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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그녀에게 삶은 노력과 분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미래는 모험이라기보다 수용에 가까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계획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은 말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그녀는 이 수업에 대한 자신의 비밀스러운 열망을 알아차렸다. 국문과 학생들의 대화 속에서 종종 등장하던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이 강의에 대한 간절함을 깨닫게 된 거였다.
그곳의 책들은 아동 열람실의 그것들과는 달랐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듯한, 상냥하게 악수를 청하는 듯한 책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책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책을 꺼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의 도서관 첫 인상은 학교에 교실 하나크기의 도서관조차 없는 신설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도서관이었다. 의외로 도서관은 많이 낡고 나이 들어보였다. 전공서적자체가 오래된 자료들이어서일 수 있지만 낡은 종이냄새가 나는 공간이 첫인상이었다
만지면 바스러질것같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겨야 하는 책들
조심해서 모셔야 하는 교수님같은 엄격함과 신중함을 요구하는 듯한 )
부모의 삶은 그녀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여백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편하거나 풍족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삶은 에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척하고 투쟁하고 쟁취하는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삶이 내주는 과제들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방식으로 삶에 순종했다. 평생 그악스럽고 억센 것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모습은 그런 태도 덕분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모르는 채로 시작하는 법이지요. 일이란 게 원래 그런 겁니다.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정도로 업무에 서툴렀다는 사실도, 무엇인가를 배우는 과정이었으나 석주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 지 알지 못했다. 매 순간 장민재가 자신의 자질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게 아닌가 염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석주는 자신이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시절, 그녀의 자질은 역량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시절을 떠올렸을 때 석주의 기억속에 어떤 절실함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막막함과 고단함 속에서 뭔가를 쓰던 그 시간은 석주에게 인내심을 가르쳤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분별력을 주었다. 그녀는 잠깐 작가를 꿈꾸었지만 그것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정말 그런 삶을 원하는지 고민해보진 못했다.
석주는 자신이 글쓰기를 포기한 까닭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좀처럼 따라주지 않은 행운에서, 바쁜 회사생활에서 찾았다. 그것이 실은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한 건 긴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열정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의지라는 것, 그것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다는 것 그 시절 석주의 열정은 사람을 단번에 압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만히 길들이는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집중되고 있었다.
미진한 애정을 꿰뚫어 본 듯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순간을 우회적으로 나무라는 듯한 그의 말은 석주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하지만 그 말이 훗날 자신의 마음을 돌려세울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판권면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단단히 잠가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것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오는 놀라움만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멀리 치워두었던 마음.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한 마음,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떨쳐지지 않은 이상한 이끌림이었다.
수월하지 않았다. 어떤 단어는 과해보였고 어떤 문장은 인색하게 느껴졌다. 단정한 표현은 건방지다는 오해를 살 것 같았고 후한 평가는 나태하든 인상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보고서를 올리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았다.
훝날 미흡한 것투성이었던 그 첫 미팅을 떠올릴 때마다 석주는 자신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세삼스럽게 여겨졌다. 모든 면에서 어리숙했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떤 부족함은 끝까지 남았다. 오래도록 그녀는 그 첫 미팅에서 부족했던 점을 만회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경험이 쌓여도 능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랬다. 그것은 늘 처음처럼 어려웠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원호가 석주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그 활기가 느슨함으로, 방만함으로 번지지 않도록 신경썼다. 그 무렵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업무를 챙겼기 때문에 석주는 어느때 보다 일에 몰두한 사람처럼 보였다.
석주는 오기서가 그 일에서 어떤 성취를 느꼈는지 어떤 좌절을 견뎠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거라곤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골똘하게 읽는 모습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의 삶에서 아주 사소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무엇,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책을 만드는 일은 인간적인 동시에 기계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많은 이의 시간과 마음이 모여 완성되는 작업이면서 순서와 방식에 따라 한 단계씩 이뤄지는 체계적인 공정이기도 했다.
거의 매일 독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지금껏 진지하게 독자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책이므로 성패가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했는지도 그동안 자신이 만든 책들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나지 못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자책이 뒤따랐다.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독자들의 내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완성되어가는 듯 했다.
하나를 고르는 과정은 쉽지 않고 이후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하나를 고르는 일은 나머지를 모두 외면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석주는 나중에 알았다. 그 시절 원호와 나눴던 것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데서 오는 희열이었음을, 계획할 수 있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상할 수 있으나 예상을 비껴난 형태로 완성되는, 두 사람은 그런 우연적이고 불완전한 세계에 매료된 닮은 꼴의 서로를 단번에 알아본 거였다.
사랑은 극적이기보다 안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건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캐묻는 법이 없었다. 그런 무던함이 좋았다.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을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더라고요.
자책할 거 없어요. 석주씨 탓은 아니니까 그냥 각자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거죠. 자기를 못살게 구는 거 그거 안 좋은 겁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글을 탐독하는데 삶의 대부분을 허비한 사람, 매일 뭔가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느라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진짜 삶에는 한없이 서투른 사람 사람들의 평가속에서 석주는 자신이 기획에도 섭외에도 능하지 못한 반쪽짜리 편집자임을, 성실하지만 얼마간 무능하고 진지하지만 구태의연한 직장인임을 모르지 않았다.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석주는 늘 했다. 아따금 부담감으로 압박감으로 돌변하곤 하던 그 기대를 놓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를 탐독하고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일상을 돌보는데 서툴렀고 힘껏 붙잡아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날 석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 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누군가의 삶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별다른 감동이나 드라마가 없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쌓여서 일생을 완성해 나가는 것
완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뭣하다면 그렇게 쌓여서 삶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자
시간이 쌓이고 나이를 먹어도 서투른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익숙해질만하면 나오는 실수와 오류로 인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
그리고 그 삶의 주요한 요소에는 노동이 있다.
사람은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존재이기도 하고 일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발전할 수 있다.
일이란 삶의 중요한 한 줄기이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낸다.
그 일은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증명하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일을 선택할 때 온전히 이 일이 나에게 맞다고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 일이 나에게 적합할까. 내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전락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두려움은 설레임이기도 하고 낙관적인 희망일 때도 있다.
불안하지만 도전하고 싶은 마음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쌓여가기도 하고 이직을 통해 젼혀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우스개 소리처럼 일이 어려운게 아니라 관계가 어렵다고 하는 말도 있다.
일이란 매뉴얼을 숙지하고 그 일에 관심과 애정을 쏟고 처음에는 비슷하게 흉내내다가 조금씩 내 스타일대로 변형하며 내 방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일이란 결국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사람과의 관계 역시 일의 일부가 된다.
현재 직업이 그 사람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만들어 간다.
꼼꼼함을 요하는 직업을 가진 경우 후천적으로 세심하고 꼼꼼함이 발달하기도 하고
사람을 자주 만나다 보면 사회적인 페르소나를 몇 개 더 가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 중에 읽고 또 읽고 행간에 없는 의미마저도 알아차려야 하는 편집자의 일을 책은 그리고 있다.
단순하고 서성이는 마음이 주인공을 통해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일이 삶은 절대 단순하다거나 주저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껼국 멀리서 보면 보이는 그 삶의 무늬를 책은 보여주고 있다.
그 무늬가 각자 다르게 그려지겠지만 제각가가 모두 아름다울 것이다.
(사족“ 일하는 여성에게 결혼이란 늘 그렇듯 결혼이란 고루하고 가부장적인 제도이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줄이고 집에는 여자가 있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 무한반복되는 제도 안으로 누가 감히 용기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 원호 역시 그 되돌이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였다는 것
남자들조차 그것이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거절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혼을 그냥 어른들에게는 인사정도만 하고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좋겠다. )
사족2) ai시대에 읽는 행위가 그리고 쓰는 행위가 꾸준하고 묵묵한 인간의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 가치가 계속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