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장 아름다운 건 꽃이 피기 전까지. 그러니까 간절하게 그 꽃을 기다릴 때다. 꽃은 피고 나면 그뿐 그 순간부터 봄은 덧없이 지나갈 뿐이다.

(모든 것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지나간 후다.

밤에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비로소 그때 그 순간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고 내가 대응했어야 할 말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지난 후에 뚜렷하게 보인다.

어쩌면 몰라서 아름다웠고 몰라서 편안했을 수 있다.

알고 나면 후회만 남기도 하겠지만 이젠 되었다 라는 체념과 비슷한 편안함도 있다.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행합일이라고 아는 바를 행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런데 아는 걸 행동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젠 책을 더 안 읽어도 될 정도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 머릿곳의 그 아는 것들은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지행합일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뜻인데 이 말은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것이 무척 많닥 했지만 그 중에 행하는 것이 거의 없다면 이 말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다.

행동하지 않은 한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무지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지행합일을 무서운 말이다. 특히 많이 읽고 배운 사람에게는...

 

요즘 사람은 행복이라면 무조건 최고로 여기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위안이 되는 목소리를 찾아 티비를 틀고 인터넷을 헤맨다. 마치 자신의 삶에서 고통과 슬품과 죽음이 조금이라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당의를 입힌 이런 일상 속에서 죽음을 대면한 옛사람들이 내던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과 고통과 아픔을 계속 피할 수 있을까?

 

 

기쁨이란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순간 바로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지만 고통은 단 하나의 감각적인 정보만 결여되어도 타인들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르므로 고독이란 우리가 고통을 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재앙은 우리를 가장 외롭고 연약한 사람으로 만든다.

언제나 이 연대 불가능한 고통앞에서 위로 역시 불가능하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내 고통을 누구에게 설명할 단어들을 찾을 수 없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라는 마음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니 설명해주세요. 천천히.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모르니까 내가 알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틀렸다면 말해 주세요.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정말 나는 너를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도 잘 모른다. )

 

독서는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건 의도하지 않은 변화이다.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난 꽃이었다.

 

어떤 순간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이제 청춘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는 이 순간 다시 읽은 <청춘의 문장들>

지금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간에는 그대로 옳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옳다.

틀린 건 없다.

다만 나도 달라졌다.

조금 더 성장한 면도 있고 조금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있으며

이제는 기대하지 않는 것들도 늘어간다.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것

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인정하게 된 것

좋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 그러면서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나 싶은 마음들

청춘은 머무리지 않고 흘러간다.

그러자 지금 이순간만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이순간이 청춘이라 믿는다.

여전히 흔들리고 꿈을 꾸고 좌절하고 앙ㄴ달하는 것

지금 이순간 나는 청춘이다.

청춘은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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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읽은 사람일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칡는다.

나는 달라지고 싶어서 책을 읽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읽으며 나는 또 하루를 버텨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삶응ㄹ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는 나를 늘 힘들게 했다.

다들 정말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의심했다.

나는 지금 내일 무얼할지도 정하기 힘든데 내 시간을 모두 바쳐 달려가야하는 목표를 정하는 것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느렸고 무계획했고 부정적이었고 그냥 하루하루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퍼거나 불안했다. 그럴 때 책을 읽었다. 이야기 뒤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고 공감받을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에게 화자에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만큼 나는 세상에 내 자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기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오면 내 범위는 여전히 좁았고 세상은 언제나 저만치 앞에 있었고 모두가 다들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긴긴 시간을 혼자 채워야 하거나 흘려보내야만 했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나이먹은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알게 된 것은 어른이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

그냥 받아들이고 통과해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망치고 모른 척하고 회피해도 결국 내가 해야할 몫은 내 앞에 온다.

그냥 받아들이고 상처받고 우울해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또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외롭지만 조금은 강해졌구나 약간의 근육이 생겨서 조금 덜 삐그덕대겠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그게 다 책에서 배운 것이다.

책은 내가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 대부분이 내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몰랐다면 더 단순하게 더 씩씩하게 내가 잘났다고 믿으며 살았을텐데

읽을수록 나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불안하고 초라해졌다.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나는 표현그대로 한 점에 불과했다.

읽을수록 작아지는 나.

그러나 나는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작은 내가. 작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물론 가끔 부자가 되고 싶고 권력을 갖고 싶고 명예와 지식을 가지고 뽐내고 잘난척 하고 싶은 욕구에 이불킥할만한 행동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를 이제는 받아들인다.

책이 그랬다.

그냥 너는 너라고...

책은 책일 뿐이고 나는 나 일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친해졌고 서로 인정하고 있다.

읽기가 주는 즐거움은 어쩌면 무용하다.

후기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에 무용하고 하찮은 것들이다

쉽고 빠르게 누구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지금 현실에서

느리게 읽고 쓰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머물뿐인데 뒤로 자꾸 밀려난다.

조금 읽고 많이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서 많이 말하고 더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읽을수록 작아진다.

이렇게 읽다가 내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괜챃다.

나는 작아져서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있다.

내가 안다. 내가 있음을. 내가 읽었음을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읽다보니 그것으로 괜찮다.

 

 

그런데 이탈리아 철학자 바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가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세계까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뜩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거라는 감정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모호한 것은 두렵다. 그래서 두려운 대상을 명확하게 한다. 친구를 잘못사귀어서 그래. 저 사람이 문제라서 내가 화를 낼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왜 밖에 놀러다니고 그런거야? 단순한 이유일수록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들이 안전하다. 그래서 문제야 그 명확한 문제만 해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낼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암묵적으로 나만 아니면 되는 대상을 미워하고 상황을 혐호한다.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전한 문제다. 두껑을 덮는다고 오물이 사라진 것이 아닌데...)

 

안나 이호바토바는 말년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시작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렇게 읽힌다. ’나는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집이 다시 출간되기를...

(하루를 무감하게 살아내는 것, 반복같은 하루를 그래도 살아내고 먹고 자고 생각하고 쓰고 일하고 귀가하고 다시 고단한 몸을 눞히는 일을 내일도 모래도 지치지 않고 해내는 일 때로는 그 일이 혁명보다 더 위대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 모르는 타인들 그리고 당신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은 우리가 위대하다.)

 

실비아 플러스의 딸이 이야기 한다.

어머니가 실존했고 자신의 능력을 다해 살았고 행복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황홀하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는 사실이 축하받기를 원했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운 작품활동을 했으며 평생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은 우울증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스캔들로 소비하는 대신 그녀가 남긴 작품 속의 치열한 삶을 보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이다.

(피해자는 늘 24시간 피해자가 아니다.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욕심도 내는 사람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일상의 한 순간 험한 경험을 했고 상처를 받았고 삶이 잠시 중단되었겠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다시 영웅이 된다. 얼마나 괜찮았는지 멋졌는지 영웅이 되거나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떤 배우를 나는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웃고 울고 설레었지만 너 그 배우를 좋아하니? 라고 묻는다면 별로 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원히 반짝반짝 빛날 별일거라 믿었는데 너무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직업탓에 모두가 그의 상처를 알고 치부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극단적인 선책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가 분노하며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늘 그대로 그 사람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햐냐고 물어보면 글쎼 라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그가 나온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아낀다. 그뿐이다. 그는 자기 삶을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남아있다. 그냥 그 뿐이다. 먼저 간 내친구를 남은 친구들은 좋은 면만 기억한다. 나도 그 친구의 나쁜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가 성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인간적인 결함도 있고 때로 이기적인 판단을 하기도 했고 자기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기도 했고 그 판단이 누구에게는 상처였을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좋은 친구였으나 대단히 멋진 사람은 아니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친구들 중 하나.. 내가 사랑했던 가족중 하나.

특별안 단하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여럿중 하나지만 가끔 그립다고.. 그렇다. )

 

아리엘 도르프만

그는 누군가의 실제하는 고통을 맬로드라마로 가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정확히 동시통역하는 것이 시의 임무라고 믿는다. 그는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강한 어머니의 아이로 남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의 고백대로 세상의 고통에 대해 고작 전문가란 이유로 두둑이 보수 받고 동시통역이나 해주는 단순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 있는 한 사람 덕분에 평범한 이들의 비극이 온세상에 알려진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늘 다짐한다. 나는 내가 아는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아는 상대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판단하지 말자. )

 

조앤 디디온

디디온은 기사에 글쓴이의 주관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의 에세이 <엘리시아의 대안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객관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글쓴이가 가진 편향성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모든 편향에서 자유로운 척하며 쓴 글에는 대안 매체에 아직 전염되지 않은 가시과 허위가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 만약 이라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연구한다. 만약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이 상황이 누가 어떤 위치에서 보고 기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는 어쩔 수 없는 승작의 기록이다.

그리고 보통의 우리도 부지런히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여기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생각도 있다고 . 역사는 결국 기록하는 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그 시간 그 시대에 누가 권력이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누가 썼는가에 따라 독자는 다르게 읽는다. 냉정한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속되고 속되다. 주관적임을 인정하자. 내 의사 편향성을 인정하고 이런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

 

단어들을 가지지 못할 때 청년들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소박하고 반지성주의적인 저항을 일삼게 된다. 베트남 전쟁과 소비의 상징인 비닐ㄹ oq에 반대해 마약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단어가 필요한 생각은 잘난 척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점을 무척 염려했다. ‘이 아이들이 ㅇ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어휘는 이사회의 진부한 표현들이다. 사실 나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꼐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결손가정출신이라는 표현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 그들이 결손가정이라는 단어로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 엄마 아빠 나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은 결핌이자 비정상이라는 기성의 관점에 자신들도 모르게 동의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는 결국 죽을 운명인데도 힘을 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삶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조리하다고 해서 다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지프는 아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비극이랄 게 없다.비극은 오로지 그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시작된다. 다시 저 아래의 바위를 향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바참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 고통을 응시함으로서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앤카슨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이별하는 것

(애도에는 기간을 둘 수 없다. 천천히 자기 방식으로 이별하는 수 밖에 없고

애둘러 내 방식으로 위로나 배려를 하지 않은 것 지금 여기 없는 이의 이야기에 내가 먼저 마음을 베이지 않는 것 되려 먼저 조심하지 말 것. 그냥 피가 첲철 흘릴만큼 베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톨스토이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ᄁᆞ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와 방향을 조금씩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 할 것만 있다.

 

읽기는 즐겁다.

그리고 이야기도 때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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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공감하는 것과 사실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

그 차이를 드라마에서 배운다

<굿파트너>를 혼자 보면서 차은경과 한유리의 대화법에서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차은경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접근을 한다.

그가 딸 재희와 하는 대화는 나와 내 딸들의 대화와 비슷했다.

아이가 힘듦을 이야기하면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해결사 모드로 전환한다.

엄마라는 것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앞에 어떠한 문제도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할 수 없어서 절망하고 화가 나는 것

나에게 선택지는 그 두가지 뿐인데 아이가 점점 자랄 수록 나는 후자밖에 할 수 있는게 없어졌다.

해결은 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란 점점 진화하는 것이어서 점점 복잡해지고 오묘해지고 잘잘못의 구분이 부명하지 않다. 문제라고 여기는 지점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도데체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아이에게 좋은 해결사도 못된다.

해결해야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고통이다.

차라리 어려워서 노력하고 연구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괜찮은데 이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쏟아부어도 답이 없는 경우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나고 무력해진다.

그때 화를 낸다.

넌 도데ㅔ 왜 그런 문제에 매달리는 건데

그게 뭐라고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 니가 지금 그럴 때야?

물론 드라마속 차은경은 나보다 이성적이어서 그리고 여유가 있는 엄마여서 그런 막말을 쏟아내지는 않지만 딸 재희앞에서 자꾸 무너지고 해결중심으로 접근한다.


반면 딸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는 한유리는 재희와의 대화에서 공감을 해준다.

무엇도 질문하지 않고 재희의 말을 그대로 반영한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자기개방을 하고 그때 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화가 났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어쩌면 재희가 원하는 건 그 문제 내가해결해 줄께 가 아니라 어머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내가 알아 그거 되게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야 라는 말들이었다.

한유리의 공감대화는 재희의 마음을 열었고 재희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너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문제는 어른들이 해결할 일이고 너는 너가 원하는 대로 하면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것ㄴ 역시 그들이 알아허 할거야 라는 말을 근사하게 풀어준다.

너가 가장 우선인 부모들이니까 너의 결정으로 두 사람이 상처받는 일은 없다고 너의 선택을 가장 존중할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공감의 대화와 문제해결의 대화의 다른 점을 두 사람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법정에서 의뢰인을 앞에 놓고는 두 사람은 다른 위치가 된다.

그 자리에서는 차은경의 문제해결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

공감도 필요하지만 의뢰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온 사람이다.

그때는 차변의 말대로 내 감정 내 입장은 넣어두고 상대가 원하는 것 상대가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 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모를 수 있고 

알지만 말로 잘 풀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빙빙 돌릴 때도 있다.

차변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알아낸다.

사실 상대의 문제를 잘 파악하는 차변 역시 공감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 

한변은 상대의 말을 내 관점에서 걸러서 다시 재 조립해서 듣는다.

아이를 서로 맏ㅌ지 않겠다고 싸우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나는 그의 말은 부모란 모름지기 아이를 서로 원하고 양육하고 싶어해야한다고 하는 신념ㅔ 차있다.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이때만큼은 한변의 공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서로 다른 모양의 퍼즐조각처럼 서로 많이 다른데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다.

서로 원하는 지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콤비 플에이도 서로가 적당한 경계선으로 나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즉 두 사람이 가족이 아니기때문에 가능하다.


가족이란 그냥  뒤엉켜져 있어서 어디까지가 내 경계인지 모호한 집단이다.

차은경이나 한지상은 둘 다 재희가 내마음이라고 믿는다.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내가 그동안 보살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아이가 나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다. 나와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서도 상대가 내 입장을 이해할거라고 잘 알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부부이고 가족이라고 믿어서 갈등이 깊어졌다.

상대는 나와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서운한 마음까지  안고 함꼐 할떄 가족은 오래 간다.


한지상에게는 차은경이 가져오는 경제적 안정은 당연시 되었고 그에 더불어 흔히 모성이라고 하면 드러나야할 아이에 대한 무한정한 애정과 희생까기 기대했다.

차은경 역시 한지상의 육아와 살림에 대한 책임을 어느 순간 당연시 했다.

내가 이렇게 서포트를 하고 있고 내 시간이 없을만큼 일에 매달리는 것은 다 가족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걸 몰라주는 것이 서운했고

늘 육아와 살림은 당연하게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의 모책임하고 무신경함에 서운했을 것이다. 

서로 가족이 그러해야한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한다 라는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차은경은 엄마로서 경험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먼저 사회적인 성공을 했고 사회에서 일을 하고 얻는 성취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공감보다는 문제해결에 뛰어나고 그 능력으로 지금껏 살아왔따.

그런 그에게 육아를 하면서 집에 있으라는 건 사실 날개를 꺽는 일이다.

사람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집보다 직장이 더 편하고 성취감을 주는 차은경은 아이와 보낸 육아휴직 기간이 행복했지만 동시에 자신은 사라지고 없는 상실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육아란 온전히 타인에게 집중해야하는 노동이다.

그냥 잠깐 보면서 귀엽고 즐거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차은경과 재희의 관계처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뒤톧수를 한대 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지칠 수도 있고  절대 어떤 풀이과정도 맞지 않은 난제 일 수도 있다. 

그런 간계에서 에너지가 고갈된다.

사실 양육은 내가 얻는 즐거움과 보람만큼의 에너지를 그대로 빼앗기는 일이다.

아이가 마냥 이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아이. 나의 도움이나 관심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고 생존마저 위태로운 존재. 자라서는 엄마의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엄마가 하면 당연하고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심어주는 시화분위기와 여러가지 거지같은 이론들이 부모를 옥좬다.

그냥 이뻐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주말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좋은 아빠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부성과 다르게 모성은 하나라도 빠지면   실패가 되고 죄책감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들은 많은 차은경들은 (굳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문제해결중심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내 아이에게 생기면 그때 모든 시선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에게 쏠린다. 엄마가 어떻게 해결하지? 지켜보는 눈들이 생긴다.

아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닌데 엄마가 먼저 지레 겁을 먹고  돌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감은 뒤로 밀리고 문제해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아마 드라마는 재희와 차은경이 좋은 관계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아직 외도를 한 배우자에게 좋은 결과를 주는 드라마는 없다.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를 양육할만큼 좋은 아빠였떤 한지상이었는데  외도문제가 생기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차은경에게 자존감이 상했는지. 육아에 지쳤고 외로웠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 않다.

다만  그럴 수 있지,.... 라는 마음이 외도가 보태지면 어떤 깐한 마음도 들지 않는다. 


부모도 힘들도 자녀도 힘들다.

나와 다른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

나와 다른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녀

부모같지도 않은 부모도 있을 거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엇나가는 자식도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그래도 함꼐 살아가려면

나는 늘 주장한다.

적당한 거리.

모르는 사람처럼 

늘 다를 수 있다는 생각 (어제와 오늘 내마음이 다른데 저 사람은 늘 한결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도데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어쩌면 서로 외롭고  쓸쓸할테지만

나는 차라리 상처나 배신감보다는 외로움을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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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데버라 캐머런 지음, 강경아 옮김 / 신사책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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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B다 라고 딱 짚어주고 정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렇게 다양한 개념과 시각을 보여주는 책도 괜찮다. 어쩌면 그래서 읽고나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다툴수 있다. 일고서 모두가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단 그건 아니지 그렇게만 볼건 아니지 라고 끼어들여지가 믾은 책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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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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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아주 뜨거웠던 94년의 여름만은 못하지만 지독히도 뜨거웠던 그 여름 시부의 병수발을 들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학으로 홀홀단신 상경해서 일가를 이루고 아내가 죽은 후 혼자 아들을 박사까지 만든 시부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이라고까지 불리던 정많고 젊잖은 시부였다.

나는 남편과 교대로 시부를 간병한다.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알던 시부라면 힘들지 않다. 나를 딸같은 며느리라고 생각하고 딸처럼 대하지 않았는가 나도 딸인 듯 그를 보살피면 된다.

그러나 증상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두 사람의 힘으로 감당이 되지않고 일상에 자꾸 균열이 생긴다. 휘청거리고 남편과의 관계마저 건조하게 꺼끌거리는 낌새를 보이자 간병인을 쓰기로 한다.

하루 8만원 큰 돈이지만 최저시급을 놓고 계산해보면 당사자에게는 큰돈이 아니다.

그러나 그 8만원으로 나는 시간을 샀다. 그 시간조차 온전히 내가 가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집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시부의 섬망증상이 나타나면서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죄를 짓지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

평소에 느낀 어떤 찜찜함이 훅하니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시부는 평소 쓰지 않던 욕설을 하고 억지를 부지고 간병인을 마구 대한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럽고 민망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병자니까 지금 제정신이 아닌 섬망상태니까 그렇다. 그러게 이해하려고 하지만 찝찝하고 억울하고 이건 아닌데 싶다. 그러나 콕 찦어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시부의 기억속에 있던 자두를 먹으며 고모를 기억하고 고모가 병문안을 온다.

애매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병자에 대한 연민과 간병하는 사람들에 대한 치하 입에 발린 무책임한 말들이 오가는데 순간 시부가 깊이 감추어둔, 제정신에는 절대 꺼내지 않을 속마음을 드러낸다.

저 애가 우리집에 시집와서 지금껀 뭐 한 일이 있나? 박사님과 결혼하면서 열쇠 세 개를 해왔나? 애를 낳았나? 저 애 때문에 우리 집 귀한 손이 끊겼

섬망의 순간에도 내가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은 정확히 짚어낸다. 가장 약한 부분 가장 나를 두려워하는 그 부분을 사정없이 쪼아댄다. 그리고 간병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을 한다.

도둑년

모두가 불편한 상황 난감한 상황이다.

그냥 니가 어떻게 좀 해봐라. 니가 참아봐라.. 말을 다르지만 뉘앙스는 다르지 않다.

해결하라는 것 책임지라는 것 더러운 일 치사하고 불편한 일들은 니가 하라는 무언의 몸짓과 손짓들

남편은 방관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따로 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부끄러운 짓거리를 해대면서 아무렇지 않고 그 옆에서 그 짓을 고스란히 보고 당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또 따로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역할구분되어진 것을 가족공동체라고 여긴다.

호통치는 사람이 있고 말리는 사람이 있고 방관하는 사람이 있고 당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타인보다 가족안에서 제각각 맡은 역할들이 있고 틀림이 없이 항상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이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고 익숙한 촌극이다.

역할이 바뀌면 그럴 수 없이 불편하고 불쾌해진다.

호통치는 사람이 당하는 건 당연히 불편하지만 당하던 사람이 방관하거나 말리던 사람이 당하거나 어쨌거나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냥 당하는게 낫고 모르쇠하고 있는 게 가장 안전하고 모두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야 상황이 빨리 종료될테니까

 

결국 그 사단이 나고 남편은 간병인을 그만두게 한다.

표면적인 건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니 못할 거라는 배려있는 이유겠지만 사실 노여움이다. 그 상황을 드러나게 한 노여움 감추고 싶던 장면이 공개된 분노와 치욕이다. 그건 고스란히 아내에게 향하는 것이지만 애꿏은 간병인을 자른다.

아버지는 간병인을 아내로 착각했다. 그래고 순간 본심을 드러내고 적의를 표현했다. 속에 꾹꾹 담아두었던 쌍욕까지 시전했다.

아버지의 화를 돋운 건 영옥씨다. 그 앞에서 얼쩡거리며 아내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은 아내다.

아내에게 화를 낼 수 없음을 누구보다 남편이 잘 알고 있다. 그건 공정하지 않고 어처구니 없음에 영옥씨를 자른다.

 

새로 남자 간병인이 왔다. 그는 그가 고치지 않은 사투리가 권력임을 안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를 이해해야한다는 오만에 사투리를 마구 써댄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는 선생님이다.

온갖 일들을 도맡았던 영옥씨와는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힘이 있다.

그리고 시부는 당연하게 그 힘을 알아보고 그 힘에 복종한다.

 

그리고 그 간병인이 자리를 비운 순간 시부는 요의를 느낀다. 참을 수 없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시부는 며느리에게 의지해서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노출한다.

이제 나는 남자도 아니다. 부끄러움이 머리까지 돌아내려오는 순간 시부는 분노한다.

감히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다니

부끄러움은 가부장의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들킨 가부장은 가장 약한 며느리에게 분노한다. 죽어라 죽어

 

같은 사건을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용서하라 용서하는 것은 별일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익숙한 복종이다. 그러나 잊지 않겠다.

 

시부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아들에게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그 장례식장에서 남편은 엉뚱한 곳에서 용서를 구하며 울부짖는다.

나는 어이가 없다.

우리라고 굳게 맺어진 동맹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들은 언제는 내가 우리에 속했다가 어떨 때는 선 밖으로 밀쳐낸다.

공고한 그들의 동맹에 내가 낄 수 없다. 우리는 규칙을 정하고 뭔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한다. 윤리와 그러해야하는 당위를 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규칙은 언제나 내게 강요되면서 내가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도 우리가 된다. 어떤 희생 어떤 돌봄 어떤 뒤치다꺼리를 할 내가 우리속에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의무를 그들 마음에 들지 않은 형태로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가 아니다.

 

권력은 호의를 베푼다.

상대의 취향이나 기호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의도가 호의라면 그냥 호의인 것이다.

상대의 배려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익숙하고 편리한 상황은 당연하다. 불편하게 하는 것 상대가 당연히 배려하지 않는 순간 그건 나에 대한 도전이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어머니에게 인사시켜드리며 말한다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많으셨어요? 이제 어머니는 호강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어머닌 힘든 일 다 내려놓으시고 호강만 하셔요

어머니의 그 호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동안 어머니의 고생을 알았던 독신 아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유부남 아들은 호강시킬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가 될까

어머니긔 고생은 아들을 향했는데 어머니는 그 댓가를 며느리에게 요구한다.

너도 가족이 되었으니 당연한거 아니냐고 아들이 한마디 거든다.

그리고 며느리는 가족인데 당연히... 라는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화목하고 비둘기집같은 우리가족

 

 

텍스트를 너무 사랑해서 번역이 갈팡지팡하는 역자

너무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꼬이는 해석

 

비단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너무 잘 하고 싶어서 내 능력 이상으로 애를 쓰거나 노력하면 모든 게 꼬인다.

과장된 것은 어딘가 허술할 수 밖에 없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혼자만 애써서 될일도 아니다.

사람의 관계란 적당이 모르고 넘어갈 때도 있고 모른 척 할 때도 있고 몰라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상대를 다 알겠다 다 해주겠다는 건 오만이다.

상대도 나에게 다 해줄 수 없다.

신도 그렇게는 못한다.

 

 

가부장제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 집 안방에만 있지 않고 현관에도 있고 이웃과 우리집 사이 엘리베이트를 기다리는 공간에도 있다. 버스 안에도 있고 사무실로 향하는 번화가에도 있다.

그건 예의이기도 하고 질서이기도 하고 상식일 때도 있다.

어른을 공경해야 하고 가족끼리 돕고 살아야 하고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내가 조금 참아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행위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가장 약한 사람. 가장 여린 부분에 모든 것이 집중해 있다.

 

어쩌면 시부가 암이 아니었다면 섬망이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가장 어두운 인간의 바닥이 그렇게 가장 약하고 두려운 순간 불쑥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섬광은 주변의 방관자들도 더 선명하게 비춰준다.

모두 함께 조용히 모른 척 그렇게 넘어간다. 그게 편리하고 안전하고 익숙하니까

그렇게 지금 당신 옆에도 가부장제가 있다.

아마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그 형태로 말이다.

 

 

 

나는 가족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해

갖다 버리고 싶고 그냥 씻어서 빡빡 문지르고 싶고

그러면서 나도 그냥 행복한 우리 집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기도 하고

복잡한 관계다 세상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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