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에게 내 고통이나 불안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다.

나는 늘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덤덤하게 보이고 싶다.

어느 정도 성공햇다.

불안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니 불안이 없어졌다. 매사 감정적이고 싶지 않았더니 무덤덤한 사람이 되었고 조금은 재미가 없었다.

그냥 직선적으로 말하고 덜 상처입고 무심해지려고 했더니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건 그 사람의 감정이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통을 드러내고 요란스럽게 아파하고 뒹구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들이 용기있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외치고  호소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그리 애쓰고 가끔은 떼쓰고 울부짖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나 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내 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은 용기있어 보였다.


내 아픔을 내가 먼저 알고 타인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용기가 맞다.

나이 치부를 드러내는 것

어쩌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던진 승부수일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그 상황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레 혼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닿지 않을 고통과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울부짖어서라도 드러내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드러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드러나는 것도 싫었고 행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어서 너무 큰 상처나 흉터를 드러낼까봐 더 두려웠고 싫었다.

그냥 숨기고 누르다 보면 무감해진다.

무감하다는 건 어찌 보면 무척 강해 보인다.

아무렇지 않고 덤덤하고 늘 안정적인 스텐스를 유지하는 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강해보일지 모르겠다. 가끔은 진짜 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그만큼 나를 죽이고 버려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고통도 두렵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두렵다.

나에게 무감하고 나에게 덤덤한  기질이 결국은 주변 사람을 외롭게 하거나 서운하게 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물어본다.

엄마가 혼자 잘 지내시는지...

그럴 때 마다 똑같은 대답이다.

혼자 지내다 보니 자식이 있는 도시로 올라왔고 마침 언니 집 근처에 집을 구해 살고 있어요.

언니가 자주 들여다 보고 있어요

대답도 비슷하다.

그래 아무래도 딸이 낫지. 그래도 장녀구나 

언니가 엄마에게 잘 한다는 건 알고 있다.그리고 둘은 꿍짝도 잘 맞다.

취향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종가집 며느리라는 위치도 비슷하고 남편의 직업도 비슷하고 그래서 서로 잘 아는 면이 많다. 

둘 사이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그 외로움을 이용했다.

외로웠지만 외로워서 그들 눈에 띄지 않은 나의 위치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보이지 않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의무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고 보이지 않아서 심통을 부려도 그러려니 했다.

언니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엄마랑 비슷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보다는 내가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베푸는 걸 좋아했고 자기가 손해보는 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퍼주고 받지 않음을 욕하고 서운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니에게 충분히 많이 받았고 나는 대부분 되돌려 주지 못했다.

나는 상대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면 줄 수 없었고 그런 베품이 어쩌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했고 행여 필요하지 않고 곤란한 시혜이거나 돌봄이라면 어쩌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이기적이고 못된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언니는 무조적 베풀고 나누었다.

가끔 필요없는 것들도 있어서 받고 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앞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티나게 서운해하거나 왜 받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대부분 좋았고 필요했지만 또 한편 굳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따.

필요한 것을 하나 더 쟁여주는 느낌. 뭔가 몰라도 그만인 신제품을 알게되는 것

그런것이 사는 정이고 작은 즐거움이고 선물이지만 가끔은  버거웠다.


암튼 

그런 언니는 엄마를 돌보는데도 정성이었을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알아차려서 마련해주고 

좋은 곳을 데려가고 함꼐 나들이를 가고 

가끔 나도 끼어 함꼐 했지만 나는 그저 함꼐 끼는 사람이었고 늘 언니가 모든 것을 다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래서 편하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위안하기를  계획에 잘 따라주는 것도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늘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언니는 나보다 평안해 보였으니까

가끔 엄마가 언니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들었지만 귀담아 두지는 않았다.

누구나 살면서 모퉁이가 있고 돌부리가 있는 걸 언니라고 없을까

언니가 결혼상대를 선택할 때도 그리고 삶을 살면서 순간순간 이건 힘들겠구나 라고 짐작했을 텐데 그만큼 잘 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냥 생각했다.

나는 늘 내 삶이 가장 중요했고 내 삶의 순간에 허덕이고 있었고 내 삶이 엿같은 순간들이 많았으므로 

언니는 늘 언니 역할을 하는 줄 알았다.

엄마는 누가 찾아가든 늘 똑같은 레파토리를 읆었고 이제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을 했고 (이제 팔순이다. ) 혼자 사는 것이 외롭고 무섭다는 이야기도 가끔 했지만 엄마의 성정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지나친 걱정과 잔소리 그리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리고 자기말을 하는 것 등은 여전했으므로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없이 엄마가 이렇게 더 살아계실거라고 믿었다.

그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엄마가 없는 나 자신이 상상이 가지 않고 두려워셔였던 것 같다. 

그냥 세상은 변하지 않을꺼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라고 믿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니도 여전히 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언니같은 언니였고 누구를 챙기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명령하면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언니때문에 엄마가 힘들수도 있따고 가끔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리로만 돌봄을 이해했지 그걸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내 가족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과 함께 있지 않지만 그래서 더 신경쓰이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더 힘들 수 있음을 나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가 화를 냈을 때 비로소 언니가 많이 힘들었음을 알았다.

그랬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그때 현실로 받아들였다.

딱히 뭐가 힘드냐고 묻는다면 이거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힘든 일이 돌봄이다.

같이 병원가고 산책가고 음식을 챙겨주고 씻는 것을 돕는 것 그건 사실 몸이 힘들지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듣고 고통스러움을 듣는 일 

상대를 위해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로 튕겨나오는 경험이 반복되고 내가 이 짓을 왜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들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엄마도 나름 언니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니 매사 괜찮다고만 하고 참기만 하고

언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알지만 속상하고 화가 난다.

그런데 동생들은 손님처럼 엄마에게 왔다가 가기만 하는 것도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나는 잘 모른다고 하면서 멀리 있다고 하면서 내 앞의 문제가 힘들다고 하면서 엄마를 잊었다.

잘 지낼거라고 믿었다.

언제나 똑같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한해한해 나이 먹어가는 것에 대해 민갑해지면서도 엄마는 늘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무심했다.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폐를 끼지거나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내 식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이기심이었다. 모르니까 안해도 그만이라고 짧게 정의되는 짓들이었다.

언니처럼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귀찮을지 몰라도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챙기고 도와주는 것이 결국은 돌봄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하게 외치다가도 누군가의 사소한 배려나 관심에 간쓸개 다 줄만큼 녹아내리기도 한다. 

귀찮게 찾아가고 챙기고 잔소리하는 것

돌봄이란 그런게 아니었을까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귀를 막고 이해할 수 업으니 괜한 참견은 하지 않겠다는 깔끔함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서 다가가고 만지고 뿌리쳐지는 것들이 반복되는 것

고통의 곁이 하는 진정한 역할은 그게 아닐까

엄마가 고통은 아니지만 언니는 혼자 지쳐가는 곁이 되었고 스스로 고통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엄마와 언니는 서로의 고통이고 서로의 곁이었고

이기적이고 못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1따위였던 거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단 몸을 쓰고 움직이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가장 최선을 찾기보다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더 많다.

뭐라고 해야 잘하면 계속 하면 되고 못하면 다시 바꾸고 조절하며 해나가면 된다. 


책을 읽으며 고통에 대해 그리고 고통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그의 곁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못되고 이기적이 나를 생각하고 부끄러웠고

오지랍이야  잔소리가 많아  왜 저렇게 살까 싶었던 언니와 엄마를 떠올리며 

한없이 쪼그라 든다.

전화 한번 더하고 한 번 더 찾아가서 잔소리하는 것

방이라도 치워주고 나가지는 않아도 창밖의 햇살을 함께 누리는 것

고통은 아니어도

돌봄은 그래야 하는게 아닐까 

거기다 돈까지 쓰면 더 좋고


속되지만 그런 것들이 더 필요한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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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삼킨 이후 가지게 되는 편안함

이불킥을 만드는 것은 후회되는 내 말들과 행동들이다.

간혹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어정쩡하고 용기없는 내 모습에서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그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 했는데

물론 그런 후회도 있다.

어떤 정의앞에서 내가 비굴했던 기억, 그냥 좋은게 좋은거지 라는 말로 변명하며 애써 태연한척 했던 나를 후회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기다리줘야 하는 순간이 있다.

굳이 꺼내 표현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갹했던 순간들이 있다.

내가 조금 참길 잘했지

그건 오래된 사이에서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처음 본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때로 침묵과 기다림과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포용이 필요하다.

손해보는 거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나만 왜 맨날 맥아리없이 살까 하는 마음이 불쑥 쏟아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럴 때가 있다.

저맘도 내맘같아서 나처럼 견디고 있구나 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냥 가만히 있길 잘 했다는 마음이 들면서 내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어주고 싶다.

말을 하면 시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남는 묘한 찌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해서 내가 견디는 무게만큼 상대도 견디고 있고 참고 있었다.

(물론 서로 평등하고 다정한 사이가 더 그러하다.)

 

해진 작가의 책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은영 작가의 책은 말하지 못했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읽힌다.

 

관계라는 것은 그 자체가 유기체라고 생각된다.

만나고 이어지고 유지되고 그리고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이제 끝인가 싶다가도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익숙해서 잊기도 하고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들

관계란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이 무용할 때가 있다.

 

가장 맛있는 케이크는 안도감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천천히 여유있게 맛을 볼 수 있는 순간

그건 내가 말이나 상황에 대해 잘 대처했구나, 내가 괜찮았구나 싶은 순간에 찾아온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건 오랜 시간이 흐를 뒤 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간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동안 이리저리 흐르고 요동쳤던 내 마음이 이제 한풀 꺽이고 담담해진 순간 그때 그 순간의 마음이나 감정이 이해가 된다. 내가 올려다 보지 못할만큼이 아니라 나랑 다르지 않았다고 믿었던 홍콩친구의 변화들과 성장들이 나를 더 작아 보이게 했지만 결국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슬픔도 받아들이며 편안해진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나를 드러내는 것과 가만히 있는 것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쁨은 없다.

상황이 있을 뿐이고 관계가 있을 뿐이다.

말해도 후회하고 말하지 않아도 후회한다.

그러니 어쩌랴... 정말 중요한 건 후회한 그 이후가 아닐까

후회라는 것이 뒤에 생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그러하다.

미리 안다는 것, 당시 알아차리는 일보다 나중에 모든 것이 지난 후에 보이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은영작가는 미묘한 폭력의 순간을 참 잘 묘사하고 잡아낸다.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배려이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상대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내가 옳다고 믿고 밀어붙이는 건 결국 폭력이다.

고기를 먹지 않은 아이에게 성장 때문에 건강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며 억지로 들이미는 것

그리고 그것 봐라 다 할 수 있지 않으냐며 자기 행동에 합리화 하고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보며 침묵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폭력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는지

내가 버릇없고 예의없는 아이였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일들

폭력은 그렇게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 조금씩 불편한 순간, 혼자만 즐겁고 만족하는 순간, 단 한사람이라도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순간,

모두가 고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모두가 이성을 좋아하고 모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함께 웃는 농담도 없고 모두가 함께 금기하는 조건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래서 삐뚤어 보이고 일그러져 보이게 흘러가겠지만

그것이 일상이 아닐까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

어떤 쪽이 더 나은 건지 상황에 따라 늘 변한다.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야 상대가 알 수 있다.

알면 오해가 줄고 서로 조심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조금 걸리더라도 한번 꿀꺽 삼켜진 말들 그 말들이 관계를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그 미묘한 경계를 찾아내는 것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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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퐁속 어린 나무

 

자기 삶의 주체였던 여자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삶의 객체가 된다.

어린 소녀들은 천천히 유년기를 땅에 묻고 독립적이고 도도한 자아를 버리고 순종적인 성인이라는 존재가 되어 간다.’(시몬 드 보부아르)

청소년기 여자아이들은 인간 존재로서이 지위와 여성으로서의 소명사이에서 갈등한다.

여자아이들은 존재하기를 그만두고 보여지는 삶을 시작한다.’

 

자신의 진짜 자아를 부정하고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가짜 자아를 떠맡도록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억압(앨리스 밀러)

억압을 경험하며 진짜 자아와 가짜 자아로 분열해 가는 것, 이때 억압은 부모가 아니라 문화로부터 나온다.

 

심리상담실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개 자기를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어ᄄᅠᇂ게 느끼는지를 잘 알았다. 이들은 동료, 남편, 아이, 친구의 요구를 균형 있게 잘 맞췄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상황일 때 자신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는 잊었다. 이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자기 삶에 남아 있는 청소년기의 문제와 분투했다. ‘외모와 인기는 얼마나 중요할까?’ “ 어ᄄᅠᇂ게 하면 이기적이지 않게 나를 돌볼 수 있을까?‘ ” 어ᄄᅠᇂ게 하면 솔직해지면서도 계속 사랑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취를 이루면서도 다른 사람을 엽혐하지 않을까?‘ ’ 어떻게 하면 열의를 보이면서도 모든 사람을 책임지는 일을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20년 혹은 30년 전에 진행했어야 했던 작업을 뒤늦게 시작했다. 각 여성을 타인의 삶을 위한 객체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 다시 세웠다.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프로이트의 거만한 질문에 대답했다. 각 여성은 서로 다르고 특별한 무언가를 원했으나 그러면서도 똑같은 것을 지향했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기.그리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기.

 

2. 가짜 자아와 진짜 자아

 

여자 아이들이 복잡하고 치열한 인간관계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의무감을 느끼면서도 분개했고 사랑하면서도 화를 냈고 친밀하면서도 거리감을 느꼈다. 여자아이들은 이 모든 감정을 똑같은 대상에게 동시에 느꼈다. 성적 욕구, 로맨스, 친밀함이 죄다 무질서하게 뒤섞였기에 명확한 구분이 필요했다. 내담자의 나이와 공통되니 경험이 증상과 연결된 듯 했다. 여자아이들은 뒤섞인 메시지와 씨름해야 했다.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을껍데기에 불과하다.’ ‘섹시해야 한다. 하지만 야해서는 안된다.’ ‘ 솔직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다정해야 한다.’ 똑똑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을 위협할 정도로는 안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 자신의 목표와 기준을 충족했을 때 보상받았다고 느끼는 내재적 동기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이해할 때 생긴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며 행동할 때는 외제적 동기가 작용한다. 온라인에 접속해 있을 때 여자아이들은 계속해서 외부의 인정을 바란다. 그래서 좋아요와 팔로워 수를 쫒는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화면 속 모든 것에 취약해진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자기 목적을 확고히 갖고 어떤 행동을 할지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이런 식의 진정한 자유는 찾기 힘들다. ’제 미래를 결정할 힘이 제게 있었지만 뭘 원하는지 결정하는 법을 몰랐어요

 

4. 그때와 지금 1959~2019

 

어떤 면에서 캐시는 나보다 섹스에 관해 더 많이 알았다. 사춘기와 성에 관한 책을 읽고 학교에서 출산관련 영상 자료를 봤다. 캐시는 성적 장면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노골적인 가사가 담긴 음악을 여러시간 동안 들었다. 그럼에도 캐시가 가장 관심을 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언제 섹스를 해야하는지. 어떻게 거절해야하는지 좋은 성경험은 무엇이 수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무엇이 적합한 행동이냐에 대해서 예전 세대보다 더 혼란스러워했다. 가정과 교회에서 배운 가치는 미디어에 의해 널리 파진 가치나 친구들이 권하는 가치와 늘 상충했다. 캐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라고 배웠지만 거대한 포르노물 산업이 여성을 신체 부위로 축소시키는 사회에서 자랐다. 영화와 티비를 통해 세련된 사람들은 성적으로 자유롭게 자발적이라고 배웠지만 일회성 섹스를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따는 경고도 받았다.

 

6. 어머니들

어머니와 내 관계는 놀랍도록 복잡했고 사랑과 그리움, 가ᄁᆞ워지고픈 욕구와 멀어지고픈 욕구 분리와 밀착이 뒤엉켜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면서도 무시했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으며 어머니외 즐겁게 운시도 했지만 매우 사소한 결점 떄문에 짜증도 났다 어머니 집에서 하루만 지내면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었다.

 

7. 아버지들

아버지의 건강문제와 좋지 않은 예후에 관해 자세히 말하는 케에티의 목소리는 또릿하고 단호했지만 고통에 차 있었다. 케이티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많이 고민했지만 자신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케이티의 헌신을 존경했기에 신중한 태도로 접근했다. 망가지지 않은 것을 고치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케이티는 자기 삶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피트의 말이 맞았다. 케이티는 친구가 필요했고 더 즐겁게 지내야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오늘날 여자이이들이 부모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거듭 인상 깊었다. 이들은 부모가 안전한 집과 풍부한 경험을 제공해주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했다. 부모가 가진 직업윤리와 기술을 존경했다. 많은 아이가 부모를 절친한 친구로 꼽았다. 1994년 이후 우리 문화에서 일어난 변화중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닐ᄁᆞ 싶다. 이러한 존경과 사랑의 태도로 갈등이 거의 없는 좋은 관계가 수심년동안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8. 이혼

 

많은 경우 인간관계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다. 협상하기. 의사소통하기. 애정 표현하기. 자기 몫의 일을 하기 등을 배워야 하는 파트너도 있다. 이러한 훈련을 받으면 많은 결혼 생활이 구제될 수 있다. 만약 첫 결혼 생활에서 이러한 훈려이 되지 않았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 결혼생활 역시 실패할 것이다.

 

이혼은 특히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발달단계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십대들이 부모에게 많은 에너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십대들은 함꼐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감독해주고 체계를 세우게 도와주고 힘들어할 때 지지해주는 부모를 바란다. 이혼 절차를 밟는 부모에게는 이러한 에너지가 부족할 때가 많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부모와 가정과 유년기에 크나큰 상실감을 느낀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과 달리 위험한 방식으로 고통을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

청소년들은 사고 능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부모의 이혼에 제데로 대처하기 힘들다. 이들은 흑백논리로 상황을 인식하며 사건을 균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자기 파단이 절대적이라고 믿으며 부모가 완벽하리라 기대한다. 부모의 실패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판할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언제까지나 자신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켜주리라는 기대를 하다가 그 믿음이 깨지면 크게 충격을 받는다. 청소년들은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청소년기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떠나도록 기대되는 시기이지만 아이는 뒤를 도라보면서 부모의지지와 안내를 찾는다. 부모와의 연결이 끊기면 아이들은 떠나올 토대도 돌아갈 토대도 사라진다. 이혼과 함께 청소년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이들은 자신을 실망시킨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분노한다. 많은 경우 부모가 규칙을 어겼다고 느끼고 자신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부모에게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태린은 그동안 어머니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니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 지나친 분노는 지나친 순응과 마찬가지로 성장을 저해한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가 없다. 몇 개월이 지나자 태린은 어머니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줬으면 하고 기대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인정했다. 그렇게 기대했기에 둘 다 어떤 측면에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기대 때문에 로이스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혔고 태린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

 

9. 우울증과 자해

 

스즈키 박사는 어떠한 학생이든 고난도 클래식 작품을 연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따고 믿었다. 단계를 작게 쪼개고 규칙적으로 연습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활 쥐는 법, 활을 현에 갖다대는 법. 손가락을 정확하게 구부리는 법 음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법을 차례대로 연습하다보면 결국 비발디의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생활에서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 결국 작은 단계가 모여서 더 완전하고 더 충만한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부모와 따뜻하고 솔직한 관계를 잃어서 우울해한다. 이들은 또래 문화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을 사랑했떤 사람을 배신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에게 가족관계를 상실했다며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다. 슬프다고 말만 해도 자신의 나약함과 의존심을 인정하는 셈이다.

모든 여자아이는 발달단계상 이 지점에서 고통을 경험한다. 만약 이 고통이 자기때문이거나 자신의 실패탓이라면 이는 우울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고통이 부모 또래친구 혹은 그 문화 같은 다른 이유 탓이라면 그 결과는 분노로 나타난다. 이러한 분노는 반항이나 심지어 비행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거부와 엄청난 상실감이 분노에 가려질 때가 많다.

발달단계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여자아이들은 청소년기에 막대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너무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에 제대로 이름표를 붙이고 분투하여 ᄁᆞᆯ끔한 작은 상자에 정리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사상자도 많이 생긴다. 가령 비료적 가벼운 고통을 겪는 청소년기 여자아기가 자실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활동적이고 반동적이고 작은 좌절을 넓은 관점에서 인식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어떤 여자아이들은 청소년기의 혼란스러움과 힘겨움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낀다. 자살하겠따고 위협하는 여자아이들에게 다양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여자아이 자신에게 위험하므로 그들의 협박은 반드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자아이들은 소셜미디어에 가짜 자아를 구축하곤 한다. 이들은 아름다운 장소에 있는 가장 멋지고 행복한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을 포스팅하느냐와 실제로 어ᄄᅠᇂ게 느끼느냐 사이에 엄청한 간극이 존재한다. 온라인 상에서의 자아는 거의 완벽하고 매우 매력적이다. 하지만 오프라이네서의 자아는 침실을 거의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아 마케팅은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해를 입히는 치명적인 종류의 가짜 뉴스다.

 

11. 마른 몸에 대한 숭배

 

자신을 잘 보살피라고 격려한다.

익명의 과식자 모임 의 슬로건 지나치게 배곯거나 화를 내거나 외로워하거나 지치지 말라.‘

자기 감정을 각각 구분하고 모든 감정에 무차별적으로 배고픔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 피곤하면 휴식을 취하고 화가 나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지루하면 다른 뭔가 할 일을 찾는 법을 배웠다.

 

12. 약물과 술

 

알코올 중독자들의 딸들이 그러하듯 리타는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를 선택했다. 사랑은 분노 폭력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수치심과 연결된다. 리타는 이번에는 해피엔딩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테리와 사귀었다. 리타는 익숙한 상태가 더 편안했기 때문에 테리와 데이트를 했다. 그게 알콜중독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익숙한 혼돈상태일지라도 말이다.

 

특히 십대 여자의 경우에는 그 아이가 화학물질을 왜 사용하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과도하게 이를 사용한다면 자포자기. 사회적 불안. 친구나 가족과의 문제 성취에 대한 압박. 혹은 부정적인 성경험 가은 다른 문제를 드러내는 적신호일 수도 있다. 여자아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술이나 약물에 손을 댄다. 그러므로 각각의 고유한 상황에 맞우어서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13. 섹스와 폭력

 

중학생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자기 행동의 함축적인 의미를 모두 이해하고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른다. 이들ㅇ이 가진 계획 및 처리 기술로는 섹스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적절히 결정하기가 힘들다. 또한 이들은 또래 압박에 지나치게 취약하고 사랑과 섹스 그리고 인기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성격험을 하면 빠르게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섹스를 하면 발생하는 팩무를 처리하는 데 정서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섹스를 하겠다는 결정은 북극성처럼 확고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자아 존중감과 가치관 장기적 목표와의 조화를 이루어 결정해야 한다. 고등학교 입학전에 일부 여자아이들은 성경험을 할만큼 충분히 성숙해질지 모르지만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아이들은 대개 섹스를 피한다.

여기서는 삽입성교와 성적 겨엄을 구분해야 한다. 여자 아이들이 나름대로 성적 반응성의 발달을 즐기고 성을 탐색하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건강한 일이다. 성적 경험을 하면서도 삽입성교를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성적 접촉을 멈추는 쉬운 방법이나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아이들은 데이트나 성적 접촉 자체를 아예 피했다. 언제 혹은 어떻게 선을 그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자신만의 방침을 세웟다.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자시니 좋아하는 누군가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섹스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대와 논의하고 임신과 성병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었다. 또한 성적 행동을 하겠따는 결정을 데이트할 때 뜨거운 열정속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발게 빛나는 낯에 내리기로 했다.

 

손가락을 베면 피가 나지. 너는 피를 싫어할지 몰라. 무섭고 골치아프니까. 하지만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나야 하는 법이란다. 그게 건강한거야. 만약 피가 안 난다면 뭔가 잘못된거야. 장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많이 고통스러울거야. 그 일이 싫을거야. 골치아프고 무서울 테지. 하지만 그건 치유되는 과정의 일부란다. 감정을 꽁꽁 묻어두면 결국에는 더 아플 수 밖에 없어. ”

 

성폭행과 성추행을 단순히 개인의 행동으로 국한해 규정할 수 없다. 성폭행과 성추행은 문화적 규범, 대중매체, 음악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 등에 의해 구축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여자아이에게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라고 남자아이에게는 성적으로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다시 말해 우리 문화에서 여자아이들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존재라고 교육했다. 여자아들은 친절하고 다정하고 착하면 칭찬을 받고 남자아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감 넘치고 남자다우면 칭찬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부모가 문제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인터넷에서 섹스를 배운다. 대다수 부모는 아이가 포르노물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안다고 해도 아이가 접하는 포르노물의 양을 과소평가한다. 아이들이 문화의 가장 어두운 면을 부모보다 더 많이 아는 역사상 최초의 시기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공감력과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인정하는 태도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로 이어진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온라인 테크놀로지가 도래한 이후 공감력 숫치가 많이 떨어졌다.

 

14. 경청하며 배운 것들

 

나는 북극성을 은유로 자주 사용했다. 내담자들에게 너가 세상의 거친 풍랑 속에서 표류중인 배에 탔다고 생각 해봐. 너희 부모님 선생님 친구 그리고 대중매체의 목소리가 너를 동쪽으로 보냈다가 서쪽으로 보냈다가 그런 다음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게 만들어. 항로를 유지하려면 너만의 부극성을 쫒아야 해. 네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네 생각말이야. 북극성을 향해서 갈 때만 진로를 계획하고 그걸 유지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부귺성을 행해서 갈때만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을거야

 

자신에게 하는 질문

나는 지금 기분이 어떤가?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나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나는 미래의 내모습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

나는 어떤 취미활동을 좋아하는가?

나는 언제 가장 나다운가?

나는 사춘기에 들어선 이후 어떻게 변했는가 (혹은 나는 내 나이에)

나는 어떤 사람들을 존경하는가?

나는 나의 어머니와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가?

나는 나의 아버지와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가?

나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나는 죽을 때 무엇을 자랑스러워할 것 같은가?

 

 

내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중학교 무렵 많이 꺽어졌다.

나는 내가 성장한 방법밖에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자라온 방식을 고수했다 사실 그 방식은 내가 내 부모에게서 진저리치던 방식이었으나 나는 내가 경험한 것밖에 몰랐고 내가 그렇게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이는 상처를 받았으나 나는 나중에 아이가 그만큼의 시간을 더 견딘 이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 아이는 틀린 적이 없다.

내 아이는 잘못한 적이 없다.

그냐 내 기준에 틀렸고 잘못했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듣는게 싫었고 내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듣는게 싫어서 그냥 똑같이 살라고 강요했었다.

아이가 친구를 만나고 함꼐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친구가 내 마음엔 안 들수 도 있다.

그러나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오래가고 깊어진다는 걸 몰랐다.

현재 아이는 상처가 많고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다.

그런 기질 일수도 있고 다른 여러 경험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잘못된 훈육의 시간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고 하다.

믿어주려고 한다.

기다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타인의 말에 나는 흔들리고 피곤하다 모른다는 이유로 여전히 모른 척 하고 회피하는 나를 본다.

그래도 아직 엄마가 좋다는 아이에게 감사할 뿐이고

엄마가 밉다는 아이의 문 밖에서 서성일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다.

이제는 내가 모른다고 해서 틀렸다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

설령 틀렸더라도 너가 다시 고치고 시작할 수 있다고 믿을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세상은 아직 경험하고 즐길 거리가 많다.

좋은 학교 좋은 진로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의외로 세상은 따뜻하고 좋은 길들은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는 툭툭 털고 일어날 힘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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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가장 아름다운 건 꽃이 피기 전까지. 그러니까 간절하게 그 꽃을 기다릴 때다. 꽃은 피고 나면 그뿐 그 순간부터 봄은 덧없이 지나갈 뿐이다.

(모든 것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지나간 후다.

밤에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비로소 그때 그 순간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고 내가 대응했어야 할 말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지난 후에 뚜렷하게 보인다.

어쩌면 몰라서 아름다웠고 몰라서 편안했을 수 있다.

알고 나면 후회만 남기도 하겠지만 이젠 되었다 라는 체념과 비슷한 편안함도 있다.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행합일이라고 아는 바를 행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런데 아는 걸 행동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젠 책을 더 안 읽어도 될 정도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 머릿곳의 그 아는 것들은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지행합일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뜻인데 이 말은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것이 무척 많닥 했지만 그 중에 행하는 것이 거의 없다면 이 말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다.

행동하지 않은 한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무지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지행합일을 무서운 말이다. 특히 많이 읽고 배운 사람에게는...

 

요즘 사람은 행복이라면 무조건 최고로 여기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위안이 되는 목소리를 찾아 티비를 틀고 인터넷을 헤맨다. 마치 자신의 삶에서 고통과 슬품과 죽음이 조금이라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당의를 입힌 이런 일상 속에서 죽음을 대면한 옛사람들이 내던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과 고통과 아픔을 계속 피할 수 있을까?

 

 

기쁨이란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순간 바로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지만 고통은 단 하나의 감각적인 정보만 결여되어도 타인들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르므로 고독이란 우리가 고통을 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재앙은 우리를 가장 외롭고 연약한 사람으로 만든다.

언제나 이 연대 불가능한 고통앞에서 위로 역시 불가능하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내 고통을 누구에게 설명할 단어들을 찾을 수 없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라는 마음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니 설명해주세요. 천천히.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모르니까 내가 알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틀렸다면 말해 주세요.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정말 나는 너를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도 잘 모른다. )

 

독서는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건 의도하지 않은 변화이다.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난 꽃이었다.

 

어떤 순간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이제 청춘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는 이 순간 다시 읽은 <청춘의 문장들>

지금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간에는 그대로 옳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옳다.

틀린 건 없다.

다만 나도 달라졌다.

조금 더 성장한 면도 있고 조금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있으며

이제는 기대하지 않는 것들도 늘어간다.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것

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인정하게 된 것

좋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 그러면서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나 싶은 마음들

청춘은 머무리지 않고 흘러간다.

그러자 지금 이순간만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이순간이 청춘이라 믿는다.

여전히 흔들리고 꿈을 꾸고 좌절하고 앙ㄴ달하는 것

지금 이순간 나는 청춘이다.

청춘은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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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읽은 사람일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칡는다.

나는 달라지고 싶어서 책을 읽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읽으며 나는 또 하루를 버텨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삶응ㄹ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는 나를 늘 힘들게 했다.

다들 정말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의심했다.

나는 지금 내일 무얼할지도 정하기 힘든데 내 시간을 모두 바쳐 달려가야하는 목표를 정하는 것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느렸고 무계획했고 부정적이었고 그냥 하루하루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퍼거나 불안했다. 그럴 때 책을 읽었다. 이야기 뒤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고 공감받을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에게 화자에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만큼 나는 세상에 내 자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기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오면 내 범위는 여전히 좁았고 세상은 언제나 저만치 앞에 있었고 모두가 다들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긴긴 시간을 혼자 채워야 하거나 흘려보내야만 했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나이먹은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알게 된 것은 어른이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

그냥 받아들이고 통과해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망치고 모른 척하고 회피해도 결국 내가 해야할 몫은 내 앞에 온다.

그냥 받아들이고 상처받고 우울해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또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외롭지만 조금은 강해졌구나 약간의 근육이 생겨서 조금 덜 삐그덕대겠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그게 다 책에서 배운 것이다.

책은 내가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 대부분이 내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몰랐다면 더 단순하게 더 씩씩하게 내가 잘났다고 믿으며 살았을텐데

읽을수록 나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불안하고 초라해졌다.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나는 표현그대로 한 점에 불과했다.

읽을수록 작아지는 나.

그러나 나는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작은 내가. 작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물론 가끔 부자가 되고 싶고 권력을 갖고 싶고 명예와 지식을 가지고 뽐내고 잘난척 하고 싶은 욕구에 이불킥할만한 행동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를 이제는 받아들인다.

책이 그랬다.

그냥 너는 너라고...

책은 책일 뿐이고 나는 나 일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친해졌고 서로 인정하고 있다.

읽기가 주는 즐거움은 어쩌면 무용하다.

후기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에 무용하고 하찮은 것들이다

쉽고 빠르게 누구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지금 현실에서

느리게 읽고 쓰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머물뿐인데 뒤로 자꾸 밀려난다.

조금 읽고 많이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서 많이 말하고 더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읽을수록 작아진다.

이렇게 읽다가 내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괜챃다.

나는 작아져서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있다.

내가 안다. 내가 있음을. 내가 읽었음을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읽다보니 그것으로 괜찮다.

 

 

그런데 이탈리아 철학자 바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가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세계까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뜩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거라는 감정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모호한 것은 두렵다. 그래서 두려운 대상을 명확하게 한다. 친구를 잘못사귀어서 그래. 저 사람이 문제라서 내가 화를 낼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왜 밖에 놀러다니고 그런거야? 단순한 이유일수록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들이 안전하다. 그래서 문제야 그 명확한 문제만 해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낼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암묵적으로 나만 아니면 되는 대상을 미워하고 상황을 혐호한다.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전한 문제다. 두껑을 덮는다고 오물이 사라진 것이 아닌데...)

 

안나 이호바토바는 말년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시작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렇게 읽힌다. ’나는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집이 다시 출간되기를...

(하루를 무감하게 살아내는 것, 반복같은 하루를 그래도 살아내고 먹고 자고 생각하고 쓰고 일하고 귀가하고 다시 고단한 몸을 눞히는 일을 내일도 모래도 지치지 않고 해내는 일 때로는 그 일이 혁명보다 더 위대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 모르는 타인들 그리고 당신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은 우리가 위대하다.)

 

실비아 플러스의 딸이 이야기 한다.

어머니가 실존했고 자신의 능력을 다해 살았고 행복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황홀하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는 사실이 축하받기를 원했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운 작품활동을 했으며 평생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은 우울증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스캔들로 소비하는 대신 그녀가 남긴 작품 속의 치열한 삶을 보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이다.

(피해자는 늘 24시간 피해자가 아니다.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욕심도 내는 사람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일상의 한 순간 험한 경험을 했고 상처를 받았고 삶이 잠시 중단되었겠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다시 영웅이 된다. 얼마나 괜찮았는지 멋졌는지 영웅이 되거나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떤 배우를 나는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웃고 울고 설레었지만 너 그 배우를 좋아하니? 라고 묻는다면 별로 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원히 반짝반짝 빛날 별일거라 믿었는데 너무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직업탓에 모두가 그의 상처를 알고 치부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극단적인 선책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가 분노하며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늘 그대로 그 사람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햐냐고 물어보면 글쎼 라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그가 나온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아낀다. 그뿐이다. 그는 자기 삶을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남아있다. 그냥 그 뿐이다. 먼저 간 내친구를 남은 친구들은 좋은 면만 기억한다. 나도 그 친구의 나쁜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가 성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인간적인 결함도 있고 때로 이기적인 판단을 하기도 했고 자기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기도 했고 그 판단이 누구에게는 상처였을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좋은 친구였으나 대단히 멋진 사람은 아니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친구들 중 하나.. 내가 사랑했던 가족중 하나.

특별안 단하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여럿중 하나지만 가끔 그립다고.. 그렇다. )

 

아리엘 도르프만

그는 누군가의 실제하는 고통을 맬로드라마로 가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정확히 동시통역하는 것이 시의 임무라고 믿는다. 그는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강한 어머니의 아이로 남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의 고백대로 세상의 고통에 대해 고작 전문가란 이유로 두둑이 보수 받고 동시통역이나 해주는 단순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 있는 한 사람 덕분에 평범한 이들의 비극이 온세상에 알려진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늘 다짐한다. 나는 내가 아는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아는 상대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판단하지 말자. )

 

조앤 디디온

디디온은 기사에 글쓴이의 주관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의 에세이 <엘리시아의 대안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객관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글쓴이가 가진 편향성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모든 편향에서 자유로운 척하며 쓴 글에는 대안 매체에 아직 전염되지 않은 가시과 허위가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 만약 이라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연구한다. 만약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이 상황이 누가 어떤 위치에서 보고 기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는 어쩔 수 없는 승작의 기록이다.

그리고 보통의 우리도 부지런히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여기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생각도 있다고 . 역사는 결국 기록하는 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그 시간 그 시대에 누가 권력이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누가 썼는가에 따라 독자는 다르게 읽는다. 냉정한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속되고 속되다. 주관적임을 인정하자. 내 의사 편향성을 인정하고 이런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

 

단어들을 가지지 못할 때 청년들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소박하고 반지성주의적인 저항을 일삼게 된다. 베트남 전쟁과 소비의 상징인 비닐ㄹ oq에 반대해 마약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단어가 필요한 생각은 잘난 척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점을 무척 염려했다. ‘이 아이들이 ㅇ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어휘는 이사회의 진부한 표현들이다. 사실 나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꼐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결손가정출신이라는 표현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 그들이 결손가정이라는 단어로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 엄마 아빠 나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은 결핌이자 비정상이라는 기성의 관점에 자신들도 모르게 동의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는 결국 죽을 운명인데도 힘을 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삶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조리하다고 해서 다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지프는 아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비극이랄 게 없다.비극은 오로지 그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시작된다. 다시 저 아래의 바위를 향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바참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 고통을 응시함으로서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앤카슨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이별하는 것

(애도에는 기간을 둘 수 없다. 천천히 자기 방식으로 이별하는 수 밖에 없고

애둘러 내 방식으로 위로나 배려를 하지 않은 것 지금 여기 없는 이의 이야기에 내가 먼저 마음을 베이지 않는 것 되려 먼저 조심하지 말 것. 그냥 피가 첲철 흘릴만큼 베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톨스토이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ᄁᆞ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와 방향을 조금씩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 할 것만 있다.

 

읽기는 즐겁다.

그리고 이야기도 때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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