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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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지금은 없어진 시네마 선재에서 본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였다.

자식을 다 키운 나이 든 어머니 역할이었는데 참 이질감이 드는 엄마였다.

아니 이질감만 드는 건 아니었고 뭐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그려지는 엄마는 아니었다

흔히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사회에서 그려지는 희생하고 배려하는 나이든 엄마는 아니어서 그래도 명색이 가족영화인데 엄마가 너무 속물스럽고 튄다는 느낌이 참 낯설었다.

그런데 사실 현실에선 그런 엄마가 참 많다.

내 엄마도 그런 면이 있고 주변 누군가의 엄마를 떠올려도 그렇고 이제 엄마가 된 내 모습도 마냥 푸근하고 따뜻한 존재만은 아니다.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모성은 다르게 보면 내 자식만 위하는  이기심과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일부러 힘들게 하기도 하는 악감정을 품기도 한다. 기억은 적당히 내가 편리하게 왜곡해서 자식들에게 심어주기도 하고 내가 보기 불편한 것들은 보이지 않은 척하고 좋은 것만 취하고 싶은 속물적인 마음도 없지 않다.

엄마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엄마 아닌 다른 모두에게 완벽한 엄마가 편리할 뿐이다.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엄마는 그랬다.

완벽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고 오히려 가족을 옥좨기도 하고 마듬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의뭉스럽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돌아서면 픽 하고 냉소를 품어내기도 한다.

꽤 낯설지만 매력있고 닮고 싶기도 한 엄마였다.

 

그 이후 여러 영화에서 그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나기면>  <앙> <도쿄 타워>에서 그녀는 늘 엄마였고 소수자였고 억척스러웠고 떄로는 속물스러웠고 한없이 동동거리면서도  무심하게 태연했다.

마지막 작품이었던 < 어떤 가족>에서는 모든 면을 품어내며 무심하게 그려냈다.

꽤 익숙한 크리세같으면서도 그녀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글을 읽는다.

아니 구체적으로 읽었다기보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책의 구성은 조금은 쉽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여기저기 그녀의 인터뷰를 모아서 전체 맥락이 아닌  그 중 하나의 질문에 대한 키키 키린의 대답을 모았다.

하실 그  말도 그 질문에 대한 전체 맥락인지 아니면  괜찮아보이는 몇몇 구절만을 뽑아온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단편적인 말 몇마디라면 그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를 더 만들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얻고 싶은 건 내가 몰랐던 키키 키린을 더 잘 이해하고 알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느꼈던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고 어쩌면 오해일 수 있지만 내가 가진 그녀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것일테니 책의 편집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짧은 인터뷰의  대답에서 그녀의 성격이 잘 보인다. 아니 내가 다시 확인한다.

그녀는 쉬운 삶을 살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삶에 무릎꿇지는 않았다.

하나의 포커페이스일 수도 있고 진실을 감추기위한 방편일 수 있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유머가 있다. 매사가 심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았다.

심각해서 될 일이라면 충분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겠지만 그렇게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냥 재미나게 받아들여야하지 않겠어요? 라는 무심하고  시크한 답변들을 듣는다.

그럼에도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보인다.

누군가의 말한마디나 글 한 줄로 그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글이나 말을 통해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내가 몰랐던 다른 면을 알게 되어 더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행여 내가 기대했던 그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 그냥 내가 아는 모습이 전부일 거라고 믿고 싶어서 말이나 글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찾고 내가 판단한 대로 받아들이며 읽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키키 키린은 여전히 유쾌하고 유머있고 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지만 그 이면에 따뜻함도 가지고 있었다. 살아보니 별거 아니더라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라고 말한다.

결혼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그 후회조차 내 선택이었고 뭔가 내게 좋았다고 말하고 배우 생활에서 뭔가 최정점을 찍겠다는 각오는 없지만 이렇게 길게 오래 이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있다.

어려 작품에서 보여주는 한없이 가볍고 속물스럽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 없는 깊이마저 느껴지는 그 감각을 여기서도 발견한다.

 

약간 사시가 있고 나중에 들으니 한 쪽 눈이 실명되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이 약간 코믹하고 슬프면서도 한편으로 서늘한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 처럼

그녀가 연기하는 어머니 할머니 어떤 소수자는  쉽게 주변에서 본듯한 인물이면서도 전혀 새로운 독특한 인물이다. 그건 무거운 건 가볍게 가벼운 것은 무겁게 연기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작품에서 그녀를 만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필름작품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이다.

화면에서 말하고 움직이고 표정짓던 그가 글로 보인다.

그를 모른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그가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한 번 읽어볼만하다.

 

부디 세상만사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사시길

 

너무 노력하지도

너무 움츠려 들지도 말고.

 

 

그렇게 나도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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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보았다.

어두운 상영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지금 2019년 은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 삶도 반짝반짝 빛날 때가 있을까요?" 은희는 영지샘에게 물었다.

답은 없없지만 아마  영지샘이면 말없이 웃어주었을 것이다. 빛난다. 빛나지 않는다는 말로 단정지울 수 없는 것이 삶이므로 ,  우리의 삶은 별이 아니다.

아니 모든 별이 빛나지 않은 것이므로 별이어도 상관없다.

은희는 지금 빛나게 살고 있을까?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빛나고 있다고 믿더라도 그렇게 보지 않은 타인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저 미미하게 여기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테고 부러워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냥 내 삶은 이어질 뿐이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

은희는 빛나든 아니든 어쨌든 손가락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서 은희가 계속 대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심부름을 보내놓고 모두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 이상 집에 아무도 없을 수가 없다.

적어도 급하게 대파를 사러 보낸 엄마라도 있어야 한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두렵다. 그럴리가 절대 절대 없지만 가족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을 수도 있다. 불가능한 상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것이 불안이고 두려움이다.

그리고 은희는 다시 대문을 본다. 우리집이 아니다

여태 남의 집을 두드리고 화를 내고 애를 쓰고 있었다.

멋적고  창피하고 동시에 다행이다

한 층을  올라서 은희는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아주 오랜 기억이 있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시장에 갔다.

엄마는 어린 남동생을 업고 있었고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시장은 늘 같은 곳이지만 늘 새롭다

구경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그러나 젊고 바쁜 엄마는 등에 있는 아이가 무겁고 짐하나 들어줄 수 없는  어린 딸도 버겁고 점점 무거워지는 찬거리도 힘겹다. 돌아가봐야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어서 들어가서 등에 있는 아이라도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집은 굳이 어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디 움직일 것도 아니고 늘 살고 있는 그 공간보다는 여기 시끌거리는 시장이 더 흥미롭다.

장을 보고 사람들이 둘러선 곳에 구경을 간다. 무얼 팔았을 것이고 그 전에 뭔가 공연같은 걸로 사람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시시하고 유치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아이는 궁금하고 보고싶다.

엄마가 행여 먼저 가버릴까봐 아이는 포대기 끈을 꽉 쥐고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빠져든다.

한번 뒤를 돌아보면 엄마는 그대로 서 있다. 다행이다.

다시 구경에 빠진다

재미있어서 너무  다음이 궁금하기도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포대기끈은 절대 놓지않는다

아니 놓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순간 돌아보니 엄마가 없다

내가 잡고 있는 끈은 어떤 할머니 치마끈이었다.

언제 바뀌었을까? 아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그 할머니가 친할머니였거나 친척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냥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

아이는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따지지 않았다

왜  혼자 두고 갔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도 왜 먼저 갔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냥 이제 다 보고 왔냐는 듯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고 어른이 된 아이는 기억한다.

그냥 물어서는 안되는 거라고 따져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물어보거나 따지면서 발버둥을 치며 찡얼거린다면 엄마는 다시는 나를 데리고 나가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나를 놓아버리고 멀리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다.

오히려 엄마가 뭘 그리 오래 보고 왔냐고 꾸중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도리어 안심했던 쓸쓸한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어쩌면 조작일 수 있다

나는 찡얼거렸을 수도 있고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전에 엄마가 나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고 갔을 수도 있고

가자고 등을 밀었는데  내가 고집을 피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엇이건 내게 박힌 기억은 그냥 내가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못따졌다는 것뿐이다.

나는 버려질까 두려웠던 걸까?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은희를 보며 그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돌아보면 별거 아닌데 그 순간 왈칵 두려움이 덮치는 순간  그게 뭔지 나는 안다.

아닐거라고 굳게 믿지만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

나중에 멋적고 싱겁고  그러면서도 왠지 슬퍼져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

나는 첫 장면에서 공황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은희는 늘 누군가와 닿고 싶어 했다.

가족과 닿고 친구와 닿고 누군가 다정한 단짝을 만들고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닿고 그리고 영지선생님을 존경하고 닿고 싶어했다.

아이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서 떨어져나갈것을 두려워한다.세상과 연결되는  방법은 타인과 관계를 맻는 것이다.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지는  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일 

그게 살아가는 목표가 된다.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고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고  무조건 튀려고 하고 센척 하고 자기의 약함을 숨기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그런다. 인정받고 싶어서 연결되고 싶어서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게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아이들은 그저 놀고 먹고 자고 단순하다고 믿는 어른들이  아이들이 뭘 알겠어하지만  아이들도 나름 치열하게 애써야 한다.  다만 어른들은 자기들도 그랬다는 걸 잊었거나 잊은 척 하거나 할 뿐이다

 

은희의 가족이 유달리 콩가루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름 단단하고 화목한 편이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고 어머니는 묵묵하게 제 역할을 견딘다. 강남에 살면서 학교를 떨어져서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언니가  집안의 유일한 문제아인것은  그만큼 문제 없는 괜찮은 가족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가족끼리의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폭언들, 무시와 강압이 그냥 당연했고 손위 오빠가 여동생에게 손을 대는 건 그냥 아이들사이의 다툼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오빠 밥은 당연히 동생이 챙겨야 하고 아버지의 말은 법이다 어머니는 그냥 모른 척하고 견디고 외로울 뿐이라. 딸 아이들의 빈 마음을 다  마져주기에도 힘겹다. 굳이 가족끼리 대화하지 않아도 함께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화목한 우리집을 그려낼 수 있다. 대화는 일방으로 흐로고 침묵은 긍정이고 착한 자녀의 표본이다.

 

학교에서선생님들의 무지한 폭언도그냥그냥 일반적이다

날나리가  되지않고 대학을 가야 당연한 학생이다.남자친구를 사귀고 노래방을 가는 것은 날나리가 하는 일이고 공개적으로 날라리를  적어내라는 폭력이 발생한다. 당연하게

어른들의 잣대대로 아이들은 생각하고 행동한다.

공부를 못하고 잠이나 자고 남자를 만나는 친구는 당연히 날라리고 커서 파출부나 할 아이라고 어른처럼 믿으며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공포감으로 나와 그 아이를 구분한다 그건 어른들이 바라는 교육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도 은희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감자전을 먹을 수도 있고 언니와 은밀하게 교감도 나눈다. 오빠의 폭력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견뎌야 하지만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 있다

학교에서는 왕따일지라도함께 트림벌린을 뛰고 학원을 가고 콜라텍을 갈 지숙이 있고 나름 자기를 예뻐하는 남자친구도 있다. 다만 모든 관계가 단단하지 않을 뿐이다

언니는 더 중요한 바깥 관계가 있고 어마는 늘 바쁘거나 힘들다.

순간의 두려움으로 친구가 나를 배신할 수도 있고 어른들의 편견으로  남자친구가 없어질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계절이 바뀌어서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멀리하는것도 일상일 수있다

화면속에서 은희는 지숙이나 남자친구 자기를 좋아하는 후배와 한 화면에 나오지만

은희가  가장 말갛고 편안한 자기 얼굴을 갖는 순간은 혼자 있는순간이다

혼자 병원을 가고 혼자 시술을 받고 혼자 입원을 하고 혼자 걷고 돌아오는 순간들 말이다

그 혼자일때도 누군가와 닿고 싶지만 의외로 편안하기도 하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없이  그냥 은희 그 자체의 얼굴이면  된다

은희는  혼자를 잘 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열다섯의 은희는 모를 것이다.

자기가 혼자 잘 해내고 있다는 걸 그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건 슬프지만 괜찮기도 하다.

아직 어린 은희는 그걸 다행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게 영원할 수 없겠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그리고 명지 선생님.

은희를 알아봐주고 말을 들어주고 눈을 맞춰주고 뭐라고 충고하지 않아도 은희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던 사람 그 사람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하거나 가늘고 위태롭게 이어져오던 은희가 단단하게 매듭을 묶고 머무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고 내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이다.

 

얼마전 아이에게 들었다.

인터넷에  개인주의자 검사를 하는 문항이 있는데 그걸 보니 자기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란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고  남의 감정을 잘 알기 히들고 오래 관계가 지속되면 피곤해지고  혼자가 더 편하다는 것  통화보다는 톡이나 문자기 더 편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남의 감정에 쉽게 개입하지도 않고 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개인주의자란다.

그런데 요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위 문항에 나도 다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위 문항에 맞는 사람을 쿨하다고 멋지다고 하지 않나?

먼저 다가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냥  다가 오지 말라 나도 다가가지않겠다며 자기 바운더리를 지키고 맞춰주는 것 그게 예의고 멋진 일이 된다.

한때는 우리 모두가은희였으나 이젠 적당히 멋지고 피곤한 개인주의자들이 된다.

외롭긴 해도 덜 위험하고 덜 해롭다.

은희가 자라 스무살이 되면 멋지지만 쓸쓸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될까?

영지 선생님처럼 쓸쓸하지만 따뜻한 이웃이 될까

어쩌면 이 둘은 같은 타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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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의 이야기이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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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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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나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남성적'나;들이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 /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 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정치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문제를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 <들어가는 말: 보편의 제구성>

 

 

 

칭찬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다.나는 너에게 칭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너는 나에게 칭찬을 '받는'사람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아랫사람을 인정하는 행위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는 반려견,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려는 칭찬은 아랫사람이 갈구하는 당근의 역할을 한다. 뒷사람은 칭찬을 통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라는 압력을 넣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소에 좋게 봤는데'와 같은 말을 덧붙여 비난한다.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p26 < '진짜'는 없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진짜'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넌 늘 화가 나 있는 '진짜'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의 말을 교양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8 <진짜는 없다> 

 

진짜(좋은)와 가짜(나쁜)에 대한 구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 곧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그것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참된'민족과 '참된' 문화와 '참된' 공동체 그리고 폄하하고 공격해도 문제되지 않는 '참되지 않은'타자들이라는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전략을 나는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순수, 진짜 참됨을 향한 숭배는 극우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많은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짜인 우리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저들을 만들어 저 타자들을 축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페미니즘에 대한 점검은 꾸준히 헛수고가 될 것이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꾸준히 남성혐오로 번역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성정은 죽어야 증명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현재를 방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다.

                                       p49 < 진짜는 없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충돌을 통한 성장을 억압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형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42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p52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이다. 이를 '다소곳한''참한' '청순한'  '얌전한'  '순한'   조용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 하고 있다. 성희롱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상황은 셀 수 없이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여성의 행동에는 토를 넘는 이나. 지나친 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다닌다.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티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이다.진보정당의 계시판에서페미나티라는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른 큰 일도 많은데 여자들이 너무 설치기 때문이다 저항은 조롱당하고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소거당하고 있는대도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p64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보니 여성을 존종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남성다움'에 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보고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 한다. 남성이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걸레는 여성의 경험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다.걸레는 낡고 냄새나는 더러움의 상징이다.걸레, 곧 경험있는 여자는더럽다는 낙인이 찍힌다. 처녀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p 71 <몸이된여성들> 

 

여성의 다양한표현과 다양한 모습의 재현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의 생각과 인격을 무시할 수 있는 흔한 방법이다. 돌아다니고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궁~ 남성의 시각에서 자궁은 생각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는 공포로 탈바꿈 해 억압할 수 있다. '이빨 달린 질'은 오래된 신화다.

 

어머니= 대지 라는 공식에 따라 한국의 민중미술에서도 여성은 대지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대지의 어머니>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이든 여성이 상반신이 땅에서 올라온 모습이다. 땅과 여성이 한 몸이되어있다. 이 여성의 몸에서는 고단한 세월이 느껴진다.작가는 이 작품을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본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가는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의도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나체의 상반신을 드러낸늙은 여자의 형상은 생명력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대지= 생명력의 공식은 그 대지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감정 이입하는 사람의 시각일 뿐이며  대지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시각은 아니다. 나의 땅은 생명력있는 대지이지만 남의 땅은 빼앗아야 할 장소가 되고 주인 없는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p 91 

 

여학생 휴게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이 있는 이유는 여성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여성이나 성소수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폭력을 방지하는 대인일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의 장소는 자꾸만 제약을 받고 침범 당한다. 화장실 몰카라는 성폭력은 바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침략행위이다.남성은 여성의 몸(공간)을 침범해그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점령하려 한다. 그래서전쟁은 반드시 강간을 동반한다.

                         p123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여성이 체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편안할 안은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p 143

 

 

여성은 집사람이다. 집은 돌아다니지 않는다.과거의 쓰개치마, 전족, 남자를 동반하지 않는 해외여행 금지 등에는  모두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일부 나라에서 부르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집은 과연 여성에게 안전한가 밖에서 여성이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집이란 공간은 많은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p 208 <같은 공간 다른 자리>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자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시대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정과 젠더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부모가 그러면 안되지 않아?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거지. 친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거야. 자격이 없지

무슨 엄마가 그래?

여자가  그러는  거 말이 안되지.

그래도 여잔데 그건 아니지 않아?

말이?

행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 이유로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말이겠지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뒤집어 보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편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는 차처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는 거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조항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아닌 '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과 차별을 바탕으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까 그를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 건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별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이며 내게 기대되는 역할의 문제도 다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한 마땅함들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희생과 무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주로 소수자일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일

세상이 기대한다고 말하는 진짜는 누가 정해놓았을까?

고백하자면  그렇게 누군가가  누군가 (분명 전체를 위한다고 믿으면서도  일부만 편한) 를 위해 만들었다는 규칙에 맡기는 일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내게 거슬리는 건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일이라고 탓해버리면 되거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원래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이면 누구든 입을 닫게할 수 있거든

 

학생답지 않잖아.

그것도 여학생이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그 말을 뒤집으면 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는 거슬리고 너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내가  욕 먹는건 딱 싫다. 이런거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면그냥 욕하거나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무시할테고

나랑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너를  위한 말이야라고 하면서 위하는 척  생각해주는 척 하며 니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세상의 기준들

 

진짜 감별사들은 세상에 너무 많아

점점 세분화 됨면서 개인 자격이라도 있는것 처럼 진짜 다운 걸 가려내는  사람들

자식답게

학생답게

신입직원답게

아르바이트답게

후배답게

주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은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고

간혹 위를 향하는  기준은 그들의 꽉 막힘이  꼰대같은 행위들을 이해해주라는듯  마땅하다는 걸 말하는 기준으로 쓰이곤 하지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지만...)

 

페미니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조심스럽게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내가 꼭 페미니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덧붙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의고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차별은 싫고  삶에서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에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결국  누군가 타인에게 기준을 맡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렇게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입을 다물고있어도 될까   예쁘게 화장하고 샬라라 옷을 입고 누군가에게 얘교있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고 적당히 보호 받고 싶고 모른 척 하고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누가 하는 말처럼  내가 필요할때 필요한 카드를 적당히 뽑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당하고 솔직한 타인이 나랑 상관없을 땐 멋지다고 하면서

내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나랑 비교될것 처럼  보이면 그냥 이유없이 미워지고 너무 나대고 설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밉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 없이 화가 나는 부분은  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살면서 너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점이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그땐 사람들이 좀 무지했고 생각이 짧았고 너무 오랫 관습때문에 잘못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빠르게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여전히 누군가는 불공정함과 공포와 내가 책임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조금씩 진보하고 변할 뿐이다.

그저 치한이나 변태들이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내가  당연히 이용해야하는 공공시절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지울수도 없고 쉬지도 않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곳에서 나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공포의 불안은 진화하는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차라리 그 시절의 변태나 치한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이렇게 여전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더 치밀하게 치사해질 줄 알았다면 후손을 남기지 말고 그냥 삶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는 것을 택했어야 헸는데...

조심하며 살아온 내 시간만큼 내 아이들도 조심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할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건 도데체 뭐라고 해야할까?

 

 너는 진짜냐? 고 묻는 이에게 나도 묻고 싶다.

니가 생각하는 진짜는 도데체 뭐지?

그 진짜가 진짜로 진짜라고 믿는 너는 진짜니?

이 무슨 말장난같은.....

 

이제 무얼 읽어도 시원해지는 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은 점점 엉망이고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침 드라마같고

그러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나의 무능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에서 그래도 실날같은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데

그냥 사는게 두렵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아이들을 채근하는 내가 무섭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뭐.... 복잡한 마음 뿐이다.

 

올 여름이 너무 덥지도 않았는데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일까?

무얼 읽어도 다 깝깝하고 쉬이 지친다.

이건 책의 문제오 아니고 날씨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아직도 막막한 이 세상의 문제 8할에 개인적인 호르몬의 문제가 2할인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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