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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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논의, 충만한 삶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히포크라테스] (2026)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서 생각하곤 한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문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 모바일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며 화면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로 열차 안이 가득하다. 긴 지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이 열차에 탄 모든 이들이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흔들리며 함께 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 열차에 탄 사람들은 단지 이 순간 병원에 있지 않은 것뿐이지 않은가. 집안에 오랫동안 아픈 환자가 있었던 이들은 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픈 사람이 많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 조심성 없이 밀치면서 지나가던 이들이나 내가 막 앉으려던 자리에 잽싸게 끼어들어 앉고야 마는 이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결국엔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죽음은 태어난 모든 생명체에게 최종 목적지와 같다. 생의 완성인 것이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말했듯이 ‘죽음이란 늘 타인의 죽음’이기에, 죽음 이후의 두려움 따위란 무의미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겪게 되는 운명이지만, 살아 있을 때 경험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갖는 두려움이란 사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일 터다. 여기에는 무엇보다‘고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는 딱 지금의 내 나이, 지천명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40을 넘기기 시작한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지천명’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교통사고나 전쟁과 같은 문명이 가져온 부작용을 제외한다면 지금껏 인류의 대부분은 ‘자연사’했다. 이제는 각종 의료 기술과 도구의 발달로 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어나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은 절차가 되었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이하 《연명치료》)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양성관이 20년에 이르도록 수많은 환자를 진찰하고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저작이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에 집안 어르신 두 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고부터다. 한동안 우리 집안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이 없었으나, 저자가 강조하듯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한 분은 암으로, 또 한 분은 치매를 비롯한 만성 질환을 앓고 사망하셨다. 죽음에 특별한 예외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연명치료》에서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임종에 이르는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누구인들 고통이 가득한 반면, 무기력하게 수명을 연장하다 죽음을 맞고 싶겠는가? 저자는 바로 이 문제를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이 책에서 독자와 우리 사회에 질문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초등학교 당시만 해도 가족의 죽음이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어느 새 죽음은 그에게 익숙한 자신의 방이 아닌 병실이 되어 버렸다. 저자가 언급하듯, 우리 사회는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과 같은 일이 있고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죽음’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왔지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죽음은 기피의 대상으로 치부되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회피해야할 소재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생명 존중’의 가치와‘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득 작년에 돌아가신 어르신도 생전에 늘 연명치료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셨다는 게 생각났다. 가족은 모두 공감하고 그러겠노라 했음에도, 막상 돌보는 입장에서 ‘치료 중단’을 요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한바와 같이,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담당 의료진에게‘뭐라도 해주세요’라는 절박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로에 서서 절망한다. 남은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약으로 항암 치료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 한 가지 더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의료진의 입장과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연명의료결정법이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하거나 시행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기에 임종에 이르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보다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여기에 종교계, 법조계, 윤리학계, 시민단체 등이 이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감지할 수 있다. 이제 현대인의 죽음은 사회가 정한 법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노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다고 한다. 특히 가족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온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장래 역시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걱정거리들을 던져 주기도 한다. 나이가 더 들면 몸에 이상이 생기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될 터인데, 여러 가지 사안이 바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핵가족화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나이듦이란 새로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돌보아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의 경제력으로 치료 및 돌봄을 여유 있게 받을 수 있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두려움도 있다. 저자가 일본의 간병 살인 사례를 든 것처럼, 혹시 내 병이 오랜 간병의 절차를 의도하지 않게 필요로 하게 된다면 내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존엄하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전한다. 종교계나 법조계 등의 관점도, 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좀 더 유연하게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다. 90세 건축가 할아버지는 텃밭이 있는 아담한 집에서 87세의 아내와 함께 살아왔다. 어느 날 아침에 할아버지는 텃밭에 앉아 쉬엄쉬엄 일을 하고는 집에 들어와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곧 낮잠을 자다가 아내 곁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았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였기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실화였고, 영상도 실제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기에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마지막 모습의 롤모델이 이 영화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이처럼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죽음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는 질병을 앓고 고통을 받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다.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본가를 다녀온 후 어머니와 통화할 때, 어머니는 이제 막 산책을 나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프지 않으려면 (그래서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수화기로 넘어온 이 말이 가슴에 쿵 하고 박히고야 만다. 태어난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없으나, 생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마지막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책에 소개된 스위스의 안락사나 화려한 요양병원 시설을 이용할 여력이 되지 않는 나에게 우리 나라가 OECD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고, 70-80대의 자살률이 10대의 자살률보다 7개 높다는 통계는 충격적이고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이것은 바로 ‘나의 미래’일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책에서 제기하는 다양한 이슈들, 이를 테면 연명 치료 중단이나 완화 치료, 의료조력사망, 그리고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막막하게 느껴지던 현실을 좀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저자가 “죽음은 단지 의료나 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다.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120)라고 던진 메시지를 이제는 꼭 붙들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관해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과 진지하고 열린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때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남아 있는 각자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연명치료는사양하겠습니다 #양성관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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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까치] (2026)

 




언제인가 세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종의 기원》을 읽어보려 시도한 적이 있다. 성공했다면 번번이 아는 척을 했겠지만 나는 그때마다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책의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일상이 그만큼 번잡하고 산만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깜빡이는 배너 광고와 SNS에서 날아오는 알림을 확인하는 일이 밤에는 진정이 되지만, 이번에는 스포츠와 가수의 영상이 넘쳐나는 온라인 플랫폼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나이가 들면서 노안 문제를 제외하곤 그나마 꾸준히 책을 읽어온 내가 책을 읽는 일이 점점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 활동으로부터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 가운데 《종의 기원》은 여전히 내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 가운데 상위권에 올라 있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책읽기 과정에서 파악한 나는 머뭇거리고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는(이하 《읽은 척》) 나의 게으름과 미루기 신공을 보완해 줄 비결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세상에는 나처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고민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먼저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이 《읽은 척》은 다윈의 저서를 읽기 위한 워밍업 내지는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 《읽은 척》이 단순히 《종의 기원》을 자세히 요약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과학이 오류로 판명된 다윈의 설명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윈의 오류를 알고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된 진화의 지식을 갖추고 다윈의 저서를 읽는 일은 그 반대로 시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처럼 ‘미루기 신공’의 마스터들에게 이 《읽은 척》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다윈의 삶과 진화론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읽은 척》을 읽는다면 정말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보상이 있다. 제목대로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와 같은 ‘미루기 신공’족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다. 단 이 《읽은 척》을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 ‘미루기 신공’족들이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내가 ‘읽은 척’을 시연할 대상을 명석하게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종의 기원》을 ‘읽은 척’을 하려 한다면 우선 상대방의 전공이 적어도 생물학 전공은 아닌지 부터 확인 하고 시도할 일이다. 지피지기면 백전일승은 할 수 있을 게다. 여기에 더하여, 소개팅 상대방이 얼마나 폭넓은 교양을 지니고 있는지 다방면으로 질문하고 파악할 것. 상대가 음대생이라고 해도, 매우 희박한 확률로 내셔널 지오그래피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 덕후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은 부모님이 생물학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말이다.


 

한편 소개팅 자리에서 이 모든 ‘읽은 척’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있다. 상대방에게 시도하는 ‘읽은 척’이 효과가 있을지 알아내는 동안 상대방에게 던진 다양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좀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또 알겠는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되거나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읽은 척》은 우선 다윈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종의 기원》을 읽어 내기 위한 워밍업을 보장하는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혹은 읽지 않아도 좋을 만큼 최신의 과학 지식으로 업데이트 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 문헌을 얻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도 해당이 안 된다고 해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 것. 당신이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하여 내가 지적으로 보이도록 도와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와일드카드로 기능할 수 있고, 동시에 ‘읽은 척’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 공세로 상대방을 보다 잘 알게 되고 더불어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필살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읽은 척》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장점들을 장착하고 있다. 비용대비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읽은 척》을 다 읽지 않아도 ‘읽은 척’함으로써 한 번 더 책을 열어보고 고민하게 되니 얼마나 건전한 ‘읽은 척’인가. 게다가 이 책을 구입함으로써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건 굿즈와 함께 따라오는 예기치 못한 덤이 아닌가.

 



#종의기원을읽은척할수있는책 #사라시나이사오 #이진원번역가 #까치 #종의기원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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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과학사 교과서
정인경 지음 / 이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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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과학사 교과서

 

정인경 지음 [이음] (2026)

 



최근에 혼자 생각하곤 하는 질문이 있다. ‘과학을 왜 공부해요?’라는 질문과 ‘인류는 지구에서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이다. 누군가 나에게 과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물어보았을 때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섬주섬 어렵지 않은 용어로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자문해보곤 한다. 게다가 올 여름 뜨거운 열기로 실감하게 했던 기후위기 시대에 인류 문명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를 종종 상상해본다. 이건 진지한 환경활동가처럼 어떤 행동으로 실천해야한다는 의무감보다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일종의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학저술가, 과학사연구자 정인경의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를 읽는 동안 나 혼자 자문해보던 이 두 주제에 대한 고민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2022년도에 개정된 고등학교 과학사 <과학의 역사와 문화>를 집필했다. 이 책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저자가 과학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고민했던 주제들을 후기처럼 들려주는 성격의 책이라 느꼈다. 교과서의 정제된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에 숨어 있는,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이 책에서 보다 진지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저자는 과학 공부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었을까? 내 나름의 설득력 있고 세련된 표현을 찾지 못했기에 나는 저자의 견해가 궁금했다. 들어가는 글에서 그는 “(과학) 지식이 왜 중요한지 알고 자신의 삶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11)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달리 말하면 과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나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진 ‘과학의 상업화’를 지적하며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지닌 위상과 역할이 달라진 현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과학의 공공성과 메타 학문으로서 과학의 역할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시대가 지나며 과학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과학의 목표 또한 과거와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과학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과학사는 메타 인식을 하도록 도와주는 채널일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과학이란, 절대적 진리를 확정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과 앎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검증 받아온 믿음 체계 혹은 방법론에 가까운 듯하다. “과학은 지난 40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에서 살아남은 지식”(12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여태껏 신뢰를 더 쌓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메타 인지적 절차, 끊임없는 비판과 토론의 과정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우주의 법칙을 찾는 것이나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같았”다(73)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한편으로 나는 저자가 ‘인류의 문명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를 묻는 대목에 관심이 갔다. 인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결국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인류가 겪게 될 ‘문명의 죽음’이 얼마나 가속화될 것인가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활동, 자원을 착취하는 행위로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은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최근 네팔의 산지에서 발생한 대홍수 사태를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환경의 변화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올 때 환경 변화에 취약한 계층이 더 많은 희생을 겪게 마련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인류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함께 붙들고 해결할 마지막 타이밍을 놓쳤다고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러한 문제는 지식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는 과학 교과서를 통해서 인식하고 생각해보기에는 부족하다. 저자는 과학사에서 우리가 처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여긴듯하다. 조금 낯선 입장이긴 하지만, 저자는 과학사로부터 인류에게 필요한 윤리적 입장을 발견하고 이야기해 볼 수 있다고 본 듯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탐구 일변도의 관행과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 전에 과학의 방향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여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다행히(?) 과학은 가능하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은 ‘과학적 상상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부터 주목하는 철학과 윤리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 집단의 책임과 열린 자세, 과학 행위의 공공성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고 우려하는 과학의 상업화 현실에 개개인이 거리를 두고 균형감을 갖게 해주는 도구가 아닐까. 이제는 ‘시민과학’이라는 표현이 익숙해졌다. 시민과학의 관점에서 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들도 과학과 기술이 수행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제 인류 공동체의 삶을 결정 짓는 문화이자 ‘사회적 합의’의 산물로 우리의 삶 속에 공고히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선의 가능성과 실패에 따른 위기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의 가능성과 일련의 수행 과정이 열린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적 절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과학적 상상력’이 인류 문명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당장 임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예상해 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10년 가까운 트로이 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트로이 왕국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 가운데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했던 인물인 카산드라가 있다. 트로이가 맞이한 비극은 트로이 왕국의 운명을 카산드라가 예언했지만, 그 누구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의 멸망에 대비할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인류의 운명을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과학적 상상력이 예측하는 인류의 위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은 트로이 왕국처럼 되지 않을까.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과학적 상상력은 카산드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과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학 활동에서의 민주적 절차임은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과학 활동으로 축적된 지식과 판단 체계가 주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곧바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곧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한 책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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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믹서’  6월 모임 후기


《나쁜 유전자》


정우현 지음


제5장 범죄 유전자

 



홍대 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이번 달에 진행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에서는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 제5장 ‘범죄 유전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 장은 ‘범죄자는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답변해 왔으며, 사회가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에 관한 짧은 역사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이번 장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호기심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함으로써 불완전함에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온 셈이죠. 《나쁜 유전자》에서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은 ‘나쁜 유전자’라는 관념이 실체 없는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관념에 대해 지배층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시선을 관철해온 결과의 부작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나쁜 유전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고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이름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순덩어리 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단에 공개된 인물들의 사진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머그샷이 없다보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살인자부터 눈빛이 무서워 보이는 사기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물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서는 두개골에 범죄의 본성을 지닌 부위가 있다는 믿음이 공기처럼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오랜 시간 집필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대표작인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과 같은 작품만 보더라도 인간의 빈곤 문제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과 더불어 되물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범죄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국에서 다윈의 사촌형인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생학이 꽃핀 곳은 미국이었죠. 우생학은 보다 많은 지배층의 지지를 받으며 법제화되고 이른바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개선’한다, 혹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곧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미묘하게 굴절된 시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되며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제정한 ‘인종법’과 같은 구체적인 탄압의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독일에서 채택되어 인류사에서 참혹한 재앙을 낳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의 선조격인 이 견해는 단순히 이웃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죠. 이른바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믿음이 ‘수치화, 혹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구실과 얽혔을 때 인류 공동체에 어떤 재앙을 야기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빈 서판’과 같다는 견해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떤 행동이든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내게 건강한 아기 12명만 데려다 달라. 나는 이들을 변호사, 의사, 심지어 범죄자로 길러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왓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절한 환경(조건)과 교육이라면 새로운 인류도 창조할 정도의 자신감이 아닌가요.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사례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나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의 빈도를 늘리는 실험이었던 ‘스키너 박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40-5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은 이른바 ‘정신질환자’에게 많이 시도되었던 방법입니다. 이 시술은 특히 인간의 ‘기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인이 가진 정신 질환은 뇌를 (전기 충격을 통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듯) 백지화한 후 새롭게 교육을 하여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셈이죠.


 

여기서 주목해보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나아가 통제하려는 인간의 충동입니다. 이런 관점은 <신기관>등을 저술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른바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말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자연의 조건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점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나치 독일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인체) 실험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야기한 이런 ‘재앙’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실험용으로 보고 인간이 개입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낸 결과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선이 사전에 저지되었더라면 40만 명이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유전자에 의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읽은 5장에서는 유전자가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서술합니다. 이른바 ‘유전 vs. 환경’ 논쟁에서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없이 논의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특정 형질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형질이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절대 다수의 유전자는 ‘다면발형성’, 곧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멀티 플레이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나오는, 하나의 유전자가 그대로 하나의 또렷한 형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어느 특정 형질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 같네요. 따라서 특정 형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가 장차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이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른 형질 발현 과정에 교란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유전보다 환경에 더 방점을 두는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핑커가 지닌 견해의 기반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주요 논지인 ‘인간의 폭력성이 점차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핑커는 환경적 측면,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진전, 교육의 역할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매우 빈약/취약해 보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역사 무대에서 대량 학살을 비롯한 인간의 범죄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사용한 방식이 설득력이 매우 약해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우현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합니다.


 

“폭력을 주로 전쟁과 살인에 의한 사망자 수로 다소 편협하게 제한해 정의함으로써 통계적 착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의 수많은 참상은 애써 축소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테러, 내전, 국가폭력 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이 결국 범죄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인신매매, 성범죄, 사이버 폭력, 언어폭력, 환경 파괴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그러나 대량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큰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아마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도 문제다. 그의 책은 마치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를 입증할 만한 통계자료만 선별해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235-236)


 


제가 놀랐던 점은 많은 매체나 독자들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호평 일색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납득이 가지 않거나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비판한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이죠. 단지 내 생각과 맞아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학자가 자신의 책에 적용한 논리가 일개 독자도 납득시킬 수 없는, 문제적인 논리임을 그동안 아무도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독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핑커의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역사관/인간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 실었기 때문이죠. 정리해보자면, 핑커의 역사관도 유전 보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상황에 있지만,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통계자료만을 취사선택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례의 누락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너진 상황에서, 핑커의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무튼 핑커의 책과 관련한 사항은 이렇습니다.

 


이번 모임에 읽은 ‘범죄 유전자’를 정리해보면, 유전자는 단독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가 환경, 곧 특정 상황과 맥락 아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환경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맥락, 바로 그 유전자가 놓인 맥락 혹은 환경이 어떤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발견과 사실에 의해 기존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유연한 존재’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번 장인 ‘범죄 유전자’를 읽으면서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번 여름인 7-8월에는 과학책 읽기 모임이 ‘방학’에 들어갑니다. 9월 모임에서는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이야기 거리가 풍성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쁜 유전자》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 한권 씩 골라서 읽어 오시면 더 좋겠네요. 9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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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
김추령 지음 / 종이와빵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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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어진 지구에서 함께 잘 살기위한 공부


《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


김추령 지음 [종이와빵] (2026)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AI에 대한 신기술이 발표되고 인류의 달 거주 계획이나 화성 탐사에 대한 전망을 접하는 시대에 산다. 어느 과학자의 예언 같은 선언처럼, 기술적인 ‘특이점’이 이제 곧 시작될 것만 같다. 너무나 빠른 발전 속도와 생산성,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우려는 반기술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기 쉬운 형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위를 올려다보는 동안, 이들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발아래의 세계는 어느덧 꽤나 낯설어져 버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새로운 현실 세계로 편입되어버린 가상공간이나 우주 공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자연과 본래의 현실 세계로부터 오히려 더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낯선 지구>에서 저자는 인간에 의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된 지구에 주목한다. 곧 이어 인간이라는 존재로 향하는 저자의 시선이 담긴 글쓰기는 지구와 인간 사이의 느슨해진 연대를 확인하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전망을 담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인간에 주목하지만, 과거의 검은 하늘(우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질계의 역사에 관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한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낯설었다. 달이 없던 태초의 지구를 상상해본 적이 없거니와 인류가 달이 생겨나는 순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낯선 지구’의 모습이다. 물론 과학자들의 상상은 지금껏 인류가 축적해온 모든 지식과 보다 많은 파라미터를 사용한 시뮬레이션에 기반하고 있지만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생소한 지구의 모습은 지금껏 단 하루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특히 지구와 달의 형성과정에서 우연히 삐딱해진 지구의 자전축이 오늘 지구가 갖춘 모습에 이토록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만 인간은 너무나 짧은 시간에 칙칙한 회색빛 얼굴을 지구에게 안겨 주고 말았다. 인간이 기후 및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나무 아래로 내려와 발을 딛고 살아가기 시작한 터전을 무심하고 거침없이 파헤치고 이용해온 결과다. 인류는 과거에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지구’와 또 다른 지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안내한다.


 

우선 지구의 부단한 지질활동이야말로 질소나 탄소 같은 주요 원소들의 순환을 견인했다. 이로 인해 빙하기와 해빙기의 순환도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물질계의 흐름과 상호작용과 부단한 변화들은 생명의 출현과 이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극적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우연히,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대기 산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질학적 시간에서 말하는 다섯 번의 대멸종과는 차원이 다른 대멸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히 나의 존재가 지질시대의 대멸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1%의 존재에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역사로부터 나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흐름에 대한 이해의 놀라움은 나를 연대와 새로운 부채의 감각으로도 이끌어주었다.


 

내 피부에 와 닿도록‘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대상은 바로 ‘나’의 존재였다. 내 몸 안에 무척이나 다양한 개체(미생물/바이러스/남세균 등의 흔적)가 들어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나’혼자만의 고립된 단독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건 감각이 새롭게 환기되는 경험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개체들이 내 몸 안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상호작용하고 유전자도 교환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내 몸의 세포보다 100배나 많은 유전자가 비인간 생명체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은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에서 더 나아가 내 몸이 정말로‘소우주’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저자가 초기 지구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들려주는 동안 내가 주목했던 부분 한 가지는, 어느 영국 시인의 말대로 ‘인간은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생명체 역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 밑 수 km 아래, 저 심해 바닥의 열수공 주변은 수백 기압의 압력과 수백 도의 극한 환경이지만, 이런 곳에서도 혐기성 생물들은 열수공에서 분출되는 광물질에 의존해 살아간다. 무엇보다 이 세균들마저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가 새삼 낯설게 다가온다.


 

이 책은 우리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현재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한 가득 안겨준다. 이를 테면 물질계와 생명계가 서로 촘촘하게 얽혀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반면 인간은 지구의 다양한 순환 시스템에 상당한 교란을 일으키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종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드게임 젠가(Jenga)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처럼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나무토막을 하나씩 계속 빼고 있다. 멈추지 않고 호기심에서든 혹은 관성 때문이든 나무토막을 계속 빼려 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음에도 발아래 다가온 위험을 직시하거나 멈추기 위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운명은 분명하다. 다만 언제 그 운명이 닥쳐올지 모르는 것뿐이다.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인류 공동체는 이전과 달리 행동하거나 변화를 시도하는 데 여전히 더디다.


 

인류 대부분은 이러한 위기감을 분명 알고 있다. 다만 발아래에 있는 이 위기를 당장은 살짝 눈감고 싶은 불안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에 더하여 과거와 현재의 몇몇 공동체의 모습들, 사회적인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은 여기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작은 공동체에 존재했던 작은 전통들을 이야기하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캐나다 서부 선주민의 ‘포틀래치’ 전통이나 멜라네시아의 ‘쿨라 링’의 전통이 그렇다. 저자는 이런 전통들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기’가 경제적인 것만 있지 않음을 역설했다. 특히 공동체를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에 주목했다. 저자가 여러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에서 읽어내는 것은 구성원 사이의 명예나 존경심, 연대의 가치다. 다만 이러한 가치들이 규모가 훨씬 큰 현대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좀 더 고심해볼 문제다.


 

이 책의 제목 ‘낯선 지구’는 인간의 편리함, 나아가 성장 위주의 탄소 소비 문명이 지질학적 시간에 비해 얼마나 짧은 시간 만에 지구-자연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분명한 점은 지구상의 어느 종이든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 문명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명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이 과정을 얼마나 빨리 앞당길 것인가는 분명 인류의 손에 달려 있을 터다. 저자는 오래 전 지구 곳곳의 선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연대의 문화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다. 지구는 인류에게, 나아가 모든 존재들에게 유일한 공유지이다. 기후위기와 같은 지구적인 문제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다면 작은 공동체의 사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실마리로부터 내가 속한 공동체에 맞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해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낯선 지구’와 다시 연결되어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며, 작지만 공존을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함께 잘 살기’위해 이제는 낯설어진 지구에게 손을 내미는 작은 제스처이다.

 

 


 

 


[책속으로]

[1] "지구의 삐딱함이 바로 테이아(달을 만든 외계 천체)와 텔루스(원시 지구)의 충돌로 인한 결과입니다. 테이아와 텔루스의 우연한 충돌로 만들어진 지구의 삐딱함은 지구에 거주하는 많은 생명체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물론 오늘날 인류의 등장도 그 영향을 받았지요." - P16

[2] "지의류, 땅의 옷이라는 뜻입니다. (...) 지의류는 보통 곰팡이와 광합성을 하는 녹조류나 남세균의 공생체예요. (...) 지의류의 특성을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표현이 ‘극한 미생물’입니다." - P54

[3] "지의류는 기후변화가 심화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한계점을 넘을 수도 있는 지구 시스템과 닮았어요. 지의류는 공생이라는 방법으로 슈퍼 생물이 되었습니다." - P59

[4] "1905년 러시아의 생물학자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메레슈코프스키는 한 가지 가설을 주장합니다. ‘진핵세포가 지구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세포 내에서 공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1960년대 세포내공생설을 주장했던 린 마굴리스의 발견(세포내공생설)의 원천이 되는 발견을 한 러시아 생물학자 메레슈코프스키의 발견. - P62

[5] "우리는 말 그대로 슈퍼유기체가 아닐까요? 다양한 생물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작동하고 유지되고 번성하는 초유기체 인간. 인간이라는 정의 자체가 공생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 P72

[6] "진화는 생물과 물질적 환경이 서로 얽혀 추는 정교한 춤이며, 그 춤에서 ‘가이아(지구)’라는 존재가 탄생한다."
- 데이지꽃 행성 개념을 만든 제임스 러브록의 말 - P92

[7] "모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오로지 경제적인 동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의 명예, 자존심, 그리고 사회적 약속이 경제적 이윤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가 지구의 여러 공동체로부터 발견한 전통(쿨라 링)과 의미 - P141

[8] "오스트롬이 발견한 작은 공동체의 복작복작하고 시시비비로 시끌벅적한 그 회의장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마을공동체의 자율적인 관리 체계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 낯선 인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희망이라 불러봅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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