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알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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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알렙] (2026)

 



지난달 강원도 영월의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이 재개장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1980년대 중국의 저가 텅스텐 공급으로 경쟁력을 잃으면서 상동광산은 1994년에 문을 닫았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었다. 현재 광산의 소유권은 캐나다의 광산기업 알몬티 인더스트리스가 지분 100%를 쥐고 있다고 한다. 광산이 문을 닫은 시기, 그 빈자리에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추정 경제적 가치 약 60조 원에 이를 자원의 광업권을 온전히 외국 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우루과이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의 역작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을 느릿느릿 읽는 동안 강원에 있는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를 종종 떠올렸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가 지난 500년 동안 겪은 식민주의적 수탈의 역사를 담아 1971년에 출간되었다. 갈레아노는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청소년기에 자동차 수리공, 외상 수금원, 간판화가, 경리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노동의 현장을 직접 겪었던 언론인이자 작가였다. 이런 삶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그는 방대한 역사 자료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 책에서 해부해 놓았다. 이 책이 지닌 폭발력은 군부독재 시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컸다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지닌 주제의 무거움을 조금 덜어준 것은 표지와 본문의 삽화였다. 게다가 앞뒤 표지 안쪽에도 그림이 있는 책은 드문데,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의도되었던 이런 작은 마음과 상상력을 만나는 일은 그 반가움이 배가 되곤 한다. 표지 안쪽에 있는 삽화는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를 떠난 모습()인듯하다. 표지 뒤쪽의 삽화는 두 개의 십자가와 갈라진 땅 밖으로 올라온 한쪽 팔이 그려져 있는데, 원주민의 무덤처럼 보이는 장면은 유럽에서 온정복자가 라틴 아메리카에 출현한 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에는 배를 타고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모두 죽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출간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견지한 논지는 간결하지만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의 관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낙후성저개발이 자연적 후진성이 아니라, 무려 500년에 걸친 체계적 수탈의 결과라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저자의 입장은 지극히 명료하고 비판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삽화가의 경력을 지닌 언론인다운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정복자들이 규정해 온 표현)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에서 선택된 언어가 낯설었지만 이내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16세기 스페인·포르투갈의 라틴 아메리카 정복 이후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주의적 수탈의 연속성을 추적하며, 풍요로웠던 땅이 어떻게 빈곤과 죽음의 땅이 되었는지 집요하고 치밀하게 서술해 나간다. 금과 은, 사탕수수, 면화, 카카오, 고무, 석유에 이르기까지, 자원이 풍부할수록 그 땅의 원주민들이 더 가난해진 역설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한 가지를 꼽아본다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멕시코 금·은광 채굴 과정과 그 결과를 들 수 있다. 16~17세기 포토시 광산에서만 백만 명의 원주민이 미타(mita)’라는 강제노역 제도에 의해 동원되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제도를 두고 죽음으로 향하는 초대장이라 불렀다. 광산 내부의 수은 증기와 상존하는 붕괴 위험, 혹한 및 굶주림 같은 가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소모품처럼 소비되거나 죽어 나왔다. 그들은 언어를 가졌으나 정복자들의 언어와 편견에 의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정복자들의 억압과 요구에 그들은 가축처럼 무거운 짐을 나르며 쓰러져 가기도 했다. 인류의 폭력성이 현대로 오면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의 학자들이 있지만, 나는 이런 역사 앞에서 과연 인류가 더 나은 윤리·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성숙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스페인으로 유출된 라틴 아메리카 은의 총량은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했던 양의 세 배가 넘었다고 추산된다. 이 은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자본으로 전환되는 동안, 포토시 원주민의 인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격감했다. 저자는 이 현실을 다름 아닌 학살이라 불렀다. 영화 <미션>에서 볼 수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수탈 과정에는 교회도 유럽 정복자들의 착취 구조를 신의 섭리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빠져나간 은과 금 등의 자원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적 몰락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이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라틴 아메리카의 은과 금 등을 비롯한 막대한 자원을 유럽에 유입시킨 장본인들이었지만, 건실한 제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자원의 이동통로 역할만 했을 뿐이다. 실제적인 부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국으로 넘어갔다는 저자의 지적은 현재 유럽의 지형도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번성한 유럽의 존재는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테다.

 


갈레아노의 표현에 따르면, ‘자원은 그 땅에 있되 이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형태는 각각 달라도 구조는 닮아있다. 500년 전 포토시의 은이 스페인 왕실의 금고를 잠시나마 채웠듯, 강원도의 텅스텐 역시 그 수익의 핵심이 어디로 귀속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경우 구한말 시기에 이미 전국 각지에 있는 광산을 소유했던 것은 외국의 자본이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금과 은, 구리, , 석탄 등을 소유했던 국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었다고 한다. 내가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에 주목한 이유는 국내 광산을 소유한 외국 기업과 자본의 존재보다는 자원에 대한 서구 문명의 집착과 욕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구조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분노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가 겪었던 현실에 대한 저자의 구조적 인식이다. 수탈은 폭력을 수반하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논리,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땅에서 나오는 자원이 이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충분히 쓰이고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강원도의 텅스텐 광산이 열렸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주가를 검색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읽은 우리는 갈레아노처럼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땅의 혈맥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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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15주기에 받은 리영희 선생의 유산'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2025)





오늘(2025년 12월 05일)은 고 리영희 선생의 15주기라 한다. 마침 오늘 리영희 선생과 만나고 시간을 함께 했던 인연들이 기억하는 선생에 대한 글을 모은 <나와 리영희>가 도착했다.



내가 선생에 대해 알게 된 시기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선생이 남긴 글들을 우연히 접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기억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영희 선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진실'이라는 단어다. 그가 생전에 아마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표현이,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쫓겠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이 단어만큼 왜곡도 많고, 논란이 많으며 때로는 과소평가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런 개념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인데, 선생이 오직 이 '진실'만을 위해 살았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 천명했던 선생의 신념을 되새겨보는 날이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동료/지인/후학들을 비롯한 인연 32명이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선생이 평생 추구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또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지녔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찾아야할 답이겠다. 



한 가지 실마리, 혹은 출발점으로 오랫동안 뉴욕 타임즈에서 서평가로 활동했던 일본계 미국인 미치고 가쿠타니를 소환해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종종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내가 이해하는 가쿠타니의 '진실'은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진실'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균형추로 작용하는 '무게중심'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편 이 무게중심의 한 가운데에는 '인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대의 많은 저술가, 사상가들이 '진실이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가쿠타니를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가 줄곧 추구하던 진실이 내게는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진실과 닿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존재일 테다. 진실을 향한 길 한가운데에서 늘 길을 잃고마는 우리 인간을 다시 붙들어주고 다시 이를 향하게 해주는 평형추와도 같은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지점은 앞으로 <나와 리영희>를 읽거나, 그의 저작을 읽게될 때 내가 염두에 두고 들여다볼 지점이기도 하다. 내게 주어진 과제와도 같다. 앞으로 나는 '어떤 진실'을 쫓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같다. 



리영희 선생의 15주기 되는 날에, 그리고 암담했던 계엄의 밤이 이제 막 1년 지난 시점에, 꽤나 오래 책장에 놓여 있던 선생의 평전과 책 몇 권도 함께 꺼내어 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는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감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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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 - 사사키 아타루, 죽음을 배우는 시간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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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며 읽는 착은 철학책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


사사키 아타루 지음

천 옮김 [북노마드] (2025)



 

사람이 가득한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일단어쩌다의 삶 사이에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로 놓여 있는 존재다. 그러니 곰곰히 따져보면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이 없다.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삶의 이력(history)이 나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은 세상에 태어난 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운명이다. 피할 길이 없다. 어느 누구도 경험한 바 없지만 누구나가 지극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대상이다. 그러니 탄생과 더불어 이토록 부조리한삶의 진실이 있을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일단어쩌다의 철학은 어머니의 우짜노철학과 닮아 있었다. 다만 어떤 사건 혹은 현상의 전과 후를 마주하는 주체의 부조리한 감각이 전/후로 구별되어 있을 뿐이다.


 

내게 어머니의 우짜노철학은 체념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체념이 포기가 아니듯, 이는 앞으로 다가올 삶을 덤덤하지만 의연하게 맞이하겠다는 결연한 견딤의 의지이기도 했다. 지금껏 겪었던 크고 작은 시련들에 어머니의 우짜노철학이 언제나 내게 큰 힘과 위안을 준 이유다. 나아가 어머니의 우짜노철학은 그 뒤에 (그래도 해야지, 그래도 살아가야지)라는 말이 숨어 있는 삶의 지혜이기도 했다.


 

멜빌의 <모비딕>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생각난다. 입 가운데가 살짝 갈라지고 입 전체를 덮은 듯 보이는 참고래가 죽음을 굳건히 참고 견디는 스토아 철학자를 닮았다고 말하고, ‘얼굴 없는향유고래는 죽음에 초연해 보이는 듯한 인상이 플라톤을 닮았으며, 나아가 향유고래는 말년에 스피노자를 만났을 것이라 말하는 대목 말이다. 이처럼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존재함과 떨어질 수 없는 이란성쌍둥이다.

 


철학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작은 책은 죽음이야말로 나에게 고유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단 하나의 경험이기에, “나의 죽음은 내 것이다. 누구도 나 대신 죽을 수 없다.”(54)고 부연한다.

 


오늘 내가 품은 욕망은, 아타루에 따르면, 타인이 만든 모조된 욕망일 뿐이다. 유럽 여행을 하고 지중해의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는 일, ‘인생의 목적은 행복해지기와 같은 표현은, 결국 내게 주입된 타인의 욕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욕망은 인간의 등장 이후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형되어온 진부함의 총체이기도 할 테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아마도 죽음이야 말로 나 자신에게 고유한, 결코 진부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좀 더 읽어봐야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혹은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는 결코 자살하고 싶다거나, ‘어차피 죽을 건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식의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내게 고유한, 이 존재론적인 문제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뜨거운물음인 것이다. 이건 문제에 대해 뜨겁게 반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차갑게직관하는 일에 더 가까울 듯하다. ‘뜨거움차가움은 같은 진실의 다른 단면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순간순간 혹은 오늘 나의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제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는지 퇴근할 때 마저 읽어야 겠다.)

 


 

 

 

 

 

#모두를위한철학입문 #사사키아타루 #안천번역가 #북노마드 #철학책 #작은책 #출근하며읽는책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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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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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다시 환대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 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글·그림

안의진 옮김 [바람북스] (2025)




 

인간의 역사는 늘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해 온 역사다. 지중해 역시 이곳을 무대로 기록된 역사에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환대의 전통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바다였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만이 아니라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오랜 이야기에는 늘 먼 곳으로부터, 혹은 공동체 밖으로부터 방문한 나그네들이 누군가의 환대를 받고, 그들의 사연이나 경험을 들려주는 전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상대의 정체를 알기 전에 이미 음식을 대접한 후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전통을 떠올려보게 된다. 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의례의 과정이 상대방의 삶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유구하고 훌륭한 문화가 이제는 쉽게 발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된듯하다. 특히 환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해 주었던 지중해에서는 오히려 침묵만이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이폴리트는 이런 현실을, 그래픽노블의 형태를 빌어 인상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책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다루는 주제는 현재 지중해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이주민 문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부분 아프리카 북부의 리비아에서 목숨을 걸고 보트로 탈출하여 지중해를 표류하는 난민들을 구조하는 구조선 ‘SOS 메디테라네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저자 이폴리트가 함께 승선하여 취재한 ‘SOS 메디테라네의 운영비는 98%가 개인의 기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루 필요한 운영비의 액수도 놀랍지만,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이들을 구하는 구조대에게는 무엇보다 시간은 돈이라기 보다, ‘시간은 생명이었다. 지중해 주변 국가들에 의해 구조선이 억류되어 발이 묶인 시간만큼,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수많은 생명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그 무게감이 상당히 다르게 전해졌다. 특히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전 세계인들이 고통을 받았던 코로나 봉쇄기간이었기에 그렇다. 우리가 겪은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는 취약한 이들의 삶을 더 무겁게 내리누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삶이 예기치 않게 제약을 받거나 위기에 처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무엇에도 기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로서 취재 노트에 해두었을 법한 메모가 구조팀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108)라고.


 

특히 지중해 연안의 지역 혹은 국가들, 이를테면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아프리카 북부의 국가들은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침묵과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있다. 난민 구조팀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이러한 냉담과 침묵인 것같다. 이는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해결하기를 회피하는 행동이다.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으니, 문제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문제가 눈앞에 있을 때, 이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일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참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국제 사회에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어려움에 처한 난민들의 인도적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서유럽의 EU 회원 국가들(비교적 부유한 국가)이 이탈리아나 그리스, 리비아와 같은 지중해 국가에 거액의 지원금을 주고 지중해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많은 난민을 막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에 소개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나 섬이 많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는 열악한 상황의 난민 캠프가 조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지중해 지역의 난민 캠프는 서유럽 국가들에 유입되는 난민들을 막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지중해 주변, 혹은 유럽 국가들의 침묵과 냉담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런 행보를 보이는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고작 한 차례의 난민을 받을 것인가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난민을 외면하고 내친 적이 있는 우리가 이 국가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이들은 상당수의 난민/이주민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여있는 난민들의 인구 밀도가 과도하게 높고 시설은 열악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결속력이 상당히 강한 공동체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관용도가 그만큼 낮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존재하는 문제는, 난민/이주민들은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태어난 곳을 떠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이 품고 있는 현실, 혹은 내가 책에서 건져 올린 질문은 이렇다. ‘사람들은 왜 떠나야 할까?’ 혹은 그들은 왜 떠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누구는 빈부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자본의 탐욕을 이야기할 것이다. 또 누구는 보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탐욕을 언급할 지도 모르겠다. 자본 자체가 탐욕을 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난민/이주민 문제는 어느 기득권 세력의 현상 유지, 혹은 이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대다수를 희생하게 만들어버린 시스템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CNN이 취재하여 보도한 리비아의 노예시장에 관한 언급이었다. 무엇보다 판매 대상이 된 난민 당사자들이 처한 조건을 상상해 보게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겨진 상황이라면, 타인의 몸에 대한 권한을 손안에 쥐고 있는 자는 어떤 행동도 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다에서 구조된 어느 여성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고 말문을 닫아버린침묵의 언어가 구체적인 언어 표현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시리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신의 몸값으로 거액을 내고서야 풀려난 후, 다시 목숨을 걸고 바다로 탈출했던 여성 나딘의 삶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기에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와야만 했다. 그녀가 구조선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을 삶의 여정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또 수감된 남편을 뒤로 하고 딸 아이샤를 살리기 위해 거친 바다로 나온 마타의 사례도 기억난다. 큰돈을 뇌물로 제공하고 나서야 감옥에서 딸과 자신의 몸을 풀어낼 수 있었던 그녀는 돈이 부족하여 남편을 감옥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었다. 언젠간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SOS 메디테라호가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저자가 취재한 실제 구조 현장의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구조 당시 현장의 혼돈과 흥분을 반영하듯 그림과 사진이 번갈아 등장한다. 마치 저자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만 머물던 캐릭터가 실제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여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존재들이다. 이폴리트가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165)라고 말하듯 개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어떤 숫자나 분석의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지중해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라고 인식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지중해 바다 어딘가에선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리비아의 해안 경비대가 아니라 ‘SOS 메디테라네와 같은 이들에게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보트피플이 있다. 지중해의 끝, 파랑에서 느낀 것은, 난민/이주민 문제가 단지 지중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지중해는 인류애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은 과연 무엇때문인지 많은 독자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코 개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구조된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항구에 하선하는 풍경이 지나간 후 이폴리트가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부터다. 인도적으로 난민을 구조하는 활동을 널리 알리고자 저널리스트로 참여한 그였지만, 그 역시 가족이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구조 현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아이들을 품에 안아 돕기도 했던 그는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156)는 심경을 남겼다. 아들과 통화한 후 자신이 머물던 방과 창문을 통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전면으로 그려놓은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풍경 속에서 천천히 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저자의 시선처럼 느껴져서다. 자신이 머물던 빈방의 풍경에는 아들을 향해 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저자의 마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이 순간 이폴리트가 중얼거렸을 단어는 이 말이었을 것 같다.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함께 가자)!”라고.






[책속으로]

[1] "함께 간다. 함께 살아간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 P14

[2] "관광에는 열려 있지만, 인간에게는 닫혀 있는 바다." - P46

[3] "낭비되는 시간만큼, 생명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 P49

[4] "그날 놀라울 만큼 많은 생명을 구하고도, 한 번의 실패가 그의 마음을 전부 움켜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닿지 않을 손을 뻗는다. 모두가 외면하지만, 삶을 행해 발버둥치는 그들을 위해." - P79

[5] "안디아모 뚜띠(Andiamo Tutti, 다 같이 가자고!)"
"이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면한다." - P80

[6]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다." - P108

[7] "내 손은 아기 바구니가, 내 팔은 요람이 된다." - P156

[8] "이 아이들을 전부 품에 안을 수 있으면 좋겠다." - P157

[9] "하나하나의 담요 아래엔 하나의 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삶이 있다.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배가 출렁이고, 우리의 마음도 휘청인다." - P165

[10] "우리는 문명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요람이 우리의 존엄을 묻는 무덤이 되게 해선 안 됩니다."(203, 교황 프란치스코가 마크롱 대통령에게 전하는 말) - P203

[11] "2014년 이후 중앙 지중해에서는 22,631명이 사망했다."
"중앙 지중해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상 이주 경로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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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타자에 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시선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arte] (2025)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통독하면서 우선 떠오른 감상은 탁월하다는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이 없지만,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한가함지루함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사람이 토끼 사냥을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에게 고되고 때로는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냥 활동에 나가는 대신 잡은 토끼를 던져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할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어요. 저자는 그 이유가,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합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몰입의 대상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지복에 이르는 열쇠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줄곧 저자의 글에 탁월하다를 연발하는 이유는, ‘한가함지루함이라는 키워드로 인류 문명의 핵심을,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쓰기를 하는 저자를 또 다른 수준(another level)'의 저자라고 분류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보시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 모로 놀라움을 줍니다.

 

어떤 면에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의 한병철이라고 평가한다면, 좀 더 친근하게 여기실 수 있으실지. 다만 한병철의 문장은 좀 더 압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문장 자체가 고이치로의 문장보다는 좀 더 밀도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철학 비전공자에겐 고이치로의 문장이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 그리고 문화를 진단하고 요약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를 하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 비전공 독자로서는 우리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주는 저자의 등장이 반가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됩니다. 이 책으로 저자의 글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팬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만큼 현재 제 수준에서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의 6장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때문입니다. 이 장의 부제는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인데요, 도대체 한가함과 지루함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도마뱀이 갑자기 뭔 소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장(chapter)의 시작은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햇볕을 쬐고 있는 도마뱀은 햇볕과 바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한 생물학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6장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움벨트(umwelt, 둘레세계, 주변세계)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건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입니다. 그는 1934년에 출간한 책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이 둘레세계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이 개념은 생물이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세계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혹은 구성된)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플라톤 철학과 연결 짓자면, 각 존재마다 감각기관을 통해 구성된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를 말하죠. 모든 감각적인 생물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말이죠.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생물체의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칸트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윅스퀼은 칸트주의 생물(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올해부터 진행하는 과학책 읽기 모임의 두 번째 선정도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6장에 주목하면, 이 장이 바로 윅스퀼이 제시한 둘레세계의 개념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처음에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서 진드기로 갔다가 결국에는 인간에 이르고 있는데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335)라고 비판했다고 고이치로는 말해줍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생물학자 윅스퀼을 비판했다고 소개하는 거죠. 그 이유는 동물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336). 하지만 고이치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논리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동물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이치로의 말대로라면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거든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에 합치되는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신체만 있는 기계라고 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인간을 영혼이 있는 기계로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므로, 이장의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죠. 각 존재의 둘레세계는 생물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감각기관의 차이가 종마다 크게 다르니까요. 각 종이 인지한 세계의 모습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차이를 저자 고이치로는 인지된 둘레세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은 이 둘레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동물 보다는) “인간이 다른 동무에 비해 매우 높은 둘레세계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다”(352)는 의미로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제가 이해한 바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고이치로는 이 능력을 가리켜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라고 좀 더 폼나게 정의합니다. 제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인간이 보다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이제 고이치로가 인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다룬 책에서 둘레세계(움벨트)를 이야기한 이유에 한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저자는,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과 공감력을 통해, 다른 둘레세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가져와 정리해볼까요. “인간은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355)라고요. 지루해하지 않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지루해하는 이유를 윅스퀼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에 동물의 감각에 주목한 후대의 과학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동물이 인간에 상응하는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몇몇 동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미 앞에서 대나무를 입에 물고 앞구르기를 하는 팬더 푸바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해, 본능에만 따른 행동은 아닐 것 같은데요.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이 점은 물론 더 많은 연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6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었으니 마지막 장 까지 힘을 내서 읽어줄 것을 기대하겠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눈앞인데, 정녕 책을 덮을 것이냐?’고 독자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탁월한 책을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뛰어난 공감력/상상력으로 둘레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자는 여기에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윤리학의 작동 원리는 판단하기 전에 여러 조건을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죠. 달리 말하면, 다른 둘레세계를 검토하고 다가가려는 태도/마음가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저자의 팬이 되어버린 철알못독자의 감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가지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보시라는 겁니다. ‘강남 아파트 입성을 이야기하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 참으로 탁월하군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움벨트'개념이 소개되는 다른 책을 추가해봅니다.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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