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재의 이야기이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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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다는 것은  힘든 적은 없었다.

세상은 감정을 드러내고 살기엔 너무 빠르고 험한 곳이었다.

감정은 나의 가장 약한 속살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단단하게 무장하고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고 크게 눈이 띄지 않고 살아가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덤덤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머리로 계산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쉽게 상처받을 일도 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보고 눈길을 돌리면 그뿐인 정도의 관계망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운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몸으로 먼저 익혔다.

울어서 곶감하나를 얻었던 기억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게 얻어 먹은 곶감이 썩 달지만은 않았다. 떨떠름하고 뭔가 개운하지 안은 뒷내가 오래오래 남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신세지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끙끙거리고 해결해버리는 일이 차라리 편했다.

다만 누군가 먼저 내미는 손을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것인지 그저 거절이 어려워 아무거나 받아두는 일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쉽게 거절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일이 작은 충격이었던 기억이 있다.

저렇게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먼저 요구하지않았지만 먼저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고 착하고 만만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욕을 잘 하는지 얼마나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지 얼마나 싫은 상황을 많이 꼽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지만 모른 척 했을 것이고 설마 그럴리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운 기억이 별로 없다.

전혀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울고 나서 개운했던 기억은 없다.

늘 찝찝하고 울지 말아야 했다는 기억이 있다.

울음을 참으며 웃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고 그냥 꾸역꾸역 참았던 기억이 있다.

혼이 나도 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런 일로 울고 짜는 일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이런일로 우는 거 아니야.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힘들다고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늘 내가 먼저 나에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 병문안을 가는 일이었구 누군가 슬픈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위로 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어려운게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훅 하고 그 감정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것인 것마냥 자리를 잡아 버려서 당황스러웠다.

이건 내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일이 아닌데 이러는 건 너무 오바하는 일이야

도데체 이런 감정이 뭐지? 이런 걸 내 보이면 안될 거 같아

그런 억누름이 먼저 생겼고 늘 감정을 숨겼다.

함께 우는 일 함께 분노하는 일은 어려웠고 내 아픔이나 플슴이나 분노도 누군가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늘 내 아픔은 내 슬픔은 타인의 것보다 작았고 하찮아 보였다.

늘 내가 먼저 내 문제를 뒤로 미루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픔에는 경중이 없고 선후가 없다.누구의 어떤 아픔이나 슬픔은 똑같은 질량과 무게를 가진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아픔이 자기의 슬픔이 가장 무겁고 깊다.

 

남의 상가집이나 남의 병실에서 울지 않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상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내려가는 내내 내가 생각한 것은 슬픔이나 황망함이 아니라 울지 못하면 어쩌하 하는 걱정이었다.

명색이 자식이고 어찌 보면 느닷없는 죽음이었기에 슬프고 아파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내게 그런 감정은 당연하게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것이 너무 도드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아니 걱정이 더 깊었다.

늘 울지 않았던 그래서 독하다는 말도 들었던 내가 이번에도 울지 못하면 어쩌나 남들이 어떻게 볼까

울고 있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경험만 있던 내가 처음으로 울지 않은 모습을 남들이 보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엄청나게 통곡하지 않아도 눈물은 나왔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나 친척들이 성정이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만한 선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애도하고 충분히 감정을 드러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장례를 치뤄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3일 장 그 시간은  결코 순수한 애도의 시간은 될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서도 여러가지 치뤄내야 할 절차가 있고 형식이 있고 보여지는 관습이 있다. 계약하고 싸인하고 인사하고 주고 받고 다시 주문하고 클레임을 걸고 손님을 받고 인사하고 때로는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어울리지 않게 꺄르르 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무상가란 어쪄면 슬픔과 고통속에 나름의 희노애락이 모두 뒤섞여 있기도 했다.

터져야 할 울음은 오래 속에서 삭혀지지만 전혀 휘발되지 않았다. 그렇게 곰삭고 진해지며 이걸 밖으로 배출하지 않으면 내가 살기 힘들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를 사랑했고 존경하고 필요했던가 스스로가 놀랄만큼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무게는 대단했다. 어쩌면 긴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지나고 이제 정말 그 존재가 부재함을 실감하는 순간 애도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혼자 누가 보지 않은 곳에서 엉뚱하게 울음이 터졌고 그의 일을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며 보낸 시간이 아마 나에게는 애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그에게 많이 의지했고 많은 것을 받았고 많은 부분이 닮았음을 인정할 수 있었고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혐오했던 부분이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기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그게 나에게는 힘들고 어려웠고 미움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늘 화해와 깨달음은 뒤는게 온다.

그게 적절한 순간에 온다면 성인이지 일개 개인일 수는 없을 테니까

 

친한 친구의 병문안도 쉬운 일은 아니니었다.

간단한 시술이 아니고 어쩌면 생과 사를 넘나들지도 모를 병을 앓는 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견디라고 밥도 잘 먹고 쉬기도 잘하고 치료도 잘 받고 부디 잘 견디어 예전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말이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입에 발린 말같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만 같고 그저 타인의 형식적인 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막상 병문안 가서 본 모습이 충격적이었지만 아닌 척 모르는 척 괜찮은 척 하며 그래도  좋아보여 다행이야. 넌 잘 해낼거야. 원래 씩씩하고 똑독했으니까 이만큼일거야 라는 말... 그게 얼마나 전해졌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내 감정은 소금밭에 뒹구는 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일상은 평화롭게 지나간다. 배가 고프고 졸립고 피곤하고 해야할 일은 시간시간  이어진다. 무심하게 아무일 도 없다는 듯한 그 풍경이 아프다. 어쩌면 나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는 모든 것들이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내가 아프다는 것은 타인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도 내개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삶이란 그런 거였다. 원래

그래서 괜찮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별 거 아닌 문장들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별 거 아니어서 무심해서 더 북받치는 것 그런게 있다.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한다.

아이는 특별하고 무언가 뛰어난 누군가가 되고 싶어했다.

평범하고 무탈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나이다.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하긴 나도 그랬다. 삶은  길고 나는 영원히 살것처럼 굴었다.

누구와도 차별되지 않는다면  독특할 수 없다면 그냥 살지 않은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냥 이어지고 흐르는 삶

어디를 뒤바꾸어  놓아도 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는 나이 먹어야 아는 일이다.

굳이 많이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더라고 내일과 같은 오늘이 축복이라고 생각될 순간이 온다.                  

아니다. 떠쩌면 특별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높고 외롭고 쓸쓸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개개인은 스스로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롭고 그래서 쓸쓸하다.

그걸 아는 나이가 되면 누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고 하나밖에 없는 내가 다른  누구와 함께 어울리고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입원일이다. 아침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몰래 피운다. 맛있다. 풍경은 흐리다. 전철 역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간다. 세상의 일상은 무사하다. 그 무사함에 팩트들이 들어있다. 팩트는 엄혹한 칼이다. 정확하고 용서가 없다. 이 칼의 무심함에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 기록은 사랑이다. 사랑은 희망이다. 뭄ㄴ득 파란 버스가 풍경안으로 들어와서 정류장에 선다. 그리고 떠난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맞았따. ˝모든 것은 오고 가고 또 온다‘- P60

때아니게 툭툭 마음이 꺽인다.
가을날 마른 나무처럼.- P18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날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낼 뿐이다.- P23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라.- P119

삶은 힘들이다.
몸은 힘으로 살아간다.
정신은 힘으로 사유한다.
마음은 힘으로 노래한다.
생의 기쁨과 희망과 사랑을- P122

대학병원 카페테라스에서 창경궁 대문을 본다 추녀 마루의 부드러운 곡선, 혼자가 아니라 둘로 층이 나눠어서 더 중후한 힘의 안정성, 하늘을 바라보는 지붕들의 겸손한 낮음-내가 자주 삶의 격조라고 부르기 좋아했떤 어떤 자세- P128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P145

돌아보면 살아온 일들이 꿈만 같아서 모두가 고맙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이별의 행복 그건 빈손의 행복이 아닌가- P178

요즈음 별로 불편한 것이 없네요라고 내가 말한다. 그게 문제죠. 라고 의사는 말한다. 암 자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안하요. 다만 점점 자라날 뿐이죠. 그러다 종양이 혈관을 막고 장기를 누르게 되면 뭄이 불편해지는 거죠. 몸이 편하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몸이 편할수록 암의 상태를 의심해봐야죠.- P185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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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기본값이 결핍이다.

태어나 보니 이미 누군가 경쟁해야할 상대가 있다.

게다가 그 상대는 내가 사랑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은 대상의 전부였다.

부모는 이미 먼저 태어난 아이에게 모든 기본값을 맞추었다.

처음 태어난 아이는 아이도 첫 아이지만 부모도 첫 부모가 된다.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 비로소 부모가 된다.

부모는 어떠해야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존재하지만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내 아이는 또 다른 아이와 다르다

나는 또 다른 부모와 다르다.

그래서 아이와 부모는 함게 서로를 맞추어 나가야 한다.

늦게 자는 아이가 있고 일찍 자는 아이가 있다.

시간 맞춰 먹여주는 일이 가장 큰 행사인 아이가 있는가 하면 먹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는 이러지 않는다는데

육아서를 보면 이 월령에는 이런 행동을 해야하고 이런 발달 상황을 보여야 하는데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속도가 있고 취향이 있고 성정이 있다.

실수하고 참아내고 반복하며 아이와 부모는 서로를 알아가고 부모는 그 아이에 맞춰 육아의 디폴트 값을 정해놓는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이젠 경험이 있고 여유가 있고 예측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세상 모든 아이가 다르다는 것은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다르다는 말과도 같다.

한부모라고 해도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예 기본값을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 했던 첫 경험과 달리 두번째는 잉미 경험을 통해 축적한 통계가 있고 기본값이 있다. 그러나 그건 다른아이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다.

무용지물이다.

부모는 그걸 모른다.

내가 해봤으니 아는 것은 커다란 자산인데 지금 이 아이는 그 자산을 무시하고 비웃는다.

자꾸 내가 가진 기본값으로 아이를 맞춘다.

그 기본값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고 잘못되었으므로 훈육하고 가르쳐야 한다.

큰 아이의 틀에 작은 아이를 맞춘다.

작은 아이는 그 틀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내 것이 아니므로

틀을 믿는 부모는 자꾸 그 틀을 통해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있는 그대로 새롭게 봐주기를 원하지만 표현할 수 없다.

아이는 외롭고 거칠고 스스로 자기를 증명해야하는 도전앞에 놓인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앞에서 더구나 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앞에서

아이는 자꾸 외롭고 허기지고 불안하다.

그러나 눈치가 있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것까지 안다.

 

아이를 여럿  키우더라도 아이마다 다시 새롭게 기준값을 세워야 한다,

보편적인  가치는 아주 적게 남겨두고 저마다의 성정과 리듬에 맞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아이는 찍어낸 제품이 아니다.

살아있고 스스로를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생명체이고  인격이다.

 

참 늦게 그걸 알았다.

 

넌 왜 니 형처럼 니 누나처럼 하지 않니?

도데체 누굴 닮아서 그런거니?

둘째들은 이기적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네

 

때로는 기준값을 둘째에 맞추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익숙하고 편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싶어한다.

큰아이가 힘들었거나 둘째가 너무 자기랑 잘 맞다명 기준값은 다르게 정해지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 둘째는

외롭고 허기지며 늘 애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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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해야할 일은

입으로 떠들어댈 것이 아니라

입을 닫고 들어주고

가만히 옆에 있어주고

단순하고 원론적인 충고 정도만 하고

옳은 길로 이끄는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행동을 먼저하고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뿐이다

 

결국 내 말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들어주는  입장과

행동하는 모습이 전해질 뿐이다.

 

어른은 그래야 하는 거였다.

 

아무리 좋은 말 옳은 말 아름다운 말도..별로다. 

때로 재수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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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생긴 첫 아이에 관한 그림책 동화책 그리고 육아서적은 있는데

이미 형 누나 언니 오빠가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 둘째에 관한 이야기는 없을까?

 

큰 아이가 폐위된 왕의 입장이라면

둘째는 태어나면서 누군가와 경쟁해야하는 각박한 환경에 던져진다.

이유없이 억울했고 화가 났고 무언가 참고 눌러야 한다는 본능은 둘째라는 숙명일지 모르겠다.

태어나며 나누어야 하고 나누어 주는 대상에게 감사해야했고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귀여워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함을 장착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면 동생이라 철이없다거나 둘째 특유의 욕심이라고 한다.

나의 행동과 태도는 나의 개성이 아니라 둘째가 갖는 특성이라는 안경을 통해 판단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그저 둘째였다.

 

그런 둘째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없을까

 

아이를 둘 낳으면서 둘째를 보면서 그 아이의 이유없는 투정과 짜증과 토라짐에 이유가 있음을 안다

그 아이의 행동은 예전에 내가 했던 그 행동들이었다.

같은 둘째로 동질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엄마가 언니가 둘째를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아무래도 조금은 뒤로 처지고 손이 안간다는데 무심해지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예쁨 받는지 눈치로 알아야 하고 그게 생존본능이 되어버린... 그래서 내가 원치 않은 내 모습이 칭찬 받는 내모습이라는 걸 몸에 익히면서 억울하고 어딘가 어정쩡했던 기분들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서럽고 외롭게 자랐는데

아이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손이 안가는게 다행이라고만 여기는 내가 있다

입장이 바뀌는 시각이 바뀌는 걸까?

태어나면서 사랑받고 으시대며 자라다가 동생이 생기면서 모든 것을 나누고 양보해야하는 큰아이의 짠함 만큼 태어나니 이미 모든 걸 반쪽에 만족해야하는 둘째가 있다.

누가누가 더 억울한가 내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각각 힘듬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나도 나의 둘째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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