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을까? - 브루투스 vs 카이사르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3
박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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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브루투스 너마저! 

 

   

이는 모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정치를 했었고  로마시민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던  1인 지배자가 되어 각종 사회정책, 역서의 개정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당한 카이사르가 남긴 명언들입니다.

 

무장해제를 명받은 루비콘강을 무장한채 건너며 했던 말이 주사위는 던저졌다였고

소아시아 지역을 평정한 직후 로마 원로원에 보낸 보고서에 적혀있던 말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였으며

그의 권력과 독재를 두려워한 로마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할당시 남긴 말이 바로 브루투스 너마저 였던 것입니다.

 

역사속 대립되는 두 인물을 통해 세계사를 이해하게 만드는 자음과모음의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3번째 이야기는 바로 공화정에서 황제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로마사를 정리해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두 인물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통해 복잡했던 당시 로마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답니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3번째 브루투스 vs 카이사르

 

 

 

일찍이 민주주의가 발전했던 로마는 공화정 정치를 하였으며 귀족과 평민간의 지위동안 오랜 투쟁끝에 겉으로나마 평등함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원로원 300명중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을 선출했으며 집정관 2명중 한명은 귀족 출신, 다른 한명은 평민출신에서 선출되었고 전쟁때에는 독재관이 있어 안정을 기합니다.

그러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펼치며 코르시카, 마케도니아,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등 넓은 지역을 정복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카이사르의 인기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한 카이사르의 세력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 원로원의 대립과 평민들의 권력을 더 이상 인정하기 싫었던 귀족들의 계략에 의해 로마 공화정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최고의 장군 폼페이우스와 최고의 재산가 크라수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의한 3두정치시대가 열리며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무장한 채 루비콩 간을 건넌 사건으로 인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결국 적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지요.

 

그 후  잠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협약으로 제 2차 섬두정치 시대가 이어지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왕제에 오르기에 이릅니다.


  

 

 
 

그 와중에 우린 역사속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추앙받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크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에서 역사의 한 축을 이루는 사건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수도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과연 독재자였던걸까 ?. 그래서 그는 죽어야만 했는가 ?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한 인물의 평가는 고대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바탕이었습니다.

 

카이사르와 얽혀있던 인물관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고대로마의 역사가 보이고, 왜 그가 죽어야만 했는지의 대한 사실을 알아가는 데 에서는 공화정에서 황제시대로 넘어가는 로마의 정치사가 투명해져왔답니다.

 


 

 

 

세계사도 그러하고 우리의 역사도 그러하고  보통 역사공부하면 인물, 연대, 사건을 중심으로 달달달 외우는 공부가 되기 쉬운데 그리하여 개념보다는 단편적인 지식이 되곤하는데 역사공화국 시리즈는 이해하는 역사, 개념을 확인하며 연관관계를 찾아가는 공부가 되어주니 좀 더 확장된 역사관과 기본이 탄탄한 역사공부가 되어주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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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4.19 혁명이 일어났을까? - 장면 vs 이승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7
박은화 지음, 이남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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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 모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시리즈 57권 왜 4.19 혁명이 일어났을까 ? 

장면 대 이승만의 법정 대결로 살펴본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헌번 제 1조 제 1항 , 무슨 주문과도 같이 뇌까리게 되는 말인데  헌데 우리 아이들이 민주 공화국이라는 말을 잘 아느냐, 민주주의 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나 그래서 사회과목을 어려워하고 역사공부를 싫어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거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직접 겪어 왔고 엄마 아빠 세대는 간접경험과 보고 들은것이 많았던 반면 이제 중학생이 되고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에겐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생소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자음과모음의 한국사법정 57권 왜 4.19 혁명이 일어났을까는  그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민주화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6.25 전쟁과 휴전 남북 분단에 이르는 아픈 시간을 보내고 진정 우리가 원했넌 나라를 건설해가는 과정의 첫 출발점이었습니다.

 

 

 
 


 

 

 

36년의 일제 강점기또한 우리는 독립만 하면 될 줄 알았지요, 헌데 독립을 하고 나니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양분이 되었고 그 결과 6.25 전쟁이라는 뼈아픈 시간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과정은 그 후로도 쭈욱 이어졌던  통일이냐, 분단이냐의 분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분단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남과북의 분단은 확정이 되었고 장기집권이 이루어졌었고 그렇다면 그토록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은 과연 이루어졌던 것일까 ?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신이 추구하는 생각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아직도 다르고 평가 또한 뚜렷하게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를 우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것일까 ? 책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 의도로 인한 정치 왜곡, 3.15 부정 선거와 4.10혁명의 발생, 4,19 혁명 결과와 그 이후 정치상황으로 이어지는 여러 사실들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들려주려 하고 있습니다.



 

 

 

 

4,19 혁명 하나를 두고보면 조선이 무너진 후 대한민국의 1.2.3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실정에 의거합니다. 장기 집권이라는 원인에서 출발하여 , 장기 집권을 누리기위한 부정선거와 부패선거에서 기인한것이 4,19 혁명이었으니까요.

 

 

 

 


 

 

 

4,19 혁명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치 현실, 잘못되었던 정치들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입하여 그럴 수 밖에 없었다라는 집권층의 의견과 민주주의를 염원한 시민들의 의견을 동시에 들려줌으로써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은 오롯이 책을 읽는 독자가 하게끔 만듭니다.

 

이승만 대 김구 조봉암, 조병옥, 신익회 장면등으로 이어지는 권력경쟁구조속에서도  침묵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스스로 깨어났던 4.19혁명은

지금의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 는 ~ 이다. 라는 확실한 정답이 있는 여타의 과목과 달리 다양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각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른 역사적 사실인만큼 독재로 점철되었던 그 시간, 북한의 사회주의로부터 민주주의와 국민들을 지켜야만했다라고 하기엔 당시의 정치가 너무나 혼탁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언제 결론이 날지 모르는 정치적 대립은 다양한 배경지식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등을 그럴수 밖에 없었다라는 양쪽의 법정 공방을 모두 들음으로해서  일방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라는 주입식 교육이 아닌 주체적인 생각을 하게끔 만들기에  자음과 모음의 역사공화국이 좋은 이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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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킴이 안룡복 자모역사소설 4
리성덕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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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지킴이 안룡복,  / 자모역사소설 네번째이야기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앞으로도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 분쟁 그 시발점은 공도정책이었다.

왕권이 무력해질대로 무력해진 고려 말 왜구는 우리나라의 해안지역을 수시로 침몰하였으니 그건 새로운 나라를 개국한 조선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조선왕조는 국경선을 더욱 공고히 지키기 보단 백성을 이주시킴으로써 지켜야 할 의무를 방임해버렸고 결국 그건 일본이라는 나라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외딴 섬들을 넘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격이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만으로도 우리는 일본을 절대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시대는  다 그러했다고  힘이 없었기에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너무 큰 것이다. 우선 그 발단부터 생각하자면  분명 우리이 잘못이다. 침략할줄 알면서도 대비하지 못했고 내분으로 인해 자멸하다시피 그들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의 악연은 거기까지 였을까

아니었다, 지금 현재도 진행중인 독도문제가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우리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그 땅을 그들또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될때까지 우린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한 것일까. ?

그것이 바로 공도정책이었다. 내 땅을 지키기 보단 버리고 방치했던 일, 자모역사소설 독도지킴이 안룡복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얽힌 조선과 일본간의 분쟁을 이야기 하고 있다

580페이지에 이르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난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몇번이나 책장을 덮어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야했던것은 진실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독도는 그냥 우리 땅이니까, 라는 무대포적인 사실로는 지금 이순간도 국제적인 로비를 통해 야금야금 독도를 복속시키려는 일본에 맞설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왕도 양반 관리도 조정대신들도 나서지 않았던 일을 일개 능로군이란 미천한 신분의 안룡복이 해 내었던 일 가 아니었다면 독도는 물론이요 울릉도까지 지금 일본의 영토가 되어있었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땅 울릉도에 들어가는 것을 조정에서 막고 있는 사이 일본은 대마도와 호끼주를 중심으로하여 호시탐탐 울릉도를 노렸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짓밟힌지 채 100년도 안된 시간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사실이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우리 조정에서는 벌써 그 처절했던 수모를 잊었던 말인가.

안용복이 일개 어부의 신분으로 일본에 까지 건너가 울릉도는 분명 우리의 땅임을 주장하고 있는 상이에도 조정은 이런 수모적인 편지를 외교적 답서를 보내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민들을 단속하여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울릉도에서 멀기 때문에 마음대로 왕래하는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그 밖의 땅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 어선들이 귀국의 지경인 죽도에 들어갔다가 하니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경을 넘어 들어가 함부로 고기를 잡은 데 대하여서는 법조문에 따라 죄를 지울 것이며 이 뒤로는 다시는 규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엄하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우리의 울릉도를 자신들의 이름인 죽도라 주장하며 그 영토를 복속시키려는 음모를 알고 있으면서도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우유부단한 외교적 답서였다.

 

결국엔 장희빈의 몰락으로 인해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의 판세가 바뀌고 안용복의 목숨을 건 노력에 힘입어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게 바뀌기에 이른다

 

 

우리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부속 섬이 있어서 울릉도라고 한다. 멀리 동쪽 바다 가운데 위치하여 풍파가 심하고 바다깊이 불편하므로 그곳 백성들을 옮기여 그 섬을 일시 비워 두었으나 때때로 공식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해보고 있다.

이 섬은 산봉우리가 륙지로부터 똑똑히 보이며 그 산천과 지형과 백성들이 살던 자리 토산물 등이 다 우리나라 여지승람에 적혀 있으니 력대로 전해 온 사적이 명백하다, 이번에 우리나라 어민들에 섬에 갔는데 귀주 사람들이 제 나름으로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면서 도리여 우리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우리나라 어민들이 고기를 잡던 곳은 울릉도로서 그곳에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죽두라고 하는데 이 것은 한 섬에 대한 두 가지 이름일 따름이다.

 

 

 

 


 

 

 

울릉도를 지키며 울릉도에서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들 그들만의 외로운 싸움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울릉도라고 하는 보물섬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이젠 우리들의 역활이 남아 있다. 독도를 지켜야만 하는 것 !!!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독도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알아야하는것은  일본의 정부에서는 독도를 복속시키기 위한 물밑작업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군사적 힘의 논리에 지금은 경제적 영향력까지 더해지면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한없이 조심스러워하는것임 국가간의 분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과 우리나라간 독도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인 일본의 입장과 달리 우리의 입장은 우리의 것이기에 분명 지켜야하는 절실함이 있다는것이 다를까. 그 사실 자체가 너무 원통하다. 왜 이렇게까지 이 문제를 끌고 와야했는가 .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무조건 항복했던 그 순간에도 일본이 챙겼던 그 땅,

아무 상관이 없던 나라의 잇권이 개입되며 당사자인 우리만 피해를 입어야 했던 그 땅, 

대통령이 그곳을 가든 말든, 그곳에 무슨 시설을 만들던 말든 그 누구의 간섭을 받지않는 온전한 땅으로 하루속이 만들어 당당하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또 하나의 보물섬 독도를 물려줄 날을 위해 우리모두 안용복이 되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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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별초는 최후까지 싸웠을까? - 김방경 vs 김통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19
강재광 지음 / 자음과모음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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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항쟁 * 왜 삼별초는 최후까지 싸웠을까 ?  (자음과모음)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항거하여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대몽항쟁을 펼쳤던 삼별오, 그들은 왜 최후까지 싸워야만 했을까 ?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은  그리이스도 로마도 아닌 몽골, 우리에겐 그 몽골에 대항해 비록 100여년간의 속국의 시대가 있기는 했으나 끝까지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 항쟁의 역사에 가장 큰 역활을 했던것이 삼별초였다.

30여년건 6번에 걸친 침략속에서 강화천도후 진도와 제주도를 거치면서까지 민주 항쟁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헌데 왜 그들이 역사공화국 법정에 서게 된 것일까 ?

삼별초는 어떤 부대였기에, 민란을 진압했다는데 정말 몽골 항쟁의 주력부대가 맞았던걸까 ? 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인물 구조속에서 객관적으로 짚어가본다,

 

 

 

 

 

 

그 주인공은 개경환도를 반대하며 대몽항쟁의 길로 들어선 후 마지막 격전지였던 제주에서 몽골군과 맞서싸운 김통정과 

경순왕의 후손이자 처음엔 몽골군과 대항해 항쟁하였으나 원종의 지시로 삼별초를 소탕한 고려군 총대장 김방경이다.

 

처음엔 대몽항쟁이란 같은 출발선에 섰던 사람들이 후에 쫓는자와 쫓기는자가 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대몽항쟁의 표상이었던 삼별초를 이렇게 재조명하게 된데는  무신정권 시대 최고 통치기구인 교정도감과 사병기구인 도방을 설치 자신들의 정권유지수단으로 창설되었다는 데 이유가 있다.

 

하지만 고려는 1231년 몽골 1차침임 이후 1254년 6차 침입까지 23년간이 전쟁을 치루면서 점점 쇠퇴해갔다.

그리고 다시 100년의 시간동안 속국으로 남겨지면서 결국 명망에 이르게된다

삼별초가 비록 무신정권에 위해 창설되었 1차 2차 침입때먼해도 전쟁터에 파견되는 대신 무신정권의 권력기반의 수단이 되었지만 3차 이후 그들은 민중과 더불어 대몽항쟁의 중심이었다. 5차 침임이후부터는  우리가 교과서속에서 배웠던 항쟁을 펼쳐 나갔음이다.

 


 

 


 

 

화친이냐,  끝까지 대항하느냐의 기로에서 그들은 최씨 무신정권의 몰락과함께 나라로부터 내쳐졌음이다

민란을 막기위해 창설된 부대 야별초, 국왕이나 최씨정권을 위한 군위대 마별초, 몽골 항쟁에서 포로가 되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

그들이 합쳐진 삼별초는 처음의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교과서에서 미쳐 찾아낼수 없었던 당시의 배경과 모습을 다시금 조망한 가운데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충정이었다,

 

한국사법정의 삼별초 이야기를  통해 무신정권에서 몽골의 침략 그리고 몽골의 속국으로 변화해가는 고려사를  좀 더 통찰력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음이다.

 

 

 



 

그 책 속에서는 또 하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몽골의 흔적이 많았음을 알게된다

전통혼레에서의 족두리와 연지곤지, 벼슬아치 장사치등의 접미사 치도 그러했으며 수라 마마 무시리와 같은 왕실 표현들과 제주도의 목장또한

그때의 유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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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 - 아니토스 vs 소크라테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7
육혜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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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 ?.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석가모니, 예수님, 공자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중 한 분이다.

그런 그를 생각할때면 떠오르는 문장은,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악처였다. 정도

 거기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 법정 비화정도가 있을까.

그가 무엇을 주장했고, 어떠한 사상을 펼쳤기에 유명한지는 생소하다, 

 그리고 왜 독배를 마셔야만 했는지 또한 확실히는 모르지 않을까 ?

 

 

 
 

 

 

 

교과서 속 역사이야기가 법정에 선다. - 자음과 모음의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자 아니토스는 자신의 고발로 사형에 이른 소크라테스를 또 한번

법정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왜  소크라테스 사후 위대한 성인을 죽음에 이르게한 사형의 주동자가

되어 비난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치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을 만난다.

 

 

 
 

 

 

 

 

나는 포악한 과두정 인사들과 맞서 민주정을 지키려고 애썼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간의 역사속에 민주정치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을 거요.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이오.

^

아테네 민주정에는 분면 여러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민주정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정의로운 국가를 꿈꿨을 뿐이고

그러려면 정치에 통찰력을 지닌 전문가가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오

 

이상은 아니토스 대 소크라테스의 충돌입니다.

 

 


 

 



아니토스와 소크라테스의 법정 대결로 알아가는 아테니의 민주정치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세기 펠리클레스 장군이 다스렸던 아테네는 폴리스라는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발전을 하게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인근

폴리스들과 동맹을 맺어 자유와 민주정을 수호하고자 하나 아테네의 발전에 위협을 느낀

 다른 폴리스는 비 협조적입니다, 결국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27년간이나 지속되다가는 패배를 하게되지요.

 

그렇게 이어진 펠로폰네소스전쟁과 페리클레스장군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직접 만주주의에서 30인의 참주정을 걷게되나 폭정에

 시달리고 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실제로는

 다이몬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신탁의 깨달음으로 당 시대의  선인으로 거듭난

소크라테스가 다이몬신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펼친 논리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속에서 우리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진리를 추구해

나갈것을  역설하면서 지식인의 현자가 정치를 해야한다르는 사상을 주장하기에 이르지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귀납버에서 사람들의 대화에 의한 문답법에서

독단적인 지식을 비판하고 제거하면서 일반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하였구요

 

그러한 사상은 아테네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맞물리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위배했다

하여 기원전 399년 소송에 이르게되고 결국 독배를 마시곤 죽음을 맞이합니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7권 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확인해가는 길이었습니다. 반박과 토론을 거듭하면서, 당시의 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원전 아테네의 시간속으로 들어가 당시의 민주정치과 정치상황을 만납니다.

 

부러 자신의 무죄를 증언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또 한번의 재판에서도

 부러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변호사와 증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자신들의 생각으로사고하고 판사의 판결문을 통해 정리해갑니다.

 

이어 한걸음 더 역사 논술의 과정을 거치면서 미쳐 캐치하지 못했던 논술력까지 시도합니다.

위대한 철학자와 아테네 민주정의 이야기는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이었지만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여러 정황과 대결속에서 이해하니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학교 교과과정에 기반하여 좀 더 풍성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확정되어 가는 길은

그렇게 세계사법정으로 완성해 갈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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