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가해자에게 - 이 대화는 가능할까?
사이토 아키요시.니노미야 사오리 지음, 조지혜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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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이어져온 피해자와 가해자의 왕복 서신과 대면 프로그램을 기록한 책이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 니노미야 사오리와 가해자 임상 전문가 사이토 아키요시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회복적 대화라는 전례 없는 실천을 시작한다. 피해 이후의 시간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 대화는 시작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출발한다.

 

사이토는 3000여 명의 가해자를 만나온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재범 방지 치료를 진행해 왔으며, 니노미야는 그 과정에 참여해 피해자의 언어를 직접 전달한다. 가해자성-남성성-인간성을 해부하는 이 대화는 단순한 사과나 감정적 화해를 거부하고, 왜 가해가 반복되는지를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대화는 행동 변화를 보장하지 않지만, 변화의 조건을 탐색하는 과정 자체를 기록한다.

 

용서와 사죄를 분리하고, 교정이 아닌 갱생을 요구하는 이 책은 성폭력을 과거의 사건으로 봉인하지 않는다. 책임을 평생의 과제로 끌어안는다는 의미를 묻고, 실패한 대화조차 무용하지 않다는 믿음 위에서 언어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피해-가해의 도식을 넘어 오늘의 사회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문제작이다. (알라딘 책소개)

 

이상하게 폭력앞에 성이 붙으면 피해자가 늘 전전긍긍하게 된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내가 원인이 아닐까

그리고 세상은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궁금해한다.

왜 그랬대? 무슨 일이래? 그래서 살 수 있겠어?

뭔가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니야? 빈틈을 보였거나 뭔가 기미가 있었겠지

표적이 피해자에게 몰리면서 가해자는 지워진다. 천인공로할 사건이라면 가해자 역시 죽일놈이 되어 세상의 입에 오르고 몇 번을 죽임을 당하겠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폭력들은 결국 피해자에게만 관심이 쏠리다가 잊혀진다.

당했다면서 웃어? 당했다면서 화를 내고 당당하게 살아가? 뻔뻔하네

혹은 아직도 그러고 사니? 그냥 잊어 지워버려

그리고 법정에서는 늘 복사해서 붙인 말처럼 앞날이 창창한~ 혹은 유능하고 다정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라는 이유로 양형이 가벼워진다.

피해자가 가해자들을 만나기로 한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만나게 된다.

서로 무슨 말을 할까

편지로 소통하고 피해자의 말을 듣는 자리로 진행되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바로 그 피해자가 아니다. 서로 날선 감정들이 오가지는 않지만 충분히 상대를 생각하고 직면할 수 있는 기회다.

피해자에게 가해자는 떠올리기 두려운 존재이거나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존재일 수 있었다.

사건은 있지만 잡히지 않은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주고 두려움을 주고 세상에서 나를 고립시킨다. 그가 어디서 나를 보고 있을지 나를 알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알고 있는 행위자 역시 내가 겪은 고통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 않거나

받게 할 수 없을 경우 그 기억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피해자의 고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해자의 입장은 어떨지 궁금했다.

폭력의 예방은 당연하게도 가해자가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서 완벽하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 행위하지 않음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폭력을 저지를까? 왜 성폭력이 계속 발생하고 있을까

그 대답은 가해자가 들려주어야 할 차례다.

 

책에서는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

사람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어떤 대상으로 여긴다.

성적인 존재일 뿐 나와 같이 생각하고 감각이 있고 존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 비인간적인 통념이 있다. 그냥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면서, 저도 좋아서 했을텐데, 거부하지 않았다면 동의한거 아니야? 그런 통념들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하고 행위들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남자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행동들, 자세들 울지 말아야 하고 당당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들을 가지지 못했을 때 가장 약한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아가는 것이 폭력이다. 약한 존재를 휘두르고 마음대로 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내가 살아있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각이 폭력, 성폭력을 만든다.

가해자도 왜 자신이 가해자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내 행동에 대한 성찰이 없고 오랫동안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운이 좋지 않아 들켰고 그래서 가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들키지 않아서 괜찮아서 해도 괜찮을거라는 이유가 붙기도 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도 하고 그 행동에서 쾌락이나 힘을 느끼면서 더 당당해진다고 믿어지는 통념들

그래서 가해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가해자로 살아가지만

그 역시 스스로 알지 못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행위 이후의 삶이 있다.

계속 살아야 하는 일상이 있다.,

그 일상은 행위 (사건)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 상처(행위)와 함께 그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

행위자는 이후의 삶을 살아가지만 피해자는 이후의 삶을 살지만 살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를 살갗을 벗겨내는 것처럼 훓어내린다. 그리고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 그건 삶이 없는 것보다 고통스럽다.

행위자는 문제의식이 없고 피해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폭력행위가 일상이어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이벤트처럼 다가오는 폭력이 행위자에게는 일상이어서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폭력에 대한 생각이 만연하고 당연하다는 것이 더 무섭다.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행위자도 행위자임을 기억해야한다.

일상이 그 기억으로 망가지거나 멈추어서는 안되지만

진행되는 내 일상안에 그 기억을 지울 수도 없고 지워서도 안된다고 한다.

내가 가해자였음을 기억하는 것 거기서 조심하고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생긴다.

피해자도 피해자임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일상이 어려울수도 있고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기서 조금씩 회복되면서 전과 다르지만 안전하고 무심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회복적 사법에 기초를 둔 프로그램답게 사과와 용서가 이야기 된다.

사과는 당연하다.

그 사과의 대상이 누구인가

사법질서에 대한 사과는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 경찰을 향해 심지어 보이지 않은 대중을 향한 사과는 수없이 많지만 피해자를 향한 사과를 찾기 어려웠다.

사과가 내가 어떤 잘못을 누구에게 했는지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모면이나 그저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사과는 그 방향을 잃는다.

진짜 사과는 내가 어떤 잘못을 했고 상대가 어떤 상처를 입었고 지금 어떤 마음인지를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다. 그래서 상대가 보내는 분노나 원망을 고스란히 받겠다는 마음이다.

이후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나 약속도 포함되어야 한다.

물론 보상이나 죄값도 당연하다.

그러나 사과가 용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과를 했는데 용서도 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용서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용서를 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원망하거나 상대를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몰아서는 안될 일이다.

 

죄는 평생을 달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죄와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삶은 되돌아갈 수 없다. 그저 앞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전에 한 행동들과 말들이 주렁주럭 꼬리처럼 나에게 붙어 있을 것이다.

그걸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한다.

 

피해자 나노미야씨는 가해자도 행복해야 하고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이란 타인을 해하고 타인을 희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하고 감내하고 조금 참아내면서 만들어 지는 진짜 행복을 안다면 행복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피해자도 행위자도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사는 사람이 행복하고 편안해야 나도 그럴 수 있다.

죄책감에 떨며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힘들다.

서로가 행복하기를 원하면서

그 행복이 어떤 희생이나 차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복적 대화의 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가해자와 대화를 해보겠다는 나노미야씨의 용기도 대단했고

그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여러 행위자도 대단하다.

대화를 통해 타인을 알아가는 것

타인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어쩌면 서로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서로에 대해 상상하고 생각하고 듣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란 

내가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라는 것 

폭력예방의 가장 앞자리는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의 회복임을 다시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과연 얼마나 잘 진행될지...

모르겠다.

일본에 행위자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꽤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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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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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을 수완과 시간과 허신과 공감능력을 요한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건설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하는 행위다. 이러한 작업은 여전히 십중팔구 여자의 일로 치부되며 그 결과 이 막대한 과제를 얕잡는 온갖 단어가 난무한다.

아내와 어머니를 배태한 것이 사회라면 이이는 만인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다. 오랜 가부장제가 이성애 핵가족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이야기를 구축하는 작업도 이이 손으로 이루어졌다. 때에 따라 적절한 꾸밈새를 보태가며 말이다. 그리 손수 짓고꾸린 가정집에서 정작 스스로는 겉도는 느낌과 대면하는 순간 사회와 그 여성 불평분자라는 한층 큰 차원의 이야기가 촉발된다. 그간 희망과 자부심과 행복감과는 다른 여러 모순되는 감정과 분노 가운데 본인이 연기해온 사회적 이야기에 아주 무릎 꿇지 않은 한 그는 이야기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분투한 사람치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도 없이 오히려 그 중간 어디께 있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경계에서 서성이며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사실 난 침착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여성성의 구태의연한 정의에 따르면 침착함은 여성성이라는 문화적 인성 중에서도 주인공 격에 해당하는 특성이다. 그녀는 침착하고 그녀는 인내한다. 그래 견디고 고통받는데 소질이 있다 못해 실은 인내와 고통이 그녀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중략) 그럼에도 남자들이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는 점만은 명백하다. 내 배역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중단하는데는 어떤 비용이 따르려나?

내가 아는 여자중에 여성성이라는 유령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유력이 뭔데> 여성성이라는 유령은 허상이자 망상이자 사회적 환상이다. 연기하기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며 그 역할(희생, 감내, 고통의 와중에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기)을 연기하다 끝내 이성을 잃고 만 여자도 수두룩하다. 그런 이야기라면 결단코 다시 듣고 싶지 않다.

다른 재능을 가진 새로운 주인공들을 찾을 때였다.

 

나는 혼자였고 자유였다. 관리되는 것도 거의 없고 수도나 전기같은 기본 시절마저 수시로 끊기는 집에 따라붙는 막대한 관리비를 지불할 자유가 내게 있었다.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가는 컴퓨터에 글을 쓸 자유가 내게 있었다.

 

엄마가 된 여성들이 배우는 치명적인 인내심이 그들 스스로를 해치는 길임을 보부아르가 앞서 바르게 짚어내기도 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겐 이런 인내심이 없었다.

우리의 욕망을 주장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차라리 그런 욕망들을 조롱하는 게 더 마음 편하기 마련이니까

 

메두사가 내 내면에 깃든 게 반길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메두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여자이자 심기가 거슬린 여자였다. 남성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는 대신 정면으로 되쏘아 보며 맞서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두사는 신화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고 결국 여자가 잔혹하게 참수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자의 머리 (곧 마음, 주관. 주체성)와 몸의 분리로. 여자의 머리가 지닌 잠재력이 그만큼이나 위협적이란 듯이 말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위협적인 여성 권력을 끝장내고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메두사를 참수한 것이리라 추정한 바 있다.

 

현대 가정을 둘러싼 변덕스런 정치가 한층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터였다. 내가 아는 현대적이고 외관상 힘이 있어 보이는 여자 중의 다수가 다른 이들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도 보금자리에서 느껴야 마땅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보다도 사무실이나 다른 형태의 작업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후자에선 그나마 누군가의 와이프 이상의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었다.

와이프 또한 가면을 쓰고 그 갖가지 변형된 모습에 맞게 얼굴의 양태가 달라진다. 집안의 주소득자인 여성 중엔 그들이 성취한 성공을 빌미로 남자 식솔에게 간사한 제재를 받는 이도 있었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알려주었듯이 힘과 성공을 남자 몫으로 간주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를 능가해서는 안된다. 남자가 여자의 재능에 경제적으로 의지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그리고 여자들에게 관해 역사적으로 행사해 온 길고 긴 지배의 특권을 수월히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진다. 동시에 여자는 자기의 힘을 숨겨야만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치명적인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

 

가부장제의 가면이 기형적이고 도착적이라는 걸 남자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게 가면은 상처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가면에 장식이 많이 붙을수록 그는 여자와 아이와 다른 남자를 위압하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면은 다른 남자들의 눈에 낙오자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남자가 성공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자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기때문이라면 사회는 이런 측면에서 실패하는 것을 위업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여성을 완전히 억누르는 데 실패한 오늘날의 중년 남자가 자기 권한을 빼앗겼다고 여기면서 느끼는 고통 이는 세심함을 요하는 문제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 불편함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힘이라면 보여지는 존재와 보는 존재가 구분되는 것 역시 힘의 문제다. 보여지는 존재가 보는 순간.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불편하고 역겹고 불쾌하다.

누구나 나를 볼 수도 있고 보여질 수도 있음을 모른다.

보는 사람은 늘 보는 행위만 할 뿐 보여진다는 생각이 없나?

부모는 자식을 지켜본다. 돌보기 위해 안전을 위해 그러나 자식이 부모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순간들을 예의없고 버릇없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아내를 바라보고 사랑스러워하고 애정을 주는 존재인데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고 사랑스러워하고 뭔가를 베푼다고 느끼는 순간 불편함이 든다.

직장에서도 상사는 바라보는 자리에 있고 직원은 보여지는 자리에 있다.

일을 하는지 다른 짓을 하는지 모든 내 행동들이 시선속에 있다

학교 역시 교사들은 바라보고 학생들을 보여진다.

cctv를 달아도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내 집주변의 모니터도 공권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찍히는 것은 뜻대로지만 그 화면을 보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메두사의 눈들

피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그래도 마주보는 그 시선이 불편한 이가 꼭 있었을 것이다.

굳이 목을 치고 눈을 파내야 하는 이유가)

 

(쓰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안다는 것은 오래 보고 오래 듣고 오랫동안 내 속에 덩어리 진 것들을 매만지는 일이다.

보고 알게 된 것들을 쓰게 되고 쓰면서 정리하고 다시 더 잘 알게 된다. 선순환이다.

보지 못하면 쓰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보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이고 그 말을 복종에 길들이는 것

아는 것은 아프지만 힘이 맞다. 아픈 힘이다.

괴롭지만 그 괴로움에 힘이 있다.

안다는 것은 다시 모르는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

머릿속에 들어온 것을 잊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을 택한다. 알지 말라 알려고 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보지 말라

쓰지 말라.)

 

(방랑하는 밤)

낡고 닳은 이야기에 따르면 주인공이자 영웅이요 꿈은 좇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기에게 딸린 여자와 아이들의 청승맞은 요구와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할 일을 하러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아버지는 자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것이라는 게 통념이다. 어머니들이 우리를 위해 꾸려놓은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환영을 받거나 아예 낯선 이방인이 돼 버리고 만다. 이방인의 경우 그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 보다 결국 우리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아버지는 세계에 나아가

우리 어머니들은 이러한 생활 가운데 우리와 살아가고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모든 걸 어머니 탓으로 돌린다. 동시에 우리는 어머니의 인품과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신화들과 공모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우리 몫의 불안감마저 떠맡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불안으로 넘쳐나기에 어머니에게 우리의 감정을 털어놓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불가사의하게 우리가 느끼는 바를 어머니가 모조리 이해해주리라 기대한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헌신하고 우리를 시중하는 자아가 아닌 우리 너머에 있는 당신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자아에 가까워지기라고 하면 우리의 보호자이자 양육자여야 하는 어머니의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사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어머니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 싶으면 어머니가 우리를 질식시키고 전염되기 십상인 불안감으로 우리의 섬약한 용기를 감염시키려 든다고 여긴다.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할 몫이라며 옹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 이리도 모순되고 사회의 가장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잉크로 쓴 메시지를 어머니가 용케 견뎌내는 것이 가히 기적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나

 

여자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의 서사와 결별할 때, 그가 맹렬한 자기 혐오에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이 멎지 않는 회한에 빠지리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핸 마련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어머니가 되기 전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자식의 엄마가 된다는 일은 늘 보던 일이라 잘 아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자식을 돌보고 식사를 만들어주고 깨워주고 잔소리하고 희생하는 존재 그래서 그 엄마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고 무엇을 잊어가고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애써 다잡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량한 모성을 들먹이며 쉽게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고 가차없이 비판했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엄마도 아니지

말은 쉬웠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뭐든 쉬운 법이다.

엄마가 되고 모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다그치고 몰아붙여서 그래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면서 그리고 얄량한 인간애와 전우애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결국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만들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부실하고 아슬아슬한 발판위에

모성은 죄책감을 먹고 자라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커져갔다. 마음은 아니고 머리는 아닌데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걸 엄마가 되고 알았다. 그럴 수도 있구나

몸이나 머리가 참 나약하고 별로구나

몸으로 익혀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일들

아침에 눈을 뜨고 부엌으로 향하고 아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들이 가끔 정말 가끔만 빼고 그냥 몸으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해야하니 하는 일들

그 사이사이 죄책감이 끼어 들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오래 고민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 그냥 몸이 익힌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행복했다. 즐거웠고 보람있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족들을 사랑했다. 얼핏얼핏 저주하고 미워하고 모른 척 하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을 받았지만 즐겁지 않다.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때도 있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이럴려고 태어나고 공부하고 어른이 된 건 아닌데

어쩌면 내가 너무 단순하고 모자라서 두 세가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고민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아닌 척 하고 있을 뿐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은 척 좋은 척 하는 거야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살아온 날이 후회되진 않지만 다시 살아보라고 한다면 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면 굳이? 라고 반문하겠다.

도시락 싸들고 말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뀌지도 않을거고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마음도 있고

뭐 모성이란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한 번 무너짐과 다르지 않다.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결혼이 끝나고 서류를 정리하고 짐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공간을 바꾸는 것

이제 내 이름이 바뀐다.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고 나의 삶은 그 비용의 댓가로 주어졌다.

혼자 고장난 수도파이프를 고칠 자유, 무거운 전기자전거를 장만할 자유, 그 자전거를 뒷마당까지 옮겨야 하는 자유, 머리에 흙이 묻은 나뭇잎을 붙이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자유, 로드킬을 당한 닭을 다시 주워서 저녁 식사를 해야하는 자유, 누구도 돌보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자유

그 모든 시간은 내가 몸으로 해낸 살림비용을 치러낸 것들이다.

자유롭고 싶어

쉽게 내뱉는 말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무게들이 달려있을까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세상의 편견들과 가족단위로 부과되는 의무와 권리들을 바꾸어야 하고 나에게 닥친 일들을 내가 해결해야한다.

나를 돌보는 누군가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가고 노력해야한다.

그래도 할 만 한건 주변에 따뜻하고 오지랖이 넒은 사람들이 아직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로 수입을 만들 수 있다면 살아볼 수 있겠다.

작가는 이혼이후 동화같은 가정의 벽지를 벗겨내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잊힌 여자를 꺼집어 내어 다시 스스로 비용을 치를 자유를 주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가끔 나오는 딸들의 이야기들

그래도 작가는 일이 있고 그 일에서 간당간당하지만 수입이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내가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얼마나 될까

한 번은 나 자신을 혼자 두고 그 비용을 계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얼마의 비용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그 비용을 치르고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나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살고 있는 중인가?

 

이제 삶이 한 모퉁이를 지난 나이에 어쩌면 다시 도전하고 선택해야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올라오는 지금 살림비용이라는 단어는 우박처럼 차고 단단하게 쏟아진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

어떤 드라마의 누군가의 대사처럼

묻어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유혹 혼자 하고 혼자 다 처먹을거라는 유혹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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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해방
에이먼 돌런 지음, 김은지 옮김 / 복복서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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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때문에 고통받은 경험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렵다.

가족은 당연한 존재이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한다.

나는 당연하게 가족의 일원이고 한 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가족의 일은 가족안에서 해결해야 하며 가족은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고 지켜주고 책임을 져야 한다.

원시시대부터 공동생활을 해온 가족의 역사는 길다.

안전을 위해, 서로를 돌보고 돌봄을 받기 위해 가족은 중요하다.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의 사랑으로 풀어내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쉬는 곳도 가족안에서다. 가족은 대처될 수 없고 영원하며 언제나 소중한 목록의 가장 앞에 자리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고 훈육하고 성인으로 길러내고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존경하며 나중에 늙은 부모를 돌봐야 한다.

가족단위로 사회가 굴러간다.

가족은 세상이 변해도 쪼개지지 않은 단위이다.

남의 가족을 들여다 보지 않은 것은 서로에 대한 예의다.

개인적인 부분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다.

아이를 양육하는 방법, 함께 살아가는 규칙 등 가족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 가족안에서 안정과 편안함을 얻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박과 통제를 느낄 수도 있다.,

더 쪼개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

버릴 수 없는 존재

나와 영원히 함께 해야하는 존재라는 것은 안정감과 함께 공포감을 줄 수도 있다.

 

단란한 가족

가족의 행복, 가족의 날,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끈적이고 들러붙고 어찌할 수 없음을 느낀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냥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참 불편할 때가 있다.

버릴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손절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다.

내가 버려도 내가 떼어낼 수 없다.

나는 죽어서도 그 사람의 자식이거나 그 사람의 부모이고 그와 형제이고 그와 부부이다.

(부부는 그래도 남남이 될 수 있다.)

 

A는 부모와 관계를 끊었다.

어린 시절부터 차별과 모욕적인 말들을 들어왔다.

너가 태어나서 내 인생을 망쳤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말을 엄마에게 들었고 아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빠는 내 아내 내 자식보다 본인의 가문 본인의 조상 본인의 친척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고 본인의 직업도 한 가문의 장손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고스란히 엄마의 폭언을 받아냈고 아빠의 무관심을 견뎌냈다. 동생과 차별을 할 때도 몇 번 화를 내고 소리쳤지만 그때 뿐이었다.

A의 선택은 조용히 집을 나오고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들이 도와주었고 친구 부모도 도움을 주었다.

주변에서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하고 가족을 단절했다. 나를 찾지 않도록 행정처리를 했다.

그리고 혼자 산다.

언젠가 다시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만나지 않고 내가 노력해서 내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

A가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다.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면 돈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다.

엄마에게 그동안 키워준 돈을 돌려주고 싶다.

돌려주고 나면 서로 부채감 없이 산뜻하게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지금 단단하고 야무지게 부모와 단절하고 혼자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 저 아래에는 어떤 부채감 또는 죄책감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래도 되나 라는 마음보다 그동안 힘들었다. 견딜만큼 견뎠고 내가 받은 상처도 컸다는 마음이 더 클 것이다.

A는 잘 살아갈 것이다.

스스로 자립하는 법을 알고 도움을 받을 줄 안다.

그가 가질 죄책감이나 용서에 대한 딜레마가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지금 안 보는 것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

언니와는 유일하게 연락을 하지만 그냥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이고 가족의 소식을 듣는 통로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는 부모가 자신에게 나쁜 기억만 준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자신을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고 인정받았던 부분이 있고 나를 자랑스러워한다는 마음도 안다.

그건 그거지만 내가 상처받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던 것도 치유가 쉽게 되지 않는다.

옆에서 할 수 있는 건 더 상처받지 않고 죄책감느끼지 않고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 마음이 많이 풀어져서 엄마를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려 주는 것

그리고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엄마가 딸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깊이 들어주면 좋겠다.

어떤 의문도 갖지 않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고

 

B는 오랫동안 부친의 폭력아래서 자랐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빨리 한 것도 어쩌면 부친의 폭력때문일 수도 있다.

모친은 자식 때문에 참아왔다. 이혼을 하면 딸들이 결혼하는데 흠이 될까봐 참아왔다

그리고 늘 폭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괜찮을 때도 있으니까 견딜만했다.

그러는 동안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고 딸들이 부친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도 봐야 했다.

딸들이 결혼하고도 부친은 기세가 등등했다.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고 욕을 하고 수시로 찾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협박을 했다.

딸들도 모친처럼 부친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이어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고 가족이어서 어디 가서 함부로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술을 마신 부친이 모친을 폭력하고 결국 칼을 든 일이 발생했다. 어찌어찌하여 부친은 강제입원을 했고 당분간 한숨돌리는 시간을 가졌다.

부친은 입원중에도 계속 딸에게 연락을 하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

돈이 필요하다. 퇴원을 하고 싶다. 병원이 너무 덥고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 아버지가 거기서 나오지만 않는다면 B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그렇게 아버지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지금 아버지를 거부하면 이후에 아버지가 나올 경우 엄마는 어쩌면 우리 자매들도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부친은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잘 달래서 살살 꼬드겨서 계속 병원에 있도록 해야한다.

부친이 죽을 때까지

은근히 B가 기다리는 것은 부친의 죽음이다.

그 마음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무섭지만 그게 다른 모든 사람이 사는 길이다.


나는 A를  받아들이고 B를 설득하기 위해 이 책이 필요했다. 

괜찮겠지? 와 괜찮아 사이에 내가 있었다.

가족을 버려도 괜찮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잖아 라는 말이 개인이 아니라 누군가 설득력있게 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내 부모의 치부를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부모에게 맞았다는 말은 장난처럼 혹은 겉멋부리듯이 하는 말이 아닌 이상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내 자식에게 맞았다는 말은 더욱 그렇다.

부모는 때릴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때릴 수는 없다. 세상의 윤리가 그렇고 상식이 그렇다.

그럼에도 가족이어서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

때리는 부모를 쉬쉬하며 살아야 하고 때리는 남편을 때리는 자식을 그저 내탓이려니 하고 끌어안고 버텨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자식을 위해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

 

이 책은 가족을 끊어내도 된다고 말한다.

가족으로부터 해방되도 된다고 한다.

 

 

가족은 우리가 정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친구이거나 반려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나의 동료이거나 누구든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있다.

 

가족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가족과의 관계는 보여지는 것이 중요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짜 관계를 말하기 어렵다.

 

가족과 멀어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우리에게 사랑, 애정, 헌신, 감사. 존중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절연을 통해 마침 나는 나 자신이 된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버륵. 나를 나답게 하는 열정, 부모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실 가치 있게 여긴 나의 개성을 사랑하게 된다.

 

미성숙한 부모가 허용하지 않는 여섯가지 감정과 행동

분노, 열정, 자발성, 상처와 상실과 변화에 따르는 슬픔과 비탄, 거리낌없는 애정, 진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 말하기

 

때로 가족은 어떻게 보이느냐가 실제 어떠냐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것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이 변할지 아닐지는 알 수가 없다. 학대자에게 입힐 수 있는 주된 타격은 접촉 횟수를 줄이는 일이다.

 

자기 돌봄과 자기 경계는 공생관계여서 하나에만 집중해도 다른 하나는 강화된다.

자기돌봄은 매순간의 실천이지만 우리가 언제 익숙한 패턴으로 돌아가는지 미리 생각해보면 그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나는 언제 라고 하고 언제 아니요라고 하는가?

 

저자가 미국인인만큼 많이 미국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적극적인 행동과 자신감 행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틀린 건 아니다.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내가 나를 바꾸는 건 내가 이제부터 바뀔 거야 라는 마음이나 생각이 아니라 내가 뱉는 한마디 내가 하는 거절의 몸짓이나 말들 내가 스스로의 욕구를 말로 하는 것 등 어쩌면 사소하지만 사소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그래서 참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거절하기 힘들면 침묵하면 되고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가 힘들어할 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나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죽음앞에서 웃더라고 그것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참 어려운 일이 내 욕구를 말하고 내 의견을 드러내고

거절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몸에 붙은 익숙함을 버리는 것은 어렵다.

그냥 나만 참거나 내가 해서 편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였겠는가

다 좋자고하는 일인데

괜히 분위기 망칠 것도 없고

늘 하던 걸 안하는 것도 껄끄럽고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그냥 내가 조금 조심하면 되는 거고

어쩌면 저 사람도 저러는 것이 미안하기도 할 것 같고

뭐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자꾸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당연함으로 굳히고 있다.

 

내가 저 사람을 바꿀 수도 없고 바꿀 능력도 없고 바꿀 생각도 없다.

그냥 내가 안전하고 내가 편안하고 내가 좋은 걸 하는 수 밖에

그게 싫다면 저 사람이 뭔가 액션을 할 테고 그 방식이 폭력적이라면 나는 도망칠 것이다.

저 사람에게 도망쳐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은 넓고도 많다.

 

가끔 늙은 부모를 걱정한다. 내가 버리면 늙어서 어디서 손가락질이나 받다가 죽을 것이고

그를 아는 주변 친구들이 우리를 욕할텐데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한국이라는 곳은 가족을 버리고 싶어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며 미적거린다.

가족을 버린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나는 저렇게까지는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가족은 버리거나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함께 하는 관계이다.

누군가 이 관계로 힘들다면 떨어져도 된다.

끈끈한 피로 연결된 가족이라면서

멀리 떨어져도 평생 안봐도 가족이라면서

그런 대책없이 국건한 믿음이 있으면서도 떨어지고 해체되는 걸 겁내는 건 모순 아닌가?

쪼개져도 가족이고 떨어져도 가족이고 다시 보지 않아도 가족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독립되어야 한다. 물론 돕고 돌보고 의존하는 존재이지만

누군가 당연히 나를 돌보는 사람, 당연히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가족은 그 당연함을 그 동안 해주었던 고마운 사람일 뿐이다.

 

미국스타일의 매끈한 전개가 좀 걸리긴 해도

가족을 몰래 말고 그냥 떼어내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이야기 해주고 내가 그것봐 그렇다고 하잖아 라고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가족이란

참 어려운 관계다.

가족을 조금 더 유연하고 다양하고 주관적으로 정의하고 싶다.

함께 살고 싶은 사람

돌보고 싶고 돌봄을 받고 싶은 사람

나답게 살 수 있고 그 답게 사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관계

그렇다면 혈연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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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을 알아간다는 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만나고 바라보고 듣고 이야기를 하고 다시 듣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웃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과정들을 함께 보내면 그 사람을 잘 알게 될까

그렇다면 연예인을 좋아하거나 작가를 좋아하는 것

서로가 대면하지 못하고 그저 일방이 바라보는 것만 있는 시간에서 그 사람을 잘 알게 될까


소코의 미소에서 처음 작가를 알았고 단편집에 수록된 글들을 꼭꼭 씹어 읽어가면서. 또 가까운 이에게 책을 권하면서  이 사람은 참 반듯하겠구나,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늘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는 

조금은 피곤한 사람이겠구나 생각을 처음 했다.

작품집에 씌여진 작가의 말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마음인지 작가를 조금 흔들어 놓고 싶었다. 꼭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 없지만 꼭 그렇게 반듯하려고 애쓰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문장사이의 주저함과 머뭇거림을 발견한다.

한문장을 쓰고 돌아보고 주저하고 또 한문장을 쓰고 처음부터 다시 보고 머뭇거리는 그 모습이 그려졌다.


내게 무해한 사람,  밝은 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애쓰지 않아도 를 읽으면서  이 작가가 지칠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계속 읽고 싶은데 계속 주저하고 점검하다가 이 작가가 지쳐서 글쓰기를 포기하면... 


작가의 소설 문장들을 읽으면 내가 가졌었는데 정리되지 못하는 어떤 감정들 어떤 경험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도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던 시간들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든 알아주었으면 했던 마음들

내가 여기 있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 기분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때의 소외감과  아닌척 눈은 웃고 입은 울고 있던 이상하게 이그러진 표정

애써 잊었거나 모른 척 하고 있던 그런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이야기속에 들어있었다.

그래 나도 이런 마음이었는데 

반가우면서 부끄럽고  괜히 심술이 났다.

나도 알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알았는데 


에세이는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작가가 아니라 글보다 앞에 서 있는 작가를 만난다.

솔직하게 말하는 암투병 이야기. 고양이들 이야기., 혼자 달리는 이야기  사람들과의 관계 내가 느끼는 감정들 페미니즘을 만나고 변한 모습들 

오래전에 알고 지내다가 다시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그때 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세삼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의아하면서 새롭기도 하고 그래그래 이런 사람이라고 짐작했었어 라는 마음들 


낮잠에서 깨어나면 왠지 눈물이 났다는 문장을 보면서 어릴 때 대명동 시절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햇살이 마루 안까지 길게 들어와서 눈을 가늘게 떠야 했던 순간

마루에 놓인 요강에 앉아 오줌을 누면서 그 햇살을 보고 고요한 집에서 혼자 라는 생각을 했다.

자는 동안 가족들은 다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함께 살던 고모가 깼나 라고 무심하게 물어보던 소리

그리고 이웃집 아줌마가 자기 아들 생일이라고 놀러오라고 내 손을 잡고 갔던 기억

잠에서 덜 깨고 옷도 엉망인데  친하지도 않은 남자아이들 사이에 멍하니 끼어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온 기억

그때 아마 나는 엄마에게 나만 두고 어딜 갔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가 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었는지 나만 두고 어딜 갔는지 알면 더 서러워질까봐 두려웠는지 아니면 얼떨결에 간 생일에 혼이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햇살이 길게 있는 걸 보면 지금도 마음 한 쪽이 시리다.


그런 마음이 에세이 갈피마다 들어 있다. 

내게 익숙한 감각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친한 사이라고 

친한데 너무 닮아서 모른 척 하고 있는 중이라고 


사람에 대해 애정이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마음

오랫동안 바라보는 마음

그래서 그 사람을 알려고 애쓰는 마음

아직 나는 잘 모른다는 주저하는 마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용기 있는 마음 

내가 아는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읽고 좋아하고 이렇게 살고 싶어  

그 마음을 받아 나도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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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치권이 여야 가릴것 없이 안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를 ‘억울한 남성의 목소리‘라며 정치적으로 승인해준 결과는 남성의 더 나은 삶이아니라 ‘연쇄적 혐오‘였다. 더 성평등해져야 하는 상황에서그 반대길을 택한 대가를 우리 사회는 톡톡히 치르고 있다.
명백하고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숨기거나 정당화해왔던 ‘정치적 관습이, 무한경쟁과 줄세우기만이 공정이라는 ‘그릇된 공정 감각‘이, 인권과 평등을 이야기하는 모든 언행을 역차별이나 위선으로 간주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영포티는 단순히 우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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