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장 아름다운 건 꽃이 피기 전까지. 그러니까 간절하게 그 꽃을 기다릴 때다. 꽃은 피고 나면 그뿐 그 순간부터 봄은 덧없이 지나갈 뿐이다.

(모든 것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지나간 후다.

밤에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비로소 그때 그 순간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고 내가 대응했어야 할 말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지난 후에 뚜렷하게 보인다.

어쩌면 몰라서 아름다웠고 몰라서 편안했을 수 있다.

알고 나면 후회만 남기도 하겠지만 이젠 되었다 라는 체념과 비슷한 편안함도 있다.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행합일이라고 아는 바를 행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런데 아는 걸 행동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젠 책을 더 안 읽어도 될 정도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 머릿곳의 그 아는 것들은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지행합일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뜻인데 이 말은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것이 무척 많닥 했지만 그 중에 행하는 것이 거의 없다면 이 말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다.

행동하지 않은 한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무지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지행합일을 무서운 말이다. 특히 많이 읽고 배운 사람에게는...

 

요즘 사람은 행복이라면 무조건 최고로 여기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위안이 되는 목소리를 찾아 티비를 틀고 인터넷을 헤맨다. 마치 자신의 삶에서 고통과 슬품과 죽음이 조금이라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당의를 입힌 이런 일상 속에서 죽음을 대면한 옛사람들이 내던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과 고통과 아픔을 계속 피할 수 있을까?

 

 

기쁨이란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순간 바로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지만 고통은 단 하나의 감각적인 정보만 결여되어도 타인들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르므로 고독이란 우리가 고통을 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재앙은 우리를 가장 외롭고 연약한 사람으로 만든다.

언제나 이 연대 불가능한 고통앞에서 위로 역시 불가능하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내 고통을 누구에게 설명할 단어들을 찾을 수 없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라는 마음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니 설명해주세요. 천천히.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모르니까 내가 알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틀렸다면 말해 주세요.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정말 나는 너를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도 잘 모른다. )

 

독서는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건 의도하지 않은 변화이다.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난 꽃이었다.

 

어떤 순간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이제 청춘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는 이 순간 다시 읽은 <청춘의 문장들>

지금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간에는 그대로 옳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옳다.

틀린 건 없다.

다만 나도 달라졌다.

조금 더 성장한 면도 있고 조금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있으며

이제는 기대하지 않는 것들도 늘어간다.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것

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인정하게 된 것

좋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 그러면서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나 싶은 마음들

청춘은 머무리지 않고 흘러간다.

그러자 지금 이순간만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이순간이 청춘이라 믿는다.

여전히 흔들리고 꿈을 꾸고 좌절하고 앙ㄴ달하는 것

지금 이순간 나는 청춘이다.

청춘은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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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읽은 사람일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칡는다.

나는 달라지고 싶어서 책을 읽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읽으며 나는 또 하루를 버텨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삶응ㄹ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는 나를 늘 힘들게 했다.

다들 정말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의심했다.

나는 지금 내일 무얼할지도 정하기 힘든데 내 시간을 모두 바쳐 달려가야하는 목표를 정하는 것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느렸고 무계획했고 부정적이었고 그냥 하루하루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퍼거나 불안했다. 그럴 때 책을 읽었다. 이야기 뒤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고 공감받을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에게 화자에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만큼 나는 세상에 내 자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기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오면 내 범위는 여전히 좁았고 세상은 언제나 저만치 앞에 있었고 모두가 다들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긴긴 시간을 혼자 채워야 하거나 흘려보내야만 했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나이먹은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알게 된 것은 어른이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

그냥 받아들이고 통과해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망치고 모른 척하고 회피해도 결국 내가 해야할 몫은 내 앞에 온다.

그냥 받아들이고 상처받고 우울해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또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외롭지만 조금은 강해졌구나 약간의 근육이 생겨서 조금 덜 삐그덕대겠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그게 다 책에서 배운 것이다.

책은 내가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 대부분이 내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몰랐다면 더 단순하게 더 씩씩하게 내가 잘났다고 믿으며 살았을텐데

읽을수록 나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불안하고 초라해졌다.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나는 표현그대로 한 점에 불과했다.

읽을수록 작아지는 나.

그러나 나는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작은 내가. 작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물론 가끔 부자가 되고 싶고 권력을 갖고 싶고 명예와 지식을 가지고 뽐내고 잘난척 하고 싶은 욕구에 이불킥할만한 행동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를 이제는 받아들인다.

책이 그랬다.

그냥 너는 너라고...

책은 책일 뿐이고 나는 나 일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친해졌고 서로 인정하고 있다.

읽기가 주는 즐거움은 어쩌면 무용하다.

후기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에 무용하고 하찮은 것들이다

쉽고 빠르게 누구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지금 현실에서

느리게 읽고 쓰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머물뿐인데 뒤로 자꾸 밀려난다.

조금 읽고 많이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서 많이 말하고 더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읽을수록 작아진다.

이렇게 읽다가 내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괜챃다.

나는 작아져서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있다.

내가 안다. 내가 있음을. 내가 읽었음을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읽다보니 그것으로 괜찮다.

 

 

그런데 이탈리아 철학자 바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가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세계까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뜩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거라는 감정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모호한 것은 두렵다. 그래서 두려운 대상을 명확하게 한다. 친구를 잘못사귀어서 그래. 저 사람이 문제라서 내가 화를 낼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왜 밖에 놀러다니고 그런거야? 단순한 이유일수록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들이 안전하다. 그래서 문제야 그 명확한 문제만 해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낼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암묵적으로 나만 아니면 되는 대상을 미워하고 상황을 혐호한다.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전한 문제다. 두껑을 덮는다고 오물이 사라진 것이 아닌데...)

 

안나 이호바토바는 말년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시작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렇게 읽힌다. ’나는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집이 다시 출간되기를...

(하루를 무감하게 살아내는 것, 반복같은 하루를 그래도 살아내고 먹고 자고 생각하고 쓰고 일하고 귀가하고 다시 고단한 몸을 눞히는 일을 내일도 모래도 지치지 않고 해내는 일 때로는 그 일이 혁명보다 더 위대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 모르는 타인들 그리고 당신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은 우리가 위대하다.)

 

실비아 플러스의 딸이 이야기 한다.

어머니가 실존했고 자신의 능력을 다해 살았고 행복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황홀하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는 사실이 축하받기를 원했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운 작품활동을 했으며 평생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은 우울증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스캔들로 소비하는 대신 그녀가 남긴 작품 속의 치열한 삶을 보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이다.

(피해자는 늘 24시간 피해자가 아니다.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욕심도 내는 사람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일상의 한 순간 험한 경험을 했고 상처를 받았고 삶이 잠시 중단되었겠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다시 영웅이 된다. 얼마나 괜찮았는지 멋졌는지 영웅이 되거나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떤 배우를 나는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웃고 울고 설레었지만 너 그 배우를 좋아하니? 라고 묻는다면 별로 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원히 반짝반짝 빛날 별일거라 믿었는데 너무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직업탓에 모두가 그의 상처를 알고 치부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극단적인 선책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가 분노하며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늘 그대로 그 사람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햐냐고 물어보면 글쎼 라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그가 나온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아낀다. 그뿐이다. 그는 자기 삶을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남아있다. 그냥 그 뿐이다. 먼저 간 내친구를 남은 친구들은 좋은 면만 기억한다. 나도 그 친구의 나쁜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가 성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인간적인 결함도 있고 때로 이기적인 판단을 하기도 했고 자기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기도 했고 그 판단이 누구에게는 상처였을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좋은 친구였으나 대단히 멋진 사람은 아니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친구들 중 하나.. 내가 사랑했던 가족중 하나.

특별안 단하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여럿중 하나지만 가끔 그립다고.. 그렇다. )

 

아리엘 도르프만

그는 누군가의 실제하는 고통을 맬로드라마로 가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정확히 동시통역하는 것이 시의 임무라고 믿는다. 그는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강한 어머니의 아이로 남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의 고백대로 세상의 고통에 대해 고작 전문가란 이유로 두둑이 보수 받고 동시통역이나 해주는 단순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 있는 한 사람 덕분에 평범한 이들의 비극이 온세상에 알려진다.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늘 다짐한다. 나는 내가 아는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아는 상대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판단하지 말자. )

 

조앤 디디온

디디온은 기사에 글쓴이의 주관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의 에세이 <엘리시아의 대안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객관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글쓴이가 가진 편향성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모든 편향에서 자유로운 척하며 쓴 글에는 대안 매체에 아직 전염되지 않은 가시과 허위가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 만약 이라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연구한다. 만약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이 상황이 누가 어떤 위치에서 보고 기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는 어쩔 수 없는 승작의 기록이다.

그리고 보통의 우리도 부지런히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여기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생각도 있다고 . 역사는 결국 기록하는 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그 시간 그 시대에 누가 권력이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누가 썼는가에 따라 독자는 다르게 읽는다. 냉정한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속되고 속되다. 주관적임을 인정하자. 내 의사 편향성을 인정하고 이런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

 

단어들을 가지지 못할 때 청년들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소박하고 반지성주의적인 저항을 일삼게 된다. 베트남 전쟁과 소비의 상징인 비닐ㄹ oq에 반대해 마약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단어가 필요한 생각은 잘난 척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점을 무척 염려했다. ‘이 아이들이 ㅇ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어휘는 이사회의 진부한 표현들이다. 사실 나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꼐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결손가정출신이라는 표현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 그들이 결손가정이라는 단어로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 엄마 아빠 나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은 결핌이자 비정상이라는 기성의 관점에 자신들도 모르게 동의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는 결국 죽을 운명인데도 힘을 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삶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조리하다고 해서 다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지프는 아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비극이랄 게 없다.비극은 오로지 그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시작된다. 다시 저 아래의 바위를 향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바참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 고통을 응시함으로서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앤카슨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이별하는 것

(애도에는 기간을 둘 수 없다. 천천히 자기 방식으로 이별하는 수 밖에 없고

애둘러 내 방식으로 위로나 배려를 하지 않은 것 지금 여기 없는 이의 이야기에 내가 먼저 마음을 베이지 않는 것 되려 먼저 조심하지 말 것. 그냥 피가 첲철 흘릴만큼 베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톨스토이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ᄁᆞ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와 방향을 조금씩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 할 것만 있다.

 

읽기는 즐겁다.

그리고 이야기도 때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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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걸 싫어해요.
다른 거 불편하니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내가 어리석었나? 내가 잘못하고 있나? 나만 모르나 하는 불안을 갖게하는 것들을

누군가의 말이,외침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건
그게 나와 다르고 익숙하지 않아서예요
그런 건 폭력이예요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나는 원하지 않아요
나는 다른 삶을 원해요.
당신의 행동은 폭력이고 나는 거절해요.
그런 말들이 불편해요

그래서 까다롭다. 뭘 모른다. 이기적이다. 라고 ㅇ
하면서
입을 막고 손발을 묶으려고 소리를 지르고 손을 올려요.
두려운거죠
내가 틀렸을지 몰라
내가 모르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누르려고
더크고 세고 강하게 자신을 부풀려요.
너희가 틀렸어
너희가 뭘 몰라
너희들이 너무 예민해

어쩌면 우리는 말하는 법 듣는 법을 몰라요.
그냥 내말만 냅다하고 상대방 말을 듣지않죠
내가 할말만 생각하느라 들을 수없고
상대방말의 틀린점을 잡기워해 곤두서 있어요.
대화는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묻고 듣고 다시 생각해야하는데
침묵이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우린 모든 순간 순간을 말로 채우려고해요.


말을 듣고 생각하고
다르구나 그럴 수 있구나... 하는 고요의 순간이 필요한데
그래서
듣기만하다가 아쉽거나
말을 했지만 후회스럽거나 쓸쓸해지는 순간
차라리 아무말도 말걸
말하기 전으로 돌아가고싶다.
들었던 내귀를 씻고싶다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죠

말을 했고
들었는데
더 단절되는 기분
자꾸 멀어지는 기분
더 외로운

어떻게해야할까요?

마음엔 말들이 그득한데 내놓을 수 없거나
들었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들었지만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

우리는
나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나요?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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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공감하는 것과 사실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

그 차이를 드라마에서 배운다

<굿파트너>를 혼자 보면서 차은경과 한유리의 대화법에서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차은경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접근을 한다.

그가 딸 재희와 하는 대화는 나와 내 딸들의 대화와 비슷했다.

아이가 힘듦을 이야기하면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해결사 모드로 전환한다.

엄마라는 것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앞에 어떠한 문제도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할 수 없어서 절망하고 화가 나는 것

나에게 선택지는 그 두가지 뿐인데 아이가 점점 자랄 수록 나는 후자밖에 할 수 있는게 없어졌다.

해결은 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란 점점 진화하는 것이어서 점점 복잡해지고 오묘해지고 잘잘못의 구분이 부명하지 않다. 문제라고 여기는 지점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도데체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아이에게 좋은 해결사도 못된다.

해결해야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고통이다.

차라리 어려워서 노력하고 연구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괜찮은데 이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쏟아부어도 답이 없는 경우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나고 무력해진다.

그때 화를 낸다.

넌 도데ㅔ 왜 그런 문제에 매달리는 건데

그게 뭐라고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 니가 지금 그럴 때야?

물론 드라마속 차은경은 나보다 이성적이어서 그리고 여유가 있는 엄마여서 그런 막말을 쏟아내지는 않지만 딸 재희앞에서 자꾸 무너지고 해결중심으로 접근한다.


반면 딸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는 한유리는 재희와의 대화에서 공감을 해준다.

무엇도 질문하지 않고 재희의 말을 그대로 반영한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자기개방을 하고 그때 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화가 났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어쩌면 재희가 원하는 건 그 문제 내가해결해 줄께 가 아니라 어머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내가 알아 그거 되게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야 라는 말들이었다.

한유리의 공감대화는 재희의 마음을 열었고 재희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너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문제는 어른들이 해결할 일이고 너는 너가 원하는 대로 하면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것ㄴ 역시 그들이 알아허 할거야 라는 말을 근사하게 풀어준다.

너가 가장 우선인 부모들이니까 너의 결정으로 두 사람이 상처받는 일은 없다고 너의 선택을 가장 존중할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공감의 대화와 문제해결의 대화의 다른 점을 두 사람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법정에서 의뢰인을 앞에 놓고는 두 사람은 다른 위치가 된다.

그 자리에서는 차은경의 문제해결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

공감도 필요하지만 의뢰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온 사람이다.

그때는 차변의 말대로 내 감정 내 입장은 넣어두고 상대가 원하는 것 상대가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 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모를 수 있고 

알지만 말로 잘 풀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빙빙 돌릴 때도 있다.

차변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알아낸다.

사실 상대의 문제를 잘 파악하는 차변 역시 공감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 

한변은 상대의 말을 내 관점에서 걸러서 다시 재 조립해서 듣는다.

아이를 서로 맏ㅌ지 않겠다고 싸우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나는 그의 말은 부모란 모름지기 아이를 서로 원하고 양육하고 싶어해야한다고 하는 신념ㅔ 차있다.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이때만큼은 한변의 공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서로 다른 모양의 퍼즐조각처럼 서로 많이 다른데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다.

서로 원하는 지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콤비 플에이도 서로가 적당한 경계선으로 나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즉 두 사람이 가족이 아니기때문에 가능하다.


가족이란 그냥  뒤엉켜져 있어서 어디까지가 내 경계인지 모호한 집단이다.

차은경이나 한지상은 둘 다 재희가 내마음이라고 믿는다.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내가 그동안 보살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아이가 나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다. 나와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서도 상대가 내 입장을 이해할거라고 잘 알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부부이고 가족이라고 믿어서 갈등이 깊어졌다.

상대는 나와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서운한 마음까지  안고 함꼐 할떄 가족은 오래 간다.


한지상에게는 차은경이 가져오는 경제적 안정은 당연시 되었고 그에 더불어 흔히 모성이라고 하면 드러나야할 아이에 대한 무한정한 애정과 희생까기 기대했다.

차은경 역시 한지상의 육아와 살림에 대한 책임을 어느 순간 당연시 했다.

내가 이렇게 서포트를 하고 있고 내 시간이 없을만큼 일에 매달리는 것은 다 가족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걸 몰라주는 것이 서운했고

늘 육아와 살림은 당연하게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의 모책임하고 무신경함에 서운했을 것이다. 

서로 가족이 그러해야한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한다 라는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차은경은 엄마로서 경험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먼저 사회적인 성공을 했고 사회에서 일을 하고 얻는 성취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공감보다는 문제해결에 뛰어나고 그 능력으로 지금껏 살아왔따.

그런 그에게 육아를 하면서 집에 있으라는 건 사실 날개를 꺽는 일이다.

사람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집보다 직장이 더 편하고 성취감을 주는 차은경은 아이와 보낸 육아휴직 기간이 행복했지만 동시에 자신은 사라지고 없는 상실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육아란 온전히 타인에게 집중해야하는 노동이다.

그냥 잠깐 보면서 귀엽고 즐거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차은경과 재희의 관계처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뒤톧수를 한대 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지칠 수도 있고  절대 어떤 풀이과정도 맞지 않은 난제 일 수도 있다. 

그런 간계에서 에너지가 고갈된다.

사실 양육은 내가 얻는 즐거움과 보람만큼의 에너지를 그대로 빼앗기는 일이다.

아이가 마냥 이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아이. 나의 도움이나 관심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고 생존마저 위태로운 존재. 자라서는 엄마의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엄마가 하면 당연하고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심어주는 시화분위기와 여러가지 거지같은 이론들이 부모를 옥좬다.

그냥 이뻐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주말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좋은 아빠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부성과 다르게 모성은 하나라도 빠지면   실패가 되고 죄책감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들은 많은 차은경들은 (굳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문제해결중심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내 아이에게 생기면 그때 모든 시선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에게 쏠린다. 엄마가 어떻게 해결하지? 지켜보는 눈들이 생긴다.

아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닌데 엄마가 먼저 지레 겁을 먹고  돌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감은 뒤로 밀리고 문제해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아마 드라마는 재희와 차은경이 좋은 관계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아직 외도를 한 배우자에게 좋은 결과를 주는 드라마는 없다.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를 양육할만큼 좋은 아빠였떤 한지상이었는데  외도문제가 생기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차은경에게 자존감이 상했는지. 육아에 지쳤고 외로웠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 않다.

다만  그럴 수 있지,.... 라는 마음이 외도가 보태지면 어떤 깐한 마음도 들지 않는다. 


부모도 힘들도 자녀도 힘들다.

나와 다른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

나와 다른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녀

부모같지도 않은 부모도 있을 거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엇나가는 자식도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그래도 함꼐 살아가려면

나는 늘 주장한다.

적당한 거리.

모르는 사람처럼 

늘 다를 수 있다는 생각 (어제와 오늘 내마음이 다른데 저 사람은 늘 한결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도데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어쩌면 서로 외롭고  쓸쓸할테지만

나는 차라리 상처나 배신감보다는 외로움을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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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남궁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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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봤던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생각났다.

그 드라마도 소설원작이랬다.

은행원들 이야기였고 멜로가 있었지만 그 드라마에서 내가 본 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은 내게도 익숙한 공간이어서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사이의 공기의 밀도, 긴장감들을 함께 느꼈다. 내가 그 공간에 있을 땐 정규직 비정규직은 없었다. 다만 그때는 고졸 대졸이 나뉘었고 경력이 다르게 입사하지만 여자라면 같은 단계에서 누군가 조금 위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조금 아래에서 시작하는 정도였다. 아마 그때 대졸 여행원을 막 뽑기 시작한 무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이라는 조직이 갖는 긴장감이나 단순하고 고지식한 면 그 속에서도 정치도 있고 무리도 있는 것들을 보면서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걸 느꼈었다.

 

일을 위해 모인 공간에서 일은 어렵지 않다.

물론 일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개인의 능력이나 기질에 따라 능률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해내거나 포기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등 일이 주는 무게감이나 스트레스는 크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일을 해내는 건 디폴트값이고 다른 자잘한 것들이 더 힘들게 한다.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단순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미묘하다.

일은 매뉴얼이 있고 숙지해야할 규칙이 있다.

서툴더라도 시간이 해결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매뉴얼이 없고 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나같으려니 하고 좋은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차라리 분명한 선과 악이 있으면 편안할탠데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믿음직한 직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까칠하고 알 수 없는 상사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사람이 사소한 문제 사실 사쇠한 문제란 없다. 내게 절대절명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까짓것 하는 문제로 등을 돌릴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얹어주기도 한다.

 

일만 하자 일만

하고 일에 묻히는 게 차라리 나아서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일만 하면서 출퇴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월급이 쌓이고 올라가고 다른 충족감이 생긴다.

그러나 지금의 월급생활 아니 모두를 뭉뚱그려서 노동을 하고 댓가를 받는 일들이 그렇게 뿌듯하고 자존감을 올리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죽어라 일하는 개미는 여전히 개미일 뿐이다.

죽어라 해야하는 일을 얻는 것도 힘들고 운 좋아서 일을 얻어도 그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 더 이상 아니다. 그냥 한마디로 개고생이 된다.

죽어라 충성해도 내게 돌아오는 건 쥐꼬리만한 월급과 어디 썼는지도 모르게 쌓여가는 대출과 스트레스와 직업병 등등이라면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애써왔나 우울하다.

가족도 내가 노력함을 알아주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여기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회의감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역시 태어나 자라면서 배워 온 것이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은 필요하다. 노동을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등등 한만큼 가져가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는 걸 배워왔다. 나 역시 그렇고 가족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고 인생에서 꼭 해야할 무언가가 되면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노동에 속박된다.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고 사회 부적응자같고 도태되어버린 것 같아서 찝찝하지만

하는 순간 언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소설들은 노동을 하고 월급을 받는 (주급을 받든, 자영업이든 일을 준비하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걸 하게 되었으니 불행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만 있다. 그러니 미래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불평은 하면 안된다.

이건 윗세대도 나도 지금 세대도 머릿속에 가진 생각이다.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다를지라도....

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라

하다가 더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

눈만 높아서 좋은 일만 하려고 하고 자기 주제는 모른다.

일단 시작해야지 고르면 어떡하나

언제까지 꿈을 쫓을 수는 없지 않니? 뭐라도 시작해 봐

그렇게 나를 낮추고 맞춘다. 내 팔다리를 자르고 몸을 우겨넣어서 맞춰주고 기다리지만 조직은 세상은 내가 맞춰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 아게 아닌데 싶은 순간 나는 조직이라는 톱니바퀴에서 나올 수 없다. 이미 리듬에 맞춰 돌아가는 그 속에서 나오는 건 또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한때는 정의가 이상이 그리고 사명감이 일을 하게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세상에 떳떳하게 내보내는 일

조금 엄격하고 깐깐하지만 그렇게 해서 적확하고 바르게 배워야 한다고 믿었는데 알게 모르게 세상은 바뀌었고 정서가 중요하고 공감이 중요하고 아이들의 마음이 더 중요해졌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해 온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억울하다.

나도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고 하고 그 결과가 수입이 줄어드는 것으로 눈에 명확하게 보여진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귀찮아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아이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불편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냥 누구든 만만한 사람에게 나도 화를 내고 퍼붓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 돌아서서 다시 아이를 맞이 하겠지만

지금 내가 좋다고 내가 옳다고 말하면서 도와달라는 아이를 어찌 거절할까

그 순간은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이 아닌 사명감으로 채워지는 노동의 시간이다.

 

직장이 없어지고 임금을 줄 수 없는 사업장도 딱하지만 그런 사업장을 믿고 참고 기다리면서 노동을 해온 노동자들도 딱하다면 더 딱하지 않을ᄁᆞ

관계에서 내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교통사고도 일방적인 100%라는 건 없는데 관계에서는 그것도 직장에서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결국 약한 존재가 물러나고 포기해야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가능한 내 둘레에 견고한 벽을 쌓고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 어떤 틈도 잡히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지고 그 원인이 나에게 돌아온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니라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 벽들이 결국 나를 공격한다.

흔히들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내가 나를 지킬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들이 그렇게 만든다.

지금의 일은 함께 가자가 아니라 각자도생이다.

잘하면 내탓이고 못하면 니탓이거나

잘하면 조직덕이고 못하면 너의 무능력이거나

잘할 필요가 없다 못하거나 책을 잡히지 않으면 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일조차 책잡히는 일 리스트에 들어가는 세상이다.

 

내가 속한 조직이 조금 더 잘 되고 그래서 내게도 뭔가가 흘러 넘쳐서 얻는 게 있고

그러려면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그 열심히 안에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종목도 분명히 있다.

거래처에서 좀 더 우위를 점하고 가맹주들에게 비위를 맞춰가며 더 얻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승진이 걸려있고 정규직 전환이 걸려 있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들이 걸려있다.

포기가 쉽지 않다

거기까지도 죽을둥 살둥해서 올라왔는데 저기가 고지인데....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는 늘 그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버텨야지 그러려면 서울로 이사가거나 차가 있어야 하는데....

말로 투덜대는 창희는 가맹점주에게 최선을 다한다.

덜렁덜렁 껄렁거리는 거 같아도 그들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노력하고 애쓴다.

어쩌면 진영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꽤 인정받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그 길이 아니었구나 하고 돌아서는 창희처럼 어쩌면 휘청거리지만 꺽이지 않을만큼 단단했던 창희처럼 진영도 조금쌕 때는 묻어가지만 어느 순간 아니라고 느껴질 때 칼같이 돌아서길 기원한다.

진영은 절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이 아니다.

잘 풀렸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인성에 비해.. 그건 아닌 거 같다.

선영의 무심한 말들이 턱턱 걸리면서 내가 준비한 매뉴얼과 다른 반응에 늘 멈칫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가끔 사람은 내가 잘 아니까, 으래 그려려니 하는 마음으로

타인도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보편이고 상식이라고 믿어버리면 그 상식을 타인고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꺽였고 상처입고 상처를 주고 살고 있다.

나의 상식과 보편은 그냥 내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순오와 진영이 전혀 다르듯이 진영과 선영이 다르듯이

그걸 진영이 알고 받아들이면 진영도 괜찮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나도 온라인이나 올영에서만 화장품을 사고 있었구나,)

 

흔히 듣는 말

정 안되면 쿠팡물류알바나 하지

쿠팡 물류알바 알아보고 있어요

하루 가기로 했어요

다녀왔는데 할만해 또는 진짜 죽겠어 못해 못해

쿠팡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하긴 했나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은 들었고 그래도 일에 비해 보수가 좋다는 말도 있고

할만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한달을 버티고 있는 주인공이 장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정치질이 있고 스트레스를 풀 전용갤러리가 있는지 몰랐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디서든 살아남는 것이 사람이다.

도지윤마저 응원할 줄이야.... (그래도 방구성키보드 워리어가 아니라 몸을 쓰는 노동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

 

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가

최근 기사에서 여학생을 일찍 학교에 입학시키면 결혼을 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출산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참 애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출산율이든 출생율이든

왜 여자들이 결혼하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지 모를까

이 나이 먹은 나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더 낫고 결혼을 하지 않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자고로 여자란 결혼을 해서 남자들 뒷바라지를 하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디폴트였는데 그걸 하지 않는다. 세상이 말세구나

해야할 당연하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왜 그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을 할까를 먼저 고민해야지 왜 당연한걸 안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접근하면 해답이 없다. 정답도 없다.

결혼이 손익계산을 따져야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낭만으로 덕지덕지 쳐바르는 행위도 아니다. 어쨌든 현실이다. 현실이니 손익도 필요하고 그렇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약속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낭만도 필요하다. 정말 필요한 건 당사자들간의 합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당사자의 합의뿐 아니라 두 가정의 부모와의 합의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지원을 할것인가 어느정도 요구를 할 것인가 미리 합의가 필요하다.

정해진 답이 없다.

상황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낭만의 크기가 다르다면 답은 저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합의해서 결혼을 하면 잘 이행해야 한다.

들어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면 안된다.

노동을 하고 다시 출근을 하는 일이 생기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아 9to6 일을 마치면 쉬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다시 같은 시간 일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쉬러가는 집에 누군가는 다시 출근하는 일은 끔찍하다.

아이를 낳아도 지금같이 사교육이 필수인 세상에 아이를 키우기도 쉽지 않다.

이젠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알 수 밖에 없다.

정보도 빠르고 소문도 빠르다.

쉽게 뒤처지고 쉽게 기가 죽고 쉽가 열불이 나는 세상이다.

그리고 나 조차 자립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한데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까

최저 생계비는 점점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월급만 작고 소중해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고 부모를 부양하고 살아야 할ᄁᆞ

내가 나를 부양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이 시점에서 ...

나는 그 문제에 빠져있다고 자신할 사람도 없겠지만

내 의사와 다르게 편집되고 잘리고 다시 기워져서 목적에 맞게 조작된 내 말과 내 표정은 영 불쾌하다. 좀 큰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고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진정성도 상품이 되고 돈이 된다.

그런 감각이 있어야 돈을 버는 모양이다.

나는 보이사가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감각이 좋고 수완이 좋을 뿐이다. 불법은 없으니까

민지가 순수했다고 하기도 그렇다.

다만 나쁜 건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는 내가 좀 슬플 뿐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찜찜한 내용이다.

 

이제 아이가 취직을 해야할 나이다.

그렇다는 건 구세대인 나의 기준에서 이다.

이제 방향을 잡고 준비하고 했으면 하는데 아이는 아직도 중구난방이다.

기회가 오면 모든 걸 해보고 싶어한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괜히 내가 마음이 조급하다.

나도 배우자도 늙어가는데 지 혈육도 있는데 언제까지 늙은 부모가 뒷바라지 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라는 말은 꾹 참지만... 얼른 철이 들었으면 한다.

여기서 철이 들었으면 이란 얼른 내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으면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다.

 

월급을 받고 산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지만

인생 초반에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인생을 100으로 볼 때 20대 중후반은 초반이다.) 경험해야할 일이 아닐ᄁᆞ????

적어도 시작하고 이게 아니었어. 이렇게 살려고 공부한게 아니었어, 야자하고 비싼 사교육비쓰고 엄마한테 욕듣고 한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더라도

일단 들어가야 할 수 있지 않나????라고 꼰대 엄마는 생각한다.

내가 책에서 뭘 읽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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