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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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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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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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이건 더 베스트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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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선보인 작품이 하나 뿐이지만 입문자들에겐 더 없이 좋은 첫 만남일수도요~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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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 알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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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존재다


,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알렙] (2026)





시간을 살아남아 이제는 고전이 된 유토피아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이다. 그의 글을 읽지는 않아도 이 작품은 텍스트로서, 문학으로서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청빈하고 공정한 재판관으로도 존경을 받았던 모어는, 헨리 8세의 권위에 맞서 옳지 않다고 믿었던 가치에 반대하고 비판하다 결국 참수되고 말았던 비운의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의 억울한죽음이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건설되었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한 문학 교수의 여행기에는 과거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고 결국 우울한 결말을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들이 즐비하다. ,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의 저자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는 멕시코 출생의 문학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학자이기도 하다. 또 단편소설과 연대기,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저자가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대부분 폐허의 흔적만 남은 장소를 찾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학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문학을 연구하며 또 스스로 문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유토피아란 하나의 텍스트이자 문학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문학의 힘에 깊이 매료되었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신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182)임을 이미 간파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의 글은 여행기이면서 일종의 연대기이다. 다만 저자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149)는 바람을 내비치는데,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의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게 그의 여행은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명료한 판단과 구분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되었다. 책 밖으로 나와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단지 새로운 앎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무지가 더욱 드러나는 계기로서의 여행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모든 여행이 거대한 오해의 과정”(277)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여행자라면 여행한 장소에 대한 앎이 더욱 빈곤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그의 말처럼 여행에서 기록자는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여향자란, 결국 여행에서 무지의 지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폐허가 유토피아에서 발견되는 특징들


저자는 과거 한때 유토피아가 시도되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장소를 방문한다. 설립된 년도만 보더라도 1539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4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세상에 나왔으나 대부분은 사라진 이상향의 실험 장소들을 섭렵한다. 하지만 이상향에 대한 논의는 단지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가 등장하여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며 함께 살아온 이상,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이 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인간의 살아감이란 문제가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든 결코 녹녹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보자면,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회도 많은 이들에게는 지옥과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현실의 녹녹치 않음이야말로 위정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지금의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라 설득하기 수월하게 해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한인들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떠나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넘어 북쪽으로 건너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실패한 유토피아는 일종의 성공적인 재앙’(88)을 남겼다. 유토피아에 대한 실험은 대부분 실패했다.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했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파라과이에 설립되었던 누에바 게르마니아처럼 지독히 인종차별적인 시선과 타 민족에 대한 아리아족의 우월감, 그리고 현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 현지 자연 환경에 대한 무지와 같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유토피아를 지지하던 이들이 지닌 타자에 대한 도덕적·신체적·문화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배타성은 결국 스스로 섬이 되고 밀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곳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유토피아의 시간성 역시 특징적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오븐에서 갓 꺼낸 빵 속에 있다’(88)는 표현처럼, 아직 손을 대고 시식을 하기 전의 빵에만 존재하는 관념 그 자체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고,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인간이 모이면 유토피아는 이미 서서히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화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193)을 띠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시간의 순서와 무관하게, 오로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붙들려 과거를 소급하거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몰두하는 영화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유토피아의 시간성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일 수밖에 없을 터다.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기획했던 이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곤 했던 이유를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건 인간의 삶이라는 조건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으레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건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사건 앞에서 살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과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늘 지옥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굳이 치안도 불안정한 폐허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도 한 때 존재했던 사회의 꿈과 악몽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으리라. 저자는 어느 사회의 꿈과 악몽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 여긴 듯하다. 이 작업은 과거나 미래에 집작하는 유토피아의 시간성에 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비로소 현재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들여다보는 일은 창립자로 대표되는 당대 인간들의 욕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 건설의 전망과 수행 과정, 그리고 실패 혹은 재난의 잔해 위에 반복해서 세워지는 인류 존재의 원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인류학자가 인간은 문화에 중독된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유토피아라고 하는 문화적 관념에 중독되어 있는 존재는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시대와 상관없이 그런 곳은 없는어딘가를 늘 꿈꾸어온 까닭일 터다.

 


작가는 대개 폐허로만 남은 유토피아의 흔적을 답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현대적인 유토피아,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의미의 산타 페를 주목해 본다. 에스파냐 식민 세력이 신앙을 전파하며 멕시코의 이 지역을 점령했던 것처럼, 20세기 말에 기획된 유토피아적 도시는 여전히 인류 존재의 원리로서의 유토피아를 증거한다. 도시로서 산타 페는 신에 대한 믿음, ‘신이 죽은 시대를 대체하는 믿음이 이제 자본과 신자유주의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믿음이라는 문화적 기호는 이제 단지 새로운 기호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모든 이들의 혐오 지역이었을 법한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이 신자유주 유토피아는 수평으로 확장되고, 수직으로 자라나며 기존의 도시들과는 다른 하나의 섬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배타적인 섬이 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신흥 현대 도시 산타 페는 유토피아의 이중적인 시간성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면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산타 페는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한 말,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다는 말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인 단서가 된다. 이에 유토피아는 줄곧 혼돈과도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한 책임과 마주보기의 실패 혹은 회피를 전제해온 듯하다. 지금 내 발 아래의 현실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늘 현실 밖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토피아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문학이라 말하지 않았는가. 문학의 상상력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비폭력적인지, 본래부터 선한지 혹은 악한지와 무관하게 허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인간의 초상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이 유토피아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현실이라는 악몽과 이상향이라는 꿈을 늘 꾸어온 존재로 보였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대목은, 아마존의 밀림 한복판에 건설되었던 고무 플랜테이션 도시 포드란지아에 대한 글에서였다. 밀림 속의 폐허로 남아 있는 이 공장 터 주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포드란지아를 기획하고 수행했던 이들의 신념을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 지역 주민 대다수는 오히려 열대림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의 어느 가게에서 저자에게 탄산수를 건네주던 여종업이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35)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종업원과 연결됨을 느꼈다. 인간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 이 지루함의 공백을, 미치지 않고 살아나가려면 유토피아 같이 기댈 곳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결국 인간은 결코 유토피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시대와 장소를 떠나 유토피아를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유토피아는 면 과거에 존재했으며, 미래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포드를, 유토피아를 기다린다.





 

[책속으로]

[1] "유토피아는 관념이 실현된 곳과 관념 자체가 동일시되고 혼동을 일으키는 환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하나의 텍스트로 있었다. 예컨대 유토피아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정치적인 선언 가운데 위치한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 - P11

[2] "한 사회가 지닌 꿈과 악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P12

[3] "모든 유토피아는 창립자들의 도덕적·신체적·정신적 혹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배타성을 띤다. 이는 어느 폐쇄적인 종파가 지닌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17

[4] "그런데 빵집 이름이 왜 포드인가요?"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아마존 밀림 속 포드란지아 인근의 가게 여종업원과의 대화 - P35

[5] "사랑해 본적이 없는 사람만이 사랑이 지루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인종차별적인 유토피아(누에바 게르마니아)를 실험하고자 했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엘리자베트 니체 부부의 묘비명을 본 저자의 단상. - P137

[6] "누에바 게르마니아는 밀림 한가운데에 농업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지역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지 않아 실패했다. (...) 유대인이 없는 아리아 사회를 유럽 밖에 건설하겠다는 꿈은 1890년 파라과이의 누에바 게르마니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 유토피아 실험이 4년 만에 실패한 이유 - P141

[7] "나는 내 생각들에 바람을 쒸어 주고 싶다. 생각과 함께 걷고, 생각을 뒤쫓고, 그러다 생각을 잃어버리고도 싶다. 손에 쥐었다가 놓치기도 해야 계속 길을 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
- 저자의 글쓰기 지향점 - P149

[8] "나는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하고 있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다. 무심하면서도 집요하게. 나는 의심하기 위해 여행한다. (...) 여행은 의심을 강화하기 위해, 그 의심이 마음껏 자라날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그 의심들과 하나로 얽히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 P153

[9] "이 땅에는 온갖 광신자를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 P167

[10]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들 - <멋진 신세계>부터 <1984년>까지,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작품들 - 과 유토피아들은 본질적이면서 숨 막히는 특징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동성이다. 두 세계 모두 변화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가능성조차 고려되지 않는 궁극의 사회를 그린다." - P168

[11] "지상에 펼쳐진 지옥 앞에서,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이든 -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까지도 - 이 지옥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기 때문이다." - P177

[12] "유토피아는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토피아의 무시무시한 힘이 나온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실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P182

[13]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을 띠게 된다." - P193

[14] "본질적으로,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독립 국가의 탄생에는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 P222

[15] "모든 여행은 거대한 오해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비롯된 오류와 혼란으로 점철된 이미지 몇 개를 간직하게 될 거다. (...) 어떻게 하면 한 나라를 오롯이 알 수 있을까? (...) 나는 실패한 기록자이자 허황한 관광객이었다. (...) 그리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 P277

[16] "멕시코에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이 지역(산타 페)은 국가가 선물한 땅의 쓰레기장 위에 세워졌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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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2026 서울형책방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작품으로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유명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블레이드 러너 2049>(2021)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거리가 풍성할 수 있지만 워낙 널리 알려진 나머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제법 오던 주말 아침이어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요, 빗길을 뚫고 멀리 제주에서 온 분도 계셔서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모임 2시간 동안 길게 느끼지 않고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번 읽기는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느슨하고 불완전한 읽기 모임이었죠. 그럼에도 소설의 배경과 작가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이어서 보이트-캄프 검사 장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검사는 안드로이드(합성 세포이지만 인간처럼 만든 유기체)가 감정 이입(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특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구요.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 릭 데카드가 안드로이드를 찾아내는 데 쓰던 테스트였죠.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한 인물은 특수인(specials) J.R. 이지도어였습니다. 그는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부작용에 지능도 떨어지는 인간, 인류 대부분이 화성으로 이주할 때 배제된 존재였죠. 문제는 그가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혹시나 데가드가 이지도어를 안드로이드로 판정했다면, 이지도어는 은퇴(사살)’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대로 공감능력이 월등히 개선된 안드로이드가 이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면, 우리는 이들을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저는 이지도어에 주목해보고자 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낙인도 모자라, 낙진이 세상을 덮고 있던 지구에서 결혼과 자녀를 낳는 것도 금지된 인물말입니다. 그는 특수인이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치킨헤드라 불리며 차별당하고 타자화되어버린 존재였죠. 심지어 안드로이드들은 현상금 사냥꾼으로부터 달아나고자 그를 이용하려 했죠. 반면 이지도어는 정체 모를 안드로이드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지도어는 화성으로 갈 수 있었던 선택된인간과 은퇴할 운명인안드로이드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 혹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로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 이지도어의 존재에 주목하여 읽어보면 조금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지도어는 공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사회로 확장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다수가 소수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죠. 사회 속의 소수를 포용하고 환대할 수 없는 사회는, 인위적인 경계 짓기의 효용성을 넘어 결국 서로를 타자화하고 나아가 인간성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필립 K. 딕이 우려하던 바였지요.

 


주어진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이지도어가 인용한 영국 시인 존 던의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작품 전체에서 던지는 질문,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은 이 영국 시인의 문장 앞에서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참가자분들은 이 작품이 1968년에 발표되었지만, AI가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온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해주셨습니다. 비 오는 주말 아침에 함께 생각하고 좋은 의견을 나누어주신 참가자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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