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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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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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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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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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논의, 충만한 삶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히포크라테스] (2026)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서 생각하곤 한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문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 모바일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며 화면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로 열차 안이 가득하다. 긴 지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이 열차에 탄 모든 이들이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흔들리며 함께 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 열차에 탄 사람들은 단지 이 순간 병원에 있지 않은 것뿐이지 않은가. 집안에 오랫동안 아픈 환자가 있었던 이들은 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픈 사람이 많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 조심성 없이 밀치면서 지나가던 이들이나 내가 막 앉으려던 자리에 잽싸게 끼어들어 앉고야 마는 이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결국엔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죽음은 태어난 모든 생명체에게 최종 목적지와 같다. 생의 완성인 것이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말했듯이 죽음이란 늘 타인의 죽음이기에, 죽음 이후의 두려움 따위란 무의미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겪게 되는 운명이지만, 살아 있을 때 경험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갖는 두려움이란 사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일 터다. 여기에는 무엇보다고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는 딱 지금의 내 나이, 지천명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40을 넘기기 시작한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지천명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교통사고나 전쟁과 같은 문명이 가져온 부작용을 제외한다면 지금껏 인류의 대부분은 자연사했다. 이제는 각종 의료 기술과 도구의 발달로 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어나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은 절차가 되었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이하 연명치료)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양성관이 20년에 이르도록 수많은 환자를 진찰하고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저작이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에 집안 어르신 두 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고부터다. 한동안 우리 집안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이 없었으나, 저자가 강조하듯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한 분은 암으로, 또 한 분은 치매를 비롯한 만성 질환을 앓고 사망하셨다. 죽음에 특별한 예외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연명치료에서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임종에 이르는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누구인들 고통이 가득한 반면, 무기력하게 수명을 연장하다 죽음을 맞고 싶겠는가? 저자는 바로 이 문제를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이 책에서 독자와 우리 사회에 질문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초등학교 당시만 해도 가족의 죽음이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어느 새 죽음은 그에게 익숙한 자신의 방이 아닌 병실이 되어 버렸다. 저자가 언급하듯, 우리 사회는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과 같은 일이 있고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죽음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왔지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죽음은 기피의 대상으로 치부되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회피해야할 소재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생명 존중의 가치와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득 작년에 돌아가신 어르신도 생전에 늘 연명치료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셨다는 게 생각났다. 가족은 모두 공감하고 그러겠노라 했음에도, 막상 돌보는 입장에서 치료 중단을 요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한바와 같이,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담당 의료진에게뭐라도 해주세요라는 절박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로에 서서 절망한다. 남은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약으로 항암 치료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 한 가지 더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의료진의 입장과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연명의료결정법이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하거나 시행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기에 임종에 이르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보다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여기에 종교계, 법조계, 윤리학계, 시민단체 등이 이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감지할 수 있다. 이제 현대인의 죽음은 사회가 정한 법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노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다고 한다. 특히 가족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온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장래 역시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걱정거리들을 던져 주기도 한다. 나이가 더 들면 몸에 이상이 생기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될 터인데, 여러 가지 사안이 바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핵가족화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나이듦이란 새로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돌보아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의 경제력으로 치료 및 돌봄을 여유 있게 받을 수 있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두려움도 있다. 저자가 일본의 간병 살인 사례를 든 것처럼, 혹시 내 병이 오랜 간병의 절차를 의도하지 않게 필요로 하게 된다면 내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존엄하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전한다. 종교계나 법조계 등의 관점도, 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좀 더 유연하게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 90세 건축가 할아버지는 텃밭이 있는 아담한 집에서 87세의 아내와 함께 살아왔다. 어느 날 아침에 할아버지는 텃밭에 앉아 쉬엄쉬엄 일을 하고는 집에 들어와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곧 낮잠을 자다가 아내 곁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았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였기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실화였고, 영상도 실제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기에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마지막 모습의 롤모델이 이 영화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이처럼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죽음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는 질병을 앓고 고통을 받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다.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본가를 다녀온 후 어머니와 통화할 때, 어머니는 이제 막 산책을 나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프지 않으려면 (그래서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수화기로 넘어온 이 말이 가슴에 쿵 하고 박히고야 만다. 태어난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없으나, 생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마지막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책에 소개된 스위스의 안락사나 화려한 요양병원 시설을 이용할 여력이 되지 않는 나에게 우리 나라가 OECD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고, 70-80대의 자살률이 10대의 자살률보다 7개 높다는 통계는 충격적이고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이것은 바로 나의 미래일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책에서 제기하는 다양한 이슈들, 이를 테면 연명 치료 중단이나 완화 치료, 의료조력사망, 그리고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막막하게 느껴지던 현실을 좀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저자가 죽음은 단지 의료나 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다.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120)라고 던진 메시지를 이제는 꼭 붙들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관해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과 진지하고 열린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때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남아 있는 각자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연명치료는사양하겠습니다 #양성관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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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까치] (2026)

 




언제인가 세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종의 기원을 읽어보려 시도한 적이 있다. 성공했다면 번번이 아는 척을 했겠지만 나는 그때마다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책의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일상이 그만큼 번잡하고 산만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깜빡이는 배너 광고와 SNS에서 날아오는 알림을 확인하는 일이 밤에는 진정이 되지만, 이번에는 스포츠와 가수의 영상이 넘쳐나는 온라인 플랫폼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나이가 들면서 노안 문제를 제외하곤 그나마 꾸준히 책을 읽어온 내가 책을 읽는 일이 점점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 활동으로부터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 가운데 종의 기원은 여전히 내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 가운데 상위권에 올라 있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책읽기 과정에서 파악한 나는 머뭇거리고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이하 읽은 척) 나의 게으름과 미루기 신공을 보완해 줄 비결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세상에는 나처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고민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먼저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이 읽은 척은 다윈의 저서를 읽기 위한 워밍업 내지는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 읽은 척이 단순히 종의 기원을 자세히 요약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과학이 오류로 판명된 다윈의 설명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윈의 오류를 알고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된 진화의 지식을 갖추고 다윈의 저서를 읽는 일은 그 반대로 시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처럼 미루기 신공의 마스터들에게 이 읽은 척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다윈의 삶과 진화론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읽은 척을 읽는다면 정말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보상이 있다. 제목대로 종의 기원읽은 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와 같은 미루기 신공족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다. 단 이 읽은 척을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 미루기 신공족들이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내가 읽은 척을 시연할 대상을 명석하게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종의 기원읽은 척을 하려 한다면 우선 상대방의 전공이 적어도 생물학 전공은 아닌지 부터 확인 하고 시도할 일이다. 지피지기면 백전일승은 할 수 있을 게다. 여기에 더하여, 소개팅 상대방이 얼마나 폭넓은 교양을 지니고 있는지 다방면으로 질문하고 파악할 것. 상대가 음대생이라고 해도, 매우 희박한 확률로 내셔널 지오그래피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 덕후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은 부모님이 생물학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말이다.


 

한편 소개팅 자리에서 이 모든 읽은 척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있다. 상대방에게 시도하는 읽은 척이 효과가 있을지 알아내는 동안 상대방에게 던진 다양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좀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또 알겠는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되거나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읽은 척은 우선 다윈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종의 기원을 읽어 내기 위한 워밍업을 보장하는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혹은 읽지 않아도 좋을 만큼 최신의 과학 지식으로 업데이트 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 문헌을 얻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도 해당이 안 된다고 해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 것. 당신이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종의 기원읽은 척하여 내가 지적으로 보이도록 도와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와일드카드로 기능할 수 있고, 동시에 읽은 척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 공세로 상대방을 보다 잘 알게 되고 더불어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필살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읽은 척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장점들을 장착하고 있다. 비용대비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읽은 척을 다 읽지 않아도 읽은 척함으로써 한 번 더 책을 열어보고 고민하게 되니 얼마나 건전한 읽은 척인가. 게다가 이 책을 구입함으로써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건 굿즈와 함께 따라오는 예기치 못한 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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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과학사 교과서
정인경 지음 / 이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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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과학사 교과서

 

정인경 지음 [이음] (2026)

 



최근에 혼자 생각하곤 하는 질문이 있다. ‘과학을 왜 공부해요?’라는 질문과 인류는 지구에서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이다. 누군가 나에게 과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물어보았을 때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섬주섬 어렵지 않은 용어로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자문해보곤 한다. 게다가 올 여름 뜨거운 열기로 실감하게 했던 기후위기 시대에 인류 문명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를 종종 상상해본다. 이건 진지한 환경활동가처럼 어떤 행동으로 실천해야한다는 의무감보다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일종의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학저술가, 과학사연구자 정인경의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를 읽는 동안 나 혼자 자문해보던 이 두 주제에 대한 고민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2022년도에 개정된 고등학교 과학사 <과학의 역사와 문화>를 집필했다. 이 책 과학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저자가 과학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고민했던 주제들을 후기처럼 들려주는 성격의 책이라 느꼈다. 교과서의 정제된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에 숨어 있는,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이 책에서 보다 진지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저자는 과학 공부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었을까? 내 나름의 설득력 있고 세련된 표현을 찾지 못했기에 나는 저자의 견해가 궁금했다. 들어가는 글에서 그는 (과학) 지식이 왜 중요한지 알고 자신의 삶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11)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달리 말하면 과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나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진 과학의 상업화를 지적하며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지닌 위상과 역할이 달라진 현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과학의 공공성과 메타 학문으로서 과학의 역할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시대가 지나며 과학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과학의 목표 또한 과거와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과학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과학사는 메타 인식을 하도록 도와주는 채널일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과학이란, 절대적 진리를 확정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과 앎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검증 받아온 믿음 체계 혹은 방법론에 가까운 듯하다. “과학은 지난 40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에서 살아남은 지식”(12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여태껏 신뢰를 더 쌓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메타 인지적 절차, 끊임없는 비판과 토론의 과정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우주의 법칙을 찾는 것이나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같았(73)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한편으로 나는 저자가 인류의 문명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를 묻는 대목에 관심이 갔다. 인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결국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인류가 겪게 될 문명의 죽음이 얼마나 가속화될 것인가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활동, 자원을 착취하는 행위로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은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최근 네팔의 산지에서 발생한 대홍수 사태를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환경의 변화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올 때 환경 변화에 취약한 계층이 더 많은 희생을 겪게 마련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인류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함께 붙들고 해결할 마지막 타이밍을 놓쳤다고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러한 문제는 지식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는 과학 교과서를 통해서 인식하고 생각해보기에는 부족하다. 저자는 과학사에서 우리가 처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여긴듯하다. 조금 낯선 입장이긴 하지만, 저자는 과학사로부터 인류에게 필요한 윤리적 입장을 발견하고 이야기해 볼 수 있다고 본 듯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탐구 일변도의 관행과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 전에 과학의 방향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여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다행히(?) 과학은 가능하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은 과학적 상상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부터 주목하는 철학과 윤리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 집단의 책임과 열린 자세, 과학 행위의 공공성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고 우려하는 과학의 상업화 현실에 개개인이 거리를 두고 균형감을 갖게 해주는 도구가 아닐까. 이제는 시민과학이라는 표현이 익숙해졌다. 시민과학의 관점에서 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들도 과학과 기술이 수행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제 인류 공동체의 삶을 결정 짓는 문화이자 사회적 합의의 산물로 우리의 삶 속에 공고히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선의 가능성과 실패에 따른 위기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의 가능성과 일련의 수행 과정이 열린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적 절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과학적 상상력이 인류 문명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당장 임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예상해 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10년 가까운 트로이 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트로이 왕국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 가운데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했던 인물인 카산드라가 있다. 트로이가 맞이한 비극은 트로이 왕국의 운명을 카산드라가 예언했지만, 그 누구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의 멸망에 대비할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인류의 운명을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과학적 상상력이 예측하는 인류의 위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은 트로이 왕국처럼 되지 않을까.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과학적 상상력은 카산드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과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학 활동에서의 민주적 절차임은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과학 활동으로 축적된 지식과 판단 체계가 주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곧바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곧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한 책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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