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존재의 나들목에서 저항하기,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기
- 보후밀 흐라발의《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모국어로 쓰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판매 금지된 이 작품은 작가가 66세(1980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언어로 공식 출간되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한탸라는 인물이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생쥐들과 함께 삼십오 년 간 책과 폐지를 압축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는 그는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들이고자 했다. 기계를 외삼촌 집의 정원에 두고 매일 폐지 한 꾸러미씩 만드는 삶을 꿈꾸었다.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지식인들이 겪었던 수난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압축기 속의 책과 폐지처럼 억압 받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소설 속의 철학교수, 중앙난방 제어실의 근무자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 청소부, 성당 관리자등이 그런 예다. 지식인들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체제가 강요하는 상식과 충돌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소설에는 하구수에 사는 회색 쥐와 검은 시궁쥐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수구는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은유였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쥐들은 전쟁을 벌였고, 결국 검은 시궁쥐가 패배했다. 시궁쥐는 추방당한 지식인들이었다. 나치가 대학을 폐쇄되기 전까지 흐라발은 법학을 공부했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이런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다른 지식인들처럼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폐지 작업공은 그 중 하나였다. 소설에는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탸는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들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 그는 단지에 받아 놓은 맥주를 마셨고,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곤 했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 이것이 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 작업 중 발견한 희귀 도서는 집에 가져가 쌓아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십오 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비록 목욕이라면 질색인데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머리는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웠던 이유다.
한탸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젊은 시절엔 그에게도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비록 똥에 얽힌 사건으로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라하 교외에 사는 옛 연인 만차를 보러 갔을 때, 한탸는 잿빛 머리가 된 그녀의 새 집을 보았다.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정신적인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남자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러브 스토리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쥐들이 책을 올려둔 천개를 갉아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했던 한탸는 젊은 시절 그의 삶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탸의 퇴근길에 따라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집시 여자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녀는 저녁 장작용 널빤지를 구해와 매일 불을 지피고, 스튜와 소시지로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사라졌다. 게슈타포에 붙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나들목 - 폐지 압축기
사랑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마다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되뇌었다. 이 말은 소설 전체에서 되풀이되어 발견된다. 무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을 응시하는 화자의 만트라였다. 마치 냉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한탸가 다루는 압축기에는 두 가지 색의 버튼이 있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44) 한탸가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이 표현은 언제든 삶의 관성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직관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에겐 세상만사가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69)이었다. 현실은 한탸의 삶에 결코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압축기의 ‘왕복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기 이루어지는’(37) 세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던 화자는 사람의 환영을 보았다. 《성경》과 《도덕경》의 주인공 예수와 노자였다.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하듯 예수와 노자는 각각 ‘미래로의 전진/낙관의 소용돌이’와 ‘근원으로의 후퇴/출구 없는 원’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에 대응하기도 한다. 폐지가 작업장에 도착하여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노자)이었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예수)인 셈이었다. 유명 화가의 복제화와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면, 폐지 꾸러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꾸러미는 이제 새로운 예술작품이 되었다.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물성을 지닌 책과 폐지를 맨손으로 꾸리는 작업은 한탸가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장이 자신의 뇌와 혈관에 스며들게 하고,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또 폐지 더미 속에서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으로 조기 출근과 2시간의 추가 근무를 삼십오 년째 마다하지 않았다.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작동시키며 폐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삶 자체였다. 연인과의 사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압축기와 함께하는 작업은 그에게 유일하고 ‘온전한 러브 스토리’였다. 그러므로 압축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삶의 구심점이었고, 세상만사를 통찰하게 해주는 사유의 토대였다. 세상만사의 원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기계를 통해 이해되었다. 기계 속의 책처럼 존재를 억압하더라도 한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꾸러미처럼, 모든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기는 모든 존재가 거쳐 가는 나들목이었다.
추방당한 이방인,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다
행복한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들어선 후 견고하게 보였던 한탸의 삶도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압축기를 보러간 그는 폐지가 지닌 종이의 감촉,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한 채 장갑을 끼고 일하는 작업자들에 모욕감을 느꼈다.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새 책 더미가 그대로 폐기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는 젊은 일꾼들에 용기마저 잃었다. 휴가 및 여가 계획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업자들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량을 채우느라 한 번도 휴가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99)라는 독백에는 평생 일해 온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좌절과 체념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거대한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한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기계부품처럼 다른 작업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제 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나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 온 일꾼들은 한탸의 압축기로 불과 한 시간에 다섯 꾸러미를 만들어냈다. 청년들을 칭찬하는 소장을 뒤로 하고 한탸는 피로감과 굴욕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새로운 상황과 기계는 그를 배신했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의 작은 기쁨을 짓밟았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산업 현장에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106)는 말에는 깊은 좌절감과 극도의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한 순간 삶이 뒤바뀐 한탸에게도 변화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비인간적인’ 작업 방식을 거부했다. 작업장을 나와 여러 술집을 전전한 그는 맥주와 럼주를 번갈아 마신 뒤 다시 같은 카페로 돌아왔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미래로의 전진’, ‘낙관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로부터 떠올린 ‘근원으로의 후퇴’, ‘출구 없는 원’ 주변에서 맴도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한탸는 평생 동안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는 책과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러브 스토리에 온전한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일까.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131) 압축기에 들어간 한타가 절대 고독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듯 떠올린 이 말이 내게 못 박히듯 들어왔다. 평생 몸담아온 장소와 시간의 역사가 부정당한 존재가 저항하며 홀로 내뱉은 선언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작업 조건, 나아가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의 모순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허먼 멜빌이 창조했던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합리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한 일에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 만에 작업 거부를 통해 수동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작업장 밖에서 방황하다가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죽음을 택했던 상황은 사망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의 행보와 대척점을 이룬다. 나아가 한탸와 바틀비의 비타협적인 거부 행위는 단지 행위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대되었던 순응적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무화한 것이다. 두 인물의 저항은 수동적이나마 자본가들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게임 규칙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탸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 백지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압축기로 들어가며 ‘삶의 근원으로 후퇴’하기로 한 ‘선택’은, 감옥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틀비의 ‘선택’과 접점을 이룬다. 두 인물 모두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의 행위는 상식이 폭력으로 작용하며 존재를 소외시키고 추방하는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긍정행위다. 한탸가 간파했다는 그리스도의 냉혹한 말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37)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소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다. 흐라발과 멜빌의 소설은 정치 및 경제 여건의 변화로 추방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틀비와 한탸는 세상의 게임을 만든 설계자·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패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규칙과 상식을 거부했고, 인간적인 삶의 본질을 관통하며 흐르는 존재의 가치를 지켰다. 한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탸가 간 길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비인간적이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1]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9)
[2]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
[3]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
[4]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18)
[5]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37)
[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바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44)
[7]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46) -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문구를 풀어서 되뇌는 화자의 만트라.
[8]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9]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93)
[10]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6)
[11]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129)
[12]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