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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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할 수 없는 목격자의 진술.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 나조차 나를 믿을 수 없는 상황 심리상담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광장 공포증 환자.흑백 스릴러 영화들, 와인, 약
그리고 의심과 불안
모든 근사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진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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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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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부모는? 
남의 부모다.
가장 좋은 자식은?
남의 자식이다.
말장난같지만 항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니까

한국의 어느 미래 사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 출산율은 줄어들고 미래가 어둡다. 국가는 정책을 결정한다.
이제 아이는 나라에서 책임지고 키우겠다.
아이를 낳은 성인들이 아이의 부모가 되어 키우고 싶다면 키워도 좋다.
아이를 낳았으나 키우고 싶지 않다면 국가가 관리하고 양육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13세가 되어 누군가 부모가 되고 싶어하는 커풀이 있다면 면접을 보고 부모가 될 수 있다. 다만 선택은 아이에게 있다.
국가에서 관리되고 양육된 아이들은 13세부터 부모를 찾고 가정으로 들어가 일반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다. 만약 19세가 되도록 부모를 찾지 못한다면 국가양육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 미래에도 나와 다른 타인은 차별받고 별종으로 몰린다. 
어쩌면 왠만한 가정에서보다 더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케어받았던 아이들이 다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 다른 타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전에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야 한다.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페인트라고 한다. 
부모가 되를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로 결정하는 것은 가디의 조언을 받은 아이들이 결정한다.

이제 18세가 된 제뉴301은 더 늦기 전에 부모를 만나야 하지만 부모를 결정하는 일에 늘 시큰둥하고 시니컬하다. 부모가 되기 위해 잘 보이려는 커플의 그 속속이 너무 잘 보이고 어떤 부모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나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 그리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좋은 부모만으로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보통의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흔히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나 보니 저 사람이 내 부모인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숙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긴 사람에게 부모는 한때 절대적인 존재다. 나의 생명을 책임지고 정서적 물리적 만족감을 채워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은 거부할 수 없고 순종해야 하는 기간동안 부모는 절대적이다. 따뜻한 사랑과 관계를 배우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거나 불안과 공포를 줄 수도 있다. 어리고 약한 아이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없어 받아들이게 되는 부모의 존재는 대단하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보면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아이가 나의 유전자를 닮아 나와 비슷한 성정과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겠지만 나랑 닮았을 뿐이지 나는 아니다. 어떤 아이가 나올지는 부모도 알 수 없다. 태어나면서 처음 만나고 키우면서 알아갈 뿐이다. 
서로가 처처음 알아간다는 것은 미숙하고 실수를 하고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안아죽주고 이해햐려는 과정의 반복들이다.
한없이 미워질 수도 있고 너 없으면 이제 못살 거 같은 끈끈함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미움움도 사랑도 켜켜이 쌓이면서 관계는 단단해진다.
다만 그 과정을 무탈하게 겪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일 수도 있다


이제 제뉴처럼 커버린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릴적 서운했던 경험을 이야기 할 때가 있다. 그때 엄마가 동생만 원하는 걸 들어줘서 너무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웠다는 이야기
사실 나는 공주 드레스가 갖고 싶었는데 엄마는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술사 망또를 사줬다는 이야기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이 그려진  그 원피스가 정말 진저리치게 싫었다는 이야기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외로움 두려움을 들을 때면 당혹스럽다.
나는 잘 해주려고 했었는데
나름 너무 여성적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 중성적인 캐릭터를 심어주고 싶었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골라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아이는 그런 내 선택을 너무 싫어했었다고 한다. 10년도 훨씬 지나서
그 때 아이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믿은 나름의 양육태도도 있었을테고 뭔가 정칮치적으로 옳음을 실천한다는 뿌듯함이나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여겨 아이의 의사를 쉽게 잊었던 것들이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아이에게는 그게 외롭고 쓸쓸하고 인정받받지 못하는 기분으로 남아있다.
그게 아닌데
의도와 다다르게 닿는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비일비재한 게 부모와 자식이다.
좋은 것 바른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섭이 되고 강요가 되고 일방적인 지시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처를 주고 받는다.
제뉴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와 해오름의 이야기 가디인 박의 이야기를 읽으며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생각한다. 생각할 수록 그건 쉬운일이 아니라고 자꾸 도망가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뿌듯함 만큼 늘어가는 건 미안한 마음이다.
잘 해줘도 미안하고 무심해도 미안하고  아이가 의젓하면 너무 빨리 눈치를 보게 만드나 싶어 미안하고 아이이답게 이기적이고  무심하면 내가 잘못된 모델이 된 게 아닐까 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서운하다는 말만 자꾸 꽃혀서 미안하고 돌아보 스스로 한심하고 짜증나서 다시 그 부정적인 감정을 전해버린다.
부모도 참 힘든데

책이 아쉬운 것은 다들 너무 생각이 많고 착하다는 것
누구하나 삐뚤어지거나 순간이라도 악한 마음을 품은 인물이 없고 다들 순하고 생각이 많고 반듯하다. 그래서 읽다보면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부모를 면접하고 선택하는 시스템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왜 이렇게 공공드라마같은 분위기로 풀어버렸을까? 작가가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고민이 많았던게 아닐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5세 전에 아이가 주는 즐거움이  나중에 미운 7살을 지나 사춘기가 와서 지랄지랄을 할때의 증오를 다 상쇄해준다는데 그리고 내 경우도 그러한데
그런 이쁜 기간동안 잘 모아놓은 기쁨도 없이 그리고 함께 미운 기간동안 애증을 쏟아붓는 처절함도 없이 이제 어느정도 대화가 되고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맞추주는 능글맞은 17세의 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건 정말 하나와 제뉴의 말대로 부모 자식의관계라기보다는 그냥 친구같은 게 아닐까 싶다. 
미워서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골백번 들더라도 잠들었을 때, 아기때 그 무방비의 천진함이 여전히 남은 얼굴을 보면서 모든 걸 싹 지워버리는 그런 기분 
뭐 이 얼굴 하나면 되지 않나 싶은 마음
이전의 모든 악전고투를 다 잊어버리는 그 망각같은 것들
그게 그래도 부족한 내가 20년동안 부모노릇을 하게 만드는 힘이었는데 
힘든 건 쉽게 잊고 좋은 건 오래오래 나 편하게 편집해서 기억하게 되는 마법
그것이 부모를 부모로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묘약이다
그런 것 없이 어느 순간 각성해서 부모와 자식이 되는 일.. 그건 
참  생각햅해볼 문제다.

좋은 소재였고 아이디어였는데
캐릭터들이 이렇게 재미가 없다니. 
그냥 부모교육지침서로 흘러가버린 게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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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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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외출이었다

사실 내키지 않았다 태어난지 8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집에 남겨두고 엄마라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다. 죄책감도 들고 이런 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엄마는 사람이 아닌가? 임신과 출산을 겪는동안 그리고 8주간의 육아동안 내가 나 답게 살아본 적이 있던가? 아니 나 답게는 고사하고 사람처럼 살아본 적은 있던가?

늘 잠은 모자랐고 모유를 짜느라 가슴은 쥐어뜯어질것처럼 고통스럽고 내 아기만 발달과정에서 뒤쳐지는게 아닌가 싶고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건 죄스러운 마음만 갖게 한다 아이에게 눈을 떼어서도 안되지만 동시에 임신기간에 쪘던 살도 빼야 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도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출산 이전의 자기 커리어로 돌아와야 할 의무가 있다. 나만 바라보는 어리고 여리고 애틋한 생명체를 떼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가 싶으면서도 이렇게 육아에 발목잡혀 내 인생이 그냥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꼴을 겪고 싶지도 않다.

아이를 열달을 품으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출산의 고통을 겪고 양육을 하면서  무얼하든 죄스럽고 미안하고 짠한 감정만 남는다.아기때문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지만 오롯이  그 정서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힘들고 애쓰고 참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양육이었다.

 

뉴욕 브로클린에 사는 엄마들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마놀라블라닉을 신고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또각또각 걸어다니던 시절이 있었더라도 엄마가 되는 순간  늘어지고  젖냄새를 풍기는 셔츠를 입고 고무질 바지를  허리 근처에 고정시키고  이것저것 쓸어담은 기저귀 가방을 한 쪽에 매고 아기를 안고 혹은 유모차를 밀며 조심스럽게 다녀야 한다. 그건 어디나 똑같다.

5월맘들도 그렇게 8주를 보냈고 애썼고 그리고 딱 한 번 일탈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그냥  엄마가 아니라  아니 엄마이지만 그냥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 엄마로 밤에 외출을 하고 술을 한 잔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날 밤  싱글맘 위니의 아기가 유괴되고 엄마들의 비밀이 밝혀지고 삶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러나 결국 엄마들은 강하다고 ... (이 말은 정말 싫지만) 하고 싶었던지 무능력한 경찰대신 엄마들이 사건을 파헤친다. 아기를 잃었다는 고통을 그들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아기를 누가 데려갔는지 그유괴가 어떻게 된건지보다 사건을 따라가는 세 엄마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다.콜레트와 넬과 프랜시의 집착과 광기까지 보이는사건에 대한 관심과 노력 그리고 흔하지않은  남성 가정주부 토큰의 스토리까지

남의 일 같지 않은 비보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기를 찾기 위해  고전분투 하고 또 제각각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겨우 9주 지난 아기들은 아직도 엄마를 필요로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도 있고 같은 부모인 아빠가 있지만 아빠에게 아기를 맡긴다는 것은 옳은 일 같지 않다. 그냥 도와주는 것 이상 믿을 수도 없고 책임을 나눌 수도 없다. 오롯이 육아는 엄마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눈아래 다크 서클과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부 처짐이나 곤두서는 신경을 누르고 일터로 돌아가지만 믿을 만한 주부가 없는 여자들은 일터에서는 아이가 눈에 밟히고 집에서는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이 자꾸 걸린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하고 두렵고 힘들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다

엄마들은 그렇게 점점 어깨에 진 짐의 무게를 늘려갈 뿐이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5월맘 모임도 잘 되어가고 있다고 책은 끝이 나지만 정말 그럴까?

그녀들의 아이는 이제 겨우 1살이 되었을 뿐인데.

그냥 한숨돌리고 조금 육아에 익숙해진 것 뿐 아직도 삶은 길고 지루하고 두렵게 남아있을테니까

 

늘 궁금하다.

내가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중임에도 늘 의문이다

왜 엄마들은 아이들 옆에서 종종거리고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하면서도 모멸감과 죄책감을 벗어날 수 없고 아빠들은 어느 한 순간 내 기분이 좋을 때 한번 선심쓰듯 베푸는 육아에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기만 할까?

그러지말아야지 하면서도 무심코 저절로 드는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걸까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퍼펙트 마더라는말...

어느 경지에  이른다면 완벽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완벽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완벽할 수 없는 대다수의 엄마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단어 이며 정의인 이 말이 왜 father에게는 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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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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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은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지쳐있었고 우연처럼 기적처럼 새로운 일을 제안받는다. 육아가 아닌 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미리엄을 일을 하기로 하고 보모를 구한다. 처음 누군가 타인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내 생활을 드러내야 하고 타인을 내 생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나타난 루이즈는 완벽한 존재였다.

희미한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미리엄의 완성된 삶에 도드라지지 않았고 그의 육아는 완벽했으며 육아뿐 아니라 살림까지 반짝하게 빛을 낸다.

일은 성취감을 주고 삶에 여유를 주고 남편 폴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시 충족된다.

모두가 루이즈 덕이다.

완벽한 일과 완벽한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루이즈 덕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성공이고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완벽한 성취감앞에서 루이즈는 정말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스럽다.

 

그리스 휴가를 함께 다녀오고 난 뒤였을까

루이즈는 슬슬 완벽한 가정에서 이물감을 남긴다.

완벽한 화장과 옷차림. 티끌 하나 없는 살림살이. 부모보다 보모를 더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미리엄과 폴은 완벽한 삶을 위해 이제 루이즈를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루이즈가 없는 상황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쉽게 떼어낼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껄끄러운 것 그게 루이즈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자기것을 가진 적도 없고 누군가와 친밀한 교류도 없이 딱딱한 자기 껍질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던 루이즈.

그녀에게 미리엄과 폴의 가족은 다정하고 완벽한 공간이고 관계였다.

그 관계속에 그 공간속에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마음

어떤 것도 욕심내지 못했던 루이즈에게 그 가족은 가지고 싶고 속박되고 싶은 대상이다.

이제 떼어버리고 싶은 미리엄과 이제 들어가고 싶은 루이즈는 서로 타인이다

그리고 비극이 생긴다.

루이즈는 미리엄과 폴을 잘 알지 못했고 폴과 미리엄도 루이즈를 몰랐다.

가족처럼 격의없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찰라였고 여전히 타인이었다.

책을 다 읽고도 루이즈는 잡히지 않는다.

책 속에서 툭툭 던져놓듯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한 크로키처럼 묘사되는 루이즈는 조각조각 숨어있다. 그 조각들을 맞추어도 정말 중요한 단서들이 빠진 그래서 그 인물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 사건을 앞에 둔 나나 경감처럼 여전히 그녀는 안개속에 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알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서로 관계가 없을 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

나는, 그에게 타인이다.

그는, 나에게 타인이다.

그냥 아는 사이일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한다.

어디에 살고 누구와 친하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싶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가 내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듯 나도 그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타인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안전하니까

미리엄과 폴은 루이즈가 필요하다.

그들 삶에 쉼표가 필요하고 계속 원할한 지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더 할 나위없이 소중하고 필요한 루이즈지만 그녀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그냥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관계를 원할 뿐이다.

루이즈도 자기를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만나고 걷고 생활하는 루이즈는 누구에게 자기를 보여주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같기도 하다.

그냥 혼자 견디는 것이 가장 쉬웠고 그냥 눈감는 것밖에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책을 다 읽고 우리는 폴과 미리엄을 알게 되지만 루이즈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해줄지 아닐지조차 미지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

그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내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두렵다.

모두 외롭게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알지 못하길 바란다.

같은 마음으로 그를 알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렵다.

가끔 나도 루이즈처럼 나를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서 사라지면 좋겠다 라는 마음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내 속에 있다.

 

타인을 알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이 상대에게 닿아 상처가 된다.

상대에게 닿아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누구도 폭력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개인들

다른 누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버거운 개인들이 자꾸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미리엄의 불편과 이질잠이 루이즈에게

루이즈의 지나친 친절과 완벽함은 미리엄에게 깊이 숨겨진 불안이 건드려진다.

엄마의 위치를 침범당하고 있다는 두려움 불안과 다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소망

그 두가지 욕망이 충돌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에게 주지도 않았던 상처를 받는다.

 

타인을 안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의 바운더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타인을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무심히 읽은 책인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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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잠에서 꺠어나도 여전히 해는 마루 깊은 곳까지 닿아있었다.

집안은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걸까? 설마 어린 딸이 잠든 동안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걸까

끝방이 시끌한 걸 보면 고모들은 있는 모양이다.

고요한 마루 끝에 놓인 요강에 엉덩이를 댄다. 차가운 감촉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떨다가 괜히 마루 끝에 닿은 해가 미워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손목이 잡힌 채 골목을 걷는다.

아직 낮잠의 한 꼬리가 매달려 있는 멍한 상태로 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 집에 닿았다.

생일파티가 한창이었다. 이미 한참이 지난 상황인지 케잌은 적당히 흐트러져 있고 먹다 남은 음식들도 있고 아이들은 누가 새로 오든 개의치 않고 떠들썩하다.

**왔어.

힐끈 보고 인사를 했던가 아이들은 다시 놀이에 빠지고 나는 희미해지는 낮잠의 끝을 닦아내고 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챙겨 주셨다. 일단 먹고 놀자.

그리고 나는 멍하니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늦게 초대되어 그 자리에 그냥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집은 가족들로 가득찼고 시끌거렸고 여전했다.

오늘 하루의 내 일상이 꿈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리송하다.

내가 그 생일에 가고 싶었던 걸까? 그건 언제 약속된 거였지? 대부분이 남자 아이들이었는데 내가 왜 초대된걸까? 친하지도 않았었는데

싫다고 말할걸 그랬나? 안갔더라면

어쩌면 오빠네 가족이 다 부재중인 휴일 한 낮 어린 조카 하나만 보내면 자기들끼리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고모의 술책이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낮선 시간 낮잠에서 깨서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혀 골목을 걷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케잌을 퍼먹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도드라지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슬펐다. 이유는 모르겠다.

 

# 2.

그 때 이모집에 가면 늘 돈가스를 해주셨다.

냉동식품이 아니라 고기를 두들기고 밑간을 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 돈가스였다. 그 때 사촌언니 오빠들은 이미 고등학생이어서 함께 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뭔가 모르고 고요하고 엄숙한 그 집에서는 마땅히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돈가스는 이모네 아주머니가 만들었는데 나는 그때 마다 빵가루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시판 빵가루가 아니라 먹다 남은 식빵을 채에 문질러 가루를 만드는 과정 나는 늘 채를 앞에 놓고 빵을 문지르며 가루를 만들었다.

그때 나의 언니와 동생은 어디에 있었을까?

늘 공부하고 있던 사촌들과 함께였는지 아니니 모르겠지만 돈가스를 만드는 부엌엔 없었다.

나만 늘 빵가루를 만들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잘한다 잘한다는 말에 신이 났던 걸까?

이건 **말고는 할 사람이 없네 니가 제일 잘한다.

그리고 이모가 몰래 찔러주던 오백원짜리 지폐에 맛을 들였던 걸까

왜 나만? 이란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늘 내가 그 담당이었다.

그런 어느날 어디서 마음이 삐졌는지 오늘은 하지 않을거라고 고집을 피웠다.

뭐 할 수 없지.. 내가 동참하지 않아도 돈가스는 완성되었는데 왠지 죄스럽고 이 돈가스를 내가 먹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돈가스가 실망스러웠고

내가 마땅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지만 나는 쉽게 넘기질 못했다.

그런데 더 슬픈 건 아무도 나의 그런 심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빵가루를 만들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 3.

언니가 집을 나갔다. 외치에서 머리통이 큰 동생들과 다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언니가 집을 나갔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형제들은 위 아래가 있더라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있다. 위면 어떻고 아래면 어떤가 하는 마음에 서로가 무시하고 막대하는 시절

사실 우리는 언니가 가출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잠깐 나갔나보다 그랬던 거 같다.

그리고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니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 착한 &&이 집을 나와?

니들은 언니가 가출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수가 있니?

평소 화를 내지 않은 이모가 쏟아내는 말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왜 가출을 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니는 언제나 옳았다. 언제나 착했다. 더할 나위 없는 첫딸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동생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뭐든 나서서 주도하고 챙기는 성격

그래서 동생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키는 것을 하거나 싫다고 하거나 두가지 중 하나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착한 언니는 어른들에게도 잘 해서 인정 받았고 그 덕에 우리는 늘 철없고 생각없는 동생이었다. 나이가 얼마가 되든..

그렇게 착한 언니가 참고참다가 화가나서 가출을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엔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짢고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랑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 왜 다퉜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언니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언니는 옳은 말을 했을 것이고 우리는 무시하거나 거부했거나 했을 것이다.

문득 그 때가 생각나면서 뒤늦게 억울했다.

무엇이든 항상 옳고 바른 사람이 있고 항상 틀리고 나쁜 사람이 있구나

착한 언니가 디폴트값이 되면서 우리는 늘 상대적으로 덜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되었다.

언니랑 의견이 다르거나 언니의 말을 거부하거나 언니를 화나게 하는 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누구나 착하다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사람 그 사람의 그 강한 자부심이 때로는 주위사람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언니를 욕할 수 없어서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약이 올랐던 어리고 젊었던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때 나도 참 힘들었겠다고 토닥거려주고 싶었다.

 

# 4.

“한 번도 감정이 드러나는 걸 본 적이 없어”

이게 칭찬일까?

나를 소개하면서 선배가 한 말이다. 좋다고 막 들뜨는 성격도 아니고 힘들다고 티나게 가라앉는 성격도 아니고 늘 그만큼 담담하게 다르지 않게..

감정을 그렇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몰라서였다.

누군가 내 영역에 들어오면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게 먼저 눈에 띄어서 나쁜 의도도 아닌데 화를 내거나 그걸 표현한다는 건 너무 심한게 아닌가 하며 스스로 마음을 검열하고 차단한다.

너무 신나는 일이 있어도 그걸 표현하는 건 자만 혹은 뽐내는 일처럼 보일까봐 아닌 척 하느라 가끔 상대를 실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뭘 해줘도 좋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위로 뾰족하게 솟은 부분을 깍아내고 아래로 깊게 박히고 싶은 부분을 깍아낸다.

결국 뿌리를 내릴 수도 없고 위로 솟아 뻗어나갈 수 없는 나의 감정선들은 물속에서 흔들리는 부초처럼 그냥 그저 떠돌아 다닐 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단단하게 어딘가 묶여져 있다. 어디에 옮겨 심기든 상관없는 상태에서 흔들려 흘러가버려도 안되게 단단학 붙잡고 있는 것 마치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도 잡지 못한 채 반동으로 흔들려 누군가에게 닿아도 안되는 상황에 몰린 것처럼

아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한동안 감정이 단단하고 잘 조절 할 수 있어서 이성적이라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늘 이성에 비해 하위 개념이라고 믿었고 감정을 주체못하는 걸 비웃었고 무시하면서 스스로 단단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자부심으로 느꼈다.

그렇게 안으로 허물어지고 텅텅 비어간다는 걸 몰랐다.

 

# 5

상처에도 경중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디선가 기대고 싶을 때 누군가 더 큰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 쉽게 내 상처를 안으로 숨겼다.

겨우 이런 일로 징징대면 안되는 거야

우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소한 상황에서도 불쑥 생겨났지만 그건 잘못된 거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봉인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으니 역시나 과장된 생각이라고 믿었다.

늘 나의 상처를 나의 힘듬을 그 자체로 보지 않았다.

저 사람보다 얼마나 큰가 작은가? 늘 비교하는 대상일뿐이었다.

정말 문제는 내 상처는 누구의 것보다 너무나 작았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비틀대는 이유는 내가 약하기 때문이고 내가 징징대기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에게 너무나 엄격하게 판단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이를 그만큼 먹어서 이정도도 못 견디면 안되는데

부모가 되어서 먼저 힘들다고 지치면 안되지

가족이라면 함께 견뎌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내 욕구와 나의 마음은 늘 쉽게 잊혔다. 그렇다고 타인을 깊이 공감하며 들여다 볼줄도 몰랐다. 사실 나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볼 수 없다는 걸... 나는 늘 모르고 살았다.

내가 받지 못한 공감을 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한 배려를 타인에게 할 수 없었다.

늘 고대로 따옴표로 가져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써도 이상할 것 없는 입에 발린 위로와 공감만 남발하고 있었다.

공부가 힘든 아이에게

친구관게게 힘든 이들에게

가족에게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늘 어디든 쓸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말들 하나도 깊이가 없어서 그저 상투적이기만 한 그 말들 이외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듣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아파서 너무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득한데 그걸 표현할 줄 몰랐고 오히려 너무 아파서 타인을 외면하고 싶었다.

고통의 치료는 샐프로...

나도 말하지 않는데 너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딱 그마음 그렇게 점점 체온이 내려갔다.

웃기는 건 그러면서 난 참 나에게 공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싫은 말 하지 않고 잘 들어주고 (거의 반이상은 딴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내주는 것

단 그게 전부였다.

딱 이마에 붙여서 가지고 있다가 등을 토닥이며 돌아서는 순간 그대로 냉정하게 떼어 버리면 그만인 만큼만 상대에게 곁을 내주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상처받고 힘들고 싶지 않아서

왜나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할 줄 몰라서..

 

# 6.

 

윤성희의 소설들은 참 이상했다.

이 소설은 절대 영화가 되거나 드라마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도데체 사건이 나오질 않는다. 극적인 상황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내가 먼저 지쳐버리는 너무 손에 땀이 나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인물의 어떤 감정이나 느낌은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전혀는 아니더라도 거의 표현하지 않고 인물들의 상황만 나열하는데 그 상황이라는게 두서가 없고 개연성이 없다.

누군가를 만나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게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아픔이 있고 순간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었던 경험이 있고 이젠 잃어버린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결함들일뿐이다.

하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경험들을 따라가면서 자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가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된다.

 

어릴 적 드라마에 출연해 진구라는 역할을 했었던 형민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형민과 토크를 하던 아나운서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형민의 아내, 형민의 딸 형민의 딸의 친구 형민 아내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형민의 직장 동료들, 출퇴근 시간에 만나는 토스트 포장마차 사람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무슨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처럼 줄줄이 나열된다.

이건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뜬금없이 전편에서 스쳐가던 사람이 여기서 불쑥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특별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결말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편에서 누군가가 불쑥 마무리를 할 수 없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므로

드라마속 어린 진구는 참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묵묵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족을 돌보고 의젓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진구의 성향은 아마 형민에게서 왔을 수도 있고 형민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그건 대단한 유혹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을 경우 괜찮다는 평판만큼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형민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도 그랬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

사람이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 없다 그렇게 나누겠다면 한 사람이 절반으로 나뉘거나 세토막 네토막 심지어 잘게 쪼개져버릴 수 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람일 것이다.

형민도 그렇게 하영이도 그렇게 모두가 그렇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과 무게는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사람은 좋은 사람은 알아보지만 그 사람이 견디는 무게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진데 타인이 어떻게 알까?

 

# 7.

그가 어떤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별 거 아닌 기억일 수도 있고 차마 꺼내기 힘들어 지워버린 고통일 수도 있고 쉽게 잊힐 것 같지만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무심하게 흘리는 별 거 아닌 이야기가 타인인 내개 깊게 박히기도 하고 힘들게 힘들게 꺼낸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몹시 아프다.

그냥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좀 쉽게 살고 쉽게 무뎌져서 흔한 그래도 편한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자꾸 부끄럽고 미안하고 어쩔 줄 모르는 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처럼”

형민이 미안하다는 마음을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할 줄 알아서 그래서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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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1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 보내세요.^^

푸른희망 2019-09-13 20:40   좋아요 1 | URL
늘 상냥하시고 부지런한 서니데이님~ 명절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계속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