렵다. 그리고 다독에 대한 그의 관점에도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로진 작가의 <몸으로 책읽기>에서 인상적인 책읽기의 모습을 보여주듯, 몸으로 경험하는 책읽기가 문학작품을 읽어나가는 데에 일반독자로서 도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외국이 배경인 문학작품을 보고 현장에 가기는 힘들겠지만, 작품의 인물들이 드러내는 감정의 양상에 우리를 대치시켜볼 있을 것이다.  

 

한편 책의 머릿말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문학 텍스트의 언어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함을 강조한다. 이는 흡사 사진찍기의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진찍기에서는 피사체, 대상을 관찰하고, 사진가의 내적인 인식과정과 행동에대한 결정과정을 거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된다. 대상을 관찰하고 셔터를 누르는 과정 사이의 영역을 반응과정이라고 있다면, 반응 내포된 심상( 이미지) 형성이 문학을 이해하는 반응과정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다시말해 시각적인 과정을 통해서건, 텍스트를 통해서건 어떤 현상에 대한 의미가 우리의 인식 내부에서 생겨난 과정은 모두 반응 공통적으로 수반하는 과정이라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 인정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문학이든 사진이든 예술활동의 본령이 아닐까.  

 

책을 읽고나면 내가 과연 비평적 분석 나도 있을지, 그리고 모든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적 읽기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정리해보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저자들이 사용하는 언에 민감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읽을 , 그리고 천천히읽을 것이 초보 문학 독자로서 보다 유용한 팁이 있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처럼 수많은 작품에 대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는 사유의 망은 시간을 들여 이러한 미세한 과정을 거친 이후에 보다 시각에서 작품을 다시금 떠올려 가능한 일이겠다. 술에 배부를 없는 . 나는 중요한 무기를 얻었고, 당분간 무기를 사용하여 책을 읽어볼 일이다.  

"희곡이나 소설의 ‘문학적 성격’을 간과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는 작품의 인물들을 실제 사람처럼 다루는 것입니다."(97면)

"그 자체로서 연극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겸손의 미덕을 키워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중한 미덕입니다."(97면)

"사랑과 샤토뇌프 뒤 파브 포도주가 사라진다면, 그와 더불어 전쟁과 독재자도 사라지니까요."(98면)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308면)



"눈에 핏발이 선 천재가 새벽 두 시에 퍼뜩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류가 공유한 지혜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서나 유사하고, 이 말은 곧 호머가 소포클레스가 인간의 본성을 그려낸 방식에서 진정으로 더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327면)

"그리고 문학작품의 해석은, 아무리 무의식적으로라도, 우리의 문학적 가치와 가정에 의해 채색됩니다. 무릇 문학적 고전이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기 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어떤 비평가는 생각합니다."(3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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