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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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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책임에 대한 오랜 물음의 대화

 

얼마전 일본에서 전시되고있던 위안부 소녀상작품의 전시 중단 소식을 접했다. 뉴스와 후속 기사를 보면서 사건의 양상이 내게는 이전과는 다른 맥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최근에 서경식 교수의 저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를 읽고난 이런 뉴스가 내게 달리 보였다고 말할 있겠다. 뉴스에서는 사건이 표현의 자유 침해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보도되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인하는 사람들도 뉴스에 보도되는 맥락만을 따져본다면 소위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되었다 방향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회의 시민이 표현의 자유 보장받는 일은 응당 중요한 사안이다. 그리고 시민이 가진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는 사회 존립에 위협이 되지 않는 쉽게 제한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그리고 사태가 하나의 우려를 재확인하는 사례임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 보도된 사건의 배경은 일본군 성노예 끌려간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작품 앉아있는 소녀상 일본 내에서 전시되는 가운데, 일부 일본인들의 반발과 주최측에 가해진 압력으로 작품의 전시가 중단된 것이었다. 내가 느낀 위기감은 표현의 자유문제에 국한되어 해결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일본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주의 영향으로 결과한 사건의 본질이 회피되고 심지어 무화(無化)되는 상황으로 종결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주의라는 본질을 건드리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양보 필요가 있는가의 논쟁으로 소비될 있기에, 아베 정부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는 편리한 변명으로 작용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하는 구실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도된 뉴스는 표현의 자유 억압문제에 관심이 맞추어지다보니 보다 본질적인 면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회피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읽게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대담짐 책임에 대하여에서 바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볼 있다.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 대담자들은 일본의 보수세력에 대항했던 리버럴파 지식인들이 보여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 외면하는 상황을 응답 책임의 회피 표현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비판적인 집단임을 자처하던 리버럴파가 몰락 내지는 자폭한 상황은 결국 아베 신조를 비롯한 강경파가 착실하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었다. 소녀상 전시 중단과 같은 사건이 일본 사회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강경파세력이 너무 비대해짐과 동시에 제한적이나마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해왔던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의 붕괴에 가까운 무기력으로 비판기능이 제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에게는 보다 근본적으로 넘어설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바로 천황제 존재다. 일본사회는 천황 중심으로 어느 시기나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던 국가였기에, 천황에 대한 강력한 인정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책임에 대하여에서 교수는 일본국의 본성에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식민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천황이라는 단어가 수반하는 힘은 특별하다. 일본 국민과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천황=국가라는 도식 속에 스스로가 신민 되는데 이견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분명히 정치와 종교를 헌법상에서 분리하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일본의 패전 70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천황에 대한 비판은 매국노가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제정된 헌법 상에 명시되어 있는 개인적 자유의 보장이 일본인들 스스로 간절히 원하여 누리게 시민적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어낸 경험없이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제대로 자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후에 그나마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기회를 여러 놓쳐 버린 것이 오늘의 전체주의적인 일본의 모습에 이르게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천황은 평화주의자였다라며 본질을 흐리는 발언을 하거나, ‘요새 그런 이야기(민족, 식민주의) 하면 내셔널리스트라고 비난 받아요라는 말을 리버럴파로부터 듣게되는 상황이 것으로 보인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지적하는 희생의 시스템에는 과거로부터 여전히 지속되는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공 문제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후쿠시마 원전사고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있다. 대담자들은 모든 사례가 바로 식민주의의 과거 현재의 형태에 다름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사례들에 공통적인 특징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희생에의 강요 정리해볼 있을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경식 교수는 한결같이 해당 문제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식민주의 지적하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담자는 일본국의 본질적인 식민주의 척결을 있었던 여러 시기를 일본 사회는 놓쳤다고 한다.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자유이긴 하지만 자국민 스스로가 천황제를 폐지하고 자주적인 국민으로서의 인식과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아직까지도 이어져오는 여러 희생의 시스템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당수의 진보적인 일본 지식인들은 천황제라는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고, 이런 정서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의 전체주의시대가 도래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풀이해볼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정당 혹은 기타 정치 집단이나 매스 미디어 그리고 학계의 저항이 거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것이다. 다카하시 교수가 결과로 저항자는 가장 마이너인 입장으로 내몰리고 고립되어 버리는 이라고 말에서,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인 대담자의 고립감과 어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어낼 있었다.

 

전체주의 일본이 형성된 결과는 다시 일본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미일 안보체제는 일본의 헌법을 초월한 존재인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미군이 기지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미군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는 오키나와 대학에 떨어진 미군 헬기 수습 과정이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오키나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뚜렷이 확인할 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군측은 일본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일본 정부가 이런 미국 측의 대처방식에 대해 항의나 사고 수습에 대한 의지 조차 없어 보였다는 점이었다. 내게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한 피해는 결국 자국민인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돌아가버리는 구조가 되었다. 자국민인 오키나와의 재산과 인명이 피해를 봤는데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본토 일본인들과 정부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결과 오키나와인들은 본토 일본인들에 의해 버린 취급을 받으며 다른 차별과 희생을 떠안게 되어 버렸다. 정황을 다시 정리해보면, 일본 사회의 식민주의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문제는 다시 자국민의 인권이 온갖 형태로 침해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있다.   

 

서경식 교수는 책의 일본어판 후기에서 2017 <치안 유지법> 적법하게 제정되었으므로 손해 배상도 사죄도 실태 조사도 하지 않겠다라는 법무대신의 국회 답변을 보고 일본은 마침내 데까지 왔다라고 판단했다. 1990년대 부터 일본의 반동기(리버럴파의 몰락과 강경파의 장기집권) 들어선지 사반세기가 지나자 이제는 국민과 국제적인 시선은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속내를 시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런 말을 언론 앞에서 하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갑갑했을까.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것은 없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와 마주하는 일이 남았다. 문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여행을 취소하는 문제에서 해결될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최근 일간지의 뉴스를 보니 일본의 관광객이 크게 줄어 위기의식을 느낀 여당 정치인(자민당 간사장)  우선 일본이 손을 내밀어 양보할 있는 것은 양보할 "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우리(일본) 어른이 한국의 주장을 듣고 대응해 나가는 도량이 없으면 된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출처: 중앙일보] "한국에 양보할 하자"…관광객 급감에 온건파들이 움직인다   (2019 09 29일자 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23589845 ]

 

우선 총재 다음 자리인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 二階俊博·80) 이면에는 이번에 읽은 대담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과거 식민주의 행보의 가해자라는 인식을 전혀 확인할 없었다. 아울러 한국에 대한 유아적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음을 확인할 있다. 특히 양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 의미하는데, 그가 사용한 맥락에서의 양보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행위의 맥락으로 감지된다. 나는 물론 양국의 경제적 교류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여파가 일본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국면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을 주는 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언젠가  끝나게 되겠지만, 일본인들이 전후 이래 학습된 사고 정지와 (천황제로의) 자발적 예종의 습관으로 공고화된 일본의 전체주의적인 본성에 일말의 영향을 미칠 있으리라는 기대에는 회의적이다.

 

책을 읽으며 가지 주목하게 것은(서경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있었던 리버럴파의 몰락으로 시작된 일본 사회의 반동기 오늘날 일본형 전체주의가 이제 완성되었다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여기에 아직 역사적인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내가 배운 점은 오늘날 일본의 전체주의 형성에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것은 서경식 교수가 국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자국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천황제를 잔존시켰기 때문”(255)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있다. 나아가 전후 일본사회 재편의 양상이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양상과 궤를 같이 한다는 , 그리고 중심에 공통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해방을 맞았을 , 도망갔던 한국인 검찰·경찰 세력이 미군정 국내 장악과 함께 다시 복귀한 사실, 이들이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정치적 역량을 확보한 사례는 일본의 경우와 매우 유사함을 발견한다. 이런 정국에서 우리는 친일파에 대한 파악과 처벌 과정에 중요한 골든 타임 놓치게 되었다. 상황은 일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유사한 패턴의 배후에 미국이 보인 행보를 우리는 주목해야 것이다.

 

패전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은 역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1947 트루먼 독트린 이후 냉전 태세를 굳혀 가던 미국은 중국 공산화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 재무장을 핵심으로 동아시아의 냉전적 대결 체제를 본격화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 처벌과 ‘평화 국가 일본’으로의 개조라는 기존 정책을 전쟁 범죄자 재기용과 일본 재무장, 이를 위한 일본 경제의 재건이라는 방향으로 급회전시켰다. 이것이 일본 패전 지금까지 70 년간 동아시아의 정세 흐름을 결정지었다.(302)

 

일본 사회 역시 패전 직후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전범자를 재기용하도록 방관하여 식민주의가 오늘날에도 건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미구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일본이 누리게 해주면서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화에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미국은 ·간접적으로 아시아의 평화유지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 형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앞서 서경식 교수는 일본이 이제 아베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일본적인 전체주의를 완성했다고 했다. 동시에 데쓰야 교수는 제국 시기의 식민 지배 책임을 계속 부인함으로써 과거의 단절 극복하지 못하고 국제 지도 속에서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지적한다. 이유를 데쓰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통해, 근린 민족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출할 없게 현실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284)

 

일본이 이렇게 무모하게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자신만의 행보를 유지하는 것은 배후에 미국과의 유착 혹은 상당한 정도의 대미 의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상황은 결국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도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 살려고 노력해도 그럴 없는,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일본 정부는 전근대적인 천황제를 폐지하고, 식민주의를 극복하여 일본인들이 헌법에 보장된 대로, 자유로운 개인적인 주체로서 존재할 있도록 해야만 것이다. 천황제의 종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일본 국민의 다수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신민으로 회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발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천황제는 원리적으로 서로 양립하기 힘들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정부를 비롯한 대다수 일본인들이 회피해왔던 책임 다시 바라보고 인식하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같다. 그래야 역사 수정주의 문제나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고 있는 모럴의 붕괴 계속 진행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있다.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과거의 허물을 그만 들추라 논리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논리는 가해자, 기득권자가 가장 좋아하는 레토릭이라고 서경식 교수는 말한다. 보다 밝고 건강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언제나 함께하는 가운데 과거사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알려져야 하며, 후세는 이를 알아야만 한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행위는 미래에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마무리 대담자들을 다시 보며

 

다카하시 교수의 가차없는 일본 정부 비판을 보노라면 일본 사회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인물임을 알게 된다.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는 학자라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일본 내에서도 이렇게 극소수에 속하는 학자에 대해 서경식 교수의 평가는 남다르다.  

      

(다카하시 선생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에 있는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일본이라는 곳에서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고 수는 없겠지만 이른바 아카데미즘과 현장이라는 것의 경계를 오가며 생각하는 , 소수파와 다수파의 경계에 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205)

 

서경식 교수에 대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신뢰와 평가 또한 남다르다.

 

서경식 선생은 언제나 나에게는 스승과 같은 벗이자 벗과 같은 스승이었다.”(286)

 

20 넘은 대화와 고민의 세월을 지내며 대담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지닌 도반 셈이다. 그리고 소수의 입장이나마 끊임없이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를 비판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왜곡된 시선을 갖는 이들이 펼쳐 놓은 문제점들을 지적해왔다. 이번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에서는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는 책임 회피 기작을 분석 비판하고 응답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이 두 지식인의 입장이 소수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일본 국민 다수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심성과 싸우는 일에 오랜 시간을 바친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다음 세대에 이분들의 역할을 이어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더 많이 나와 한일간의 연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데쓰야 교수가 후기에서 인용한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의 시인 야에 요이치로 시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한다.  

 

야에 요이치로의 시집(2017) 일독(日毒) 나오는 재인용.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

300만의 일본인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2,000 아시아인을 괴롭히다 죽이고는 그것을

모두 잊었다는

의지 의식적 기억 상실

교활함 야비함 거무칙칙한

광기의 공포 그리고 나는

확인한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일본의 암흑을 통째로 표상하는 한마디

일독’(日毒)

 

 

서경식 교수: 여기서 일독’(日毒) 스스로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은 채로 타자에게 계속 재앙을 뿌려대는 모습을 의미한다.(11)

데쓰야 교수: 여기서 시인이 과제로 삼은 일독의 제거 메이지 유신 150년을 관통하는 일본의 식민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의미한다.(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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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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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시스템 - 후쿠시마/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앞에 번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처음 오키나와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군복무 시절이었다. 이따금씩 국내에 도착하는 미공군 수송기가 출발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 였던 것이다. 당시 내게 오키나와라는 섬은 머나먼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을 환상의 섬이었을 뿐이었다. 번째 오키나와를 만나게 것은 나의 신혼여행지가 오키나와 였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공항의 쪽에 정렬되어 있던 군용기들을 보며 군복무 시절을 떠올렸다. 오키나와 섬을 돌아보며 미해군 기지와 과거 미해병대의 상륙작전(이제 보니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관한 안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번째로 만난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에 나오는 류큐 왕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조공국으로 등장한다. 한편 명나라 시절(1621-1627) 왜구가 류큐를 공격하여 왕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류큐의 태자는 왕인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 보물을 싣고 떠났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한 기록이열하일기 등장하기에 과거의 오키나와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통해 다시 현재의 오키나와와 만나게 되었다. 신혼여행 보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키나와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현대사회의 모순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무관하게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만나게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이하《희생의 시스템) 사실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교수와 데쓰야 교수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 읽는 도중에 알게된 도서였다개인적으로는 책임에 대하여 대담집이고 관련지식에 부족함을 느껴,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와 관련한 주제들의 배경 이해를 위해 희생의 시스템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은 저자 데쓰야 교수가 2011 3 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마무리가 글이다. 그는 기간 동안 후쿠시마 현의 피해지역 여러 곳을 수차례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집필을 했다 특히 데쓰야 교수는 바로 원전사고가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나고 유소년기를 보냈기에 사고 현장을 둘러보고 글을 쓰는 과정이 보다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희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겉으로는 자연재해의 피해로만 보일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모습과 평화로워 보이는 오키나와와 연관된 문제가 희생 관점에서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이란

 

우선 희생이란 관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희생의 시스템개념에는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 이익이 다른자()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161) 원전이 '희생의 시스템'인 이유는 희생당하는 대상(원전 주변 거주민들의 생활과 건강, 주변의 자연 ) 볼모로 희생시키는 주체(원자력 마피아-정치가, 관료, 학자, 전문가, 원전 유치 지역 유치에 관여한 관료들) 이익을 취하는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경우는 어떤가. 1879 류큐 처분이라는 이름 하에 오키나와는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전통과 오키나와 언어의 사용을 금지당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쇼와 천황이 천황제 유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했던 것이다.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본토 일본인(야마토 일본인) 미국의 상호 합의 하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지속적으로 주둔하며 기지를 건설하였다. 오키나와인들의 희생을 통해 본토 일본일들과 일본정부, 미국은 분명한 이득을 취하고 있기에  희생의 구도 찾아낼 있다. 전일본 인구의 1% 해당하고, 면적으로 보면 전체 일본 면적의 0.6% 불과한 오키나와에 현재 일본에 건설된 미군 전용시설(기지) 74%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후쿠시마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문제 역시 희생의 시스템 속한다.   

 

 

희생의 시스템에 잠복하는 희생의 논리와 식민주의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개념에서 희생당하는 대상 존재는 필수요소이다. 희생의 모습이 통상 감춰지거나 그렇지 못하는 경우 소중한 희생으로 전화되는 독특한 논리 구조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있겠다. 희생자들은 대다수 국민의 (예컨대 도덕적 타락) 속죄하기 위해 죽었으며, 이들의 희생(‘소중한 희생’) 있었기에, 대다수 국민의 죄가 속죄되고 도덕이 회복된다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치 기독교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죄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죽어간 구도와 았다. 일본의 근대 기독교인이자 무교회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천유론은 논리상 이런 희생 서사구조를 따르기에 여타의 천벌론과 다를바가 없다.

 

후쿠시마의 현의 사례를 희생의 논리 구조 대입해보면,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희생은 천벌 혹은 천유의 결과였으며, 희생을 통해 도덕적 결손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속죄를 위한 기회를 얻고, 도덕적 균형의 회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논리가 된다. 자연의 대재앙과 원전 사고와 같은 인재를 통한 희생자들의 죽음에 도덕적 의미 가세되어 생존자들의 이상을 이해 이용되는 구조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 일부 사회 지도층에 의해 하나의 신념처럼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연 희생자의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문제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을 일방적으로, 죄가 있어서 처벌받은 존재로 간주하고 그렇게 이야기할 있는 것인가,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119) 라고 반문한다.    

 

데쓰야 교수는 1923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6,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우치무라 간조는 간토 대지진을 천벌로 간주하고, 대지진을 통해 일본의 천지는 일소됐다. 속죄를 통해 국민의 양심이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기독교 동향에 관심을 갖고, 조선 기독교인들과 교류도 하던 그가 간토 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고려한 흔적은 없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희생의 논리에는 희생당한 대상(사람들과 자연, 전통과 문화 ) 대해 감정이 거세된 같은 무감각함을 찾아낼 있다. 심지에 이런 희생의 논리에서는 일본에 가해진 원폭 투하를 심지어 위대한 번제 표현되고 있기도 하며, 소중한 생명 죽음으로 세계의 평화를 회복할 있었다는 논리에까지 나아갈 있음을 저자는 분석해낸다. 희생의 논리 단순히 천벌, 천혜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희생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거나, 감수성을 아예 무력화시킬 여지가 있기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전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가 출간한 강연집 공중전과 문학 떠올려 본다. 책에서는 영국과 미국 등의 연합군에 의해 1940년대 전반, 독일 전국의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60 명으로 추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10 여명의 6배에 달함)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제발트는 홀로코스트로 600 이상의 유대인과 반대자들을 처형한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패전국의 수치심 등으로 독일 내에서 연합군에 의해 발생한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는 독일인들의 집단 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괴의 결과로 발생한 거대한 폐허에 대한 관심을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새역사 건설 대한 동기로 대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인들의 경우, 자국 희생자들에 대해 시종일관 침묵과 외면, 망각을 통한 심리에 갖히고 가려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좀더 적극성 갖는다고 있을까. ‘존귀한 희생 도덕성 회복을 위한 대가로서, 자기도취적 매개 구조를 통해 신일본 건설 나아가고 있음도 찾아볼 있다. 더불어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결여는 독일의 경우와 유사함을 있다. 데쓰야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 나르시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일본인들과 아베 정권의 관심사인 도쿄 올림픽 준비와 관련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슬로건에서 이 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희생의 시스템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주의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음을 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불거진 전후 일본의 희생 양상에는 식민주의구도가 이미 역사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있다. 앞서 언급한 류큐 처분조치를 통해 일본의 최초 식민지가 오키나와는 본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여기에 천황중심으로하는 식민지 교육을 강행했다는 점도 야마토 일본인들의 식민지화·동화 정책을 통해 확인할 있다.   1947년에 일본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한 '오키나와에 대한 천황의 메시지'는 어떤가. ‘러시아의 위협,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대한 우려로 미국이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한다 메시지는 전후 미일 안보체제가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은 희생의 시스템임을 다시금 반증한다. 따라서 오키나와는 미국와 일본, 양국의 공동 합의하에 존재하는 식민지에 다름 아니다. 희생의 시스템 희생의 논리 최근 한일 갈등의 발단이 일제 징용문제에 적용해보아도 여전히 희생의 시스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식민주의적 성격을 여실히 찾아낼 있다.       

 

비슷한 논리로 저자는 후쿠시마 문제에서도 무의식적인 식민주의 찾아내고 있다. 도호쿠전력의 관할지에 도교 전력이 관할하는 원전 2기를 포함하여 10기의 원전이 있다는 , 그리고 원전에 대한 리스크를 후쿠시마 현민들이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이익은 간토 지방, 도쿄 전력 관할지에서 향유하고 있는 구조를 찾아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이것은 수도권(중앙) 비롯한 도시부와 지방 사이에 일종의 식민지 지배 관계가 성립돼 있다는 보여주는게 아닐까?(171) 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원전 시스템의 리스크는 지방에 넘기며 도시부 주민들이 이익을 향유하는 구조 통해 차별적인 식민지적 구조가 있음을 있다는 말이다.  

 

 

나가며 - 희생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문제와 오키나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통해 공통된 식민주의적 성격을 읽어내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저자의 온전한 시각을 통해 현재 심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의 국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집단적인 심리에는 어떤 논리가 흐르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의 시각으로 분석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구조를 읽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일본 지배층의 행동 양식과 사고를 소개해주고,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점을 강조한다. 원칙적으로 공감하게 되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희생없는 사회가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어쩔수 없지 않나라는 태도만큼 무책임하고 위험한 반응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가 어쩔 없는 일이었다 발언한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의 발언처럼, 또 다른 규마 후미오를 만들어내는 단초가 뿐이다. 이러한 정치인들과 관료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그리고 대다수 일본인처럼 무의식적인 식민지주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역량을 줄여나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군사기지나 원전의 리스크를 한없이 제로에 가깝게 수렴시켜 가는 그런 정치적 선택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을 지향해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189)라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는 무엇보다 그리고 언제나 주변화된 희생자들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후쿠시마 현민들이 그렇고, 복구 작업이나 잘못된 피복선량기준으로 지금도 상당한 양의 방사선에 피복되는 주민들의 2 피해자들이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주민 위에 군림하는 미군 관계자들과 주민들의 부당한 피해에 침묵하는 일본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희생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희생의 시스템에는 이처럼 문제와 관련된 정보의 은폐와 대화 소통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도 주목해봐야 같다. 희생의 시스템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에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던 이들을 초대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을 있을 같다. 언젠가 다시 오키나와에 기회가 있다면, 오키나와의 지형과 자연,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이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덴마크 육군 대장 프리츠 홀름의 ‘전쟁절멸 보장 법안‘
˝전쟁이 시작되면 10시간 안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서 파병된다. 첫째, 국가원수. 둘째, 그 남성 친족. 셋째, 총리대신(총리), 국무대신(각료, 국무위원), 각 부의 차관. 넷째,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 번째,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던 종교계 지도자.˝- P88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
˝재난을 알아차렸고, 예언도 했고, 경고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면, 그리고 행동했더라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P93

˝동일본 대지진은 하늘이 오사카에게 내린 은헤였다˝
(오사카 부의회 나가타 요시아키 의장의 천혜론)- P96

˝이런 국가익찬체제(국가총동원체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신국(神國) 사상은 국가의 역할을 비대하게 만들고 신들린 듯 정신 나간 ‘일본‘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면서 다시 큰 과오를 불러들일 우려가 있다.˝- P136

˝자신(야마토 일본인)이야 말로 오키나와인에게 안보 부담을 과도하게 떠넘기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대다수 일본인들이 망각해 왔다고 할 수 있다. (...) 대다수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식민지주의에 무의식 상태인 것이다.˝
노무라 고야 (히로시마 슈도대학 교수)의 저서 <무의식의 식민지주의> 중에서 재인용- P161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자(들)의 이익이 다른자(들)의 생활(생명, 건강, 재산, 존엄, 희망 등)을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이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의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P161

˝식민자와 식민지(의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희생시키는 자‘와 ‘희생당하는 것‘의 관계다.˝- P161

˝오키나와는 잠자고 있지 않았다. 전후에 늘 그랬다. 그것을 모르는 것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그 자체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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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 무병장수의 꿈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조영 옮김 / 부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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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원제: Natural Causes)

바버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지음 | 조영 옮김 | [부키]

 

나의 지인 중에는 자신의 신체 컨디션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각종 측정기구를 통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반드시 숫자로 표기된 결과가 건강한 영역 내에 포함되는지를 따진다. 물론 결과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체중이 늘었는데, 약한 비만 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줄여야 하며 맛있는 식사를 피하거나 조금 밖에 즐기지 못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거나 학대를 하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나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나를 보고는 가르쳐주려 한다. 오늘 만나게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신간 건강의 배신에서는 바로 이렇게 지나친 건강 염려증의 허상을 파헤치기도 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나올 있었는지, 의료화된 우리의 건강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를 되돌아볼 있는 기회를 준다.

 

책의 저자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 시작으로 하여 여러 종류의 배신시리즈를 출간한바 있다. 그녀는 번째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조사했다. 나도 저자의 배신시리즈를 익히 들어서 다른 도서들을 조만간 읽으려고 하던 차에 건강의 배신 만나게 되었다. 내가 저자의 책들에 주목하게 이유는 그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미국사회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건강을 둘러싼 의료 현실은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을 책에서 많이 발견할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일부 지역이나 국가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발견할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병원이 병을 만든다 전문가들의 사회 같은 저작들)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이반 일리치의 저작을 인상깊게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건강의 배신에서는 크게 가지 점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현대의 의료문화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가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의 개념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귀결될 있는지에 관한 점이다. 사실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하지만 나는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료화된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에서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들이 어떤 의료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다각도로 고찰한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인이 의지하는 의료문화가 자본주의체제라는 맥락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의료 환경은 의학 전반 분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의료 산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의료 문화에서도 과잉 진단, 과잉 진료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환자들 혹은 내담자들이 불필요한 검진 검사를 받는 이유는 의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검사와 검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원인 하나는 바로 이윤이다. (…)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의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29)

 

고가의 장비를 빚을 내어 개원하는 개인 클리닉의 경우, 의료인들은 이윤 추구라는 현실에 더욱 내몰리게 된다. 책에 소개된 의료 산업의 이윤에 대한 집착 혹은 광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다. 어느 의학 세미나에서 ‘100 여성이 생애 최초로 유방 조영 검사를 마쳤다 보고된 청중들이 엄청난 환호를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노인은 검사를 받으면 안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본질은 자체로 발병의 위험 요인 되는 유방 조영 검사를 과잉 진단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 그리고 이를 광고한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 의료관계자들이 보여준 반응 때문이다.

 

저자는 건강에 대한 정보 제공의 명목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를 하는 이들에게, 의료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여, 건강한 이들로부터 돈을 버는 시스템이 형성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의사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관찰되는 양상은 의사와 병원, 제약회사가 연관되어 있다. 의료 소비자가 충분히 많은 검사와 검진을 받게 하면, 의사들은 추가 검진을 유도하기도 한다. 저자는 검사를 권하는 의사가 검진 영상 장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을 과잉검사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의례화된 건강 검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의례라고 표현한 것은 개별 환자의 의료행위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 사회에서 의례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으며, 목적에 부합하고 있다는 의미가 것이다. 나는 건강 검진이 전국민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장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서구 의학의 의례화된 검진이 원시 부족의 치유 의례와 유사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구성원들에게 확신과 가르침을 주거나 단결을 강화하던 원시 부족의 의례와 비슷하게, 의례화된 검진은 건강 염려에 중독된사람들에게 환자의 권익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몸이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의 경우, 의료 대상자 본인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함께 실질적인 효과와 건강의 증진을 가져오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패배감을 주고 있다고 보는 같다.

 

예컨대 일반적인 치과진료를 받던 저자가 치과의사로부터 수면 무호흡증으로 자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자신이 추천하는 의료기기를 구매하면 안전하게 수면을 취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를 떠올려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나아가 여성의 경우 적어도 사춘기부터 폐경기에 이르기까지 의료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은 저자에게 더욱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의례화된 검진에서 의사의 지배적 위치와 환자로서의 복종적 관계에 주목한다. 문제는 남성 의사에 의한 여성 검진 대상자에 허용되는 프라이버시 침해 상황에서 더욱 불거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의사의 권위에 여성 검진 대상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프라이버시 접근 권한을 무기력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 환자 혹은 검진 대상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질병의 위험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에 연례 건강검진에 적용되는 신체의 부위가 개별 의사들과 해당 검진에 대한 비용 부담에 동의하는 보험회사 기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진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의례화된 정기 건강검진의 무용론을 이렇게 지적하며 반문한다.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관심과 염려의 표현이라면, 의료행위가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양성되어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의료 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51)

 

한편 저자는 연간3 달러의 산업으로 성장해버린 미국 헬스 케어 시스템 산업의 본질은 우리 몸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산업화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미국적 자기계발 운동의 맥락과 불교 신비주의적인 종교의 영향이 결합되어 우리의 마음 자본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기 통제라는 유행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보아야 것이다. 우리가 건강 혹은 건강한 상태라고 믿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미명하에, 피트니스가 자기계발과 성장의 수단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고용상태가 불안한 직장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은 퇴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서 다른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는 부지런함이나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덕적인 판단과 도덕적 의무의 문화가 개입한다. 그리고 과정에는 어김없이 건강보험의 존재 빠지지 않는다. 대목에선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피력했던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소진되고, 소진됨에 기꺼이 참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저자는 책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자본화된 의료 산업의 영향력과 의사들의 지배아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통제받게 되었음 다각도로 검토하여 보여주고 있다.       

 

 

 

건강 패러다임에 대하여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의 사례는 줄곧 내게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인 지인에게 건강이란 몸에서 측정한 수치 정상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의미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들이 존재한다. 물론 측정된 수치가 절대로 믿을만하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제쳐두고라도 매순간 변하고 유동하는 신체상태를 고착화된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참고의 기준은 지라도 지나친 신뢰를 갖는 것에도 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우리가 정상혹은 건강 상태로 여겨지는 어떤 기준이라는 것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는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제약회사나 자본의 이해관계가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 적이 있을까? 수많은 개별 인간의 편차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혹은 건강과 비건강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 기준 언저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어느 측정한 결과가 비건강의 영역으로 나왔고, 그리하여 평생 약을 먹으라고 권고를 받거나 호르몬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있다. 이건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장비로 동일 항목을 측정해보니 건강한 영역에 속했다고 하면, 과연 누구를 믿어야 것인가. 혼자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의료계가 정한 어떤 기준 분명히 건강과 비건강 대한 주의를 주고 환자나 해당자가 결과에 대처할 여지를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패러다임으로는 일시적인신체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이런 일탈의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거하는데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다. 그리고 현대 서구 의학과 약리학의 입장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다.

 

지인의 경우, 이런 건강 개념에 따르면 몸을 상하게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당장 두통이 있고 감기까지 겹친 경우, 바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오거나, 자가진단하는 경우, 감기약과 두통약을 함께 먹을 있다. 두통과 감기라는 비건강 요인이 있으며, 문제(두통과 감기) 제거가 건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에 따라 종류의 약은 함께 복용하면 혹은 다른 신체 부위에 악영향을 있다고 설명서에 나온다. 흔히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 나는 문제가 보다 분명하지 않는 몸의 회복력에 여지를 주는 편이다. 말하자면 건강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없는 몸의 상태보다 문제가 있을 때에도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포함한 상태 주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나는 몸의 상태와 감각에 보다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약을 거부하거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료를 가기 전까지의 몸에 대한 판단과정은 저자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의학이 과학과 손잡음으로써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의료 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했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의학이 실험 과학으로 여겨지면서 의료 행위 자체가 샘플 등의 데이터를 필요로하는 채취산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의료 검진에서 혈액, 소변, 혹은 조직 채취, X-Ray CT스캔 장비의 영상 자료 다양한 장비와 기구를 사용한 후의 증거, 신체에 대한 수치가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분명히 과학적 의료 개념 공격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신체 데이터의 권위가 너무 확고해지거나 비대해짐을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말하는 자신의 병력이나 보다 자세한 증상에 대한 정보는 실증적 데이터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로 처음 사망한 사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리고 데이터에 대한 신뢰의 형성에는 어김없이 건강 보험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보험회사의 경우, 확고한 증거에 기반하여 보장할 있는 치료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의 입장에서 치료 범위의 문제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으로서의 의학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음을 상기하며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시 건강 문제로 돌아가보자. 건강에 대한 나의 관점은 한편으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건강해지기 위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고, 이에 더하여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비난까지 곁들여지게 정황에는 민영화된 의료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없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결정짓는 미국적 요소에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문화(근면한 자들의 자기계발 문화) 신비주의적 종교의 요소(뉴에이지 문화, 신비주의적 자기계발 문화) 해당된다. 특히 60-70년대 반문화주의의 영향과 어우러진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전체론의 관점은 내가 우리의 신체를 생각할 신뢰하고 주목하던 관점이었다. 전일적(holistic) 관점이라고도 하는 전체론의 관점은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으며, 심신이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몸과 마음을 독립적인 개체로 보았던 심신이원론의 데카르트적 관점은 일찌감치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는데, 아마도 신체가 기계같이 느껴지도록 했던 관점이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건강 문제를 어떻게 있을까. 아마도 서로 독립적인 신체와 마음의 개별적인 건강 개념이 필요할 같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나아가면,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대 생물학이 20세기 중반에 DNA 구조 역할에 대한 발견으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전체론적 시각은 분자 수준의 기능을 넘어, 신체의 부분의 협력과 조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

 

이번 독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의 , 건강에 대한 기존의 관점(환원주의 전체주의 관점)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사례였다. 바로 백혈구의 일종인 체내 대식세포의 이중적인 역할과 세포들의 개별적인 자율성에 대한 발견 사실 때문이었다. 대식세포는 신체의 외부에서 침입하는 세균 등을 잡아먹거나 노화된 세포를 먹어 청소하는 좋은세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대식세포가 암세포와 결탁하여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돕는다는 결과였다. 암환자들은 면역력을 강화해야 암을 극복할 있다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의 지식 수준으로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대식세포가 심근경색이나 뇌졸증은 물론이고, 관절염과 당뇨병에 긴밀히 관여하며, 심지어 치매와 우울증, ADHD, 노화와 여드름까지도 관여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뿐만 아니라 대식세포는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단순히 타자(침입 세균, 혹은 노화된 세포) 먹어치워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식세포는 무엇보다 타자 구별하여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대식세포가 공격할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놀라면서 지적하고 있는 상황의 함의는 무엇일까. 의학계에서는 신체의 면역체계라는 관점에서 대식세포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대식세포가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자체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자율성을 갖는 대식세포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달리 유기체 전체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있는존재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저자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가까운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세포들의 집합체에는 이들을 통제할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엄청나게 다양한 세포들의 공동체이며, 면역체계는 비유적인 공생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구성 요소들 사이의 갈등과 동맹을 포함하는 전장이기도 하다는 뜻이된다. 저자는 대식세포가 보여주는 배신행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몸의 세포들을 연결하는 모든 화학적, 전기적 커뮤니케이션에도 불구하고 다툼과 혼선이 발생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조화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까지 모두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17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첨단 과학의 도움과 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구축된 현대의 여러 제도적 측면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여기저기에 우리의 건강에 대한 배신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주위의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그저 수용하기만 해왔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건강의 배신 자본의 영향으로 구축된 현대의 의료 산업의 현주소를 재검토해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는 얼마나 의료화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건강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말이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책의 서론에서 독자에게 전하는 본인의 바램 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책은 의료 산업이나 우리의 건강 프로젝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있으며, 주체적으로 우리 삶의 결정권을 어떻게 획득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로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고민하고, 판단하는 일이 것이다. 저자는 분명히 의료의 혜택을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다음과 같이 슬쩍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예방 의료를 거부한 데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의료화된 죽음이라는 고문에 반대할 아니라, ‘의료화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이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는 축하할 가치가 있다.”(32)

   

나는 부분을 바바라의 건강 선언으로 이름 붙이며 마무리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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