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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레슨(Style)

: 명확하고 아름다운 영어 글쓰기

조셉 윌리엄스(Joseph M. Williams) & 조셉 비접(Joseph Bizup) 지음

라성일·윤영삼 옮김 |  [크레센도]

 

 

언젠가 사놓고 묵혀두었던(?) 이 책을 책정리하면서 발견하고 조금 읽어보았다. ‘명확하고 아름다운 영어 글쓰기라는 부제가 달린 책은 영어 문장쓰기, 영어 글쓰기 안내서다. 이런 취지의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읽어보니 다소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말과 글로 글쓰기를 하는 데에도 참고가 만한 부분이 있을 같다.

 

1장은 무엇보다 스타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씌여졌다. 흔히 글에서 스타일(style)’이라고 하면 문체라고 번역이 되는데,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갖는 의미의 맥락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타일 문체다라고 선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묘한 문화적 맥락의 차이는 감안하고 이해를 해야 것이다.    

 

장을 읽다가 주목하게 문장은 이것이다.

 

완벽한 상태로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시간이 허용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흠잡을 없을 만큼 완벽하면 좋겠지만, 완벽이란 죽을 때까지 도달할 없는 것이다.)”(28)

 

문장에 주목하게 것은 내용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느껴서 라기보다는 문장이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을 불러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딴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고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여러 고쳐 쓰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글이 완벽해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 결코 이루어질 없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완벽이라고 있는 상태가 있다고 믿는다면’, 상태에 무한히 점근적으로 다가가려고 시도하는 것이 생애 우리가 있는 작업일 것이다. ‘저자는 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미리 힌트를 주고 있다. 글쓰기를 해도해도 안된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원래 해도해도 (완벽하게) 안되는것이 글쓰기라고 말해준다면, 애초에 그런 기대보다는 보다 나은문장을 만들기 위해 수련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물론 해도 안되는것이기에, ‘차라리 안하겠다라는 결론은 보다 나은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와 커다란 차이를 갖는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문장은 미완의 문장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어느 문장이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고 판단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 책의 중요한 전제는 초고를 적용하는 규칙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초고를 때는 불필요하게 글쓰기 규칙을 고민하면서 쓰지 말고 일단 쓰고 , 수정하는 과정에서 책의 글쓰기 규칙들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고라도 글을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지가 고민인 독자들에게 책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자신에게 맞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요한 생각을 아니겠지만,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맞는 책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 자체도 자신에 대해 좀더 알아가는 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관심사에 따라 모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은 욕망과 결핍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책은 단순히 영어공부/영어 문장 쓰기를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라는 관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모호하게 숨어있는 안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여 전달하기 위한 훈련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을 알아가는데 도움을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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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19-10-15 16:23   좋아요 0 | URL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 표정훈, 그림 속 책을 탐하다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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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 당신 곁의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그림 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일까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표정훈은 2 권의 장서가 있는 자신의 서재에 혼자 남은 , 책이 그려진 화보집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책의 방향에서 짐작할 있듯이, 독자는 저자의 궁금증을 따라가며 그림 속의 인물, 인물을 그린 화가를 둘러싼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람과 책의 이야기 만나게 된다. 책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러 그림이 등장하는데, 그림 속에는 언제나 책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개는 그림 속의 책이 어떤 책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대신 저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중심으로, 화가가 알고 있었을 법한 책이나 그림의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제목을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을 통해 추정해 내고 있다. 마치 셜록 홈즈가 것처럼, 그림 책이 어떤 책인지 추리해나가는 것이다.

 

혼자 남은 , 당신은 무엇을 것인가. 스마트 폰과 TV드라마의 맹공에도 살아남아 당신 곁에 있게 책을 펼쳐 보면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화가 윤덕희의 그림 <독서하는 여인>처럼, 온전한 휴식으로서의 독서도 가능하고, 독자의 정신을 벼리는 독서를 있겠다. 보기 시작하면 끝이 때까지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라마처럼, 다음에 읽게 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책에 소개된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면 좋겠다.

 


나를 위로하고 그대를 위로하다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그림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중에서 화가 고흐가 그린 그림으로부터 시작해본다. 저자는 독서광 고흐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었던 것은 소설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고흐가 남긴 편지, 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노라면, 고흐가 마주했던  고난을 일부나마 엿볼 있었다. 특히 강한 자기애와 현실에서 비롯된 자기비하가 항상 맞물려 나타나는 고흐의 자의식을 발견할 때면, 자신의 일부를 보는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고흐의 곁에 소설 남아 그를 위로해주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던가. 책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 <석고상, 장미꽃, 소설 권이 있는 정물>에는  제목이 적혀있는 권이 등장한다. 바로 기드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 콩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였다. 대개의 그림에 책은 부수적인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흐가 그린 그림에는 권이 가운데에 배치해있고, 책의 제목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다. 책들은 그만큼 고흐에게 의미있는 책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굳이 권이 책일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가족의 배척을 받는 분위기에서 언제나 홀로 느낌을 받았을 법한 고흐에게 권의 소설이 무엇보다 그에게 위로가 되었법하다. 게다가 수수께끼같이 그림 속에 여인의 토로소 석고상과 장미꽃이라니. 저자 표정훈은 그림에 보이는 권의 책을 통한 상징성 읽어나간다. 석고상, 장미꽃, 소설 이란 , 생명과 죽음의 본능, 그리고 이야기 있을지 모른다”(164)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저자가 내세우는 상징성으로 파악해보는 방식보다 단순한 이해를 선호한다. 정보(책의 제목) 주어진 권이 그림의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는 점으로, 소설이 화가에게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특히 소설에 어떤 공통점은 없을까를 생각해봄직하다. 저자가 소개해주고 있듯이, 소설은 여성의 지난한 삶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있을 같다. 공교롭게도 소설에는 남성들(특히 유혹하는 남성들) 의해 (벌거벗은 석고상처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낸채) 육체적 쾌락 충족의 대상으로 농락당하고 급기야는 외면 받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적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했던 고흐는 소설이나마 고통받는 여성들을 생각하며 장미를 놓아두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고흐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와 비루한 현실의 살아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을 연민하고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믿고 싶다. 바로 고흐 자신에게 위로를 소설의 여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민의 장미 꽃을 건네는 . 비록 그림 뿐이었지만, 무엇보다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불태우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놀라운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15세기 말에 그려진 페드로 베루게테의 그림 < 도미니크와 알비파> 보면서 동양의 진시황만 책을 불태운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림은 기득권을 가진 종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교단의 서적을 파괴하고 제거하도록 이들을 불태우는 폭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책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문자를 읽어 있는 식자층의 사상을 통제하고 공포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에서도 농서 등을 제외하고 각종 서적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수백명의 유생들도 생매장 당했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폭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책을 불태우는 일이 오래 전의 일만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알려진 분서사건 또한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1933 5 10, 나치 독일이 광장에서 자행한 분서사건은 비독일적이라고 지정된 책들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의 도서, 하인리히 하이네,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만, 베르콜 브레히트 많은 독일 작가들의 책이 불에 타버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소설 이민자들(‘막스 페르버, 233) 사건을 보도한 독일 신문의 보도 사진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바로 사건 당일(5 10) 저녁,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광장에서 비독일적으로 지정된 책들을 불태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제발트는 사진이 조작된 것임을 소설 화자의 입으로 언급한다.  당시 책을 불태우던 시각이 저녁이었기 때문에 너무 어두워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제대로 찍을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전에 같은 광장에서 개최된 집회 행사의 사진에 거대한 연기기둥을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소설에 사용된 사진과 사진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제발트가 직접 주인공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수집한 사실에 입각하여 쓴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도된 신문 사진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난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책을 불태우며 사상을 통제하는 행위에 더하여, 책에 등장하는 사진, 책의 내용이 독자를 얼마나 기만할 있는지 또한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지닌 이들이 사람들을 분서 대변되는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있음과 동시에 조작 거짓 내용을 유포하는 방법을 통해 비가시적이고 조용한 대중 통제 방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어떤 매체인지 우리에게 존재를 드러내고 영향을 주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있겠다.

 


책장을 보면 사람을 있다

 

저자는 이광수의 무정나오는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의 책장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한다.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는이형식은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의 존경 받는다. 이유가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어려운 영문 도서와 독문의 금박 입힌 도서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책장에 꽂힌 책을 통해 주인을 짐작할 있음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견해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아가 좀더 구체적으로 도서 주인의 욕망을 읽어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란 한편으로 결핍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로,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를 다녀와 3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정리했던 열하일기에서 청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대부들이 북경 책방거리 유리창에서 책을 사오는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필사와 돌려보기 이외에 책을 자유롭게 구하기 힘든 시절, 나아가 모든 책을 국가에서 편찬하는 시스템을 유지했던 조선의 현실에서 유교 경전을 구하는 일은 전문 브로커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브로커 역할을 했던 이들이 청나라 사신 행렬을 따라갔던 상인들이나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이 사신 행렬을 따라 사들여왔던 서적들로 사대부들은 자신의 서재를 자랑삼아 꾸미게 것이 유행이 것이다. 만약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만들어 놓은 서재를 살펴볼 있다면 우리는 서재의 책들을 통해 이들의 욕망과 결핍의 자의식 또한 읽어낼 있었을 것이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소박한 책장을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기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경우는 소장의 빈약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고 내가 결핍을 느끼는, 때로는 내가 열등감을 갖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거침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책장을 때면 나는 으레 꼭꼭 숨겨둔 나만의 속물근성과 숨겨둔 욕망을 들킬 것만 같아 부끄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의 책장 전체를 유심히 있다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읽어낼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공감하게 된다.

 


책을 덮으며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화가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나 샤틀레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 속에 혼인하지 않은 처녀 자신이 그린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라고 적어 넣은 화가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때가 1554년임을 상기해보라. 저자는 그림 속의 문구를 하나의 인간 선언으로 읽어내고 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을 살다 여인은 글쓰고 책읽고 연주하고 그릴 아는 여성임을 당당하게 드러냈고,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선언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 오히려 구식으로 느껴질 만큼 멋진 여성의 자취를 만났던 기회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연인이자 후원자였으며 학문적 반려였던 샤틀레 후작 부인이 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는 또한 눈여겨 볼만한 짜릿한 사례였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번역이란 언어의 치환 혹은 표현 대체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원문 도서에 대한 내용을 읽고 이해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덧붙일 있는 것이 주석이다. 사학자 박상익이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외국의 고전 문헌을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다는 행위가 대학원에서 학위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 보게 된다. 국내의 학계가 제대로 번역 연구작업(주석 달기를 포함한) 대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가 계속 되는 우리 문화의 수준이 표피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틀레 후작 부인이 번역한 프린키피아  프랑스 학계에서 표준 프랑스어판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21세기에 사는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해준다.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책에 소개된 그림을 둘러싼 인물들(화가와 그림 인물) 그림 책이야기를 능숙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글쓰기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단순한 배경지식과 정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 내놓기 힘든 결과물이다. 그림 점마다 화가와 대상의 삶과 당대의 현실이 교직하는 지점을 저자는 날카롭고 흥미롭게 찾아내고 고찰한다. 여기에 저자의 경험과 깨닳음이 더해져 앎의 기쁨과 지혜를 독자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저자가 자신의 장서가 있는 서재에 혼자 남아 현실과 거리를 내면을 성찰하는 관조의 순간 상상해보게 된다.




밤이다.
구석방에 홀로 있다.
그런 당신 곁에 책이 있다.
혼자이되 외롭지 않으리라.- P5

˝노년의 가낭 큰 어리석음은 젊은이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P40

˝그림 읽기와 소설 읽기는 시선의 놀이다.˝- P52

˝그녀의 어떤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녀의 다른 성품에 기뻐할 것이라˝
- <코란>(무슬림이 수집한 하디스, no. 1469)- P127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을 피하거나 무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하며 숙달하고 정통해야, 즉 무언가를 ‘마스터해야‘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며 나아가 새로운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창조할 수 있다. 아무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없듯이, 아무나 책을 찢을 수 없다.˝- P207

˝독서는 세상과 타인을 좀 더 깊이 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그것의 가장 깊은 차원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 독서는 곧 자기 성찰이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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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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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L’analphabéte): Récit autobiographique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지음 |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이 책을 실수로펼쳐든 , 단번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밤 무언가를 써야만 했다. 무엇을 써야할지 망설여졌다.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몸소 체험한 경험 어느 하나도 나와 공유하는 것은 없었다. 때부터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는 저자와 달리 나는 유독 책을 읽지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초중고 학창시절을 통해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책은 한권이었다. 요즘처럼 읽기 쓰기교육을 공공연하게 강조하는 시대의 관점에서 분명 나는 문맹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에 홀린듯 책을 덮을 때까지 저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나에게 생소한 작가다. 헝가리 태생의,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성장했던 작가로서 정치적인 이유로 난민이 되었다. 이에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녀와 가족은 마침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녀는 생을 마칠 때까지 외국어인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살에 이미 글자를 읽기 시작한 이후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렸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생경한 언어로 환기되는 낯설음 성인이 되어 뜻하지 않은 문맹 상태로 내몰리게 되었다. 사막처럼 느껴지는 고립된 환경에서 그녀가 느꼈을 고독감과 상실감은 쓰기 대한 갈증을 통해 새로운 욕망의 혁명을 일구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같다. 

 

 

모국어를 잃는다는 언어와 정체성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모국어는 헝거리어다. 그러나 어느 그녀의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로 갔다가 갑작스런 러시아의 점령으로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했다. 19세에 결혼을 하고 21 때에 4개월된 갓난 아이를 품에 안고 국경을 건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정착하여 평생 이곳에서 지내고 생을 마감했다. 한번도 모국어 사용 금지라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서 나는 할아버지 세대가 일제 강점기에 경험했을 법한 분열적 체험이 없다.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문맹> 그녀가 시대의 격량에 휩쓸려 조국을 떠나 새로운 공간, 새로운 문화적·언어적 공간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체험의 기록이다. 저자의 가족이 다른 공간(국가)에서 생존을 위해 다른 언어를 배워야했던 경우라면, 노명우 교수가 <인생극장>에서는 부모님의 식민지 경험이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라는 구체적이고 한정된 시공간에서 살기위해 새로운 언어를 접해야했던 식민지 시대 가장들의 이야기라 있다. 작품 모두 개인이 경험했던 주관적인 기록이 널리 공유되고 이해될 있는 보편성을 가진 기록으로 거듭난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있다 

  <인생극장>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소학교를 있었던 집안의 아들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혹은 출세를 위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던 아픈 현실이 놓여있었다. 반면, 소학교 교육의 기회마저 없었던 가난한 집안의 딸들 학교를 가지 못해 일본어 마저도 배우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우리 말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어떤 의미에선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모국어를 상실한 세대라고 수도 있다. 일본 식민지 세력이 물러나니 곧이어 한반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고, 노명우 교수의 아버지는 미군들을 상대로한 클럽을 열었다.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시대가 어느 갑자기 영어를 해야 먹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간, 낯선 언어 환경에 내몰리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마디라도 독일어를 해야만 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가 심지어 적국의 언어였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난 세기 초에 우리의 앞선 세대가 내몰리게 경험들을 아가타 크리스토프도 분명 다른 방식으로 마주했던 것이다.

 

우리, 헝가리 사람들에게 독일어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상기시켰으므로 적의 언어였고, 그것은 또한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외국 군인들의 언어이기도 했다.”(51)

 

 

      작가가 적어넣은 여러 국적과 언어의 이름을 일본어와 같이 치환하면 어떤가. 노명우 교수의 부모님이 경험했던 모국어의 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이 드러난 정황이 그리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정착하게된 스위스에서 아가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를 몰라 성인이 나이에 한번의 문맹경험을 하게 된다.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마주치는 경험을 통해 저자는 새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52)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우리가 생각하듯 아름답고 낭만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헝가리어 죽이는 적어(敵語) 뿐이었다. 30 넘게 프랑스어를 말하고, 20 넘게 프랑스어로 글을 썻던 저자는 나는 여전히 언어를 알지 못한다라고 여전한 낯설음을 고백한다.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언어의 벽은 모국어를 잃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체성의 상실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작가가 피부로 느꼈던 언어에 대한 이질감은 인간이 자각하게되는 최초의 상실이며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결핍의 경험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상실의 기억

     스위스 뇌샤델이라는 곳에서 시계 제조 공장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은 저자는 언어 이외에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새롭게 자각하기 시작한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 스위스 노동자들은 난민지위를 거쳐 정착하기 시작한 헝가리인들에게 진심어린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정작 낯선 환경에 고립된 헝가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환경이 새로운 사막(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되어 다가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그리움은  저자 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했던 동료 디아스포라들이 느끼는, 결코 충족되지 않을 내면의 상실감, 결핍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물질적으로 보면 우리는 에전보다 조금 잘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 대신 개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석탄이 충분하고 음식도 넉넉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비하면 너무 비싼 값을 지불한 셈이다.”(90)

 

 

     저자가 느끼는 이런 소박한(?) 상실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강한 생존의 욕구만 소유할 있었던 저자의 가족은 자신의 몸을 누일 집과 먹을 것을 마련할 있게 되자 다른 결핍의 자각이 따른다. 여기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것들 분명 언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스위스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자신에게는 하나의 사막과 같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자신의 삶이, 필요충분한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뀐 경험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누가 이해할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상실의 체험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였다. 가족과 헤어져 허름하고 낯선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기서 그녀가 이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유일하게 있었던 일이 바로  글쓰기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결핍과 상실의 체험이 글쓰기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치유의 글쓰기, 그리고 작가가 되는

    글쓰기에 대한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욕망은 그녀가 14 가족을 떠나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보다 분명해졌다고 고백한다. 절대 침묵을 강요당했던 학습실에서 시간동안 일기 같은 것을 쓰는 것이 유일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일기에 담은 내용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실의 감정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었다.

 

 나는 일기에 나의 불행,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를 밤마다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적는다.”(32)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불과 20킬로미터 떨어진 오빠를 보러 다른 도시로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상태다. 무엇보다 소녀는 차비가 없어서 자유가 있더라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대신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실의 감정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문장을 통해 보살핌을 받게되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34)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분명 치유의 효과를 가지는 모양이다. 글쓰기란 어쩌면 자신이 마주한 고통, 슬픔, 상실감, 고독감, 두려움, 이따금씩 찾아오는 행복감 등의 모든 감정이라는 나의 얼굴 마주대하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글을 씀으로써 나의 요동하는 감정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일 있는 기회를 가질 있다. 안에 굽이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잦아들면, 보다 진실되고 깊은 힘이 문장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학교를 다니게된 딸아이와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저자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희곡을 완성했다. 그녀의 희곡은 아마추어 배우들에 의해 장기공연을 성공적으로 하고,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기도 하면서 진짜 저작권료를 받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103)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적어(敵語)로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언어로 남은 평생 글을 썻던 아가타 크리스토프의 의지는 이미 자기 암시로 본문의 어딘가에 드러나있다.

 

 

 

내가 확신할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82)

 

 

 

 

이제 우리의 할일은 쓰기, 그리고 계속 쓰기

     나는 책을 정독하고, 다시 출퇴근 읽어보았다. 작가가 경험했던 삶의 풍경들, 작가가 남긴 진실한 문장들에서 처음 느꼈던 인상이 여전히 강렬한 상태로 줄어들지 않는다. 살때부터 읽기를 시작한 소녀의 삶은 소녀가 사용하던 언어와 일체를 이룬다. 그녀의 언어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상실과 결핍의 상태를 메워주는 집짓기 행위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저자와 내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체험이 아니라 근원적인 결핍에 대한 자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무언가를 없었다면 위로를 받지 못하는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란 의미이다. 작가에게 쓰기란 그녀에게 내려진 의연한 삶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이 어느 글에서 졸렬한 글이라도 용기를 내고, 계속 쓸것 주문했던 문장을 다시 기억해 내었다. 졸렬한 나의 글은 이렇게 한번 살아남게 되었다. 아가타 크리스토프는 책을 덮고  우리가 해야할 일을 자신의 책에 살짝 숨겨놓았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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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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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독서>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대학재학 난치병으로 13 투병생활.

   이 문구의 기록만으로도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겪었을 법한 절망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20 전체를  난치병과 함께 싸우고, 어르고 달래며 보냈을 것이다. 군복무와 같이 스케줄이 정해져있는 일들과는 달리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같다.  

 

   <절망독서> 절망의 전문가 우리에게 귀뜸해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절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절망의 시기에는 우리에게 이야기 필요함을 말한다. 그리고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함을 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권할 있는 , 영화, 드라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덮은 잠시 인상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대하고 있음을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없는 대상, 자신만이 겪어야하는 절망과 정면승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는 아이디어는 합리적이다. 당연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그럴듯해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과 수용이 안될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 하나를 저자는 전해준다. 바로 자신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조급하게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지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배우고, 이를 자신의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저자는 내가 공감하는 도피성 긍정적 사고 언급한다. 우리는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장려하지만, ‘부정적 (거의 모든) 것을 피하려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현대사회를 긍정성이 제거된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성의 제거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거슬리는 어떤 (부정성) 없애고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강박의 징후가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절망독서> 읽으며 가지 확신을 갖게 것은 부정성 긍정성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공존해야 온전하다는 .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 것을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요구받는다. 하지만 부정적 태도가 일방적으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부정적태도와 비관적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없다 태도는 비관적이다. 반면 이런 방식은 일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있다. 따라서 다르게 시도해볼 있다.’라는 태도는 분명 부정성 속하는 것이지만 비관적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우스개소리로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부정성이 결여된무한 긍정으로 자기를 혹사시키고 소진하는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절망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부정성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점이다.

 

저자는 TV드라마 작가 야마다 다이치가 어느 인터뷰를 인용한다.

(214)

"지금 사회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양쪽 면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다들 깨달으면 살기 편해질 겁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빨리 잊거나 극복하는 데에만 너무 열중하는 같습니다. 어두운 면을 마주보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을 속인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정성 우리의 절망을 마주대하게하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망 또는 어떤 문제를 회피하기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일일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천년 갖고 있던 삶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성을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씀으로써 우리의 절망을 성숙의 기회가 아닌 자기 파괴의 거대한 흐름에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진실로 절망의 바다라는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본저자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깨달음을 이야기해줄 있을 것이다.

 

   <절망독서>에서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 범주를 이야기할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듯이, 저자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방편으로 만을 권하지 않는다. 저자는 보다 넓게 우리가 우리의 절망을 마주할 공감하고 따라갈 있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의 작가들을 위주로 언급하고 있기에 다자이 오사무 같은 국내에 비교적 알려진 작가들 외에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세계문학의 무대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나는 보다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 중에서도 카프카를 소개하는 부분은 내가 막연히 갖고 있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게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군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진중문고판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훈련소가 절망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나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과 견주어봤을 뿐이었다. 문학적인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정도의 경황이나 이해도는 없었다. 당시는 그냥 기묘하고 기괴한 이야기다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를 하고 삶의 보편성을 좀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다르게 공감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이 주는 매력은 이야기의 모호한 진실 속에 무수히 많은 또는 삶의 진실을 읽어낼 있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국어시간에 객관식 문제의 해답을 찾듯이 하나의 해답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 관해 저자가 이야기할 나의 눈이 한동안 머무는 문장이 있었다. 바로 저자 자신의 <절망은 나의 > 인용해둔 카프카의 말을 재인용한 부분이다.

(98)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은 못합니다. 미래를 향해 좌절하는 , 그것은 있습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절망을 제거하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좌절한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 이것은 오히려 자신과의 거리두기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통렬한 절망의 시기에 그밖에 무엇을 우리가 할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용된 문장으로 인해 나의 잃어버린 절망의 시기 되돌아 있었다. 나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없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나의 절망을 마주하고나서야 나는  절망의 시기를 보낼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야겠다.

 

    절망의 강도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는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고난이 가져다 절망의 시기는 아니었다. 나는 정신적인, 나의 영혼의 고난 속에서 20 동안 허우적 대었다. 절망의 시기를 함께 보내는 대상으로 저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진 있었다. 책을 비롯하여 사진이란 매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저자도 , 영화, 드라마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절망을 마주하는 활용할 있는 대상을 이것만 제시했을 , 사진을 비롯한 다른 활동 모두 포함할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20 전체를 난치병과 싸우며 길어올린 저자의 깨달음을 <절망독서> 조심스럽게 전달해준다. 우리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일깨워주듯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불행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절망의 시기에 머리를 깨주던 도끼와도 같은 한마디는 빅토르 프랑클 박사의 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만 것이 아니라 삶이 나로부터 기대하는지 들여다보라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주는 한마디, 구절은 모든 이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절망이라는 피할 없고 보편적인 현상을 마주대하고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절망 이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계기는 우리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절망독서>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보내고 자신을 추스릴 있는 계기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책은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하면 잘보낼 있을까에 대한 조언이며 제안이다. 결국 쓰러진 다음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뇌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경험해야만 치유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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