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류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누구든 타인의 개인적인 기록을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알아야 할 것들 몰라서는 안되는 것들로도 충분히 넘쳐나는데

그냥 남의 일상사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더워지고 짜증이 나고 누군가의 행복이나 여유에 질투가 날거 같았다.

그냥 모른 채 넘어가면 없는 일이 되고 그러면 내 마음이 순간이나마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없이 꺼내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 순간..

이건 빌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단단하고 무심한 문장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나에게는 낯선 도시 파리에서 내가 절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의 일상과 말과 행동들이  그림처렴 펼쳐졌다,

무심한 일상이고 그저 저자가 아는 세상의 이야기들이지만 묘하게 매력있었다,

간단하고 단순한 문장들이 아름답다,

여름엔 그저 모든 장식을 뺀 단순한 옷이 가장 아름답고

최소한의 양념으로 원재료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이 더 끌리는 법이다,

천체 망원경을 구입한 노인이나 누구에게나 부탁을 잘 하는 앨리스나  저자의 아랫층에 사는 의사까지 나는 알지도 못했던 그들의 사소하고 은밀한 일상이 궁금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름에 읽기 좋은 글들이다.

 

 

 

 

 

 

 

 

 

 

 

 

 

 

저절로 튀어나온다,

어이구 어쩌면 좋아....

혹시 이렇게 전개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펼쳐진다,

뻔하다는 생각보다 사람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일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일임에도 아무도 그 희생은 보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칭송할 뿐이다. 몸이 따르지 않은 입에 발린 찬사들은 개똥보다도 쓸모없다.

아이를 집에 두고온 젊은 엄마의 날카로운 불안

젊은 부부의 미묘한 갈등

뭐라고 말 할 수 없지만 밉고  성가진 이웃 부부

자녀의 가족사에 끼어드는 장민과 장모

어쩌면 이런일이.... 어쩌면 이렇게.... 라는 예상에 딱딱 맞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는 허무함이 남는다,

어떤 상처나 어떤 흉도 덮어서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두꺼운 덮개를 씌우고 깊이 파묻어도 그 고약한 악취나 밑에서부터 썩어가는 걸 막을 순 없다. 묻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손톱밑 작은 가시를 방치하면 손끝은 나도 모르게 곪아가고 썩어서 끝내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반드시 닥친다,

더구나  인간사의 소소한 일들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버린다, 빌어먹게도...

앤과 마르코  부부가 곁에 있다면 등짝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 이제라도 정신차리라고..

제 무덤을 파버린 부부에게 해 줄게 그거 밖에 없다.

습습하고 끈적거리는 소설이다, 여름처럼

 

 

 

 

 

 

 

 

 

 

 

 

 

 

 

 

100시간의 가정폭력 상담 교육이 끝나고 함께 스터디 하기로 한 도서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은 상호의존적이다,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다,

상담가와 내담자는 평등하다

역량을 강화한다.

여성의 시각은 가치있다,

 

위의 원리에 따라 상담이 진행된다,

단순히 상처받고 불안한 개인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가부장적 사회에 모순과 거기서 소외당하고 평가절하된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가치관의 전환의 문제이다,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가치판단과 거기에 따르는 비난이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울어진 사회가치의 문제라고 본다,

여성주의 상담은 여성 개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나아가 사회의 변혁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여성주의 이론과  상담의 방법과 실제들이 차레로 나오며 여성주의 상담가의 길을 가고 있는 저자들의 자기성찰적 고백이 있다.

꼭 여성주의 상담뿐 아니라 상담을 하는 사람들

나아가 일상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판단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가지게 되는 가치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가진 생각이나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일까

아니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정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없을까?

결국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고 그리고 다시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긴 쉽지만 행하긴 어려운 것이다,

여름 이 한권의 스터디가 끝나면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한달에 한번 갖는 독서 모임에서 이달에 함께 읽을 책

지난 달 다시 읽은 제인에어가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좋았다고 했다.

다만 예전에 읽었던 기억과  영화등의 영향으로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기억이 뒤섞여 있다는 의견이 많ㅇ서 내쳐 이 책까지 읽기로 했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와 함꼐 읽은 제인에어만큼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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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세상에서는 어떤 질문도 나올 수 없다,

모든 것은 의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모든 질서들은 당연하다.

조금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불쑥 들때가 있겠지만 그건 단지 내가 별나서거나 내가 모나서일 뿐이지 세상은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런 세상에서 아니지 않은가? 라거나 이상하지 않니? 라는 목소리는 내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나대거나 튄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젠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하고 많이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는 누군가 아프고 불편하고 힘들다,

그건 언제나 타인이지 않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아이을 키우게 되면 다양한 지영씨들을 만난다,

나처럼 서른 넘어 첫 아이를 낳은   지영씨부터 갓 스물 넷에 첫아이를 낳은 아직도 소녀같은 지영씨까지... 나이도 다르고 살던 곳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도 다르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단하나의 공통점만으로 모여도 이야기는 잘 통한다,

비단 아이를 키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시집식구들과 격는 갈등

우리도 밤에 모임을 하고 싶은데 자꾸 남편 눈치가 보인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나도 한때 한 술 했는데 이젠 그런 모임은 고사하고 동네 엄마끼리 맥주한잔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푸념

내가 한때는 전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집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아이가 있으니 어디 근사한 식당은 고사하고 동네 분식집이나 중국집에서도 구석자리를 잡아야 하고 얼른 아이 챙겨먹이고 일찍 일어나야하는 조급함도 같았다,

나이가 다른데 어쩜 이렇게 잘 맞을까?

그저 한때는 그게 우리가 잘 맞는 동네친구라서... 라고만 생각하고 뿌듯했드랬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울때  나처럼은 살지 마라 살지마라 했었고 나 역시 그래도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아.. 라고 되뇌이면서 나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대학시절 겨우 한두학번 아래 후배를 보면서 꼭 나이든 사람 마냥  학번차이가 장난이 아니야 하면서  우리와 다른 세대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후배들을 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보면 엄마의 삶이나 나의 삶이 그렇게 멀지 않고

60년대 끄트머리에 태어난 지영씨와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지영씨가 다르지 않게 서로 통하고

결국은 소설속 82년 지영씨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약간씩의 차별을 받았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존중받고 귀하게 큰 딸들이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어했고 대학은 못가더라도 괜찮은 여상에 가서 괜찮은 직장을 잡고 싶어했었다,

남자못지 않게 학점도 따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서도 간혹 보이는 덜떨어진 남자들을 보조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 보람있고 즐거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엄마랑 다르구나.. 이젠 시대가 다르구나 하고 느끼던 찰라의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열살이상 차이나는  고만고만한 아이를 키우고 또 아이가 자라서 학부형이 되고 진학을 걱정하는 나이까지 오면서 우리는 점점 닮아갈 뿐이었다,

 

아들을 낳을 때 딸을 낳을 때 역시 대접이 다르더라

티내진 않지만 은근히 손녀는 차별하더라

지금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자꾸 눈치를 주니 지금이라도 아들을 낳아야 하는지 고민중이다,

아무래도 딸은 이쁘게 키우는게 젤 중요하지 않나?

아들이면 그냥 알아서 오겠거니 하겠지만 딸이니.. 힘들어도 어쩔 수 있나? 독서실에서 올때 데리러 가야지..

아무래도 딸이라 보니 선생님과 일대일로 하는 과외는 좀 꺼리게 되네

아이가 주번이라고 해도 딸아이라 보니 학교에 일찍 보내는 것도 좀 겁이 나

뭐 아들은 안그런가? 그래도 딸이 더 신경 쓰이긴 하겠지?

주위에서 스토커같은 엣애인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는 남자들이 분명히 없진 않겠지만

드라마에서도 뉴스에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톡에서의 소문들도 그 주인공은 늘 여자였다,

연애를 하고 싶고 멋진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워 하는 것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 있고 서로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인데 행여 그 때문에 험한 일 당하지 않을까 아예 연애를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

남자에게는 당연히 묻지 않은 질문들

결혼하면 직장은 어떡할거예요?

애 낳고도 계속 다닐 건가요?

이렇게 밤늦게 일하면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나요?

남편도 이렇게 술 잘 마시는 거 알아?

 

뭐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 베려하는 마음 챙겨주려는 마음일거라는 것도 안다,

세상이 험악하니까 ....

결국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나 개인적인 우울감 등으로 드러나느 폭력이나 사건에서 남자가 피해자라는 뉴스는 들은 기억이 없다, 언제나 피해자의 역할은 여자들이었다,

드라마를 봐도 연쇄 살인범은 남자였고 늘 그 피해대상은 힘없는 여자들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말했었다,

딸들이  어리면 어린대로 걱정이고 다 크면 다 커서 걱정이다,

딸들이 다 귀가하면 비로소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갔다는 셍각이 든다...

가끔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수다가 길어져서 늦어지는 날마다 들었던 엄마의 전소리였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집에 있으면 결혼이나 할려나 하고 걱정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언제 오나 왜저리 밖으로만 도나 하는 걱정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엄마처럼 전전긍긍한다,

한참 이쁠 때고 이쁘고 싶을 때라는 걸 머리로 이해햐면서도

짧은 옷은 입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직은 학생이니까 화장은 안하면 좋겠고

어디 친구끼리 다닐때는 그냥 긴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좋겠고

아무리 기막힌 학원이라도 멀리 떨어진 곳은 일단 망설여지고..

학원 선생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신경써야 하고 그 학원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신경써야 하고  혹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으슥한 곳에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

어쩌면 그렇게 한치도 틀리지 않고

예전 엄마가 했던 걱정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고

나는 이렇게 엄마랑 다르니까.. 또 다르겠지 하고 믿으며 조금은 시샘하고  경계했던 나 이후의

후배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 거?

이제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남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거?

각종 고시나 학교 교사들이 이제 남자보다 여자가 조금씩 더 많아지는거?

집안에서 엄마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한것?

단지 그것들 만으로 여자가 살만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젠 역전되어 매맞는 남자도 생겼고  여학생들의 진학률이 남학생을 능가했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느냐고.. 남성부는 없는데 여성부는 있고 남성들은 여전히 군복무의 의무가 있지만 여성들은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냐고...

여대는 있지만 남대는 없으니 대학진학에서 여자들이 갖는 이익도 얼마나 크냐고...

웃기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학력 나이 등등 의 스펙중에 가장 큰 스펙이 남성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의 절반은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하며 또 여자들 중에도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다, (몰른 그 속 마음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말하고 주장하는 여자들에게

나대고 시끄럽다고 말했던 개그맨의 언행은 그만의 것이 아닐것이다,

여자들은 수다스럽고 사소하고 속된 이야기를 좋아하고 큰 일은 함께 할 수가 없는 족속이며 언제나 한 발 뒤에서 도와주고 보조하고 보살피는 존재이길 바란다,

원하는 순간, 드러나는 사람이길 바란다, 평소에는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우면 그뿐이다,

모든 일에 보조하는 사람인  지영씨들이 오로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는 주체적이길 바란다, 그 부분에서 지영씨가 아닌 이들은 그저 도와주고 조력하고 감사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건 사적이고 소소하며 개인적인 일이니까

결국 58년 지영씨도 69년 지영씨도 75년 지영씨도 82년 지영씨도 그리고 93년 지영씨도 아마 우리는 다를것이라고 굳게 믿겠지만 결국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억울하고 또 동시에 힘이 되리라 믿는다, 세대를 지나도 우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잘 소통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두 발을 다시 디딜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지영씨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연홍과 종찬의 딸 민진이 실종되었다,

하필 그날은  국회의뭔이 되려는 종찬의 선거 첫째날이었고

하필이면 그들의 딸은 문제아였고

이미 시작된 선거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다

전에도 있던 일이라고 하며 종찬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한다,

행여 아이가 돌아왔을 때 더 곤란해질 수 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실종신고는 미뤄지고 연홍 혼자 초초하게 민진의 흔적을 쫒는다,

연홍이 알고 있는 민진의 정보는 모두 가짜가

연홍이 알고 있는 친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연홍의 친구들은 여전히 날라리고 민진을 알지도 못하고 학교에서는 왕따였다,

연홍은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연홍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미친년처럼 중얼거리고 감정이 앞서고 흥분하고 날뛰면서 연홍을 뛰어다닌다,

엄마니까 무서울게 없고 부끄러울 게 없고 거리낄게 없이 학교로 거리로 경찰서로 쫓아다닌다

종찬은 무서울만치 냉정하다,

이미 문제를 일으켰던 딸이고 가출을 경험했던 딸이다, 앞에는 일생을 걸어야할 선거가 시작되었고 경쟁자는 시시틈틈을 노리며 약점을 찾고 있고 세상이 초짜 정치인을 지켜본다, 내편이라고 안심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종찬을 둘러싼 남성들의 세계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질서있게 움직인다, 어떤 시기에 경찰에 가야할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계산이 철저하다,

결국 시신으로 돌아온 민진앞에서 연홍은 미친년이 되고 종찬은 차본하게 연홍을 다독이고 협박한다, 이렇게 나가서 좋을게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다고....

가족의 일은 사적인 일이고 사소한 일이며 지금 문제를 크게 일으킬 수는 없다,

오히려 딸의 죽음으로 동정표를 얻고 상대편 후보에게 의심이 가면서 선거판은 유리하게 돌아간다. 계산이 앞서고 머리회전이 먼저 될 수 밖에 없다,

연홍은 무엇이 대의이고 무엇이 사소한 일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딸이 죽었고  이유를 알 수 없고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내 딸이 어떤 아이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나쁜 아이? 영악한 아이?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에 당혹할 뿐이다,

종찬은 계산을 하고 어떤 방향이 내게 이익인지 끊임없이 찾아내고 이성적으로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움직인다,

연홍은 흐트러졌다가 단정했다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가 표준말을 썼다가 정신이 없다, 타인에게 덤비고 자해를 하고 폭력앞에 노출된다,

그러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미친년처럼 돌아다니던 연홍이다,

뭐든 사소하지 않고 허투루 보지 않고 다가가도 마주하면서 연홍은 진실앞에 다가간다,

이성적이고 반듯하고 흐트러짐없다고 믿었던 대상에게 인간적인  실망.. 아니 존재론적인 배신감을 느끼며 연홍은 혼자 문제를 해결한다,

이성적이고 빈틈없는 종찬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선생은 자기 죄를 덮으려고 이성을 잃고 날뛰었고 연홍은 또다시 문제를 파해치려고 정신을 잃고 날뛰었다,

그렇게 사건이 발생하고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었다(?)
감성적이고 작은 일에 집착하고 큰 그림을 보지 않고 바로 앞의 문제에만 골똘하던 연홍이 결국은  사건을 풀어낸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어떻게 연루가 되는지 도데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조차 모르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큰 그림을 볻다고 믿는  종찬대신 연홍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죄를 단죄하고 상처받은 아이를 안아준다,

연홍을 미친여자취급하고 전라도 여자라고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어버리고 그저 예쁘게 꾸며서 예쁘게 웃으면서 선거 송에 맞춰 율동을 하고 미소지으며 투표하는 사진만을 원할 뿐이다, 나에게 필요할때는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그 들의 세계에서 문제를 파악하지도 무엇이 잘못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소하게 시작된다, 어떤 큰 대의나 정의? 정치적 암투따위는 끼어들지도 않았고 그 따위는 애초 있지도 않았다, 모든 문제가 그렇다, 별 일 아닌것 사소하고 사적인 일..그렇게 시작된다,

소문처럼 실체없이 번져나가지만 무시하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분위기

별거 아니라고 개인적인 일이고 집안일이라고 덮고 쉬쉬하고 뒤에서 쑥덕거리던 일들이 덮고 모른척하고  없던 일처럼 치부되면서 그 냄새는 점점 심해지고 썩어가고 악취를 풍기며 자란다

큰 그림에서 보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쪽에는 실체가 없다,

사소하게 시작된 불륜  남겨진 친구에 대한 연민  사생활이 노출될까하는 두려움  비밀 수치감 모욕과 분노가 뒤섞여서 사건이 자란다, 크게 보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상관하라 수 없는 부분 모른 척하는게 예의인 부분에서 사건은 자란다,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게 사적인 부분 가정사인 부분에서 일은 시작되었고 사람이 죽었고 죽였고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일이 커지고 곪아서 냄새가 진동하기 전까지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일

그런 일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다,

 

 

 

 

 

 

 

 

 

 

 

 

 

 

 

 

 

 

가정폭력이라는 문제에서 해결책이라는 것이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보호"라기 보다는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가정 폭력특레법이 제정되고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가족간의 사적인 문제나 가정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결국 주된 목적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나 누구에게나 안정감을 주고 필요한 가정을 깨지 않고 잘 유지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과 믿음  세상에서 절대 없어서도 안되며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가정은 결국 개인의 영역이고 사적인 문제라서 공권력이나 공공의 개입은 자제하고 그저 모른 척 존중(?)해주고 철저하게 사생활로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의지가 함께 포함된다, 가정이전의 개개인의 안전이나 지지 보호는 그저 가정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누구든 가정을 꺠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행복과 사랑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며 바깥에서는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친 파도가 닥치더라도 우리 가정만은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가정은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고 누구나 가정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가정이란 어째 되었든 유지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그 지속과 유지의 책임은 가족에게만 있을뿐 타인이 간여할 수 없다, 이런 근거없는 믿음속에서 가정을 꺤다는 일은 부도덕하고 패륜적이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가정이 사회의 기본이라고 하고   보금자리라고 하고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가정이 없다는 것 조금 다르다는 것만으로 열등하고 부족하고 문제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가정을 깨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죽을만큼 맞고 살아도 가정을 깨려고 한다면  그동안 죽을만큼 맞았던 시간과 고통은 싹 다 잊히고 가정을 깬 여자 혹은 자기 자식을 버린 여자가 되어버린다, 별일도 아닌것을 부부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법으로 보호한다고 하지만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 폭력을 가했던 그 가해자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의 결정은 오롯이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나하나 참고 말것인가 ..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할것인가

가정폭력이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다루기가 힘든 건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고소와 처벌로 끝이 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가 죄책감을 가지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잇고 최악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절대 분리될 수 없고 그 악순환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차별을 경험한다,  설령 에전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위험하고 험한 세상에 대한 공포감이 가정으로 스며들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쓴다는 행동들이 하나의 차별이 될 수도 있다, 82년 지영씨가 할머니에게 받았던 차별이 지금은 없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지금의 지영씨들도 밤길은 위험하고  짧은 옷들은 나의 의도과 상관없이 해석되고 보호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소외된다, 여전히 말해서도 나서서도 주장해서도 안된다, 누구도 용감하게 나서서 안된다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눈쌀이 찌푸려지고 거부되고 조용히 무시될 수 있다

연홍처럼 여전히 진실을 다가가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친년처럼 뛰어야 할테고 여전히 가정내의 폭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된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게 가장 안전하다, 때로는 그 것만 알고 있다는 것이 권력이 될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하는 삶에 나도 속해있다고는 것이 하나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이해하고 잇는 것 이상의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의 일이고 남의 사생활이며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처절하고 간절한 일일 수도 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기에 누구도 깨서는 안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그 곳에서

누군가는 신음하고 아파하고 치를 떤다,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믿었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균열되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할거라고 안전할거라고 믿고 있는 공간에서 느끼는 배신감 소외감 그리고 말로 꺼내기 애매하고  속에 쌓아두기엔 억울한 많은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여기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세상은 내가 아는 것 이상이며

여전히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해시켜야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지영이들이 연홍이들이 그리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그리고 죽어버린 피해자들이 여전히 여기 이곳에 있다,

나 가족이고 내 이웃이고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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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속죄..

이야기와 이야기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둘러싼 커다란 테두리(?)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한 사람은 어던 죄도 없이  댓가를 치러야 하고

알맞은 시간에 속죄를 하지 못했던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벌주면서 속죄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속죄였음이 드러나는 반전 반전 또 반전

 

속죄 용서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사라믈은 김창동의 영화  <밀양>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의 또다른 작품 <시>도 용서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떠올리는 것은 이정향의 <오늘>이다,

용서를 해야히지만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피해자에게는

용서 이전에 반성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죄하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용서는 선택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

사람들은 용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거룩한지를 말하지만 막상 사죄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댓가를 현실적으로 치렀는지는 넘어간다,

그저 용서만이 온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살기좋게 하고 옳은 것이라고만 말한다,

피해자는 제 상처를 추스르기도 전에 용서해야하는 압박속에 갖히고 만다,

용서 하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사죄는 권리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과제이다,

 

 

 

 

 

 

 

 

 

 

김애란의 <서른살>의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희도 자라면 내가 되겠지 고작 내가 되겠지"

 결국 자신처럼 되어버린 제자를 생각하며 주인공은 어쩌지를 못한다

 일껏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노량진에서 함께 생활했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지금의 "내"가 되기전 그 어리고 발랄했던 제자의 나이였던 "나"를 떠올리며

다시 내가 버리고 온 제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죄책감이란 그런 것일까

기껏 떼어냈다고  돌아서서 휴우 한숨을 돌리는 순간에도 그 놈은 내 등뒤에 짤싹 붙어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 등뒤의 무게에 혼자 휘청거리는 사람은 있다,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믿고 싶지만 그 무게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약하고 미미하고 보잘것없는게 그래서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한다,

<서른살>의 주인공은 힘겨운 노량진에서의 재수생활끝에 미미한 대학에 진학하지만 취업은 또 아득하고 그렇게 학원가를 전전하면서 나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보람도 느낀다,

지독히도 공부를 안하고 희망도 없는 아이들이 순진하고 발랄하게 다가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다가섰던 그 순간은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라는 유혹으로 시작한 다단계 생활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생활 관계속에서 마지막으로 아직 순수하고 발랄한 제자를 끌어넣는 순간까지 그는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제자의 문자를 씹고 전화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 죄인이었다,

자기를 아직도 순수하게 기억하는 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부칠지 알 수도 없는 편지를 쓰면서

주인공은 그게 속죄라고 생각할까

이미 자기치럼 피폐해지고 자기정도의 어른밖에 되지 못한 제자를 졔속 밀어내면서도 그는 아마

오래오래 그 아이와 함께 할 것이다, 그게 그의 벌이다,

 

내가 읽은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인데

나는 자꾸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속죄와 아직 살아있고 내곁을 계속 맴도는 사람에 대한 속죄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이 남았지만

아직 살아있고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지 않냐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죽어버려서 모든게 끝나버려서 가벼워질 수 있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자기기만일 수 밖에 없드라도) 것이 있다면 아직 현재진행형이어서 점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우유부단 회피 망설임의 덧대어지는 죄들이 있다,

누구의 죄가 더 클까

나는 신이 아닌데도 아무것도 아닌데도 자꾸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차대전과 작가라는 소재에서는 두 책이 연상된다,

전쟁동안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게 되는 이야기와

전쟁을 겪으며 궁핍한 상태를 견디는 작가가 멀리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있는 서점주인과 교류하며 서로를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이 책도 다른 인물이지만 전쟁을 겪는 이야기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겹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록해서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것

그저 흩어지고 엷어져서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싶은 그 순간 그 감정 그 사람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잡고 싶은 그 마음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잡고 싶은 그것은 어떤 대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를 그대로 박제하는 일이다,

브리오니는 자기의 죄를 반성하기 위해 그 순간을 기록하기로 하고

건지감저껍질 파이의 작가는 그 시대의 상황을 씀으로써 그 시대의 모습과 함께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대상인 동시에 자신이다,

그것이 반성이든 생계를 위한 것이든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그가 쓴 글에는 작가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너무  택도 없는 비유겠지만

어쩌면 이 서재에 글을 남기는 나도 내가 읽은 책들(대상)을 기록하는 일인 동시에 나를 드러내느 일이다, 내가 여기서 쓰는 글은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은 나라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브리오니가 자기가 들어가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것은 그가 아직 어리고 유치하고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때부터 누구가 품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주인공이가 자기가 겪어야 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if 란 있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나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역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는 것도 그렇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 되돌리려고 하고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꿰맨 상처는 흉터로 남아버린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되돌리는 일은 없으며 원인에 대한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소설은 그 역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결말을 바꾸고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혹은 일아나게 하는 일

그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은 지워버리고 해야만 했어야 하는 말을 삽입한다

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기가 쓰는 작품안에서

브리오니가 그렇게 자기 작품속에서 세상을 바꿈으로써 속죄를 한다,

미안한 마음  그러나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으로 몇번은 고치고 고쳐가며 소설을 썼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것이 모두 브리오니의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가 앞에서 언급했던  "소설에 없던 것은 내 삶에도 없었다"

부딘칠 수 없던 일들을 차마 쓸 수 없던 그는 드디어 직면해서 쓰기 시작했다,

지나버린 역사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만들어내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리오니는 자기가 꼭 들어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유년시절의 미성숙한 의지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작가가 되었다,

 

 

브리오니는 결국 언니 세실리아에게도 그의 연인 로비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미처 그럴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사망했고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브리오니는 그 커다란 속죄를 해피앤딩이 있는 소설로 대신한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연인을 소설속에서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내면서

스스로는  용서를 구하지만 결국 용서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스스로를 속죄하려고했다,

열세살의 브리오니는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이였고

이제 어른이 된다는 어쩌면 설레고 짜릿하면서 아찔한  그 순간이  얼마나 그릇되고 독선적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본 사실 내가 받아들이는 진실이 전부라고 믿는다,

이미 틀을 만들고 그 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틀이 어른의 틀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였다,

존중받고 관심을 끌고 싶고 세상의 중심이고 정의를 실현해야하는 인물을 자기여야 한다고 믿는 아이 그 아이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잘못된 판단이 사람들을 끝으로 몰아갔다,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힘에 밀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는 언제나 때가 늦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속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를 아울러 속죄에 대해 죄책감에 대해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죄도 업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죄 이후가 사람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직면하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잘못을 알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구나 세가지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적거나 크거나,,,

 

그냥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 읽다가

주인공에 따라 나를 생각하고 내가 아는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전쟁과 역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속죄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결국 인간이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그 이후가

속죄를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범으로 하는가 의 문제가 그 품격을 결정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도덕책에서는 가장 쉽게 서술되어있지만

삶속에서는 가장 어려운 행동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가져다 주는 이언 매큐언은 진정 작가라고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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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1-1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언 메큐언...미루고만 있었는데,
이동진 때도 안 읽던걸 펼쳐들고 싶게 만드셨습니다요~^^

푸른희망 2017-01-17 21:20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셔요. 김중혁도 추천했잖아요~~^^님의 리뷰 기대합니다

cyrus 2017-01-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글쓴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라는 생각, 푸른희망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글쓴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생각들은 완벽히 옳을 수가 없어요. 틀릴 수 있습니다. 생각이 틀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은 자신의 리뷰가 비판받으면 불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면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 다만 자꾸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서 고집 부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면 주변 사람들의 잡음이 더 많아집니다. 글은 글쓴이의 결함을 가리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글은 글쓴이의 분신입니다.

푸른희망 2017-01-17 21:21   좋아요 1 | URL
그래서 가끔 서재에 글을 올리고 나면 너무 부끄러울 때가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계속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cyrus 2017-01-17 21:26   좋아요 0 | URL
2, 3년 전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워요. 그 당시 글을 쓰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비문이 보여요. 벌거벗은 아기 시절 모습이 찍힌 앨범사진을 보는 기분입니다. ^^
 

그림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크면서 글밥이 많은 동화책으로 넘어 간후 그림책을 보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하고 단계를 밟아가고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그림만 많은 그림책을 잊었다.

그러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무엇보다 그림책만큼 쉽게 마음을 열기 쉬운 도구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림책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글을 알아도 글을 몰라도 상관없다,

시간을 쪼개내지 않아도 휘리릭 볼 수 있고

하루종일 책을 끼고 앉아 아까운 곶감 빼먹듯이 두고두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책에서 받은 느낌은 제각각이다,

나의 처지난 상황 감정에 따라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누구나 주목하는 가운데 커다란 주인공 대신 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기도 하고 흘려그리듯 대충 그린 구석의 꽃 하나 혹은 배경 하나에 꽂힐 수도 있다,

그게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게 그림책이다,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내 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편하고 듣기도 편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냥 그림책 한권을 슬쩍 밀어넣어도 괜찮다,

나는 이런 의미를 주고 싶은데 아이는 혹은 상대는 저런 의미를 발견해도 상관없다,'

서로 미처 보지 못한 그 그림에 그 한 줄에 의미를 나눌 기회가 된다,

 

                  

 

 

 

 

 

 

 

 

 

 

 

 

 

 

두 작가의 그림책 이야기를 읽는다,

미스다 마리는 자기가 어렸을 때 읽은 그림책을 이야기한다,

그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어떤 편견으로 읽다 만 혹은 들춰보지도 못한 그림책을 이야기하며 그때의 감정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

그때 그 친구가 준 그림책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랐을까

그때 무서워서 펼치지 못한 책을 내가 읽었더라면

그때 너무 아끼던 그림책을 아직 가지고 있었더라면

다 부질없지만 그래도 의미는 있다,

그때의 미련이나 후회가 다시 그림책을 들추게 하고 그 때 발견하지 못한 혹은 느끼지 못한 감정이나 의미를 다시 알아본다,

그림책은 나의 과거로 가는 문이기도 하고 내가 미처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저 아래의 무의식을 건드리기도 하고 아주 어이없이 간단하게 타인을 공감하게도 만든다,

그림책속의 인물중에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인물은 이제 없다,

단 한줄 혹은 귀퉁이의 조그만 인물도 그냥 허투루 넘어가지지 않는다,

그때 못 본걸 지금은 볼 수 있다,

내가 못 본걸 누가 보고 이야기 해 줄 수도 있다,

단순하다. 그래서 더 깊고 넓다,

 

<그림책에 흔들리다> 저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아픔에 그림책으로 위로하고 스스로도 위로받는다,

아팠던 과거나 속상했던 순간 그림책이 함께 한다,

그림책을 읽으며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주인공을 따라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그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내가 모든 걸 해낸것 처럼 공감하게 된다,

그림책의 주인공에게 공감해본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미스다 마리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림책이 주는 위로와 공감을 더 내밀하게 이야기해준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들   죄책감  불안  패배감 등등을 그림책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잘못이 아님을 알고 안도한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나만 겪는 어려움이 아님을 아는 것 그래서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일 '

그 어려운 일을 그림책이 해낸다,

 

미스다 마리의 책을 보면서 나도 다시 그림책을 읽어봐야지 마음을 먹게 되고

김미자 저자의 책에서 나는 나도 나름 괜찮은 엄마고 괜찮은 살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의 내밀하지만 솔직한 고백이  나에게도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별 거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소소하고 자잘한 자기고백이 때로는 힘이 될 때도 있다,

그림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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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고전적이다, 클래식하다... 뭐랄까 신인다운 발랄함이나 참신함 보다 우직하다고 생각했다,

기교도 없고  어찌보면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써내려간 그런 투박한 이야기가 그대로 마음을 치고 들어와 앉아버렸다,

이건 뭐지 싶었다,

내가 평론가는 아니니까 뭐라고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한 독서가 어느 순간 정자세를 하게 만들고 읽다가 잠들든지 뭐... 하던 나른함이 다시 어깨를 토닥이면서 다  읽어야 할거 같은 의무감을 들게 했다,

별 거 아닌데,.. 멋진 구성도 아니고 어딘가 툭툭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냥 그렇게 쑥 들어왔다, 어떤 예고도 없이

이건 반칙이지...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었었다,

누군가를 담담하게 기억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순식간에 들어가버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소설 거의 중반이후에 나오는 주인공 소유의 감정의 결이 거의 내것처럼 그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그가 쇼코를 바라보는 시선 할아버지를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기대했다가 경멸했다가 혐오했다가 그렇게 인정하게 되는 순간순간이 퍽이나 이해가 가면서 동시에 내가 이해받고 있는 기분 그러면서 이런 이해와 공감을 한 10년도 더 전에 내가 느꼈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내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억울한 감정도 들었다,

이건 뭐지? 싶어 한참을 있다가 다음 작품을 읽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라는 공통점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스며드는 일 누군가가 내게 스며드는 일에 대해  조금 더 나도 그렇게 스며들고 싶었던 거 같다,

80분의 기억을 가진 수학자 그리고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가사도우미 그리고 그녀의 아들

그리고 수학과 야구

예전에 나는 이 책을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의이자 배려'라고 했다,

지금도 그럴까?

그때나 지금이나 책에서의 첫 인상은 일본인답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등장인물의 성격이라고 해야할까 서로가 서로에게 어색해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고 그래서 깍듯해지고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며 그 사이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느낌... 그거였다,

누군가의 바운더리를 존중해주는 것 나에게 그건 예의의 처음이었다,

친해지고 다가오고 다정한 사이도 좋지만 그렇게 상대가 가지고 있는 공간을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가만 내버려 둘 줄 아는  여유가 예의이자 배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냉정하기도 하고 못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사가 가지는 기억의 한계는  늘 박사를 깍듯하게 만든다.

내겐 낯선 사람이지만 어쩌면 내가 아는 나를 아는 사람일 수도 있는 상대에게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조금은 미안해하며 다가가는 박사의 모습과 그런 박사의 이질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하는 도우미와 그의 아들 루트 ..

그건 어쩌면 최은영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공감과 이해 그것과 같은 결일것이다,

누군가에게 훅 하고 다가가진 않지만, 그저 주변에서 서성이고 주저하고  생각이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주저하는 시간동안 상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 입장을 이해하고 또 이애하고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그렇게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박사가 말하는 여러 수식과 숫자의 아름다움은 낯선 것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그 말들이 나를 인정하고 나를 배려하고 나를 존중한다는 의미라는 걸 도우미는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존중받고 인정받고 존재감을 느꼈을까

낯설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수식의 세계에서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공감하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었다,

지속되지 못할 기억일지라도 추억을 만들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이 비록 잊혀졌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

기억은 없어도 관계와 존중은 지속되는 것... 그것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밋밋하지만 따뜻하다,

그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고고 뻐근한 근육들을 풀어주는 나른한 시간같은 순간들이었다,

 

문득 그런 박사와 도우미와 아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안채에서 보고 있던 미망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했다,

영원히 나와의 시간은 잊지 못하는 사람

나를 잊어서는 안되는 그 사람이 지금은 불구가 되어 80분의 기억밖에 지속하지 못하지만

그가 가진 낡고 오래된 기억속에 나는 영원하다는 사실은

그 미망인에게 위로였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나는 늙고 이렇게 변했는데 그의 기억속에서 나는 영원히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예전엔 외롭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만 하는 미앙인의 마음도 이젠 알 거 같다,

 

 

다시 <쇼코의 미소>로 돌아와서....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어린 투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순간 무안해졌을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웃는 아이는 자기에게 박히는 말들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애써 지우리고 하는 게 아니라 애써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두가지는 비슷해보이지만 다르다,

지우겠다는 적극적 의지조차 내 보이지 못하고 그저 보이지 않도록 보여지지 않도록 남모르게 혼자 애쓸 뿐이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건 그 이야기가 아프다는 걸 안다는 거다,

아픈 이야기지만 아프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쿨하다고 보여지고 싶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내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자락 깔려있다,

 

나와 발음이 같은 응웬 아줌마도 역시 잘 웃었다 잘 이해해주었고 상대의 좋은 점을 잘 알아봐 주었고 슬프면서도 언제나 웃고 있었다, "행복이 슬픔과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목이 매이거나 괜히 명치 끝이 먹먹해지는 기분

그걸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을까

이런 모순되고 이상한 마음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닐까 하고 어릴적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끼고 알고 있는 걸까

혹시 나만 느끼는 것 아는 게 아닐까

나만 아는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도 몰랐지만 왠지 나만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고 나말고도 다 아는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반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신은 항상 그런식이야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 안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혹은 못하는 사람을 나도 알고 있다,

언제나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잘못이구나 하고  알겠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자기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잘못을 말하는 순간 자기가 지는 거라고 자기가 없어지는 거라고 믿어서 그게 두려워서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요즘 생각을 한다,

그냥 못나고 고집세고 안하무인으로 보이는게 차라리 낫다고 믿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안쓰럽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절대 그런 내색을 나는 하지 않는다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동안 나는 절대 그를 이제는 알거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끝까지 모른 척 이해 못하고 알지 못하는 저쪽 별에 사는 사람처럼 대하면서 내가 조금 그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해인지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받아주려고 한다는 걸 절대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이게 복수라고 믿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루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 보다 훨씬 더 전에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

 

아니다 속이 깊은 아이들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기도 하지만 다 아는 어른 처럼 냉소적이고 진지하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보이든 그게 타인의 눈에는 어리게만 보인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거나 웃기거나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찡그리고 있거나 그건 지금 내가 몹시 약하고 불안하고 힘들다는 말인데 그걸 사실 타인은 모른다 나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오래되면 그게 나의 본성인듯 여겨진다,

나는 원래 냉소적이고 쿨한 사람이야. 라고 자기를 착각하거나 나는 웃기고 유머감각이 있는 아직은 아이같은 면이 있지.. 하고 자기를 그렇게  정해버린다,

오래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은 이제 내 피부인지 합성고무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이젠 그런 외피가 없으면 오히려 더 불안하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써 온 내 겉모습이 이제 내가 된다, 익숙하다, 그렇게 미리 어른이 된 아이들은 나중에 영영 어른이 못되기도 하는 걸까

어릴 적에는 그렇게 조숙해버린 아이가 되었고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는 영원히 철들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어정쩡한 나이먹은 아이가 있다,

둘의 공통점은 언제나 지금 현실과 붕 떠있다는 것

아이일 적엔 아이인적이 없었고 지금은 어른이 너무 힘들고 낯설다,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이 말이 가장 많이 입을 통해나오면서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되었다,

괜찮지 않다고 아무렇지 않을리가 있겠냐고 말을 해야하는데 그건 자존심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언제나 나보다 타인이 더 중심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언제나 괜찮아야 하고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일들이 쌓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억울하고 억울한 마음이 계속 불어났다,

그리고는 이젠 습관처럼 그렇게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간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니까요

세상에 내게 별일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온다,, 라는 말처럼 허무맹랑한 말이 있을까 이렇게 환상적인 환타지가 있을까 세상은 수학공식이 아닌데 늘 들어가는 수에 따라 나오는 수가 일정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박사는 수식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그건 그저 추상적인 수식일 때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곳은 그렇게 딱 떨어지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노력보다 큰 걸 갖는 사람도 있고 노력따위는 쓸모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해도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제로섬게임도 아니다, 누가 더 많이 가져서 누가 덜 가져가는 일이아니라 그냥 우연이고 운명이고  신의 장난같은 거다, 신도 가끔은 변덕을 부리거나 마음이 내키거나 말거나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커다란 우주의 진리는 그러한데 세상은 지금 소수점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세어가며 누가 얼마나 더 많이 노력했는지 더 많이 이루었는지를 깨알처럼 따진다, 이렇게 노력하고 애써서 이만큼 이루었는데 나보다 덜하고 덜 이룬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부당하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세상을 본다, 누가 중간에 새치기를 하는지 누가 노력없이 먹으려고 하는지... 그래서 점점 세상이 모래알처럼 되어가고 있다,

가장 큰 세상의 비밀은 언제나 불공정하고 언제나  모든 것이 비례든 반비례든 딱딱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인데 그걸 아무도 모른다,

 

 

이외의 다른 최은영의 단편들 속에서도 주인공은 늘 머뭇거리 오래 생각하고 멈칫하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행동이 굼떠 보이고 그래서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오해를 그냥 내버려둘 수 밖에 없어 혼자 속으로 곪아가기도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렇게 오래오래 속에서 삭힌 생각들 상대에 대한 생각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 배려가 된다,

아 그랬구나

켈리는 사람에게는 제각각의 개인구상개념이 있다고 했다,

내가 본 것 알아낸 것 느낀 것 배운 것들이 모여서 내가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틀 같이 각각 개인은 개인만의 개인구성개념을 가지게된다, 개인이 어떤 구성개념을 가졌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 다르고 개인의 성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개인의 구성개념은 또 다른 경험이나 감정 생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렇게 딱딱하게 굳기도 하는 것이다,

최은영의 인물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개인구성개념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봐도 될까 이렇게 받아들여도 될까  저건 어떤 의미일까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거나 오해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아 다 싫다 피곤하다 남따위는 모르겠다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타인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넓어지고 깊어진 각각의 개인구상개념을 가진다고 하면

켈리박사에게 실례가 될까?

모든 소설속에 내가 있고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면서 그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혹은 미워하고 복잡하다가 쥐어짜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그를 사랑하는 나를 보기도 한다,

 

박사와 가정부도 서로에게 조심하고 조심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라는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키다가 서로를 살펴주고 상대가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쌓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도 사랑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나는 상대를 생각해서 조언이랍시고 하고 그 입장을 생각해서 말을 꺼내지만

그게 참 어설픈 조언이나 하나마나한 잔소리 심지어 소음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절실히 알아가는 요즘이다,

나는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냥 내가 보기에 저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좀 더 세심하게 남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이라도 하면 좋겠고 비록 속마음은 아닐지라도  세련된 척 괜찮은 척하라고 조언하고 싶어 죽겠다,

그래도 남의 입장에 함부로 입질하지 말자고 참고참고 참다가 결국은 꼭 사단나는 한마디를 한다

말은 하는게  더 후회가 많고 왠만한 말은 다 사족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고 배려한다는 것

그건 그냥 오래오래 그를 마음에 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말고

그냥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믿어주고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냥 웃어주는 것 뿐이란 열패감이 섞인 깨달음이 든다,

아는 건  쉬운데 그렇게 해주는 건 참 어렵다,'

 

공감이라는게....

그게 오히려 폭력으로   전해질 수 도 있겠다 싶어서

열심히 책만 뒤적인 요 몇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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