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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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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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나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남성적'나;들이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 /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 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정치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문제를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 <들어가는 말: 보편의 제구성>

 

 

 

칭찬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다.나는 너에게 칭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너는 나에게 칭찬을 '받는'사람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아랫사람을 인정하는 행위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는 반려견,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려는 칭찬은 아랫사람이 갈구하는 당근의 역할을 한다. 뒷사람은 칭찬을 통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라는 압력을 넣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소에 좋게 봤는데'와 같은 말을 덧붙여 비난한다.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p26 < '진짜'는 없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진짜'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넌 늘 화가 나 있는 '진짜'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의 말을 교양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8 <진짜는 없다> 

 

진짜(좋은)와 가짜(나쁜)에 대한 구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 곧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그것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참된'민족과 '참된' 문화와 '참된' 공동체 그리고 폄하하고 공격해도 문제되지 않는 '참되지 않은'타자들이라는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전략을 나는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순수, 진짜 참됨을 향한 숭배는 극우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많은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짜인 우리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저들을 만들어 저 타자들을 축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페미니즘에 대한 점검은 꾸준히 헛수고가 될 것이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꾸준히 남성혐오로 번역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성정은 죽어야 증명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현재를 방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다.

                                       p49 < 진짜는 없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충돌을 통한 성장을 억압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형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42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p52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이다. 이를 '다소곳한''참한' '청순한'  '얌전한'  '순한'   조용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 하고 있다. 성희롱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상황은 셀 수 없이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여성의 행동에는 토를 넘는 이나. 지나친 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다닌다.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티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이다.진보정당의 계시판에서페미나티라는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른 큰 일도 많은데 여자들이 너무 설치기 때문이다 저항은 조롱당하고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소거당하고 있는대도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p64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보니 여성을 존종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남성다움'에 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보고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 한다. 남성이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걸레는 여성의 경험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다.걸레는 낡고 냄새나는 더러움의 상징이다.걸레, 곧 경험있는 여자는더럽다는 낙인이 찍힌다. 처녀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p 71 <몸이된여성들> 

 

여성의 다양한표현과 다양한 모습의 재현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의 생각과 인격을 무시할 수 있는 흔한 방법이다. 돌아다니고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궁~ 남성의 시각에서 자궁은 생각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는 공포로 탈바꿈 해 억압할 수 있다. '이빨 달린 질'은 오래된 신화다.

 

어머니= 대지 라는 공식에 따라 한국의 민중미술에서도 여성은 대지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대지의 어머니>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이든 여성이 상반신이 땅에서 올라온 모습이다. 땅과 여성이 한 몸이되어있다. 이 여성의 몸에서는 고단한 세월이 느껴진다.작가는 이 작품을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본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가는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의도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나체의 상반신을 드러낸늙은 여자의 형상은 생명력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대지= 생명력의 공식은 그 대지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감정 이입하는 사람의 시각일 뿐이며  대지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시각은 아니다. 나의 땅은 생명력있는 대지이지만 남의 땅은 빼앗아야 할 장소가 되고 주인 없는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p 91 

 

여학생 휴게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이 있는 이유는 여성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여성이나 성소수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폭력을 방지하는 대인일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의 장소는 자꾸만 제약을 받고 침범 당한다. 화장실 몰카라는 성폭력은 바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침략행위이다.남성은 여성의 몸(공간)을 침범해그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점령하려 한다. 그래서전쟁은 반드시 강간을 동반한다.

                         p123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여성이 체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편안할 안은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p 143

 

 

여성은 집사람이다. 집은 돌아다니지 않는다.과거의 쓰개치마, 전족, 남자를 동반하지 않는 해외여행 금지 등에는  모두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일부 나라에서 부르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집은 과연 여성에게 안전한가 밖에서 여성이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집이란 공간은 많은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p 208 <같은 공간 다른 자리>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자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시대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정과 젠더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부모가 그러면 안되지 않아?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거지. 친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거야. 자격이 없지

무슨 엄마가 그래?

여자가  그러는  거 말이 안되지.

그래도 여잔데 그건 아니지 않아?

말이?

행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 이유로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말이겠지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뒤집어 보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편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는 차처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는 거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조항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아닌 '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과 차별을 바탕으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까 그를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 건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별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이며 내게 기대되는 역할의 문제도 다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한 마땅함들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희생과 무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주로 소수자일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일

세상이 기대한다고 말하는 진짜는 누가 정해놓았을까?

고백하자면  그렇게 누군가가  누군가 (분명 전체를 위한다고 믿으면서도  일부만 편한) 를 위해 만들었다는 규칙에 맡기는 일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내게 거슬리는 건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일이라고 탓해버리면 되거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원래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이면 누구든 입을 닫게할 수 있거든

 

학생답지 않잖아.

그것도 여학생이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그 말을 뒤집으면 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는 거슬리고 너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내가  욕 먹는건 딱 싫다. 이런거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면그냥 욕하거나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무시할테고

나랑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너를  위한 말이야라고 하면서 위하는 척  생각해주는 척 하며 니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세상의 기준들

 

진짜 감별사들은 세상에 너무 많아

점점 세분화 됨면서 개인 자격이라도 있는것 처럼 진짜 다운 걸 가려내는  사람들

자식답게

학생답게

신입직원답게

아르바이트답게

후배답게

주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은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고

간혹 위를 향하는  기준은 그들의 꽉 막힘이  꼰대같은 행위들을 이해해주라는듯  마땅하다는 걸 말하는 기준으로 쓰이곤 하지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지만...)

 

페미니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조심스럽게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내가 꼭 페미니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덧붙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의고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차별은 싫고  삶에서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에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결국  누군가 타인에게 기준을 맡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렇게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입을 다물고있어도 될까   예쁘게 화장하고 샬라라 옷을 입고 누군가에게 얘교있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고 적당히 보호 받고 싶고 모른 척 하고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누가 하는 말처럼  내가 필요할때 필요한 카드를 적당히 뽑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당하고 솔직한 타인이 나랑 상관없을 땐 멋지다고 하면서

내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나랑 비교될것 처럼  보이면 그냥 이유없이 미워지고 너무 나대고 설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밉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 없이 화가 나는 부분은  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살면서 너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점이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그땐 사람들이 좀 무지했고 생각이 짧았고 너무 오랫 관습때문에 잘못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빠르게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여전히 누군가는 불공정함과 공포와 내가 책임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조금씩 진보하고 변할 뿐이다.

그저 치한이나 변태들이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내가  당연히 이용해야하는 공공시절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지울수도 없고 쉬지도 않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곳에서 나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공포의 불안은 진화하는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차라리 그 시절의 변태나 치한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이렇게 여전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더 치밀하게 치사해질 줄 알았다면 후손을 남기지 말고 그냥 삶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는 것을 택했어야 헸는데...

조심하며 살아온 내 시간만큼 내 아이들도 조심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할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건 도데체 뭐라고 해야할까?

 

 너는 진짜냐? 고 묻는 이에게 나도 묻고 싶다.

니가 생각하는 진짜는 도데체 뭐지?

그 진짜가 진짜로 진짜라고 믿는 너는 진짜니?

이 무슨 말장난같은.....

 

이제 무얼 읽어도 시원해지는 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은 점점 엉망이고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침 드라마같고

그러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나의 무능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에서 그래도 실날같은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데

그냥 사는게 두렵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아이들을 채근하는 내가 무섭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뭐.... 복잡한 마음 뿐이다.

 

올 여름이 너무 덥지도 않았는데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일까?

무얼 읽어도 다 깝깝하고 쉬이 지친다.

이건 책의 문제오 아니고 날씨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아직도 막막한 이 세상의 문제 8할에 개인적인 호르몬의 문제가 2할인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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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 개론>은 누군가에게는 과거 아련한 추억과 낭만적인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불쾌하고 찝찝함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개봉하고 거의 초반에 딸아이들을 데리고 관람했던 영화는 풋풋한 수지와 어리숙한 이제훈이 만들어 내는 어리숙한 신입생의 분위기에 푹 빠졌다 왜 굳이 나이 먹어서 엄태웅과 한가인이 나왔을까 투덡거리기도 했다.

긴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아프고 힘든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있지도 않았을 대학시절 낭만을  떠올리고 그땐 그랬었는데 저랬었는데 하는 몽실한 감상에 잠기거나 봐봐... 저러니 대학은 가고 봐야 하지 않겠니? 게다가 이왕 갈거면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야.. 하는 속물적인 충고까지 잊지 않았다,

그떄 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틀에 아무런 의심도 저항도 없이 그저 낭만적이고 순수한 첫사랑과 그 첫사랑의 배신과 아픔만 보였다,

그러나 듣고 읽고 말하고 바뀌어진 내 눈으로 보는 영화는 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를 첨 봤을 떄도 유연석인 재수없는  명확한 나쁜 놈이었지만

유머와 재미를 담당하는 조정석의 대사들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견에 가득차서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인지 알게 되고

순수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제훈 조차 그저 자기 감정과 자기 입장에서만 상대 여성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난 한다

그리고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변한 게 없고 그 상식이라는 것과 관습이라는 것이 단단하게 고착되어서 그저 자기상처만 불쌍하고 아픈 사람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승민과 서연은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다. 영화속 승민은 순수하고 어리숙하고 서연은 수줍고 청초하지만 또 한편 도발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승민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며 동시에 관객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다. 서연의 진짜 모습이 아니고 내가 보고 판단하는 내 위치에서의 서연의 모습이다.

순진한 승민은 자기 어깨에 기대 잠든 서연에게 순간 뽀뽀를 해버리지만 친구 납득이는 그걸 납득할 수 없다. 잠든 여자를 그냥 내벼려두는 것은 범죄라는 대사가 여기서 나온다.

그냥 잠든 여자를 길거리에 내팽개치는게 범죄라는 게 아니라 내 옆에서 무방비로 잠든 여자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것이 범죄라고 열변을 토한다.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 앞에서 쉽게 잠든다는 것은 어떤 여지를 준 것이고 그 기회를 놓쳐버린 승민은 남자답지 못한 찌질한 남자가 된다. 그냥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혀가 드나들고 서로의 몸을 부비는 단계를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치욕이고 동시에 그렇게 쉽게 내 앞에서 잠든 여자는 어떻게든 해봐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배 재욱의 여성편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일단 술을 먹여 술을 먹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상대를 침대로 넘어뜨려 그러면 게임끝

이 유치하고 폭력적인 대사를 대단한 비법인 양 후배앞에서 늘어놓으며 자랑한다

그들에게 그런 말이나 행동들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라면 원하는 여자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여자는 싫다고하지만 그래도 순순히 따라오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고 그런 하룻밤의 동의되지 않은 관계는 그냥 하루의 일탈이고 쾌락이지 전혀 범죄라는 관념이 없다. 너도 하고 나도 하고 우리 선배들도 해 온 일인데 새삼 무슨 범죄냐고 되물을 것이다.

 

우리의 순진하고 순박한 승민은 서연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전전긍긍한다.

이제 제법 공인된 연인사이같기도 하고 아직 그저 그런 친구사이 같기도 하며 확신 할 수 없다.

남자들 사이의 확신이란 몸의 확신이다.

육체적관계로 내 것이라고 도장찍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불안하다.

연인이 물건도 아닐 진대 내것이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그 소유욕은 유치하고 두렵다.

그리고 어느날 밤 술에 취한 서연이 선배 재욱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다.

이미 유명한 바람둥이 선배앞에 술에 취한 서연이 있다.

술먹이고 침대에 눞히면 게임끝!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쩌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그러나 승민은 나서지 못한다.

이제훈이 연기한 승민은 우물쭈물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순신한 청년을 연기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한 남자와 함께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그저 방관이며 한편으로 동조이기도 하다.

결국 그 찌질한 승민이 하는 일은 두 남녀가 들어간 집 현관앞에서 귀를 세우고 안의 소리를 엿들고 있거나 우리의 납득이게 가서 질질 짜면서 서연을 욕하는 것이다. 쌍년이라고

오로지 그 순간 승민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하고 안쓰럽다.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든 서연은 당연히 쌍년이며 버려마땅하다.

재욱의 존재는 온데간데없다.

어떤 여자든 넘어뜨릴 수 있다고 믿는 그 선배는 그저 대단한 선배일 뿐이지만

선배에게 넘어간 서연만 나쁜 년이 된다.

그리고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헤어진다.

치사하게 짝이 없다.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따돌리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정도 되니까 아무말 하지 않고 이렇게 끝내주는 것이다. 너 상대 잘만난줄 알아라.

 

그냘 그 현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일 없었을 수도 있고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를 남길 범죄가 있었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라의 동의왕 즐거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건 그걸 겪고 견뎌야 할 사람은 서연인데 승민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비극의 주인공이라 믿으며 사랑의 막을 내린다.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추억이었다.

맞다. 나도 그때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어떻게 지내든 나보다 잘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아직도 나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잊었고 보란듯이 무시할거라는 유치한 다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오갈 수도 있다.

그렇게 오간 생각들은 지난 추억이며 낭만이라고 생각되지 그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다.

좋아하면 육체적으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경험한 여자가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여자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대고 평가하고 욕하는 것

이별의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고 무시하고 정서적으로 아프게 하는 것

알지도 못하면서 욕하고 판단하고 쌍년으로 몰아붙여버리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처음도 서연이고 끝도 서연이다.

술을 마셔서

몸도 가누지 못하게 취해버려서

남자 앞에서 쉽게 잠들어 버려서

혼자 산다는 것을 흘리고 다녀서

모든게 서연의 잘못이고 서연의 문제이고 서연의 행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내 첫사랑은 깨어졌고 얼룩졌고 지나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경우에 따라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의 민족의 비극으로 확대되기도 한다.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의 비극이고 결코 그 문제의 해결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개인의 문제가 확대 해석되어 이미 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한 당사자는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전시되고 더 큰 정의의 문제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의 비극을 그가 당하는 차별과 무시 억압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로 보면서 그의 아픔에 내가 동조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내 것 우리의 것이 유린당한 데 대한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나라 여성은 여성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재산이고 소유인데 그걸 타인이 침범했다는 데 대한 분노가 모든 것을 뒤덮을때 그 개인은 이미 없어졌다. 원치않았을 노출과 재해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였다.

조직에서의 성폭력은 문제 제기자체가 어렵다. 다들 가만 있는데 왜 하필 너는?

예민하고 까칠하고 받아들이질 못하니?
조직을 이렇게 망칠 셈이냐?  혹시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니냐? 대의를 망칠 생각이냐

이제 와서 세삼스럼게 그 때 일을 들추는 이유는 무었이냐?

너의 행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냐?

너도 좋아서 한 행동이 아니냐?

 

가정폭력 아내 폭력은 그저 사소한 개인적인 일이다.

부부간에 강간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럴 지경이라면 진작에 도망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느냐

아이들을 봐서라도 참아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

그렇게 가정을 깨야 겠느냐

그래도 아이들 아버지 아니냐...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등 친말한 관계에서의 폭력은 문제가 생기기전 예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 날지도 모를 불안을 해결하기위해 경찰이나 상담소 어디에 손을 내밀어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 아무짓도 하지 않은 가장을 잡아 갈 수도 없고 가족을 도피시필 권리도 없다.

그저 기다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잽싸게 연락하고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때 참 이게 뭐하는짓인가 자괴감이 들었었다.

누군가의 사적인 영상을 공유하고 퍼나르고  낄낄거리고 한두마디 보태는 일은 그저 일상의 작은 일탈이고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것으로 누군가 아프고 힘들고 죽을 수도 잇다는 건 아예 개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누구나 하는 일이고 이정도가 무슨 범죄냐

그렇다면 애당초 이런 것을 찍지를 말든지

이런 짓을 하는 그 여자의 행실이 문제지 보라고 만든 거 보는게 무슨 대수냐

불볍 촬영을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유통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뒤지고 탈탈 털어서 사대문안에 매달았다가 능지처참을 해버리면 그때는 좀 잠잠해질까?

 

왜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3인 이상의 가족만이 정상일까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보다는 낳진 않아도 멀쩡한 양부모가 키우는게 아이에게 더 낫지 않느냐는 말...

나도 쉽게 생각하고 내뱉았을 말.. 그 말이 누군가에게 절망이고 차별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여성폭력은 차별의 한 영역이며 인권침해다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공 국가의 책임 영역으로 확대 돌 수 있는 문제이다.

성별 불평등으로 인한 차별,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이 여자라 하더라도 그 여자가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기에 만만하고 대처능력이 없으며 쉽게 순응하고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며 폭력을 행사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아는 상태에서 사소한 친절을 통해

결국 성폭력은 남녀 불평등의 문제이며 위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남성들에게 여성이란 약자이다. 약자는 나와 동등한 대상이 아니다.

보호하고  살펴야할 대상이지 나와 입장을 나란히 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같은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순종적이고 공손해야한다.

그리고 내가 베푸는 시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

사회통념이라는 것 상식이라는 것은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보호받아 마땅한 열악하고 낮은 존재는 쉽게 다루어지는 존재와 같은 말이다.

원치 않은 보호와 친밀감은 폭력이다.

 

성이란 즐거워야 하고 안전해야한다.

생물학적 보건 위생학적인 성이 아니라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즐기는 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 즐거움이 서로가 즐거워야하고 서로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나만 즐겁고 나만 안전한 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나의 쾌락과 욕망은 타고난 것이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타인의 괘락은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이고 감추어야 한다면 그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서로의 존중과 동의가 성생활에 필요하다.

 

사회가 원할가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다. 법과 제도 개념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제도를 틀을 만들때 누군가가 소외되거나 누군가 일부의 이익을 위주로 그들만이 주체가 되어 만들옂ㅆ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제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사회는 유기적이며 유연성이 필요하다

 

언어는 시대의 속성을 가진다.

언어가 개념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생각의 방향을 잡고 규정하는 것이 언어이다.

생각은 언어에 종속되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부장제란 사적으로는 가족의 가장이 아버지가 된다는 부계혈통을 의미하지만

공적으로는 남성이 지배를 가지고 있는 세상을 규정한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 제도 일반화된 상식들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지배받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기준으로 차별 받을 수 있다. 권력 돈 명예 인종 장애 등이 차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차별받는 남성은 자신의 차별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도 자기보다 자유로운 여성에게서 찾고 분노한다.

 

신뢰의 함정이란 오래 알고 익숙하여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 존재를 더 잘 안다고 믿는다. 폭력에서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와 피해자의 감정이 중요하다.

그럴 리가 없는 사람. 오래 알아 잘 아는 사람,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내가 아는 그것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방관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말해버리는  사람도 충분히 가해자의 자격이 있다.

 

sexsuality는 인식의 문제이다. 욕구 쾌락  지향은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본능만이 아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절제가 가능하다.

욕구를 느끼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남성은 욕구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이고 여성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욕구는 두 다리 사이가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조절된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

존재하기 힘들다.

어떤 말이나 명제에도 누군가의 생각이 들어가고 어떤 의도된 방향성이 있다,

그걸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과학적이라는 것도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언어나 현상은 항상 그 이면을 뒤집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리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험의 방향성을 조작할 수도 있고 해석을 달리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늘 당연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책속의 100인회 시건이나 정미씨의 아내폭력문제  비디오 사건들...

어쩌면 지금 이순간 사건들과 이리도 겹쳐보일까

세상은 바뀌기도 하지만 계속 제자리를 맴돌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때와 달리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조금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가 없는 성은 역시 폭력이다

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푝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 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남자 앞길을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더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여성의 고통보다 가해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 P34

˝모든 인간은 폭력 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은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여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담론은 인간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를 더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는 성역할로 정당화 정상화된다. 여성의 성역할과 인권은 양립할 수 없다. - P35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의 역사와 같다, 여성 폭력은 수천년간 시대와 지역 계급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행해져왔다 그러나 여성이 당하는 폭력이 사회적잉ㄴ 문제로 제기되고 법의 규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서구의 경우에도 불과 30여 년밖에 도지 안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폭력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일로 자연스런 일상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성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 성기 중심성으로 성폭력 개념 역시 남성 성기 중심적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폭력 개념은 강간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문제화 할 때 는 성폭력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동반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강간이냐 화간이냐‘의 논란은 이 문제의 가장 흔한 예이다. 여성의 경험 현행법 규정 여성주의 이론 대중의 통념에서의ㅣ 성폭력 개념이 모두 다르다.- P28

그러므로 인삭자의 사회적 위치와 이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정의되는 성폭력 개념중에 누구의 경험이 객관적인 성폭력 개념으로 선택되는가와 이러한 선택의 원리에 개입된 권력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 - P28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이건은 대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다 질문이 제기되는 방식이 ‘정말 성폭력이 없었을까˝가 아니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성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피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끄까지 피해사실을 말해도 결코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 한 피해자와 지원자들이 ˝왜 가해자 본인이게 확인하지 않고 사건을 공개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다수의 가해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확인˝애햐 성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가해자가 인정하는 것만 피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가해자외 피해자의 진술이 상반될 때 피해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피해자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P70

성폭력 피해를 사건화해서 사회 문제화하는 것과 구체적인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개인적인 치유는 서로 다른 차원과 방식의 운동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기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제현 체계 자치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담론 체계안에서 수용되는 방식으로 문제화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흔히 사건 발생시점 또는 사건을 문제화한 시점에 정박해 있다고 여겨지고 다루어 지지만 사실 그 여파는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삶 속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 P77

아내 폭력은 숨겨진 범죄라 불릴 만크 폭력 피해가 은폐되기 때문에 폭력 피해자들은 조사와 재판 고자ㅓㅇ에서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가해자의 폭력 행위를 낱낯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들의 방어는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사게 되고 방어 행위가 아닌 공격 행위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폭력 피해자들이 아프다고 소리쳐야만 사회는 관심을 갖지만 막상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소리질러야 하는 데 이웃이 알도록 소리질렀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저항이 범죄화된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동정을 호소한느 불쌍하고 의존적인 존재일때만 자신에게 가해진 불법 부당함에 대해 저항하기 보다 스스로 부서져갈 때 가부장제 사회는 비로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은혜를 내려준다. - P116

정담 방위가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정상 참작과 선처를 호소하는 것은 동정을 받는 것이다, 끝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사법부의 판결은 애초부터 정당방위할 인권을 가진 적 없는 아내폭력 피해자들의 현신을 증명한다. - P117

모든 언어는 정치적, 무의식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맥락이며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언어는 그 언어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사회적 맥락의 정치적 효과다. 이들 비디오의 내용은 ‘성행위‘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은 폭력이다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명명은 명명의주체와 명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행위이다.- P124

대개 형사사건에서는 가해자 또는 범죄자의 이름이 사건 이름이 된다. 이에 반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이름이 그 사건의 이름이 되어왔던 것은 우리 사회가 ‘누가 왜 성폭력을 행사했는가‘보다 ‘누가 왜 성폭력을 당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성폭력 피해를 가시화하고자 하는 여성운동의 노력 역시 이중적 성규범과 성폭력 가해를 정상적 비범죄화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자융로울 수 없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이 되고 남성의 경험 인식이 세계를 정의하는 사회에서 남성 관점에서 이루어진 명명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 P125

‘폭력을 행할 수 있따‘는 것은 권력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 후 피해자는 가해자가 행사한 폭력의 의미를 묻고 고통 받는다. ‘그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를 피해자가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한 일에 대한 해석의 권력이 남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왜‘라는 동기 이유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력 그자체가 문제이다. 가해남성이 ‘왜‘를 문제삼은 것은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지만 피해자가 ‘왜‘를 묻는 것은 그런 일이‘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설명하여 이유없는 폭력을 이해햐려는 노력이다.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원하는 효과를 낳는다. 폭력 가해자에게 흔히 붙여지는 또라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나 가해/피해 심리를 설명하는 무수한 연구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기여해 왔다,- P156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개념과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법의 영역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모두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의해 구성된다.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여성의 주장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남성의 주장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5000년이 넘는 성별 권력 관계의 이러한 역사성을 무시한 채 피해ㅕ성의 인권과 가해남성의 권력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남성의 특권을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한느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삭제되는지를 보여준다. 뿌난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해 남성과 가부장제 사회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라기 보다는 남성 생물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성폭력 의 불가피성이라는데 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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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1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 유명한 [건축학개론]을 보지 않았던 저는 푸른희망 님의 이 글을 통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게 되었네요. 와... 세상 쓰레기같은 남자가 나오는군요. 그런 남자가 비단 영화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지만요.

저도 밑줄을 아주 잔뜩 그어가며 읽었던 책인데 제가 읽은 게 구판이라, 개정판으로 새로 사서 다시 한 번 읽어야겠어요. 또 밑줄을 잔뜩 긋게 되겠죠.

잘 읽었습니다, 푸른희망 님.

푸른희망 2019-04-12 17:4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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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