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인류 - 인류의 위대한 여정, 글로벌 해양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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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자유와 상상력을 품었던 공간, 이제는 우리의 바다


- 주경철의바다 인류(휴머니스트, 2022)



 

바다는 인류사의 중요한 무대다. 지구 표면의 70%가 넘는 바다는 인류에게 미지의 세계이자, 장애물이었던 반면, 육지와 다른 장점을 갖춘 통행로이기도 했다. 이 논지는 일요일의 역사가, 대항해 시대,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를 비롯한 많은 역사서로 대중에게 역사를 친숙하게 소개해온 주경철 교수의 신간 바다 인류(2022)의 큰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연구 분야인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과 경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안목으로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시리즈와 같은 주목할 만한 번역서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도서는 바다와 함께 해온 인류 문명사에 대한 오랜 관심과 연구 사항을 총정리한 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전작 대항해 시대역시 바다를 매개로한 역사를 면밀하게 다루었다. 다만 이 책은 세계를 거대한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준 근대의 형성 배경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이번 작업은 인류가 바다와 상호작용해온 역사를 보다 긴 호흡으로 추적한 역작이라 볼 수 있다. 대항해 시대가 중세가 마무리되고 근대가 시작하는 인류사 시기의 여러 장면을 해양이라는 무대 속에서 현미경적으로 들여다본 작업이었다면, 바다 인류는 같은 맥락에서 바다를 탐험하고 도전해온 인류 역사의 흐름을 보다 높은 곳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했다.


고고학 연구가 아닌 이상 인류의 역사는 무엇보다 먼저 살았던 이들이 남긴 문자기록에 크게 의존한다. ‘역사 시대란 이런 특성을 반영하고 여기에 의존하던 시기이므로, 문자가 등장하여 기록된 매체가 역사 연구의 주요 대상이다. 현재 인류에게 남겨진 가장 오랜 문자로 수메르 설형문자/쐐기문자를 들 수 있다. 이들 문자와 기록은 5000년에서 8000년 전의 인류가 이미문명을 이루고 있었고, 또 이들이 이미 바다로 나가 필요한 물자를 운송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이런 관심을 지니고, 고대 문명이 바다로 나아가 바다를 개척했던 역사가 궁금했다. 문명 초기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해양으로의 진출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진행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메소포타미아나 아프리카 고대 왕국에서 신전과 같은 건축물, 선박과 같은 목재 구조물을 짓기 위해 바다를 이용하여 거대한 바위와 목재를 나르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최근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철학 등 고전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다. 내게도 조금 익숙해진 지중해 지역(유럽과 아프리카, 근동 지역이 만나는 곳)의 문명이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 주변의 문명과 인도양 지역의 문명(아프리카 북동부와 인도)이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해 연결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 흐름이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근대 해양 네트워크의 한 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육상의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해양의 진주길이 만들어진 역사는 도전적이고 동시에 역동적이었다. 이 역사의 한 가운데에 목숨을 건 말레이인들의 중개무역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서양인의 시선에서 해석된 역사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번 독서에서 인상 깊게 주목한 부분은, 저자의 세심하고 균형감 있는 역사적 안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은 로마 제국이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는 설명에 익숙하고, 이것이 상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초기 지중해 세계가 그리스-로마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양한 민족들이 협력과 투쟁을 하며 복합적인 역사 흐름이 이어지는 곳’(69)이라고 말한다. 서양 역사가 혹은 이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역사가들의 설명을 왜곡된 설명이라 지적하고 편견을 바로잡고자 한다. 저자는 그 역사 흐름은 일직선의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성장·후퇴·갱신을 거듭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바다는 다양한 문명들의 혼합을 통해 새로운 문명이 떠오르는 창조적 공간이었다”(69)라고 알려준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점령지역]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 식민지화에 대한 저자의 해박하고 균형 잡힌 설명이 눈에 띄었다. 이를 테면, 페리클레스 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문명)그들(야만)‘간의 대립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그리스라는 문명이 일사분란하게 지중해 지역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문명을 수호했다는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지중해 세계의 식민지화 양상을 고려할 때 흔히 적용되어 온 셈이다. 이에 저자는 단일 구조 아래 일부 주민을 내보내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설명은 환상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실상은 인간이 항해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 소통했고, 그 가운데 형성된 네트워크가 확대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연결고리에는 광대한 지역과 다양한 종교 및 문화가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보와 지식, 물자가 유통되어 왔다는 점이 핵심이 되겠다.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지중해 세계는 지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단일한 구조가 아니며, 페니키아와 그리스 민족의 해상활동을 두고 해양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보다는 여러 문화 자산이 전달되는 해상네트워크의 중첩이다.”(109)


 

이처럼 지중해 네트워크는 점차 확대되어 인도양 네트워크 및 태평양 네트워크와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갔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지역의 해양 네트워크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섬을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역시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저자가 유럽과 중국의 역사를 운하와 해운의 관점에서 비교하는 대목이었다. 중국의 수나라는 단명했지만 양쯔강과 황허 강을 연결하는 대운하공사를 2대에 걸쳐 단행했다. 이 공사가 국가의 운명을 단축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제·문화적으로 화려한 중세 황금기를 견인했다. 중국이 상이한 지역의 인적/자연 자원을 이용하는 길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거대한 땅에서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어 역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대운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은 개방된 바다에 접해있었다. 이 때문에 해당 지역의 국가들에 대한 통제가 훨씬 어렵고 그 역할도 미진했다. 이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지역을 통합하는 추진력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몰락은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중국과 매우 다른 길로 나아가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보았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유럽 주변의 전쟁처럼, 저자는 유럽 대륙은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분열된 조합 양상으로 역사가 진행’(220)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백성들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던 중국의 대운하 사업이 역사에 영향을 준 유일한 부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저자는 대운하가 경제 성장을 가속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폐쇄와 내향화를 촉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결국 중국과 유럽 문명이 각각 제국과 국민국가라는 상이한 길로 가게 된 이유를 통찰하면서 대운하를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국내 학자가 주목한 주제를 저자가 직접 짚어주고 해석하는 대목과 만나는 부분이 이 책을 읽는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이후 중국과 이슬람권의 역동적인 교류 및 교역이 아시아 해양 세계를 한동안 특징지었다고 한다. 여기에 팽창하게 되는 이슬람 문명이 가져온 세계사적 영향은 근대의 기원을 열어젖힌 대항해시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로서 인류의 역사는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한 해양 네트워크를 매개로하여,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졌다. 지구적인 해양 네트워크를 통한 팽창이 제국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예비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바다를 거치지 않은 제국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인류 역사에서 바다가 지니는 함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커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다에 초점을 맞춘 인류 역사를 문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통찰하고 있다. 오늘날의 바다를 다룬 장에서는 무엇보다 현재 인류가 마주하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환기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 및 미국과 같은 제국사이의 새로운 경쟁과 충돌 양상은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인류 역사의 어느 때보다도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우리에게 지구 환경 변화의 문제, 지구적 오염 문제보다 더 큰 위기감을 주는 문제가 있을까싶다. 이 문제의 징후가 무엇보다 바다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빙하가 영구적으로 사라져버리고, 공유 영역으로서의 바다는 플라스틱 오염원의 배출구가 되고 있다. 이 심각성을 제대로 실감하고 인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태평양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해구 바닥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일 뿐이다. 바다에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먹는 거북이나 몸 안의 소화관에 미세 플라스틱을 지니고 있는 해양 생물 역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걸까. 이제 인류는 전체의 운명이 걸린 실존적인 문제 앞에 놓여 있다. 어쩌면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바다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인간의 역사, 특히 문명이 바다로 진출한 역사는 자연과의 대결을 오롯이 보여주었다. 앞에 놓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지혜를 모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역사는 우리가 다시금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저자는 로마인들이 바다(지중해)로 나갔을 때, 바다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말했다. 인류가 직면한 환경 변화와 오염을 고려할 때, 자연 변화와 환경 오염은 특정 국가나 이들에 속한 영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는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아야 할 때다. 그러므로 지구의 바다 전체가 곧 우리의 바다가 되어야 한다. 지구에서 운명을 공유하는 지구인으로서 말이다.


 [오스트로네시아족인들의 인도양-태평양지역 확산 흐름]



이 책은 인류에게 바다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으로 시작했다. 이 물음은 태평양의 오스트로네시아족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확산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정교한 문양이 들어간 라피타(Lapita) 도자기 문화는 바다를 건너 확산되고 공유되었던 역사를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바다가 무한한 자유를 가진 공간이자 하나의 거대한 모험이 기다리는 세계였을 것이다. 바다라는 세계를 마주했던 인류는 대상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했다. 세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협력을 통해 지식을 개발하고 집단 지성을 이루어왔다. 이번 독서에서는 인류가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과감하게 도전하고 모험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구적인 해양 네트워크를 완성한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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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3 0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 초란공님 정리 넘 잘하신거 아닌가요 !!! 전 읽긴 읽었는데 정리가 안돼요 ㅠㅠ초란공님 👍

초란공 2022-03-03 20:35   좋아요 1 | URL
저도 방대한 양이라 관심가는 부분만 뽑은거지요 ^^;; 통나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워요!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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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자의 세상 읽기

: 망각에 대한 애도와 치유를 위한 밤의 시간들


- 황현산밤이 선생이다(2013) 읽고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지리를 파악할 겸 산책할 때였다. 이 지역은 낮은 언덕과 평지가 이어지는데, 언덕에는 주로 단독주택과 재개발된 소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었다. 반면 평지에는 재래시장과 주변의 대규모 뉴타운이 인접해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가다가 단독주택 지역과 아파트 단지의 경계를 이루는 도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길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파트 단지는 언덕 위로 하늘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고, 높은 담이 단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한쪽 담벼락에는 도로변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아파트 단지 내의 보도를 따라 산책해보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만을 위한 시설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엘리베이터용 키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아파트 단지 주민이 아니면 아파트 담 주위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아파트 단지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요새처럼 보였다. 이런 구조가 주변 지역과의 분리와 단절을 불러온다고 생각되었다.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들은 황현산의 칼럼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되살아났다.


 

해방 직전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저자는 신안 앞바다의 한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칼럼집은 저자의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는 이 때의 기억을 마련해준 고향 섬이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삶의 준거가 되고 있다고 밝힌다. 1986년부터 2012년까지 사반세기에 걸쳐 쓰인 글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정서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었다. 저자의 외할머니는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불을 때어 얻는 화염과 햇빛에 말려 얻는 천일염 맛을 구분했던 분으로, 화염을 넣어 만든 제대로 된 오뉘죽 맛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안방의 술을 익게 하는 귀신’, 건넛방의 메주 띄우는 귀신과 함께한 시간들은 이제 세상의 편리와 자본의 논리에 덮여 사라져 버리고 저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만 남게 되었다. 저자는 글 속에서 자신의 오랜 기억을 심심찮게, 때론 집요하게 소환해내었다.


 

저자는 무슨 까닭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이토록 안타까워하고 이들을 기억하고자 했을까? 사람은 태어나 언젠가는 세상을 뜨기 마련이고, 개인의 기억은 사라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된 이 과정에 한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 대수인가. 하지만 계속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말하는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의 기억까지 포함하는 듯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191)


 

유독 유행에 민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는 글에서 저자가 현대인의 망각에 줄곧 저항하는 이유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기억의 필요는 우리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향하고 있었다. 저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안의 여러 귀신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 맺어온 관계의 흔적이자 세상과 사랑을 나누었던 내력’(252)이었다. 우리 몸이 시간의 역사를 담고 삶을 기억하는 매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사라져버리면, 공동의 기억을 매개로 하던 사람들의 관계망 역시 콘크리트로 덮이듯 은폐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영영 잊혀 지게 된다. 우리가 관계하던 땅과 그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사라진다는 의미다. ‘요새처럼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왕래가 차단된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 내가 느꼈던 생각들과 다르지 않다. 한 지역에 거주하는 세대수는 월등히 많아졌지만,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사람이 자신의 장소와 관계 맺기를 하지 못한다면, 삶이 줄 수 있는 가능성과 상상력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화염과 천일염의 소금맛이 아니라 그저 짠맛만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달리 맞은편 주택가의 소규모 재래시장 주변에서는 꽤나 분주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요새처럼 폐쇄적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장소에 대한 기억과 상상력의 소멸을 우려한다.


 

저자는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204)고 예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가 말하는 기억은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상상력과 결부되어 있다. 이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반응하고 공감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에 각인된 기억이 사라질 경우, 저자는 우리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용산 철거 시위 사건을 두고 192인의 문인들이 공동 선언을 하고 이를 글로 쓴 일은 무엇보다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들의 선언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또 집단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동체의 공감하는 능력을 지켜내려는 다짐이기도 했을 테다.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불러온 단절, 대규모 뉴타운의 인적 없는 거리와 임대간판이 내걸린 수많은 빈 가게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은, 저자가 밝고 깨끗하고 번쩍거리는 폐허’(51)라고 언급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기억을 덮고 사람의 자리를 외면한 개발의 결과는 결국 사람이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는’(51)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징후를 읽고 글로 말하고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기억을 지닌다는 말은 삶의 깊이를 지니고 사람과 그의 삶을 존중하는 맥락’(97)을 고려한다는 의미다. 이는 그 사람이 살아온 장소와 시간의 복원을 전제한다. 인간을 획일적인 소비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무감각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이에 공감하는 상상력을 확보하여 어디에나 사람이 있음’(244)을 감지하는 일이다. ‘요새와 같은 아파트 단지는 장소와 관계 맺어온 사람들의 기억을 차단하고 사람에 대한 상상력을 빼앗아 가버린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여지, 내 안에 타인이 설 자리를 애초에 지워버린다. 따라서 시간 속에서 장소와 관계 맺어온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이다. 저자는 이를 시를 읽을 때처럼 우리가 잠시나마 비로소 사람이 되는’(245)일 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언급한 아파트 단지의 개발 방식과 뉴타운의 모습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만드는 사례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청계천 복개 과정을 이야기한다. 청계천 복개 후 정리 과정에서 개발 주체 및 관련자들은 상인들과 주민들을 불암산 자락으로 내몰았다. 이 관행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로 이어졌다. 정부와 개발 주체가 주도하여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구럼비 바위와 맺어온 기억을 파괴한 셈이다. 이는 공동체에 망각을 강요한 폭력이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눈앞의 현안으로 이를 가려버릴 때, 저자가 말하는 덮어 가리기 근대화’(111)의 모습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에서 저자가 기억을 붙들고 저항하고자 했던 이유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영원히 망각해버리고, 슬픔을 함께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심지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59)고 말이다. 인간이 삶에서 관계 맺은 모든 것들에 대해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 정체성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 혹은 잃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애도하기를 일관된 태도로 보여준다. 청계천 복개 사업이나 강정마을 미군기지 건설에서와 같이 덮어 가리기 근대화는 집단적인 망각을 초래했고, 고통과 상처를 남겨놓았다. 저자는 공동체 앞으로 다가온 망각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우리는 삶에서 늘 패배하곤 하지만, 이따금 누군가는 공동체가 떠안은 상처와 슬픔을 치유할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문학비평가인 저자는 시에 그 희망을 걸어 보기도 한다. 삶에서 얻은 좌절과 슬픔, 분노를 시를 통해 왕성한 생명력과 더불어 기억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삶의 깊이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시는 기억술’(204)이라는 말을 믿는 이유다.


 

저자가 주목한 관점 중 인상적인 것 하나는 그가 갈구하는 희망과 치유의 가능성이 밤의 시간에 속한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낮의 시간은 이성과 사회적 자아의 시간인 반면, ‘밤의 시간은 상상력과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또 밤의 시간은 낮에 발생하고 겪었던 슬픔과 상처를 문학, 특히 시를 통해 치유하고 봉합하며, 새살을 돋게 하는 소생의 시간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밤의 시간은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이기도 하겠다. 이미 150년 전에 보들레르는 잘 정비된 도시의 모습에서 기억이 사라지고 상상력이 소멸된 폐허의 모습을 어둠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했고, 괴테는 그보다 더 일찍 밤의 말이 지닌 힘을 간파했던 것 같다.


 

하늘 높이 머물러라

 사랑스러운 루나여,

 언제까지나 밤이도록 자비를 베풀어라

 낮이 우리를 쫓아내지 않도록!”  (*)


 

이 대목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요정 세이렌들이 에게 해의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을 보며 노래하는 대목이다. 이 세이렌들처럼 저자는 독자들이 각자의 은밀한 시간을 통해 기억과 상상력을 회복하고, 상처와 슬픔을 치유하며 소생해나갈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만 그가 떠나고 없는 이 세계는 어둠의 입을 통해 기억을 전하던 그리오 Griot한 명을 더 잃게 된 셈이다





(*) 출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9, 318






[1]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쓰는 사람이 된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32)
-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2009) 중에서

[2] "그 시인이 시인이기 때문에 30만원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기 때문에 30만원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어야 한다."(37)
-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2010) 중에서

[3]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50)
-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2010) 중에서

[4] "강에 댐을 쌓고 하안 공사를 하고 난 후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늙은 사공들은 대답했다."(60)
- 「기억과 장소」(2010) 중에서

[5] "어떤 비평가는 작가의 윤리와 작품의 윤리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는 윤리적으로 순결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훌륭한 작품을 썼기에 훌륭한 작가로 인정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 예는 적절치 않다. 발자크는 자기 안에서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자기 시대 비판의 창조적 열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친일 작가들의 친일 행위는 그들이 애초에 지녔던 창조적 열망까지도 메마르게 만들었다."(84)
- 「<고향의 봄> 앞에서」(2011) 중에서

[6]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 속의 복숭아 씨와 살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100)
- 「금지곡」(2010) 중에서

[7] "이 주소의 역사는 서울이 그 주변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와 관련된 서민들의 삶을 식민화한 역사와 같다."(111)
- 「덮어 가리기와 백사마을」(2011) 중, 중계동 104번지에 있던 백사마을을 언급하며

"청계천 복개는 내가 ‘덮어 가리기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의 전형적인 예이다."(111)

[8] "표절이 명백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준 대학이 학위를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학이 아닐 것이며, 그 사람이 계속 교수로 남아 있는 대학도 대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124)
- 「시대의 비천함」(2012) 중에서

[9]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이 겨울의 개는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152)
-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을 다룬 「겨울의 개」중에서

[10] "사실은 공허하게, 움직일 수 없이 거기 있기에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실주의 예술의 뛰어난 미덕이다."(163)
-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을 다룬 「찌푸린 얼굴들」중에서

[11] "사람의 마음 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191-192)
-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2002) 중에서

[12]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204)
- 「윤리는 기억이다」(2003) 중에서

[13] "오페라 <심청>의 대본을 쓴 사람(윤이상)에게 정작 그 착상을 도와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220)
-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2003) 중에서

[14]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244)
-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2004) 중에서

[15] "이 신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우리와 함께 그 영검이 깊어졌으며, 또한 우리 운명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우리와 숨결을 교환하고 냄새를 교환했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의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 맺어온 관계의 흔적들이며, 세상과 사랑을 나누는 내력들이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기억의 시간들이었다."(252)
- 「귀신들 이야기」(200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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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1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님 글 정말 좋아요. 기억에 대한 작가님 글들 공감합니다. 초란공님 정성 가득한 서평도 👍

초란공 2022-03-01 21:06   좋아요 1 | URL
항상 관심갖고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사진의 뿌리를 찾아서


- 박주석의한국사진사출간기념전시를 다녀와서

 


작년(2021)에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한국사진사를 기념하여 마련된 전시 ()에서 ()으로에 다녀왔다. 전시장에는 한국사진을 개척했던 사진가 22명의 사진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번 사진들은 한국사진사 연구를 처음 개척했던 고 최인진 선생(1941-2016)이 수집한 800여 점의 프린트에 이번에 출간된 한국사진사의 저자 박주석 교수(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 대학원 교수)가 수집한 700여 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프린트를 더한 컬렉션에서 선별한 사진 전시다. 오늘 페이퍼는 도서 소개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실제로 보기 힘든 사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전시에 다녀온 후기를 겸해서 작성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의 강남에 있는 전시관 <언주라운드>에서 진행중인 전시는 이달 26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후 광주에 있는 <갤러리 혜윰>(03.05-03.25)과 대구의 <아트스페이스 루모스>(04.02-05.01)에서 전시된 다음, 해외 순회전시가 기획되어 있다. 전시장 담당 큐레이터분이 직접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 일부는 미국 순회전시에 포함되어 있어서 당분간(2년 정도)은 국내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진사에 소개된 사진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지만, 이번에 전시되는 작가들의 빈티지 프린트, 오리지널 프린트는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귀한 사진들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시기를.


 

(전시회()에서 ()으로포스터(왼쪽)와 2021년에 출간된한국사진사표지(오른쪽))


 

책의 저자인 박주석 교수는 연구자로서 사진은 이미 포토그라피()를 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진()의 문제이다.”라고 바라보며, 그러므로 오늘날의 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사진을 감상하면서 이 두 글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내게 ()’의 문제는 기술적인 조건과 형식이 답하는 문제다. 카메라, 렌즈, 기본적인 원리 혹은 시대성 등등을 포함한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의 문제는 ()’의 문제와 모종의 연관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도 보다 비가시적이고 주관적인 조건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사진가의 해석과 관점, 의도와 같은 것들이다. 사진가의 의도는 기술적으로 ()’를 구현하기 위한 선택에 개입한다고 볼 수 있겠다. 각종 특수인화 기법들과 사진가의 의도에 따른 도구의 선택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의도에는 인화지의 유형과 종류, 프린트 방식과 크기 등의 선택 과정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 ()’의 문제에는 무엇보다 사진가의 철학이 담긴 해석과 의도가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국내에서 이른바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사진 활동 기록은 1928년 정도부터 라고 한다. ‘조선포토싸롱이라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 대회가 생겨난 것이 이 때부터이며, 이 때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사진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진가 문치장의 이력처럼 1920년에 조선 총독부 사진과 조수로 일본인들에게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정황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들이 사진술을 습득한 후 20년대 후반부터 보다 활발하고 능숙하게 사진 활동을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사진 전시에 선보인 사진들도 1929년에 촬영된 정해창의 사진으로 전시회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사진가다. 작가 소개 정보란을 보니 일본 유학 시절 독일어를 공부하고, 서양화를 배웠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화학과 피그먼트 인화법을 연구하며 사진가의 길로 들었다고 한다그림을 공부한 사진가라서 그런지 정해창의 사진에는 전통적인 회화의 특징적인 구도와 양식이 반영된 근대 사진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사진이 회화와 구별되는 지점을 치열하게 고민했을 사진 선구자의 방황과 열정이 느껴진다. 특히 정해창의 사진 몇 점은 사진가 구본창이 재인화 작업을 하여 선보인 작업들이다. 아마도 유리 건판으로 작업했을 정해창의 사진 인화물이 이제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당시에 작업했던 인화물(주로 RC인화지로 작업)이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아서일 것이다.(인화지 관련 정보는 아래 추가 설명 참조)




(정해창, 여인의 초상(1929), 왼쪽/ 인형과 오브제(1934), 오른쪽, 두 사진 모두 구본창 인화)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한국 사진의 역사가 비록 일제 강점기에 태동했지만 세계 사진사의 역사에서 크게 뒤쳐져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한 한국 사진의 역사는 1938년 정도 까지는 국내의 사진 동호회(구락부) 활동이 꽤나 활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부터는 국내 사진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사진가가 동아일보의 사진과정으로 있었던 신낙균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전시회 포스터로 사용된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을 비롯하여 세련미가 느껴지는 자화상 사진 세 점이 선보이고 있다. 전시회 소개자료의 작가 소개 정보를 참조하면, 신낙균은 무엇보다 국내 최초의 사진학자이자 근대 사진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교육자였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1927년에 한국인 최초로 일본 동경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졸업하고, YMCA의 사진과 교수로 처음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신낙균의 자화상(1927), 왼쪽 / 임응식, ‘구직(求職)’(1954), 오른쪽)


 

한국의 사진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일제의 영향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것은 1942년에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가 전시에 사진 찍는 일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한국사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마추어를 포함한 사진활동은 한 번 이상의 소강상태를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 계기가 태평양 전쟁이었겠고, 두 번째는 물론 한국전쟁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40년대 사진 몇 점이 보이지만, 뚜렷한 개성을 지닌 리얼리즘 사진은 한국전쟁 전후에 두드러지는 것 같다. 전시회 소개 자료에는 생활주의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진가 임응식을 언급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구직(求職)>(1954) 사진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선보이지 않았지만 이 리얼리즘사진의 맥을 있는 사진가로는 사진가 정범태와 최민식으로 맥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사진 전공한 친구는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애(humanity)가 잘 느껴지는 정범태 작가의 사진도 볼 수 있었으면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선정되지 않았나보다.


 

개인적으로는 사진가 이형록의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는데, 책이나 전시회에서 보면 금방 어떤 사진의 유형인지 알 수 있겠다. 그의 사진은 앞서 언급한 임응식이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삶을 주제로 작업한 임석제리얼리즘사진들과는 조금 다르게 조형성이 강조된 사진들이었다. 내 취향에 가장 가까웠던 이형록의 사진은 아침 시장의 모습을 담은 작품(1955)이다. 어렸을 적에 전통시장 근처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 사진을 봤을 때 털털거리며 연기를 내뿜으며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이 떠올랐다. 또 비가 오지 않아도 언제나 뜯어낸 무나 배추 잎이 섞여 질퍽한 진흙탕이었던 시장 바닥이 생각났다. 인물의 검은 실루엣이 프레임을 양분하며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손잡이 달린 양동이(대개는 불을 떼기 위해 양동이 주변으로 구멍을 뚫는다)를 흔들어 불을 붙이는 듯한 장면이 포착되어 있는 사진이다. 질퍽하고 싸한 재래 시장의 아침에 불을 제대로 붙이려고 흔드는 사내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흰 색 연기의 대비가 강렬한 사진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렇게 조형성이 강조된 사진을 좋아하는 것 같다(예전엔 그다지 생각을 안했는데 말이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 중에서 조형성에 주목한 사진가는 이상규, 김행오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이형록 시장의 아침’(1957), 왼쪽/ ‘어촌’(1958), 오른쪽)


 

이형록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그가 앞서 언급한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 임응식1935년에 강릉 우체국 직원으로 부임했을 때 서로 알게 되어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일화다. 한국 사진의 선구자들이 서로 만나 각각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한 명은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을, 다른 한 명은 조형주의 사진을 개척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이형록의 전시회 사진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그의 섬세한 조형 감각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아침 시장사진 외에 머리에 물건을 이고, 포대기에 아이를 엎고 배가 엎어진 모래사장을 지나가는 사진(1958)이나 공사 현장의 노동자들을 찍은 사진(1955)이 보여주는 조형 및 균형 감각은 매우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조형성과 비견되는 사진들이라 생각한다. 그의 사진이 궁금한 분들은 책이나 이번 전시회 사진들을 참고해보시기 바란다.



 

 (현일영 손목시계’, 왼쪽/ 박필호 무제(손 위의 시계)’(1937), 오른쪽)


 

전시회 안내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사진 중 사진가 현일영의 사진들이 또 다른 사진들과 맥이 다른 것 같아 흥미롭게 주목해본다. 자료에는 작가주의 사진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현일영의 사진에는 간결한 오브제를 주시하며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져오는 사진들인 것으로 보인다. 손에 찬 손목시계,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달력, 타고 남은 담뱃재가 쌓인 재떨이, 부식되는 사과와 같은 대상들을 응시한 사진들이다. 앞서 언급한 이형록의 사진들처럼 외부세계를 향해 관찰하며 조형성을 가미하는 시선과는 분명히 다르다. 현일영의 사진들은 사진가의 시선이 사물을 응시하지만 결국은 반사되어 사진가의 내부로, 그리고 이어서 관람자인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사진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선은 분명히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 사진가가 관찰하고 응시하는 대상에서 결국은 나의 기억과 감성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사진적인 사진이라고 말하곤 하는 그런 사진들이다. 현일영의 사진과 맥을 같이 하는 사진으로는 손바닥 위의 회중시계를 찍은 사진가 박필호의 사진을 꼽을 수 있겠다. 현일영손목시계사진과 비슷한 형태의 오브제를 찍었다는 점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자 기호로서 오브제를 이용하는 점,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형록의 사진들과는 분명히 다른 맥락을 이루지만 현일영의 사진들은 오히려 더 현대적인 감각을 일깨워 준다. 사물에 사진가의 내면을 비추고 있기에 오히려 한편의 짧은 시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이형록의 사진들은 외부 세계를 응시하면서 기록하기에 소설 속의 이야기(서사) 한 장면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문치장 설빔 차림의 아이들’(1937), 왼쪽, 전시장 입구의 안내문, 오른쪽)

 


현일영의 사진 옆에 이어지는 사진 중에 또 나의 눈길을 끌었던 사진은 1933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이었다. 동아일보의 사진기자였던 문치장이 프레임의 한쪽 끝에 보이는 복엽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날았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 중에는 서울 상공에서 찍은 항공사진이 있다. 사진의 한쪽 프레임으로 보이는 복엽기의 날개 사이로 동아일보 사옥이 촬영되었다. 전시장에는 대형 카메라를 조작하는 사진가의 자화상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미 30년대에 다양한 시각을 검토하고 실험하고자 했던 시도들, 그리고 기술적 조건들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위에 제시한 사진은 항공사진이 아닌 그의 설빔 입은 아이들’(1937) 사진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나라의 유적 앞에 나있는 거리 한 가운데에서, 설빔을 입은 모습을 찍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사진가가 느꼈을 법한 감정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은 그렇게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배운 것이 있다면, 전시 소개 자료에 나온 사진 비평가 박평종의 도움글이다. 그는 빈티지 프린트로 보는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글에서 빈티지 프린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짚어준다. 우리가 흔히 빈티지 감성’, ‘빈티지 효과라는 상투어에서 많이 보듯이 낡고 오래된 무언가를 연상하게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서 빈티지 프린트라고 하면 필름 원본(혹은 유리 건판)이 사라진 유일무이한 인화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매번 인화할 때마다 같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지만, 더 이상 인화물을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평종이 언급한 것처럼 빈티지 프린트는 희소성이 높고 컬렉터들이 주목하고 있기에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더하여 비평가는 빈치지의 비교 불가능한 가치와 의미를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빈티지 프린트가 생산되었던 당대의 정확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것. 바로 빈티지 프린트가 갖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는 시대와 관계 맺고 있던 작가의 개입, 이를 테면 사진가가 네거티브 원판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해석이라면 보다 구체적으로 앞서 언급한 인화지들의 종류, 작품의 크기(혹은 카메라 판형), 프린트 방식과 기법 등에 관해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선택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빈티지 프린트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에는 네거티브 원본만 있으면 되기에 인화물에 대한 관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또 보관성이 좋은 FB인화지보다 보다 일찍 변색이 되곤 하는 RC인화지에 작업을 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의의는 한국사진사의 출간 기념 전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박평종의 말을 빌리면, 고 최인진 선생과 박주석 교수가 그동안 수집, 정리, 보존해온 빈티지 사진들을 통해 한국사진의 역사를 복원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중 일부는 꾸준히 작업하고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글을 써온 사진가 구본창, 주명덕이 다시 작업한 인화물(정해창, 현일영의 사진들)이 있어, 빈티지 사진과 한국 사진사 정리와 보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말에 이르는 초기 한국 사진의 선구자들의 활동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피식민지의 땅에서 태어나 당당히 일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체계적으로 사진을 배우고 다양한 생각과 시도를 구현해보고자 했다. 이들은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지식인들이었다. 아울러 지금의 시선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형식들이 이들의 손에서 시도되었고 실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지 편리해진 디지털 카메라로 이들 선구자들이 고민하고 시도했던 작업들을 반복해보는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장비에 접근성이 높아진 지금과 달리 100년 전의 한국 사진은 진지한 지식인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예술분야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나는 서양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함을 배운다. 그런 다음에야 후학들은 선구자들이 고민과 실험을 통해 내놓은 결과를 기반으로 더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 읽은 불문학자이자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 한 대목이 여기에 어울릴 듯하다.


 

아직도 나는 그 섬의 이런저런 해안 자락을, 이 마을 저 마을의 고샅들을, 동내에 함께 살던 어른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의 모든 표준이 여전히 그 섬에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섬으로 세상을 잰다.


(밤이 선생이다중에 실린 글 고향의 잣대(2001), 난다, 2013, 292)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을 신안군에 속한 작은 섬에서 보냈던 황현산은 어린 시절 몸에 각인된 세계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잣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말마따나 지난 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포스트모던의 담론이 기존의 잣대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럼에도우리에게는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나름의 잣대는 필요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국제 외교나 통상에서 그때그때마다 현행의 잣대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 같은 처지의 국가들은 늘 한 걸음 뒤지게 마련이다. 그 잣대의 향방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파악하고 그 고향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구미 제국을 공부할 때, 그 고대와 중세를 더듬어 그 잔뿌리까지 남김없이 캐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겠다.”(294)

 


따라서 우리 사진의 역사에서도 캐내야 하는 대상은 서구의 역사와 문물만이 아니다. ‘내 안의 타자인 우리 선구자들의 기억과 이들이 남긴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존하며 그들의 작업을 면밀히 파악하는 일이 곧 잔뿌리가지 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사진사을 또 하나의 토대삼아 한국 사진의 작은 역사를 우리 것으로 이어가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덧붙임] 인화지에 대한 추가 설명

1920-30년대 당시의 인화물은 섬유 재질로 된 화이버 베이스(FB) 인화지보다는 감광성 수지를 입힌 RC(Rasin-Coated) 인화지에 주로 인화했기 때문일 텐데, RC인화지가 작업에 좀 더 편리하고 가격이 저렴한 반면, 계조나 암부 묘사 등의 표현력에 있어서 FB인화지보다 떨어지고 보관성이 떨어진다. 반면 FB 인화지는 작업이 좀 더 까다롭고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표현력이 좋고 무엇보다 보관만 잘 하면 100년 이상은 거뜬히 갈 수 있는 보관성이 좋은 인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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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23 14: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설빔 차림의 아이들 사진을 초란공님 설명 읽으면서 보니 달라 보이네요 ㅠㅠ 신낙균의 자화상은 지금 시대에 봐도 카리스마있고 멋집니다. 시장의 아침도 좋고. 초란공님 설명과 함께 사진보니 전시회에 온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초란공 2022-02-23 18:37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쵤영년도를 보면서 저런 시도는 가능했을까 싶더라구요. 자화상은 세련된 것 같아요. 근데 이게 20년대 사진이라니 놀랍구요.

프레이야 2022-02-23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반짝! 초란공 님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전시 기간과 공간이 세 가지군요.
그 중 한 곳은 가볼 수 있기를 기약해 봅니다.
아무래도 대구가 될 것 같습니다. 국내 첫 공개 빈티지 오리지널 프린트도 궁금하고요.
황현산 선생의 인용문도 의미 있습니다.

초란공 2022-02-23 18:46   좋아요 3 | URL
네~ 기회되면 꼭 가보세요.~ 저는 전시장 사진을 찍는다는걸 깜빡했는데 다른 전시장 모습도 궁금하네요~

얄라알라 2022-02-23 2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초란공님, 지난 Lucy 리뷰에서도 마지막 단락에서, 소설속 사진집 작가를 콕 집어 추정해내시는 걸 보고, 사진에 애정이 깊으시구나 했는데
전시회 다녀오셔서 이렇게 기억하시고 쓰실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감탄하고 갑니다

최승희님의 춤을 컷컷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타임머신 탈 수 있다면 최승희의 무대를 보고 싶어요^^

초란공 2022-02-24 22:46   좋아요 2 | URL
사진에 관심있는 분이 많이 계신 것 같아 기억을 짜내서 후기를 남겨봤습니다. ^^;; 그리고 공개된 사진은 많지 않지만 정말 귀한 사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인것 같아서요. 한 70년 전의 모습이라는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정말 영상으로 무대를 보면 어땠을까 싶네요.
 
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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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Lucy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

 



피식민지 출신 소녀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과정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고 대개 감탄하곤 한다. 혹은 풍경 속의 현장에 직접 가보고 싶다거나 그 장소의 이력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것 은 아니었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 루시 Lucy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도시에서 사는 백인 중산층 부부와 이들의 아이를 돌보는 흑인 소녀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창밖에 갈아엎은 밭이 펼쳐진 풍경을 보고 백인 여성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풍경이라고 말한다. 반면 흑인 소녀는 저 일을 내가 안 해도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소설 전반부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동일한 풍경, 혹은 이를 담은 사진을 보고 사람마다 크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설 루시 Lucy는 저자 킨케이드의 자전적 이야기다. 저자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 식민지였던 앤티가섬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 뉴욕 주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 입주 보모(오페어)로 일을 시작했다. 화자는 저자의 분신이었다. 화자의 생년월일이 저자와 동일하게 설정되기도 했다. 킨케이드가 대학에서 잠시 사진을 공부했던 것처럼 화자 루시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설은 길지 않은장편소설이지만 꽤나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가 뒤섞여 있다. 식민주의, 여성으로서의 삶과 페미니즘, 가부장제도, 인종주의와 같이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틀과 맥락이 밀도 있게 담겨 있다. 인종주의적인 측면은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지만, 인종 문제는 소설 속 인물의 배경이 되는 전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사실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식민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고통


앞서 언급한 흑인 소녀의 이름은 루시 조지핀 포터다. 루시는 자신의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 식민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앤티가섬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68년 즈음에도 여전히 영국에 속해 있었다. 1981년에서야 독립했던 이 섬은 공식적으로 무려 349년 동안 식민지였다. 루시의 성 포터는 예외 없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던 조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식민지 현실에서 노예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던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시의 할머니는 사라져버린 원주민의 후손이었다. 3대에 걸친 여성의 피 속에 식민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흘렀다. 실제로 킨케이드는 루시 Lucy의 전편 격인 자전적 소설 애니 Annie John를 출간한 해에 딸을 낳았는데, 딸의 이름 역시 애니로 지은 바 있다. 현실의 삶에서도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식민주의의 역사가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작가의 삶이 맺는 관계는 마치 거울에 비친 대칭 이미지처럼 여겨진다. 작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잊지 않기를 무엇보다 바랐던 것 같다.


식민지 모국에서 살아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삶은 내게 익숙한 삶을 너머 훨씬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오랜 시간 피지배자로 살았던 환경에서 개개인이 그 영향력을 떨쳐내기란 역부족이다. 루시와 엄마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나는 엄마와 닮지 않았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해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루시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겪던 두통을 마찬가지로 앓는다. 백인 주인 머라이어의 손을 보고도 엄마를 떠올리는 루시는 자신이 곧 엄마임을 깨닫는다. 멀리 도망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네 엄마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내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고, 넌 아홉 달 동안 내 뱃속에 있었으니까.”(74)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다. 엄마가 자신과 다르게 세 남동생을 대했을 때, 엄마에 대한 증오가 두드러졌다. 점령국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간 피식민지 여성이 가부장제도를 내면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시의 가슴에 칼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난 사회적 지위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내겐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다.”(108) 소설 전반에서 루시가 줄곧 보여주었던 정서가 아닐까한다. 루시에게는 엄마처럼 미운 사람이 없었고, 또 엄마처럼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딸 사이의 애증관계다. 루시는 언제나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는 백인 여성 머라이어의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머라이어의 손이 엄마와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보낸 편지는 읽지도 않고 치워버렸다. 하지만 갑자기 아빠가 돈 한 푼 남겨 놓지 않고 세상을 뜬 다음 큰 빚까지 남겨둔 것을 알게 되자, 루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엄마한테 보냈다. 아들이 할 법한 행동과는 사뭇 다른 엄마-딸 사이의 모습이다.


피식민지인에게 가해진 억압과 왜곡된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 때문이었을까. 루시의 대인관계, 특히 남녀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육체적 관계에는 탐닉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기대되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돈을 전부 준 다음 엄마와 손절했던 루시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고 싶어 했다. 이게 자신이 늘 원했던 삶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 루시는 자유를 얻었지만 사랑이 빠진 대인관계에서 행복감과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그녀의 대인관계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제가 남긴 상처의 결과였다. 루시에게는 곁에서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도 상처를 돌볼 기회도 놓쳤다. 사랑 없는 공허한 관계에 탐닉했던 것은 더 이상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기만의 키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루시만 고통 받았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의 부모,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결혼 생활 역시 파탄을 향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애정 표현을 과시했다. 루시는 루이스의 행동이 그저 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게다가 루이스는 가족이 별장에 머물 때, 텃밭을 망친다는 이유로 토끼를 쏘아 죽였다. 이 모습은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했던 식민지 모국의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백인 가족이 토끼를 위해 치러주는 장례 의식을 보면서 루시는 이것이 이들의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라고 여겼다. 이처럼 소설은 백인 중산층 가정의 기만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화자의 눈으로 고발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폐허라는 사실”(72)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 - 분노와 절망, 거짓을 걷어내는 의식


대인 관계는 언제나 삐걱거리고, 매사에 불만과 분노를 드러내던 루시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 가기와 책읽기였다. 머라이어는 박물관에서 본 어떤 사진을 좋아했던 루시에게 사진집 한 권을 선물했다. 사진집을 보면서 루시는 지인들을 떠올렸는데, 특히 한 소년에 대해 말했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 모습’(93)을 담은 사진이었다. 틈나는 대로 사진집을 보던 루시는 자신도 사진기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킨케이드가 사진학과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처럼, 루시도 사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여 들여다보곤 했다. 여러 면에서 루시는 작가의 분신이었다.


소설 속의 화자가 사진을 찍고 결과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진 활동은 앞서 언급했던 식민주의적 질서에 영향을 받은 인간들의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다시 말해 허위와 허영, 기만적인 삶에 얽힌 대인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관찰할 기회를 준 것이다. 또 그녀가 회피하고 가슴 깊이 묻어 둔 상처들을 돌아보게 했다. 사진 찍는 이유를 알지는 못해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그녀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루시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 익명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자유로움과 더불어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기다린 건 공허함뿐이었다. 반면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응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더라도 말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애도하는 과정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타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사진의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머라이어의 집에서 나와 독립한 루시는 이제 자신만의 방에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사진기는 렌즈 앞에 있는 대상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결과물은 사진가와 피사체를 기록하며 이들의 현존을 증명했다. 반면 루시는 사진 자체가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음을 간파했다. 자신이 인화한 사진을 보면서,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97)라고 묻기 때문이다. 루시의 궁금증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사진을 보는 감상자의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 사진의 진실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실과 사진에 보이는 진실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직관했던 것. 그녀는 바로 이 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사진은 이를 읽고 말하는 자에 따라서 언제든 우리를 기만할 수도, 혹은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점을 이해한 루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로 사진을 활용한다. 촬영자와 감상자가 동일하기에 오히려 현실에 덧씌워진 기만과 허영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고,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지나가버리는 현실과 달리 사진 속의 현실은 자신의 기억,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며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은 상처를 숨긴 채, 사람들 앞에서 삐뚤어지고 모순된 행동을 보였던 자신과 마주하게 해주었고, 자신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이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머라이어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샀던 가죽 장정 공책을 루시에게 선물한다. 침대에 누워 있던 루시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공책에 쓴 다음 이 문장을 썼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130) 이어서 루시는 수치스러움이 몰려와 오열한다. 사랑과 신뢰가 깃든 대인관계에 실패했던 것은 또 다시 상처입기 싫었기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사진을 찍고 이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식민주의의 영향과 여성의 굴레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또 자신을 가리고 있던 기만적이고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게 해주었다. 이 과정은 자신과 만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루시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가능성과 사랑이 깃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덧붙임]


루시는 머라이어가 선물해준 사진집 한 권을 보고 사진기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진집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으로 생각된다. “한 소년의 사진이 특히 그랬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였다.”(93)라는 대목을 근거로 한다면 말이다. 이 사진은 브레송이 1952년에 파리에서 찍은 흑백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배경인 1968년과도 시간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c) Henri Cartier-Bresson, Paris, 1952



[1] "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매맞는 여자아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눈에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베이는 여자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어째서 내 인생에는 선택지가 고작 그 둘뿐이지?" (22)

[2]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문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29)
- 활짝 핀 수선화가 무리지어 넘실대는 수풀을 보고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은 비통함과 원한만을 느끼는 모습.

[3]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했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하지 않았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49)

"머라이어를 보면 볼수록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면모가 점점 더 많이 떠올랐다. 손이 엄마 손과 똑 닮았다." (50)


[4] "꽤 어렸을 때였는데도 난 잘사는(그러니까 분명 행복한) 사람들은 다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뚜렷한 네 계절로 나뉘는 지역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70)

[5] "그리고 틀림없이 난 여자였다. (...) 엄마처럼 되기 싫다는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되뇌며 살았던지 그러다가 사정의 전말을 놓치고 말았다. 난 엄마처럼 되지 않았다. - 난 그냥 엄마였다." (74)


[6]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었으니까." (78)

"요즘 깨닫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을 하든 정확한 방식을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찻잔을 쥐는 법이나 포크로 찍은 음식을 옷 앞자락에 흘리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는 법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 대부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고, 미칠 일도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할 일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0)

[7]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 아직 그 대답은 알 수 없었다." (97)

[8]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누구든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지." (103)
- 폴이 차를 몰면서 대양을 건넜던 위대한 탐험가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하자 로드킬당한 동물을 보면서 루시가 대꾸한 말.

[9] "난 내가 그 섬에 존재하게 된 기원이, 내 조상의 역사가 사악한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9)
-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시킨 역사를 가리킨다.

[10] "포터라는 성은 틀림없이 우리 조상이 노예였을 때 그 주인이었던 영국인의 성일 것이다." (120)
- 실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어머니 이름도 로더릭 포터다.

[11] "악마 이름을 붙인거야. 루시는 루시퍼를 줄인거지. 하여튼 내 뱃속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얼마나 성가셨던지." (121)
- 자신의 이름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되어 오히려 실패자라는 기분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한 기분을 느끼는 루시.

[12]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130)
- 루시가 선물로 받은 공책에 썼던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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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7 22: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물을 렌즈 안에 담는 시선은 글을 쓰는 것으로 이어지겠죠?!
여성은 항상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안게 되네요.

초란공 2022-02-17 22:27   좋아요 4 | URL
킨케이드 여사가 바로 그 증거이겠죠? 얇은 소설인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만큼 생각거리가 많은 소설 같아요. 저도 계속 배우고 있고요.

mini74 2022-02-17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루시의 사진들이 궁금하네요. 무엇을 담았을지. 사진과 글쓰기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 초란공님 글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2-17 23:01   좋아요 3 | URL
저도 새롭게 알아가고 있네요~ 글쓰기와 사진... mini74님이 좋아하시는 그림도 그렇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scott 2022-02-17 2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루시에 급 관심이!
마지막 사진 속 주인공 꼬마!

반세기 후에 브레송 미망인과 만났습니다. ^ㅅ^

초란공 2022-02-19 18:00   좋아요 2 | URL
브레송 미망인과 만난 이야기가 더 솔깃하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새파랑 2022-02-18 07: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피식민지인에다가 여성이라는 것까지 저자는 힘들게 살았을거 같아요.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생생할거 같은 이야기인거 같아요~!!

초란공 2022-02-19 18:02   좋아요 4 | URL
본문 중간에 힘들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얇은 책인데 묵직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소설인 듯합니다.

얄라알라 2022-02-19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끼를 쏘아 죽이고 장례식을 치르는 백인 가족에게서 허위의식을 느끼다니,
얇은 책이라 하셨는데 행간이 넓은 책이겠어요.

˝포터˝ 이름이 식민지적 잔재라면 Porter겠구나 했습니다. 좋은 소설, 특히 루시처럼 자서전적 소설은 좁은 시야를 넓혀주는 데 정말 유용한 것 같아요.

루시가 가부장적 남아선호(?)를 한 어머니에게 분노하면서도 돈을 몽땅 보낼 수 있던 마음이 뭔지, 왜 공책을 적다가 오열했는데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란공 2022-02-19 18:06   좋아요 3 | URL
리뷰쓰느라 다시 들여다보는데 그 기분이 좀 더 느껴졌달까요. 모녀 간의 이런 애증관계는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 곳 어디에나 공통적일 수 있겠다 싶어요.

2022-02-19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77주기, 우리에겐 부끄러움이 남아 있나

-안소영의 장편소설시인/동주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오늘이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라고 한다. 시인은 차가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216일 눈을 감았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안소영 작가의 시인/동주를 들춰보다가 식민지의 땅에서 스물여덟 해를 살다간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발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태어난 곳(중국 길림성 용정)과 눈을 감은 곳(일본의 형무소)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를 떠올리면 무심한 이런 사실에도 안타까움이 더한다.

 


시인/동주를 읽게 된 것은 저자의 다른 역사소설 책만 보는 바보(2005)를 읽고부터였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여 간서치라는 별명을 스스로 짓고 또 그렇게 불리었던 이덕무. 그의 삶 또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하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사람과 자연을 부단히 사랑하고 긍정했던 그는 현실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서자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을 얻을 기회도 없었다. 추운 겨울날 구멍 뚫린 창과 문으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소장하던 논어로 이불을 삼고, 한서로 바람을 막았다 했다. 후대 사람이 이덕무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 일화는 일견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냈던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고된 시련이었을 테다. 안소영 작가는 이렇듯 바람 부는 날 심지를 꼭 붙들고 있는 촛불처럼, 엄혹한 세계에서 삶을 견디어 내던 인물들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더 갔던 모양이다. 시인/동주중에서 시인이 습작기에 썼던 초 한 대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어 다시 눈으로 읽어 보았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초 한 대(1934)에서 재인용함, 79)

 


시인 곁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한데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했던 동갑내기 친구 송몽규가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송몽규가 임시 정부 군관 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난 후, 윤동주가 썼던 시라고 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친구의 앞날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열일곱 번 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이 시에는 혼자 남은 시인의 감상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국사 시간에 들은 기억으로 1930년대면 일제의 수탈정책이 더욱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습작시를 썼던 소년 윤동주도 현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쳐내야할 세력이 바로 눈앞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10년에 출생해서 1937년에 요절한 시인 이상 역시 나라가 사라져버린 땅에서 태어나 살았던 인물이다. 책 속의 여러 정보와 상황은 시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상상만으로 그의 삶을 파악했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서 중 흔히 이야기 되는 것이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나라는 사라져버렸고, 친구 몽규는 보장된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독립군이 되는 길을 떠났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피지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혜택을 받았던 지식인으로서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할까를 자문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았을 그는 내게 거울 앞의 시인으로 보였다. 참회록(1942)이란 제목의 시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앞에 선 화자가 등장한다. 밤마다 녹슨 거울을 닦아보아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만 비친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까. 막막하고 외로운데다, 답답한 현실이 시야를 가린다. 또 일본 유학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쉽게 씌어진 시. 일본식 육첩방 집에 앉아 있던 비오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져도 되는지 자문하며 또 부끄러움을 느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쉽게 씌어진 시(1942)에서 재인용함, 229)


사전에서 부끄러움과 관련한 단어를 무심코 찾아보니 여러 연관어가 나온다. 자괴감, 자괴지심, 수치심, 망신, 모욕, 수줍음, ‘볼 낯이 없다’, ‘떳떳하지 못하다등등. 윤동주 시인이 간직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보다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있을까 궁금했다. 우선 나는 시인의 시대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그토록 싫어하고 멀리하던 시/문학을 성인이 되어 찾아 읽게 된 경위가 새삼 궁금해진다. 물론 무엇보다 책을 읽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시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을 조금씩 접하면서 점점 시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점점 많이 접하고 있다. 내게 문학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은 우선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문학 고유의 자리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 앎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성경 속의 표현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러한 내용들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전제하기 때문에, 문학은 분명 역사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 한 명 한 명은 타인들과 이루는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문학을 생산한 사람은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미래의 인간과 조우한다. 내가 작품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윤동주 시인의 심정을 복원할 수는 없어도, 시에 드러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설과 시를 생산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과정에서 많이 다를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상당부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문학과 다른 분야와의 뚜렷한 차이점일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정서와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다가 문학비평가 황현산의 산문 한 편이 생각났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칼럼 한 편이다. 2009년에 있었던 용산 철거 현장의 참사를 보고 남긴 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는 시위자 다섯 명과 경찰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이 철거를 지시한 사람들이나 이 문제의 해법을 지닌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음에 놀라고 이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문제의 진원지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멀어지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황현산이 이 칼럼에서 재인용한 시인 진은영의 용산 멜랑콜리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3, 진은영의 시 용산 멜랑콜리아를 재인용함.)


 

황현산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정작 비극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현대인들에게 닥친 실존적인 위기가 바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의 소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일본식 이름을 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청년 시인의 마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슬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면, 인간을 고립과 소외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될 것이다. 인간 소외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린 결과라 하겠다. 타인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 말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될 테다. 문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상상력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 능력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게 시적 상상력은 인간이란 종의 생존에 결정적인 징후가 된다.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를 맞아 소설 시인/동주을 펼쳐 인용된 시인의 시들을 모처럼 따라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시의 정서를 떠올리다가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까지 다시 찾아보았다. 몇 년 전에 이 책들을 읽을 때는 문학/시적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이제는 왜 시인이 용산 참사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황현산 선생은 친절하게 그 이유도 일러주었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2)

 


이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 아닌가. 그리고 고통 받았던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기반이 아닐까. 이 칼럼이 발표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적어도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을 느꼈던 80년 전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살림살이)은 나아진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렇게 적고 보니 이제 시를 읽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와 지향을 보여주는지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시를 읽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부끄러움의 연대를 이루어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처럼 시를 쓰지 못해도 말이다



또 시를 읽는 행위는 이 부끄러움의 연대를 기반으로 집단 혹은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의 기쁨과 긍지뿐만 아니라, 집단의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덮어버리고 잊어버릴 때, 인간은 서로를 고립시키고, 서로를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만날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인간과 기계는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 읽기란 개개인이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저항행위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여전히 부끄러움이 남아있는지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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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1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영화 <동주>라도 볼 걸 그랬습니다.
왜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하루 지나 여기서 보다니.
부끄럽네요.ㅠ

초란공 2022-02-17 21:21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영화 제목이 생각이 안났어요. ㅜㅜ
아마 70주기 80주기에는 행사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