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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었을까? - 자본가 vs 전태일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8
이정범 지음, 이일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전태일의 노동운동 / 경제개발이냐, 인권존중이냐 ?
산업혁명이후 고도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첨예한 대립을 하게된다
싼임금의 고소득 창출이냐, 일한만큼의 정당한 댓가와 인권 보호이냐....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영국에서도 겪었던 일이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후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쳤던 1960년대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졌던 일들로 그건 민주화가 정착된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자본주의 문제점이 되고 있다
자음과 모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8권, 왜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었을까 ? 에서는
청계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모습을 통해 경제개발 과정에서 희생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를 살펴게된다
1945년 8.15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 시작 , 그 후 제주도 43사건과 6 25 전쟁을 겪으며
대한민국은 더욱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여 1953년 휴전이후부터 우리나라는 고픈 배를
채워야만 했기에 모든것에 우선하여 경제개발이 최우선 과제가 될 수 밖에없었더,
이승만정권과 잠시 들어섰던 민주화정권에서도 추진되었던 경제개발 계획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제3공화국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그렇게 1962년부터 1981년까지20년에 걸쳐 진행이되면서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제성장을 이룩하기에 이르지만 또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있는 정권유착과 근로자의 인권파괴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평화시장이 들어선 청계천의 역사는 ?
청계천은 서울의 서쪽에 동쪽으로 흘러 한강과 연결되는 약 11km의 하천이었다.
조선시대엔 개울물이 하르는 냇가라는 뜻으로 개천으로 불리웟다가 일제 강점기부터
청계천이라 불리우기 시작했다라고 한다.
조선의 역사를 들춰보면 수표교를 비롯한 정비작업을 살펴볼 수 가 있는데
6,25전쟁 후 북에서 이주해온 실향민들과 먹고 살길을 찾아 각지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며 판잣집과 천막촌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오염이 심한 청계천을 덮으며 새로이 생겨난 공터에 들어선것이 평화시장이었다.
1948년에 출생한 전태일은 왜 노동운등을 하게되었을까 ?
전국 의류시장의 90%를 차지할만큼 성장한 평화시장은 의류의 메카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그렇게 나라도 자본가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던 시절, 누군가는 희생해야만 했으니
그들이 바로 봉제공장의 미싱사와 재단사들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모르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는 사이
햇빛조차 들지 않고 허리조차 펼수없는 다락방에서 하루 16시간씩 미싱을 돌리지만
고작 손에쥐는 월급이라고는 교통비와 용돈수준이었던 사람들....
책은 그렇게 청계천과 평화시장의 역사와 더불어 왜 노동운동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당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바보회를 만들고, 자본가와의 대화를 요청하고 언론사를 통해 사실을 알리었지만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국가주의에 밀려 노동청과 자본가들로부터 번번히 베신을
당하던 1970년11월 13일 전태일은 결국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런 그의 죽음은 수많은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기틀이 되었으니
고귀한 희생이라 말할 수 있겠다.
책은 그렇게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개발에 가려 희생해야만 했던 노동자의 인권존중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다가감으로써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